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엽 국정과 민생이 파탄지경에 이르고 민심이 개혁을 요구하게 되자 무장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에 이은 혁명으로 조선왕조를 개국하기에 이른다.
그는 처음에는 국호를 여전히 고려라 했고 도읍도 그대로 개경에 두고 있었다. 이성계는 원래 무장으로서 남부지방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 토벌 작전에 나가 수명의 적을 검으로 베었을 만큼 활쏘기뿐만 아니라 칼쓰기에도 능통하였다.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는 왕의 절대적인 권위를 세우기 위해 명에 사대의 예를 갖추고 고려말의 고질적인 병폐를 타파하기 위해 개혁을 단행, 세조대에 이르러 비로소 결실을 보았다.
그는 절대왕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귀족문벌정치를 타파하고 각종 제도를 개혁하였으며, 고려말 불교의 폐단을 거울 삼아 배불숭유 정책을 국시로 삼았다.
이렇게 성립된 조선왕조 5백년은 전제군주제의 나라였지만 태종조에 신문고를 설치할 정도로 언로를 중시한 국가였으며 조선왕조의 멸망을 부른 것은 몇몇 세도가들의 세도정치의 폐단 때문이다.
조선왕조의 역사는 다음과 같은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전기: 태조의 조선 건국으로부터 경국대전의 반포로 양반관료 체제가 완성될 때까지(15세기)
중기:사회질서가 변질되고 사림파가 훈구권신들과 이념적 대립을 벌이면서 세력 기반을 굳혀가는 임진왜란 전까지(16세기)
후기:근대 사회의 맹아가 나타나고 곧 이어 세계사의 질서속에 편입되는 개항 전까지의 17~18세기 및 19세기 중엽까지.
조선조 초기에는 문과 무의 균형적인 정치를 펼쳐 국가의 안정이 도모되는 듯하였으나, 유교와 성리학의 발흥으로 점차 문치 중심의 정사로 흘러갔다.
이에 따라 고려 초와 같은 문치주의와 문약에 치우쳐 문인을 우대하고 무인을 천시하게 되면서 국방을 게을리 하였다. 그 결과 비참한 대란을 겪게 되는데, 선조대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인조대의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그것이다.
태자 시절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쓰라린 굴욕의 경험이 있는 효종은 즉위한 후 북벌계획을 실현하기 위하여 군사조련 및 군비증강에 힘쓰고 무예를 적극 권장하는 등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흉년이 계속 된 데다 당쟁의 여파로 재정난이 겹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
사대모화 사상의 문약화 속에서 나라의 위기가 닥칠 때마다 그나마 민족의 명맥을 이어온 원동력은 숭 문천무 정책 하에서 천시받으면서도 열악한 환경을 묵묵히 견지며 평민 백성들과 힘을 합하여 의병, 승병 으로 궐기하여 외침에 대해 끈질기게 항쟁을 해온 은류의 지킴이 무인들 및 뜻있는 애국지사들과 위급한 시기마다 국난극복의 투혼과 지혜를 발휘한 이순신, 권율 등의 문무를 겸비한 장수들이었다.
② 조선 무사의 삶과 정신
국가를 세우는 초기의 원동력은 권력을 뒷받침하는 무력과 국방력, 곧 무인들의 힘이다. 태조 이성계도 즉위한 후 고려 무신정권의 폐단인 사병제를 폐지하고 병제를 삼국시대의 유습인 국민개병제로 개량하였다.
따라서 조선왕조의 제도 역시 고려와 같은 문무 양반제와 산무사제를 채택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의 무사들은 고려의 무사들과는 달리 은자적 무사의 입장을 견지하여 현실정치 참여에 냉소적이었으며, 현실도피적인 성향을 띄었으나 충의와 절개를 지켰다.
고대의 군제는 병농일치제로서 농민이 대부분 군인이르모 농사 이외의 여가가 있으면 반드시 무예를 훈련했다. 조선조 때에도 무적능력의 예비는 국민 전체가 일과로 또는 천직으로 하였으며 이와 같은 관점에서의 무예운동은 곧 생활활동의 척도였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무사정신은 병농일치의 국민개병제 하에서 모든 백성들의 정신이었으며 유교를 숭상하는 풍토에서 충효사상이 그 중심임을 알 수 있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조의 사병제 폐단을 혁파하고 병제를 정비하는 데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의흥 3군부를 설치하여 병권을 장악하고자 했으나 개국공신인 종친과 훈신들이 아직 사병을 보유하고 있어 강력한 중앙병권의 집중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사병 혁파를 통해 절대왕권의 중앙집중체제에 필요한 병권의 집중을 단행한 이는 태종이다. 태종은 정종 2년(1400)에 모든 사병을 폐지하고 3군부에 귀속시켰으며 그후 세조 10년(1404)에 3군부를 5위도충부로 개편하여 여기서 중앙군인 5위를 지휘하게 하였다.
무인들은 과거제에 의한 무과시험으로 채용되었는데 이는 고려의 제도를 계승된 것이다. 무과는 초시, 복시, 전시의 3단계로 구분되며 과목은 목전, 철전, 편전, 기사, 격구 등인데 후기에는 기사 대신에 기추, 관혁유엽전, 조총, 편추가 추가되었으며 이를 통틀어 무예 11기라 칭하였다.
조선 전기의 무예는 무인의 기초세력을 중시하였는데, 이는 고려의 제도를 계승된 것이다. 무과는 초시, 복시, 전시의 3단계로 구분되며 과목은 목전, 철전, 편전, 기사, 격구 둥인데 후기에는 기사 대신에 기추, 관혁유엽전, 조총,편추가 추가되었으며 이를 통틀어 무예11기라 칭하였다.
조선 전기의 무예는 무인의 기초체력을 중시하였는데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기초체력 연마와 궁술,갑주 창패, 도검, 환도, 목창, 목검 등으로 훈련하고 궁사,수박의 기능을 가진 무사들을 뽑기도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조선은 고려 무예의 명맥을 잇고 검술, 기사,수박 등이 대표적인 조선 무사의 수련과목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대의 무예는 실전적인 면 뿐만 아니라 이론 면에서도 체계화를 이룩했는데, 선조 때 한교는 고금의 비법을 연구하고 70여 인을 모집하여 무예교육을 시켜서 임진왜란때 응용한 일이 있으며 <무예통지> <연병지남조련도식>등의 무예이론서를 저술하여 무예의 체계적인 발전에 공헌하였다.
조선 후기에 부국강병과 무예에 절대적인 관심을 보인 왕이 효종대왕이며, 선조대왕 때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무예의 필요성과 군사훈련의 교범이 있어야 되겠다는 절실함이 정조 14년(1790)무예종합서<무예 도보통지>라는 걸작으로 결실을 맺었다.
<무예도보통지>는 정조 때 규장각 검서관 이덕무(1741~1793)와 어모장군 박제가(1750~1805),장용영 초관 백동수가 어명에 따라 한교의 <무예제보>(1598.선조 31)와 영조 35년 사도세자가 서정을 대청하면서 편찬한 <무예신보>를 바탕으로 편찬한 책으로 영조 때의 죽장창,기창, 예도, 왜검교전,원도, 협도,쌍검 ,제독검, 본국검, 권법, 편곤 등 12기를 증입,원래의 6기와 합하여 18반이 되고 정조 때에 와서 기창, 마상월도, 마상쌍검, 마상편곤의 4기를 추가하고 격구, 마상재가 부가되어 성립된 24반 무예기술을 도해 한 종함무예 이론서이다.
조선후기에 실학사상의 영향이 컸음은 이덕무, 박제가라는 저명한 실학자들의 존재를 통해서도 알수 있다, 특히 박제가는 40여세라는 장년의 나이에 문과보다 하위의 위상으로 존재했던 무과에 진출하는 성과를 거두었는데, 이는 실학사상의 실증적 수단으로 결단을 내린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탄생한 <무예도보통지>는 24기의 실전 전투능력배양을 위한 훈련서로서 임진왜란 직후인 1596년부터 200여 년의 오랜 기간 동안 국가 수호책에 대한 괸심의 결과 동양삼국과 조선 전래 무예의 실용화를 연구,수용 발전시킨 우리 무예의 총화라 할 수 있다.조선 전기에도 무예를 중시했음은 "삼군은 근교에서 위사는 금원에서 조련시켰으며 군사 조련이 가장 성황을 이룬 시기는 광해군 때부터"라는 <어제무예도보통지서>의 내용에서도 잘 드러난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무예도보통지>가 중국의 병서를 모방 , 대부분 중국식 기법응 수입한 것일 뿐이라고 평가절하 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의견에 찬동할 수 없다.조선 건국 이후 200여 년 동안 평화기가 계속되며 무비를 소홀히 한 결과 궁시하나만 있었다 할 정도로 국방력과 군사훈련도 침체되었고 무비 소홀로 인한 국가 존폐 위기를 수 차례 맞이하더니 마침내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으로 금수강산이 유린당하고 백성들이 피폐해지는 지경을 당하니 국난극복의지의 발현으로 훈련체계를 갖추어 독창적인 조선의 전래무예로 개발하기 위해 200여 년이라는 장구한 기간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노력하여 민족무예 쵀대의 걸작품인 <무예도보통지>가 탄생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민족의 자주적인 주체의식과 민족무예의 우수성에 대한 재평가도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무예도보통지>에 일본과 중국 무술이 포함된 상황은 <국역무예도보통지>해제에 잘 표현되어 있다. 조선의 무예는 원래 활쏘기 하나뿐이었는데 선조가 왜적을 물리친 후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참고하여 명 나라 장수들에게 그 기예를 물어 곤봉, 낭선, 장창, 당파, 등패, 쌍수도의 6기를 연구해설케 한뒤 그 도보를 만들어 <무예제보>를 찬하고 영조 때 장창, 기창, 예도, 왜검 교전월도, 협도, 쌍검, 제독검, 본국검, 편곤과 특히 권법 등 12기를 더 보충하고 도해를 찬수하여<무예신보>를 만들었으며, 정조 때에 기창, 마상월도, 마상쌍검, 마상편곤의 4기와 격구, 마상재,2기를 더 보태어 모두 24기를 해설하고 도보를 삽입하여<무예도보통지>를 완성했다.
이 책은 <기효신선><무비지><도검록>을 비롯하여 <모시><맹자>는 물론 <천공개물>까지 인용되었을 정도로 내용이 방대하며 한중일 삼국의 서적 224종을 참고하였다.
이 책은 조선 건국 후 일시적으로 평화기가 계속 되자 무비를 소홀히 하고 숭문 일변도가 되었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유비무환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군사들에게 무예를 상습 연마 시켜 국방에 만전을 기할 필요성에서 편찬되었다.
특히 건국 이래 경멸해 오던 왜인들의 검술까지 다룬 것으로 보아 양란 이후 왜인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음을 입증해 주고 있자.
이 책은 200여 년이라는 오랜 기간에 걸쳐 국가의 시책으로 동양삼구그이 현존하는 무예자료를 조사 하고 실증적인 실용화 연구를 통해 외래무예를 섭렵, 전통의 무예로 재창조하여 자주적이고 독창적인 군사 실용훈련 지침서로서 뿐만 아니라 무예백과사전으로 창출된 우리 민족무예의 정체성을 세운 18세기 최대의 무예유산이다.
조선에는 이때까지 궁시 하나만의 무예가 전해졌다 하는 기록은 사대모화사상의 영향이 아닌가 한다. 당시 민간에서는 수박, 각저희, 마상무예, 격구 등이 성행했었고 신라의 <무오병법> 고려의<김해병서>등이 현존하지는 않지만 고려 때까지 전래 병법을 전수,연마 했음을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의 기록에서 추측할 수 있다. 당시 양반사회에서는 적수궁권의 맨손 격투술 보다는 격검지술과 궁시의 습사용법을 중요시 한 것으로 보인다.
연전에 러시아연방을 순회하며 무예시범을 보이다가 알마아타에서 목격한 고려인의 후예들이 펼친 마상립, 마상도립,쌍기마 등의 기예는 놀랍기 그지없었고 필자로서는 <무예도보통지>에서 보았던 마상무예가 먼 이국땅 고려인의 후예들에 의해 아직까지 전승되어 민족혼을 잇고 있는 모습에 많은 감명을 받은 바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도 은류의 유교적 무사들과 지킴이들의 무예가 여러 가지 있었겠지만 동양삼국 무예의 총화인 <무예도보통지>라는 뚜렷한 자료가 조선시대의 무예 실체를 객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게 해 준다.
우리의 자란스러운 문화유산인 무예문화가 많은 부분 단절되고 멸실되었지만 국난극복의 의지와 민족혼이 달긴 한국인의 전통무예를 잘 가다듬어 전통무예를 재조명하고 자주적이고 창의적인 무예문화를 부흥시켜야 할 것이다.
조선 무예중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무예가 수박이다. 무사의 자격을 갖추는 데 필요한 대표적인 무예가 활쏘기, 창쓰기, 격구, 그리고 수박이었다. 태종대에는 병조와 의흥부에서 방패군 보충시 수박희로 세 사람을 이긴 자를 선발하고 갑사의 경우데도 동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