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산 김창숙 생가 & 창천서당 - 대가면 칠봉리
#김창숙(1879~1962)
본관 의성(義城). 호 심산(心山). 경북 성주 생.
심산은 조선 말기의 마지막 영남 선비. 심산은 동강 김우옹(남명 조식의 제자)의 후손.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심산은 서울로 올라가 을사오적을 성토하는 상소 올리고.
이 사건으로 체포. 8개월 옥고. 1909년 부친 김호림이 중창한 청천서당에 성명학교(星明學校) 창립.
사재 털어 애들 가르친다. 왜놈들 구박에 곧 문 닫고. 1919년 3·1운동.
심산은 전국 유림에서 가장 존경받는 종장격인 곽종석을 찾아 경상도 거창으로 급히 내려갔다.
병석에 누워 있던 곽종석은 김창숙을 반갑게 맞이했다. 파리장서에 대한 김창숙의 설명을 들은 곽종석 왈.
“늙은 망국의 대부로서 늘 죽을 자리를 못 얻어 한스럽게 여겼는데, 방금 전국 유림을 이끌고 천하만국에 대의를 소리치게 되었으니 이제 죽을 자리를 얻게 되었도다.”
전국 유림대표들이 서명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진정서(儒林團陳情書) 휴대하고 상하이로 건너가 파리의 김규식에게 우송.
이 ‘파리장서'에 서명한 유림 137명 가운데 13명이 성주 유림. 파리장서의 본문은 2,674자에 이르는 한문체로 기초 작성의 책임은 곽종석. 한문 3천부, 영문 2천부, 불어 1천부를 번역 인쇄해 세계평화회의에 제출.
“나라 없이 사는 것보다 나라있는 죽음만 못 할 것이며, 한 곳에 속박되는 것 보다 어찌 공공연히 듣고 함께 볼 수 있는 땅에 헌신함만 못하리오.”
그 해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이듬해 일제는 곽종석 등 137명 전원 체포.
곽종석·유필영·하용제·김복한 등은 옥사. 그 밖의 유림들은 악형에 의해 목숨을 잃거나 징역형을 받았다. 심산은 출옥 후 다시 중국으로 가서 1921년 신채호와 독립운동지인 《천고(天鼓)》의 발행에 이어, 박은식과 《사민일보(四民日報)》를 발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조직하고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 쑨원과 교섭, 독립운동기금 원조 받고.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
1927년 상하이 주재 일본영사관원에게 붙잡혀 본국으로 압송되어 징역 14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벽옹으로 호를 바꿨다. 앉은뱅이 노인. 일제의 고문에 의해 불구의 몸이 된 거죠.
"조국 광복을 도모한 지 십 년에
가정도 생명도 돌아보지 않았노라
뇌락(磊落·뜻이 커서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음)한 일생은 백일하에 분명한데
어찌 야단스럽게 고문하는가."
선생의 세 아들 가운데 둘은 독립운동 하다 목숨 잃고. 광복 후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원 역임. 성균관대학교 창립하여, 초대학장 취임. 곧 이승만에 의해 잘리고.
6·25전쟁 후 대통령 이승만의 하야(下野)경고문사건으로 부산형무소에 40일간 수감.
1952년 부산 정치파동이 일어나자 이시영·김성수·조병옥 등과 반독재호헌구국선언 발표. 또 구속.
이승만은 1959년 봄부터 아세아축구대회 유치를 구실로 백범 묘소 바로 앞에 효창운동장 개설 추진.
운동장을 짓는다는 명목으로 백범의 묘소를 이전하려던 것. 심산은 불도저 앞에 드러눕고 공사 중지 요구. 그러나 효창운동장은 군용불도저가 15만 그루에 달하는 숲과 연못을 파괴한 끝에 1960년 결국 건립됐죠. 심산이 병환 중인 사이에.
1962년 노환으로 죽은 뒤 사회장으로 예장.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1962년 83살로 숨질 때 그에겐 집 한 칸이 없었다.
심산 생가는 지금 며느리 손응교 여사가 홀로 집을 지키고 있다. 낭군을 독립운동에 바친 분. 금년 94세. 평생 심산을 수발하고.
2000년 성균관대학교의 심산사상연구회에서 김수환 추기경에게 심산상(心山賞)을 수여하기로 결정. 유학자인 심산선생 이름으로 주는 상을 기독교인이 받아서 되겠느냐는 논란.
우여곡절 끝에 수상자를 추기경으로 결정하고 추기경의 의사를 타진한 결과 추기경은 수상을 흔쾌히 수락. 심산상을 수상한 사람은 심산선생의 기일(忌日)에 묘소를 참배하는 것이 관례. 묘소를 참배하려면 유교식으로 절을 해야 하는데 추기경에게 그걸 강요할 수는 없고. 김수환 추기경은 거리낌 없이 절. 천주교계 뒤집어 지고. 추기경 왈,
"이 어른이 살아계셨다면 마땅히 찾아뵙고 절을 했어야 하는데 돌아가셨으니 묘소에서 절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성균관대학교의 심산사상연구회는 교수들의 자발적인 모임이어서 재정이 넉넉하지 못했다. 교수들의 회비와 기타 찬조금으로 운영하던 터이라 그 때 상금이 고작 7백만 원. 이런 사정을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추기경은 후일 사람을 시켜서 조그마한 상자를 보내왔는데 그 안에는 상금 7백만 원에 3백만 원을 더한 일천만 원의 돈이 들어 있었다.
백세각 - 초전면 고산리 542
#야계 송희규가 건립한 것으로 그는 당시 세도가인 윤원형의 행패를 탄핵하다가 오히려 전라도 고산으로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5년간 귀양살이를 한 뒤 고향에 돌아와 마을 이름을 고산리라 바꾸고 조선 명종 6년(1551)에 기공하여 그 이듬해 완공한 가옥이다. ‘口’자형 가옥으로 정면 7칸, 측면 7칸인 맞배지붕 건물이다. 쇠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구멍을 뚫어 사리로 얽은 점, 대패질을 하지 않고 자귀만으로 깍고 다듬어 만든 건축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1919년 3.1운동 당시 공산 송준필을 위시한 그 문인들이 성주 장날이 서는 날에 배포할 태극기를 이 건물에서 제작․보관했다고 한다. 또한 경북 유림단 파리장서 사건의 모의장소로 사용하였으며, 유림의 궐기를 독려하는 통고국내문을 제작․배포한 곳으로서 독립운동과 관련이 깊은 건물이다.
가나안 농장 - 금수면 명천리 1164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