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1대 충남도장관인 친일파 박중양. |
당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양아들 소리까지 들었을 정도의 세력가가 도청의 대전이전 건의서를 총독부에 제출했으니 도청이전은 구체화 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도장관이 바뀌면서 10여 년이 넘도록 도청이전에 대한 구체적인 진전이 없어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나는 듯 했다. 하지만 그 때 이미 대전은 경부선 철도와 호남선 철도 개통으로 신흥도시로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어 예비 도청소재지로써의 입지를 차근차근 다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26년 7월 대전에 도시계획위원회가 발족되고 다음해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가 조선총독으로 부임해 오면서 본격적으로 다시 도청이전 문제가 거론됐다.
야마나시 조선 총독 부임후 본격 거론
이러한 사전 정지작업이 있은 후 야마나시 총독은 1929년 3월 충남도 시찰을 명목으로 대전을 방문했다. 유성 온천장에서 벌어진 연회에서 대전의 일인(日人) 거류민을 대표하는 시라이시 데츠지로(白石鐵二郞)로부터 도청이전에 대한 건의를 받았다. 시라이시는 일본의 귀족원 출신으로 정계에서도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하녀와의 스캔들 때문에 도피하듯 일본을 떠나 그의 하녀와 함께 대전에서 과수원을 경영하고 있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은 야마나시 총독은 신석린 충남지사, 이케가미 총감, 김갑순(金甲淳, 창씨명 金井甲淳) 중추원 참의, 시라이시 등 5명을 자기 숙소로 불러 도청이전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김갑순은 대전에 있던 자신의 개인 토지를 도청 부지로 내놓겠다고 확약했다.
.
▲ 1930년대 대전 시가지 전경이다. 대전역에서부터 도청까지 중앙로가 일직선으로 나있음을 볼 수 있다. 대전역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발달해 있다. <사진출처 : 충청남도 개도 100년사> |
땅투기 귀재 김갑순 도청부지 제공
여기서 잠깐 김갑순에 대해 얘기해 보자. 정운현의 저서 <친일파는 살아있다>를 보면 김갑순은 공주사람으로 당대에 발복하여 엄청난 재산을 모은 부자다. 한 때 그는 서울에 갈 때 절반은 남의 땅을, 절반은 자기 땅을 밟고 다녔다고 할 정도로 조선 제일의 땅부자였다. 공주감영의 관노였던 그는 연줄로 경찰이 되고, 이를 발판으로 공직에 발을 들여 돈을 벌었다. 봉세관(현재의 세무공무원)과 6개 군의 군수를 지내면서 세금을 횡령하고 개발정보를 사전에 입수해 투기를 했다고 한다. 특히 초창기 봉세관 시절 역둔토에서 나오는 세금을 착복해 축재했다고 한다.
그의 재산이 껑충 뛴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대전지역 땅 투기였다. 1904년 이후 대전에 철도가 건설되고 관공서가 들어서자 이곳을 눈여겨 보던 김갑순은 호남선 가설계획을 미리 입수해 일찍부터 대전에 집중적으로 땅을 사들였다. 그런 그가 충남도청의 부지를 선뜻 내놓기로 한 것은 도청 이전 후의 개발 이익을 노린 때문이었다. 도청이 대전으로 이전되면서 평당 1~2전 정도를 주고 산 그의 땅이 하루아침에 1만배인 100원 이상으로 뛰었던 것을 보면 그야말로 그는 땅 투기꾼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 홍성신문 2012.10.16
여기서 김갑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공주의 연세 좀 있으신 분들은 김갑순 하면 어느 정도 아시지만 젊은 세대들은 잘 모르죠. 저 역시도 공주에 있었을 때는 잘 몰랐고 그 후에 이런 저런 매체를 통하여 알게 되었는데 원래 소시적에 충청감영에서 관노노릇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나 영특하고, 남의 비위를 잘 맞추었던지 관찰사가 사용하는 요강을 남들은 2~3번 빌 때 김갑순은 6~7번을 비웠다고 합니다. 하여튼 이를 바탕으로 고위 관리들 눈에 띄었고, 이를 바탕으로 아산, 공주, 노성 군수를 지내고 본격적으로 땅투기의 길로 들어서 도청 이전 논의가 있었을 때 대전 지역 절반이 김갑순의 땅이었다고 합니다.
1998년에 촬영된 김갑순의 옛집 모습입니다. 반죽동 대통사지 주변에 있었다고 하는데요, 아마도 이 집이 헐리거나 고쳐져서 아래의 모습의 집으로 된 것 같습니다. 큰 나무는 이상하게 가운데가 잘렸네요.
맨
위 사진은 대전에 있던 김갑순의 별장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헐리고 없다고 합니다.
김갑순이 도청이 이전 되면서 얻은 이익을 실로 방대합니다. 다음 신문기사를 보시면 어떤지 금방 이해하실 것 같습니다.
동아일보 1931-2-8일자 기사입니다. 당시 김갑순은 대전 지역 대지(垈地- 그냥 모든 땅이 아니라 집터로서의 땅)의 절반을 소유했는데 도청이전이 이전된다는 소식에 임대료를 4~5배 올린 것입니다. 평당 2원하던 지대를 하루 아침에 8원으로 올리니 임차인들의 원망이 말이 아니었겠죠. 그래서 불납동맹도 했다 하는데 하여튼 요즘 부동산 투기 하는 사람들은 저리 가랍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하여튼 대전지역 로비가 소문이 안날리가 없습니다. 이에 공주지역민들이 반대운동을 전개합니다. 동아일보 1925-10-31일 기사입니다. 청년들이 들고 일어섰습니다.
1928-2-9일자 동아일보입니다. 모신문에 도청이전설이 보도가 되자 공주시민들이 반대운동을 편친다는 내용입니다. 이에 대해 총독부는 사실이 아니다 허위이다, 이전 절대 없다, 소문이다, 하면서 부정합니다.
하지만 도청이전에 대한 이슈는 끊이지 않고 이에 공주시민은 공주시민대회를 열고 이에 총독은 다시 한번 이전은 없다 천명합니다.
이번엔 대전지역의 움직입니다. 그동안 대전은 물밑으로 로비 작업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공주시민들이 반대 운동하고, 이전하지 않고, 공주에 있는 도청을 신축한다는 소리가 나오니까 대전 시민들도 가만 있지 않습니다. 동아일보 1930-11-10일 자 신문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신문에 어뚱한 기사가 나옵니다. 충남도청 대전이전 내정(?)이라는 헤드라인에 총독부 예산이 공주에 신축하는 것이 대전에 이전하는 비용이라는 기사입니다.
이에 공주 시민은 또 한번 발끈합니다. 동아일보 1930-12-29 공주시민 천여명이 모인 가운데 도청이전 방지 연설회를 엽니다.
그럼 왜 이렇게 총독부가 왔다 갔다 했을까요? 그 내막울 알려주는 홍성신문 2012-10-10일자 기사를 그대로 올려봅니다.
" 도청의 이전 논의가 시작된 것은 1929년. 제5대 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 총독이 재임하던 시절이었다. 충남도지사는 친일파로 이름난 신석린(申錫麟)이었다. 야마나시는 군 재임 시 시베리아 원정군이 탈취한 황금을 횡령한 사건 등 다양한 부정혐의에 연루되면서 돈을 좋아하는 ‘배금장군(拜金將軍)’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는데, 실질적인 그의 임무는 당시 총리였던 다나카의 정치자금 조달이었다.
자금을 끌어모으는 데 혈안이 된 그에게 접근한 것은 대전지역 일인(日人) 실업인들이다. 1929년 3월 그들은 야마나시 총독을 대전으로 초대했다. 충남도를 시찰한다는 명목으로 공주, 논산을 거쳐 대전을 방문한 야마나시 총독을 대전의 실업인들은 열렬하고도 따뜻하게 환영했다. 이 자리에서 그들은 정치자금 10만 원을 모아 전달하면서 은밀하게 도청의 이전을 건의했다.
|
| |
|
조선 경영의 편법 ‘도청 대전이전’
그러나 채 석 달도 되지 않아 1928년 중국에서 일어난 장쭤린(張作霖) 폭살 사건의 여파로 다나카 내각이 총사퇴하면서 야마나시 총독의 입지는 급격히 위축되었다. 그는 이 같은 불안한 정국에서도 충남도청을 대전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것을 하나의 총독부 시책으로 확정지었다. 그리고나서 그는 곧바로 부산 미두취인소(米豆取引所) 설립 허가를 둘러싸고 5만 원을 받은 ‘독직(瀆職)사건’에 연루되어 사임하였다.
일본으로 되돌아간 야마나시는 재판을 받았는데, 충남도청 유치를 위해 움직이던 대전 사람들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져 파란을 일으켰다. 비록 재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석방되었지만, 이는 공주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야마나시 총독의 후임으로 온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은 신석린 충남지사를 중추원 참의로 임명하고 강원도 참여관(현재의 부지사)인 유진순(劉鎭淳)을 충남지사로 발령냈다. 사이토는 이미 1919년부터 8년간 야마나시보다 먼저 조선 총독을 역임한 바 있었다. 그런 그가 다시 조선으로 부임해온 것이다.
그러나 사이토는 그해 12월 총독부 예산을 세우면서 충남도청 이전 예산 39만 5000원을 책정해 일반인들의 예상을 깨어 버렸다. 비록 실정한 전임자의 결정이라 하더라도 총독부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는 추진할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당분간 비밀에 부쳐졌다."
음, 총독의 뇌물 사건이 있었군요. 이 와중에 공주-대전 간 싸움에 조치원, 천안, 강경 등이 가세합니다.
1925-9-26 동아일보 조치원 관련 기사와 1931-1-10 천안 관련 기사입니다. 강경도 움직임이 있었겠지만 관련 자료는 찾지 못했습니다.
1925년 경남도청 이전, 1931년 충남도청 이전 등 일제시대 도청 이전에 대한 매일경제 신문 기사가 있어서 올려드립니다. 다음 글은 1931년 도청이전이 대전으로 확정되면서 벌어지는 공주시민들의 저항의 역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댓글 예나 지금이나 ......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철거전 김갑순 별장이라 한것은 지금 현재 반죽동 대통사지 당간지주 앞에 있는 김갑순씨 집 뒤에 남아있는 건물(예전에 사무실로 사용했다 함)이 아닌가 합니다
안타까운....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