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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남 ]
전라남도 海南郡은 한반도의 서남쪽 땅끝에 자리잡고 있다.
영암, 강진에 접한 북쪽과 동쪽 일부와 동북쪽을 제외하면 3면이 바다로 둘러 싸인 반도다.
해남군의 가장 남쪽 끝이 우리 국토의 땅끝 이기도 하다.
리이시스식 해안을 끼고 펼쳐지는 바다는 곳곳에 절경을 품고 있고, 명산과 명찰, 유적 등도
두루 볼수 있어 관광지로도 인기가 높다.
해남의 총면적은 전국토의 1%, 전남의 8.9%로 전남에서 가장 넓은 땅을 보유한 군이다.
그중 임야는 약 47%, 농경지는 약 40%로 주요 기반을 농업에 두고 있다.
인구는 약 9만명, 1개읍(해남)과 13개 면(삼산, 화산, 송지, 황산, 문내, 마산, 산이, 북평, 북일,화원,
옥천, 계곡), 513개 리 로 구성되어 있다.
본래 백제의 '새금현'이었는데, 신라 경덕왕이 '침명' 으로 고쳐 양무(강진)군에 딸린 현이 되었다가,
고려때 해남으로 고쳐 영암군에 속했다,
조선 태종 9년에는 진도현과 합해 '진해현'이 됐고, 태종 12년 고을의 治所를 영암에 딸린 현재의
'옥산'으로 옮겼다가 세종 19년에 다시 갈라서 해남 현감이 됐다(동국여지승람)
세종 30년에는 황원현을 합해 '당악' 이라고 하다가, 그뒤 도로 해남현이 되어 오늘까지 그이름을
이어오고 있다.
현의 진산은 금강산(481m)이다, 지금도 성곽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울둘목-우수영-명량대첩비
해남과 진도를 연결하는 진도 대교 아래 좁다란 물목을 울둘목이라 한다.
정유왜란때 이순신 장군이 10척의 낡은 배로 일본 함대 300여 척을 무찌른 물목이다.
썰물때나 밀물때는 물결이 더욱 빠르고 거세다.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우는 소리를 내면서 거품과 파도를 일으키면서 들고 나는 물살이다.
울둘목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우수영이 거대한 기념탑과 조형물들이 함께자리잡고 있다.
높이 2.67m에 너비 1.14m 인 명랑대첩비는 정유재란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공을 기려 세웠다.
일제때 일인들이 경복궁으로 옮겨 놓았던 것을 해남사람들이 도로 찾아 옛날 자리에 세웠다.
나라에 위급한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려 예고 한다는 설이 있다.
*두륜산 대둔사
한덤사, 한덤절이라 불리던 大屯寺는 한동안 '대흥사'로 불렀으나,다시 옛 이름을 찾아 절 입구에
'두륜산 대둔사'란 일주문을 하나 더 세웠다.
대둔사 에는 볼만한 보물이 많다. 대웅보전, 응진전 앞 삼층석탑,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
북미륵암 삼층석탑, 표충사, 서산대사비, 서산대사 부도및 부도밭, 탑산사 동종, 당대의 명필들이 쓴
현판 글씨들이 바로 그것이다.
대웅보전, 침계루, 천불전은 원교 이광사의 글씨고, 무량수각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표충사는 정조대왕의 글씨고, 천불전의 대문 격인 가허루 글씨는 이심만의 글씨라 한다.
삼산면 구림리 에 있다.
표충사는 서산대사 휴정의 사당이다. 두륜산 등산로 입구에 세워져 있다.
조선 정조 12년 대흥사의 중 춘계와 천묵이 상소하여 어명으로 사당을 세우고 사액을 받아서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 유정과 처영을 함께 모시고 해마다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한 서산대사의 사당을 두륜산 대둔사 경내에 세운 이유는 '해남의 대둔사는
만고에 무너지지 않는 땅이오, 삼재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니, 내 유물을 그곳에 두라'는 유언에
따른 것이다.
선조의 하사품인 가사와 염주, 교지, 바리때, 책상, 법화경, 필첩등이 보존되어 있다.
탑산사 동종은 구리로 만든 범종으로 대둔사 경내 성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높이 79cm에 아가리 지름은 43cm 본래 탑산사에 있던 것을 옮겨 놓은 것으로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작품이다(보물 제88호).
*녹우당
해남읍 연동리에 있는 綠雨堂은 고산 윤선도 유적지다.
해남 윤씨 종가로 알려져 있다. 綠雨檀으로 더 잘 얄려져 있는데, 어초은 사당과 고산 사당이 있기
때문이다.
녹우당은 16세기 중엽에 지어진 건물로 호남지방 사대부가의 건축양식을 연구 할수 있는 기념물이다.
덕음산 기슭에 건물은 서향, 대문은 남향으로 앉혔다.
윤선도의 고조부인 어초은 효정(1476~1543)이 연동에 자라잡고 지은 것이라 하며, 전면에 있는
사랑채는 孝宗이 스승인 윤선도에게 하사한 건물로, 경기도 수원에 있던것을 연동으로 옮겨 지은
것이라 한다.
대문앞에 수령 500년 된 은행나무가 있고, 집 뒤편 사당 앞에는 수령 300년 해송이 있어서 이 집안의
오랜 내력을 대변해 준다.
집 뒤에는 윤선도의 선조 들이 500년 전 심었다는 비자나무숲이 울창하다.
녹우 란 이 비자나무숲의 초록빛을 상징하는 말이다.
집 입구와 측면에 고산유적 관리사무소와 유물관이 있다. 해남에서 은거하며 말년을 보낸 윤선도의
유품과 그의 손자 공재 윤두서(1668~1715)선생이 그린 자화상(국보 240호), 일본여도, 동국여지지도,
등 500여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고천암호-갈대밭
고천암호는 해남읍에서 서남쪽으로 약 18km 떨어져 있는 담수호다.
현 황산면 한자리 증의도 동남쪽 끝에 솟은 바위 이름 '고선암'에서 유래 됐다.
원래는 배가 드나들던 바다요 널찍한 개펄을 품고있던 灣 이었으나, 1985년 부터 2001년 사이에
진행된 개답공사와, 황산면 증의도와 화산면 율동리를 연결하는 댐이 완공됨으로써 증의도는
섬이 아닌 육지로 변했고, 댐안의 수로는 담수호로 변했다.
고천암호에는 갈대가 많다. 호수 둘레를 덮은 갈대 군락은 30~40만 평에 달한다.
따라서 고천암호 일대는 최상의 철새 도래지가 됐다. 오염되지 않은 물과 풍부한 먹이가 있기 때문이다.
간척지 논의 추수가 끝나는 11월 중순부터 이듬해 3월 중순까지 가창오리를 비롯한 희귀조들이
대규모로 날아와서 겨울을 나고 간다. 한해 가창오리 숫자만 17만 마리 였다고 한다.
해질무렵 고천암호 갈대밭에서 날아 올라 호수 하늘을 가득 덮는 가창오리떼의 군무는
야행성인 가창오리 들이 낮에는 인적이 뜸한 갈대숲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해질 무렵활동을 개시
하기 때문이다.
*우항리 공룡 화석지
약 9000 만 년전에 지나간 발자국이 5분 전에 지나간 발자국처럼 선명하게 나있다
황산면 면소재지 갈림길에서 우항리 공룡화석지 안내표지판 북쪽으로 3km 가량 가면 우항리 해안에
닿는다.
높이 1~4m의 퇴적암 절벽이 5km 가량 이어지는데 아름답기가 전북 채석강 같다.
절벽 아래는 검정색, 푸른색, 흰색을 띤 암반층이 넓게 펼쳐져 있고, 암반층 곳곳에 물갈퀴새, 익룡,
공룡 등의 발자국이 화석으로 남아 있다.
물갈퀴새 화석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미국 에오새 지층보다 4천만 년 전이나 앞선
것이라 한다.
생성 연대는 약 9500만년전, 중생대 백악기 지층에 남겨진 것이어서 관련 학계를 놀라게 했다.
1000개 가 넘는 새 발자국이 퇴적암 절벽밑, 너비0.5~1m, 길이 15m 가량의 바위에 선명하게
음각되어 있다.
물갈퀴새 화석 주변에는 익룡 발자국 화석들도 있다.
익룡의 앞발은 사람의 귀 모양과 같고, 뒷발은 사람의 발 모양과 비슷하게 생겼다.
새들의 발자국을 살피며 해안선을 따라 오르다 보면 사발 크기의 웅덩이 들이 움푹 움푹 패인것을
볼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공룡발자국 화석이다.
*달마산 미황사
達馬山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美黃寺는 우리나라 불교가 바닷길을 통해 들어왔음을
뒷받침 하는 고찰이다.
신라 '의조화상'이 창건했다 하며, 단청을 입히지 않은 대웅전이 특히 볼만하다.
정면 3칸, 측면3칸으로 지어진 단층 팔작집으로, 조선 중기의 다포 건축 양식을 구경할수 있는
훌륭한 기념물이다(보물 제947호)
대웅전 뒤쪽 응진전 앞에 서면 다도해의 물목이 한눈에 들어온다.
천불전과 천불, 부도밭도 꼭 돌아볼것, 송지면 서정리에 있다.
*땅끝
해남 영소 일번지는 단연 땅끝이다.
북위 34도17분 38초 , 동경 126도 6분 01초, 우리 국토 육지부의 최남단이다.
하늘을 찌를듯 일어선 땅끝탑이 지키고 있다.
땅끝을 바다로 담그고 서있는 산은 갈두산 사자봉이다
그 머리엔 높직한 전망대가 새로 세워져 아름다운 다도해의 조망대 구실을 한다.
*연정리 지석묘군
해남읍 완도 쪽으로 13번 국도를 따라 가다보면 대량의 지석묘군을 만나게 된다.
화산면 연동리 석정 부락 입구에 있는 연정리 지석묘군이 바로 그것이다.
해남읍에서 백야삼거리~시등을 지나 나불재를 넘어 조금 더 가면 오른쪽으로 저수지가 하나
보이고, 조금 더가면 길 왼쪽에 고인돌 가든이 있다
고인돌 가든을 끼고 좌회전 해서 20m 쯤 올라가면 석정 마을 표석이 있고, 연정리 지석묘군 이란
안내판이 있다.
둥치가 썩어서 움푹 파인 고목이 수문장처럼 서있는 안쪽에 48기의 고인돌이 모여 있다.
이곳 고인돌은 흙 위에 작은 굄돌들을 받치고 뚜껑처럼 큰 돌을 덮어 놓은 남방식(개석식)이다.
탁자 처럼 돌 위에 얹어 놓은 북방식과는 다른 모습이다.
큰것은 길이가 5m나 된다. 3m 이상 되는 것도 19기나 된다.
*해남이 낳은 시인들
'누가 와서 물었네 지나가는 말로/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나는 대답했네 거기에 있다고/
누가 와서 물었네 거기가 어디냐고/ 나는 대답했네 담 너머 하얀 집을 가리키며/
자유가 묶여 발버둥치는 곳이라고/ 산에 들에 봄이 오고//
누가 와서 물었네 지나가는 말로 / 그는 이번에 나오지 않느냐고/ 나는 대답했네 무덤 하나를 가리키며/
그는 지금 저기에 있다고' <김남주(1946-1994),'산에 들에 봄이 오고'전문>
시조 문학의 비조로 불리는 고산 윤선도(1587-1671)가 말년을 은거하며 '오우가' '어부사시사' 등의
명작을 남긴 고장 해남.
1950년 <문예>로 등단하여 교과서에도 실린 시 '강강술래'를 남긴 시인 이동주(1920-1979)는
면 읍호리 출신이다. 두륜산 대둔사 입구에 '강강술래' 시 비 가 있다.
1974년 <창작과비평>여름호에 '잿더미'등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온 민족시인 김남주(1946-1994)
는 삼산면 봉학리 출신이다.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15년형을 선고 받고 9년째 복역하다 가석방 조치로 출소 했으나
1994년 2월13일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48세였다
'진혼가' '나의칼 나의피' '조국은 하나다' 등의 시집 제목에서도 볼수 있듯. 그는 나 보다는
우리의 자유를 찾기 위해 투쟁한 사람이었다.
여성해방의 기수로 불리는 고정희(1948-1991)는 삼산면 송정리 출신이다.
1975년 <현대사회>로 데뷔했고,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 '초혼제' ' 눈물꽃' '지리산의봄'
등의 시집을 남겼다.
1994년 6월9일 즐겨 찾던 지리산 뱀사골에서 실족사 함으로써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1969년 전남일보 전남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 '나는 하느님을 보았다' '국밥과 희망'
'불이냐 꽃이냐' '넔통일' '참깨를 털면서' '아 광주여,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등의 시집을 낸 중진
시인 김준태(1948~)선생 역시 해남 출신이다.
시 '연혁'으로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하고, <문학과 지성>에 '대답없는 날들을 위하여'
등의 시를 발표 하면서 데뷔한 시인 황지우(1952~)는 북일면 신월리 배다리 마을 출신이다.
'남녘 토양은 내 시의 자양분' 이라고 말하는 그도 이시대의 대표 시인에 속한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겨울-나무로부터-봄-나무에로' ' 나는 너다' '게눈속의 연꽃' 등의 시집을
냈고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한바 있다.
1955년 <문학예술>에 시 '화병정경' 등으로 데뷔한 박성룡(1932~)시인은 화원면 마산리 출생이다.
서울신문 문화부장과 논설위원을 지냈고,'가을에 잃어버린것들' '춘하추동' '동백꽃' '휘파람새'
'고향은 땅끝' 등의 시집을 냈다.
화산면 갑길리 출신 윤금초 시인, 해남읍 안동 출신 박건한 시인, 해남읍 성내리 출신 이창열 시인,
산이면 출신 김재희 시인, 북평면 와룡리 출신 오영빈 시인, 해남읍 학동 출신 김봉호 시인등고
해남의 인물들이다.
* 해남의 별미
- 연포탕
- 떡갈비
- 산채 비빔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