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조영출(趙靈出), 충남 아산 출생, 작사 활동시 예명으로 조명암, 김운탄,이가실 등 사용(김다인이라는 예명 또한 조명암의 예명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함). 193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시), 같은 해 유행소곡 현상공모에 입선하면서 작사활동 시작. 500여곡의 가요를 작사하여 광복이전 히트곡을 포함하여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작사가임. 일제말기 군국가요(친일가요)를 다수 발표하였으며 광복이후에는 좌익활동을 하다 1948년 월북함. 한국전쟁(6.25)중에는 진중가요(북한군가)를 다수 발표하였으며 민족예술극장 총장과 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등을 역임함. 작사가의 월북으로 인해 조명암이 발표한 모든 곡이 금지되자 반야월을 비롯한 후배들에 의해 부분개작되고 작사가 이름을 달리하여 계속 불리워짐. 92년 조명암의 곡들이 해금되고 97년에는 그동안 왜곡되어 오던 가사의 수정과 저작권을 회복함.
반야월(1917.8.1~ )
본명 박창오(朴昌吾), 경남 마산 출생, 예명 반야월, 추미림, 박남포, 남궁려,금동선 등이 있으며 가수로 활동시는 진방남으로 활약함. 1937년 태평레코드사에서 주최하는 가요콩쿨에 입상하여 1938년 "불효자는 웁니다"를 취입하여 데뷔. 1939년 "넋두리 이십년" "꽃마차"를 작사하여 작사가로 데뷔함. 40대 이상의 세대가 애창하는 대부분의 곡을 작사하였으며 70년대까지 작사가 중 가장 많은 곡을 작사함(본인조차 정확히 알지 못할 정도로 많으며 확인된 곡만 1100여곡에 이름). 한국음악저작권협회 이사(1964), 한국가요반세기 작가 동지회 회장(1974), 반야월 가요작가상 제정(1977)
30년대 초반부터 발표된 화류계를 주제로한 노래 중 가장 백미인 노래로 가수 자신이 "인천권번" 소속 기생출신이라 더욱 사실감을 높인 노래. 이화자는 1930년대후반 이후 대표적인 신민요 가수로 이름을 날리며, 윤기 있는 목소리로 수많은 노래를 불렀지만, "화류춘몽"은 지금까지도 그의 대표작으로 전해지고 있다.
38년부터 70여곡의 많은 노래를 발표한 이인권의 대표곡. "눈물의 춘정" "꿈꾸는 백마강" "부녀계도" "귀국선" "미사의 노래" "무영탑 사랑" "선죽교"등의 히트곡을 부른 이인권은 광복이후에 작곡가로 데뷔하여 "미사의 노래" "카츄사의 노래" "외나무 다리" "바다가 육지라면" 등의 히트곡을 발표하여 작곡가로도 성공하였다. 이 노래도 "김용호" 작사로 잘못 알려졌다.
39년 데뷔하면서 자신의 자서전적인 노래인 "아들의 하소"를 발표한 고운봉이 오케레코드로 적을 옮겨 부른 대표곡으로 오히려 발표당시보다 후에 더욱 유명해진 곡이다.조명암의 월북과 김해송의 납북으로 나중에는 "고명기" 작사와 김해송의 처남인 "이봉룡" 작곡으로 알려진 곡이다.
백년설은 서민적인 취향의 노래를 많이 불렀다. 당대 최고의 가창력을 갖춘 남인수와 치열한 경쟁을 벌일만큼 인기를 누린 것도 백년설이 부른 노래 성향과 구수한 목소리가 대중들의 가슴에 파고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절절하게 표현한 이 곡 또한 "추미림"의 작사로 잘못 알려졌다.
장세정의 대표곡 중 하나. 이후로도 장세정은 조명암의 가요작품중 마지막에 해당하는 "고향초"를 불러 히트함. 대표곡으로 "연락선은 떠난다" "아시나요" "잘있거라 단발령" "역마차" "항구의 무명초" "고향초" 등이 있으며 일제말기 남인수와 듀엣으로 영화주제가이면서 군국가요인 조명암 작사의 "그대와 나"를 발표하였다.
이민자, 김진규가 주연으로 출연한 남일홍 감독의 59년 동명의 영화주제가. "비 내리는 호남선"이 신익희 선생과 인연이 있는 노래라면 이 곡은 조병옥 박사와 연관이 깊다.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 박사가 투표 며칠전에 세상을 떠나자 "...장면 박사 홀로 두고 조박사는 떠나갔네..."로 개사되어 추모곡처럼 불려졌다.
실제 춘천 출신의 가수지망생 윤기순(당시 18세)을 모델로 하여 만들어진 곡으로 오히려 무대가 된 "소양강"보다 더욱 유명한 노래다. 무명가수 김태희를 스타로 만들어 주었으며 춘천에서는 매년 "소양강 처녀" 선발대회와 동상건립, 캐릭터 선정은 물론 노래비 등이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