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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 군산지역 근대 건축 답사
○ 숨결이 느껴지는 자연 풍경
6월초, 평화로운 시선이 펼쳐 가는 푸르른 들녘, 모내기한 벼가 발을 담그고 한창 뿌리를 내리려 애쓰는 때다. 논물에 투영되어 어우러진 논바닥의 흙빛과 여린 모의 연두색 빛깔이 청초하고 아름답다. 푸른 하늘은 아니지만 뿌연 안개 사이로 흐릿하게 비추이는 햇살, 기온도 누그러지고 그림자는 엷게 그려졌다. 농부가 모를 심는 풍경이, 흙에 고향을 둔 일행의 마음에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옛날 시골은 가난의 상징이었다. 부끄럽기도 했던 땅, 감추고 싶었던 고향, 그러나 재화보다 자신들의 심령이 더 가난함을 고백하게 된 이 시대에는 누구나 옛 시절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치 집안에 걸어 두고 싶은 정감 있는 그림처럼, 마음에 틀을 두어 저 풍경을 한 폭씩 담아 갈 듯 했다. 수증기 같은 구름을 관통한 햇살에 비추는, 모판에 끼인 물이끼의 연두빛깔이 반짝인다. 또 밭에서는 너르고 싱싱한 담뱃잎이 기운차게 자라고, 태양이 고도를 높여 갈수록 안개는 걷혀, 햇살이 만드는 그림자도 뚜렷해진다. 넓은 감자밭 대공이 필 무렵, 땅속에서는 감자 씨알이 사춘기 소년의 불알 마냥 굵어 갈 것이다. 그 들녘을 바라보는 농부의 대견함, 허나 모낸 논은 이제 시작이다. 염생이 풀의 하얀 꽃이 찔레꽃과 엉켜 논둑을 장식하고 있다. 아직 빈 느낌이 드는 저 대지도, 몇 달 후면 흘려 보낸 시간의 보상으로 황금빛을 출렁이며, 무성한 수확을 가져올 것이다.
우리 국토의 서남쪽은 굽이굽이 흩어진, 야산과 함께 이어지는 평야 지대이다. 그 야트막한 산들은 농사일에 지친 농부들에게 상쾌한 휴식처가 되어 기운을 차리게 한다. 곡식이 자라나는 이 땅은 인간에게 언제든지 삶의 기운을 새롭게 북돋울 수 있는 곳이다. 더욱이 도회 인의 소회로는 언제나 새 삶을 동경하게 하는 곳이다.
답사는 무엇을 얼마나 알게 할까? 특별히 마음먹고 나서야 만나게 되는 과거의 문화유산들, 자칫 옛것에 대한 애정이 앞설 수도 있다. 하지만 꼭 특별한 가치를 찾으려 하기보다, 단지 인간 삶의 흔적으로 지나칠듯 느껴야 바르게 와 닿을 수 있다. 이번 행사의 목적은 물론 건축 답사지만, 일행들의 다른 속내에는, 자연과 산사의 분위기에 힘입어 정서적 건조함을 씻고자 함도 있을 법하다.
○ 필경사
필경사는 당진에 소재 한다. 흙에 뿌리내리는 삶이 상상되던 소설속 장면과 같은 곳, 그러나 지금은 서해안 시대를 대비하여 대단한 개발 열기에 휩싸여 있다. 이 곳으로 진입하는 교차로 부근은, 서해고속도로상에 동양최대길이로 건설되는 서해대교가 연말 완공을 목표로 그 엄청난 역사를 계속하고 있다.
이 건물은 심훈이 글을 쓰기 위해 집필실로 지은 것이다. 집터 앞에는 경작하는 논이 바로 마주해 있어서, 글을 일군다는 의미의 집이름이 더 느낌에 와 닿는다. 여기서 쓰여진 심훈의 소설 상록수는 농촌을 주제로 한 계몽 소설이다. 제목의 상록수는 흙 위에 뿌리를 튼튼히 내리고 살아가는 삶을 상징한다. 심훈은 그 푸르고 건강한 이미지를 빗대어, 농촌 젊은이들에게 의미 있는 삶을 일구어 가도록 고취하고자 했다. 집터 한켠에 작가의 소설을 상징하듯, 침엽수 한 그루가 연륜을 더하며 사철 푸르게 자라고 있다.
이 집은 글쓰기에 적합한 구조로 지어졌다. 집필실로 쓰인 대청을 가운데 두고, 잠자는 방과 부엌, 창고 등을 연결해 두었고, 때때로 찾아오는 손님을 위한 손님방도 두었다. 전체적으로는 한옥에 현대적 요소가 가미된 평면 형식을 하고 있다. 대청마루는 벽이 마루 바닥까지 트이지 않아 닫힌 느낌이며, 창이 벽의 중간에 나 있다. 대청 출입도 마당에서 바로 할 수 없으며 현관을 통해 들어가야 있다. 형태는 가구법이 간결한 한옥 구조로서 초가 지붕으로 되어 있고, 부재에 의한 면분할이 외관 형성에 크게 작용하고 있다. 방 창 앞으로는 난간을 두른 화단을 만들었는데, 그로서 집주인이 근대적 사고로 교육받은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다.
독락당이나 윤증고택처럼 역사적으로 남은 전통 건축들이 주인의 안목에 의해 품격 높은 건축으로 되어졌다. 하지만 근대의 소설가의 집은 어쩐지 설익은 건물 일거라는 선입관으로 대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가 요새 건축업자가 지은 집들보다 백배 났다. 작가의 생가를 관광 상품화하여, 상술이 꼬이게 하는 것이 못마땅하다가도, 이러한 생가는 한 작가의 얼과 만날 수 있어 귀히 여겨진다. 상록초등학교, 상록마을, 동네의 모든 명칭이 심훈의 자취와 관계를 맺고 지어졌다.
이 유산은 마을 사람들의 가슴에 자긍심을 심어 놓았다. 그것이 도가 지나쳐서, 필경사 앞에는 의리의리한 기념관이 있다. 다른 경우지만 마을에는 커다란 현대식 교회가 지어졌다. 소박함을 잃는 것은 자칫 진실로부터도 멀어질 염려가 있다. 집 뒤켠에 난 길로 돌아 나오며 필경사가 멀어져 가는 동안, 익어 가는 보리밭 위로 한 마리 백조가 날고 있다.
○ 해미읍성
향수를 자극하는 들녘 풍경도 해미읍성이 가까이 있는 서산을 지날 때쯤이면 어지간히 보아 온 터다. 해미읍성은 조선시대 호서좌영에 속하던 곳이다. 읍성은 외부와 차단된 성을 쌓고, 그 안에서 안전한 삶이 영위되도록 한 방호 구역이다. 자연 지세에 순응하여 유기적으로 형성된 전통 마을과 달리 이 곳은 당시의 계획된 도시이다.
가옥의 멋을 발산하는 양반 가옥은 예의 규범을 적용하여 도상학적으로 펼쳐 놓았을 뿐, 애초에 아름다운 비례를 위해 지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채와 채사이, 담장과 건물사이, 건물과 자연 사이에서 허와 실, 매스와 그림자의 균형을 이루며 멋이 지녀지게 된 것일 것이다.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의 읍성가운데 가장 좋은 감각이 느껴진다. 그 투박한 성벽은, 부분으로 보면 질박한 물성의 벽일 뿐이지만, 전체 윤곽선은 참 간결하고 맵시 있다. 이 성을 쌓을 때도 마찬가지로 멋의 비례를 먼져 염두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방호를 위한 것이지만, 성벽은 노고가 쌓인 인간의 손길에 의해 ,공예품과 같은 맵시와, 누적된 땀에 의한 숭고함을 띠게 되었을 것이다.
이 곳은 성벽의 물성도 좋지만, 내부에서 느껴지는 공간감은 더 좋게 느껴진다. 엄격한 경계내 빈 공간의 푸른 잔디밭에서 평온함이 느껴진다. 또 북쪽 동헌 뒤에 있는 앝으막한 야산의 둔덕에 의한 지형 변화는, 가지런히 닦여진 평지성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나는 지난해 어느 연재지에 종묘를ꡐ공즉시색 색즉시공ꡑ이라는 말로 설명했었다. 종묘 정전은 한국에서 가장 단순하고 긴 건물로서 힘이 매우 세게 느껴진다. 그런데 그 곳에서 건물에 의해 느껴지는 힘은 3할 정도이고 나머지는 월대의 힘으로 보였다. 그리고 월대에서 뻗쳐나는 그 커다란 힘에 의해, 그 굳건한 정전마져 가볍게 느껴졌다. 공허부의 힘이 오히려 실체인 정전의 힘을 압도한다. 즉 ꡐ공즉시색이며 색즉시공ꡑ이다. 그런데 그 월대의 힘이 인식될 수 있는 것은 담장에 의해 한정된 영역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울타리가 없다면 그 비움의 힘을 인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도 그와 유사한 느낌이 나타난다. 하지만 그 성벽의 둘레가 더 커서 그 안의 넓이가 무한히 확산되었다면 공간의 힘으로 인식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 그 안이 당시처럼 읍내로 되어 있으면 또한 공간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 안은 비워 있고, 둘레가 1.8Km인 성벽은 아직도 공간의 감각을 충실히 느낄만한 넓이이다.
돌을 쌓아 굳게 둘러쳐진 성은, 울 너머에 딴 세계를 그리는 호기심을 일게 한다. 그리고 여기의 그 비워진 공간은, 역사적 상념을 가두어 두고 있다. 민초들의 사소한 이해 다툼에 활기도 띠었을 성내 거리는 지금은 유적으로만 남아 있다. 그리고 성벽은 유물함 역할을 하고 있다. 성안은 마치 시간을 새겨 둔 곳처럼 느껴지는데, 한때 이순신 장군이 근무한 적이 있다는 것이 역사적 중요성을 크게 한다. 이곳에 근무할 당시 그는 낮은 직책에 있었고, 어떤 인간적인 면도 형성되었을 것이다. 한 때 젊의 이의 패기로 그 안이 좁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후로 닥쳐올 국가의 환난을 감당할 만큼 성장하게 된 것이 다행스럽다.
적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해미읍성은, 그러나 또다른 슬픈 역사 때문에 평화로움만이 아닌 숙연한 숭념의 장이 되었다. 해미읍성은 천주교의 최대 순교지로서, 이 곳에서 자행된 형벌은 다른 곳에서 벌어진 박해보다 더 잔악하였다. 특히 지금도 남아 있는 문루 앞의 자리개질치던 돌을 보면 칼에 에이듯 마음이 아파 온다. 지금 이곳의 내부는 관아 건물인 동헌부분만이 남고, 민초들의 삶의 터는 모두 비워진 채 푸르고 너른 마당이 되어 있다. 그리고 순교의 흔적이 남아 있는 노고목(호야나무)이 홀로 쓸쓸히 서서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 군산으로 가는 길
해미읍성을 보았으니 오늘 일정은 이것으로 끝이다. 이제 내일 답사의 대비를 위해 군산으로 가서 오늘밤을 묵는 일만 남았다. 서산을 나와 홍성군 갈산면을 지났다. 시골 아주머니들이 길가에 드믄드믄 소박한 먹거리 장을 펴고, 사람들이 수레를 피하듯 차를 피해 찻길을 건너는 시골 읍내이다. 그 작은 읍내를 금새 빠져나와, 다시 들길을 달린다. 보령들녘, 인간이 땅과 함께 살아온 체취가 여전한 곳, 그래서 아직은 도시의 빼곡함을 닮지 않은 구수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곳이다. 지금 우리 일행은, 여행의 맛이 가장 좋게 느껴지는 지방 국도를 따라 보령 응천을 지나고 있다. 시간은 흐르지만 거리는 쉬 줄지 않는 굽은 길을 지나기 때문에, 그 정취들을 더 잘 감상할 수 있다. 길의 좌측으로는 저채도 군청색을 띤 산줄기가 저만큼 떨어진 곳에 병풍처럼 둘러쳐 이어지고, 그 앞들에서는 모가 자라고 있다. 길을 가다 소박한 마을이 다시 나타났다. 흰머리가 섞인 아주머니가 손녀와 앵두를 따려 손을 내 뻗으며, 설레었을 나이를 회상하고 있을 것 같다. 일곱시 반경, 보령댐 휴게소를 잠시 쉬고 나서 마서면을 지나는 곳에, 국도와 평행하게 난 서해안 고속도로가, 평원 위에 선을 그리며 건설되고 있다. 여덟 시경 간척댐인 금강하구댐 위에 잠시 서서 갯벌과 서해 바다를 보았다. 그 댐위를 달려 서천에서 웅포로 향하고 있다. 좌측은 강경 우측 서해, 장항 제련소가 시선에 닿는다. 이 속력으로 이십분 후면 군산이다.
○ 군산
군산은 1935년에서 1945사이 일제의 진출에 의해 신흥도시로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외세의 침략에 굴복한 민족의 아픈 역사가 뼈저리게 스며 있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는 외세에 의해 신흥도시로 변모되어 가는 군산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질박한 삶이 잘 그려지고 있다. 군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김제평야를 인근에 두고 있고, 일제는 그 곡창에서 거두어진 쌀을 제 나라로 실어 내기 위해서 항구를 만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수탈의 목적을 빨리 이루기 위해 기반시설에 투자했으며, 상업활동을 하며 거주할 주택이나 빌딩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항구도시는 외세에 의해, 전통적으로 내려온 조선과 다른 문화를 이 땅에 심는 교두보가 되었다. 주거지는 평지 위에 격자 형태의 계획 도시로 조성되었고, 항구에는 간만의 차에도 구애됨 없이 배가 드나들 수 있게 3개의 부교가 건설되어, 순박한 백성들의 신문화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일본식 나가야 집이라 불리는 건물들이 영화동, 신창동, 월명동(백화양조), 유곽시장(서쪽) 쪽에 많이 들어섰었다. 그 중에는 항구에 오는 사람들을 접대하기 위한 건물도 많았다. 그 후로는 미군이 주둔하면서 양공주 거리가 생겼고, 지금도 고지에는 남아 있다.
그러나 군산은 북으로 장항에 막혀 있고 동으로는 익산이 가로막고 있어서 뻗어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해방후 8만 정도이던 인구가 현재 18만 명으로 늘어났다. 숫자의 변화로는 크지만, 짧지 않은 세월로 보면 답보 상태인 셈이다. 그때까지 도시의 모습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10년전까지만 해도 당시의 일본식 집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 신도시가 건설되면서 면모가 크게 바뀌고 있다. 일본식 이층집들은 10년전 신시가지를 조성하면서 대부분 없어졌다.
근대 이전까지 건축은 시대상을 나타내는 가장 보편적인 유산이었다. 그렇지만 양식을 부정한 근대 건축이 대두되면서 그 의의도 미미해졌다. 근대에 와서 모든 분야의 예술은 독창성을 중시하였고 근대 건축가들 역시 추상 화가의 그림처럼, 독창성과 작품성을 갖는 건축만을 의미 있게 대했다. 근대 건축가들은 양식 안에서 건축의 작품성이 찾아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건축에 담긴 역사적 의의에도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적지 않은 세월이 흐른 뒤에야 우리는 작품성만이 아닌, 건축이 지니게 되는 역사적인 힘을 부정할 수 없음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것은 군산에서 만난, 외세가 낳은 근대 건축물들을 보면서 어쩔 수 없는 상념으로 다가왔다.
나는 1991년 군산 해상 신도시 현상설계에 참여한 일이 있다. 강하구에 여의도의 반정도로 쌓인 모래탑, 그 언저리를 석축으로 쌓아 섬이 되었는데, 그 곳을 신도시로 건설하는 계획이었다. 중국 붐을 의식해 서해안 시대니, 황해시대니 하는 거창한 슬로건을 내걸며 시작되었다. 국제화를 겨냥하여 컨벤션센타, 호텔, 금융과 유통 상업 시설 그리고 배후 주거지도 계획하였다. 그러나 당선안은 페이퍼로만 남은 채 단 한 번의 삽질도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해망동 부두로 나가니 바닷바람이 비릿내를 풍겨 냈다. 부두는 현재에도 10년전 자료 조사를 하던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때보다 넓은 시장은 채워지지 않았고, 마치 관광객을 위한 유적처럼, 활력 없이 드믄드믄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 이영춘 가옥
이 집은 재생병원을 설립, 운영한 구마모토가 지은 대 저택으로서, 그는 일제 패망후 이영춘 박사에게 집을 물려주고 떠났다. 지금은 82세의 부인만 살고 있는데, 박사가 두 번 상처한 후 1950년 세 번째로 결혼하신 분이다. 여사께서는 뜻밖에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리고 스스로 그 집과 관련된 예기들을 쉬임없이 들려 주셨다. 여사의 고향은 함경남도 청진이며, 자유당 시절에는 이 집에서 많은 손님을 접대하셨다 한다. 또 여사의 말에 의하면 이영춘 박사는 1935년 서울 세브란스를 졸업하고 국내 최초의 의학박사가 되었다. 세브란스의 와타나베 교수가 이 박사에게 이곳으로 가도록 권유했다고 한다. 말씀을 하면서 점점 더 활력을 띠는 모습이, 이따금 예기치 않은 손님이 찾아오는 것을 그저 낙으로 생각하는 듯 했다.
이 집 모습에서 일행들은 금새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건축을 연상했다. 그만큼 라이트 건축적 요소가 많이 읽혀진다. 그의 초원주택 이미지를 닮은 외관에, 의장적 요소로 자연석을 쌓아 만든 굴뚝, 그리고 요철된 평면에 의해 생긴 직교되어 나타난 모임지붕등이 그렇다. 그리고 외부 마감은 반으로 켠 소나무를 사용했다.
평면은 각 방들이 기능에 충실하게 잘 짜여져 있는데, 크고 독립된 거실에는 중앙에 벽난로가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독립된 부엌과 식당 수세실 등, 그 시대에 가능한 완벽한 설비를 갖추려 했다. 마루 천정등에서 공예적인 섬세한 디테일로 꾸며졌으며, 미닫이 창살은 전형적인 일본 건축의 모습을 보여준다.
○ 조선은행
이 건물은 소설 「탁류」에서 자본가에 의해 착취당하는, 소작인의 한이 사무치는 무대로 등장한다. 당시 사람들에게 서양식의 큰 규모로 지은 이 은행 건물이, 부의 상징처럼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급한 경사 지붕에 설치된 천창이 특별히 눈에 띄는데,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을 듯 하다. 평면은 여전한 고전 형식으로 되어 있다.
지금은 정비된 시가지중 철거하지 않은 영화세트같은 이미지로, 옛 시절의 그 느낌을 전하고 있다. 일행 대다수가 이 건물이 채만식 기념관으로 되어졌으면 하는 바램을 나타냈다. 바로 우측 터에는 공원을 꾸며 놓았는데, 가로등의 장식만 요란할 뿐, 좀체 맵시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 곳에 소설에 등장하는, 수탈의 한에 몸서리치는 가난한 삶의 한 장면이나마 재현해 놓았으면 하는 생각이 스쳐 갔다.
○ 군산세관 구청사
나라가 스스로의 힘으로 지탱되지 못하고 남의 손에 좌지우지되던 때에, 이 땅에는 각양각색의 외래 건축이, 마치 서양 여인이 맵시를 뽐내며 들어오듯 들어섰다. 이 건물도 그런 흐름 속에 지어진 19세기말의 화란 양식이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 흐름에 영향받은 유럽의 신흥 산업 국가들이 고전 양식을 실용화해 만든 것이 이른바 신고전주의이다. 고전과 근대의 과도기 양상을 보여주는 그러한 건물은, 고전 양식에 현실적인 기능을 수용하려 한 것이다. 사회가 기능을 중시하게 됨으로서, 양식은 간략화 하는 대신 형식적 이미지를 유지하고자 장식적 모티브를 그대로 쓰고 있다. 평면 형태도 고전 양식의 틀이 유지되는데, 이 건물도 마찬가지이다. 사무 공간인 은행 업무실은 중앙에 위치하며 현관 홀 전실을 거쳐 출입하게 되어 있다. 천장은 반자가 없으며 구체에 흰색프라스터로 마감했다. 그리고 지붕은 콘크리트 경사 스라브에 동판 기와가락 잇기로 되어 있다.
이 건물은 지금 수위실로 쓰이고 있는데, 그 모습이 지은지 얼마 되지 않은 신관과 대조되어 보인다. 신관은 화강석 붙이기로 되어 있는데, 풍우에 견딜 업무공간을 제공하는 것 말고는, 건축적으로 특별히 느껴지는 것이 없다. 이 시대 대다수 건축이 이루어지는 단면을 보는 것 같다. 모더니즘의 모토에 밀려나, 고전의 화장술로 겨우 건축의 자존심을 부지하려 했던 옛 건물이, 지금은 그처럼 범람하듯 지어진 인근의 현대 건축들을 보면서, 우쭐대고 있지나 않을까 하고 생각되었다.
○ 김혁종가옥
이 건물은 꺽인 평면이 인상적이다. 안채와 별채를 연결해 놓은 듯한 평면 형태의 건물이. 정원을 끼고 난 측복도로 길게 연결되어 있다. 그 복도의 살창으로 빛이 들어오고 시선은 뜰과 만난다. 정원은 오랜 세월 자라난 수목으로 빽빽하다. 군산에 몇 남지 않은 완성된 일본식 주택으로서, 국내에서 그것을 접하고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은 편리한 일이다. 일본 건축이 근대 건축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얘기된 바 있다. 이 건물에서도 느껴지듯이, 직선적이고 간결한 처리에서 근대 건축사상과 유사한 맥락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나라의 현대 건축이 유럽의 영향을 받은 것만이 아닌, 자신들의 전통을 이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안도타다오의 건축에서 그러한 접합점을 느낄 수 있다.
일본 전통 가옥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창살이다. 또 우리 전통 건축이나 일본 전통 건축이 다같이, 창살 위에 창호지를 붙이는데, 일본 건축은 창살의 간격이 넓어 추상회화의 화면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우리가 창의 방쪽에 창호지를 붙이는데 비해 그들은, 바깥에 붙이는 특징이 있다. 또 이 집처럼 외벽에 나무 판재를 빗 붙인, 비늘판벽으로 마감한 경우가 많다. 집을 구석구석 돌아보면서, 그 당시 꼼꼼한 솜씨로 정성 들여 지은 건물임을 느낄 수 있었다.
○ 동국사
동국사는 군산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일본식 사찰이다. 구조나 상세에 이르기까지, 일본 건축양식을 잘 갖추고 있어서, 한국과 일본 건축을 비교 연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는 건물이다.
정면과 측면이 각각 5칸으로서 불전의 규모가 꽤 큰 편이다. 건물 내부로 들어가면 신발을 벗는 곳이 대웅전 마루 바닥보다 낮게 분리되어 있다. 내부 공간이 넓어 불자들이 앉을 수 있는 자리도 비교적 넉넉하였으며, 가운데 꾸민 불단도 공간을 두고 대할 수 있다. 스님이 불자들보다 앞에 나와 앉아 불상을 보고 염불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내부 천정은 높낮이가 부분적으로 다르게 우물천정을 반듯하게 짜 놓았고, 외부로 드러난 서까래도 네모로 반듯하게 다듬어 사용했다. 공포는 쇠서등 장식적인 조각이 없고 단순하게 가공되어 있다. 일본 문화의 간결한 이미지 그 저변에는, 선불교적인 면이 바탕에 흐르고 있다고 느껴진다. 선사상의 고요함을, 그들은 간결하게 다듬어 이루어 낸 것으로 생각된다.
이 사찰이 갖고 있는 우리나라 사찰과의 두드러진 차이점은, 평면상에 불전과 요사체가 한 건물로 연결되어 있는 점이다. 불사 건축에서 가장 위엄을 두고자 하는 불전과, 요사체가 하나로 된 것은 중생과 부처간의 거리를 좁힌 것으로 해석된다. 별채로 떨어진 종루에는 일본식 범종이 걸려 있는데, 크기가 한국종보다 매우 작다. 종루 바닥에는 울림통으로 항아리를 묻어 사용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2000.6.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