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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의 어제와 오늘
작성자:노 우 호
예루살렘은 현재 이스라엘의 정치적 수도이다.
반면에 행정적인 수도는 텔아비브(야파)이다.
예루살렘은 부를 때
아라비아인은 이 도시를 쿠드스(신성한 도시)라고 부른다.
인구 약 59만 1천(1995).
동부는 요르단령이며,
서쪽은 1948년부터 이스라엘령이 되었고,
1950년에는 그 수도가 되었다.
1967년 6월 중동전쟁 이후로
유대교도 ■그리스도교도 ■이슬람교도가
저마다 성지(聖地)로 받들고 있는 동쪽 지역도
이스라엘의 점령지이다.
사해(死海)로부터 25km,
지중해 연안으로부터 55km,
높이 790m 가량의 팔레스타인 중앙산맥의 분수령상에 있는데,
지중해성 기후와 사막기후의 영향을 두루 받기 때문에
북위 31■41'에 위치하지만
겨울에는 몹시 춥고 봄 ■가을에는 이따금 37■의 더위를 겪는다.
동(東)예루살렘에는
사적(史蹟)■성적(聖蹟)이 많으며,
통곡의 벽(유대교),
성묘(聖墓)교회(그리스도교),
오마르사원(이슬람교) 등이 특히 유명하다.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가 많으며,
순례자와 관광객 상대의 호텔 ■레스토랑 ■상점 등이 많다.
서(西)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정치 ■문화의 중심지이며,
정부 청사와 헤브라이 대학 ■국립박물관 ■미술관 등이 있다.
또 금속 ■담배 ■플라스틱 ■신발 ■전기기구 공장 등이 있다.
BC. 3000년대 말경에 ‘여부스’라는 가나안인(人)의 한 부족이
그 동부에 성시(城市)를 지어 거주한 것이 기원이라고 한다.
이 도시는 우루살림이라고 불렀는데,
■평화의 도시■라는 의미이다.
BC. 2000년대 중엽부터
이집트의 파라오(王)의 세력하에 들어갔으며,
BC. 1000년 무렵까지 이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 후 헤브라이인이 이곳을 점령하였고,
다윗왕이 여부스인을 쫓아내어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다음에는 솔로몬왕이
지금의 아크사 이슬람교사원이 있는 지점에 궁전을 지었고,
그 북쪽, 현재의 바위사원(쿠바트 앗사흐라)이 있는 곳이며
일찍이 다윗이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을 사서 솔로몬에게 인계하였고
솔로몬 왕이 등극하자
아버지 다윗 왕의 유지를 받들어
약 7년에 걸쳐 성전을 건축했었다.
이 무렵에는 주민들도 늘어났고,
도시 둘레에 성벽도 만들었다.
솔로몬 왕이 죽은 후 BC. 935년
왕국이 이스라엘과 유대로 양분되자
예루살렘은 유대의 중심지가 되었다.
BC. 586년 신(新)바빌론의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파괴하였으며,
시민들을 바빌론으로 끌고 가서
BC. 538년까지 억류하였다(바빌론의 포로).
그 후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이들을 석방해 줌으로써 BC. 536藪?
스룹바벨의 인솔하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도 재건하였으나,
옛날의 번영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
유대인들은 파란 곡절을 많이 겪으면서
마침내 이두메 출신인 헤롯이 권력을 잡게 되었다.
BC. 37년부터 헤롯 왕이 이곳을 점령하고
성전을 개축하기 시작했다.
헤롯은 주전 19년경부터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성전을 개축하기 시작했는데
이 성전 개축 공사는 80년 이상 계속되었다.
이때부터 예루살렘은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헬레니즘 문화의 색채가 농후한 것이
옛날과 다른 점이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혔을 무렵(AD 30년 4월)에는
처형장인 골고다 언덕과 매장지가
북서부의 성벽 밖에 있었는데,
10여 년 후에는 이 지역을 둘러싼 새 성벽이 만들어졌다.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70~71년에
이 도시를 공격함으로써 헤롯 시대의 번영은 사라졌다.
유대교도들은 헤롯이 지은 성전의 벽,
나중에는 그 성벽을 ■통곡의 벽■이라 이름짓고
이곳을 찾아가서 통탄하는 풍습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에도 유대교도의 반란이 거듭되었기 때문에
로마인은 135년 성전과 성벽을 완전히 파괴했으며,
예루살렘을 콜로니아 아이리아 카피톨리나라 부르고
직속지로 삼아 유대교도들을 몰아냈다.
로마가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자
예루살렘은 그리스도교도의 순례자로 붐비었으며,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337)의 명령으로
그리스도의 성묘(聖墓) 등에 최초의 교회가 건립되었다.
주후 614년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호스로 2세가
비잔틴 제국군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뒤,
많은 교회를 불사르고 다수의 시민을 끌고 갔다.
638년 이슬람교로 단결한 아랍인이
이곳을 함락시켰으며,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도 비잔틴 제국에서 이탈하여
이슬람교 국가의 일부가 되었다.
현재 바위돔 사원에 있는 큰 바위는
마호메트가 꿈에 대천사 가브리엘의 안내로
제 7층천에 있는 알라신(神) 앞까지 갔다는
이른바 승천(미라지)의 장소로서 신성시되고 있다.
아랍인들은 솔로몬의 궁전이 있던 곳에
‘알 아크사(아득한 회교사원)’를 지었으며,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프, 압둘 말리크(재위 685~705) 때에는
다윗이 제단을 마련한 곳에 바위사원을 건립하였다.
이때부터 이슬람교도와 그리스도교도는
서로 상대방의 성지를 존중하였다.
예외로는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의 칼리프, 하킴(재위 996~1020)이
그리스도의 성묘를 비롯하여
그리스도교도의 몇몇 성지를 파괴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는 비잔틴 제국의 도전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1099년에는 제1차 십자군이 성시(聖市)를 침략하였으며,
이슬람교도와 유대교도의 대학살을 자행하고,
이곳을 수도로 하는 예루살렘 왕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1187년 이집트에 아이유브 왕조를 건설한 살라딘이
이슬람 세력을 모아 이를 탈환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친 십자군 원정이 있었으나
1229년 2월~1244년 8월까지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와의 화의(和議)로
이 땅을 회복한 적이 있을 뿐
성지 탈환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이 땅은 맘루크 왕조의 세력 하에 들어갔으며,
다마스쿠스 총독이 이를 관할하였다.
그러나 1516년 12월 말에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셀림 1세가
시리아에 있는 맘루크 왕조의 세력을 꺾고
예루살렘을 그 지배하에 두었다.
현존하는 성벽의 대부분은 투르크 영이 되고 난 뒤
술레이만 대제(재위 1520~1566) 시대에 축조된 것인데,
투르크 영의 시대에는 차차 쇠퇴하여
19세기 전반에는 인구가 약 1만 1천 정도로 감소하였다.
한편, 19세기 중엽부터는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이
투르크에 압력을 가하여
이곳의 성지 보호에 주력하기 시작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말기에 투르크 군이 패퇴하고
앨런비 장군이 거느리는 영국군이 이곳을 점령하였으며
1920년부터 팔레스타인이 영국의 위임통치하에 들어가자
그 수도가 되었다.
그 후 대전 중의 밸푸어선언에 따라
유대교도의 이민이 격증하였으며,
아랍족과 마찰을 일으키게 되었다.
1948년 팔레스타인의 유대교도와 아랍 각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으며,
그 이듬해 2월에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성립하였다.
이에 따라 예루살렘은 요르단과 이스라엘이 동서로 양분하여
각각 한 쪽을 영유하였는데,
1967년 6월의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아랍 국가들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의 동부마저 점령해 버렸다.
‘통곡의 벽’만 남은 예루살렘 성전 산 ,
BC. 950년경 솔로몬 왕이 순금장식 성전 세웠던 성전이 불타고
제 2성전 스룹바벨 성전시대를 거쳐서
제 3성전 헤롯 성전은
다시 로마군에 의하여 소실되었던 곳이다.
"하늘과 하늘 위의 하늘이라도
주님을 모시기에 부족하거늘
제가 지은 이 성전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성전을 향해 기도할 때,
그 기도를 들어주시옵소서.".
이것은 기원전 950년경,
이스라엘의 지혜의 왕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고
감격에 차서 드린 기도다.
순금으로 장식, 장엄미가 넘 치는 솔로몬 성전이 세워진 곳은
예루살렘 성안의 동쪽 편에 있는 높은 지대였다.
성전이 세워진 후
이 지역은 '성전 산'(Temple Mount)이라고 불려 지게 되었고,
성도 예루살렘의 핵심부가 되었다.
솔로몬 왕이 세운 성전은
이스라엘 최초의 성전으로 그들 신앙의 중심 지요,
자부심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이 성전은 건축 된지 4백년을 넘기지 못하고
유다왕국의 멸망과 함께 파괴되는 비운을 맞았다.
기원전 6세기 초,
바벨로니아제국의 군대는 예루살렘을 침략하여
도성 을 불질러 초토화시켰다.
이때 성전도 완전히 소실되었다.
성전이 파괴 되는 과정에서
성전 안에 안치되어 있던 법궤(성궤)는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까지 이 문제는 역사의 미스터리로 남아
많은 이야기의 소재가 되고 있다.
유다왕국 멸망 후,
유대인들의 역사는 바벨론 포로생활로 이어졌다.
그러나 역사에 영원한 제국은 없는 법이다.
유다왕국을 멸망시킨 바벨로니아도
신흥세력인 페르시아 제국에게 무릎을 꿇었다.
페르시아제국의 승리로 유대인들은 포로생활에서 해방되었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폐허가 된 성전을 재건하였다.(기원전 516년)
성전 산 위에 세워진 이 '두번 째 성전'은
페르시아, 희랍, 로마시대를 거치는
5백여 년 동안 나라 잃은 유대인들에게 종교적, 정신적 지주였다.
기원전 37년,
헤롯이 유대 역사에 등장하였다.
악명 높은 폭군 헤롯은
자기에게 등을 돌리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두 번째 성전을 헐 고 크고 화려한 성전을 새롭게 건축하였다.
이것이 '세 번째 성전'이며,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성전이기도 하다.
그러나 헤롯성전은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서기 1세기 중엽,
로마제국 통치에 항거하는 유대인들의 반란이 일어났고,
이를 진압하는 와중에서
로마군대는 성전을 불태워 파괴시키고 말았다.(서기 70년)
이후로 성전 은 다시는 재건되지 못하였고,
오직 성전 산의 서쪽편 축대의 일부가
'통 곡의 벽'으로 남아 그곳의 역사를 증언해주고 있다.
유대인들의 달력으로 '아브'(Av)달 9일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 날이다. 그것은 솔로몬성전과 헤롯성전이 파괴된 날이다. 비극적인 두 날이 일치 한다는 것은 단순한 역사적 우연일까? 오늘날도 그날이 돌아?으? 유대인 들은 하루종일 금식하고, 구약성경 '예레미야의 애가서'를 읽으면서 그 날의 역사적 의미를 반추한다.
성전 산의 모습은 서기 690년대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아라비아 반도에 서 일어난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아랍인들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성전 산 위에 그들의 대사원을 건축하였다. 오늘날까지 성전산 위에 우뚝 서 있어 예루살렘의 대표적인 건축물이 되고 있는 이 대사원은 정팔각형 건물에 황금색 둥근 돔(dome)이 특징이 다. 또한 모든 벽면이 정교한 기하학적 문양으로 장식되어 아랍 건축예 술의 백미로 평가된다.
사원 안으로 들어서면 중심에 있는 거대한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유 대교와 기독교 전통에서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곳이요, 이슬람교 전승에서는 마호메트가 승천할 때 마지막으로 밟았다는 거룩한 바위다. 그래서 이 대사원의 이름도 황금빛 나는 '돔'과 거룩한 '바위', 이 둘이 합해져서 '바위의 돔'(Dome of the Rock) 이 되었다. 이 아름다운 '바위의 돔'의 건축자는 모슬렘의 통치자 '알 말리크'였 다. 그는 벽면에 자기의 이름과 건축연도(서기 691년)를 새겨 놓았다. 백여년이 지난 후, 당시의 통치자 '알 마문'은 자신이 대사원의 건축자 로 역사에 남고 싶은 욕심을 냈다. 그는 알 말리크의 이름을 없애고 자 기의 이름을 대신 넣게 했다. 그러나 그는 건축연도를 고치는 것을 잊어 결국 역사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최근 '바위의 돔' 대사원은 새 단장을 하게 되었다. 요르단의 후세인 왕은 6백 50만달러의 사재를 내어 구리와 니켈 합금인 '돔'을 24K 순금으 로 씌우게 했다. 1993년 1월 시작된 공사는 15개월 동안 계속되어 1천 2백장의 얇은 순금 판이 '돔' 위에 입혀져 글자 그대로 '황금의 돔'이 되었다.
필자가 93년 1월에 예루살렘을 방문했었는데 그 때가 바로 황금돔 성전을 수리하고 있었다. 과거 이스라엘의 성전이 있던 '성전 산' 위에 오늘날에는 이슬람교의 '바위의 돔'이 서 있다는 사실은 파란 많은 예루살렘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일부 과격한 유대인들은 이 대사원을 폭파시키고 그곳에 성전을 다시 세우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거룩한 땅 '성전 산'에서 종교적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만약 예루살렘의 황금 돔 성전이 파괴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면 우리는 세계역사에 가장 충격적인 사건을 목도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될 때는 중동에 큰 재앙이 임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서는 아무도 그 황금돔 성전이 언제 어떻게 될는지 예측을 못하고 있다.
구약성경 창세기에는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가 아들 낳기를 기다리다 지친 나머지 서로 짜고서 이집트인 여종인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이란 아들을 낳았다. 하갈이 아이를 잉태하자 여주인 사라를 괄시하기 시작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부부가 제멋대로 결정하여 낳은 이스마엘을 ■약속의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아브라함이 100세 되는 해 사라를 통해 이삭이라는 아들을 낳게 하셨다. 두 이복 형제가 자라면서 형인 이스마엘이 동생인 이삭을 자주 구박하자 이를 지켜보던 사라는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 모자를 사막으로 내쫓아버린다.
그로부터 4000년이 지난 현재. 아브라함과 사라가 내린 결정의 후유증은 이스라엘(이삭)과■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아랍국가■(이스마엘)의 피비린내 나는 대결로 이어지고 있다. 성경과 코란에 의하면 이삭의 자손이 이스라엘 민족이고 이스마엘의 자손과 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의 자손들이 아랍민족이다.
더 나아가 최근 예멘에서 발생한 미국 함대나 영국문화원에 대한 회교 과격 무장단체의 테러에서 보듯 ■유태교와 기독교 문명■대■이슬람 문명■의 대결 양상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2000년 10월 13일까지 사망자만 105명을 기록하고 있는 이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충돌은 원인이 결과를 낳고 그 결과는 또 다른 원인으로 변해, 더욱더 악화된 결과를 빚는 악순환에 휘말리고 있다.
12세 팔레스타인 소년이 이스라엘 군인의 총에 맞아죽는 장면이 TV 로 온 세계에 방영되자 팔레스타인은 전세계의 동정을 얻었으나 이번에는 요르단강 서안의 자치도시인 라말라에서 팔레스타인 시위대들이 이스라엘 군인 3명을 집단 린치하여 죽인 뒤 그 시체를 차에다 매달고 끌고 다니는 모습을 연출했다. 이에 격노한 이스라엘은■제한된 행동‘이란 단서를 달긴 했지만 라말라에 대한 헬리콥터 미사일 공격을 단행했다. 그 분쟁의 끝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사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이러한 형태의 갈등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번 분쟁은 예전과는 조금 다르다. 종전에는 영토분쟁의 성격이 짙었다면, 평화협상의 막바지에서 일어난 이번 유혈사태는 종교분쟁의 성격이 가미되고 있다. 그럭저럭 진행되어 오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협상이 종교 성지인 예루살렘 구 시가지(Old city)와 그 내부의 성전산(Temple mount) 주권 문제에 부닥치면서 대 폭발을 예감케 한다.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비교가 안 되는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아랍국가들과 전세계 이슬람교도들의 후원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2000년 10월13일 인도네시아의 무슬림 여성들까지 자카르타에서 ■지하드(聖戰)) 촉구 및 이스라엘 타도 결의대회■를 열고 시가행진을 했을 정도이니 인근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리비아, 이라크 같은 국가들이야 대 이스라엘 전쟁 분위기로 고조된 것은 물론이다.
반면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는 물론이고 정통 유태교를 지키겠다는 생각으로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다는 마지노선을 그어놓고 있다. 양측의 대결은 이렇게 정치와 종교가 뒤얽혀 좀체 그 해법을 찾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무엇이 중동평화를 가로막는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그리고 국제정치의 몇 가지 측면에서 문제점을 살펴보아야 한다.
무엇보다 이스라엘 내부의 극우파 정당과 극우파 종교인들을 첫손에 꼽을 수 있다. 200년 10월의 유혈사태도 이스라엘의 야당인 우파 리쿠드당의 아리엘 샤론 당수가 지난 9월 28일 성전 산에 있는 회교 3대 성지인 ■알 아크사 사원■을 전격 방문하면서부터 비롯됐다. 보통 독실한 유태교인들은 성전 산에는 올라가지 않고 성전 산을 서쪽 모퉁이에서 떠받치고 있는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는 것으로 그친다.
성전 산에는 2개의 회교 사원이 있는데 하나는 마호메트가 바위를 딛고 천상여행을 했다는 전설에 따라 서기 691년에 지어진 ‘바위 돔’이고 또 하나는 코란에서 ‘아득히 먼 사원’이라고 언급되어 있다고 회교측이 주장하고 있는 ‘알 아크사 사원’(십자군 전쟁 당시에는 교회로도 사용되었다)이다. 이중 ‘바위 돔’ 성전이 서 있는 자리는 주전 950년경에 솔로몬이 제 1성전을 세웠던 곳인데 주전 586년 느부갓네살 왕에 의하여 완전히 파괴되었다가 다시 포로에서 돌아 온 스룹바벨에 516년에 재건했다가 그 후 다시 500년이 지나서 헤롯 왕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지었었다. 헤롯은 주전 19년부터 성전을 수리하게 시작해서 주후 65년에 가서야 완공했으니까 무려 84년이나 걸려서 성전을 건축했었다. 어느 날인가 예수님께서는한창 건축 중이었던 그 성전 앞을 지나시면서 날이 이르면 돌위에 돌 하나 첩놓이지 않고 다 무너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말씀하신대로 헤롯이 건축한 성전은 준공한지 불과 6년만에 로마의 장군 티투스에 의하여 무너지고 말았다. 그 때가 주후 70년이었다. 그 옛날 하나님의 성전이 서 있던 곳이 지금의 황금 돔 성전이 서 있는 장소와 일치하거나 아니면 가까운 위치인 것으로 알려져 유태교인들은 아예 성전산에 올라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칫 잘못하다가 성전 내부에서 오직 대제사장 혼자만 제사를 지내려고 들어가던 지성소(至聖所, Holy of the holies)가 있던 자리를 밟을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알 아크사 사원은 ■바위 돔■에서 남쪽으로 50m 가량 떨어져 있어 지성소가 있던 자리를 밟을 확률이 ■바위 돔■보다는 적지만 역시 성전산에 자리잡고 있어 유태교인들이 거의 가지 않는다.
유태교인들은 궁극적으로 성전산을 완전히 재탈환하여 그곳에 성전을 재건하는 것을 꿈으로 여기고 있지만, 이스라엘 정부는 종교 분쟁을 막기 위해 일찍이 성전 산의 관할권은 회교측이 갖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런데 아리엘 샤론 당수가 평소 자신들의 관행을 뒤집고서 알 아크사 사원을 굳이 들른 것은 그 방문 자체에 하자가 있는 것이 아니지만, ■이스라엘측이 성전 산을 무력으로 빼앗아 여기에다 유태교 성전을 재건하려 한다■는 팔레스타인 및 이슬람 측의 평소 불안감을 강하게 자극시켰고, 결국 이번 유혈사태의 뿌리가 됐다.
사실 이스라엘 국민들 중엔 생각보다 종교적인 인구는 많지 않다. 오래 전부터 내려온 유태교 관습만 지킬 뿐이다. 그런데 검은 옷에 검은 모자를 쓰고 다니는 ■하시딤■을 비롯한 정통파 유태교인들과 이런 극우 종교세력을 바탕으로 하는 리쿠드 당과 샤스당 등은 애당초부터 팔레스타인 사람들과의 공존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들은 이스라엘 의회(크네셋)에서도 의석이 과반수에 이를 정도로 정치적인 파워가 크다.
극우파들은 1993년 오슬로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합의를 통해 팔레스타인 자치원칙을 준수하자는 내부 움직임에 제동을 걸기도 했고, 결국 전임 네타냐후 정권은 동 예루살렘에다 일부러 유태인 정착촌을 확장하면서 양측의 긴장을 높?? 나갔다.
지난 1995년 아랍 측과의 평화협상을 주도하던 이츠하크 라빈 총리의 암살 역시 극우파 유태교 청년이 저지른 행동으로, 세계는 극우파 유태인들의 과격한 입장과 행동을 우려하고 있다.
극우파 유태인들은 예루살렘 시내에서 ■이슬람교는 메카로 가라, 기독교는 로마?? 가라, 예루살렘은 유태인의 것이다■라는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이기도 한다.
그래서 이들로부터 회교뿐 아니라 기독교 국가들에게도 눈총을 받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회칠한 무덤이요 위선자들■이라고 질책한 바리새인들의 후예가 이들이라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시각이고, 따라서 상당수 서방 기독교 단체들은 오히려 기독교에 개방적인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원에 더 주력하기도 한다. 사실 예루살렘과 갈릴리 지방을 여행하다보면 이스라엘 사람들보다는 아랍 사람들이 기독교도들인 우리들에게 훨씬 더 호의적인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다
반면에 유태인 극우파 세력은 회교는 물론 기독교와의 대화도 단절할 정도로 이스라엘을 더욱 더 강경하게 몰고 가고 있다.
최근 리쿠드당의 아리엘 샤론이 정권을 잡았다. 극우파의 정치적 파워가 만만치 않다. 샤론은 노동당의 에후드 바라크 총리마저 에게 ‘비상연정에 참여해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워낙■비둘기파■로 꼽히던 바라크로서는 처음에 수락하는 것 같이 하더니 예상대로 물러서고 말았다.
이스라엘 내부적으로는 국민의 20%에 이르는 아랍계 주민들의 불만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도 과제다. 이들은 국적이 이스라엘이지만 병역의무가 없는 대신 웬만한 곳의 취업이 제한되기 때문에 팔레스타인인 못지 않게 이스라엘 정부에 대한 불만이 강하다. 이들은 주로 예루살렘 구시가지에 거주하고 있는데 점차 팔레스타인측과 손을 잡고 테러나 시위를 일으키는 배후로 등장하고 있어 이스라엘 당국의 고민이 커지고 있다.
중동평화가 힘든 요인은 팔레스타인측에도 있다. 역사적으로 보아 팔레스타인은 자신들의 나라를 가져본 적도 없고 그런 노력도 없었다. ■어느 날 유태인들이 나타나 우리를 몰아내고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세웠다■고 이들은 호소해왔다. 하지만 유태인들이 19세기 말부터 세계 각지에서 선조들의 땅인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면서 땅을 개간하고 텔아비브라는 유럽식 신도시를 조성하는 등 국가 재건을 위한 작업을 차근차근 진행시켜오는 동안 이들은 오스만 투르크와 영국의 식민통치에 순치되어 버렸다. 자신들 나름의 국가형성이란 것은 생각지도 않았으며 당연히 그런 시도도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이스라엘이란 국가가 설립되고 물적 기반으로 생각하던 요르단이 ■나 몰라라■하면서 공중에 붕 떠버린 상태가 된 것이다. 뒤늦게 사태를 깨달았을 즈음에는 무장 테러만이 유일한 저항수단이 되고 말았다.
수십년에 걸쳐 팔레스타인이 미국 성조기와 이스라엘 국기를 불태웠지만 그런 모습은 오히려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여론을 악화시켜 자신들에 대한 국제적 원조나 후원을 차단시키는 부작용을 낳았다.
가령 이스라엘이 잘못할 경우 이를 국제여론에 호소하면 훨씬 유리하게 상황이 돌아갈 수 있는데도 ■지하드(聖戰)라는 회교 교리에 입각하여 오히려 이스라엘보다 더 과격한 행동을 하는 바람에 국제여론을 180도 돌려버린 경우가 허다하다.
이번에도 12살짜리 팔레스타인 어린이가 이스라엘 군인의 총에 맞아 국제여론이 이스라엘을 비난하고 팔레스타인을 동정하는 쪽으로 갔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라말라에서 길을 잘못 찾아든 이스라엘 군인 3명을 붙잡아 잔인하게 린치와 사격을 가해 죽이고 시체까지 차에 매달아 끌고 다님으로써 세계의 동정론을 상실해 버렸다.
팔레스타인의 고질적인 문제는 회교에서 말하는 ■샤히드(순교자)■라는 미명하에 청소년들이 이스라엘 군을 향해 돌을 던지는 등 위험한 행위를 하는 것을 일종의 통과의례로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AP통신에 따르면 목숨까지 담보로 하는 이들의 행동은 이스라엘에 대한 자발적인 적개심 때문인 경우도 있지만 일부 청소년들은 ■왕따■당할 것을 우려해서 그런 행동에 나선다는 것이다. 희생자들에 대한 지나친 영웅화가 이들의 철없는 행동을 부추기고 있다.
요르단강 서안에 있는 나블루스 마을의 한 주민은 2000년 10월 2일 여섯살짜리 아들 무하마드의 성화에 못이겨 거의 매일 총격전이 벌어지는 인근 성지 ■요셉의 무덤■ 부근에 함께 다녀와야만 했다. 무하마드는 매우 우쭐했는데, 그의 부모는 ■아들이 총에 맞아 죽을 경우를 대비해 장례식용 포스터를 만들 수 있도록 사진까지 몸에 지니고 갔다온 것을 알았을 때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고 AP통신은 전했다.
특히 일부 팔레스타인 과격파 부모들은 자식들을 직접 가두시위로 내보낸다. 가자 지구 나트자림의 이스라엘 군기지에서 10월 4일 빗발치는 총알을 뚫고 폐쇄된 전망탑에 올라가 이스라엘 국기를 내리고 돌아온 팔레스타인 소년 아부 다카(16세)는 그날의 행동이 TV전파를 타면서 단번에 유명인사가 됐다. 영국의 BBC도 2000년 10월 14일 이런 상황을 현장 사진으로 보여주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부추겨 방패막이처럼 내세우고 그 아이들이 죽으면 더욱더 저항 열기를 고조시키는 게 문제가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여기에 팔레스타인 당국이 하마스나 헤즈볼라 같은 무장 과격파 회교단체들을 통제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그들과의 연대를 끊지 않는 점도 늘 이스라엘에게 명분을 빼앗기는 요소라는 지적이다.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은 갈수록 아랍세계에서의 위상이 약해지고 팔레스타인 내부의 여러 정파에 대한 통제력도 상실하고 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아라파트는 지난 96년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공동으로 노벨평화상을 받고 미국 및 이스라엘과 잦은 접촉을 가지면서부터 팔레스타인과 아랍내부에서■비겁한 타협자■■자신의 국제적 명성에 안주하는 배신자■라는 비난까지 듣고 있다. 앞으로 아라파트의 리더십이 계속 약해질 경우 중동갈등은 더욱 커지리라는 전망이다.
국제정치적으로 중동평화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요소는 많다.
우선 팔레스타인에 대한 아랍과 이슬람 국가들의 ■립 서비스■(Lip service)다.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은 최근 유혈사태가 벌어지자 ■움마(국가를 초월하는 범 이슬람 종교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면서 이스라엘 측에 맹 비난을 퍼붓고 마치 힘을 모아 전쟁을 일으킬 것처럼 나서고 있다. 하지만 이집트와 요르단을 제외하고는 한번도 팔레스타인의 평화협상 후원에 나선 적이 없을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에 대한 경제적 지원은 더더욱 하지 않고 있다. 자기들 사정이 더 급하기 때문이다.
현재 팔레스타인의 경제는 이스라엘에 종속되어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상당수가 이스라엘 내부로 출퇴근하면서 노무직으로 생계를 유지해왔는데 만일 이스라엘이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를 오랫동안 봉쇄하고 양측의 교통로를 통제하면 팔레스타인의 경제는 심각한 국면을 맞게 된다. 당장 식수난부터 심각하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유랑에 직접적인 책임을 져야 할 요르단의 경우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자기 나라로 넘어 올까봐 경계하면서 오히려 이스라엘이 아닌 팔레스타인과 국지전을 벌이기도 했고 최근에는 ■성전 산은 팔레스타인뿐 아니라 요르단에게도 주권이 있다■며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집트는 1973년의 10월 전쟁 이후 이스라엘과 우호적인 관계에 들어가면서 그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상당수 원조액까지 받아 입이 막힌 상태이고, 시리아는 소련의 붕괴로 군사력에서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으며, 이라크는 미국의 직접적인 통제와 견제를 받아 꼼짝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랜 내전으로 풍비박산이 되고 있는 레바논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주변에서 어느 누구 하나 팔레스타인을 도와주지 않으면서 이스라엘과의 싸움만 부추기고 있다. ■이스라엘과 직접 싸우기에는 우리가 너무 부담이 된다. 우리가 우리 나라 수도에서 가두시위를 벌이는 등 옆에서 싸움 부채질은 해주겠다. 그러니 직접 이스라엘과 싸우는 것은 팔레스타인 너희가 맡아라■는 식이다.
하지만 현역 18만 명에 예비군까지 합치면 60만명의 병력에다 세계 최고의 최첨단 무기를 자랑하는 이스라엘에 맞서 소총만 가진 3만명 정도의 경찰과 보안군, 6000명의 자살폭탄 특공대 정도를 갖고 있는 팔레스타인이 전면전을 벌이기란 처음부터 얘기가 되지 않는다.
한편으론 서방 쪽도 한 목소리를 내는데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는 중동정책에 불만을 갖고 있는 프랑스 측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평화협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측을 부추긴 사례가 많았다. 이스라엘로서는 프랑스가 눈에 가시다. 이번에도 프랑스는 대통령 궁의 대변인 논평을 통해 아리엘 샤론의 알 아크사 사원 방문을 맹 비난했으며 전국적으로 반 이스라엘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런 프랑스의 외교정책 때문에 2년 전 시라크 프랑스 총리가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가 봉변을 당하기도 했으며, 2000년 10월 10일 파리의 미국대사관저에서 열린 휴전협상에서도 시라크 대통령이 바라크 총리를 비난하다가 바라크 총리가 회담장을 뛰쳐나갔다는 외교가의 뒷 얘기가 나올 정도다. 서방국가들의 의견이 통일되지 못하는 것도 양측의 갈등을 진정시키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