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는 마을 중간에 동서로 장승 木刻 법수가 있어 마을 주민들의 疾病과 災難을 방지해주고 풍년을 기약하였다.
마을 주민들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成品成穀을 모아 豊年祭를 올렸다고 한다.
동사리 東舍마을(현 동사리 1구) 동사리는 조선시대 남평군이라 칭할 때 東軒의 동쪽에 손님들이 쉬었다 갈수 있는 객사가 있어 현재까지 동사리라 부르고 있다.
마을어귀에는 立石과 동사리비가 있다.
동사리 客舍門마을(현 동사리 1구) 晉州姜氏 13대 조부인 강씨가 京官에 있다가 다도면 호봉굴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중 그 후손들이 최초로 동사리에 정착한 것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조선조 남평군 당시에 동쪽에 손님들이 쉬었다 가는 객사문이 있었다하여 객사문 또는 객사몰이라 칭하였다.현재는 잘 부르지 않고 있다.
동사리 明水마을(현 동사리 2구) 마을 형성 유래가 오래되지 않으나 安三萬氏가 최초로 이 곳에 정착하여 하천부지를 경작하였다고 한다.
원래는 동사리에 속한 마을이었으나 행정수요의 증가로 1974년에 분구되었다.
어원은 設村 當時 明鏡止水와 같이 맑은 물이 흘렀다하여 明水라고 불렸다.
교촌리 橋村마을(현 교촌리) 金海金氏인 김사행氏가 임진왜란 당시 함경북도에서 이곳 橋村으로 이주 정착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연대는 미상이나 마을 앞에 큰 냇가를 건너던 돌다리가 있어 돌다리목이라 불리워 오다 옥앞에다 돌다리목이 합해져 石橋里라 불리우다 최근에 와서 교촌리라 불리어지고 있다.
교촌리 獄앞 마을(현 교촌리) 김해김씨의 정착으로 마을이 정착되었으며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조선시대에 현방청(지금의 교도소)이 있었다하여 옥전(獄前)을 옥앞이라 불렀으나 현재는 60세 이상의 노인들에게만 불리어지고 있다.
마을 앞 들판에 위치한 입석에서 매년 정월 대보름날 제사를 지내고 있다
橋院리 院村마을(현 교원리 1구)
조선세종 2년(1420년) 남평 동문밖에 향교를 건립하면서부터 최초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入鄕姓氏는 羅州林氏로 전해지고 있다.
설촌 당시 남평에서 가장 먼저 생겼고 또한 마을 형태가 제일 컸다하여 원촌이라 칭하였다 한다.
교원리 생계마을(현 교원리 1구) 세종 2년에 남평향교가 건립되면서 강릉咸氏가 생활터전을 잡았다 전해지고 있다.
향교소재 마을이라 하여 생계라 칭하였으나 현재는 잘 부르지 않고 있다.
교원리 防築마을(현 교원리 2, 3구) 平山申氏가 화순에서 거주하다 外家의 養子로 입양하여 이 마을에 최초로 정착하였으며 그 후 인동 張氏가 入鄕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마을에는 300년 이상된 물버들나무가 있는데 가뭄때 버들祭를 지내면 가뭄이 해소되고 풍년을 이룩하였다 한다.
마을설립당시 마을 입구에 오가리만한 방죽(둥그런 구기)과 堤防이 있었다하여 방축이라 불렀다 한다.
書山리 書院마을(현 서산리 1구) 155년경 달성서씨, 전주이씨 파평윤씨가 황해도 개성 등지에서 입향하였다고 하며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마을에 서원이 있어 서원이라 칭하여 전해오고 있다.
서산리 鶴당골 마을(현 서산리 1구) 학이 날아와 놀던 곳이라 하여 학당골이라 불리우고 있으며 靈城丁氏가 1500년경에 서원마을에 들어왔다가 학당골로 이주 정착하였다.
서산리 鳳山마을(현 서산리 2구) 마을 입구에 오동나무가 있고 전면에 봉황산이 있어 옛부터 상서러운 봉황이 자주 날아든 곳이라하여 봉산이라 전해오고 있다.
五溪리 磻溪마을(현 오계리 2구) 김해김씨 8대조께서 해남 尹政丞 벼슬을 하다 주변 산세가 수려하고 절경에 도취되어 이 곳에 생활 터전을 닦았다고 한다.
설촌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마을 주변에 돌이 많고 맑은 물이 흘러 旱害에도 水源이 마르지 않는 곳이라 하여 돌고개(돌마을)라 하였으며 현재 반계라 불리워지고 있다.
오계리 珠峯마을 (현 오계리 2구) 신라시대 국지사 玉龍子께서 砥石江을 구경하시다가 지석강 맥이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보고 주봉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다섯 마리의 용이 구슬을 탐낸다하여 주봉이라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오계리 花山마을(현 오계리 2구) 고대부터 산세가 수려하여 자연의 哲理를 감탄한 곳으로 봄이면 花蕪요 벌레가 찾아들어 선인들로부터 화산이라 전해 내려오고 있다.
화산은 산세가 수려하여 국지사 玉龍子께서 묵어 가시던 곳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오계리 五龍마을(현 오계리 3구) 백제시대(150년경) 도자기를 직접 제작하던 곳으로 최초로 진주강씨가 정착하였으며 현재는 김씨, 최씨가 혼성을 이루면서 생활하고 있다.
마을뒤의 산세가 용의 형상으로 마을을 감싸고 있으며 마을 앞에는 마치 용이 여의주를 무는 형태의 구슬峯이 있다하여 오룡이라 불려지고 있다
오계리 石峙마을(현 오계리 1구) 이 지역은 항상 수원이 풍부하고 경관이 수려하여 강태공들이 이곳을 찾아 돌바위 위에서 침어를 하였으며 돌고래가 있었다하여 석치라 불리워지고 있다.
上谷리 上村마을(현 상곡리) 설촌연대는 미상이나 맨 먼저 선진화된 마을로 제일 부촌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면 소재지로부터 남서쪽으로 8㎞ 지점에 위치한 오지마을로 계곡이 깊고 지형이 평야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였다하여 상촌이라 칭하였다.
상곡리 淵谷마을 (현 상곡리) 설촌연대는 미상이나 제주양씨가 최초로 정착하였다. 계곡이 많아 연못이 많고 마을 일대가 연꽃이 만발하어 구경꾼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유명해지자 선인들이 연곡이라 명명하여 오늘이 이르고 있다.
雨山리 印岩마을 (현 우산리 1구) 마을 형성연대는 미상이나 최초 입향은 평산신씨로 추정되며, 그 후에김해김씨, 하동정씨 순으로 정착하였다.
이 마을 백호등에 있는 10m 이상의 석층위에 60kg쯤의 마치 호랑이 형태의 도장 모양이 찍혀있는 바위가 있는데 아무리 힘쎈 장사라도 이 바위를 움직일 수 없었다는 전설과 호랑이 형태의 도장이 찍혀 있는 마을에 터를 잡았다하여 인암으로 칭하였다 한다.
우산리 文武마을(현 우산리 1구) 이 마을에 최초로 정착한 선인들은 다른 마을에 비해 글공부하는 學童이 많아 추후 많은 문인들이 배출될 것이라 하여 선인들이 문무라 칭하였다.
우산리 雨津마을 (현 우산리 3구) 新平宋氏 宋自殷이 전북 신평에서 살다가 이 마을에 와 南陽洪氏의 딸을 맞아 후손 5형제를 두어 500년 안주할 곳이라 입향하였다.
현재 500년 이상된 당산나무가 그 때 심어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마을 앞에 있는 高堂山이 施雨하여 마을 앞에 山亭燈을 나리 삼아 무형을 따라 오른쪽에는 白雲臺가, 왼쪽에는 雲洞이, 앞으로는 雲浦가 있어 비나리(雨津)라 하였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산리 차산마을 (현 우산리 2구) 마을 뒷산 지형이 櫓頭에 피었다하여 花頭라 불리우다가 일제때에는 돗대라하였고 현재는 차산이라 칭하여지고 있다.
藍石리 中藍마을(현 남석리 1구) 慶州崔氏 崔反이 광산구 大村에 살다가 父親 崔厚立이 임란 의병으로 출전하니 모친을 모시고 피난와서 최초로 안주하였다.
그후 隨城崔氏 崔聚東은 多侍에서 거주하다 말을 타고 능주로 가다 지석강 건너편이 산세가 수려하여 이 마을에 移居하였다 한다.
砥石江 水源이 쪽(藍)같이 푸르고 지석강 바위가 웅장해서 남석이라 부르다가 남석의 중간 마을에 위치하였다 하여 중남이라 칭하였다 한다.
남석리 下藍마을(현 남석리 2구) 연대는 미상이나 坡平尹氏 尹確이 임란으로 한양에서 피난왔다가 정착지를 물색하던 중 지석산천을 따라 올라 갈 때 지석강 건너 마을이 산세가 수려하고 쪽같이 푸른 물에 도취되어 이곳 하남에 정착하였다.
原名은 남석리로서 쪽같이 푸른 물이 흐른다 하여 쪽돌이라 부르다 마을이 上, 中, 下로 나뉘어져 한양에서 가장 먼 곳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하남이라 칭하였다 한다.
남석리 上藍마을(현 남석리 3구) 坡平尹氏 尹華達은 지금부터 약 740년 전에 충청도에서 거주하다 이곳 지석유역을 유람할 때 물이 너무 푸르고 농경지가 비옥하여 이곳에 최초로 정착하였으며 현재까지 파평윤씨의 集姓村을 이루고 있다. 남석리 상, 중, 하남중에 한양에 가장 가까이 위치했다 하여 상남이라 칭하였다 한다.
楓林리 元岩마을(현 풍림리 1구) 연대는 미상이나 1600년대 초 全義李氏가 최초로 정착하였으며 原名은 元積고을이라 명하였다.
본래는 남평에 속하는 東村面 소재지권이었으며 일제후 마을 이름을 원암으로 개칭하여 현재까지 불리워지고 있다.
풍림리 竹林마을(현 풍림리 2구) 마을 설립연대는 미상이나 1600대초 河陰奉氏(현재 江華奉氏)가 최초로 정착하였다고 한다.
마을 명칭은 조선시대 때 봉씨라는 효자가 모친의 병환을 치료하기 위하여 竹筍을 찾아 통곡할 제 신이 나타나 죽순이 있는 곳을 가르쳐주었다 하여 죽림이라 칭하였다 한다.
풍림리 楓江마을(현 풍림리 3구) 설립연대는 미상이나 백제시대에 마을 앞으로 큰강이 흘렀는데 계속된 풍수해로 모래, 자갈이 메꾸어져 마을이 형성되었다하여 풍강이라 불리워지고 있으나 현재는 강의 형태는 찾아볼 수 없다.
김해김씨가 최초로 정착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현재 군락을 형성하고 있는 나무들은 그 때 심었다고 한다.
노동리 蘆洞마을 (현 노동리) 1600년경 明宗때 훈련도감을 지내다가 사화를 피하여 이곳에 처음 정착한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마을은 白氏村으로 유래된다.
지금도 마을 중간에 당산나무가 있는데 당산나무를 백씨 할머니라 부르고 있다. 그후 淸州金氏가 入鄕하여 그 맥을 유지하고 있다.
당초 가르실가룻(가롯)이라 불렀던 것은 심산유곡이라 그렇게 불렀지 않았나 추정되며, 일제때 행정구역 개편으로 노동리라 불러오고 있으며 마을 주변이 갈대숲으로 쌓여 고을을 이루고 있다하여 이와 같이 命名하였다 한다.
光村리 新村마을(현 광촌리 1구) 淸州金氏 12대손이 蘆洞에서 거주하다 노동은 산세가 험하고 수원이 부족하여 농경생활이 불편하므로 지세가 낮고 평야지대인 이곳으로 최초에 정착하엮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초에는 광촌리라 부르다가 현재 마을은 지대가 낮고 수원이 좋아 농경생활이 편리하므로 큰 마을이 형성될 것이라 하여 선인들이 신촌이라 칭하였다 한다.
광촌리 淨光마을(현 광촌리 2구) 연대는 미상이나 당초 마을의 위치는 현재의 터가 아니라 남서쪽으로 2㎞쯤 떨어진 폐절터가 있는 곳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당시에는 하천수가 은빛같이 맑고 빛났다하여 정광이라 불려지고 있다.
水元리 水淸마을(현 수원리 1구) 마을 설립연대는 미상이나 최초 정착은 은진宋씨로 추정되며 현재는 김해김씨, 광산김씨 등이 집촌을 형성하고 있다.
원래 이 마을은 중간 산간지대에 위치하여 농사철에는 수원이 부족하여 흡족한 농경생활을 못하자 선인들이 풍부한 水源을 갈구하는 뜻에서 수청이라 불렀다 한다.
수원리 新金마을(현 수원리 2구) 설립연대는 미상이나 본 마을은 농토가 비옥하고 수원이 흡족하여 일찍부터 集村을 이루었다.
조선시대 마부들이 말을 세워두는 馬場터였다 하여 마당거리라 불렀으며 행정구역 개편과 더불어 마을 이름을 신금이라 名하고 있다.
수원리 金堂마을(현 수원리 3구) 마을 설립연대는 미정이나 최초 입향은 漢陽趙氏와 南平潘氏로 추정되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두 성씨가 집촌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에는 풍년제를 모시는 堂이 있는데 祭를 모시고 나면 매년 풍년농사를 이루어 윤택한 생활을 영위하게 되자 주변에서 금당이라 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광이리 光利마을(현 광이리) 약 500년전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며, 최초의 정착은 平山申氏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시대 廣驛 또는 驛村이라 하고 廣利로 칭하다가 일제시대에 광이리로 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평산리 平山마을(현 평산리 2구) 평산리는 원래 평야가 광활하고 수원이 좋아 농작물 재배에 가장 적합한 지역이었다 하여 평산이라 칭하였다.
이곳에 최초 정착은 密陽朴氏의 朴一奉으로 전해지고 있다.
평산리 於田마을(현 평산리 1구) 全州李氏 李河康이 전주에서 생활하다가 家勢가 어려워 정착지를 찾던 중 전담이 비옥하고 수원이 좋은 이곳에 최초로 정착하였다.
지명 유래는 당시 전답이 부족하여 주변 지형이 낮은 산을 전답으로 개간 농토를 확장하여 생활하여 오던 중 멀리서 지형을 살펴볼 때 산의 허리가 늘어진 것 같이 보였다 하여 어전이라 불려오고 있다.
평산리 새터마을(현 평산리 3구) 새터마을은 당초 마을이 형성되지 않은 지역이었 전답이 광활하여 晉州河氏 하지환氏가 이곳에 최초 정착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새터는 전답이 비옥하고 수원이 풍부하여 농경생활지로서는 적합한 곳으로서 최초 마을을 형성한 先人들이 새로 만들어졌다하여 현재의 새터라 칭하여오고 있다.
1995년 1월 1일 나주시로 병합되었다.
1999년 9월 28일 산포면 덕례리, 등수리 일부지역(108ha)을 남평읍으로 편입시켰다.
이곳 문바위는 남평문씨 시조인 문다성의 탄강(誕降)설화가 서려있는 곳으로 이곳에 대한 기록은 호남읍지(1895년) 남평군읍지 고적조에 보인다.
문바위는 높이 6m 폭 5m 정도의 크기이며, 우리나라 대표적인 씨족 설화가 서려있는 곳으로 1851년 문약연이 문암이라 새긴비를 바위위에 세웠고, 1928년 문락광이 주축이 되어 암각을 지어 보호해 오다 1975년 시멘트 골조 건물로 중수하였으나 문암에 대한 원형을 복원하기 위해 1995년 건물을 해체하여 현재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