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들장미의 혼(魂)을 그리며
정각스님
I. 장미의 혼(魂)
나타샤킨스키의 앵두입술에 물려진 한 송이, 빨간 들장미를 생각해 본다. 들장미가 핀 언덕, 슈베르트가 그토록 예찬을 아끼지 않았던 빨간 들장미 그 속에는 오만한 왕후(王后)의 고뇌가 담겨져 있다. 사랑과 허무의 슬픔 서려 있기도 하다.
인간이 만들어낸 우주의 질서가 '5월의 장미(薔薇)'를 탄생시켰음은 어떤 까닭일까? 언제까지나 인간은 장미를 사랑해야 한다는 '숙명적 형벌'을 뜻했음일까?
그리하여 작은 별, 어린 왕자는 그토록 한 떨기 장미화에 고뇌해야 했는가. 고뇌의 장미. 그 장미 없었다 한들 사랑의 시인 릴케를 우리는 어디서 찾을 것인가.
아, 장미의 혼은 끝이 없어라....
II. 몽상의 장미를 바라보며
아, 장미꽃 피어나는 신록의 계절엔 편지를 보냄이 좋다. 도회지 한적한 길모퉁이 우체국 창가에 서서 그리운 사람에게 보내는 장미 빛 사연. 책갈피에 끼워진 장미꽃 이파리 함께 접어 보내는 소년의 가슴에 이제 고뇌는 사라진다.
장미의 계절에 고뇌는 생겨나지 않는다. 장미꽃 만발한 룸비니 동산. 더 이상의 근심과 고뇌를 멀리한 무우수(無憂樹) 나무 아래에, 그곳에 어떤 슬픔이 있었겠는가? 그리하여 장미꽃 룸비니 동산에 태어난 싯달타는 말하였다.
'일체의 고통을 내 마땅히 그치게 하리라....'
그러나 장미의 계절에 형이상학적 고뇌는 생겨난다. 스물 아홉, 싯달타는 카필라성 장미동산을 떠나며 말하였다. '장미꽃 시들면 그 향기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 아름다움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이처럼 몽상의 장미, 그 몽상의 장미를 바라봄에 구원의 길은 열려진다.
III. 구원을 알리러 부처님 오셨네
"모든 생명의 행복을 위해, 평화와 기쁨을 위하여
이 세상에 부처님 오시었네."
[잡아함경]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그 행복, 평화의 기쁨을 우리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나자렛 예수는 말했던가? 그렇다. 오직 참된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행복과 평화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진리 어디에 있는가? [법화경]은 말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뜻은 모든 중생들에게 부처님과 똑같은 '앎'과 '봄'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다. 미묘한 방편으로서 많은 법을 설하시지만, 이는 한결같이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되게끔 하기 위함인 것이다. 부처, 곧 깨달은 자와 같은 '앎과 인식'을 얻어 우리 모두가 부처가 되고자 함에 진리의 참뜻이, 진리의 참된 신비가 담겨져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앎과 인식'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로 표현되는 헤겔(Hegel)의 구원론과는 거리가 멀다. 헤겔의 이중성의 의미를 넘어선 - 직접성(直接性, unmittelbarkeit)의 의미도 매개(媒介, Vermittelung)의 의미도 아닌, 부조리(不條理)의 사변적 고뇌에서도 멀어져 있다.
억압된 프로메테우스라는 까뮈(Camus) 식의 부조리한 상황 속에 인간존재가 놓여져 있다 하더라도 어느 누가 그것을 부담 없이 인식할 수 있단 말인가?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가 분석하고 있듯이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허망한 자기헌신 속에서 어떻게 참된 구원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만큼 윤리를 포괄할 만큼의 목적이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은 도대체 평범한 개인에게는 자연스러이 생각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앎과 인식은 어디에 있는가?
IV. 초파일 연등놀이
음력 4월 8일은 부처님 오신 날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신일로 욕불일(浴佛日)이라 불리기도 하는 이 날, 많은 사람들은 절을 찾는다. 절에 가서 연등을 켠다. 한편 이 날은 관등일(觀燈日)이라 불리기도 한다. 절을 찾아 집안 자녀들 수효대로 등을 매달며, 무명(無明)의 심지에 불을 밝힌다. 마음의 등불을 환히 밝힌다.
[동국세시기]는 말한다. "시내의 등 파는 집에서 파는 등은 천태만상으로 5색이 찬란하고 값이 비싸며 기이함을 자랑한다. 난조(鸞鳥) 학 사자 호랑이 거북 사슴 잉어 자라 모양의 등(燈)과 선관(仙官) 선녀가 말 탄 형상의 등을 만들어 팔면, 아이들은 다투어 사서 장난하면서 논다. 연등회(燃燈會) 날 저녁에는 통례에 따라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된다. 온 장안의 남녀들은 초저녁에 남북의 산기슭에 올라가 등 달아놓은 광경을 구경한다. 그리하여 서울 장안은 사람의 바다를 이루고, 불의 성을 이룬다."
한편 [고려사]에 의하면 연등행사는 원래 정월 대보름 14-15일에 행해지던 풍속으로서, 최이(崔怡)가 그 날짜를 4월 8일로 옮긴 것이라 말한다. 또한 신라의 팔관회가 연등놀이로 변형된 것이라 쓰여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날 불 밝힘은 무슨 뜻이 있는가?(태양의 부활과 관련된 로마 새턴네리아 축제를 생각할 것. 그러므로 이것은 예수의 탄일과 관련이 있으며, 한식날 이후의 불의 사용과도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이에 우리는 '법등명 자등명(法燈明 自燈明)'이란 [열반경]의 구절을 상기해 보아야 한다. 더 이상 남의 교설(敎說)이거나 가르침에 의거하지 말며, 스스로의 마음의 심지를 밝혀 자신을 일깨우란 말인 것이다. 나루터의 뗏목을 놓아둔 채 피안(彼岸)의 저 언덕에 올라 불성(佛性)의 심지를 활활 타오르게 하는 데 불 밝힘의 뜻이 있단 말이다.
온갖 더러움 속에 뿌리박고 있으면서 물방울 스며들지 않은 채 아름다운 꽃 피워내는 연꽃과 같이, 오탁악세에 발 딛고 살면서도 탐 진 치의 어두움 여의고서 빛나는 우리 마음의 등불. 등불 피어오르면 마음 밝아올 것이다. 고조된 감정의 기복 없이....
V. 입하(立夏), 소만(小滿)의 절기에
이제 며칠이 지나 더운 바람 불기 시작하고, 여름이 찾아온다. 그래서 [농가월령가]에 '4월은 맹하(孟夏)이니, 입하(立夏) 소만(小滿) 절기로다'라 했다. 맹하(孟夏)는 초여름을 말한다. 입하(立夏)가 되면 농작물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하고, 소만(小滿)에 이르러서는 모내기를 서둘러야 한다.
만물이 소생하는 때, 비 내린 후 죽순이 솟아나듯 우쑥 솟아나는 뭇 생명들. 혹 피어나는 생명을 밟아 죽일까 하는 염려에서, 그리고 해충들에게 입는 피해를 막기 위해 승려들은 홀로 아니면 몇 사람이 짝을 지어 동굴 등에 거처를 정하여 살게 된다. 곧 결제일(結制日)을 맞게 되는 것이다.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의 90일 동안 비구들은 엄격히 외출을 삼가게 되며, 일정 장소에 머물며 오로지 연구 정진 수양에 힘쓰게 된다. 그들이 안거(安居)를 행함은 적막함을 사랑해서이다. 적막함에는 참된 침묵이 있다. 그 침묵은 언젠가 우뢰의 함성이 되어 메아리쳐 나올 것이다.
VI. 손톱에 봉선화 물들이며
이렇듯 침묵 속에 이어지는 산사(山寺)의 계절이 다가옴에도 아이들은 분주하다. '울밑에 선 봉선화....' 애처로이 널려 있는 마을에서 아이들은 일제 치하의 쓰라림을 알지 못한다. 아이들의 가슴에 울분과 설움의 봉선화는 없다. 그럼에도 곡조의 쓸쓸함은 그 마음의 파장되어 남아진다.
그러나 언제나 봉선화 꽃잎은 화사하다. 어렸을 적 누나 손잡고 봉선화 꽃 따다 백반을 섞어 돌멩이로 으깨던 일....
저녁이면 손톱 위에 얹고, 비닐로 감싸 다음날의 화사함을 꿈꾸던 추억들.... 아이들은 추억을 머금고 자란다. 그러나 지금의 아이들에게는 가슴 조이는 추억들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계절의 쓸쓸함만을 느낀 채 아이들은 노래부를 것이다.
울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노라....
VII. 사족(蛇足)
기쁨보다는 슬픔의 정서 속에서 우리 내면은 희열을 느낀다. 진정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위해 희랍의 비극을 연출한 디튜람보스(Dithurambos)의 비장함 속에서 디오니소스(Dionysos)의 겨울 축제를 능가하는 그 무엇을 우리는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슬픔의 정서는 자비의 근원이 된다. 치밀어오는 마음의 울적함을 나누는 비장함 속의 여행자는 그 옛날 실연한 삽포(Sappho)의 바닷가 무덤을 찾아 한 송이 장미꽃 던질 것인가?
1990년 통도사 월간지 <등불>에 실었던 글임.
첫댓글 장미와 봉선화.. 그리고 연등.. 상념이 꼬리를 이어갑니다. _()()()_
제가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_()()()_
_()()()_
_()()()_
_()()()_
_()()()_
_()()()_
_()()()_
_()()()_
_()()()_
_()()()_
장미꽃이 만발한 계절에 떠나가신 친정아버지를 그려봅니다 _()()()_
_()()()_
_()()()_
아름다운 장미를 아름답게 느낄 수 있는 것은 마음의 여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 이 마을에서 18 여년을 사는 동안 단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어느 이름 모를 새의 지저김이 어찌나 좋던지요.^^ 신기해 하며 나는 그동안 이런 마음에 여유도 없었나 보다 라는 생각했습니다. _()()()_
_()()()_
_()()()_
_()()()_
_()()()_
_()()()_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