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안이씨(遂安李氏) 약사(略史)
□ 수안이씨(遂安李氏)의 유래
∙우리나라 성씨(姓氏)는 대개 중국성씨를 모방한 것인데, 옛날 중국에서 처음에는 왕가에서만 성(姓)을 가졌으나 공신에게 사성(賜姓 - 성을 줌)하여 점차 귀족층으로 확대되었으며, 나중에는 일반 서민도 성씨를 가지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고조선 시대에는 왕족에 한해 성씨를 가졌으며, 삼국시대에는 사성으로 귀족들도 성을 가질 수 있었으나 고려 때는 그렇지 못했으므로, 유력한 가문들이 후세까지 그 계통을 유지하면서 관직(官職) 등에서 득세(得勢)하기 위하여 자기네 씨족역사를 기록하게 된 것이 족보(族譜)의 유래이다.
∙우리 종문이 수안이라는 본관을 가지게 된 것은 고려시대 충렬․충선․충숙왕 때 명관(名官)인 연송(連松) 조(祖)부터인데, 이 분이 여러 벼슬을 거치면서 나라에 공을 세우고 황해도 수안군 영주(領主)에 봉해져 ‘수안이씨(遂安李氏)’로 불리워졌으며, 그 분의 12대 선조인 견웅(堅雄) 조는 경산인(京山人-지금의 경북 성주)으로 고려의 개국공신이며 태사공(太師公) 벼슬을 지냈고, 후손들도 대를 이어 나라의 요직에 있으면서 명성이 높아 후손들이 태사공을 시조(始祖)로, 연송 조를 중시조(中始祖)로 받들게 되었다.
□ 가문을 빛낸 조상
∙시조(始祖) 태사공(太師公) 견웅(堅雄) : 경산인(京山人-지금의 星州)으로 신라 말 태봉국왕(泰封國王) 궁예(弓裔)의 횡포가 심해지자 홍유․배현경․유금필․신숭겸․복지겸․윤화원 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王建)을 왕으로 추대하였으며, 태조 왕건이 군사를 이끌고 후백제를 토벌할 때 왕을 호종(護從)하고 삼한(三韓)을 통일하여, 벽상개국공신(壁上開國功臣)으로서 삼중대광태사평장사(三重大匡太師平章事)에 올라 명문대가(名門大家)의 기반을 닦았다.
∙2세 장석(長碩) 정승공(政丞公) : 벼슬이 삼중대광문하평장사(三重大匡門下平章事)를 거쳐 좌정승(佐政丞)이 되었다.
∙3세 빈(彬) 사공공(司空公) : 광종 때 문과(文科)에 등과하고, 왕에 표청(表請)하여 후생(後生)에게 문학을 권장하였으며, 과거법(科擧法)을 시행하였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서 직내리수사공(直內吏守司空)과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지냈다.
∙4세 단(端) 문충공(文忠公) : 목종 때 문과에 등과하고, 현종 때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郞)을 지냈으며, 덕종 때 추충좌리공신(推忠佐理功臣) 상주국(上柱國)으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1037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국가원로로서 국가 중대사가 있을 때에는 왕의 부름을 받아 의논하였으며, 본래 천품이 장중하고 강직․청렴해 정의를 굽힐 줄 몰라 조정 대신들이 두려워하였다.
∙5세 상선(象先) 어사공(御史公) : 덕종 때 소년으로 문과에 등과하고, 정종 때 감찰어사(監察御使)를 거쳐 문종 때 인재이극론(因災異極論)과 시정득실(詩政得失)을 품(禀)하자 왕이 기쁘게 받아들여 금대(金帶)를 하사하였다.
∙6세 위(威) 시랑공(侍郞公) : 정종 때 문과에 등과하여, 문종 때 형부시랑(刑部侍郞)․이부시랑(吏部侍郞), 선종 때 중추원사(中樞院事)․동북도병마사(東北道兵馬使)를 거쳐, 겸지행영병마사(兼知行營兵馬使)로서 상서우복사참지정사(尙書右僕射參知政事)를 지내며 국사를 편수하고, 헌종 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다.
∙7세 경충(景忠) 지후공(秖侯公) : 벼슬이 합문지후(閤門秖侯)로 겸전의시사(兼典儀侍事)를 지냈다.
∙8세 공인(公麟) 승지공(承旨公) : 인종 때 문과에 등과하여 한림내승지(翰林內承旨)로서 전중내사(殿中內史)를 지냈다.
∙9세 송(竦) 평장공(平章公) : 예종 때 문과에 등과해 삼중대광문하평장사(三重大匡門下平章事)와 이부상서겸판문하성사(吏部尙書兼判門下省事)를 지냈다.
∙10세 사덕(師德) 평장공(平章公) : 명종 때 문과에 등과하여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를 지냈다.
∙11세 보(普) 상서공(尙書公) : 고종 때 문과에 등과하여 우정언(右政言)을 지냈으며, 사후에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추증(追贈) 받았다.
∙12세 승순(承順) 비서공(秘書公) : 봉훈대부비서감승(奉訓大夫秘書監丞)을 지냈고, 사후 광록대부수사공(光祿大夫守司空)을 추증(追贈)받았다.
∙13세 수안군(遂安君) 연송(連松) : 수안이씨의 중시조(中始祖)로서 자(字)는 백심(栢心), 호(號)는 용계(龍溪), 익호(謚號)는 문익공(文翼公)이며, 충렬왕 때 낭중(郞中)이 되고, 충렬․충선․충숙왕을 거치며 추충보정공신(推忠輔靖功臣) 삼중대광태사평장사(三重大匡太師平章事)를 지냈고, 수안군 영주에 봉해졌다. 공이 수안군으로 봉해지기 전에는 이 고을이 장한현(獐寒縣-노루매기)으로 이름조차 고약했지만 ‘公의 위대한 공적으로 마침내 고을이 태평해졌다.’하여 수안군(遂安郡)으로 개칭하였다. 충렬왕 22년(1297년)에 장군으로 원(元)나라에 봉사(奉使)하여 탐라(耽羅-제주도)의 피화(皮貨) 등을 바쳤고, 충렬왕 29년(1303년) 충선왕이 왕자로 원나라의 향수원(香水園)에 있을 때 간신(奸臣) 역수(逆竪)가 왕자를 해치려 하자 박경량․유복․홍선․평유령․강융․이량․이유․조통 등과 함께 막아, 나라에서는 자손에 이르기까지 특별등용토록 하였다. 충선왕 원년(1309년)에는 호부상서(戶部尙書), 충선왕 4년에는 서북도(西北道) 도지휘사(都指揮使)가 되었다가 다시 지밀직찬성사(知密直贊成事)로 판문하삼사(判門下三事)에 임명되었으며,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 문하생으로 충선왕4년(1312년)에는 가재(家財)로 관서(關西) 각 읍에 문묘(文廟)를 세우고, 논어․맹자․중용․대학과 효경유학자설(孝經幼學字說)․초서천자(草書千字) 등 많은 경서를 발간하여 공자의 도(道)와 주자학(朱子學)을 널리 보급하였다. 충숙왕 때에는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기아에 허덕이자, 원나라의 대란(大亂)에 원정해 대승을 거두고 상(賞)과 벼슬 대신 쌀 40만석을 얻어와 백성을 살리게 하여 왕이 추충보정공신(推忠輔靖功臣)으로 삼았으며, 장한현이 수안군이라 칭하게 되었고 공을 수안군에 봉해 영주(領主)로 삼았으나, 군(郡)에는 본래 장량(藏糧)이 없었으므로 가노(家奴) 300여 가구를 관(官)의 노비(奴婢)로 하며, 잡곡 17,000석을 관고(官庫)에 충당하였고, 4,600석으로 의고(義庫)를 세워 가난한 백성들을 구휼(救恤)하였으며, 관사(官舍) 50여칸을 지었다. 상왕(上王) 충선이 원 나라에 인질로 들어갈 때 수안군 이연송, 부춘군 박경량, 삼사부사 박한공, 밀직부사 최성지 등이 사종(使從) 하였는데, 고려출신 환관(宦官)으로 원 황제의 신임을 얻은 백안독고사(伯顔禿古思)가 모함해 충선이 삭발(削髮)당하고 토번(吐蕃)으로 유배되었으며, 토번은 거리가 15,000리라 수행하던 신하들이 모두 도망갔으나 수안군(遂安君)과 박경량 등만은 추종(追從)하였다. 충숙왕(忠肅王)7년 충선이 원 황제에 의하여 강남으로 내려가게 되자, 시사(時事)가 좋지 않게 될 것을 알고 왕을 금산사(金山寺)로 피신케 하니 원제(元帝)가 급히 사신을 보내어 소환(召還)하고, 기사(騎士)를 보내 시종(侍從)하는 신하들을 위협하니 다른 신하들은 모두 달아났으나, 수안군 이연송(遂安君 李連松)과 박경량(朴景亮)은 약(藥)을 마시고 순절(殉節)하여 살신성인(殺身成仁)의 대의(大義)를 떨쳤다. 수안군(遂安君)의 업적과 충절(忠節)은 후세까지 전해져 조선 현종 때는 공을 서원에 모시게 되었으며, 숙종34년(1708년)에는 왕이 사액(賜額)을 내리니, 곧 용계서원(龍溪書院)이다.
∙14세 수안군(遂安君) 휴(庥) : 자(字)는 중비(仲庇)이며, 부군(父君)의 대를 이어 수안군이 되고 전리판서삼중대광(典里判書三重大匡)을 지냈으며, 충목왕 때 원나라에서 벼슬한 후, 원에서 공을 본국에 보내 충목왕을 봉책(封冊)하며 부군 수안군의 순절을 위로해 중성좌승상(中省左承相) 벼슬을 내리고, 왕이 친히 연회를 열어 말 2필과 백금 50량을 하사하였다.
∙15세 백기(伯琦) 제학공(提學公) : 휴(庥)의 장자(長子)로서 충렬왕 때 문과에 장원으로 등과해 영렬대부사헌내승지지제학(營列大夫司憲內承旨知提學)을 역임했고 절세문장(絶世文章)으로 명성(名聲)이 높았다.
∙16세 징(徵) 서령공(署令公) : 대관서령(大官署令)을 지냈다.
∙17세 관(觀) 안염공(按廉公) : 징(徵)의 장자(長子)이며 자(字)는 담보(膽甫)로서, 정헌대부(正憲大夫) 양광도안염사(楊廣道按廉使)를 거쳐 공민왕 때 내승지(內承旨)를 지내고, 청주목사로 부임한 후 청백(淸白)한 선정(善政)으로 청주남문(淸州南門)과 나주(羅州)․협천(陜川) 등에 선정비(善政碑)가 건립되었으며 왕의 총애를 받았다.
∙18세 의우(義祐) 저후공(袛侯公) : 성천파 덕화공(德和公)의 부(父)로서 관(觀)의 둘째 아들이며, 벼슬이 합문저후(閤門袛侯), 배위(配位)는 김해김씨(金海金氏)이고 슬하에 아들 둘(장자 德和, 차자 允奭)이 있었다. 백씨(伯氏)인 인우(仁祐)는 고려 말기 무장(武將)인 지밀직삼사부사좌장군(知密直三司副使左將軍)으로 의성(宜城)의 반도(叛徒)인 달노화역(達魯花亦 - 다로하찌)를 토벌하여 왕으로부터 금대(金帶)를 하사 받았으며, 수안 옥현동 추원사에 모셔져 있다. 조선 초 불사이군(不事二君)으로 유명한 두문동72인 중 한 분인 수생(遂生) 조의 숙부이다.
∙19세 덕화(德和) 원외랑공(員外郞公) : 호는 정재(靜齋), 벼슬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郞)이며, 배위는 파평윤씨(坡平尹氏)로서 1남2녀를 두었으며 성천파의 파조(派祖)이다.
∙20세 동주(東周) 평사공(評事公) : 평안도평사(平安道評事)를 지냈으며 배위는 옥산장씨(玉山張氏-仁同張氏)이고, 1남 안귀(安貴)가 있었다.
∙21세 안귀(安貴) 판서공(判書公) : 자는 수선(守善), 호는 곡란(谷蘭)으로 세종 때 문과에 등과하고 문종․단종 때 자헌대부 공조판서(資憲大夫 工曺判書)에 이르렀으며 배위는 문화유씨이고 4남2녀를 두었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해 40리 선고비(先考妣) 묘를 초하루 보름으로 성묘하며 비통해 하여, 세상 사람들에게서 육랑(陸郞-중국 吳나라 때 효자)의 미명(美名)을 얻었다. 사육신인 박팽년과 친분을 맺고, 세종 때 사육신의 원통함을 상소(上疏)하다 파출(罷黜) 당하여 성도(成都-成川)에 유배되니 바로 이곳이 평안도 대곡면 학동이다. 公은 이곳에서 유배생왈을 하면서도, 대(臺)를 쌓고 정자를 세워, 조복관대(朝服冠帶)하고 매일 대궐을 향하여 4배하였으니, 훗날 사람들이 가학대(駕鶴臺-신선이 학을 타고 다닌다는 뜻), 망궐정(望闕亭-대궐을 향해 4배하던 곳)이라 했다. 뿐만 아니라, 가재(家財)를 털어 10년동안 방민(坊民)의 요역(徭役)을 견면(蠲免)하고, 효제(孝悌)의 도리와 향약(鄕約-성천군에 있는 장전의 향약을 말함)과 백록동규(白鹿洞規-주자의 학규)를 전하고 교육하여 사람들은 열복(悅服)하고 그 마을을 선래(仙來-공을 신선이라 일컬었음)라 하였다. 그 후 오랫동안 계속해서 병화(兵禍)를 겪어, 후손과 제생(諸生)들이 사방으로 흩어졌고, 골짜기 모습도 변하여 향화(香火)가 끊기고 묘도 실전(失傳)되었으나, 나중에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지낸 후손 현초(賢初)가 도백 홍우길(道伯 洪祐吉), 성도백(成都伯) 조병식(趙秉式)과 뜻을 모아 전의비(傳疑碑)를 세웠는데, 명(銘)은 홍도백(洪道伯)이 지었으며 비문(碑文)은 조도백(趙都伯)이 썼다.
□ 수안이씨의 번성(繁盛)
∙중시조(中始祖) 연송(連松)의 두 아들 중 장자 휴(庥)의 후손들은 주로 황해도와 평안도에 걸쳐 번창하였고, 차자 완(完)의 후손들은 충남지방에 자리를 잡았다. 18세 인우(仁祐)의 신씨부인(愼氏夫人)은 길화(吉和)․수생(遂生) 두 아들과 함께 수안 북부 율리촌(栗里村) 연대부(蓮垈附) 산록(山麓)에 자리를 잡은 후,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여 수안 일원에 퍼졌으니, 장손 금천공파(長孫 衿川公派-玉硯)는 주로 수안 북부에 뿌리 내렸고, 차파(次派) 존암공파(尊庵公派)는 장자 물안파(物安派)가 수안 남부와 북부지방에 정착하여 크게 번창하였으며, 2, 3, 4, 5자 후손들은 운산(雲山)․평산(平山)․이천(伊川)․포천(砲川) 등지로 이거발전(移居發展)하였고, 성천(成川), 봉산(鳳山), 황주(黃州), 중화파(中和派)들도 대파(大派)를 이루어 정착지를 파명(派名)으로 부르게 되었다. 개중에는 극소수가 집성촌을 떠나 타향에서 외롭고 가난하게 살아 족보 편수(編修) 때 입보(入譜)하지 못해 대를 거치는 동안에 수안이씨인 것만 알고 선대조상이 어느 분인지 모르게 된 종문들이 상당수 있으나, 현명한 후손들이 여러 방법으로 입증을 통해 입보한 것이 구보(舊譜)에 점견(點見)되고 있다.
※ 자료 : 수안이씨 이부랑덕화공파(吏部郞德和公-成川) 世譜 - 1998년(丁卯)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