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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1 주일 ** 풀무불보다 더 뜨거운 믿음 (다니엘 3:19-27)
1)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2+2는 4다. 그러면 4+4는 얼마냐?”
그랬더니 아들은 불평하며 말했습니다. “씨, 쉬운 거는 아버지가 다 하고, 어려운 것만 내게 물어.”
2) 바보 조폭 둘이 한 여자를 두고 결투를 벌이게 되었습니다.
둘은 멍청하단 소릴 듣기 싫어, 산수 문제로 결판을 내기로 하였습니다.
한 쪽이 물었습니다. “3+2는 얼마냐?”
다른 조폭은 손가락으로 계산하며 한참을 고민하다가 “7”하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물은 쪽이 “내가 졌다. 여자는 니가 해라.”고 하더랍니다.
두 이야기는 모두 더 심한 바보라는 것을 말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왕의 금신상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풀무불에 들어갈 각오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상에게 절할 수 없는 성도의 본분을 지키려고 죽음을 각오하였습니다.
성도에게는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우상에게 절할 수 없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들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따르는 데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세상은 자기들과 한편이 되지 않으면 견디기 어렵게 만들고,
또 손해를 주겠다고 위협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위협의 강도를 더욱 높입니다.
그래서 풀무불을 칠 배나 더 뜨겁게 하였습니다.
이런 위협과 칠 배나 더 심한 어려움을 만나면 많은 이들이 물러섭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칠 배나 뜨거워진 풀무불을 대하는 방법, 우리가 만나는 세상의 어려움들을 이기는 길은
우리 믿음도 칠 배 이상 되게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32 이하에서 믿음의 사람들을 열거하면서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6:33 참조)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믿음으로 대하면 어떤 풀무불도 이길 수 있습니다.
영국의 메리 여왕은 “존 낙스 한 사람의 기도가 백만 대군보다 무섭다.”고 하였습니다.
“예수 천당”으로 유명한 최권능(최봉석) 목사님은 신사참배 문제로 옥에서 많은 고문을 당했습니다.
일본 순사가 매를 때릴 때마다 비명 대신 예수, 천당을 외쳤습니다.
아프지 않느냐고 묻는 순사에게, “나는 머리부터 발 끝까지 예수로 가득차 있어서 예수밖에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내 몸이 움직일 때마다 예수가 내 입에서 튀어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병보석으로 잠시 풀려난 최 목사는 죽음을 앞둔 자신을 옮기는 인력거꾼에게도 “예수 천당”을 외쳤을 정도로
못 말리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우리 교회 앞의 하수관로를 설치하는 공사에서 대형 콘크리트관을 옮기는 데 대형 지게차와 와서 쉽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형 관을 들어서 옮기고 묻는 데도 지게차가 크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문제가 크면 믿음과 기도도 크게 하면 감당할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뱀잡이수리’라는 새는 귀 뒤의 털이 펜을 꽂고 있는 것 같아서 비서새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이 새는 굵고 긴 다리로 뱀을 찾아 눌러서 잡으며, 날면서 날카로운 부리로 공격하는 등 용감한 새입니다.
하지만 천적을 만나거나, 위험한 순간에 처하면 날지도 못하고 땅으로만 도망가거나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잡아먹힌다고 합니다.
평소에는 믿음이 좋은 것 같고, 말도 잘하지만 막상 어려움을 만나면 비서새처럼 당황하고 잡아먹히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어부가 고기를 잡아서는, 줄자로 크기를 재어 큰 고기만 버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던 사람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왜 큰 고기만 버리냐고 물었더니,
“우리 집 프라이팬 크기가 20cm이기에 그것보다 큰 고기는 버립니다.”고 하더랍니다.
그 어부는 프라이팬을 바꾸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문제보다 더 큰 믿음과 기도로 이겼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칠 배나 뜨거운 풀무불에서도 타지도 않고, 오히려 결박한 줄만 끊어지고,
임마누엘 주님의 기적적인 도우심을 경험하였습니다.
풀무불 같은 문제를 만나면 뜨겁게 기도하기 바랍니다.
칠 배나 뜨거워지면 기도와 믿음도 7배, 17배, 70배로 대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한일서 5:4)
** 9/7 주일 ** 믿음의 가문 (창세기 28:1-5)
전에 나왔던 영화 중에 가문의 영광 - 가문의 위기 - 가문의 부활이 있었습니다.
그 영화의 제목들은 믿음의 가문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 얻고(사도행전 16:31), 하나님 잘 섬기게 될 때 가문의 영광이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때 가문의 위기를 맞습니다.
아브라함 - 이삭 - 야곱으로 이어지는 믿음의 가문을 생각할 때, 믿음의 가문으로 복을 받는 중요한 원리가
출애굽기 20:5-6에 있습니다.
“…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본문에서 이삭은 가문의 위기를 맞습니다.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가로챔으로 인해 형 에서의 손이 미치지 않는 하란으로 도망을 가야만 합니다.
두 아들을 동시에 잃을지 모르는 위기 속에, 야곱을 멀리 피신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삭은 외삼촌 집으로 떠나는 야곱을 불러 축복하고 당부하였습니다(1절).
당부의 내용은 우상을 섬기는 가나안 여자를 아내로 맞지 말고, 외삼촌 집에서 아내를 찾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보통 우리 같으면 몸 건강해라, 밥 잘 챙겨 먹어라고 할 텐데, 이삭은 믿음의 가문을 이어가는 일에 대해서
당부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섬기는 배우자를 만나 믿음의 가문을 이루어가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복의 근원이 된 것같이, 믿음의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가정이 복을 받고
자손들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기생 라합이나 룻이 그랬고, 다윗 때문에 자손들이 다 복을 받았습니다.
이삭은 먼 길 떠나며,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아들에게 축복합니다.
아들 야곱을 맡길 수 있고, 야곱을 지켜주실 오직 한분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3절).
자식에게 해주고 싶어도 마음밖에 없는 아버지가 전능하신 하나님께 아들을 맡깁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후손에게까지 주시고, 땅까지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축복하였습니다.
이 모든 축복과 기도의 내용, 아버지의 소망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삭의 축복은 야곱과 그 후손에게 그대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믿음의 사람, 믿음의 가문은 어려울 때에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지켜 주실 것을 믿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가정이 믿음의 가문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가문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복 주시고 은혜 가운데 인도하십니다.
채태원 집사는 절을 개조한 단칸방에서 살며 5남매를 길렀습니다.
아들과 함께 풀빵, 뻥튀기, 사과 등을 팔며 어렵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새벽 4시면 아이들을 다 깨워서 새벽기도를 드렸습니다.
아침은 굶어도 기도는 빠뜨릴 수 없다고 하며 매일 기도하였습니다.
기도 제목도 나라를 위해 - 이웃들을 위해 - 교회를 위해 - 5남매를 위해서로 일정하였습니다.
아들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감옥에 있을 때도 면회를 가서 “너 기도하니? 너 성경 읽니? 너 공부하니?” 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 기도의 어머니에게서 대통령(이명박)과 국회부의장(이상득), 그리고 선교사가 나왔습니다.
이 대통령은 어머니에 대하여 기도의 어머니라고 하며, 그 기도가 다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본다고 하였습니다.
한 청년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떠났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외국인 선교사를 만나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고향집으로 돌아와서 과거 시험의 결과를 묻는 부모님에게 “세상 과거보다 더 중요한 천상 과거를 보고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하자,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면서 부모님도 예수님 믿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온 집안이 발칵 뒤집어지고, 아버지는 아들을 매질하고, 몹쓸 귀신에 들렸다며 굿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심하게 핍박하는 가운데 아들이 그만 말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부모님이 아들을 벙어리로 만들었다며, 제발 입만 열면 무슨 소원이든지 들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3년 만에 입을 연 청년은 “부모님, 예수님 믿으셔야 합니다.”고 하였습니다.
부모님은 하는 수 없이, 너를 그렇게 사로잡은 예수가 어떤 분인지 믿어보자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믿음의 가문이 되게 한 그 청년이 황수관 박사의 할아버지랍니다.
황수관 박사는 그 할아버지가 자기 가문의 복의 근원이 되었다고 간증합니다.
하나님 잘 믿고 힘써 섬기면 그 가문이 믿음의 가문이 되고,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됩니다.
우상을 버리고, 변치 않고 하나님을 섬기며, 말씀대로 순종하면 약속의 복을 받습니다.
모든 성도들의 가정이 믿음의 가문이 되며, 성도 여러분이 다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들이 되기 바랍니다.
** 8/24 주일 ** 주님이 택하신 일꾼 (사도행전 1:21-26)
직분은 하나님께, 그리고 교회와 복음을 위해 충성할 기회로 주어집니다.
교회의 질서를 위해, 그리고 충성을 위해 은사로 주신 직분이기에, 교회 안에서의 계급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맡은 자들에게는 충성과 합당한 열매를 요구하십니다(고린도전서 4:2).
가룟 유다는 12제자로 뽑혔으나, 배신함으로 그 직분을 버렸습니다.
그는 직분을 이용하여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2:4-6에 보면, 유다는 도둑이면서 겉으로는 누구보다 지혜롭고 충성된 제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아름다운 지위를 버리고 멸망의 길로 갔습니다.
유다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제자들은 기도하는 가운데 맛디아를 얻습니다.
맛디아를 세우는 과정에서 교회의 일꾼이 어떠한 사람이어야 하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사도의 직분을 맡을 자는 항상 함께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21-22절).
전해오는 이야기에 맛디아는 70명 전도대의 한 사람이었으며, 후일에 이디오피아 등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본문에서도 예수님의 공사역 기간 동안 항상(the whole time, 모든 시간 동안)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서
선택하였습니다.
그래서 맛디아와 또 다른 추천인 요셉은 늘 제자들과 함께 다니며 일한 사람들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교회의 일꾼은 단순히 오래 다닌 사람이 아니라, 주님과 동행하며 제자들과도 함께 다니는 사람입니다.
일꾼은 구약의 에녹과 같이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창세기 5:24).
또 다른 제자들과도 함께 일하며, 변함없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가룟 유다는 주님을 믿지도 않았고, 제자들과 같은 뜻도 아니었으며, 결국 배신함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일꾼은 고린도전서 1:10의 말씀과 같아야 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또 교회의 일꾼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22절), 봉사와 사도의 직무를 위해(25절) 일하는 사람입니다.
교회의 일꾼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해 세움을 받는 것입니다.
맛디아도 사도로 세움을 받아 죽기까지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서 세움을 받은 일곱 집사들도 복음 전도자였습니다.
빌립은 사마리아와 여러 지역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복음을 전했고, 스데반은 진리를 외치다 순교하였습니다.
교회의 일꾼은 주님이 직접 택하십니다(24-25절).
사도들이 기도하며 뽑았고, 제비를 통해 주님이 택하심을 믿었습니다.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언 16:33)
아간의 범죄 때나(여호수아 7:16-18), 요나가 니느웨로 가지 않고 도망할 때나(요나 1:7)
제비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그래서 사람이 제비를 뽑고 투표를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장하심을 믿습니다.
사람의 손을 통하는 것 같지만, 일꾼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세우십니다.
요셉에 관한 소개를 볼 때 그가 더 이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주님께서는 맛디아를 선택하셨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인정하고, 그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선택된 맛디아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충성하였습니다.
12사도의 자리에 선택되는 것은 참으로 귀하고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맛디아의 이후 기록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순교하기까지 복음 전하는 일에 충성하며 직분을 감당했다고 전합니다.
교회의 일꾼으로 세움 받은 사람은 오직 주님의 영광과 몸된 교회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내고,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맛디아처럼 아무 기록도 없고, 이름과 영광이 없어도 죽도록 충성하는 일꾼들이 되어야 합니다.
다같이 찬송가 355장 3절을 부르면서, 그렇게 맡기신 직분에 충성합시다.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아멘”
** 8/17 주일 ** 좋은 직분자 (디모데전서 3:8-13)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성도라고 부릅니다.
성도는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귀한 지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에 들어가는 시민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어 성도가 되는 것은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고, 영원한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되는 것도 복된 일인데, 하나님께서는 직분도 주십니다.
구약시대에는 왕, 제사장, 선지자 등을 기름 부어 세우셨고
신약시대에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목사, 장로, 집사 등의 직분을 주어 세우십니다.
직분은 계급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햇수가 늘어감에 따라 주어지는 감투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승진의 개념도 아닙니다.
달란트 비유에서처럼 각자의 은사를 따라 직분을 맡기십니다.
직분은 교회의 질서를 위해 필요합니다(고린도전서 12:4-11, 14:40).
하나님께서 주신 질서를 따라 맡은 직분을 감당하므로 주님의 교회가 든든히 서가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음 주일에 집사와 권사를 선택합니다.
성경에 주신 원리를 따라 합당한 사람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3:1-13에 감독(목사와 장로)과 집사에 대한 자격을 말하고,
사도행전 6:1-6에서는 지혜와 성령이 충만하고 칭찬 듣는 사람을 집사로 세웠음을 보여 줍니다.
오늘 본문의 자격들 하나 하나를 생각하면서,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9절의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입니다.
성도는 믿음 속에 살아갑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믿음의 원리를 따라 살아갑니다.
(로마서 1:17, 히브리서 10:38, 요한일서 5:4)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원리는 믿음입니다.
교회는 믿음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실 때도 안드레는 아이의 도시락을 가져오면서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하였습니다(요한복음 6:9).
교회를 섬기면서 세상일과 같은 원리로 해서는 안됩니다.
교회 일꾼은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의 손과 일하심을 바라보면서 일해야 합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실 때처럼, 순종의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교회를 세상의 단체처럼 여기게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습니다(히브리서 11:6).
가나안 땅을 둘러보았던 정탐꾼들 중 믿음의 유무에 따라 보고 내용은 달랐습니다.
믿음 불패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는 자격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일꾼은 무엇보다 믿음이 좋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은혜에 감격하여 주님의 교회를 섬기며,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또 기도하면서 믿음의 원리를 따라 섬기게 됩니다.
우리 모두 믿음으로 살고,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로 살아갑시다.
또 주님의 교회를 믿음으로 섬기는 일꾼들이 되며, 그런 일꾼을 세워 주님의 교회를 바로 섬기게 합시다.
** 8/3 주일 ** 밀알의 역사 (요한복음 12:20-26)
본문의 말씀을 근거로 ‘밀알’ 하면 희생과 봉사의 아름다운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밀알이란 이름을 가진 선교와 봉사단체들도 많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밀알이 아름다운 것은 자신을 지키고 보존하는 것보다, 내어주고 희생하고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데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그 앞뒤에 죽음과 영광이란 분위기를 깔고 있습니다.
본문 앞서 11:46 이하에서부터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가 시작되었고, 12장이 유월절 엿새 전이란 말로 시작합니다.
유월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때이며,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입니다.
또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일을 두고(12:1-8) 예수님은 그것이 장사를 위함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며 밀알 이야기를 하십니다.
또 영광이란 말씀을 하십니다(23절).
제자들도 그랬지만, 보통 영광이란 단어와 죽음이란 말을 어울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영광을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크냐, 또 높은 자리에 앉겠다고 다투기도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9:46, 22:24, 마가복음 10:37 등)
그러나 예수님은 밀알의 영광이 자신을 보존하고, 스스로 높아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밀알의 영광은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밀알처럼 이 땅에 떨어지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밀알이란 말을 좋아하지만, 밀알의 본질인 희생과 죽음은 싫어합니다.
밀알이 밀알인 것은 죽어서 열매 맺는 데 있습니다.
밀알처럼 땅속에 묻혀서, 어두운 외로움 속에 희생하고 죽는 역사가 없이 아름답고 위대한 일이 생기지 않습니다.
가정이나 교회나, 직장이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밀알처럼 희생하고, 참고 인내하며, 견디고 죽기까지 하였기에 오늘과 같이 보존되어 있고 또 발전합니다.
남에게 밀알이 되라고 하지 말고, 예수님처럼 스스로가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밀알 같은 성도, 밀알 같은 일꾼이 많은 교회가 아름답고 부흥합니다.
“달걀이 스스로 깨지면 병아리가 되고, 사람이 깨면 프라이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스스로 죽을 때 많은 열매의 영광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자는 예수님을 따라 밀알의 길을 가고, 밀알처럼 희생과 열매 맺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26절).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이런 일꾼을 귀히 여기십니다(26절).
나 있는 자리에서 밀알의 역사를 감당합시다.
밀알의 역사가 없이는 어떤 것도 유지되고 발전하지 못합니다.
주님의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한 밀알이 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7/27 주일 ** 이루시는 하나님 (출애굽기 2:1-6)
인생에는 수많은 변수들이 작용합니다.
학생들에게는 성적이라는 변수가 중요합니다.
어떤 여학교의 급훈이 "좀 더 열심히 공부하면 남편의 직업이 달라진다."라고 합니다.
심지어 육상 100m 경기에서는 뒷바람이 초속 2m 이상이면 공인 기록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나라와 민족, 시대, 가문, 부모 등 수많은 변수들이 인생에는 작용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모세는 좋지 않은 변수들을 모두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천대받는 히브리 민족이며, 고통받는 시대에 났고, 남자로 태어나는 바람에 강물에 버려져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이스라엘의 뛰어난 지도자로 쓰임받고, 성공한 데에는 그 모든 악조건들을 뛰어넘는 변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가진 조건들과 노력이 중요하지만, 인생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변수는 되지 못합니다.
모세를 둘러싼 인물들의 경우 자신의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석 달 동안 숨겨 기르다가, 갈대상자를 만들어 모세를 띄웠습니다.
모세의 누나는 (어린 계집아이가) 강대 사이로 따라가며 먼 발치에서 지켜 보았습니다.
4절에 "어떻게 되는 것을"이란 구절이 영어성경 NIV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what would happen to him)으로 번역되었습니다.
또 바로의 딸이 하필 그 시간에 맞추어 목욕하러 나왔고, 모세를 볼 때 불쌍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길이 작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떠내려 가는 갈대상자가 가장 정확하게 가야할 곳으로 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갈대상자를 주장하시고 인도하셔서, 모세의 이야기를 이루신 것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예레미야 10:23, 33:2-3, 로마서 8:28, 잠언 16:9, 33 참조)
프랑스의 피에르 가르댕은 중요한 결정을 제비로 하고, 그냥 밀고 나갔답니다.
미 항공우주국(NASA)에서는 모든 우주선 발사 준비를 끝낸 후 기도합니다.
사람의 손길을 넘어선 영역이 있고, 하나님께서 해 주시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은 모두 모세의 갈대상자와 같습니다.
인생이라는 바다를, 여러 가지 바람과 풍랑과 싸우며 가는 갈대상자와 같습니다.
세상과 인생, 시간과 환경 등의 조건들을 볼 때 정말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비록 갈대상자지만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에 있으면 안전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과 손길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인생을 계획하고 살아갈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믿음입니다.
이루시고, 되게 하시고, 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시는가가 일의 성패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변수입니다.
하나님이 하게 하시면 아무도 그 일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되지 않게 하시면 아무도 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성도의 삶은 주책(주님이 책임지시는 삶)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믿음으로, 하나님 바라보고 사는 것이 주책스럽지만
우리는 주님이 책임지실 것을 믿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라고 고백하였습니다(시편 31:15).
인도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고, 믿음을 가장 중요한 삶의 원리와 변수로 삼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7/20 주일 ** 흙으로 만드신 사람 (창세기 2:1-7)
사람은 오래 전부터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하고 답을 찾아 왔습니다.
그것은 철학에 있어서도 가장 기본적인 질문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을 나그네라 말하고 노래도 합니다. (최희준 씨의 하숙생)
"♬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최일도 목사님이 공동체 사람들과 삶은 라면을 먹으며 "삶은 무엇인가?" 주제의 이야기가 나왔는데, 한 사람이 "삶은
라면이지 않습니까." 하더랍니다.
성경은 이 질문에 분명하고 확실한 답을 줍니다.
인생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흙덩이라고 말입니다. (시편 104:28-29, 전도서 3:20-21)
어떤 화학자가 인체를 구성요소로 계산해 보았더니 다음의 결과가 나왔답니다.
체중이 60kg인 사람을 기준으로 할 때
수분이 60% 가량인 36리터 정도 되고, 비누 7개를 만들 수 있는 지방,
못 1개를 만들 정도의 철, 성냥개비 2200개를 만들 인, 연필 900자루를 만들 탄소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를 가격으로
따지면 5달러 정도랍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흙덩어리에 불과하지만, 사람은 단순한 흙덩이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혜와 능력으로 만드신 작품이며(에베소서 2:10)
생기를 불어 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다른 동물들은 단순히 생명만 있지만,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영이 있습니다.
이 영이 있기에 사람은 하나님을 알고 섬기고 사랑하며 교제하게 됩니다.
전도서 3:20-21에서 사람은 영은 위로 올라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천하보다 귀한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영이 있기 때문이며, 사람을 구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사람에게는 영이 있기 때문에 구원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단순한 흙덩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기로 살아가고 하나님의 오묘한 솜씨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교부 터툴리안은 사람을 "흙에서 하늘로 가는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불어 넣으신 생기는, 성도들에게 성령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로마서 8:14)
사람이 단순한 흙덩어리가 아니기에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섬기며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을 때 가장 사람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기를 빼면 인간은 부스러지기 쉬운 흙에 불과합니다.
성령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바른 답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늘의 별을 귀하고 아름답게 여깁니다.
(금성, 삼성, 칠성 등으로 회사나 상품 이름을 붙입니다.)
사람답게 살고 하나님께 영광돌릴 때 하늘의 별처럼 빛나게 됩니다. (전도서 12:3)
하나님을 모르고, 성령이 아닌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의 삶은 추하고 가치가 없습니다.
쓸데없는 일에 시간과 돈을 쓰며, 인생을 낭비하며 살아갑니다.
헐리우드 스타 안젤리나 졸리의 쌍둥이 사진을 게재하는 데 110억 원을 주었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섬기며 영광돌리는 삶이 가장 가치 있고 사람의 본분을 다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내 속에 주신 성령의 생기를 따라 사는 성도들이 됩시다.
** 7/13 주일 ** 주님의 제자 (요한복음 21:17-19)
우리 교회는 직원 선택을 위한 선거를 앞두고 있습니다.
교회의 일꾼을 뽑는 일이기에 중요할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시험드는 일이 없도록 기도하며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여러 조건들을 갖추었으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직분을 감투처럼 여기고 되고 싶어하는 사람은 자격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제자의 자격, 일꾼의 자격을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찾아 오셔서 제자로 회복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며 3번이나 부인하였고, 또 (본문에서) 다른 제자들을 데리고 갈릴리로 고기 잡으러 간 한심한
베드로를 찾아 오셔서 제자로 회복시키십니다.
망가지고 한심하고 맛이 간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고, 먼저 찾아 오셔서 회복시키시는 주님이십니다.
범죄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아담과 하와도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베드로에게 제자의 위치를 회복하시고 사명을 주시면서 단 한 가지만 확인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다시 회복되고, 주님의 제자의 위치를 확인하는 데 다른 조건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일꾼을 뽑고, 또 우리 모두가 주님의 제자로 따르기 위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복음 증거하는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로새서 1:24) (고린도후서 11:23-29 참조)
주님은 교회를 자신과 동일시하십니다(사도행전 9:4-5).
그러므로 제자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고, 세우고 섬기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여 교회를 섬기고, 주님의 양무리를 쳤습니다.
나중에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기까지 충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는, 교회의 일꾼은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며, 죽기까지 충성해야 합니다.
(쿼바디스 영화의 장면)
베드로는 죽음의 모습까지도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고백과 그 고백대로 죽기까지 헌신하며 사는 삶이 있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런 일꾼들이 우리 교회에 세워지도록 힘쓰며 기도합시다.
** 7/6 주일 ** 풍성한 열매들 (갈라디아서 5:18-24)
갈라디아서의 주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주님께서는 죄와 사망, 율법과 저주 아래 매였던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오셨습니다. (눅 4:18, 요 8:32,36)
그러나 이 자유를 잃어버리는 자들이 있는데, 다시 종의 멍에를 메는 자들과(갈 5:1), 자유를 방종으로 흘려버린 자들이
그렇습니다(갈 5:13).
주께서 주신 자유를 누리며, 육체를 따라 방종의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는 성령을 따라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과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의 삶은 현저한 대비를 보이는데
육체의 삶의 결과들(음행과 .... 19-21절)과 성령의 열매(22-23절)가 그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맺혀지는 열매들이 다릅니다.
성령 안에서 크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 피겨 스케이팅의 기대주 김연아 선수의 우승 동영상을 보고)
피겨에는 활주, 스핀, 점프의 면에서 여러 종류의 기술들이 있고
어려운 기술들을 아름답고 깔끔하게 연기할수록 점수가 많습니다.
우리의 삶과 신앙생활도 피겨 스케이팅과 같습니다.
여러 가지 요소들이 골고루 들어있고, 또 아름답게 감당할 때 주님께 칭찬받습니다.
어렵다고 빼버리면 좋은 점수를 기대할 수 없으며, 억지로나 의무감에서 하면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주일성수가 어렵다고 빼고, 십일조가 힘들다고 빼고, 기도생활이 제대로 없고,
말씀과 관계된 삶이 적고, 헌신과 나눔이 없다면 그런 (인생과 믿음의) 연기는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없습니다.
힘든 것일수록 기쁨으로 감당하고, 또 그런 것들을 빠뜨리지 않고 아름답게 수 놓을 때 인생과 믿음이 아름다워질 것이며,
주님께 칭찬 받을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아름답게 맺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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