‘포곡’이란 지명의 유래는 이 지역을 지나는 경안천 주변에 무수히 많은 창포가 자생하고 있어, "창포의 고장"이라 불리워지기 시작한데서 비롯된다.포곡은 옛날에는 포곡향이라 불리워오다 향을 면으로 고치게 되면서 포곡면이 되었고 2005년 10월 31일 읍으로 승격하였다. 원래는 18개 동리를 관할하여 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이 폐합되면서 현재는 삼계리, 금어리, 둔전리, 영문리, 마성리, 전대리, 유운리, 신원리, 가실리등의 9개리로 개편되었다.
모현면 지명유래
모현면(慕賢面)은 용인시 2읍7면10동 중의 하나로 본래는 쇄포면(灑布面)이라 하였다. 이는 삼으로 직조한 베와목화에서 뽑아낸 실로 직조한 무명 천을 잿물에 삶아내고 물에 담궜다가 햇볕에 널어 빛이 바래도록 포쇄하던 곳이라고 한데서 연유한 것이다. 그 후 고려 충신 포은 정몽주 선생의 유해를 능원리에 안장한 후부터는 “충신을 사모한다.”는 뜻에서 모현(慕賢)으로 개칭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묘현(墓賢)이라고 한 기록이 있고, 『용인현읍지』등에는 모현촌면(慕賢村面)으로 기록되어 있다. 1914년 발행된 「군현개정구역표」에는 모현면(慕賢面)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 「용인군 지명위원회」에서 최종 확정된 것이 오늘의 「모현면(慕賢面)」이다. 1411년 쇄포면이라 불리던 것을 포은 정몽주선생의 묘소를 능원리에 모신 후 모현면으로 개칭. 1914년 8개 법정리(왕산리,갈담리,초부리,일산리,매산리,동림리,능원리,오산리)로 개편. 2005년 구청신설로 처인구에 편입.
양지면 지명유래
양지면은 광주지방의 남쪽에 위치한 지리상의 관계로 부족 국가시대 이래 항상 광주지방의 흥망성쇠와 같이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 이전에는 진.한의 영역에 들었고, 이어 위례성을 중심으로 건국한 백제의 영지가 되었다. 그러나 고구려 장수왕 63년(475년)에는 그의 남진정책에 따라 고구려의 판도에 속했다. 그후에 삼국의 싸움으로 우여곡절 끝에 통일신라의 영토가 된 것이다. 양지면은 본래 水州(현:수원)에 속한 양랑촌부곡(陽良村部曲)이었다. 공양왕11년(1362) 에는 안성으로 이속되기도 하였다. 조선 태조의 개국초에는 고서면 봉림산 아래 주곡리에읍을 옮겨 양산이라 하고 훈도관을 두었으면 정종원년(1399)에는 안성에서 독립하여 양지현이라 일컷고 비로소감무(監務)를 두었다. 태종 13년(1413)에 현감을 임명하는 한편 광주목 관할인 추계향으로 옮겼다. 그후 세종때까지 광주진의 관할 구역으로 계속되었는데 방면이 육방(六坊)에 불과하였으므로 현의 협소함을 당시현감이 상소하여 성종원년(1470)에 죽주의 4부곡을 양지현으로 이속시킴과 동시에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관하였고연산군 6년(1500)에는 읍을 폐하고 이주부(利州府)에 합속시켰다. 그후 연산군 10년(1504)에 복설(復設)하여 정수산 아래에개읍을 하고 양지라 하였으며 동시에 가까운 5개마을을 병치하여 읍내면이라 칭함으로서 방면은 11면에 이르렀다. 갑오경장 이후 건양원년(1896)에는 양지군으로 승격되어 경기도의 4등군이 되었으나 1914년4월 1일 조선총독부령에 의해 용인군과 병합하였고 읍내면,주동면,주북면,주서면 등 4개면을 합치고 읍내에서 끝자인 내자를 합쳤다하여 내사면으로 개정되었다. 1995년 광복50주년을 맞이하면서 일제 식민통치 시절 명명된 일제식 지명을 정비할 때 민족자존심 회복과 지역 전통성을 계승 발전 보존하고자, 1914년 생겨난 면 명칭인 내사면을 양지면으로 고침으로써 조선시대로부터 이어온 고유지명을 실로 81년만에 회복시켰다. 그후 1996년 3월1일을 기하여 용인군이시로 승격되었고 2005.10.31일부로 3개구청과 1읍 6면 21동으로 개편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1470년 성종원년 양지현(陽智縣)(경기도로 이속시킴) 1896년 건양원년 양지군(陽智郡으)로 승격 1914년 4월1일 내사면(內四面)(읍내면,주동면,주북면,주서면을 합침) 1995년 양지면(광복50주년 맞아 개정) 1996년 3월1일 양지면(陽智面)(용인군에서 용인시로 승격) 2005년 10월31 양지면(陽智面)(3개구청 1읍 6면 21동으로 개편)
원삼면 지명유래
오늘날 용인시의 영역은 대체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기존의 용인군, 양지군 및 죽산군의 일부지역이 합쳐져형성되었다.원삼면은 이중 본래 죽산군에 속해 있던 지역으로 가좌·창동·두촌·분촌·문촌·승죽·능촌·독촌·야광등의 9개 동리를 관할하고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죽산군 원일면의 9개 동리, 근삼면 석곡리의 일부지역, 양지군 목악면의 6개 동리, 양지군 주서면의 광곡리를 합치고, 지역 명칭은 그대로 원삼면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이후원삼면은 고당리·사암리· 좌항리·맹리·미평리·가재월리·두창리·독성리·죽능리·목신리·학일리·문촌리의 12개리를 관할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백암면 지명유래
백암면은 본래 죽산군 근삼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백암 등 14개동리를 관할하고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죽산군의 근일면,근삼면,양지군의 박곡면, 고안면 등 용인군 바깥쪽의 4개면을 합쳤다는 의미에서 외사면이라 칭하게 되었다. 이때 외사면은 가창리, 백암리, 근창리, 근곡리, 근삼리, 용천리, 장평리, 석천리, 옥산리, 백봉리, 고안리 등 12개동리를 관할하게 되었고 면소재지를 백암리에 두게 되었다. 외사면에서 백암면으로 명칭 변경한 것은 96.3.1부터이다.
이동면 지명유래
조선 태종 13년(1413) 용인현내 2개 방면(상동촌면, 하동촌면)으로 편제 1895년 4월 지방관제 개편시 2개 방면을 합쳐 이동면이 됨. 1914년 4월 행정구역 개편시 9개 법정리로 현재까지 존속.
남사면 지명유래
원래 면의 일부가 수원부(水原府)의 처인부곡이었다. 조선 태조 6년(1397)에 현으로 승격되어 방리(坊里)를 관장하다가 태종 13년(1413)에 용구현과 합쳐 용인현이 된후 관아(官衙)를 폐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 때 당시현내면의 아곡(衙谷), 남산(南山), 매릉(梅陵), 완장(完庄), 창동(倉洞), 월곡(月谷), 방축(防築) 등의 7개 동리와도촌면의 삼인(三仁), 상동(上洞), 산정(山亭), 내기(內基), 수세(水洗)의 5개 동리, 서촌면의 동막(東幕), 원포(遠浦), 통곡(通谷), 봉명(鳳鳴), 외동(外洞)의 5개 동리, 남촌면의 진목(眞木), 원암(元岩), 전궁(全宮), 아곡(牙谷)의 4개 동리 등 4개 면을 합치고, 용인군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남사(南四)'라 하였다. 1983년에는 월경부락이 평택군으로 이관되었다. 현재 봉무리(鳳舞里), 북리(北里),통삼리(通三里),봉명리(鳳鳴里),진목리(眞木里), 원암리(元岩里),전궁리(全宮里),방아리(防牙里),창리(倉里),아곡리 (衙谷里),완장리(完庄里)등 11개 리로 이루어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유림동 지명유래
유림동은 1996년 3월 1일자로 용인이 도농복합시로 승격하기 전에는 구(舊) 용인읍에 속한 10개의 리(里) 가운데 유방리와 고림리로 나뉘어 있었다. 시 승격 후 용인읍 지역에 동(洞)을 설치하게 되면서 유방동과 고림동 두개의 법정동을 통합해 행정동을 만들었고 명칭은 유방리에서 유(柳)자와 고림리에서 림(林)자를 따서 유림동으로 하였다. 본 동의 중앙지대를 영동고속도로가 지나고 있으며 동쪽으로 경안천이 북류한다. 또한 유방동에 영동고속도로 인터체인지가 있어 용인시의 관문이 된다. 1914년 3월 용인군 수여면 1939년 3월 용인군 용인면으로 개칭 1979년 5월 용인읍으로 승격 1996년 3월 용인시승격으로 유방동과 고림동 통합하여 유림동으로 개칭 1998년 12월 유림동 청사 신축
유방동 지명유래
용인시 유림동에 속한 법정동으로 본래 용인현의 수여면(水餘面)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밀유양림(密柳楊林)이 있어서 유곡(柳谷)이라 불리우던 마을과 방축동(防築洞)을 합쳐서 유방리라 하였다. 1936년 수여면이 용인면으로 개칭된 이래 용인면(읍)에 속해 있었으나 1996년 3월 1일 용인군이 시로 승격될 때 유림동의일부가 되었다. 영동고속도로 인터체인지가 있으며 1970년대 조성된 새마을 취락 시범단지가 있었으나 지금은 밀집 주거지로 바뀌었다.
고림동 지명유래
용 인시 유림동에 속한 법정동으로 본래 용인현의 수여면(水餘面)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고진(古陳)과 임원(林院)의 두문자를 취하여 고림리라 하였다. 1936년 수여면이 용인면으로 개칭된 이래 용인면(읍)에 속해 있었으나 1996년 3월 1일 용인군이 시로 승격될 때 유림동의 일부가 되었다. 1970년대 공업지역이 되었고, 비교적 평탄하고 넓은 들녘이 위치하였으나 지금은 주택, 아파트 등 주거지역이 혼재하며 마을 북쪽으로 영동고속도로가 동서로 지나고 있다.
역삼동 지명유래
본 래 용인읍의 역북리, 삼가리 지역으로 1996년3월1일 용인시 승격과 동시 동이 되었는데 역북리와 삼가리를 합쳤다하여 역삼동 이라 하였다. 역삼동 서남쪽 부아산에서 금학천이 발원한다. 부아산 북동 하단에 용인대학이 있고, 역북동에는 번암 채제공묘와 정조대왕이 친제했다 는 뇌문비가 있으며 용인세브란스병원과 용인고등학교, 서룡초등학교, 역북 초등학교, 삼가초등학교가 있다. 위치적으로 동은 김량장동과 인접하고 북은 유림동 서는 구성, 남은 이동면 서리에 접한다.
역북동 지명유래
역삼동 일부의 행정동 명칭. 본래 용인현 수여면 지역이였 는데 1914년 4월1일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금령역의 역동(驛洞)과 북동(北洞)을 합쳐서「역북리」라하여 용인면(읍)의 일부가 되었으나 1996년3월1일 용 인군이 시로 승격될 때 역삼동으로 편입되었음. 자연마을로 관곡, 구성, 낙 은, 신대, 신성, 중간동 등의 소지명이 있다.
삼가동 지명유래
역삼동 지역의 일부. 본래는 용인읍 지역으로 1996년3월1일 용인군이 시로 승격되면서 역북리와 삼가리를 합쳐 “ 역삼동”이라 하였다. 삼가동 서쪽에서 구성 초당곡으로 넘어가는 길 즉, 용인정신병원쪽으로 넘어가는 작은 메주고개로 가는 세갈래 길이 있어서 세거리, 삼가리, 삼거동으로 불리웠으며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수여면의 서동(西洞)을 합쳐서 삼가리라 하고 용인면의 일부가 되게 하였다. 삼거동, 새터말, 궁촌, 메주고개, 상직동, 주막거리 등 소지명이 있다.
동부동 지명유래
본래 양지군 주서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마남리·마북리·신평리·김량리와 용인군 수여면 하리 일부가 합쳐져서 생겨났고 마남·마북의 마자와 신평의 평자를 취해 마평리라 하였고, 용인면에 편입되었다. 용인시로 바뀌면서 마평동으로 명칭되었다. 신점은 새술막이라고 부른다. 본래 양지군과 용인군을 나누는 경계를 이루고 있었고,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대로상에 자리하고 있어 새로이 주막이 생겨 새술막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자로 옮겨 신점이라 한다. 석담은 돌무데기라고 하는데 석담은 돌담이므로 돌이 된 담이란 뜻이 된다. 석담의 유래는 이곳에 돌로 쌓은 적석총이 남아 있었던데서 비롯된 명칭인데 원형은 많이 손상되었으나 아직도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지명은 전국적으로 흔하게 볼 수 있다
중앙동 지명유래
고려시대에 김령역이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김령역·김령원이 있었다. 시장이 섰으므로 김령장이라고도 불렀는데, 뒤에 변음되어 '김량장'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김량장리가 되어 용인군의 군청소재지가 되었고 1996년에 용인시로 승격되면서 김량장리 또한 김량장동으로 승격되었다. 2005년 용인시 3개구청 신설에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으로 변경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김량이라는 사람이 맨 처음 시장을 벌여, 그의 이름을 따서 김량장이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조선 영조 때의 『읍지』를 보면, 김량장이라는 장시의 명칭이 보이고 있어, 김량장의유래가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김량장동의 남부에 위치한 남동을 포함하여 2개의 법정동을 관할하고 있다. 1895.4 수여면 1914.4 용인면으로 개칭 1979. 5.1 용인읍으로 승격 1996. 3.1 용인시 승격으로 중앙동으로 분동 2005.10.31 용인시처인구 승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