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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극좌파가 본 진중권 – 『시칠리아의 암소』 비판
진중권은 복거일의 영어공용화론을
비판한다.
첫째, 어차피 산업사회에서 제일 중요한 정보가치를 지니는
자연과학의 언어는 영어가 아니라 인공언어, 수학언어, 형식언어다. 그건 이미 국제어다. 그리고
자연과학의 텍스트들은 비교적 간단한 문법구조를 갖고 있다. 경영학을 비롯한 그 밖의 돈 되는 학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새로운 정보를 찾을 만큼 전문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겐 언어의 장벽이란
별 문제 될 게 없다.
둘째, 인터넷 시대에 정보의 문제는 언어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잖아도 한국어로도 차고 넘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정보를 검색, 압축, 요약하여 신속하게 전달해주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 이건 전국을 영어학원으로 만듦으로써 해결할 언어학적 문제가 아니라, 기술적으로
해결해야 할 정보공학적 과제다. 영어 잘 하면서도 얼마든지 무식하고,
천박하고, 아서왕 시대의 영국인처럼 한없이
몽매할 수 있다.
셋째, 수십 년 후면 아마 자동번역이 상당한 진전을 이룬
상태일 게다. 소설이나 시는 몰라도, 최소한 돈 되는 정보들은
몇 초 만에 번역이 되어 스크린 위에 뜨게 될 것이다. 기술발전의 무한한 가능성에 미리 한계를 그을
필요는 없다. 전국민을 들들 볶아 모국어를 영어로 대체했는데, 이
프로그램이 시장에 나왔다고 해보라. 얼마나 허탈하겠는가? 그럼
복거일, 몰매 맞는다.(111쪽)
나는 복거일의
생각이 정확히 뭔지도 모르고 동의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비효율적인 한국의 외국어 교육은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진중권의 비판은 엉터리다.
진중권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정보를 찾을 만큼 전문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들” 즉 엘리뜨에게는 언어의 장벽이 그리 문제가 안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일반 대중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 “자연과학의 텍스트들은 비교적 간단한 문법구조를 갖고 있”으며 “경영학을 비롯한 그 밖의 돈 되는 학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 이것도 보통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커다란 장벽이다. 위의 글을 읽다 보면 진중권이 ‘전문적인 공부는 엘리뜨만
하면 되고 대중들은 대충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인터넷 시대에 정보가 홍수를 이루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작
가치 있는 정보는 인터넷에 없거나 외국어로 되어있는 것을 진중권이 모른단 말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 되는 정보들”은 인터넷에 올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터넷에 올리면 공짜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가치 있는 정보는 책으로만 나오며 더 가치 있는 정보는 산업 기밀이기 때문에 아예
공개를 안 한다.
자동번역이
해결해 준다고? 물론 “기술발전의 무한한 가능성에 미리 한계를 그을 필요는 없”지만 그것은 먼 훗날의 얘기다. 자동번역의 완성은 인공지능의
완성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번역은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다. 상당히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하는 박사들도
번역을 엉터리로 하는 것을 보라.
나는 선진국의 여러 좋은 면을 알리고 우리도 그렇게 하자고
하는 것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국가보안법이 없으며 대학이 평준화된 프랑스, 학비가 공짜인 독일, 의료가 공짜였던 영국 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진중권은 선진국의 좋은 점을
과장하고 있다.
영국의 묘지에 가면 묘비에 죄다 “Sir”라고 써 있다고 한다. 조국을 위해 귀족 자제들이 남보다 앞장서 싸웠다는 얘기다. 하지만 한국의 보수층은 어떤가? 툭하면 ‘안보’를 선전하던 신문사 사주 가족의 병역 면제율이 일반인의 열 배란다. 프랑스에는 항독 레지스탕스를 한 드골이 있어, 나치에 협력한 자들을 제거하고
민족주의의 전통을 세웠다. 하지만 우리의 보수는? 민족을
배반한 친일파의 사상적 후손이다. 제대로 된 보수는 국가공동체나 사회공동체를 위해 희생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정신을 갖고 있다. 근데 우리의 보수는? 제 기득권은 죽어도 양보하지 못하는 분들이다.(105쪽)
영국의 지배
계급에게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있었다고? 그건 1차 세계 대전 이전에나 들어맞는 얘기다. 그 전의 전쟁에서는 사상자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귀족들이 너도나도 군대에 갔다. 그것도 나라에 봉사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끝없이 벌어진 식민지 전쟁에서
뭔가를 챙기기 위해서였다. 1차 세계 대전 때에도 지배층이 많이 참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 전쟁이
몇 주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진국 지배자들이 노블리스 오블리제라고 떠벌리고 있는 것이 자선인데 그들이 자선을
하는 것은 회사 이미지를 위한 것이며 그들이 벌어들이는 엄청난 돈에 비하면 소위 사회에 환원하는 돈은 새 발의 피다. 또한 그들 역시 “제 기득권은 죽어도 양보하지 못하는 분들”이다. 그들이 양보를 했을 때에는 한국에서 1987년의
대투쟁과 같은 민중들의 거대한 투쟁이 있었을 때뿐이었다.
적어도 서구에서는 이제 동성애자를 사회적으로 차별하는 관행은 폐지되었다.(206쪽)
오늘날 서구에서 동성애는 그 자체로서는 더 이상 문제가 안 된다. 그저
동성애자들이 결혼할 권리, 혹은 아이를 입양할 권리에 관해 논란이 벌어질 뿐이다.(206쪽)
이런 식으로 따진다면 19세기의
유럽에서도 여성 차별은 그 자체로서는 더 이상 문제가 안 되었을 것이다. 그저 투표할 권리, 혹은 아이 취급을 당하지 않고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될 권리에 관해 논란이 벌어졌을 뿐이다.
선진국의 시민들은 파시즘이라는 바이러스에 대한 저항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시민들은 아직 ‘국민’이라는 국가주의적 이름 속에서 수백만 부를 동원한 극우언론의 이념공세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133쪽)
그리하여 프랑스는 2차
대전 후에도 알제리에서 식민지 전쟁을 벌였고 미국은 한국과 베트남에서 수백만을 학살했고 지금도 이라크에서 전쟁을 한다.
“목사의 집안에서 태어나 기독교
교육의 세뇌를 받으며 자라서 그런지 몰라도(272쪽)” 진중권은 기독교에 대해서는 너무나 관대하다. 진중권에 따르면
기독교계 일각의 광신적 행태는 아직 현대적 수준의 종교성에 도달하지 못한 한국 기독교의 문제점을 보여준다.(101쪽)
기독교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계 일각의 광신적 행태가
문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기독교를 대충 믿으라고 하지 않았다.
나를 따르려고 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백 배의 상을 받을 것이며,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마태복음
진중권이 보기에는 광신이지만 소위 광신자들은 성경 말씀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진중권은 동성애 억압에 일조하고 있는 개신교의 보수성을
개탄한다.
소돔과 고모라를 들먹이며 동성애가 죄악이라고 성토를
하고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는 개신교마저 이렇게 보수적이다. 정말
짜증난다. 자기들이 뭔데 신을 참칭하는가?(207쪽)
하지만 그들은 신을 참칭하지 않았다. 진중권 스스로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든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 레위기
라고 인용했듯이 성경에는 동성애자들을 반드시 죽이라고
나와있다. 나는 그들이 성경 말씀을 따르지 않고 단지 욕만 하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에는 관대한 진중권은
NL에 대해서는 한없이 야박하다.
하지만 달라졌어도 주사파 강철과 우익
그가 얘기하는 내용이 좌파적이냐 우파적이냐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가 어느쪽에 존재하든 그의 습속과 감성과 멘탈리티 자체는 변함없이 수구적이라는 것, 그 점을 지적하고 싶다.(24쪽)
진중권이 보기에는 경찰의 집요한 탄압을 받으며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NL과 조선일보나 따라다니는 NL 출신 배신자들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그런 식이라면 나찌에 협력했던 교황과 독재정권에 맞서 싸웠던 남아메리카의 해방신학 신부 사이에도 차이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누군가 ‘수령님은 인민의 대가리’라 떠들면, 나는 그걸 대체 어떻게 반박해야 할까?(18쪽)
가 카톨릭의
교황 무오류론에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또한
주체사상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잘난 사상이며,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저리 가라’이며, 그래서 전세계 인민이 따라
배우고 있다…… 세상에 이렇게 잘난 척 많이 하는 사상은 태어나서 처음 본다.(22쪽)
라고 하는데 “세상에 이렇게 잘난 척 많이 하는 사상” 또 있다. 기독교가 바로 그것이다.
그나마 NL이 기여한 부분, 즉 한반도의 긴장을 일으키는 미국과 남한 내의 극우 강경론자들에 대한 비판은 어디에 있는가?(27쪽)
라고 하는데 NL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 기여를 했다. 그들은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즉 국가보안법 폐지 등을 위해 싸웠으며 노동조합과 농민들의 싸움을 지지했다.
이 두 개의 극단이 우리 사회를 불행하게 만들어왔다. 주사파는
대중들의 건강한 정치적 ‘지향’을 볼모로 잡아 북의 외교적 입장을 대변하는 데에 급급해왔고, 극우파는 이 오도된 ‘표현’을 빌미로 대중들의 건강한 요구까지 불온시하며 잔인하게 탄압해왔다.(19쪽)
하지만 NL은 극단이 아니었다. 지금은
조금 달라졌지만 이전에는 PD가 항상 NL의 개량주의를 비판해왔으며
그것은 맞는 말이었다.
나는 한국의 많은 좌파들이 한심한 김일성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안타깝지만 북조선에서 호의호식하는 김일성주의자들과
남한에서 여전히 탄압받으면서 민주주의를 위해, 제국주의에 반대해서 싸우는 김일성주의자들을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들의 온갖 오류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했던 일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자기 의견을 말하고, 타인의 이견을 받아들이고, 상대와 토론과 논쟁을 하고, 거기서 협상과 타협을 끌어내는 실천적인
노하우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세대는 입으로는 민주화를 외쳤으나 민주를 습속의 형태로 몸으로 체득하지
못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게 바로 거대한 폭력 앞에서 우리 자신을 또 하나의 폭력으로 조직해야
했던 우리 세대의 한계다.(36쪽)
진중권은 마치 거대한 폭력이
노조원들이 짐승처럼 바닥에 죽은 듯이 엎드려 있고, 이
수평으로 가로누운 패자들의 시체(?)와 콘트라스트를 이루며 나 홀로 수직으로 선 자랑스런 정복자들이 있으니, 그 이름 백골단.(38쪽)
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타인의 이견”은 아무 때나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국가보안법을 유지하려는
자에게는 투쟁만이 있을 뿐이며 진중권 스스로도 아마 그들의 이견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대의제 간접민주주의는 시민의 참여라는 직접민주주의와 짝을 이루어야 한다. 그래야 국회의원이라는 이름의 공무원들이 국민의 뜻을 제대로 대의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시민단체들의 낙선운동은 우리의 대의제 민주주의를 교정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게 아니다. 그 자체가 대의제와 함께 우리 민주주의의 두 기둥을 이루는 것이다.(53쪽)
진중권은 낙선 운동을 과대평가하고 있다. 심지어 진중권이 보기에는 낙선 운동은 “그 자체가 대의제와 함께 우리 민주주의의 두 기둥을 이루는 것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낙선 운동이 없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돈과 총을 다루는 사람들 즉 사장과 장성들에게는 대의제 간접민주주의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진짜
세상을 통치하는 자들은 선출되지 않는다. 진중권 스스로도
썼듯이
이번 총선시민연대의 활동은 사실 정치적으로 보면 그리 위험한(?) 활동이 아니었다. 한국 정치의 구조적 문제를 건드린 것도 아니고 그저 부패한 정치가 몇몇의 인적 청상을 위한 활동에 불과했기
때문이다.(140쪽)
진중권에 따르면
80년대의
화두가 우리 ‘모두’의 평등을 위한 ‘민주주의’였다면, 90년대의 화두는
‘개개인’의 자유를 말하는 ‘자유주의’ 이념이었다. 90년대에는 어떤 대의 아래 함께 모여 싸운다는
생각은 낡은 것이 되었다.(52쪽)
80년대도 우리의 화두는 민주주의와 평등이었고 90년대에도
역시 그렇다. 오히려 1987을 지나면서 개개인의 자유는
상당히 신장되었지만 1997년 이후 빈부격차는 늘어가고 있다. 오히려
투쟁의 초점이 자유에서 평등으로 이동하고 있다.
어느 동물학자에 따르면 호모 사피엔스의 공격성은 초식동물의 뒤를 쫓는 사냥꾼의 그것이 아니라 외려
육식동물에게 쫓기는 사냥감의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베트남에서 민간인 학살에 가담했던
어느 병사의 말에 따르면 당시 한국군 병사들의 심리는 “언제라고 어디선가 총탄이 날아올지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 상황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이런 점을 볼 때 어쩌면 상상적 피해의식이 실질적 가해의 원인인지도 모르겠다.(73쪽)
인간의 공격성의 진화에서 중요했던 것은 인간이 사냥했던
동물 또는 인간을 사냥했던 동물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인간들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애인이 바람
피웠을 때, 다른 사람이 자신의 물건을 빼앗아 갔을 때, 다른
사람이 자신을 모욕했을 때, 옆 부족과 전쟁을 벌일 때 공격적으로 변한다. 인간의 공격성은 인간 사이에서 이해관계가 충돌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리고 베트남에서 민간인을 학살한 병사의 말을 100 퍼센트 믿을 필요는 없다. 아무 무장도 하지 않은 노인들과
어린이까지 잔인하게 학살한 이유를 자신이 느꼈던 공포로 설명하는 것은 변명일 뿐이다. 범죄자들은 누구나
핑계를 대며 그 핑계는 그저 핑계일 뿐일 때가 많다.
진중권에 따르면
역사적으로도 학살이 있었던 곳에는 종종 ‘악’에 대한 과도한 공포가 있었다. 가령
중세 말의 이단사냥과 마녀사냥은, 기독교 세계가 붕괴되는 가운데 곧 도래할 사탄의 왕국에 대한 공포가
집단 히스테리로 나타난 것, 말하자면 상상적인 악마에 대한 공포에서 실제의 인간에게 가한 대량학살이었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도 유태인에 대한 근거없는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74쪽)
가령 중세의 그 잔인한 마녀사냥은 사탄에 대한 공포, 나치의
대학살은 유태인의 세계 지배 음모에 대한 공포, 미국이 저지른 수많은 비인간적인 만행들은 공산주의자에
대한 공포, 한국군의 베트남 양민 학살은 어디에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적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리라.(80쪽)
그리고 그런 공포를 원시인의 공포로까지 추적한다.
공포는 인간을 문명 이전으로 되돌린다. 아니, 공포라는 것이 실은 원시인의 심리상태라고 할 수 있다. 공포는 이성을
잃게 만들고, 이성으로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인간은 자기보존을 위해 공포의 대상에게 가능한
한 최대한의 잔혹함을 보여주게 된다. 사실 인간의 문명은 이성을 통해 세계에 질서를 도입하여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그것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공포를 쫓아버림으로써 형성된 것이다.(74쪽)
가령 우리야 지금 과학으로 무장하고 있지만, 이 자연 지배의
능력 없이 알몸으로 자연에 맞서야 했던 원시인들에게 세계란 곧 공포 그 자체였음에 틀림없다. 자식이
없는 상태에서 맞닥뜨린 세계는 온갖 우연으로 가득찬 혼돈의 세계였을 터이고, 그 혼돈은 인간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었으리라. 그리하여 그
앞에서 인간은 무한한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게다. 그러다가 이 무질서한 혼돈 속에서 계절의
반복을 깨닫고, 다양한 현상들 속에서 공통적 요소를 찾아내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속에서 불변적 요소들을 추상함으로써 인간들은 비로소 혼돈의 세계에 질서를 도입하고, 이 질서
위에 문명이라는 것을 세운 것이리라.(79쪽)
이것은 공포에 대한 심각한 오해다. 원시인들은 까닭 없는 공포에 시달렸던 바보가 아니었다. 그들이 공포를
느낀 존재는 자신들을 잡아먹은 사자, 전쟁을 일으켜 자신들을 죽이는 이웃 부족 등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공포를 느꼈던 것은 사자, 인간들이 어떻게 자신들을
해칠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인류의 잔혹성을 비이성적인 공포로 설명하다 보니 진중권은 정작 중요한 이해관계의 충돌을 언급하지 않는다. 지금도
미국이 이라크 민중들과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은 테러리스트에 대한 공포 때문이 아니다. 석유에 대한 이해관계
때문이다.
포유류 중에서 대장을 따라 집단 자살하는 습성을 보이는 포유류로는 레밍이라는 설치류밖에 없기 때문이다.(48쪽)
나는 레밍이
자살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사고사일 뿐이다. 인간의 눈에 집단 자살로 보일 뿐이다.
그런데 왜 그의 상상력은 총선연대의 이미지를 찾아 민주국가가 아니라 하필
그리하여 마오주의는
볼셰비즘이 된다. 마오주의나 스탈린주의를 마르크스주의와
동일시하기 때문에 진중권이 보기에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를 아무 여과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젠
거의 없(107쪽)”다. 하지만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가 판을 치던 시절에는 지금보다도 더 적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니 진중권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사회주의? 정체도 불분명한 제 개인적 이상을 시도 때도
없이 논거로 들이대면 곤란하다. 공론의 영역에 들어오면 남들도 알아듣는 언어로 얘기해야 한다. 그게 에티켓이다. 진보를 하는 데에 굳이 ‘사회주의’ 어쩌구 하는 가설은 필요없다. 그거 없어도 충분히 진보할 수 있다.(265쪽)
진준권은 안티 정치인 사이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물론 이 사이트의 성패는 정치적 편향성에서 벗어나 얼마나 객관성을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겠다.(168쪽)
“정치적 편향성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진중권의 책은 편향성으로 가득 차 있다. 진중권은 조선일보를 미워하며 보수적 기독교인을 미워한다. 이것이
편향성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나는 그런 편향성이 좋다. 진중권이 지배자들이 퍼뜨리는 중립성의 신화를 믿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하버마스처럼 탈근대의 사상가들에게 “신보수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일 생각은 없다. 그러나 사회에 대해 지나치게
래디컬한 비판은 결국 실천적 보수주의를 강화한다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왜냐하면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 그 거대한 형이상학적 규모 앞에서 현실 속에 존재하는 조그만 차이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248쪽)
탈근대 사상가들이 지나치게 래디컬해서 문제라고? 래디컬이라는
말을 이런 식으로 쓰면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보는 기독교도 지나치게 래디컬한가? 기독교인들만큼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들도 없다. 원죄를
물려받은 인간은 뭘 해도 죄인이다.
첫댓글 위에 있는 <어느 극좌파가 본 진중권>을 보십시오. <어느 극좌파가 본 진중권>이 더 정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