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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동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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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관련 자료 스크랩 손양원목사 / 사랑의 사도
하늘 우편부 추천 0 조회 51 10.01.19 23:0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손양원목사 / 사랑의 사도

 

 

 

 

 

 

 

 

 

 

 

 

   

손양원목사(1902-1950)

 

1902년 6월 3일 부친 손종일 장로와 모친 김은주 집사의 장남으로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685에서 출생
1908년 5월 2일 부친 입신때 7세 소아로 입신
1914년 4월 1일 칠원 공립보통학교 입학
1917년 10월 3일 맹호은 선교사에게 세례 받음
1919년 3월 24일 칠원 보통학교 졸업
1919년 4월 서울 중동학교 입학
1920년 4월 3일 부친 손종일장로의 독립만세 운동으로 구속,서울 중동학교 자퇴
1921~1923년 일본 동경 스가모(소압)중학교 졸업
1924년 1월 17일 정양순여사와 결혼
1924년 3월 23일 재차 도일했다가 중생하여 10월 귀국
1924년 10월 23일 칠원읍 교회 집사 피선
1925년 11월 6일 동인군 출생.1948년 10월 21일 여순사건 때 순교(23세)
1926년 3월 경남 성경학교에 입학 부산 감만동교회 외지 전도사로 부임
1929년 3월 6일 경남 성경학교 졸업
1932년 감만동교회에서 성서조선으로 한주간 사경회를 인도. 사경회 인도 문제로 사임.
1926년~1932년 외지 전도사로 있으면서 밀양수산, 울산 방어진, 울산 남창, 부산 감만 동, 부산 남부민,

             양산 우너동교회 개척.
1932년~1934년 부산 남부민교회 시무
1930년 9월18일 동신군 출생.1948년 10월21일 여순사건때 순교(18세)
1935년 4월 5일 평양 신학교 입학. 능라도교회 시무
1938년 3월16일 평양신학교 졸업
1938년 4월~1939년 경남 노회 부산 지방 시찰회 순회 전도사. 부산, 양산군, 김해군,함안군 각 교회를

              순회 전도하면서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함.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한 다는 이유 때문에 순회

              전도사 일을 시찰회에서 보지 못하게 함.
1939년 7월 14일 여수 애양원교회 부임. 한국인으로는 2대 목회자로 부임.
1940년 9월 25일 신사 참배 거부로 여수 경찰서에 검속.
1940년 11월 17일 광주 형무소에 투옥
1943년 10월 8일 청주 보호 교도소에 감금
1945년 8월 17일 8.15 해방으로 석방
1945년 9월 10일 ~10월15일 애양원 임시 원장 겸임
1946년 3월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 받음
1948년 10월21일 여순사건으로 동인, 동신 형제 순교.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을 살려 양 아들로 삼음.
1950년 9월 13일 6.25 동란으로 공산군에게 검속
1950년 9월 28일 여수시 둔덕동 617-10(당시 과수원 골짜기)에서 순교 하심.

     당시 함께 순교 하신 분들.
     조상학목사 : 여수 덕양교회
     지한영강도사 : 율촌 장천교회
     지준철성도 : 지한영 강도사 아들 순천고 3학년 재학)
     윤형숙전도사 : 여수 제일교회
     허상용집사 : 여수 돌산읍 교회
     황도백집사 : 여수 남면 우황리교회
     곽은진집사 : 여수 남면 우황리교회
     안경수성도 : 여수 남면 우황리교회
     백인수성도 : 여수 남면 우황리교회
1993년 4월 27일 손양원목사 순교 기념관 개관
1995년 8월 15일 국가 독립 유공자로 선정 건국훈장 애족장 수상

 

 

 

여수애양병원

 

애양원은 미국 남장로교 한국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으로 부터 비롯되었다. 1904년 2월 목포 선교부에서 광주 선교부를 개설하기로 하고 벨 목사와 오웬목사를 파송하여 광주 선교부를 만들면서 1904.12.25. 성탄절 예배와 함께 광주 선교가 시작되었다. 오웬목사는 이 후 전남 동부지역의 능주, 남평, 화순, 장흥 등지를 맡아 선교하였다. 오웬은 1909.4.3. 급성 폐럼으로 순교하게 되는데 당시 오웬을 치료하기 위해 목포에서 활동중이던 의사 포사이트(Wiley H. Forsythe) 는 급히 광주로 떠났다. 광주로 오던 포사이트는 남평 부근에서 길가에 버려진 여자 한센병 환자를 발견하고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말에 태우고 광주까지 걸어왔다. 이 한센병 여인은 1908.3. 에 부임하여 선교활동을 하던 윌슨(Robert M. Wilson) 과 선교사들에 의해 치료받게 되었다. 윌슨과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사택 건축을 위해 사용하던 벽돌 가마터를 단장하고 한센병 환자를 돌보며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것이 서양의학으로 한센병을 치료하던 우리나라 최초의 일이다. 그러나 정성된 치료에도 불구하고 여 한센병 환자는 주님을 영접하고 수 주일 후 소천하였다. 이일을 시작으로 1909년 여름 인근 봉선리에 한센병 환자를 위한 집을 짓고 20여 명을 치료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한국 최초 나병원인 광주나병원의 시작이었고 1928년 여수로 터를 옮긴 후 1936년 여수 애양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국 최초의 나병원인 광주나병원은 1925년 현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1번지에 터를 마련하고 1928년 한센병자 600여 명이 옮겨와 지금의 애양원을 이루게 되었다. 이어 1936년 여수 애양원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여수 애양원 시대가 시작되었다. 

< 자료: 섬김, 그 아름다운 향기로> 

 

초기 애양병원

 

  

 

<기도문>

 주여, 애양원을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손양원 목사

 

 

주여! 나로 하여금 애양원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을 주옵소서.

주께서 이들을 사랑하심 같은 사랑을 주시옵소서.

이들은 세상에서 버림을 당한 자들이옵고,

부모와 형제의 사랑에서 떠난 자들이옵고

세상 모든 인간들이 다 싫어하여 꺼리는 자들이오나,

오, 주여! 그래도 나는 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오, 주여! 나는 이들을 사랑하되,

나의 부모와 형제와 처자보다 더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심지어 나의 일신보다도 더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차라리 내 몸이 저들과 같이 추한 지경에 빠질지라도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만약 저들과 같이 된다면 그들과 함께 기뻐하며 일생을 같이 넘기려 하오니,

주께서 이들을 사랑하사 어루만지심같이 내가 참으로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만약 저들이 나를 싫어하여 나를 배반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저들을 참으로 사랑하여 종말까지 싫어 버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만약 내가 여기서 쫓겨남을 당하여 나가게 될지라도

나는 이들을 사랑하여 쫓겨난 그대로 남은 세월을 이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는

참다운 사랑을 나에게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내가 이들을 사랑한다 하오나 인위적 사랑,

인간의 사랑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을 위하여 사랑하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고,

주를 위하여 이들을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보다는 더 사랑치 않게 하여 주시고,

주께로부터 나온 나의 사랑이옵고.

또한 주를 위하여 사랑하게 되는 것이매,

내 어찌 주보다 더 사랑케 되오리까.

그러나 나의 일신과 부모와 처자보다는

더 사랑하게 하여 주시되,

주를 사랑하는 그 다음은 이 애양원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내가 또한 세상의 무슨 명예심으로 사랑하거나

말세의 무슨 상급을 위하여 사랑하는

무슨 욕망적 사랑도 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만 그리스도의 사랑의 내용에서 되는 사랑으로서

이 불쌍한 영육들만 위한 단순한 사랑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 주여! 나의 남은 생이 몇 해 일런지 알 수 없으나

이 몸과 맘 주께 맡긴 그대로 이 애양원을 위하여

충심으로 사랑케 하여 주시옵소서. - 아멘  

 

 

 

 

 

 

 

 

 

손양원목사 / 생애와 믿음

 

손양원목사님은 믿음으로,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으로,사랑으로,죽기까지 하나님께 충성한 순교자요,사랑의 사도였다.

그는 기도를 호흡으로 삼고,성경을 양식으로 삼고,전도가 생활이 되어 사신 분으로 원수에게는 사랑으로,고난받는 개인과

민족을 향해서는 소망을 던져 주었던 하나님의 종이었다.또한 그의 설교는 몸으로 하는 설교였으며,그의 삶과 죽음을 통한

설교였다.

그의 사상에는 항상 민족의 정황이 문제가 되었고,민족 정신을 복음으로 승화 시켰다.그는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하나님만을

즐거워하며 사는 하나님 중심사상과 오직 하나님의 은혜 사상,국가와 민족의 사랑 순교의 각오를 가지고 살았으며,성경으로

시작해서 성경으로 끝내겠다는 하나님의 말씀 중심 사상,종말에의 소망 말씀과 삶의 일치 등의 사상을 가지셨다.

다시 말하면 그의 삶 자체가 신구약 성경 66권의 본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결국 손목사는 성경대로 하나님만을 섬겼고 나라와 민족과 교회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알고 살았으며,가장 소외되고

버림받은 한센병자와 두 아들을 죽인 원수까지 사랑했으며,하나님의 은혜만을 사모하다가 순교하신 한국 교회의 사랑의

화신이요, 한국 교회 일백년 교회사에서 세계 교회에 내 놓을수 있는 자랑거리이다.

주님께 부름 받기까지

손양원 목사는 1902년 6월 3일,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653번지에서 손종일 장로와 김은주 집사 사이에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08년 7세 되던 해에 부친의 입신(入信)과 함께 자신도 입신하고 같은 해에 본당(本洞)의 한문 성당에 입학했다.

이 때서부터 그는 부모님을 따라 새벽 기도회도 열심히 참석 했으며, 어려서부터 기도와 신앙 생활에 힘썼다.

1914년 4월 1 일, 칠원 공립 보통 학교에 입학했으나 일본의 왕이 살고 있는 동쪽을 향하여 절을 할 것을 강요하는

동방 요배(東方遙拜) 문제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910년 한일 합방과 함께 일제는 신사의 기본 정책을 수립하 고 천황 사친 배례와 요배를 강요했다. 일제는 합병 직후,

관공서와 각 학교에 천황의 사진을 나누어주고 행사 때마다 거기에 최경례를 하게 함으로써 천황 숭배의 신도적

이데올로기를 주입 하고자 했다.
1912년 7월 30일,그들이 우상화하던 명치 천황이 죽자 일제는 각지에 요배소(遙拜所)를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요배를

강요했다. 이러한 요배의 강요는 일반인들에게만 그치지 않고 일제의 각종 제일, 축일마다 학생들에게까지 계속 강요되었다.

기독교 학교는 총독부의 결의에 따르지 않았으나 문제는 관공립 학교에 다니는 기독 학생들이 문제였다. 1915년에는 개정

사립 학교령을 공포하여 종교 교육을 금지시키는 등 탄압을 가중화 시켜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시켰다. 한편 관공립

학교에서는 보다 철저한 식민지 교육으로 천황 숭배 이데올로기 주입에 광분하였다.
"매일 아침 동경을 향하여 종교적인 경의(동방 요배)를 표함으로써 수업이 시작된다. 신도 의식이 모든 공휴일마다 개최되고

학생들은 천황 사진에 절을 하게 된다. "

손 목사는 1916년 3학년 때, 이러한 궁성 요배는 십계명 중에서 제1 계명을 범하는 것이라고 하여 궁성 요배를 하지 않음으로

퇴학을 당했다. 그러나 맹호은 선교사의 도움으로 복학을하여 계속 학업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복학 후 주일에도 학교에

출석하라고 했으나 주일은 학교에 갈 수 없고 하나님께 예배를 해야 한다면서 출석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을 굳게 지켜 나가는 가운데 마침내 1919년 3월 24일에 졸업을 하게 되었다.

남달리 공부에 재간이 있고 배우려던 의욕이 강했던 그는 1919(18세)년 칠원 보통 공립 학교 졸업과 함께 서을 중동 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낮에는 학업에 임하고 밤에는 만두 장사를 하면서 고학했다. 이런 어려움 가운데서도 안국동 교회를 다니며

주일 성수와 십일조 생활을 철저하게 했다.

손 목사가 이렇게 어렵게 공부를 하고 있을 때 1920년4월3일 3·1운동의 여파로 아버지가 칠원 읍내에서 독립 운동을

주도하다가 징역 8개월의 실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게 되는 일이 일어났으며, 손목사 자신도 철저한 주일 성수로 해서

아르바이트 자리까지 흔들리게 되자 극심한 생활고에 빠진 그는 일단 학업을 중단하고 수중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70전을

출석하던 안국동 교회에 헌금으로 바치고 낙향하고 말았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서 심신을 달랜 뒤 1921년, 다시 향학의 불꽃을 태우고자 일본에 건너가, 동경의 스가모(巢鴨)중학교

야간부에 입학한다. 이번에는 아침과 낮에는 우유와 신문 배달 등을 하고, 밤에 공부를 하였다. 이 때 그는 일본 동양 선교회의

노방 전도에 큰 감명을 받고, 동경의 판교(板橋)성결 교회 중전중치(中田重治) 목사의 설교에 큰 은혜를 받고 참된 신앙의

의의를 체득하게 되며 1923년 졸업과 함께 귀국하게 된다.

손 목사는 고향 칠원 교회에서 1914년 3월 17일에 이종윤 조사로부터 학습을 받고, 1917년 10월 3일에 맹호은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924년 1월, 손 목사는 함안군 대산면 옥열리에서 자란 정양순씨(19세)와 결혼하고, 그 해 3월 23일에 일본에 다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는 학업에 임하는 도중 신앙의 새로운 도전과 확신에 찬 마음으로 중생하여 10월에 귀국했다.
귀국한 그 해 10월 23일에는 봉사하던 교회에서 집사로 피선되어 봉직하였다.

1926년 3월, 경남 성경 학교에 입학을 하고 동인이가 한 살이되었을 때 부산 감만동 한센병자 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당시 감만동 교회는 600여 명의 대부분이 한센병자들이었다. 손 목사의 첫 사역지가 이렇게 한센병자와 연결된 것이 훗날

그에게 사랑의 순교자가 되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그는 알 리가 없었다. 손 목사는 감만동 교회에 시무

중이었던, 1929년 3월 6일에 경남 성경 학교를 졸업했다.

원래 감만동 교회는 1934년까지 매견시 선교사가 목회를 했으며 손 목사는 외지 전도하는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 교회로

청빙이 되었었다. 사명을 받은 손 목사는 경남 울진 방어진과 남창에 교회를 세웠고, 부산 서구 부민동에도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개척했다. 교회 개척에 전념을 했지만 시간이 나는 대로 감만동 교회에서 설교도 하고 환우들을 보살피기도 했다.

감만동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를 하던 중 1932년, 교회를 사임하게 되었다. 손양원 목사에게 은혜를 받은 문신활이란 성도가

김교신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손 목사가 왜 감만동 교회를 사임하게 되었는가를 밝히고 있다.

"1932년, 감만동 교회에서 손양원 전도사님은 성조지(聖朝誌)를 가지고 사경 공부처럼 일주일간 설교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로소 그 시로부터 부산 감만동 나병원의 배후에도 복음의 꽃송이들이 드문 드문 피게 되었지요. 암흑에 잠겨 있던

감만동 교회는 광명을 맞이하게 되었지요. 곪아졌던 생명들은 생생하게 소리를 쳤더이다. 아! 모든 법과 의식에 결박되어

고통과 번민으로 예수를 뜻없이 믿는 소생은 날로 때로 생명적으로 자라는 참 진리로 해방을 받아 한없는 희열이 넘쳤나이다.

뭇생명들이 그처럼 자비스럽게 해방을 받아 나가던 중도에 불행하게도 소위 목회자라고 하는 몇 사람의 시기로 인하여 손양원

전도사님도 감만동 교회 일을 못 보게 되었습니다. "

손 목사는 당시 김교신이 발행한 성서 조선의 잡지를 가지고 사경회처럼 인도한 것이 문제가 되어 감만동 교회를 사임하게된

것이다. 문신활의 편지 가운데 "부민정으로 떠난 뒤로"라고 한것으로 보아 감만동 교회를 사임한 후 손 목사는 그가 개척한

부민정 교회로 옮겨 평양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부민정 교회에서 목회를 전념한 것으로 사료된다.

신학교에서

손 목사는 1935년 4월 5일, 33세에 평양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학창 시절에도 뜨거운 기도 생활과 함께 성경 연구를

깊이하였다. 그리고 학우들을 대할 때에는 항상 사랑하는 마음과 겸손한 태도로 교제하였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평양

대동강변의 능라도 교회 전도사로 시무 하면서 공부하였다.
그러나 이 때는 한국 교회가 일본이 강요하는 신사 참배 문제로 온통 뒤흔들리던 시기였다. 그래서 손 목사를 비롯한

신학생들은 그 어려움 속에서 공부하기에 많은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손 목사는 이 때부터 신사 참배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 신사 참배 문제는 선교사들 사이에도 견해의 차이가 심하여 갈팡질팡하였다.

이 때 평양 신학교 교장 나부열(R. L. Roberts)목사는 끝까지 강경한 태도로 신사 참배를 반대하였다. 그래서 결국

손 목사가 1938년 3월 제33회로 졸업하고 나온 그 해에 신학교는 교문이 닫혀 버리고 말았다.

따라서 33회 졸업생들은 학교가 폐쇄되어 버린 까닭에 졸업장을 우편으로 받는 일까지 생겼다.

손 목사가 애양원 교회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평양 신학교 2학년 때, 애양원 교회에 사경회 강사로 초청된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당시 애양원 교회는 외부 사람이 예배를 인도할 때나 방문했을 때는 하얀 가운을 입고 장갑을 끼고 들어가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손 목사는 교회에 들어가면서 흰 가운을 입는것조차 거절하고 그렇게 했던 사람들에게 호통을 쳤다고 한다. 
"호랑이를 잡으려고 호랑이 굴에 들어 온 사람이 호랑이를 무서워해서야 어찌 호랑이를 잡겠느냐. 이 곳에서 일을 한다는

사람들이 병을 무서워해서야 어떻게 일을 하겠느냐!"라고 하면서 호통을 치고 그냥 들어갔다고 했다.
이 때 애양원 성도들은 손 목사의 설교에도 은혜를 받았지만 그의 이러한 모습에 더 큰 감동을 받게 되었다. 이것이 후에 그를

애양원 교회로 청빙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신사참배 반대와 옥고

1938년 신학교를 졸업한 후 1년간 부산 지방 선교사 대리로 지방 순회 전도를 하면서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펼치던 중 1939년

7월 14일에 여수 애양원 교회로 부임하였다. 손 목사는 신학교 시절부터 신사 참배를 반대해 왔으며 특히 그가 졸업하던 해에

신사 참배가 총회에서 가결되는 것을 직접 목격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므로 그는 신학교 졸업 후 1년간 부산 지방에서

신사 참배 반대를 외쳤고 이로 인하여 경남 노회에서 순회 강도사 사역을 못하게 되었다.

손 목사는 애양원 교회에 부임해서도 설교 때마다 신사 참배반대를 외쳤으며 손 목사가 가는 곳곳마다 신사 참배에 대한

부당성이 카랑카랑한 검사의 논고와도 같이 지적되었다. 손 목사의 이러한 외침, 어쩌면 와락 터져 나오는 벌떼와도 같이

신앙의 저 깊은 저변에서 용솟음치는 회개를 역설하는 설교로 인하여 가는 곳곳마다 회개의 눈물 바다를 이루는 역사가

있었다.
그는 시간이 있을 해마다 주님의 뜻이 아닌 신사 참배를 강요하는 일본은 망하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 경찰에게

있어서 손 목사는 눈에 깊이 박힌 가시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손 목사가 시무하고 있는 교회가 보통 교회가 아니라

한센병자들이 모여 있다는 특수성 때문에 쉽게 건드릴 수 있는 처지 또한 못되었다.
그러나 그런 세월이 오래 계속될 수는 없었다. 1940년 9월 25일, 손 목사는 수요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여수

경찰서에서 나온 형사 두 명에 의해서 연행되고 말았다. 처음에는 1년 6개월 형을 받았으나 구속 기간까지 하여 거의 3년의

세월이 흘렀갔다. 그 때 손 목사에게 적용된 죄는 신사 참배 거부와 백성들을 선동했다는 것이었다.

1943년 5월 17일, 만기 출옥할 날이 가까이 왔을 때 담당 검사는 손 목사를 불러 놓고 사상의 전환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담당 검사는 손 목사에게 "덴꼬(轉向)" 해야 나간다는 위협을 하였다. 그러나 손 목사는 그 검사에게 전혀 굴하지 않고

"당신은 덴꼬가 문제이지만 나에게는 신꼬(信仰)가 문제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손 목사는 끝내 그들의 신사 참배의 유혹과 핍박의 손길을 뿌리치고 거부하여 광주 형무소에서 경성 구금소, 청주 구금소로

옮겨 다니면서 해방이 될 때까지 6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그는 옥중에서도 기도, 찬송,성경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옥중에서도 사랑을 실천하여 옥중 성자로 그 이름이 높았으며 간수들까지도 전도하여 많은 사람들을 주 앞으로 인도하였다.

한센병자의 영원한 벗

애양원 교회는 전남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에 위치한 교회로 한센병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애양원 한센병자 수용소는

미국남장로 교회 선교회의 전도 사업의 일부분으로 1909년 광주 양림에서 시작했으나 1925년, 이 곳으로 이전 확장되었다.


처음에는 9명으로 시작하였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1천 명이상을 수용하는 대규모의 한센병자 수용소가 되었다. 손 목사는

신학교를 졸업한 후 36세의 젊은 나이로 이 곳에 와서 순교할 때까지 목회를 하셨는데 그는 환우들과 함께 음식을 먹었으며

잠자리도 같이할 만큼,사랑을 말로써가 아니라, 몸과 마음을 다하여 실천하면서 살아간 목자였다.
애양원에 부임한 손 목사의 하루는 한센병자들과 함께 하는 생활 이외에는 없었다. 당시 애양원에 있는 분들 중에는 병에서

완쾌된 상태의 분들도 많았지만 그 동안 심한 병마와 투병 과정에서 눈을 잃어버린 사람,손이 꼬부라진 사람, 걸음걸이가

부자유한 사람, 얼굴이 알아볼 수 없을 형태로 일그러진 분들이 많았다. 그들은 부모 형제가 없는 고아들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세상 어디에서도 그들을 따스한 사랑으로 감싸주면서 인간다운 대접을 해 주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이 곳 애양원에서

일생을 보내려는 분들이 많았다.
설사 그들이 자유롭게 밖에 나간다 할지라도 나가는 그 순간부터 만나는 사람들이 자신을 피해 다니기가 일쑤였고, 차를

탄다거나 사람이 모이는 장소인 식당, 다방,극장,목욕탕이나 이발소에 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일이었다. 아무도 그들을

사람으로 대접해 주지 않았고 심지어는 가족들에게까지도 철저하게 외면된 삶을 사는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손 목사는 그들에게 있어서 신체적인 병을 치료해 주는 의사 못지 않은 희망의 상징이었다. 그들이 비록 육체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지만, 그들의 영혼은 찬송과 감사와 기도의 옷을 입혀서 아름다운 성도로 만들어야 한다는 결심이

손 목사에게는 힘이 되어 주었다.

당시 애양원에는 병으로부터 완치된 상태에 있는 분들과 함께 병이 악성으로 진행되고 있는 분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14호실은 애양원 전체에서 가장 상태가 심한 중환자들이 모여 있는 병실이었다. 14호 중환자실에는 같은 환우들도 가기를

꺼리는 곳인데 손 목사는 그 곳에 들어가서 중환자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안아 주면서 기도를 해 주었다.
"당시 우리가 살고 있던 애양원에 딸린 병실로 쓴 가옥은 모두 17호실로 되어 있는데 1호실부터 10호실까지는 비교적 건강한

사람들이 지내고 있었고, 11호실부터 13호실은 경환자실,14호실은 중환자실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 중환자실에 거주하는

몇명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만큼 흥악한 모습으로 병마와 싸우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상처를 한 번 치료하려면 간호원 둘이

매달려도 두 세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온 방안에 진물과 핏자국, 땀들이 엉겨 붙어 도저히 그냥 들어갈 수 없음으로 상처를 보려면 방바닥에 신문지 세 장 정도를

깔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신문을 깔고 들어가려고 하면 그 환우들이 목침을 던지면서 같은 환자끼리 차별을 한다 하여

화를 내곤 했습니다. 이러한 방을 손 목사님은 서슴치 않고 들어가서 맨손으로 방바닥을 치우고 그 곳에 앉아서 그 흥한 환자의

목을 껴안고 이마를 대고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기도 후에 그 곳에서 음식을 나누어 먹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손 목사를 누구나 할 것 없이 사랑하게 되었다. 따라서 모든 교인들이 손 목사님을 너무나 좋아하고 따르니까 그것을

시기해서 손 목사를 지독스럽게 미워하고 헐뜯는 부인이 한명 생겼다. 그 부인은 폐병 환자였는데 손 목사는 새벽 기도를

드린후, 자기를 가장 미워하는 그 부인의 집에 매일 들러서 그의 머리에 안수 기도를 해주었고, 좋은 음식이 생기면 그 집에

가지고 가서 그를 대접했다.
이러한 손 목사님의 모습을 교인들이 보고 "목사님을 그렇게도 미워하는데 무엇하러 가느냐?"고 묻자, 손 목사는 "사랑으로

녹여 내야 합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결국 손 목사는 그러한 사람들을 사랑으로 녹여 낸 사랑의 목회자였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버림받아 의지할 곳 없이 외로이 지내던 한센병자들이 이와 같은 언행이 일치된 사랑이 넘친 신앙 지도를

받으면서 소망으로 살고, 기쁨으로 넘치는 찬송을 부르는 신앙의 소유자들로 변화되게 되었다.

손 목사는 그들의 신앙의 아버지가 된 것이다.
그는 8·15해방과 함께 감옥에서 나오자 곧장 이 사랑의 보금 자리인 애양원 교회를 다시 찾았고 그리하여 교우들의 신앙은

더욱 불타오르게 되었다.

원수를 사랑한 목자

그가 1946년 3월 경남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더욱더 심혈을 기울여 한센병자들과 생사를 같이하면서 그들을 위하여

일하고 있을 때 한 커다란 사건이 터졌는데 그것이 바로 여순 사건이 었다.
1948년 10월 19일이었다. 당시 제주 폭동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서 여수에 집결했던 군인들 중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남로당

계열의 군인 일부가 반란을 일으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반란군이 된 것이다. 이 세력에 동조했던 반란군들은 불과 4시간

만에 여수 시내의 경찰서와 각 파출소, 군청, 역 등 주묘 기관을 장악할 정도로 기세가 등등했다.
순천까지도 반란군에 의해서 점령되면서 두 도시는 삽시간에 무법 천지가 되고 공산 폭도들의 세상이 되어 버렸다. 반란군들은

그 동안의 불만 세력과 좌익 추종 세력을 한데 묶어 인민 위원회를 만들어 자기들에게 동조하지 않는 사람이나 단체는 무조건

잡아죽이는 천인 공노할 민족 대학살의 광란극을 벌렸다
어제까지는 친구를 원수로 만들었고, 이웃이 적이 되어 고발하고 보복하는 인민 재판이 열리는가 하면 계속해서 인민 대회를

열어 공포의 분위기를 고조시켜 나갔다.

이 때에 손 목사의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은 각각 순천 사범 학교와 순천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신앙과 민족 정신에 불타는 이

두 형제는 학교 안에서 기독교 복음을 전하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산주의의 잘못을 폭로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자연히

학교의 공산 프락치들은 가장 먼저 그들을 색출하여 체포하였다. 그리하여 두 형제는 인민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 때에 두

형제는 서로 대신하여 죽기를 자원하였다. 그러자 잔인한 폭도들은 형제를 한꺼번에 무자비하게 총살하고 말았다.
애양원 교회에 손 목사의 두 아들이 반란군에 의해서 순교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사고가 발생한 나흘 뒤인 10월 25일

이었다. 두 아들이 한꺼번에 변을 당했다는 급보를 전해들은 손목사 내외는 물론 애양원 식구들과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반란군이 어느 정도 진압된 26일에 애양원 성도들은 손 목사의 두 아들의 시신을 거두어 교회 앞에 시신을 안치한 후 다음날

27일, 애양원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장례식을 치른 후 지금의 애양원 동산에 묻히게 되었다.
손 목사의 두 아들이 순교될 때 애양원 교회에서는 이인재전도사를 초청하여 부흥회를 열고 있을 때였다. 부흥회 도중에 이런

변을 당하게 되자 부흥 강사는 장례식의 주례까지 맡게되 었다.
장례식은 간단했으나 이 땅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산 제사를 올리는 엄숙한 순간이었다. 그 날 손 목사가 장례식 끝

부분에 고백했던 마지막 인사는 또 한번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한 편의 복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여러분, 내 어찌 긴 말의 답사를 드리리요. 내가 아들들의 순교를 접하고 느긴 몇 가지 은혜로운 감사의 조건을 이야기함으로

대신할까 합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을 나오게 하였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께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 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 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 감사합니다.
끝으로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큰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이 일들이 옛날 내 아버지, 어머니가

새벽마다 부르짖던 수십 년간의 눈물로 이루어진 기도의 결정이요,나의 사랑하는 한센병자 형제 자매들이 23년간 나와 내

가족을 위해 기도해 준 그 성의의 열매로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

사랑하는 두 아들을 떠나 보내는 장례식장에서 억장이 무너지는 쓰린 가슴을 부등켜안고서는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찾아서 아들로 삼겠다는 그 뜨거운 사랑은, 활활 타오르는 예수 사랑의 용광로가 되어서 참석한 사람의 마음은 물론

손 목사를 대하는 모든 분들의 마음을 녹일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 었다.

여수, 순천 반란이 진압된 후 정세는 바뀌었고 동인, 동신 형제를 죽인 자들 중의 하나인 '안재선'이라는 학생도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손 목사는 계엄 사령관에게 찾아가서 "나의 죽은 아들들은 결코 자기들 때문에 친구가

죽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 애들은 친구의 죄 때문에 이미 죽었습니다. 만일 이 학생을 죽인다면 그것은 동인, 동신 형제의

죽음을 값없이 만드는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그 학생의 석 방을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간청은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손 목사는 그 학생을 손재선이라 하여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 손 목사는 재선이를

부산의 고려 성경 고등 학교에 수학하도록 하여 전도사로 키워내는 놀라운 사랑의 역사를 보여 주었다.
양아들로 삼았던 안재선 씨는 성경 학교 졸업 후 잠시 부산의 어느 교회 전도사로 있다가 말년에는 제주도에서 어물 도매

사업을 하다 1979년 12월 서울에서 별세했다. 손 목사님은 실로 주님이 주신 계명을 말씀 그대로 순종하고 복종하여 실천한

20세기 사랑의 사도요 성자였던 것이다.

순교자로서의 최후의 영광

1950년 뜻하지 않는 6·25동란이 이 땅 위에 발발했다. 파죽지세로 38선을 넘어 서울로 쳐들어온 북한군은 한강을 넘어 수원을

점령하고 대전을 빼앗고 대구로 진격하는 한편, 일부는 호남으로 진격하여 호남 일대도 점령하게 되었다. 이 때 교회도 문을

닫고 피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손 목사는 피난하지 않고 교회에 남아 계속 교회 종을 치게 했으며, 자신이 강사가 되어

계속하여 교회에서 특별 집회를 했다. 집회의 주요 내용은 '잘 죽자'라는 것이 었다.

이 때 애양원 교회의 교인들은 손 목사를 피난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했으나 허락을 하지 않자 결국은 교회의 제직들과

교역자들 모두 함께 떠나자고 간청을 하였다. 우선 몸부터 피하고 보자는 제직들의 간청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손 목사는

함께 송별 예배를 드리고 배에 올라가 마지막 찬송을 부른 후 갑자기 혼자만 배에서 가방을 들고 뛰어 내려오는 것이다.
교인들이 "목사님, 왜 피난을 가지 않고 다시 배에서 내려가시는 겁니까?"라고 묻자, 손 목사는 "나는 원래 피난을 가지

않는다고 했지 않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죽는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그리고 만일 내가 피신한다면 일천 명이나 되는

양떼들은 어떻게 합니까? 내가 만일 피신을 한다면 그들을 자살시키는 것이나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하며 피신하기를 완강히

거부하고 제직들만 보냈다고 한다.

그리하여 손 목사는 마침내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 되어 1950년 9월 28일 저녁11시 여수 근교 미평에서 총살당하여

순교의 영광을 간직하였다.
당시 손 목사의 나이는 48세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양들을 보호하고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총의 개머리 판으로 입을 맞아 얼굴이 피투성이 되었으며 마지막 죽음의 자리에서 두 손 모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시다가

산군의 총에 순교를 하셨다.

 

<자료출처: 샘의 근원>

 

 

 

 

 

 손양원목사의 교회사적 의의

      - 김의환목사(손양원목사순교50주년기념대회시 학술강좌 교안)

 

 일찍이 한명동 목사는 손양원목사를 가르켜 "20세기가 낳은 한국교회의 거성입니다. 그는 그 존재 자체로 남에게 은혜를

주는, 언제나 말보다 실천이 앞서는 사람이었습니다"고 했다.
 과연 손양원목사는 한국교회가 낳은 세계적인 성자요, 목회자요, 순교자였다. 손양원목사의 전기를 쓴 안용준목사는 "사랑의

원자탄"이란 표현으로 손목사의 감화력을 표현하였다. 원자탄 같은 그런 폭발력으로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감화를 끼친 그의 생이 주는 역사적인 교훈은 무엇인가?
 손양원목사의 생애와 목회가 남긴 공헌을 간추려 교회사적 의의를 새겨보고저 한다.


 1. 손양원목사는 모범적인 전도자였다.

 그는 1926년 3월 경남성경학교에 입학한 이후 부산 감만동 교회의 외지 전도사로 일하기 시작한 이래 1932년, 34년 2년간

남부민 교회를 시무한 기간을 제하고 줄곳 외지 전도사로 1939년 애양원교회에 부임할 때까지 개척 전도에 전념하였다.그가

개척한 교회는 밀양수산, 울산벙어진, 울산남창, 부산 남부민, 양산원동교회 등이었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였다는 이유

때문에 시찰회에서 순회 전도비를 지불하기를 거절하였음에도 양산, 김해, 함안지역을 다니며 전도에 힘썼다.
 그의 전도는 옥중에서도 그칠줄 몰랐기 때문에 결국 독방으로 옮겨지기까지 하였다. 검찰조서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그는

일본 천황폐하를 신으로 받아드리지 않으며 신사 참배를 거절하는 이류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하나님만이 유일신이며

예수님만이 속죄주인 사실을 전하는 전도의 기회로 삼았다. 물론 그런 전도가 오히려 자신에게 불리한 재판 결과가 내려질

것을 잘 알면서도 자신의 안위보다 심문하는 검사를 향한 전도에 힘쓰므로 복음전파의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하였다.

마치 아그립바왕이나, 베스도, 벨릭스총독의 재판장에 선 바울의 변증자세와 같은 전도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사형장에 끌려가는 도중에도 전도함으로 사형직전까지 전도한 토마스 선교사를 연상시켰다.


 2. 참목자상을 보여준 목회자였다.

 애양원교회를 시무하면서 양떼들을 위하여 설교한 메시지는 철저한 성경중심적인 "말씀"의 사자였다.그 자신의 설교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의 설교란 강도학원리 꼭 '성경말씀에만 터를 닦고'라고 한 대로 66권이 본문이요,제목이요,대지도 소지도 이를 기초로

합니다. 성경에서 성경을 전부로 삼고 성경으로,성경을 풀고 싶습니다". 성경에 묻고 성경에서 대답하고 싶습니다. 서론도

성경이요, 결론도 성경이되고자 합니다. 즉 성경으로 시작하여 성경으로 마치고 싶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대도와 기독교의

교리를 분명히 전하고 싶습니다."(이광일저,손양원목사의 생애와 사상, PP.143-144)

 손목사는 이렇게 말씀중심으로 양육하는데 모범을 보일 뿐 아니라 육적으로 어렵고 외로운 양떼들을 돌아보는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참목자상을 보여주었다.
 장녀되는 손동희권사의 증언에 의하면 손목사님이 환자심방중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내며 극진한 사랑과 위로를 베푼 병동은

의사들도 치료 이외는 지체하며 머물기를 주저하는 중환자실 바로 그 환자들에게 손목사의 극진한 사랑의 손길이 항상 함께

하였다는 사실이다.

 
 6.25 동란시 장로 집사들이 피난을 위하여 배를 준비하여 손목사와 가족들의 피난을 재촉하였으나 양들을 버리고 목자가

어떻게 자신의 안전만을 위하여 떠날 수 있겠느냐 하시면서 거절하였다. 끝내는 양떼들과 함께 공산치하의 핍박을 견디시다가

순교의 제물이 되신 것이다. 선한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목자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그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

참 목자요 선한 목자시었다.

 목자로서의 그의 모범은 맡겨진 양떼를 사랑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두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해줄 뿐만 아니라

양아들로 삼아 키우는 철저한 원수사랑에도 나타났다. 큰딸 손동희권사의 증언에 의하면, "어떻게 남은 가족의 동의도 없이

원수를 사랑하되 양자로 가족으로 데려올 수 있느냐"는 딸의 강한 항의에 손양원목사는 이렇게 대답을 하며 두 오빠를 죽인

원수를 오빠로 받아들일 것을 타일렀다고 한다.
 "나는 하나님의 명령따라 계명을 지키기 위해 감옥에가서 5년간 옥고를 이루었는데 같은 하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

명하셨으니 순종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십계명도 요약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인데 계명하나는 지키고 다른 하나는

불순종하면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이러한 권면도 듣지 않고 오랫동안 아버지의 처신에 반항한 딸을 인내와 사랑으로 끝내 설득시켜 가정의 평화를

이룩했다고 한다. 흔히 목회자들이 교회 목회에는 성공하면서 가정목회에 실패한 경우들이 있다. 그러나 손목사의 가정은

이러한 목회결손이 없는 가정이었다. 두아들이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신앙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죽기

전까지 전도하면서 순교할 만큼 가정에서 신앙적으로 훌륭하게 양육시켰다는 점에서 손양원목사의 목회는 먼저 가정목회에서

모범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3. 순교자의 모델로 한국교회의 수난사를 빛냈다.

 순교의 역사는 교회의 역사만큼 길다.교회사는 순교자의 피로 점철되며 기록되었다. 그 긴 순교역사 가운데 손양원목사

부자의 순교기록은 가장 빛나는 페이지를 장식하리라.
 두아들의 순교를 특별하신 하나님의 축복으로 받아들여 열가지 감사조건을 들어 감사한 사실이며, 두 아들을 죽인 범인을

양자로 삼아 전도자로 키운 일이며, 순교사건 다음 주일 거액의 감사헌금을 바친 일이며, 2년 후에는 자신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순교의 제물로 바쳐진 일들은 실로 순교사 가운데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원형적인 순교사보가 아닐 수 없다.
 오년간에 걸친 긴 감옥생활, 뼈속까지 스며든 냉기를 가려줄 따듯한 옷이나 덮을 게 없는 환경속에서 겨울의 추위를 견디어야

하는 긴 형고는 형언할 수 없었으리라. 그럼에도 그런 극한 상황속에서도 그는 고난을 신앙으로 승화시켰다. 옥중에서 가정에

보낸 서신은 옥고중의 그의 신앙적 수용자세를 보여준다. 옥중에서 쓰라는 반성문 제출의 요구를 받은 손양원목사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바쳤다.

 하늘에 어찌 두 해가 있을 수 있고
 일국에 두 임금이 있을 수 있으랴
 우주의 주인공이 어떻게 둘 되겠으며
 십자가의 도외에 구원이 또 어디 있으랴
 세상에는 주인도 많고 신도 많으나 여호와
 이외에 다른신이 내게 없구나
 석가도 유명하고 공자도 성자이나
 오직 내구는 홀로 예수뿐이니
 내 어찌 두신을 섬길 수 있으며 예수님 이외에
 속죄자 어디 있으랴.이신을 위하여 아까울 것
 무엇이며,이주를 버리고서 내가 어디로 가랴

 (손동희저, 나의 아버지 손양원목사, p.89)

 그는 청주 교도소 독방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써서 가족에게 편지를 보냄으로 오히려 밖에 있는 가족들을 위로 하려

하였다.

 빈방 홀로 지키니 고적감이 밀려오누나
 성삼위 함께 하여 네 식구(四食口) 되었도다
 온갖 고난이여, 올테면 다 오너라
 괴로움 중에 진리를 모두 체험하리라
 
 본가를 멀리 떠나 옥중에 들어오니
 밤 깊고 옥 깊고 마음 가득 수심도 깊다
 밤 깊고 옥 깊고 마음 가득 수심 깊으나
 주와 함께 동거하니 기쁨이 충만하도다

 옥중고생 4년 길고 긴 날이나
 주와 함께 동락하니 하루와 같도다
 지난 4년 평안히 보호해 주신 주는
 미래에도 그리하실 줄 확신하노라

(손동희저, 나의 아버지 손양원목사. p.96)

 마치 자신의 옥고를 걱정하는 빌립보교인들을 향하여 바울이 자신의 옥중삼락(獄中三樂)을 빌립보1장에서 옮겨놓은 것과

비교되는 성시(聖詩)가 아닐 수 없다.
그는 실로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송죽같은 순교자였다.
주기철목사의 신앙을 한 마디로 김인서목사는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신앙'으로 표현하였으나 손양원목사의 신앙은 '날마다

죽는 신앙'으로 표현함이 적절하리라.

 

*옥중서신 


 4. 정통신앙의 수호자요,투사였다.

 일제말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기치 아래 한민족의 민족정신을 말살시키고 조선의 일본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본신을 모신

신사에 참배를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일제 경찰의 강압에 못이겨 장로교총회는 신사참배요구를 국민의례라는 차원에서

수용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일부 목회자 가운데 신사참배의 타당성을 일본신민의 애국적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권장하고 나서는 친일적인 목사들도 있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투옥된 주기철목사 가족은 그들에 의하여 목사관에서

쫓겨나는 일까지 일어났다. 또 일부 목회자들은 친일적동기에서는 아니었으나 신학적인 차원에서 일본신사에게 참배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합리화 시켰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대로 믿는 정통적 신앙을 소유한 대부분의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은

그것이 제일 계명을 어기는 범죄사실임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정통적신앙을 소유한 목회자들가운데 극히 일부 소수의

목회자들이 적극적인 신사참배반대운동에 참여하여 일제와 맞섰다. 그 중에 가장 선봉에서 이운동을 주도한 주기철목사,

한상동목사등과 함께 손양원목사는 신사불차배운동을 교회의 순결 및 정통신앙의 수호차원에서 전개하였다.
 그러한 신사불참배운동은 일제의 극심한 박해를 불러 일으켰다. 그 박해의 와중에도 정통신앙을 끝까지 지키다 참기힘든

고문과  5년 간의 긴 옥고를 치르며 값진 대가를 지불하였다.
 

 5. 교회관에 있어서 어거스틴적 전통을 따른 지도자였다.

 교회사는 항상 교회의 순결(Purity)과 연합(Unity)사이에 긴장이 있어온 사실을 증거한다. 초대교회시대에 로마 박해중에

변절한 지도자와 평신도들을 기성교회가 어떻게 수용할것인가? 교회의 순결을 지키기 위하여 교회는 이들을 어떻게 처리

하여야 하는가? 이런 문제가 박해가 끝난 후에 교회가 당면한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러한 교회론적 잇슈는 해방후

한국교회도 피할 수 없었던 과제였다.
전후의 한국교회에도 도나투스파의 전철을 밟은 재건파 교회의 탄생이 있었다.
그러나 손양원목사는 순결을 내새워 연합을 깨는 도나투스적 입장을 따르기보다 어거스틴적 교회론에 입각한 관용론을 따랐다.

고려신학교의 설립당시 고신운동에 참여하였으나 그것은 미국의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설립에 참여한 클리어런스 맥카트니

 (Clearance McCarthney)의 노선을 따름에 비할만한 전통적 교회론의 발현이었다. 교회는 회개한 죄인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잘못을 인정하고 돌아오는 한 탕자의 아버지처럼 수용하는 교회의 모습을 교회사는 증언하고 있다. 어쩌면 손양원목사의

이러한 교회론적 처신은 두 자식을 살해한 원수도 회개할 때 양자로 받아드린 아가페적 목회철학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 진리를 거절하는 이단은 수용할 수 없어도 진리를 따르지 못하고 일시적으로 배도한 후 회개하고 돌아오는 형제는

받아야하는 것은 교회사적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신사참배를 일제의 강압에 의해 수용한 교회는 부끄러운 '상처를 입은 교회'는 될지언정 그 교회가 다시 그 사실을 회개하고

돌아올 때 재건파에서 주장하는 '마귀당'교회는 더 이상 아닌 것이다.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함께한 한상동목사가 해방

후에도 한국교회의 정통주의 신학운동을 위하여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협력을 하면서도 소위 "총회파"로 알려진 장로교 주류

교회에 속하여 전국교회를 다니며 부흥회를 인도하며 회개운동을 통한 영성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감당한 사실은 교회사적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손양원목사의 목회자로서의 그의 모범성은 그의 순교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의 삶 전체가 산순교의 삶이었다.

그는 민족주의자도 아니요, 신학자도아니요, 부흥사도 아니었다. 주어진 목장에서 최선을 다하며 말씀대로 살다 말씀대로 삶을

마친 성자적 목회자였다. 그의 삶이 주는 감화와 교회사적인 의의는 순교이전에 참목자상을 보여준 사실과, 교권장악이나

교회의순결을 위해 교회의 분열을 쉽게 여기는 오늘의 한국교회의 현실에 참 지표적 사표(師表)를 보여준 사실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교회의 오늘의 부흥이 터틀리안의 말처럼 손양원목사같은 순교의 피를 보신 하나님의 축복임을 생각할 때 손양원목사를

한국교회에 선물로 보내주신 사실에 감사하며 이글을 맺는다.

 

<자료출처: CCM 부르는 노래>

 

 

 

 

손양원목사 순교유적지

         - 순교기념관, 애양원, 기념비, 묘

 

손양원목사 순교기념관

 

손양원목사 순교 기념관


2004년5월26일 문화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발표한 손양원 목사 유적지 테마파크 개발구상이 가시화 되고 있다.

6월23일에는 성산교회(애양원)에서 여수시장을 비롯한 다수 관계자들이 모여 회의를 갖고 구체적인 유적지 개발계획을

발표한다.

총공사비 500여억원규모로 여수시는 2005년3월까지 설계와 발주를 마치고 현재 손양원목사 순교기념관이 위치한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일원에서 공사를 시행한다. 손양원목사 유적 테마공원 5만m2, 테마전시관 연면적 6천m2  각3동을 짓고,

휴양 문화시설로는 기념 광장 1만m2등 상업시설, 편의시설,등이 들어선다. 이 사업에 대한 공사비로 민자 138억원을

포함해 486억원이다.

 

 

손양원목사 순교 기념관

 

순교비

 

손양원 목사를 기리며

 

기념관 내부 전시실

 

기념관 내부 전시실

 

기념관 내부 전시실

 

기념관 내부 전시실

 

기념관 내부 전시실

 

손양원 목사와 기도  

 

손양원 목사

 

 

손양원목사 


1939년 7월 14일에 여수 애양원 교회로 부임하였다. 손 목사는 항일정신과 신사참배 반대는 신학교 시절부터 남달랐다.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부산지방을 돌면서 신사 참배 반대를 외쳤다. 이로 인하여 경남 노회에서 순회 강도사 사역을 못하게 하기도 했다. 손 목사는 애양원 교회에 부임해서도 설교 때마다 신사 참배반대를 외쳤으며 손 목사가 가는 곳곳마다 신사 참배에 대한 부당성이 카랑카랑한 검사의 논고와도 같이 지적되었다.

1940년 9월 25일, 손 목사는 수요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막 들어오자 기다렸던 여수 경찰서에서 나온 두형사에 의해 연행되어, 재판과정에서 1년 6개월 형을 받았으나 구속 기간까지 하여 거의 3년의 세월이 흘렀갔다 그 때 손 목사에게 적용된 죄는 신사 참배 거부와 백성들을 선동했다는 것이었다. 1943년 5월 17일, 출옥할 날이 가까이 왔을 때 담당 검사는 손 목사를 불러 놓고 사상의 전환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담당 검사는 손 목사에게 "덴꼬(轉向)" 해야 나간다는 위협을 하였다. 그러나 손 목사는 그 검사에게 전혀 굴하지 않고 "당신은 덴꼬가 문제이지만 나에게는 신꼬(信仰)가 문제이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는 8·15해방과 함께 감옥에서 나오자 곧장 이 사랑의 보금 자리인 애양원 교회를 찾았고 그리하여 교우들의 신앙은 더욱 불타오르게 되었다. 5년여만의 서로 만났던 벅찬 감회도 잠간, 1948년 10월 25일, 여순 사건으로 두 아들이 잃게되는 비운을 맞게되었다.  여수, 순천 사건은 빨리 진압되어 정세는 바뀌었다. 동인, 동신 형제를 죽인 자들 중의 하나인 '안재선'이라는 학생도 체포되어 총살을 당하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손 목사는 계엄 사령관에게 찾아가서 "나의 죽은 아들들은 결코 자기들 때문에 친구가 죽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 애들은 친구의 죄 때문에 이미 죽었습니다. 만일 이 학생을 죽인다면 그것은 동인, 동신 형제의 죽음을 값없이 만드는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그 학생의 석방을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간청은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손 목사는 그 학생을 손재선이라 하여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 손 목사는 재선이를 부산의 고려 성경 고등 학교에 수학하도록 하여 전도사로 키워내는 놀라운 사랑의 역사를 보여 주었다. 양아들로 삼았던 안재선 씨는 성경 학교 졸업 후 잠시 부산의 어느 교회 전도사로 있다가 말년에는 제주도에서 어물 도매 사업을 하다 1979년 12월 서울에서 별세했다. 손 목사님은 실로 주님이 주신 계명을 말씀 그대로 순종하고 복종하여 실천한 20세기 사랑의 사도요,성자였던 것이다.

1950년 뜻하지 않는 6·25동란이 이 땅 위에 발발했다 이 때 애양원 교회의 교인들은 손 목사를 피난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했으나 허락을 하지 않자 결국은 교회의 제직들과 교역자들 모두 함께 떠나자고 간청을 하였다. 우선 몸부터 피하고 보자는 제직들의 간청한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손 목사는 함께 송별 예배를 드리고 배에 올라가 마지막 찬송을 부른 후 갑자기 혼자만 배에서 가방을 들고 뛰어 내려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손 목사는 마침내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 되어 1950년 9월 28일 저녁11시 여수 근교 미평에서 총살당하여 순교의 영광을 간직하였다. 당시 손 목사의 나이는 48세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양들을 보호하고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총의 개머리 판으로 입을 맞아 얼굴이 피투성이 되었으며 마지막 죽음의 자리에서 두 손 모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시다가 공산군의 총에 맞아 순교를 하셨다.

 

기도로 산 손양원 목사  

 

손양원 목사 생가

 

손양원 목사님 부친 손종일 장로님 회갑때 찍은 모습이다. 손양원 목사님은 3남 1녀중 장남이다.

손양원 목사, 손문준 목사, 손의원 목사 그리고 당시 미국 하와이에 살고 계시던 여동생이 있었다.

현재의 생가 자리에는 먼 친척뻘 되는 조카가 살고 있다. 생가는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685번지다.

그리고 손양원 목사님이 다녔던 모교회는 칠원교회이다.

 

손양원목사님 당시 교회 모습

 

1939년7월14일 부임해서 1950년9월28일 순교 하실 때까지의 애양원교회의 외부모습이다. 현 애양원 교회의 모습은

손 목사님 순교 이후에 종탑 부분과 강단 부분이 증축되었다.

 

1939년7월14일 부임당시 애양원 사택 앞에서 찍은 가족 사진 

 

당시에는 손목사님의 아버지 손종일장로님도 함께 계셨다. 애양원 안에는 환우들만 살 수 있었으므로 목사님 사택은 병원직원들이 사는 건강 마을에 있었다. 그래서 손양원목사 소원이 자신도 병이 들어서 애양원 안에 들어 가서 환우들과 함께 사는 것이었다.  

 

당시 예배드리던 모습  

 

손양원목사와 당회원들

 

손양원목사님 당시 애양원교회의 당회원들이다.지금 생존해 계신분은 한분도 안계신다.

사진에 신풍교회당이라고 나와 있는데 애양원교회는 1909년 4월25일 광주 봉선리에서부터 시작이 되었다. 그래서 교회이름이

설립당시에는 봉선리 교회였다. 현재의 애양원으로 1925년에 이주한 이후에는 지역의 이름을 따라 신풍교회당이라 불렀다.

1936년에 애양원교회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물론 애양원이라는 이름은 손목사님 부임전에 바꾸어진 이름으로 손양원 목사와는 상관이 없는 이름이다.

그 이후 1982년이 성산교회로 바뀌어서 현재 공식적인 명칭은 성산교회이다.  

 

 

안재선과 함께 부흥회 인도

 

서울 남대문교회 부흥집회시 안재선과 함께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함께 다니는 것이 재선이에게 안좋은 영향을

끼쳐서 후에는 같이 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애양원 정문에 선 손양원목사

 

손양원목사는 별명이 삼경목사이다. 손양원목사를 만나면 세 번 놀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손양원목사를 만나면 외모가 멋지게 생겼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그 외모가 초라하고 볼품이 없어서 첫 번째로 놀라고,

다음으로 그 조그마한 체구에 품어져 나오는 소리에 놀라고, 세 번째는 설교말씀에 놀란다고 한다. 그래서 별명이 삼경목사다.

 

애양원 원장 손양원 목사와 애양원 직원들 , 1945.9.10- 10.15 까지 임시로 원장을 겸임 하였다. 

 

한센환우를 입으로 빨아서 치료하시는 손양원 목사

 

한센병에 걸리면 감각 기능을 잃게 된다. 그래서 발이나 손에 상처가 나도 아픈줄을 모른다. 뜨거운 물에 넣어도 뜨거운줄을

모른다.

손목사님이 부산 감만동(戡蠻洞)에서 목회를 하실 때 한 한센환우가 발에 커다란 상처가 났는데 보니 상처가 아주 깊어 그대로

두면 다리를 절단해야 할 형편이 되었다. 그래서 손양원목사님이 그 환우의 깊은 상처를 입으로 빨아 치료를 해주고 있는

모습이다. 손목사님의 치료로 상처가 나아 건강하게 살다가 죽었다한다. 

 

손양원 목사(왼쪽에서 2번째)와 김구 선생(왼쪽에서 3번째)

 

해방 후 김구 선생이 자신이 운영하던 학교에 손 목사를 교장으로 초대하였으나 " 나는 환우들을 버리고 갈 수 없다" 고

거절하였다.

 

성산 초등학교 졸업생인 3명의 여학생들과 함께 

 

나환자를 위해 1915년에 설립한 학교로 당시는 봉선리 국민학교였으며 1971년 폐교되었다. 또한 1946.9.8. 나환자를 위한

성산중학교를 개교 하였고 1971년 폐교되었다.

 

한성신학교 옛 건물 사진

 

1955.4.12 애양원은 나환자를 위한 대학과정 한성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962년에 폐교되었다. 

 

한성 신학교 학적부 

  

출옥 후 옥종면 성도들과 함께

 

신사참배를 안하기위해 애양원을 떠나서 하동군 옥종면 산속에 숨어 살면서 신앙을 지켜왔던 성도들이다. 둘째 줄 꼬마가 둘째아들 동인으로 신사참배를 하도록 일제는 군입대를 시키고자 하였으나 온 가족이 흩어져 신사참배를 안하도록 의논하였다. 이에 동희와 동장이는 구포 고아원으로 동신이는 옥종면으로  동인, 동수, 어머니는 남해 산골로 각 흩어져 살다가 해방 후 모이게 되었다.

 

손양원 목사가 사용하던 성경 책, 1937년 발행 관주성경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라는 성구가 첫 장에 써있다.

 

성경

 

손 목사의 설교노트, 1925년도

 

손양원 목사의 설교노트

 

김수남 권사가 받아 쓴 손양원 목사의 설교노트

 

옥중서신

 

손양원목사 순교 기념관에는 이곳에 올려져 있는 사진 이외의 많은 사진들과 손양원목사님의 친필 설교 노트, 옥중편지,

성경 등 많은 유품이 전시되었다. 그리고 당시 손양원목사님이 활용하셨던 고서들도 전시되어 있다.  

 

청주구금소에 있는 손목사님에게 어린딸이 보낸 편지   

 

손양원목사 옥중 생활 모습

 

손양원목사가 일제시대 때와 육이오 사변때 옥중생활 하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목사님은 언제 화장실 옆에 자리를 하셨다.

그래서 키가 큰 사람들의 발을 가슴에 품고 잠을 잤다. 주먹밥은 하나님께서 자신은 키도 조그마하게 만드시고 체구 적게

만드셔서 조금만 먹어도 된다며 주먹밥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손양원목사 순교장면

 

공산군에게 9월13일 붙잡혀 가셔서 여수 경찰서에서 계시다가 9월28일 끌려 나가 여수시 미평 과수원에서 총에 맞아 순교

하셨다. 손목사님은 순교를 예감하시고 여수 경찰서에서 순교 장소까지 계속 공산군에게 전도를 했다. 그러자 공산군들이

시끄럽다고 총 개머리판으로 목사님의 입을 내리쳐서 입이 짖이겨졌다. 그럼에도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전도를 하셨다.

저녁 11시쯤에 순교하셨다. 현재는 여수 입구 새중앙교회 옆에 순교비가 서있다. 관리는 여수 산돌교회에서 하고 있다.

 

순교자 손양원 목사와 사모, 안고있는 아들은 손 목사님이 순교하신 날 낳은 아들이다.

 

순교하신 손목사님 시신과 함께한 가족들

 

정면에 누워계신 분이 순교하신 손양원목사님이시다.

우측부터 둘째 딸 손동임씨, 그 아래 막내 딸 손동연씨, 정양순 사모님, 사모님이 안고 있는 갓난 아기는 유복자 손동길

목사이고, 그 우측으로 양 아들 안재선씨와 셋째 아들 손동장씨이다. 큰 딸 손동희씨만 빠져있다.

동인,동신씨를 죽인 안재선이 손목사님의 양아들이 되어서 손목사님의 장례식에서 맏 상주가 되었다. 안재선씨는 1988년에

목암으로 소천되었다. (막내는 손동길 목사, 세째 사위 김원하 목사, 큰 외손자 박유신 목사)

 

손양원 목사 장례식

 

손양원 목사 하관식

 

손양원 목사의 생전의 옷 솜바지

  

손양원 목사의 생전의 옷 조끼

 

순교자 동인, 동신 장례식, 1948. 10.24 애양원 교회 장례식 장면

 

1948. 10. 19 여순 사건 발생으로 동년 10.21 공산폭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다.

동인 나이 23살, 동신 나이 18살이었다.

 

안장후 손동인, 동신씨의 무덤 앞에선 가족들과 교우들

 

사진 정면에서 왼쪽이 손동인의 묘이고 오른쪽이 손동신씨의 묘이다.그리고 보이는 비석은 두 아들의 묘 비석이다.

그 비석뒤에 손양원목사님이 안장되었다. 1948년 10월 21일 여순사건으로 두 아들이 순교하자 손목사님이 친히 두 아들의

묘를 쓰시고 현재 안장된 자리에서서 내가 죽거든 이 자리에 나를 묻으라고 했다. 그래서 순교하신 손목사님을 순교지에서

모셔와서 목사님께서 말씀한 자리에 안장을 하게 되었다. 손목사님이 안장 당시 사모님이 내가 죽거든 목사님과 합장을

해달라고 해서 1977년 11월 26일 사모님이 부산청십자 병원에서 돌아가셨는데 모셔와 합장을 했다.

그래서 현재 애양원에 있는 동도섬의 무덤들은 두아들과 합장된 손양원목사님의 묘가 있다. 

 

순교자 손동인

 

1925년 11월 6일 손양원 목사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절대 하나님 중심으로 살다가 1948.10.21  여순사건 때 공산폭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23세에 순교하였다.

 

 

안재선

 

손양원 목사 순교 후 가족들과 함께한 안재선 (동인 동신 형제를 주였으나 손 목사님이 양자로 삼았다) 

  

 

아홉가지 감사 

 

손양원 목사 일화 

 

대한민국건국훈장, 1995.8.15 

 

 

 

 

 

  

 

  애양원교회, 순교비, 손양원 묘  

 

애양원 순교유적지

 

애양원 예배당, 현 성산교회

 

성산교회(애양원교회)는 미국 남장로교 한국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으로 시작되었다.

벨 목사와 오웬 목사가 파송 되었고 1904년 12월 25일 성탄에배를 드리므로 선교가 시작되었다. 1908년 3월 18일 광주에서

교회가 창립되었다. 1916년 세례교인 56명이 투표로 이종수 장로를 세움으로 조직교회가 되었다. 1916년 이후 찾아드는

한센병 환자가 늘어나 1924년에는 560명에 달하게 된다. 그 후 부터 광주 한센병자촌을 순천으로 옮기려는 준비를 해서 1928년

2월10일 현재 위치로 이전 건축되었다.

이후 1934년 4월 4일 예배당 재건되고 1935년 당시 애양원 원장인 윌슨 박사가 본원의 이름을 환우들에게 현상공모하여

"애양원" 이라는 이름이 채택되었다. 이 후 애양원교회로 불렀다.

손양원 목사는 애양원교회 제2대 담임자로 1939년 7월14일에 부임하여 목회 하였으며 1945년 9월10일 부터-10월 15일 까지

애양원 병원장을 겸임 하였다.  1939년 일제에 항거한 순천노회의 :원탁회사건" 으로 손양원 목사와 장로들이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손양원 목사는 1950년 6.25 한국전쟁 당시 신앙을 지키며 공산군에 대항하다 애양원 환자들과 함께 순교하였다.

1982년 2월28일 본원의 아이들을 보호하자는 취지로 교회 이름을 성산교회로 바꾸어 현재 사용하고 있다.

  

문화재 예배당 연혁 

  

애양원 예배당, 현 성산교회

 

교회 내부

 

초기 애양원교회 사진 (애양원역사박물관 사진)

 

애양원과 최흥종 목사 (애양원역사박물관 사진)

 

포사이트 선교사의 한센병 환자 치료에 감동을 받아 목사가 된 후 나환자 선교와 사회구원에 힘썼다.  

 

성산교회 역대교역자  (애양원역사박물관 사진)

  

손양원목사 순교기념비

 

손양원목사 순교기념비 뒷면

 

손양원 목사, 정양순 사모 묘

 

애양원 동쪽 끝인 동도섬에는 1950년 9월28일 순교하신 손양원 목사의 묘소가 자리잡고 있다.

모두 세개의 묘소가 있는데 앞의 두개는 1948년 10월21일 순교한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동인, 동신의 묘이다.

뒤의 묘소는 손양원 목사님과 1977년 11월26일 소천하신 정양순 사모님이 합장되어있다.

  

손동인, 손동신의 묘 (앞의 두 묘소) 

 

손동인, 손동신의 묘비

 

동인, 동신 묘비 뒷면

 

<자료출처: 섬김, 그 아름다운 향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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