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봉사와 새마을 운동 - 지역 일선에서...
글 김덕호
새마을운동은 “근면, 자조, 협동”의 국민운동으로서 농촌에서부터 전 국민으로 확산된 법국민적 잘살기 운동이었다.
당시 우리나라가 일제하, 6.25, 보릿고개 등을 격고나서 심신이 모두 지쳐있고 특히 경제가 어려웠다.
농촌과 도시 빈민층은 늘어만 갔다.
따라서 1954년부터 농촌의 잘살기·바르게살기 의식화를 위해 가나안 농장을 만들고
“근로, 봉사, 희생”의 3대 목표를 가치로 내세워 1962년 기독 정신의 영농후계자 양성기관으로
가나안 농군학교를 설립한 김용기 장로가 이 운동의 공로로 1966년 마사이사이상을 수상하였다.
한국 뿐 아니라 못사는 아시아 국가의 가난 퇴치 이런 철학을 가진 농촌 살리기 운동이
어쩌면 자연스럽게 새마을운동 창안과 조직화·확산에 불을 붙이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농어촌 소득증대, 환경개선, can do 정신, 지도자 육성 등 잘 살기위해
우리나라가 당시 절대 필요한 사항들을 실천하는데 새마을 지도자협의회, 새마을 부녀회,
새마을 문고, 새마을 직장협의회 등을 통한 자립운동을 관이 도와주는 형태로 운영되어 왔다.
한때는 환영받지 못했다.새마을 운동 노래도.개발독재 드라이브의 도구로 사용된다 하여.민주화과정에서도 이 운동 조직이 난도질 당한 것도 사실이다.관제라는 오해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마을 운동은 지금도 외국으로 비용을을 받고 수출할 만큼 내용이 있기 때문에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대한민국이 지금 넉넉하게 사는 이유가 바로 이 운동 정신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경희의료원에서 교수직을 놓고 나와 1992년 당시 송파구 저소득층 경계 지역인 오금동에서 한방병원을 개원하여
지역 봉사를 해 나가던 중에 2003년 송파구 새마을지회 총괄회장을 맡아 달라는 청이 구청과 몇몇 유지들로부터 들어왔다.
단체장을 자꾸 맡는 것이 한편 부담스럽고 아무조건 없이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서
따스한 손이 되어주는 내 원래의 뜻이 방향을 잃을까봐 공식 3번 이상 거절했다.
진창의 고향 선배가 송파구 각 협의회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적극적인 요청을 받고 하는 수 없이 3년간만 수락하기로 마음먹었다.
우리병원만 봉사하기 보다는 새마을운동 단체 속에서 봉사하는 것이
한편 더 효율적이고 더 많은 나눔이 있겠다 싶어서였다.
나 또한 농촌 출신이라 1960년대말 부터 새마을운동 공식 선포가 없었다 하더라도
개인적으로 이미 새마을운동이 갖고 있는 가치관과 철학을 생각하고 있었고
1969년 여름에 이미 가나안 농군학교를 가본 적이 있어 삶의 방향과 가치관을
어디에 두어야하는지를 체험했기 때문에 새마을운동이 가까이 느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관변 단체라서 여러 가지 제약도 있을 것이고 오해도 있을 것 같아 수락의사를 밝히는데 장시간 고민했다.
대학시절은 원더스나, CCC, 기독학생회, 교회, 사마리안봉사단을 통해서,
경희의료원 재직시는 기독봉사회로, 개원한 후로는 선한 이웃회를 조직하여 봉사하였고,
1998년 후로는 사회복지법인 장수마을과 법인산하 인애가병원을 통해
지역사회와 해외봉사를 해왔던터라 굳이 봉사란 측면에서 새마을운동 지회장이란 직함이 거추장스러운 면도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색깔있는 눈으로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주위의 간곡한 부탁과 송파구의 어쩔수 없이 맡아야 할 현 상황을 경청하고는
수락하기로 결심했고 구두로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봉사단체장을 맡을 때는 반드시 하나님의 계획이 숨어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예비하신 자들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자로 더욱 봉사하고 복음을 증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라고 믿고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며칠 뒤 총회를 열어 선출하는 절차를 밟았다.
오전 10시에 새마을 운동 3개 단체회원들 500여명이 모여 만장일치 추대하는 방법으로 회장을 선출했다.
이어서 내빈과 축하객들이 추가되어 취임식을 성대하게 가졌다.
회장직을 맡은 후 서울과 영주의 진료와 경영으로 바쁜 와중에도
각 단체 임원진과 협의 후 대규모 “저소득층 어르신들을 위한 연합봉사”를 하기로 했다.
각 소단체들의 기존 봉사활동은 그대로 하면서 지회연합으로 세밀한 곳까지 놓치지 않고 지혜를 모았다.
부녀회에서는 음식 제공 및 먹거리 행사, 지도자 협의회는 근로, 문고에서는 레크레이션,
국악, 동화를 맡기로 하고 송파구 구민회관에서 열기로 했다.
건물내에서는 의료봉사, 미용봉사와 놀이 이벤트를 갖고 건물 밖에서는 부녀회와 지도자협의회의 주관으로
수많은 어르신과 방문자들을 섬겼다.
이 활동이 대서특필되었고 미래의 새로운 모델로 제시되었다.
일선에서 작고 큰 수많은 지역봉사 중에서 선택과 집중의 땀방울이었다.
회장 임기 중에 기본 봉사활동은 물론 여러 대소 활동 중에서 회원들과 같이 영주로의 문화활동과 영주 벽촌의 초등학교 도서 기증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