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신성리 갈대밭 사진 달새님/글 이종원 최고 흥행기록을 세웠던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보름달만 덩그러니 떠오른 어둑한 밤에 북한군 송광호와 남한군 이병헌이 흔들거리는 갈대밭속에서 만나는 장면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영화속 배경이 되는 장소가 금강하구둑의 신성리 갈대밭이다. 갈대숲을 거닐면서 나도 영화속 주인공이 되지 않을까 싶어 그 곳을 찾았다. 하긴 군대시절 "배달의 기수"에서 배고픈 북한병사로 나온 적이 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 아닐까? 지금은 뱃살이 삐져 나와 배부른 장교가 어울릴 지도 모른다. 대천휴게소 경부고속도로를 타면 산으로 힘찬 도로가 멋지게 뚫린 추풍령 휴게소를 들리고, 중앙고속도로에 올라타면 적성산성과 적성비등 소중한 문화유산이 있는 단양휴게소를 들리게 된다. 서해안 고속도로 역시 대천휴게소가 기다리고 있다. 파라솔에 앉아 음미하는 커피 향은 유난히 진하다. 서해 갯벌의 짠 맛이 커피향과 어우러져서 오묘한 맛을 내는가 보다. 대천휴게소는 서해 바다를 관망하기에 더 없이 좋다. 바다에 오면 어머니 품안만큼이나 포근하다. 관광안내소에서 서천, 보령 지도를 챙겨 넣고 뿌듯한 마음을 가지고 출발 금강 철새조망대 서천IC에서 한산에 가는 것이 휠씬 빠르지만 군산까지 내달았다. 금강하구둑을 건너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금강 하구는 가창오리등 고니등 매년 30여만마리의 철새가 날아드는 곳이다..금강 철새조망대는 지하 1층, 지상11층, 높이 55m로 내부 면적만 1157평에 이른다. 주 관망대는 9층과 11층에 자리 잡고 있다. 멀리 군산 앞바다에서 금강 중하류 웅포지역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특히 10층은 바닥이 서서히 회전하는 레스토랑으로 식사를 하면서 금강 주변을 조망할 수 있다. 금강하구둑 군산에서 금강하구둑을 넘으면 충청남도가 시작된다. 둑을 넘으며 우측에 철새 전망대가 놓여 있다. 군산과는 달리 갈대가 자라고 있어 사진찍기 더없이 좋은 장소다. 신성리 갈대밭 강변쪽으로 내 달리니 기어코 둑방이 가로 막고 있다. "저 너머에 갈대밭이 펼져지겠지 " 잔뜩 기대를 안고 엉금엉금 올라갔다. 아-끝없이 펼쳐진 갈대밭. 폭 200미터의 갈대밭이 1km이상 뻗어 있다. 면적만 7만평이 넘는다고 한다. 실은 순천만 갈대밭을 생각하고 갈색 바다가 펼쳐질줄 알았다. 그런데 생기발락한 초록빛 갈대가 펼쳐져 있어 무척 당황했다. 가을이면 갈색으로 옷을 갈아 입을 것이다. 낙조가 드리워질 때 황금색이 출렁이는 갈대밭을 상상해본다. 갈대숲에 들어갔다. 2미터가 넘는 갈대가 키를 뽑내며 하늘을 향해 올라가 있다. 신발에 진흙이 잔뜩 묻을 줄 알았더니 그렇지 않았다. 서천군에서 자갈을 깔아 놓아 산책하기에 그만이다. 산책길도 여럿 있다. 마치 미로 찾기 하는 것처럼 빠져 들어가면 헤어나기 힘들다.시를 읽으면서 거닐 수 있는 갈대숲, 물가 쉼터, 나무다리, 흔들다리등 다양한 테마 숲길이 조성되어 다양한 갈대체험을 할 수 있어 가족산책코스로 좋다. 물론 연인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장소다. 키보다 훨씬 높은 갈대숲을 거닐다가 숲으로 들어가 버리면 여지없이 키스 세례를 받을 수도 있다.^^ 애절하게 흐르는 금강물과 어우러져 한폭의 풍경화를 연출한다. 강둑에 앉아 흔들리는 갈대만 바라봐도 시간이 강물저럼 흘러가버린다. 거기다 힘센 바람까지 횡하니 내리 불면 갈대는 집단 가무로 뒤바뀐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가 서로 비벼대는 소리 역시 참 오묘하다.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작은 속삭임이리라. "서걱서걱"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신경림의 시 <갈대>- 신성리 갈대밭 가는길 서울-서해안고속도로-서천IC-부여강경방향 29번국도-한산방향-한산모시관-한신시내-우회전-신성리-갈대밭 입장료/주차비 없음 (주차장은 협소함) | 월남 이상재 생가 한산시내를 지나 613번 국도를 타고 가면 우측에 종지리마을로 들어가는 진입로가 나온다. 이곳에서 200여미터 들어가면 월남의 생가가 나온다. 종지리마을은 월남의 고향마을이다. 그는 이곳에서 태어났고 18세까지 전통 유교교육을 받았으며 주미공사서기, 의정부 참관등을 역임했으며 1896년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민족의 수난시대를 살았던 것이다. 주권회복을 위해 평생을 바친 선생을 생각해 본다. 산세를 바라보았다. 과연 큰인물이 나타날 터다. 오밀조밀 모여사는 집들이 그림속에 나오는 마을같이 정겨워 보였다. 집은 텅 비워있다. 사람들은 밭으로 들로 나간 것이다. 강아지만이 파수꾼이 되어 컹컹 내짖고 있다. 백제부흥운동-건지산성 건지산성은 백제가 패망하자 왕족 복신과 승려 도침등과 함께 주류성(지금의 건지산성) 에 군사를 모아 3년 동안이나 부흥운동을 했었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국권을 회복하고자 복수의 칼을 갈았지만 아쉽게도 실패였다. 또 다시쓰라린 패배의 맛을 본 민초들은 소곡주로 한탄의 세월을 보냈는지 모른다. 산 정상에 정자가 하나 놓여 있는데 이곳에서 바라본 경치가 일품이다. 금강과 서해 그리고 서천의 너른 들판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봉서사 입구에 주차하고 200미터 올라가야 한다. 한산모시관 모시만큼 손이 많이 가는 작업도 없을 것이다.모시풀을 껍질을 벗겨내고 태모시를 만들고 물에 다섯 번을 적셔 햇볕에 말랜후 이로 일일이 쪼개내어 모시째기를 하고 쩐지라는 버팀목에 걸어 놓고 한올씩 빼어 무릎위에 맞이어 손바닥으로 비벼 연결하고....그 외에도 여러 직조과정을 거쳐 한산의 세모시가 탄생되는 것이다. 모든 공정이 기계가 아니라 수작업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한산모시는 인간내음이 풀풀 묻어나고 있다. 숙련된 장인이 꼬박 1주일 걸려야 모시 한필 손에 쥘 수 있을 정도로 힘겨운 노동력이 필요하다. 화려하고 값싼 섬유가 쏟아져 한산모시는 그 명맥만을 유지했지만 천년을 세월을 한결같이 버틴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 모시옷 한벌 가격이 50만원을 호가하지만 그 힘든 공정을 알게 되니 그 다지 비싸게 느껴지지 않는다. 근사한 예술품을 몸에 걸치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흐믓한 일인가? 한산 모시는 인체에 전혀 해가 없는 천연섬유로 만든다. 백옥같이 희고 잠자리 날개처럼 가볍기 때문에 여름철 옷감으로 최고로 친다. 깔끔하면서도 까칠까칠한 촉감은 고결한 기품을 더해준다. 한산모시관은 모시풀 재배부터 태모시 만들기부터 모시짜기까지 모시의 전 제작과정을 볼 수 있으며 서천의 농경 유물까지 전시하여 조상의 슬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전수교육관과 길쌈놀이 전수관, 전통공방, 모시각, 소곡주제조장등 한산의 다양한 문화체험을 할 수 있게 했다. 모시날기 과정..촉촉한 습기를 위해 콩가루와 소금을 바른다. 중요 무형문화재 제 14호 방연옥씨 어찌나 동작이 빠르던지 카메라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다. 빠른 발놀림과 정확한 손놀림이 합치되어야 모시가 끊어지지 않는다. 작업하는 동안에는 아무 말씀이 없다. 노동이 곧 수도다. 가느다란 실을 엮어내며 집합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구도자의 모습만큼이나 경건하다. "하루에 몇시간이나 일해요?" " 쉬엄쉬엄 일해유." 수줍게 미소짓는 모습이 전형적인 충청도 아낙이다. 하긴 장인에게 노동의 강도를 물어보는 것처럼 우매한 질문이 어디있을까? 선녀의 옷처럼 가볍고 견고한 세모시를 만들어내는 것이 장인이 할 일인 것을.... 수만번의 손놀림, 발놀림으로 만들어낸 세모시 옷이다. 화려함은 도무지 찾을 수 없다. 기품있고 우아한 자태만 보일뿐이다. 어쩌면 백제 유민의 통한의 눈물이 백옥같은 빛깔을 만들어냈을 지도 모를일이다. 나라 잃은 설움에 찌는 듯한 더위까지 더해졌다면 이 땅의 민초들을 화병에 죽어갔을 것이다. 그나마 시원한 모시옷 덕에 기나긴 여름을 이겨냈을 것이다. 일제때 한산의 모시는 보부상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이 땅의 민중들이 흰 옷을 입으면서 백제의 유민마냥 국권회복을 꿈꾸었을 것이다. 한 올 한 올 이로 뽑아내어 한산의 모시에는 침과 땀방울이 서려 있다. 이 땅에 살아있는 예술의 경지를 나는 세모시에서 발견해 낼 수 있었다. 한산모시관 이권식씨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한산모시의 전부를 구수하게 설명해주신다. 모시풀까지 뽑아 껍질 벗기는 과정부터 세모시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자세히 알려주신다. 그는 진정 서천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본인이 직접 만든 서천지도까지 관광객에게 나눠주고 있다. 지도에는 한산의 명소, 맛집, 숙소, 거리, 심지어 과속카메라 위치까지 기재해 놓아 놀라게 만든다. "중국산 모시가 한산 모시로 둔갑하여 유통되는 것이 걱정입니다. 한산모시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어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모시를 사랑하고 한산을 아끼는 소중한 분들이 있기에 천년의 모시 기술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한산 모시관 여행정보 1) 한산 모시관 가는법 서울-서해안고속도로-서천IC-부여강경방향 29번국도-한산방향-한산모시관 입장료 어른 1천원/중고생 5백원/초등생 3백원/30명이상 단체 어른 5백원 주차비 없음 2) 한산 모시 5일장 매달 1일,6일 장터가 열린다. 유통되는 생산량의 80%가 한산읍내에서 이루어진다. 4월-9월에 성시를 이루며 이슬이 많은 새벽시간에 거래된다. 3) 문의 서천군청 문화관광과 042-950-4226 한산모시관 042-624-4635 | 한산 소곡주 한산소곡주라는 술 이름은 추수가 끝난 뒤 여인들이 목욕제계하고 소복으로 갈아입은 후 정성을 다하여 빚었다 하여 소곡주라 불리고 있다. 한산소곡주는 맛과 향이 뛰어나 한번 맛을 보면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모른다고 하여 일명 ‘앉은뱅이술’이라고 전해지는 술이다. 예로부터 한산소곡주와 관련하여 전해오는 세가지 일화가 있다. 첫째는 백제 멸망 후 백제유민(百濟流民)들이 주류성에서 나라를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해 소곡주를 빚어 마셨다 는 것이고 두 번째 일화는 조선시대 과거길에 오른 선비가 한산지방의 주막에 들렀다가 소곡주의 맛과 향에 사로잡혀 한두 잔 마시다가 급기야 과거날짜를 넘겼다는 것이고, 세 번째 일화는 찹쌀을 빚어 100일 동안 익혀야 소곡주가 되는데 이때 며느리가 술맛을 보느라고 젓가락으로 찍어 먹다보면 저도 모르게 취하여 일어서지도 못하고 앉은뱅이처럼 엉금엉금 기어다닌다고 하여 ‘앉은뱅이술’이라고도 한다는 일화다 한산소곡주의 색은 연한 미색이 나고 단맛이 돌면서 점성이 있고 향취는 들국화에서 비롯된 그윽하고 독특한 향을 간직하고 있다. 들국화의 일반 잡균에 대한 강한 항균력으로 미곡이 발효된 냄새가 전혀 없고 부드러운 맛이 나는 최고급 술이다 매년 종묘제례때 쓰이는 술이 소곡주일 정도로 권위가 있는 술이다. 모시관 앞에 소곡주 공장이 자리잡고 있으며. 공장을 견학하려면 사전허가를 받아야한다. 한산 모시관 옆에 판매점이 있다. 1.8미터 1병에 2만 4천원 문의: 042-950-2900 나장연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