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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의 왕성이었던 반월성의 야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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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유시환 |
| 며칠 전에 휴가 나온 아들 녀석과 경주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경주야 어릴 적 수학여행 시절부터 자주 다녀본 터라 굳이 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다시 한번 더 가고 싶다는 아들 녀석의 의견을 거스를 수가 없었고 만약 아들 녀석이 부모 생각해서 함께 동행하고 싶다는 여행을 내가 가지 않겠다고 하면 지금보다 더 늙으면 아예 가자고 하지도 않을까봐 어쩔 수 없이 앞날을 생각해서 따라 나서게 되었습니다.
아들 녀석은 지금 육군 사관학교 2학년 마치고 3학년 올라가는데 나이는 스물 두 살입니다. 보통 아이들처럼 그 나이쯤 되면 부모와 같이 다니는 것을 부담스러워 할 법도 한데 이 녀석은 휴가 나올 때마다 엄마 아빠 ‘거느리고’ 여행 다니는 것을 즐겁게 생각하니 정말 고맙기도 하고 배부른 투정이기도 하지만 때론 귀찮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내가 사는 예산에서 경주까지는 서울에서 부산 가는 거리만큼이나 먼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번 나서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여행을 떠나던 날은 일찍 일어나 몸단장을 하고 차 안에서 먹을 군것질 거리 좀 챙기고서는 경주를 향해 나섰습니다. 예산에서 경주를 가자면 공주를 거쳐 유성 인터체인지로 진입해 계속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야만 합니다.
아침 8시에 집을 나섰는데 유성 인터체인지 진입하는 데까지 한 시간 반, 유성에서 내리 두 시간 반 정도 고속도로를 달려야만 했습니다.
집을 나서기 전까지는 안 따라 가겠다고 한껏 튕기던 아내도 일단 집을 나서자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정경들을 바라보며 연신 콧노래를 부르며 신이 나 있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식구래야 아내와 나 그리고 아들 녀석 하나 모두 세 식구 밖에 안 되니까 원거리 이동에는 단출해서 쉽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유성에서 대구까지 가는 동안 고속도로는 시원하게 뚫려 있어서 마음 놓고 액셀러레이터를 밟다 보면 본의 아니게 속도를 가리키는 계기 바늘이 규정 범위를 종종 벗어나 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민 정신으로 규정은 지켜야 한다하는 마음에 규정을 유지하며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대구 지나서부터는 도로가 온통 공사 구간이라서 고불고불 고속도로라기보다는 예전 지방도로 같은 형편이었습니다. 100km/h 내외로 달리던 차가 70-80km/h로 달리려니 여간 답답한 게 아니었습니다.
도로 사정으로 시간이 좀 더 걸리기는 했지만 드디어 경주 인터체인지에 다다를 수가 있었습니다. 점심 때가 되어서 어디 가서 점심을 해결할까 궁리를 하다가 경주에 왔으니 경주만의 토속 음식을 먹어보자는 의견에 경주 팔우정 해장국 거리를 찾았습니다. 떠나기 전 집에서 인터넷으로 조사해 놓은 해장국집을 찾았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소박한 아주머니 한 분이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어서 오이소”, “이리 앉으시소” “식사는 ‘물’로 드릴까예?”
우리는 메뉴를 볼 것도 없이 해장국 셋을 시켰습니다. 한 10분쯤 군침을 삼키며 기다리노라니 드디어 해장국 그릇이 내 앞에 놓여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내 앞에 놓여진 해장국이 내가 지금까지 먹어온 해장국 하고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우선은 해장국 하면 떠오르는 것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뚝배기 속에 시래기나 뼈다귀 푹 고아서 선지 둥둥 띄워 고춧가루 팍팍 넣고 파 양념 고명으로 얹어 푸짐하게 나오는 것이었는데 난생 처음 먹어보는 경주 해장국은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해장국 하고는 많이 달랐습니다.
해장국에 웬 묵을 넣어 주는데 처음 먹어보는 새로운 스타일의 해장국이 낯설어서인지 내 입맛이 영 감동적인 동의를 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옆에서 같이 먹던 아내는 본래 대구 사람인지라 경상도 음식에 친숙해서인지 연신 “음~ 맛있다” “여보 이거야 맞아 이거야 내가 어렸을 때 먹어본 그 맛이야” 하면서 너스레를 떨고 있었습니다. 아내의 계속 되는 감탄사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 시원찮은 표정으로 남은 음식들을 마저 치우고는 본격적인 경주 여행에 나섰습니다.
1박 2일 일정으로 왔으니 편의상 먼저 불국사, 석굴암, 감은사, 문무대왕암을 첫 코스로 정해서 여행하기로 했습니다. 불국사와 석굴암이야 여러 번 가본 터라 가는 길은 익숙했습니다. 그러나 감은사 그리고 대왕암은 경주 여행에서 빼고 가기 쉬운 코스이기 때문에 이번 여행에서는 아들에게 꼭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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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어 용이 된 문무왕이 들어와 쉬어 가기를 바라고 만들어 놓은 금당 밑 구조물의 흔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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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유시환 |
| 김대성이 금생의 부모와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 지었다는 불국사, 석굴암을 지나 그 옛날에는 신라의 동악이라 일컫던 토함산을 넘어 우리는 감은사지를 향했습니다.
감은사는 본래 신라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지었다는 절인데 지금은 전각들은 다 없어지고 두 개의 석탑만 남아서 옛 일들을 추억케 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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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당 밑으로 물이 흐를수 있도록 만든 수구의 흔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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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유시환 | 본래 절의 금당 바닥 밑은 약 1m 정도의 공간이 있어서 금당 밑으로 물이 들어 올 수 있게 설계가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동해 바다의 용이 되어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던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용이 된 부왕이 바다로 이어진 물길을 따라 금당 밑으로 들어와 쉬다 가라는 뜻으로 그렇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나는 얻어들은 역사 지식들을 아들에게 침을 튀겨가며 열심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그 설명을 듣던 아들은 연신 “아! 그렇구나 우리 아버지 대단해요” 하면서 이 아비를 한껏 추켜세워 주었습니다. 그러면 나는 신이 나서 더 열심히 아들이 묻지는 않는 이야기들까지 설명해 주느라 계속 열을 내서 강의를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이 아비를 따라 다니면서 역사 유적지를 수없이 다녀본 경험이 있는 아들인지라 이 아비의 역사 지식을 함부로 무시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감은사지 답사를 마치고 우리는 바로 인근에 있는 대왕암으로 향했습니다. 대왕암은 바다 가운데 서 있는 조그만 바위섬이었습니다. 문무왕이 죽자 화장을 해서 유골을 이 곳에 뿌렸다고 알려져 있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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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무왕의 화장한 분골을 장사 지냈다는 대왕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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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유시환 |
| 육안으로 보아 별다를 것이 없는 이 바위섬이 1300여년 동안 사람들의 발걸음을 끌었던 것은 나라를 사랑하던 왕의 염원이 아직도 살아서 많은 이들에게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내가 특별히 이곳으로 아들을 데리고 온 이유도 죽어서라도 나라를 지키겠다던 문무왕의 나라 사랑 정신을 아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가 계속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