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호> 낙태에 대한 견해(낙태 어떻게 볼 것인가? 2000년 03월 04일
낙태 어떻게 볼 것인가 ?
1.서론 : 생략된 질문
1989년에 나온 정부 조사의 한 보고서에 의하면 지난 1년간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신생아는 60만명이며,인공유산된 태아는 이의 2배가 넘는 1백 20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또한 우리나라 기혼 여성의 과반수가 넘는 53%가 인공 유산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데,이것을 연령별로 보면 40 - 44세가 65%이상이며,특히 서울 지역에서는 71%나 된다고 한다. 또한 의학계가 조사한 다른 의학 보고서에 의하면,현재 서울 지역의 1년 낙태는 약 60만 건이며,전국적으로는 1백 50만건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나라 낙태의 문제는 어느정도 세계 공통의 문제이다.그러나 낙태에 있어서 우리나라에만 나타나는 특수한 현상들이 있다.
첫째,낙태에 의하여 죽어가는 대부분의 태아는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다. 둘째,우리나라 피임의 절대 다수는 일회용 불임 수술이다.즉 우리나라 사람들은 복잡한 방법보다는 단칼에 잘라버리는 불임 수술을 절대적으로 선호한다. 세째,낙태가 이렇게 성행할 때까지 그것이 한번도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하지 않았다.
선진 외국에서는 벌써 오래전부터 "낙태는 살인이다"라는 주장과 "낙태는 이혼과 마찬가지로 선택적인 행위일 뿐이다"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서 각층의 사람들이 심각하게 토론했으며,이런 토론은 지금도 강렬하게 진행되고 있다.
낙태에 대해서 분명히 찬반 양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찬반 양론이 완전히 생략된 상태 이것이 우리나라의 희한한 현실이다
본 연구에서는 낙태에 대해 지금까지 주로 서구에서 논의되어온 찬반 양론을 서술하고 각 주장의 문제점을 제시한후 낙태에 대한 기독교 윤리적 판단을 시도하였다.
2. 본론
제 1장 낙태에 대한 변호
제 1절 찬성론
ㄱ. 여성 해방운동의 시각
지금까지의 남성 중심적 가부장적 사회는 여성을 언제나 "아이낳는 사람"으로 규정해 왔으며 하나의 개인이 아닌 남성과 자녀와의 관계속에서 여성을 규정해왔다. 과거의 여성 해방운동이 상징적인 성과 이상을 거두지 못한 이유는 효과적인 피임방법과 안전한 낙태 수술을 제공할 정도로 의학이 발달하지 못했기때문이다. 피임방법이 여성 스스로 조정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이른 최근의 사태는 극히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필이나 루프등의 피임방법은 실패율이 1%-3%에 이른다. 피임이 실패했을 때는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피해를 입는쪽은 여성이며 여성은 원하지 않은 임신을 하게 되었을 때는 불법적인 낙태 수술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미국의 경우에 있어서 많은 주가 산모의 생명이 위험하지 않는 한 낙태 수술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 임신과 출산에서 오는 사망률이 낙태 수술에서 오는 위험보다 거의 10배가 높다. 출산의 위험과 더욱 안전한 낙태 수술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행위는 여성의 고유한 권한이어야 한다.
원래 가족 계획은 페미니즘에 뿌리를 둔 생거(Margaret Sanger)여사의 담대한 행동과 사상에서 출발했다. 원래 가족 계획의 처음명칭은 '산아제한동맹'이었으며,그 목적은 여성에게 "산아제한"의 정보와 시설을 제공함으로써 여성을 해방시키고 사회의 선을 진착시키는 것이었다.
가족 계획 운동은 피임이 실패했을 때 - 혹은 피임조치를 사용하지 않았을 때 -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느냐는 문제를 오랫동안 토론하지 않았다. 또한 여성을 자유롭고 독립된 개체로 보는 생거 여사의 페미니스트 견해보다는 어머니로 보는 견해를 오랫동안 채택했다. 그리하여 1968년 말에 낙태 금지법의 철폐를 어쩔 수 없이 지지하는 단계에 오기까지 굉장한 진통을 겪게 되었다.
모든 기술과 마찬가지로 산아제한의 기술 자체는 가치 중립적이다.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이며,어떤 것을 사용하고 그 사용의 결과가 어떤 것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이다. 여성들이 상아제한 기술에 관계된 가치를 결정하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산아제한은 더욱 많은 여가를 주는 새로운 노동경제하에서 여성을 자유롭게 하는데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ㄴ.낙태의 변호
낙태를 반대하는 대부분의 논리는 주로 태아가 임신의 순간부터 인간이며 인격체라는 전제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태아가 사람이라는 것을 설명하는데 온 신경을 쓰면서도, 어떻게 여기서부터 낙태 불가능성의 결론을 내리느냐는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태아가 임신의 순간부터 사람이라는 가정을 일단 받아들인다고 하자. 만약 임신한 여성이 아이를 낳으면 죽게 되는 심장병에 걸렸다고 하자. 그러면 사람인 태아도 생명권을 가지고 산모도 생명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동등한 생명권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경우 산모가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실시하는 낙태는 진정한 살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는 오직 두 사람만이 관련되어 있으며, 그중에서 한 사람의 생명은 위협을 당하고 다른 사람은 위협을 한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무죄이다. 위협을 하는 사람이 잘못해서 위협하는 것이 아니고 위협을 받는 사람이 잘못해서 위협당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의 위협을 받는 여성은 - 비록 아이의 죽음을 가지고 올 때에도 - 자신의 생명을 보호할 수 있다.
산모의 생명이 위험하지 않을때에도 여성은 자신의 육체에 대하여(in and to her body) 일어나는 것을 결정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생명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다른 사람의 육체를 사용할 권리를 가진 것도 아니며,다른 사람의 육체에 대한 지속적인 사용이 허락되어야 하는 권리를 가진 것도 아니다. 비록 그것이 그 사람의 생명을 위한 경우라고 하더라도. 그러므로 생명권은 낙태 반대자를 도울 수 없는 개념이다.
생명권은 단순히 살인을 당하지 않을 권리가 아니라 불의하게 살인을 당하지 않을 권리이다. 만약 내가 그를 불의하게 죽이지 않는다면,나는 그의 생명권을 침범하는 것이 아니며,그러므로 나는 그에게 불의를 저지른 것이 아니기때문이다. 강간에 의한 미생아는 전혀 산모의 육체를 사용할 권리가 없으며,이 경우의 낙태는 그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 아니며,불의한 살인이 아니다. 강간에 의한 임신이 아닌 경우에도 미생아가 그것을 요구할 수 있는 경우를 제외한 모든 경우에 있어서,산모는 건강,다른 이익과 관심,사회에 대한 권리를 그 미생아를 살리기 위하여 9개월을 희생해야 할 도덕적인 필요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태아는 임신의 순간부터 사람이라고 가정해 왔다. 그러나 임신 초기의 낙태는 분명히 사람을 살인하는 것이 아니며,이 글에서 이런 경우를 토론하지 않았다
제 2장 낙태에 대한 반대 의견
제 1절 낙태의 실제와 영향
ㄱ. 낙태의 실제
낙태란 발육하는 아기가 생존하기 위해 생성된 초기에 일어나는,일종의 임신 중절로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이 자발적으로 발생할 수도 있지만 (이러할 경우에 '유산'이라고 칭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 이 사건은 인위적으로 유발될 수 있다.
초기 낙태는 '월경규칙'이라는 완곡어적 어법으로 표현되는데 이것은 한개의 주사기가 달린 부드러운 프라스틱 관을 자궁안으로 삽입하여 자궁안의 내용물들을 흡입하여 빨아들이는 방법이다.
전기낙태는 전체 임신기간중 1/3(12주-14주이전)기간에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는데 진공흡입술 방식이 가장 널리 이용된다.이 수술은 대략 5분내지 10분이 소요된다. 자궁경부는 직경에 눈금이 새겨진 자궁소식(쇠막대기)가 삽입됨으로써 확장된다. 이때 태아와 태반이 흡인력에 의해 제거된다. 자궁내로 삽입되는 흡입관은 속이 빈 금속혹은 프라스틱제 기구이다. 이것은 긴 프라스틱 관으로 연결되어 있고 이 호스는 큰 유리병과 접속되어 있는데 다른 부착물을 통해 이 병 속에서 진공상태가 이루어진다.
여성들이 분명하게 임신초기 단계에 처해 있지 않을 경우 태반의 일부가 자궁에 남아 있기 때문에 소파술의 시행이 불가피 하다. 8주 이전의 태아는 배아라고 하는데 가령 심장 혹은 뇌같은 핵심 기관들이 이때 형성된다.
중기 낙태는 전체 임신 기간중 2/3(12주-14주이후부터)기간에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는데 자궁경부는 더욱 확장되어야 하고 태아는 너무 크기 때문에 산산 조각으로 분해되어야 한다: 아무래도 태아가 흡입관으로는 도저히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수술자를 가장 애먹게 만드는 것은 태아의 머리이다. 이 무렵에 태아의 뼈는 상당히 굳은 상태이고 두골의 파편도 자궁벽을 쉽게 뚫는 수가 있어서 이럴 경우 심각한 결과들을 초래하게 된다.
NHS 산하 병원에서 행해지는 중기 낙태 시술에는 일반적으로 프로스타글랜딘 의약품 사용을 필수적으로 포함시킨다. 프로스타글랜딘은 정맥적주법,양막내 주사,양막외 주사,질 페사리등을 이용 태아에게 약물을 주입하여 죽임으로써 유산하게 하는 방법이다.
ㄴ. 낙태의 영향
낙태에는 많은 과학적 진보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여러가지 합병증과 후유증이 따른다. 일시적인 합병증으로는 장기관 손상에 의한 복막염등과 자궁 감염으로 인한 생리불순,불임,주기적 통증을 불러일으키는 가벼운 종류의 골반감염등이 있다. 낙태 경험자들의 10%정도가 수술로 인한 이병율(가령 출혈,자궁경부/자궁손상,수술후 감염,색전적혈전증,심리적 문제등)을 보이고 있고,2%가 합병증 증세(혈액수주를 요하는 츨혈,복부수술,심각한 정신 분열 형태등)를 보이고 있다.
장기적인 합병증으로는 임신불능과 임신 장애를 들 수 있고 깊고 오래 지속되는 우울증과 기독교인의 경우 죄악감등이 있다.
제 2절 낙태에 대한 성경과 교회의 견해
ㄱ. 성경의 견해
낙태라는 것이 한낱 현대의 문제가 아니라 하더라도 - 낙태가 고대에도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 성경의 각페이지에서 논의에 적합한 것을 끄집어 낼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이 주제에 대해 분명한 기독교적 견해가 없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유대인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성경에서 낙태금지를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왜 이런 결론에 도달하였는가? 그것은 비록 성경저자들이 낙태문제 그 자체에 대해서 관심을 표명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들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의 생명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논의되어야 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성경적 이해이다.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로 고백한다. 그것은 인간이 어떤 다른 이유나 목적으로 인해 고귀한 것이 아니고 인간이라는 그 자체로서 고귀하고 가치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은 단순히 일종의 유기물의 기계적 조합이 아니며 도구화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성경은 인간생명의 전이를 말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라는 성경 본문은 이삭의 생명이 태내에서 시작되었음을 가리키는 분명한 언급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출산전 특정한 아이들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고 언급하고 있는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에 관한 가장 명확하고도 중요한 성경 구절들의 상당수는 누가복음에서 찾아볼 수 있다.이는 아마도 누가가 의사였기때문에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관심을 표명할 수 있었다고 보여진다.
누가복음 1:15에서 요한이 '모태로부터'성령 충만하리라는 천사의 약속은 요한이 그의 모친의 태중에서 '기쁨으로'뛰놀았다라는 등의 표현을 볼때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또한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된 일인고'(눅 1:43)라는 엘리사벳의 마리아에 대한 인사는 엘리사벳이 벌써 복중의 예수를 자신의 주로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선지자 예레미야의 탄식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아니하셨으며'(예레미야 20:17)는 예레미야가 자기 자신의 존재를 태중에 있을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이것은 욥과 다윗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ㄴ. 교회의 견해
초대 교회 기독교인들이 낙태를 살인을 금한 계명의 파기로 보고 거부한 것은 향후 교회 견해의 모범이 되었다. 낙태에 대한 처벌들이 다양햇고 의학 사상이 아리스토텔레스적 태동 개념에 영향을 받는 동안에도 '1900년 무렵'까지는 놀라울 정도의 일관성이 남아있었다.로마 카톨릭 교회는 최근까지 이 견해를 지속해 오고 있으며 최근의 많은 개신교 교회들이 매우 상이한 입장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낙태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3. 결론 : 우리의 선택
제 1절 어려운 질문들
ㄱ. 낙태라는 것이 진정으로 인간의 생명을 끊어내는 것이라면,산모의 생명이 위태로운 경우,또는 강간에 의한 경우에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낙태라는 것이 과연 낙태 찬성론자들의 주장대로 두 사람 사이에 관계된 일이며 태아는 한 여성의 육체를 사용할 권리가 없을지도 모른다.그리고 그것이 산모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때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임신이 강간에 의하지 않은 경우 임신한 것에 대한(즉 한 생명을 잉태시킨 것에 대한)산모의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으며 산모의 생명이 위급할 경우 그것은 산모의 결정에 맡겨야 한다. 기독교적 사랑은 희생을 그 근본으로 하고 있으며 실제로 기독교인이 아닌 경우에도 아기를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의 예는 많이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 자신의 생명을 위해 아기를 희생하는 경우 정죄할 수는 없다고 여겨진다.인간의 근본적인 이기적 성품은 정당화 될 수는 없으나 용인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강간에 의한 임신인 경우에도 같은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 원하지 않는 불행한 사건에 더하여 원하지 않는 상대의 아기를 임신한다는 것은 피해자를 더욱 가혹한 고통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여성의 체내에 임신된 태아 역시 한명의 피해자이며 그에게는 죄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역시 그 선택은 임신한 여성에게 맡겨야 한다. 교회가 윤리와 선행을 '강요'할 수는 없다.
ㄴ. 기형아의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정신 신체적 장애가 있는 태아의 생명을 제거하는 것은 동정받을 수 있는가?
인간의 가치가 그의 소유나 능력으로 판단될 수 없으며 인간 그 자체로서 고귀하고 가치있는 존재라는 것이 기독교의 인간 이해임은 앞서도 밝혔다. 이것은 그가 장애인임에도 (태중에 있던 태밖에 있든)여전히 유효하다. 인간의 가치를 어떤 외부적 차등이나 능력의 차이로 인해 판단하는 것은 인류역사의 여러 범죄형태로 나타났고(이를테면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나 미국의 노예제도등) 지금에 와서 이를 정당하게 생각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제 2절 결론
낙태라는 문제는 단순한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 가지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는(즉 우리 사회의 문제들이 종합적으로 얽혀있는) 문제이다. 여기에 대해 천편일률적인 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또한 설사 그러한 판단을 했다 하더라도 그러한 판단은 오류에 빠져들어 있기가 쉽다.
낙태문제에는 근본적으로 생명에 관한 종교적 철학적 문제와 사회적으로 여성 해방문제,성문제, 경제정의문제,개인 윤리문제등이 들어있다.
우리는 여기서 낙태에 대한 기독교 윤리작 판단을 하고자 하였다. 낙태 문제에 대한 기독교 윤리적 판단은 낙태 찬성 혹은 반대의 단순한 논리로 결말지을 수 없을 말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혼'에 대한 말씀에서 모세의 율법이 이혼을 허용한 이유는 <사람들의 악함>때문이라고 하셨다.그러나 근본적으로 이혼은 불가하다. 하나님께서 하나라 하신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신 인간 존재를 사람이 마음대로 죽일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들의 악함>때문에 그것은 허용되어오고 있다.그 악함은 단순히 낙태를 원하는 남성,여성들만의 악함도 아니고 정부나 의사들만의 악함도 아니라 우리 사회의 총체적인 악함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노력은 단순히 낙태 반대만을 외칠 것이 아니라 낙태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총체적인 사회악(여기는 남녀 평등과 성폭력 문제,경제정의문제,의료윤리문제,개인의 윤리문제등이 포함된다)과 투쟁하며 개인의 신앙적 결단과 희생의 감수를 외쳐야 한다.
다음의 성서 말씀은 오늘의 낙태 문제에도 유효하다."너희가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 대항치 아니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