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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열 제6시집
http://cafe.daum.net/_c21_/home?grpid=1Bdo2 <단시열전> 영혼(靈魂)의 無人島(무인도)
서문 요즘 시 읽기가 지루하고 짜증난다. 메시지가 평범하고, 별 내용 없이 시가 길다. 함축미와 이미지가 결여되어 시의 특수성과 전문성이 아쉽고 그립다. 상식적이고 일상적인 내용을 길게 늘어놓은 진부한 사설이 싫어졌고, 감동도 못주고 더 읽어 볼 흥미도 관심도 갖지 못하게 되었다. 시적 기교나 표현의 미숙으로 독창성과 전달력을 잃었고, 아마추어리즘에서 헤어나지 못하여 관심과 흥미의 유인가를 절감시키고 있다. 이러한 사유로 나는 시 읽기가 싫어졌고, 일반 독자도 떠나갔다고 생각한다. 오래 전부터 단시의 매력에 이끌려 여기까지 왔다. 프랑스 시인 장 곡토, 일본 시인 바쇼오 마츠오의 하이쿠, 우리나라의 단시조, 김춘수의 짧은 시편들, 고은의 단시집 “여수”, 박희진의 1행시집 등에서 많이 유혹 당했다. 두 달 간에 411편이 신들린 듯 쓰여 진 것은 매료된 시심의 축적이 아닌가 싶다. 단시에 맛이 들려서 한정 없이 더 쓰고 싶은 욕심이 가시질 않는다. 더 이상 과욕을 부리다가는 소재의 중복이나 의식의 퇴행 현상이 시를 그르칠 염려가 있어 이쯤해서 멈추기로 하였다. 서둘러 책을 내는 데는 이유가 있다. 갈 길이 바쁘고 험하다. 내 육신의 건강을 이만큼이라도 유지하고 있는 원동력은 바로 시의 힘이다. 시가 있어 신나고, 나를 지탱해주는 시에 감사한다. 2016. 3. 30 김성열
1 강변의 가을 갈대는 바람 때문에 울고 물소리 그리워 손 채양하고 먼발치로 서서 흔들린다. 2 폭포는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승천하는 용의 비늘로 높이 솟구쳐서 하얗게 빛나고 있을 뿐이다 3 하늘과 바다의 만남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의 대결장 영원한 맞수의 대결은 긴 수평선으로 남았다 4 밀려 왔다 부서지는 비 오는 날의 밤 파도 이승에서 지친 넋들이 버걱 버걱 울음 우는 바다의 게거품 소리 5 살대는 강남에 두고 왔다, 촉으로만 날아가는 제비 세 마리 온 허공이 그들의 과녁이다. 6 공원의 산책길에서 깡충거리는 까치 무리 자주 본다. 장애 입은 까치 놈은 볼 수가 없다. 차라리 콱- 죽고 말았겠지 7 김유정의 “동백꽃”을 읽던 밤에 이유 없이 엎어지던 그 여인의 속살도 스치고, 하얀 파도처럼 헐떡거리던 속초의 밤바다 그립다. 8. 연 꼬리 같은 치맛자락 펄럭이며 먹을거리 챙기던 90년대 무악동 사무실 옛, 그날의 낭만적인 인간들 지금, 어디에 있는가? 9 무덤으로 가는 고향의 샛길은 백발 잔디로 허리가 꺾여 깔렸으니 겨울철 늘그막은 시리다. 10 스마트폰, 비아그라 광고 문자에서 고개 숙인 남자의 한숨 소리가 悲我 悲我(비아 비아)......미아리 친다. 11 벽시계 빨간 초침이 무음으로 도는데 시침 분침은 느리게 삼삼 끌려가고 세월은 무겁다, 빨갛게 아프다. 12 밤은 뱀을 불러들였다 천리객창 관사 방을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히죽 히죽 웃고 있는 뱀 13 “원시적 순수성“ 이라고 내 시집 서문에 적어준 부원 시인의 선비정신 다시 보고 싶다. 14 현실을 떠난 언어가 달나라로 가고 사물을 비켜간 시어가 서울하늘에서 빈 소리로 웃고 있다. 15 낯선 영혼이 보인다는 재미 동포 여류 시인의 댓글은 옹달샘 물맛이네. 16 시인으로 죽어가는 길목에서 문득, 보이는 깨달음 피 끓는 이단자가 되는 것이다 17 나, 시인이여 말과 함께 놀다 죽을지언정 언어의 노예가 되지 말라 해방 된 의식의 바다에서 홀딱 벋고 자유롭게 헤엄쳐 가리라. 18 찢어지면서도 펄럭일 줄 아는 생성(生成)의 울음소리는 피 묻은 탯줄을 자르듯 아프게도 슬프게도 아름답다 내 태몽 속의 깃발- 19 춘하추동 우직한 황소걸음으로 산천초목을 절뚝거리며 걸어왔거늘 밟아 온 산하, 온갖 그리움 다 그립네 20 바람에 풀이 눕는 계절은 가고, 바람을 잠재우는 풀의 계절이 왔다네. 손가락 꼿꼿 세운 당찬 기세로 일어서는 풀이 푸르게 싱싱하다네. -(김수영에게) 21 거울에 녹이 슬어 흔들리는 밤에 솥작새는 다시 울고, 주름살 깊은 누님의 얼굴은 뒤안길도 잃은 지 오래되었소. 무서리 내리던 밤의 국화꽃은 시들어 꺾이고, 새벽은 어둡고 손이 시려요. -(서정주 에게) 22 떨어지는 폭포가 겁에 질렸다 고매했던 정신도 제 몸짓을 잊고 부서진 순간에 곧은 소리마저 놓쳤다 -(김수영에게) 23 제 이름 값의 꽃이 되기 위하여 꽃은 아름답고, 향기로웠지만 멋대로 희롱하는 사람들 때문에 오죽했으면 말문을 닫아 버렸을까. 返歌 (김춘수의 꽃) 24 솟으란다고 넘어간 해가 솟겠는가. 솟아라, 솟아라, 해야 솟아라. 지금이라도 그대처럼 노래한다면 청산도 비로소 감동하겠지 -(박두진에게) 25 막차는 기어코 올 것이다 톱밥 난로 불빛에 적셔진 손바닥과 굴비 광주리에 담긴 침묵을 위해서라도 그리운 순간들을 태우고, 가고 싶은 곳으로 그대는 기어코 떠나야 되지 않겠소. -(곽재구에게) 26 빈 집에 든 사랑을 왜 가두려 하는가. 제 뜻대로 드나들게 내버려 두시지요 어차피 이승에 두고 갈 보석이 아닌가. -返歌 (기형도의 빈집) 27 아수라의 꿈을 꾸는 뱀의 혓바닥에 키르쿡크의 석유를 뿌려 불을 지르던 50년대 시인이,
아! 전라도 가시내야, 가시내야
연거푸 부르다 술잔에 목이 메인 비운의 남도 사내가 절량(絶糧)의 흙탕물에 피를 흘려 보내는 계곡에서 뻐꾸기 울음 소리를 구름에 띄워올리던 멋진 낭만의 신사가
악,악,악, 악,악,악,....김. 악, 김. 악. 김. 악.
아비의 원혼을 달래는 씻김 굿판의 춤사위로 절규하는 여식의 시혼(詩魂)을 보고 있는지 몰라... (김악 시인께) 28 나 하늘로 아직 돌아가지 않을래요. 개똥밭 서러움을 더 울어보면서 다시 또, 가볼 소풍 끝나지 않았으니 천왕봉 산그늘에 놓인 그대 시비처럼 영면의 오묘한 세상에서 잘 지내시구려. -(천상병에게) 29 갯바위를 후려치는 눈보라야 너, 하늘에서 온 바람의 파도였구나. 모두 태워버린 하얀 시련이구나. 30 시를 쓰려고 냉랭한 언어를 주무르다 보니 손가락에 쥐가 나고, 혀가 굳어 말문이 막힌다. 31 전 생애의 양 극단을 유유히 회류해 온 깃발 들판에서 펄럭이는 농기(農旗)는 나의 태몽 영원히 검증될 수 없는 그림자 속의 나부낌 어머니가 전해 준 미확인의 운명증서다. 32 발바닥을 간질이는 해변의 자갈돌은 제가 밟힌 줄도 모르면서 대머리 치받고 주먹 삿대질을 해댄다. 33 죽집의 동지 팥죽이 검붉은 이슬이었습니다. 흙빛으로 굳은 팥떡이 어머니 치마폭에서 핏덩이로 떨어지는 눈물입니다. 34 맑은 정신으로 문득 아내 그리워 많이 사랑합니다. 화장대 위에 써놓았다 아침 식탁에서 종잇장 펄럭이며 무슨 뜬금없는 짓 이래요 하면서 웃는다. 난, 안 그런 척 했다. 35 고국을 그리워하며 이국(異國)의 하늘 아래서 강뚝을 걷는 여류 시인의 소식을 접했다. 이제는 눈물도 말라버린 폐허의 땅 그대가 걷던 남도의 황톳길을 내가 열심이 걷고 있다. 36 한사코 날 끌어 간 본 죽 집 기어코, 한 살 더 먹어야 한다고 백발의 아내가 날 울리고 웃긴 동짓날- 37 눈발 날리던 날 인사동 여류 시인의 매생이 국밥집에서 처음 맛 본 국물 맛, 그때 그 사람 먼 세상에서 잘 있는지 모르겠다. 명주실 매생이 가닥이 목울대에 걸린다. 38 슈르레알리즘의 시(詩)의 세례를 받고 다른 시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초현실적으로 번뜩이는 내 의식의 빛살에 눈이 찔린다. 39 새해는 왔지만 시간이 싫다. 지금까지 나를 배반하고 달아나기만 했던 나쁜 세월 먼 곳에서 아른거리는 아픔의 추억들이 목을 조인다.
40 아내는 교회로 가고, 나는 시를 쓰고 스마트폰은 놓인 그대로 엎어져서 충전된 전류만 속절없이 소모되는 일요일이다.
41 시간 흐르는 소리가 회색 빛깔로 아른거린다. 한겨울 낙목 잔가지에서 와르르 떨어지는 세월의 낟 알갱이가 비탈을 굴러 흩어진다....
42 폐허가 된 내 영혼의 무인도에서 꺼이꺼이 울고 있는 가마귀 소리를 듣는다. 아득한 벌판에서 일렁이는 그림자 하나 안고 뒹구는 자위하는 몸부림은 아프다. 43 염색 머리 깨끗이 감아내고 날(生)머리카락 자연스럽게 날리면서 마음 비우고 살고 싶은 날 철없던 시절의 울분은 차라리 행복이었네.
44 진통제를 복용하며 지내는 여류 시인의 고통을 들었다. 아파라, 더 아파라 절규하는 그대의 민낯이 섬뜩 두렵다. 45 고속버스 터미널은 병영의 엄숙한 질서로 참호를 파는 물거품으로 명멸하며 흐르는 강이다. 46 젊은 날의 자작시를 읽던 대낮에 한천의 낙목(落木) 잔가지가 바투 어울려 나처럼 낡은 계절을 증언하고 있네. 47 꽁꽁 얼어버린 한겨울 태양빛이 치매 시인의 상념을 무식하게 헝클어 버리고 허무한 목숨 줄 하나 끈질기게 당기고 있다. 48 몸 밖은 허공인데 마냥 겨누고만 있는 선인장의 날침 비운의 가시밭길은 골이 깊어 어둡다. 49 몽그작몽그작 소한 추위를 견디면서 질긴 목숨으로 이어 온 호접란 꽃대가 상업적인 대리모 뉴스를 가만히 듣고 있다 50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나를 삽입한 70과 90의 제법(除法) 80의 세월은 피 흘리며 갈 수 있겠네. 51 때가 되어 넘겨보는 묵은 사진첩 지난 세월이 무성(無聲)의 너울로 병풍을 치네 52 해남에서 저림 배추가 왔다 김장 김치를 저리도 잘 먹는 손주들 아내와 나, 함께 손발 저리다. 53 시 심사평 3편 값으로 30만원이 왔다 운수 좋은 날의 씁쓸한 현실- 54 성긴 백발의 전직 동료, 취기 올라 눈시울 붉어진다. 함께 소주 마시고 눈물은 왜 보여 이 사람아. 찐한 생활의 회한을 술 마시듯 꿀꺽 삼켜버리지 못하고 이런, 선 늙은이 같은 이라고, 나도 눈물 난다야- 55 아-(해보세요) 깍깍깍- 씹어보세요. 끅끅끅 옆으로 으깨보세요 의사 아들 말대로 잘 따라한다 유치 뽑아주던 아비의 빠진 이빨을 오늘 네가 심고 다듬어 다시 돌려주는구나. 56 시간의 여울목에서 당신의 시가 그립습니다. 아버지의 지게처럼 붓을 쥔 당신의 팔뚝이 아른거립니다. 57 안면도의 붉은 낙조는 보석으로 튕기고 현란한 해면의 눈부심에 나는 취하고 아내의 주름진 맨 손가락을 힐끗 보면서 많이도 미안한 마음이 울컥 솟는다. 58 설악산 바위는 높고 깊어 岩.岩.岩......(암암암) 高巨也 無常而之......(고거야 무상이지) 無常而故 末古......(무상이고 말고) 59 고향 땅 밟아서 눈물 나고, 흙먼지 눈에 묻혀 떠나오면 아파라 황토 빛 삼삼 유년의 세월은 한 점 티끌이네 60 돌의 눈처럼, 책 속의 눈물처럼, 몽당 빗자루 아픔처럼, 구더기 우굴 대는 내 머릿속 잡음처럼- 얽힌 인연- 61 석유 먹은 듯 굴러가는 검은 등짝의 쇳덩이 보며 낮밤도 모르고 칙칙 대는 오늘의 건널목에 내가 서 있다 62 빨간 승용차는 치맛바람처럼 날리고 여인의 운전대는 기둥서방처럼 단단하여 21세기 하늘땅은 반역의 눈물 밭이다. 63 아버지는 산소에 계시고 어머니는 가슴 속에 또 오셨네. 얼른 가세요, 아버지 곁으로 64 하늘에 계신 하느님, 그간 무고하십니까? 형과 나 잘 있다고 소식 좀 전해 주세요. 우리 부모님께- 65 피라미를 기다리며 시간을 흘리는 개울의 외발 해오라기 해종일 바라보다 내가 지치고 만다. 66 열 길 물속은 몰라도 한 길 사람 속은 알겠네. 사랑은 죽어도 끝나지 않는 것- 죽은 사람이 산 사람보다 오래 살아남는, 그런 사랑- 67 심란한 봄날에 유령처럼 날아 든 멧비둘기 이승에서 못다 이룬 내 마음 속의 탑을 흔들면서 쿠룩 쿠루룩 쿠쿠 쿠루룩 초대된 곡비(哭婢)인양 한참을 울고 간다. 68 함박눈 펑펑 쏟아진다. 토굴 속 반야심경이 목화솜으로 휘날린다. 색즉시공 백즉시색(白卽是色) 침묵처럼 눈이 쌓이고 있다. 69 알몸의 열탕 물속은 들끓는 젊은 날의 사랑보다 겉으로만 뜨겁다. 70 한밤 중 자동차 소리가 연실로 길어질 때, 자동차는 연이 되고 꽃이 되고, 하늘의 천사가 바람이 되고, 낙화암의 꽃잎은 신맛 쓴맛을 내고, 흙 묻은 속옷은 육신의 옷자락이 되어 소리로 날려간다. 71 아파트 나들길에 꼬리를 맞댄 두 마리 자웅견(犬) 위선도 성찬(性餐)의 가성도 무지몽매한 저것들 육두문자(肉頭文字)를 온 몸으로 쓰고 있다. 차라리 보고 있는 내가 바보지... 72 해남의 땅끝(土末)은 또, 바다로 이어진 파도였다 다도해 점점 군도(群島)는 건너야 할, 하늘 길의 징검다리였다 73 잣바듬한 곁가지 우듬지에 허술한 겨울 까지집 허공에서 기우는 집채를 받쳐 줄 벽이 없네. 74 고향은 정한(情恨)을 묻은 배반의 땅인가 먼저 간 사람들을 고이 감싸고 넉넉하게 서 있는 산이 정색을 하고 오랫동안 맞바라봐도 마냥 침묵이네. 75 손에 감긴 30년 된 손목시계가 지금껏 주인에게는 일언반구도 없다. 제 낯짝만 돌고 돌리면서, 시를 가리키고. 열 두 행의 연작시만 쓰고 있다. 76 스마트폰 곁의 구식 수화기는 잡혔던 손목을 전화기 위에 얹어놓고 꺾인 두 주먹을 꽉 쥐고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77 거실의 제주해녀 목상(木像)은 물안경 쓰고 먼지 뒤집어 쓴 채로 꼼짝 않고 서 있다. 숨비 소리 생생한 먼 바다만 바라보면서 막무가내로 고개 한 번 돌리는 법이 없다. 78 벽에 걸린 수상식 사진액자의 꽃다발에서 부푼 먼지 같은 꽃잎이 눈송이처럼 날린다. 부질없다. 부질없다고 불고 지나는 바람이 누렇게 빛이 바랜 해묵은 시래기 빛깔이다. 79 꺾일 듯 휘어진 난 잎 끝, 끝에 진한 땀방울이 이슬로 방울방울 .맺혔다. 허리 굽힌 채로 세월에 찌든 삶의 무계를 의연하게 받아드리고 있다 80 온 몸을 가시로 에둘러 푸른 성(城)성을 쌓고, 육탄 방어벽으로 자신을 지켜내는 선인장의 일생은 구중궁궐 어둡게 골이 파인 형극의 여심이네. 81 차창을 스치는 나무들이 빠르게 나를 비껴가고 먼데 산이 천천히 뒤따라오는 귀향열차는 겉과 속이 다 흔들리고, 덜컹거린 만큼 마음도 설렌다. 82 한밤중에 무리 진 잔챙이 별들이 임종의 순간처럼 낯빛이 가물거린다. 엄동설한에도 얼지 않는 먼 세계의 가냘픈 숨결이 도도(滔滔)히 흐른다. 83 솜 베개 죽부인은 고독한 사랑의 혁명가 억눌려 숨이 죽은 지난밤의 굴욕을 못 잊어 밤의 새 역사를 다시 쓰기 위하여 종일토록 제 몸을 부풀려 전의를 다지고 있다. 84 아파트촌의 첨예한 지붕은 입양된 자식의 불효막심한 삿대질 아무리 세상이 변했기로 하늘을 찌르다니 무엄하게 겁도 없이... 85 임진강 철조망에 찔린 강바람이 충혈 된 초병의 눈살을 스치면서 아닌데, 아닌데, 아닌데, 아닌데 60년 묵은 세월이 너덜너덜 해소 기침을 계속하고 있다. 86 백무동 처이모네 집 새끼로 얽은 싸리나무 사립문에 지리산 바람이 흐른다. 백제 사람의 바위 빛 등짝이 눈앞에서 천년을 춤추고 있다 87 오이 냉채 국물에 식초가 빠졌다. 뇌에 입력된 신맛의 조건반사로 입에 침이 돋았다. 없는 신맛을 머리로 맛보며 초. 친. 듯. 씹어 삼켰다. 88 노량진 수산 시장에서 비릿한 생선 냄새를 맡는다. 좌판에서 펄떡이는 살아 있는 목숨들아 코 찡한 죽음의 냄새를 지례 풍기고 가느냐. 89 지계 받치고 앉아서 땀 식히던 바람재의 늦가을 산국(山菊)은 나의 향수병처럼 바짝 메말라 목뼈가 뚝뚝 부러졌다. 90 삼천 원짜리 생전복을 열 마리 샀다. 삼천 년을 지켜 온 여인의 순결 같은 벌거숭이 괄약근이 싱싱한 욕망으로 흐느적거린다. 91 반쪽의 낮달이 있는 듯 없는 듯 외롭게 떠 있다. 숫돌에 잘 갈아 하얗게 날 선 우리 아버지의 조선낫 휘임으로 높은 하늘에서 어제와 오늘을 굽히고 있다. 92 가끔씩 보아 온 얼핏 스친 낮달 열 살 배고픈 얼굴로 다시 보는 청 보리 밭머리에 창백한 낮달. 93 여름날의 냇물에서 벌거숭이 네 체모(體毛)가 섬섬했다. 서로 말 없이 엉성 궂던 속마음의 너와 나, 까만 성장통(成長痛)이 살갗을 아프게 뚫었었지. 94 해질 무렵 4월에 나 혼자다. 들녘 끝으로 은회 색 교하 강이 유연하게 흐르고 있다. 강줄기에 백발 생머리를 휘어 잡힌 노인은 잔잔한 강물로 함께 흐르고 있다. 95 멀쑥하게 키가 큰 해바라기 꽃 그림자가 텅 빈 소학교 운동장을 해종일 따라 돌았다. 여름날의 뜨거운 햇볕에 논흙같이 거멓게 얼굴을 태우면서, 어둑한 해거름의 쓸쓸한 그늘을 흙발로 밟으면서 나는 컸다. 96 양지 바른 절간의 먹빛 기왓장에 송화 가루 덧덮이는 나른한 대낮 윤사월 긴긴 해는 덧없이 눈부시고 나는 짬도 모르고 배가 고팠다. 97 풍찬노숙 엉성한 형상으로 지나온 세월이 얼만데 미동도 않고 지금껏 그렇게 서서만 있느냐. 이목구비 멀쩡한 허우대에 군데군데 덧 난 상처를 이끼로 가린 석장승아- 98 머리 털 뽑힌 채로 하늘을 건너가는 달 수절의 밤 세월이 고고히도 밝아라. 창백한 새벽녘에 서산을 넘다말고 떨리는 손을 붙잡고 아미를 숙인 임아. 99 기둥을 휘감아 하늘로 뻗는 억척도 사랑의 여정을 막을 수가 없을라. 보라 빛 꽃 보료를 공중에 펴놓고 한사코 매달리는 등꽃 숭어리 100 광한루 수양버들에 그네 줄도 끊기고 오작교 다리에서 잃어버린 연인의 까지 집은 멀리서 떠돌다 종로거리의 가로수에 얹혔다. 까치집처럼 엉성한 신혼의 전세 집은 매캐한 매연으로 어둡고 손이 시렸다. |
101
산정호수 겨울 갈대가 까시락 까시락 빛바랜 소리를 낸다.
말 탄 궁예의 청동상 칼날은 호수의 거센 바람에 녹이 슬고
까불지 마라 까불지 마라 까불지 마라 까불지 마라
피 흘린 역사를 보아버린 깡마른 갈대꽃이 시간을 까불리고 있다.
102
많이 그립더라.
고향 냇물 봇도랑에
옛날 같은 물줄기만 괴괴하고
네 얼굴 박히는 큰 바위 형상이
멀리서 아물아물 오래도록 그립더라.
103
노란 강아지 풀, 긴 허리가 뜨겁던 여름을 지나와서
좁쌀 같은 씨를 떨구면서 바람에 드러눕는 고향의 들녘
노쇠한 내 목울대가 울컥 마디를 짓고 출렁인다.
104
그리움이 차라리 바위 같은 무계로 자리 한다면
바람처럼 가볍게 흉금(胸襟)을 들락날락 흔들어 놓고
시 때 없이 날 울리진 않을 것인데.
105
옛집 흙 마당은 시멘트로 굳어 있고
감나무 껍질은 덧 개 덧 개 희죽거리고
텃밭에는 빛이 바랜 힘 빠진 고추가
허리 휜 늙은이로 힘없이 매달렸다.
떨어질 날 기다리며 마음 졸이고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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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가네, 가네, 바람이 불고 지나가네.
앙상한 낙목 잔가지를 건드려 흔들고 가네.
고독한 노심은 텅 빈 방안을 맴맴, 맴돌고 가네.
107
꿈속의 여인은 세월 속에 살아 있었다.
얼굴 마주보며 웃을 수 있었던 지난 시간은 마약처럼 끌리고
깨어나서 감긴 눈에 꿈 빛이 흑색이다.
108
허리 굽힌 노파의 힘겨운 지팡이 소리가 딱딱 멀어진다.
가파른 산동네 돌계단 끝머리에 깊은 숨 몰아쉬며 멈춘다.
아슬 아슬 검은 점 하나 찍힌다.
109
반야봉과 정영치의 산줄기가 마주보며
산신령이 손뼉을 치려는 형세로 뻗어있다.
산신령이 뱀사골 계곡물을 불끈 불끈 쥐어짜니
물결이 잔잔하지 못하고 찔찔 철철 넘쳐흐른다.
110
플라스틱 볼펜에 못 박힌 손가락에 쥐가 낫다.
가만 가만 주무르고 만지작거리는 손끝에서
생각지도 않는 옛날의 연필향이 솔솔 아련하게 피어올랐다.
111
사선으로 펑펑 쏟아지는 눈발을 뚫고 월롱 단골 순대국 집을 찾았다
십년 만에 들른 단골집에 인정스런 주인 할매는 작고(作故)하여 못보고
옛 맛이 아닌 순대국을 맛정 없이 먹고 돌아섰다..
눈 덮인 귀가 길은 미끄럽고 기분은 찝찝했다.
112
모난 돌 그럭저럭 쌓아놓은 누님 네 집 다무락에
사시사철 피어나던 이끼의 추억은 잊을 수 없다.
생크림 같은 냉랭한 기억으로 살아 숨 쉬고 있다.
113
지리산에 눈 내리는 날
노고단에 올라서 보았다
아랫마을 지붕들이 풍선처럼 붕붕 떠오르고.
하늘로 이어진 긴 눈발은 산 높이를 재고 있었다.
114
기러기 울어라
여러 마리 떼 지어 팔 자 대형으로 울어라
소실 설움 우리 고모 감나무에 걸린 한을
냉천의 기를 모아 회심곡조로 울어라
115
아파트 동마다 따로 따로 노는 밤은
별빛 물소리, 계곡의 어둠이 그립고
층층이 밝은 눈빛을
잠재울 사람 하나 없네.
116
숲속의 작은 신들이
태어나기 연습을 한다.
뿔 달린 시인들이 대책도 없이
신의 탄생을 바라만 보고 있다.
117
정들면 고향이라고
노래, 노래 부르던
술 취한 우리 아저씨도 가고,
타향은 정들어도 타향이라고
떠도는 그림자들이 합창을 하네.
118
일기장에서 튀어나온 베잠방이 열 살 아이가
왜 늙었느냐고
꼭 늙어야 했냐고
내 허리띠를 붙잡고
천방지축 맴을 돈다.
119
과거를 묻지 말자고
몽땅 태워버린 일기장의 잿빛 넋이
장발 귀신으로 다시 돌아와서
과거를 다 묻었냐고, 더 묻지 않겠냐고
채근하고 또 채근하네.
120
우리 어머니는 자식이 둘
하나는 큰 아들
또 하나는 작은 아들
딸 다섯은 출가외인으로 멀리 잊고
어머니는 자식이 둘 뿐이라고
오래 오래 90해를 살다 가셨다.
121
물 건너 돌밭에는 돌이 없다
돌담으로 경계를 지은 강변 밭은
아버지가 캐낸 돌이 눈물 땀으로 쌓여서
돌 없는 돌밭이 되었다
122
다릿거리 돌너덜겅에서 뜯어 온 돌나물은
소쿠리에 거칠거칠 넘치도록 담겨 있었다.
헛배만 불려주던 돌나물 싱건지는
내가 겪어온 오래된 이야기 사연
123
걷고 또 걸어도 메마른 땅 거친 풀밭이었다. 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신작로 길에
들어서면 닷 마지기 논두렁이 외나무다리처럼 가늘고 낮게 이어졌다. 삐끗 자빠진
풀밭에서 번쩍이든 오뉴월 햇볕으로 열병을 앓아온 소년이 지금 시를 쓰고 있다.
124
불빛 반짝거린 여객기가 소리 없이 스쳐가는 밤이 있었고, 들녘 끝을 휘감아 도는
포장도로에 각 색의 자동차가 시나브로 지나가는 여름철 한낮은 길었다.
기러기 떼가 겨울을 나는 황량한 논바닥을 어둡게 밤바람은 불었고, 산 넘어
공항 쪽 하늘에 잔별이 떠서 밤을 지새우는 가을철에도 벽시계는 계속 돌았다.
125
하얀 쌀밥은 없었고, 눈 덮인 논바닥만 차갑게 들어났다.
소작논이 거두어 준 쌀알은 보기도 아까운 뽀얀 쌀 빛이었다.
126
노란 메주콩은 까만 장단콩을 못 이기고,
누런 좁쌀은 까만 줄친 보리쌀을 못 이기고,
길쭉길쭉 알랑 미는 희뿌연 토종 쌀을 이기지 못하네.
값이야 그렇다 치고, 오랜 관습을 현대인도 이기지 못하네.
127
앞산 뒤에 산, 옆으로 산
뒷산 건너 높은 산, 양 옆으로 산
높은 산 넘어 안 보이는 산, 옆으로 엎어진 산
안 보이는 산 넘어 하늘, 하늘 아래 안 보이는 산
여러 산이 한꺼번에 떠받치어 하늘이 무너지지 않네.
128
한 밤중에 자유로의 자동차가 가로등을 세고 가네.
앞 차가 놓친 셈을 뒤에 차가 또 헤아리고,
뒤에 차가 잊은 댓 수를 다음 차가 다시 세네.
지나간 모든 자동차가 밤새껏 세어 왔지만
가로등 총계는 소등으로 지워지고 말았네.
129
까지 집 기둥은 제집의 지붕을 뚫고
솟친 기둥 끝에 임자 까치가 앉아
누가 오나가나 망을 보고 있다.
130
아파트 굴뚝의 피뢰침 꼭대기에 까치가 날망스럽게 앉아 있다.
날카로운 피뢰침이 까치 등을 맞뚫어 곤충 채집 방식으로 고정시켜 놓았다.
곤충으로 잘못 인지한
피뢰침의 큰 실수였다.
131
흩어졌던 까치들이 모여들어 소리 마당 굿을 펼치고 있다
각본 없는 까치들의 율동은 인간의 연극보다 더 진솔하고,
오직한 목숨의 줄다리기일 뿐 허울 좋은 가식이 없다.
132
객지에 떠돌다 백발성성 고향 산에 올랐다.
전에 없는 이상한 향취에 전신 마비를 일으켰다
혼미한 상태로 발버둥치고 있는데
하늘에서 벼락 치는 소리가 울려왔다.
그것은 향수병의 말기 증세야. 살아서는 못 고쳐.
이 바보야, 바보 같은 늙은이야-
133
지지배배 노고지리는 어디로 갔나.
네 잎 클로버 시계 꽃은 어디서 피나
내 눈 귀가 닫쳤느냐
실향의 깊은 어둠이냐
모두 다 어디로 갔나.
134
공원에서 늙은 내외가 살금살금 걷는다.
중년 남자는 상하로 팔 젓고 걷는다.
젊은 여인이 갈 표로 손 젓고 걷는다.
팔 굽혀 옆으로 젓고 걷는 청년도 있다.
모두 제멋대로 알아서 걷는다.
135
아파트 10층에서 내려다보이는 자동차의 잔등이가
희고 검고 노랗고, 붉으락푸르락 종잡을 수가 없다.
부적응 현상이 심각하다.
136
명함의 이름자 위에 안 덮이는 얼굴이 있어
별이 별 생각을 다 해보고
이런 저런 면상을 다 떠 올려 보는
30년 된 명함첩을 나는 가졌다.
137
접는 형식의 구식 핸드폰을 스마트폰으로 바꿨다
2~3일에 기껏 대 여섯 통화 이용에 하루 이천 팔백 원 꼴이라
그래서 어쩔 것인가, 손을 들고 물어 봐도
용뺄 재간이 어디 있겠는가. 그냥 눈만 껌벅껌벅 할 뿐이지.
138
시를 쓰다 밤이 깊어,
많이도 썼다.
머릴 쓰고, 몸도 손도 쓰고,
이런 저런 여러 것을 썼다.
139
어디서 날 부르는 소리도 없다
어디서 날 욕하는 소리도 없다
어제도 날 흉보는 소리가 없었다
오늘도 날 칭찬하는 소리는 없다
내일 날 무시하는 소리가 있을까
잘 모르겠다.
140
어느 날에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산들이 기둥으로 떠받칠 준비가 되었기에
소 살아날 구멍이 생길 것이다.
141
기후 변화로 오징어 떼가 한류(寒流)따라 북상했다고 한다. 개발 지역 문발 들녘을 휘감는
새 도로에 가로등이 촘촘하게 불을 밝혔다.
깜깜한 들판에 속초 오징어 배 집어등을 옮겨다 켜 놓고, 어부들이 고깃배 대신 자동차를
타고 오징어잡이를 하고 있다.
142
고향의 장형께 홍삼정을 보내드린다고 마음먹고
요리 조리 요량만 하다가 차일피일 몇 달이 지나갔다.
형이 보고 싶은 날, 울컥 눈시울이 떨린다.
이런 감정을 누가 시켰는가. 알 수 없다. 모르겠다.
143
공원 둘레 길을 빠진 날 없이 십년을 걸었다.
개근상을 줄 교장 선생님이 안보여 섭섭하다.
144
설 명절에 손자들 온다고 먹거리 챙기는 55년 된 아내
얼쩡얼쩡 무거운 뒷모습이 살아 온 세월로 아름답다
145
육십 대에 준비한 새 옷을
30년 묵혀 입고 가신 어머니
죽음 옷 아직 못 차린 나는
어찌 할까 계산이 안 선다.
146
상수리 낙목 우둠지에 덩실한 까지 집이 높다.
구천을 떠돌다 담겨진 검은 원혼(怨魂) 한 덩이
성긴 틈으로 황소바람 차갑게 불고 지나간다.
147
후배 시인이 그냥 보내 준 보약을 받고
인사를 가려서 하게 되네
아심찮아서
아심찮아서
148
겨울 내의를 입었다
밤에 벗었다
여러 번을 입었다 벗었다
몰라보게 느닷없이
봄이다.
149
걷다가 뛰다가
숨이 차니 다리가 아파
자갈밭 굴러서 피가 흐르고
여름 오면
홍수다.
150
많이 걷고 울어 봤느냐......(몰-라)
많이 일하고 웃어 봤느냐......(모올라)
많은 땀과 피를 흘려 봤느냐......(몰.라)
그럼?
(모르고.....그냥 왔지)
151
꽃집에서 꽃피운,
꽃,
보다
아름다운 당신.
그림자로 가려진
눈 속의, 눈의 꽃.
152
한밤 중 별을 보는 소년
냉천의 하늘 아래 세월이 꽁꽁 얼었다.
생머리 백발로 다시 보는
어둠 속의 별
153
폭포는 수직으로 떨어지기 못내 아쉬웠다.
임종의 순간에 비로소 게걸음치고 수면을 빠져나갔다.
154
폭포는 처음부터 자살 의도가 없었다.
하늘보다 단단한 세계를 뚫어보려고
몸소 떨어지는 강한 의지였고,
죽기 살기로 해보는 모험정신이었다.
155
폭포는 볼 일 없이 낙하하는 것이 아닐 세. 의미가 있다네.
부부 싸움 칼로 물 베기라는 사람들의 속담을 모방하여
부부 싸움 폭포 물 차기라고 풍자한 행위예술일세
156
하늘은 구름으로 제 몸을 덮어보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그깟 한 조각, 구름으로 넓은 얼굴을 다 가릴 수 있겠는가
하늘은 본래부터 부질없는 헛짓을 잘 해왔다.
밸도 없이 속이 텅텅 빈 허망한 공간이었다.
157
변화무쌍한 구름이 잘난 척 하면서 별이 별 짓을 다 해보지만
애완동물쯤으로 구름을 조련하는 하늘은 너무 넓고 지엄하다.
허풍선이 같은 뜬구름은 제 주제를 몰라도 한참 모른다.
158
산은 손발 다 잘린 움직이지 못한 등신(等神)이다.
그래도 속은 깊어서 큰 소리, 깊은 뜻은 다 품고 있다.
용두(龍頭), 천왕(天王), 설악(雪嶽), 청룡(靑龍), 백두(白頭)
속 두고 말하는 건지, 사람을 무시한 건지
그 속을 알고도 모르겠다.
159
그래 봤자 산은 침략자일 뿐이야
결국엔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올라
봉우리마다 창을 꽂아 하늘을 공략한다.
구름을 찔러 물세례 소동을 피우거나,
산사태를 일으켜 하늘의 뜻을 거역해 왔다.
160
하늘을 우러러 볼 때
나는 하늘을 밟고 다녔다
땅의 훼방(毁謗)으로 늘 좌절했지만
발로 차고 뒹굴면서 일생 동안
하늘을 밟아 왔다
161
하느님은 지상의 삶이 부러울 테지. 늘 말리기만 했지
형이랑 코피 터지게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싸워 봤겠어요.
땀 냄새 얼룩진 살맛나는 인간미를 어떻게 알겠어요.
162
유수 같은 세월을 타고 바다에 닿을 수 있을까
저 쪽 세상에 한 척 쪽배라도 있다면
노 젓는 연습이라도 미리미리 준비해 볼 텐데.
163
내 무의식의 밑바닥을 보겠다고 겨울 바다에 갔습니다.
신비한 영혼의 꽃송이로 먼 바다에서 휘날려 오던 눈발은 보이지 않고
어머니의 치마 끈 같은 수평선에서 억센 파도만 떼굴떼굴 굴러 오고 있었습니다.
164
나비가 천 마리 만 마리
일제히 내려앉는 소리
흰 눈이 내리는 소리
꽃송이 눈발이 퍼붓는 들판에
선녀의 순정이 날리는 소리.
함박눈이 쌓이는 소리
165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린다는
시인의 말은 잘못이다.
애시 당초 열려져 있었던 하늘이 아니던가.
166
산수유 열매는 눈 속에서 겨울을 나면서 눈 덮인 추위를 꾹 참고 참다가 봄이 오자말자
급하게 서둘러 노란 똥색 꽃을 피워 올린다. 너무도 정신없이 서두른 탓인지는 몰라도
급기야는 빨간색 혈변의 열매로 익어가는 거라지.
167
킥킥거리고 혼자 걸으면서, 거리를 킥킥거리다가
킥- 자빠지고 말았던 자조 띤 미소를 생각하면서
또 킥킥-, 거리에 사람들을 킥 킥-
168
부러진 칼도 무기가 될 수 있다
깨진 그릇은 그릇으로 못 쓴다
칼은 칼답고, 그릇은 그릇답고
그래서 무엇이 옳고 그른가.
169
설날은 슬프다.
자식들이 찾아와서 슬프고,
손자들 세뱃돈 주면서 슬프다.
멀리 와 버린 세월이 슬프고,
홀로 가는 길- 절대고독이 슬프다.
170
아내의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인기척으로 느껴지지 않지만.
제삿날, 아버지의 기침소리는 먼 곳의 생생한 인기척이다.
그런데 내 자신의 인기척은 어찌해서 깜깜 어둠뿐인가.
171
발가락에 동상이 걸려서도 걷던 학교 길은, 가야할 길이어서 걸었고,
화천의 무명고지에서 영하의 혹한을 밟던 눈밭은 군대길이어서 걸었다.
어느 길인들 춥고 얼지 않는 길이 어디 있을까, 우리네 삶은
스스로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의 길이기에 그냥 살아가는 길이다.
172
하늘이 깜깜 어둠일 때
지상에도 별이 뜬다.
공중의 별보다 곁에서 친근한
무식한 인공(人工)의 별이 반작인다.
173
바람이 밤을 흔들어 댈 때, 나무는 마지못해 건들건들 흔들리고,
밤을 쪼는 가로등 불빛은 시린 눈을 참느라고 제 홀로 헉헉거린다.
바람이 갈팡질팡 깝죽대는 까닭을 모르는 것들은, 모든 동작이 수동적이다.
외세에 침탈당한 식민지의 노예 같은 몸부림이다.
174
잡힌 손 밀어내고 알룩조개 줍던 야들야들한 아이야
눈포래 속 가난한 이야기를 가슴에 깊이 새기면서
지금도 바닷가에서 외롭게 홀로 흔들리고 있느냐
찐한 남도 사투리, 정액처럼 허탈한 전라도 가시내야.
175
일은 나. 이는 아내. 삼은 자식.
사는 부모. 오는 하느님
그분들 살아 계시면
많이 섭섭해 할지도 몰라
176
형은 지친 눈빛으로 바라만 보고
세살로 돌아간 인간무상의 형수
울 수도 없는 시동생은 가슴을 치고
177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야 마를 날도 있겠지만
오줌발 툭툭 끊기는 세월은 슬퍼할 수도 없다
삶이 짤락짤락 잘려나간 절망의 끝은
더 갈 데가 없다
178
사정거리가 아주 짧은 풋내 나는 비무장 지대에서
숫한 밤을 지새우며 홀로 사정하는 북쪽의 병사는
높푸른 남향의 하늘을 그리면서 사정하듯 바라본다.
179
마음을 잘 다지면 하늘을 손아귀에 움켜쥘 수도 있어요.
멀고 큰 것은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면 더 잘 보이지요.
부모님 은혜도 손에 모아서 기도하면 더 깊어져요.
180
까치집에서 내려다보는 인간의 모습은 점이다.
땅에서 구르다 떠내려가는 농구 볼 같은 점이다.
그들의 말대로 피었다 지는 뜬구름 같은 지상의 점이다.
181
깊은 밤, 불꽃으로 타는 아미는
남자를 홀리는 마약의 불빛이다.
아는 사람은 다 안다.
182
반 쯤 깎여나간 산말랑에 건설 장비들이 설 연휴를 쉬고 있다.
힘 좋게 퍽퍽 파 올리던 강철의 쇠 주걱도 동작을 멈추고 한가롭다.
절단되어 사라져버린 산의 윤곽을 그려주는 환영(幻影)만 아른거린다.
183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책들은
글자로 담긴 쌀가마처럼 넉넉하다.
속에서 알찬 말들이 덮이고 눌려서 질식 상태다
숨통을 튀어 줄 내 손을 기다리는 간절한 표정들이다.
184
비껴가는 자동차의 뒷모습은 아쉬워 할 틈이 없다.
맞은 편 자동차가 쏘아대는 센 불빛에 눈이 시리고,
시시 때때로 급변하는 세태만 어지럽게 교차할 뿐이다.
185
치솟는 이상에만 정신 못 차리게 급급했던
젊은 날이 그리울 때에, 달리 생각해 보면
제 무계에 짓눌려 억지로 몸이 꺾인
벼 모가지는 번뇌의 고통임을 알겠다.
186
비둘기가 떼 지어 날던 창공을 잃었다.
미세먼지 자욱한 어두운 하늘이 되었다.
뱃속에다 우굴 거린 사람들을 퍼 담아 태우고
위험스런 큰 새는 좋았던 하늘 길을 누비고 있다.
187
비루한 조국에 침 뱉고 돌아서 본들
울고불고 살아온 그때를 잊지 못할 것이다.
눈물 젖은 찰흙 한 덩이 손맛 보면서 살리라.
188
생수로 닦여 진 이승의 죽은 목숨 하나
한 줌 흙으로 돌아갈 마지막 나무토막을 보네
절망의 꽃 한 송이 잘 피워 내고 간다면
어디선들 영원히 시들지 않고 피어 있겠지.
189
삼시 세 끼 밥 먹는 사소한 일이라도
꾹꾹 눌러 쓴 편지 한 장이면
만리장성 긴 이야기를 덮을 터인데
흉내 낼 수 없는 필적으로 전해오던
190
밤중에 듣던 옛날의 부엉이 울음소리
봄에 듣는 멧비둘기의 음흉한 귀신소리
조석으로 짹짹대는 무질서한 까치들 떼울음.
여러 새들이 갖가지 울음소리를 들려줘 봐도
내 영혼을 맑게 울어줄 새 울음소리는 찾아볼 수가 없네.
191
백발 생머리의 아버지가 슬프다고
염색 약 값을 주겠다는 딸이 있어
내 얼굴 다시 보니, 내가 또
서글퍼지네.
192
까치가 나무에 앉아 제 존재를 알린다고 꽁지를 깝죽대고 있다.
나도 한 번 따라서 해보려고 시도했으나 세월의 꼬리가
너무 길게 뻗어나서 도저히 흉내도 낼 수가 없다.
193
깊은 계곡, 선명한 주름살이 내 눈을 시리게 하고,
검은 윤기 잘잘 흐르던 머리채는 파뿌리가 되었다.
그런 아내가 있어, 오늘 하루도
즐거운 마음으로 걸어가고 있다.
194
즈믄 날의 머 언 사랑을
즈믄 번 노래해 본들
얼굴의 작은 상처에 대이는
손가락 하나의 체온만 하리까.
195
먼 들녘 끝을 휘돌아, 구불거린 포장도로에
시간을 점선으로 찍고 바쁘게 귀가하는 자동차들
오늘도 무사했다고, 아무 일 없었다고,
팔팔 굴러가는 자동차의 그림자들.
196
찌럭때기 목각상(木刻像)은 험상궂은 인상을 쓰면서 서재의 책장에 세워져 있다.
산우(山牛) 아우를 생각하면서 형이 다듬어 준 정성인데, 꾸밈도, 위장도 없는
거칠거칠한 아우의 야성적 내면을 잘 표현해준 형의 마음이 간절하게 울려온다.
형의 정성은 물론, 내 의식의 형상물로 감상하면서 아끼고 사랑한다.
197
아침에 부는 바람은 싱싱하고 산뜻하고,
점심 때 부는 바람은 일상적으로 냉랭, 건조하고,
저녁 때 부는 바람은 하루치 삶이 아파서 욱신욱신 아리다.
198
여보게, 우리 강물이 되어 함께 흘러가세
한 평생 우리가 많은 걸 배워 왔지만, 무엇을 깨달았다고
결국은 강물에 섞여 다 같이 흘러가야 할 물줄기가 아니던가.
199
삽이 못하겠다고 버티면 잔디밭을 찔러
뗏장을 뜰 수 있을까
가당찮은 삽의 객기를 파악하여 이해한 사람은
자신의 고집도 자연스럽게 고쳐나갈 수 있을 것인데-
200
우체국에서 양면괘지에 편지를 쓰는데 주변의 시선들이 생경했다.
구태의연한 나의 촌스런 생각 끝에 매달린 전통의 뿌리 의식이
검은 진주알처럼 또글또글 굴러서 무슨 심각한 삶의 도(道)라도 깨친 듯이
마음도 가볍게 붕붕 뜨는 것이었다.
201
정다운 사람들께 엽서라도 자주 보내겠다고 결심을 다지면서
15년 전에 140원 짜리 엽서 200매를 샀다. 현재 180장이 남았다.
지금은 엽서 한 장 값이 얼마인지는 잘 모르겠다.
202
근래 10년 동안 육필 봉함 편지를
내가 보내지도 않고, 받지도 못했다.
세월이 이만큼 지나니 한글도, 쓰는 일도 잊어버리고
컴퓨터나 스마트폰에 모두가 다 취해서 넋마저 잃었나보다.
203
그 사람 유골함은 묵언 침묵인데
산 사람의 낯 색은 준비된 유골 빛이다.
하늘이 준 핏줄의 인연을 죽음으로 끊어버리고
지상에서의 마지막 이별의식은 최상급의 비극이다.
204
영정 사진을 받쳐 안고 아무런 말도 없이 앞서가는 앳된 손자는
손끝에 전해오는 영정의 감촉으로 인생무상을 터득할 수 있을까
울어보기도 전에 지레 짐작으로 슬픈 표정을 짓고 걸어간다.
205
비오는 날, 낙목 우둠지의 까지 집은 음산하게 검은 빛을 띠고 있다.
사자(死者)의 넋이 담겨져 허공의 나뭇가지에 걸려 으스스하다.
이승의 불화로 열기 식혀진 유골을 기다리는 승화원에 모인 사람들,
영혼의 구름 꽃으로 검은 상장을 가슴에 달고 까지 집 아래 서 있다.
206
눈 없는 소한(小寒) 날, 눈 맞추고 추억할 눈사람도 눈에 안 띄고,
하늘은 차갑게 높아서 죽죽 미끄러지는 옛날의 눈길 더 멀고, 그립다.
207
어어! 하다가 한 해가 다 갔다.
세배 돈 받고 싶은 날도 있는데
세배드릴 어르신이 안계시네.
208
죽은 사람의 웃음소리가 환청으로 쟁쟁하게 울릴 때
살았을 때보다 더 간절하고 심오한 느낌을 주지만.
아득한 소리의 형상은 사진 속의 술잔처럼 공허하다.
죽음이라는 절망감이 웃음의 환청을 몰인정하게 지워버린
209
불 켜진 채로 십자가는 서 있고,
안개 깔린 나목 숲에 까치가 짹짹거리고
흰개미처럼 고물거린 청소부가 눈에 띈다.
어스름 새벽녘을
이냥 보고 살지요
210
거실의 점박이 호접란이 제 홀로 멋을 부리고 있다.
어제 핀 꽃잎은 부족함 없이 활짝 나래를 펴고
때를 기다리는 한 송이 꽃망울은 반 쯤 벌어 진통 중이다.
여러 개의 꽃망울이 잔뜩 움츠리고 있는 아침에 꽃의 생식과정을
여러모로 추리해 본다. 기억에 남아 있는 인정, 꽃정 다 그립다.
211
담배 한 대에 지천구 한방
두 대째는 손사래 세 번
세 대째에 왝- 귓전을 때리고
자괴감은 극한-
212
집 떠난 3일째, 낯선 동네 슈퍼 앞을 지나가네.
담배 한 갑 사다줄 친구 얼굴이 없네.
213
한여름 내내 고봉 꽃 밥을 두 손 움켜 모아 정성껏 피어 올렸던 연꽃 봉오리.
겨울이 되어 연꽃 밥 알 떨어뜨린 진흙탕 물에 저름때기처럼 깡마른 꽃대로 꽂혔다.
가난했지만 꼿꼿하게 살아왔던 어머니, 눈보라 세찬 연못에 허기진 꽃대로 서 계시네.
214
보릿고개 넘어가던 힘겨운 햇살이
우직스런 소눈깔에 설핏 고여
끝내 참아둔 눈물이 그렁그렁
목각 우상의 자화상을 본다.
215
10년간 멈춰 있던 서랍 속의 손목시계가
죽은 시간을 둥글게 동여매고 잠들어 있다,
인간이 깨우지 못한 적막은, 멈춰진 시계처럼
기다리는 침묵의 시공(時空)을 향유할 수 없다.
216
비가 온다는 인간의 말은 잘못이다
비를 내려주신다는 하늘의 뜻도 잘못이다
온다, 내린다, 다 잘못이다
비는 이래저래 상관 않는다.
217
눈이 쌓이기를 바라는 사람
꽃 피기를 기다리는 사람
죽기를 바라는 사람
모두 다 시간의 노예들이다
218
정치인 김은 웃으면서 말했다.
정치인 박은 웃고 나서 말했다
정치인 조는 말한 후에 웃었다
웃음 속의 협잡꾼도 웃었다
219
내 시집(詩集)은 영혼의 이바지 보따리
먼 곳으로 시집을 보내려고
동네 우체국으로 걸어간다.
220
눈으로 얼음으로 상관하랴
땅 속의 뿌리로 바람을 탓하랴.
목숨 걸고 생명으로 피어나는
노란 제비꽃은 극복된 시련이구나.
221
하늘은 하늘이라 치고,
구름은 구름이라 치자
사람들이 희롱하는 당신의 그림자는
값으로 매기면 얼마치나 될까요.
222
나무는 사람이 불러주는 나무이고
뿌리는 지어낸 사연으로 뿌리이고
사람은 나무가 바라보는 탈의 겉모습이고,
인간의 탈은 운명적인 삶의 필수품이다.
223
석양의 햇덩이가 숯불 사그라지듯 서서히 사위고 있다
내 탯줄 잘리던 토담집 호롱불에 그을린 구름이 탄다.
구름의 틈새를 비집고 스며든 벌건 핏물이 번지고 있다
산 너머로 방금 응고된 비릿한 핏덩이 하나
내 동생 첫 울음 울던 저녁 해가 지고 있다.
224
그림자에 실려 지금껏 떠돌아온 드높은 하늘과
앞서 가는 그림자를 붙잡고 진흙땅을 뒹굴던 밤에
시인의 고혼(孤魂)이 동천(冬天)의 별로 떠서
내 의식의 하늘에 옥구슬로 뿌려지고 있었다.
윤동주의 큰 별 하나
높이 떠서 빛나고 있다.
225
고향에 와서 60년 전의 냇가를 거닐었다.
먼저 죽은 괴복쟁이 친구 놈이 소리쳤다
야!야! 너 잘났다 너 좋겠다.
살아서 예까지 왔구나.
226
그대가 꽃으로 피어나길 바라는
내 마음이 채 꽃피지 못하여
돌인지
꽃인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네.
227
문발 들녘을 굽어 도는 침묵의 겨울 강
철새 높이 띄워 함께 우는 한강 물소리
새소리 물소리 섞어듣는 십년 세월
불광동에서 막혔던 내 귀가 뻥 뚫렸다.
228
산정호수의 물빛은 낮에도 검은 물색깔이다.
허물린 별장의 6,25도,
궁예의 청동상 칼 빛도.
물 속 깊이 잠긴 역사의 물 냄새로 어둡다.
229
스미어 번지고, 꿰뚫어 깊은 당신
불립문자(不立文字)로 마주 보는 정다운 숨소리
씨간장으로 푸욱 삭힌 사랑은, 지금의 여기에,
아내.
내일 ...
230
스산한 가을 날, 힘겹게 고갯마루에 올라서
떨리는 지팡이 고쳐 잡고 고향 마을 바라본다.
옛날 초가지붕에 누런 볏짚 이엉이 덮였다. 잠깐 고개 돌린 틈에
볏짚 이엉이 슬며시 쓸려 내리더니 그 자리에 스레트 지붕이 솟았다.
231
한평생 흘린 땀이 흙을 얼마나 적셨을까 .
임종의 순간에 흘린 눈물은 얼마나 무거울까
평생 보람차게 흘린 땀을 임종의 눈물 구슬로 가공한다면
빛나는 옥구슬 한 벌은 후회 없이 목에 걸고 가겠지요.
232
떨어진 눈물은 찌들어 흙에서 짠맛이 되고
맺힌 눈물은 눈 안에서 맴돌아 쓰리게 아프다.
삼킨 눈물은 울컥 울컥 목이 매여 떨리고,
모든 눈물은 마음에서 다듬어져 사리구슬이 된다.
233
눈발 날리는 밤을 본다.
산과 마을에 눈이 내리고 있다.
마음 멀리서 쌓인 눈발이
저승의 눈꽃으로 피고 있다.
234
한밤중 맞은편 아파트에 불 켜진 거실
얼핏 보여 지는 두 사람의 수상한 거동.
무참하여 고개 돌렸다..
235
가는 눈발이 날리다가 그치고,
거짓말같이 금방 찢어진 구름발
눈구름 상처에 파인 파란 멍 자국
아뜩한 순간에 번적 트이는 의식 한 가닥
236
형이 많이 아프다는 큰 조카 전화 받았다
어둡고 늦은 밤, 눈시울이 떨리고
울컥 치받는 눈물로 나는 가슴이 아프다.
237
간다 온다.
온다 간다.
밤길 오락가락 빗겨가는 자동차 불빛
둥글게 지고 뜨는 해달보다
곧은 직선으로 바쁘다.
238
책상은 책에 눌려서 힘겹고,
쌓인 책은 키가 높아서 무겁다.
나는 편리함을 택하고 앉아서
무거운 나를 가볍게 지켜나간다.
239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꼬리를 붙잡고
나는 아버지의 꼬리를 또 붙잡고
아들에게 내 꼬리를 잡히어서
문쥐처럼 헤엄쳐서 건너가는
길고 긴 세월의 강-
240
노고단 휴게소에 올랐다
하늘이 높고, 걸어온 길이 구비 구비 멀다
내려다보이는 마을의 골목길이
60년 살아 온 세월처럼 아련하게 얽혔다.
241
홑바지 걷어 올린 자형의 흙 묻은 다리목
감나무 밑둥처럼 꺼칠한 뽄새로
무논을 써레질 하던 모내기철은
잊고 살아 온, 잊히지 않는 옛날 그림 한 폭.
242
세 고개티 단숨에 올랐다.
또 넘어 볼거나
청솔가지 연기 깔리는 좁은 돌담길
처마 밑에 그늘이 고인 흙담집 세 채
보리피리 알리 알리 코피 흘리고
선머슴애가 뛰놀던 마을에 가리
243
깃발이 깃대에서 펄럭인다.
안 보이는 깃발이 허공에서 찢어진다.
찢어진 깃발의 오리가 재 몸을 휘감고
운명의 깃발로 펄럭인다.
244
조국은 탯줄 휘감긴 산하인가
빨갛게 매운 맛 고추 가루 하늘인가
우리에게 진정한 조국은 무엇인가
245
내 숨소리, 코고는 소리 못 듣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허수아비는 새 쫓는 시늉이라도 한다.
246
네 살 터울의 형을 문병하고 돌아오는 길에
4 년 후 내 모습이 허깨비로 나타나서
성큼성큼 선연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247
문학 취재수첩을 챙겨 넣고 전철을 탔다.
스마트폰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대는
손과 귀를 실컷 보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전철에서 잃어버린 나를
서재의 거울에서 다시 보았다.
248
토말 땅끝 마을에 세워진 시비는 막다른 길목에서도 절망의 기색이 없다.
먼 바다만 눈 빠지게 바라보면서 입술을 꼭 다물고 시처럼 아름답게 살라고 한다.
가슴에 새긴 글을 보란 듯이 내밀고 사람들을 기다린다.
249
온갖 풍상 다 겪어 시간을 밟고 울어 왔는데,
눈앞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하늘만 푸르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사람들은 공(空)한 노래만 부르고 있다
250
구천(九天)의 하늘, 구천(九泉)의 땅 속을
떠돌던 영혼들이 눈송이로 떨어진다.
물이 되는 눈송이를 다시 보아라.
낙화유수로 헛웃음 치는 울림을 보아라.
251
검게 숯이 된 천년의 이끼를
스스로 벗지 않는 바위는
또 천년을 기다리며
제 무계를 믿고 까딱도 않는다.
252
병신 년의 새해를 가슴으로 맞았다
먼 하늘이나 보면서 어제 같이만 살아라.
아무 일 없이 병신처럼 살면 족하리.
253
한세상 펼쳐보면 너무 높고, 하늘 같이 넓어서
한 점 마음을 어떤 길에 찍을지 막막하네.
꼬집어 아픈 몸뚱이 하나라도 꽉 붙들고
길 따라 살면, 길은 또 길이겠지, 행복하겠지.
254
눈 덮인 문발 들녘에서 소복의 여인들이 집단으로 상례(喪禮)를 치르던 병신년 겨울이
나의 벙어리 병신년처럼 가고 있다. 여러 갈래 논길로 뿔뿔이 제 갈 길로 떠나고 있다.
255
눈을 덮어쓰고 까딱 않는 소나무를 지조 높은
선비로 노래한다면, 눈물겨운 일이다
그래도 살아 보겠다고,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고
파랗게 질린 나무의 몰골이 안쓰럽다
256
시인이 잃은 건 안경알이 아니라 뜨거운 심장이다
마음의 시련으로 달궈진 심장은 식지 않는 자기구원의 영혼이다
시인은 영혼의 세계에 살면서
현실세계를 몽상한다.
257
시인은 밤에도 노래한다.
정녕, 노래할 것이 없으면
속을 부글부글 끓여 마시며
골방에서 혼자서도 노래한다.
258
잘 걷다가 수렁에 빠져 죽을 번한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
죽을 둥 살둥 모르게 살아 왔다는 사람의 후일담은 잘 기억된다.
다른 사람의 눈치 보지 않고 자기 삶에 충실한 사람은
남들의 눈 충을 받을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다.
259
음지의 눈밭에서 빨간 산수유 열매가 주렁주렁 떼 단위로 매달렸다.
놋쇠 화로 불씨 품듯 제 씨를 감싸고 촛불로 타고 있다.
260
삼할 쯤 잘려 나간 겨울 하늘 낮달이
덩실 까치집에 담겼다
투박한 질그릇 밥그릇에
고봉 쌀밥으로 넘쳐나고 있다
.
261
거꾸로 꽂힌 시집을 보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
머리를 처박힌 시인이 구원의 손수건을 흔드는 것 같다
262
책꽂이에 꽂힌 책의 제목을 읽어가면서 보았다
만 가지 생각들이 육탈골립(肉脫骨立)의 형상으로 서있는 것이었다.
세계만방의 지성인들이 모여 세상만사를 논하는 토론장 같다
263
참새는 기러기처럼 끼륵끼륵 울지 않는다.
까치는 비둘기처럼 쿡쿡 쿠루루 울지 않는다.
고양이는 개처럼 멍멍 짖지 않는다.
모든 생물은 제 소리를 갖고 살면서
그 소리에 걸 맞는 자기 명찰을 달고 있다.
264
구름을 발밑에 꿇어앉힐 수 없다면
두 팔을 잘라 달을 감쌀 수 없다면
부모님 무덤에 들어가 사죄할 수 없다면
그렇다면
사실주의 문학을 살려낼 수 있을까
265
시인은 아파서만 울지 않는다. 아픔의 고통을 삭히고 음미하면서
흐르는 눈물을 받아서 도로 삼킨다.
시인은 오래 살기 위해서 시를 쓰며
죽어서도 다시 살아나는 시인이 되고 싶어 한다.
266
고향에 갈 수는 없다
마음만 고쳐먹으면 고향에 갈 수 있다
고향은 영원히 갈 수 없지만
자동차나 비행기로 쉽게 갈 수 있다
267
한 길도 못 된 둠벙에 자살을 시도했던 새각시는
70을 넘어 거머리 떼를 잊지 못한다
연한 살 구멍으로 스멀스멀 파고들던 기억으로
자살은 팔자에 있는 것이라 했다
268
짧은 글로 긴 사연을 연출할 수 있다면,
따끔, 아찔한 찔림으로 그대 가슴에 닿을 수 있다면,
역지사지, 역발상의 비밀을 찾아 우주만상을 헤매도 좋으리.
눈감고 허우적대면서 확실한 단시 몇 편 남길 수 있다면
미라가 된 훗날에 숨소리 더 이어가리라.
269
비웃적거리다 돌로 굳어버린 천년의 비웃음
몰라보는 사람을 소신껏 비웃는 침묵의 석장승.
오장육부가 돌 속에 꽉 차서 속이 놀놀한 석장승.
270
내 고향의 냇물은 물줄기가 거꾸로 흐른다.
역류한 물살은 정화수 솟는 옹달샘으로 이어지고
고향에 갈 때마다 물이 산 위로 올라 흐른다.
271
꽃 피는 계절이 일 년 만에 온다면
장미 한 다발에 이 만 원 치고라도
꽃을 피워 올리는 아픔은 얼마일까,
꽃피워 올리는 꽃의 노력을 돈으로 친다면
이승에서는 계산할 수없는 깜깜 무값이다.
272
녹 슬은 철조망을 흔드는 기적 소리에 선잠이 설핏 깨이고
텁텁한 고향 냄새 풍기는 개찰구는 손때가 묻어났다.
아랫녘으로 빠지는 열차의 뒷모습이 아련한 소실점으로 찍히고
텅 빈 그 자리에 허름한 고향역이 한가로웠다..
273
나라 찾던 항일 시대는 갔는데
삶을 위한 독립투쟁은 끝나질 않네.
노년에 와서 그대의 미국 삶이
인생의 무엇이란 말인가
274
가만있자니 속이 타고, 말을 하려니 사전에도 없네.
자식을 살해하는 세상 꼴 태가 해괴한 도살장이네
275
그때 그 골짝의 옹달샘은 말라버렸다.
포글포글 생모래 품어 솟던 물낯은 하늘로 가고,
생리 혈 핏 빛 밑바닥이 통째로 들어났다.
단경(斷經)의 메마른 옹달샘에 세월의 녹이 두텁다.
276
철썩- 철썩- 쏴아-척
한반도를 파도쳐대는
지구촌의 파도 소리
98년의 긴 밧줄로 잉크 색 바다를 끌고 오네.
(최남선에게)
277
내가 피운 꽃 향에 스스로 취하여
잠 덧없는 고운 잠을 안아오려고
더 예뿐 꽃나무를 고이 길러 살지요
278
봄볕이 아파트 창문에 아리아리 깃들고
구름 슬쩍 거짓말같이 흘러가니
아랫녘 고향 산에 진달래꽃 피고도 남겠다.
279
깨져나간 옥개석 끝에 이끼가 타고
절간 안의 빈 뜰에 잡초가 성성한데
내가 왜 여기에 서 있는지,
낙낙 장송 푸르른 소나무를 보네.
280
복사꽃이 집단으로 피는 과수원에
연분홍 꽃 댕기 멀리서 날리고,
예쁜 순이는 안방에서 할미꽃으로 피었네.
281
심학산에 수타 바위가 있고, 고향의 큰골에 범 바위가 있다.
바위는 스스로 깨지지 않는다. 깨어져 부서질 때를 기다리는
무거운 무계로 자기 몸을 지켜나간다.
282
계곡의 실개천은 아래로 흘러가지만
결국엔 옹달샘으로 기어오르기 위해
우선은 내려가고 있는 중이다.
283
무논에 별이 떨어져 담긴 가을 밤
달과 별들이 눈싸움을 하고 있다
하늘에서 동반 투신할 때 달의 출발이
빨랐다는 별들의 눈총이 거세다
284
해는 서산으로 지고, 태양이 바다로 풍덩 빠지기도 한다.
해는 몽골 초원에서 뙤굴 뙤굴 뒹굴다 뚝 떨어지고
고비사막에서 폴짝 폴짝 뛰다가 꺾어져서 넘어지기도 한다.
285
납작 엎드린 황산의 피바위는 끝내 몸을 숨기지 못했다.
흐르는 물에 온 몸이 할퀴어 피멍이 날로 깊어지고 있음을
이곳, 인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286
자동차도 뜸한 일요일 아침에 흑갈색 포장도로는 아파트 마을로 갈래갈래 이어졌다.
일주일 내내 어둡던 집집마다 환한 휴일의 불빛이 깨 쏟아지듯 새어나오고 있다.
287
아파트에서 내다보이는 들녘 끝, 가로로 그어진 아스팔트 도로에
제 색깔로만 달리는 자동차들이 아슴아슴 고물거린다.
빨,주,노,초,- 파,남,보, 무지개 색으로 섞여서 흐르고 있다.
288
복사꽃 지면
복숭아 풋내
잊었던 순이 얼굴
소쿠리에 담기고
신 침이 자르르
입안에 고이네.
289
아아, 해가 진다
여러 사람이 서산 넘어 갔다.
한 삶이
말도 없이 뒤따라가고 있다.
290
성한 다리가,
가자고하면
아리다
길이 멀고 높으면
나는 아파라-
291
구름이 지리산을 덮고 눌렀다
화난 봉우리가 불끈 솟았다.
더는 못 참겠다고
후지산(富土山) 활화산으로 터져버렸다.
292
용트림하든 노송(老松)의
고목 가지가 찢어졌다
오래 품어 온 어린 날의 푸르른 솔잎 빛이 좋았다.
그네 매던 옛날 가지를 벼락이 내려치고 갔다.
293
나뭇가지는 바람을 안고 쏠린다.
사람이 바람을 맞서서 걷는다.
나는 흔들리지도, 피하지도 못하고
서서 바람을 맞는다.
294
명주실 같은 가는 비 내리네
가을해 느지감치 그렁그렁
가랑잎을 적시네.
두 늙은이 느리게, 느리게 걸어가네.
295
구름 사이로 햇살이 임진강에 내려 꽂혔다.
배배 꼬인 무명실 긴 타래 줄로
강물을 두레박질 하고 있다.
296
여울물살에 튕기는 한여름의 물방울
참깨 알 쏟아지듯 또글또글, 또또글 하얗다.
햇살에 달궈진 맑은 은구슬은 여울돌과 함께 섞여
온 강변에 구슬 밭을 이룬다.
297
며느리가 챙겨 준 아내의 생일상을 받고
내 부담을 네가 덜어주는구나
부모님께 감사했다.
298
안면도의 낙조가 징그럽게 타고 있다
갈매기 소리마저 붉게 물들여 태우고
끼륵 끼르륵 불붙은 날개를 파닥이며
타고 있는 석양빛에 부채질을 해 댄다.
299
바위는 무한정, 무비용으로 바람을 품어
사시사철 이끼 농사 멈춘 때가 없다.
푸른 이끼 말리고 볶아서
오래도록 먹고 살아 남았다.
300
돌아보면 뒷동 아파트는 높아
마주보면 앞동 아파트도 높아
은근히 조여드는
중간 동 우리 아파트
쪼이지도 않고,
높은 느낌도 없다.
301
형은 노루 상, 나는 공작 상
열두 살 때 떠돌이 관상쟁이가 말했다
형은 멀리 산을 보고 노루같이 뛰면서 도의원을 지내고,
나는 울안에서 꽁지 펼쳐 공작처럼 잔재주 부려가면서
시집 여섯 권을 썼다.
302
째앵- 쩌렁-
앞 냇물 어름 갈라지는 소리에 놀라며
밥 한 술 품고오던 어머니-
냉장고 얼음 띄워 양주를 마시는 저녁
동지섣달 한겨울 눈 덮인 산에서
어머니는 지금도 많이 추우시겠다.
303
땅에 찰싹 붙어 위로 솟는 사람의 집
공중에서 내려 꼬친 나무 위에 붕붕 뜨는 까치집
멀리 가까이 잘 안 보이는
머나 먼 내 마음의 집
304
도깨비 뿔 달고 검게 흐르는 임진강 물빛
오라비 전설로 얼룩진 붉은 핏자국의 달래강 물빛
얼굴 없는 강 처녀, 북한강 갈대밭의 소양강 처녀의 물빛
넓은 세계로 흐르는 글로벌의 한강, 도도한 물빛
305
못 잊어 세월 보내
아직 안 잊혀
잊힐 리 있으리라
믿고 살았소.
애달픈 그리움도
눈물로 참아
살뜰히 살다보면
가실 줄 알았소. (김소월에게)
306
물이 솟아 냇물이 물살로 솟아
인월 강물에 달빛이 옛날로 솟아
바람에 날려 꽃 댕기 날려
얼굴삼삼 맨얼굴로 높이 드날려
안방에 정든 눈빛 안방이 울어
물 솟듯 달빛 치듯 순이 얼굴 솟아
307
뻐꾸기 운다.
오늘 또 운다.
어제 울던 새 임진강 건너가고
작년에 울던 새 고향으로 가고
삼년 전 뻐꾸기 미국에서 울어
십년 전 뻐꾸기 북망산에서 울어
308
끼륵 끼르륵 기러기는 울지 마라
애끓는 소리로 밤하늘을 울리지 마라
가슴 꿰뚫린 솟대 새 위에서
구천(九天 )의 비음(悲音)으로 그렇게 울지 마라
내일 낮에 맑은 소리로 다시 울어 봐
설음도 볼 수 있게 똑바로 울어 봐
309
정월 대보름은 아내의 생일
알 탕 따끈하게 점심 사먹고
‘동주“ 영화 보고 손잡고 귀가
지금에 조강지처가 있어
나는 좋다 많이 좋다.
310
자기의 그림자는 평생 밟을 수가 없다.
발끝에 채여서 저 먼저 달아나고,
머리끝에서 손발만 제 맘대로 부리는
당신의 그림자는 만질 수도 없다.
311
가면을 쓰고 직장에 가는 사람은 정상이다
낯간지러워서 상사와 여직원을 어떻게
맨 낯으로 대할 수 있단 말인가
312
따라오던 그림자를 놓친 밤, 부모님 은혜도 잊고
잡념과 몽상에 시달리던 어둠 속에서 홀로 뒹굴었다.
삶의 허무를 찢어발겨 수북이 뿌려놓은 텃밭은
내 인생 여정에서 풀 수없는 눈물의 꽃밭이었다.
313
세월의 그림자로 가려진 고향의 논두렁길은
구불구불 길게 이어진 내 영혼의 자전거 길
성장 통 앓던 들판의 어둠이 눈을 가리는
지나온 세상이 삼삼, 헝클려 매듭진 길.
314
발바닥에 밟히는 검은 그림자보다
스스로의 눈빛으로 만들어진 맑은 그림자를
안고 사는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다
315
햇빛에 의한 그림자는 항상 붙어 다니지만, 그늘져서 어둡다.
크게 뜬 눈빛으로 생겨난 자신의 그림자는 유리알처럼 해맑다.
마음 비우고 사는 사람의 그림자는 거울 속에서 더 선명하다.
316
태평양 망망대해도 끝을 볼 수 있다.
거침없는 허무의 질주를 보다 못한 하늘이
운평선(雲平線)을 긋고
바다 끝의 경계를 지어놓았다.
317
사람들은 바다를 넓다고 말하지만
나는 온 바다를 손아귀에 움켜쥘 수 있다
제 몸속에 신비한 깊이를 지닌 바다는
손바닥에 담길 수도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318
알에서 막 깨어난 가물치 새끼가 거센 빗줄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물기둥을 보았다.
광한루 오작교 다리 밑 물속에서 기이한 생명의 지느러미를 파닥이는 광경도 나는 보았다.
319
두물 머리 합수 터
양수리에서 나는 보았다
강물의 거품을 터뜨리는 백조의 날갯짓도 보고
두 강물이 긴 손으로 의좋게 합장(合掌)하여
두 배, 세 배로 속죄하는
잔잔한 물소리도 들었다.
320
흐르다 멈춘 강물은
다시 흘러가지 못한다.
멈춰진 강물은 강이 아니다
시간이 정지하면 세상은 끝이다
그래서
강물이 흐른다.
321
들판의 묵은 땅에서 잡초가 싹을 틔우고 있다
올 봄에도 천 년 전처럼 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다
또- 또- 또- 또-또- 모진 생명이 이어지고 있다
322
아침 해가 지는 것처럼 뜨고 있다
비 없이 흐린 날 힘 빠진 태양이
떨어질 듯 떠 있다
우울한 마음이 무너지는 산 너머로
아침 해가 지고 있다.
323
이름도 모르는 무명의 잡초 무리들아, 너희들은 짓밟혀 살아온 설음의 푸른 넋이더냐.
아무데서나 잡동산이로 널브러져 구차한 삶을 이어왔기로서니, 이름 몇 자 적어 넣을 족보 책도 정영 잊었느냐. 세상에 못된 것들, 제 이름 값도 못하고 날뛰는 꼬락서니를 무명의 겸손으로 답해주는 그 신념이 고귀하구나. 무명 잡초의 불명예를 씻지 못한 채로
오죽한 목숨, 질긴 생명력으로 천년 동안 대를 이어왔으니 장하고 대견스럽구나.
324
여름 한낮에 뒷동 아파트 유리 창문이
여러 개로 뿔뿔이 눈부시다
회색빛 도색이 맑은 색깔로 빛나고 있다.
베란다에 널린 빨래 옷가지는 색색가지다
325
겨울 하늘이 높고 해맑다.
아파트 창살을 뚫고 들어 온 햇살이
송, 송, 송 볕으로 쌓여서 보일러 난방 않고도
마루의 공기가 따스하다
326
빨간 꽃은 정렬의 불꽃을 피우고,
파란 꽃은 정념의 꽃불을 끄고,
하얀 꽃은 지켜가는 순결이다.
나는 꽃도 색깔도 못 가져
아무 짓도 할 수가 없다
327
바다의 물색은 왜 하늘처럼 파란가.
보는 마음이 아득하여 수평선은 희미한가.
눈앞의 바다는 깊이를 알리기 싫어서
날마다 일렁일렁 출렁이고만 있는가.
328
바위는 덩치가 크고, 바둑돌은 자갈돌보다 작다.
수남이는 친구이고, 수철이는 악동이다.
하늘의 별은 내 가슴에
들어오지 못한다.
329
욕심 부리지마라. 몸 상한다.
말로 몸이 상한 어머니는 나를 살려놓고
자신의 상한 몸을 하늘로 날렸다
330
맨 발바닥으로 흙을 밟지 못하여 구두 밑창이 많이 닳았다
구멍 난 양말도 여러 켤레 버렸다
운동화나 구두는 피가 흐르는 맨발바닥을 배반하고,
공장의 기계적인 세계와 손잡고 발밑에서 나부댄다.
331
벽에 걸린 달력이 무심하다
숫자의 주름살이 꼿꼿하게 둥근 무심이다
시간이 나를 과속해도 아무 상관없다고
벽에 꽉 붙어서 날자만 헤아려 지키고 있다.
332
의자 소리가 찌그럭 찌르륵
몸을 틀 때마다 내 중량이 지겨운 모양이다
의자가 찡그린 소리를 내면서
제 존재방식을 드러내고 있다.
333
졸졸거린 실개천도 흘러가는 물길이 있다.
길을 잃은 폭포는 허공에서 투신하며 울부짖는다.
제 몸을 갈아 부수는 폭포의 좌절감은,
하얀 게거품으로 천 년을 이어왔다.
334
완숙의 낙과는 생존전략의 탁월한 묘수이다.
폭포의 낙법은 책임전가의 기만전술이다
시험에 떨어진 것이
바위 절벽 때문이라고
자꾸만, 퉤, 퉤- 침을 배타낸 폭포는
온 몸이 하얗게 침 범벅이 되었다.
.
335
고향에서 만난 눈사람은 눈도 까딱 않는다.
악수라도 청해볼까. 콧수염이라도 붙여 줄까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아왔나보다.
336
자신을 불태워 활활 피어나는 불꽃은
열화 같은 자기희생의 꽃 춤이고,
남의 가슴도 뜨겁게 달굴 수 있는
붉은 사랑이 담긴 염원의 꽃이다.
337
연초록 숲 너울이 바닷물로 넘실대는 봄날
왜 이리 가슴이 벅찰까
마약처럼 번지는 뜨거운 생명의 기운은
봄이 주는 천혜의 선약(仙藥)일 수밖에 없다.
338
절벽의 소나무는 바람에 맞서서
인고의 삶을 살아 왔고,
바람 때문에 굽어진 줄기로
더 애틋한 사랑을 받는다.
339
객지의 찬바람은 옷 속까지 스민다.
속옷으로 못 막는 바람을 의지로 이겨낸 사람은
자신의 삶을 잘 가꿀 수 있는 자양분을 스스로 배양하고
어떤 시련도 견뎌내는 강한 면역력을 갖는 사람이 된다.
340
갯벌에 빠진 발을 빼려니, 찰진 개흙이 놔 주질 않는다.
도피하는 이기심을 물고 늘어지는 갯벌의 포위망에 갇힌
내 의식이 종합적으로 혼란스럽다.
341
땅 밑으로 뻗는 나무뿌리는 인간의 뿌리를 저주한다.
오장육부로 감긴 뿌리를 뱃속에 담고 다니는 인간의 자유를
나무는 탈취 당했다고 생각하면서 못내 얼울해 한다.
마냥 한 자리 지키고 서서 원망의 표시로 흔들거리고 있다.
342
나무는 평생 한 자리 지켜내는 자존심으로 만족한다.
천지사방을 싸돌며 온갖 죄를 다 짓는 인간들을 손가락질 해댄다.
속이 타는 나무는 회개하라, 회개하라고
바람 부는 밤마다 목 쇤 소리로 절규하는 것이다.
343
꽃 피고, 새 울고, 바람도 쉬어가는 나의 정원이 없다
돈이 없고, 명당을 찾는 풍수지리설의 이론도, 능력도 없다
마땅한 정원 터가 어디에든 있기는 있을 터인데-
344
막다른 길목에서 길 멀미가 났다
돌아서려니 개구멍 샛길이 보였다
그 길도 길이거니 싶어서 빠져 나왔다
이상한 길에 관하여 이견은 없다
345
한강과 임진강의 합수터, 교하(交河)에서 십 년을 살았다 두 강물이 합쳐 흐르는 역사가
징그럽도록 끈질기다는 생각이 든다. 잔 줄기 실개천의 물을 긁어모아, 큰물로 흐르는
자긍심이 더욱 도도하고 당차다. 결국엔 강의 이름을 잃고 바다로 섞이고 말 터인데,
교하의 한강물은 삶의 순환처럼 끊이지 않고 계속 흘러가고 있다.
346
적막이 흐르는 그믐밤, 강 건너 마을에 지상의 별들이 굳어 있다. 반짝임도 잃고
직선으로만 뻗어가는 전등 불빛이 석고상의 눈알처럼, 죽은 사람 뜬 눈 같다.
347
겨울 밤 하늘의 기러기 울음소리는 구슬프다. 씻김 굿판의 춤사위 같은 날갯짓으로
제 울음소리를 부채질하여 애절한 선율로 변주시킬 줄 아는 날짐승이다.
기러기는 하늘을 비상하는 엘레지의 가왕으로 손색이 없다.
348
내 영혼의 속세에서
냇물의 징검돌처럼
바다의 파도처럼
고향의 논길처럼
객지의 찬바람처럼
가족의 눈물처럼
나는 흘러왔다.
349
탈춤꾼의 춤사위는 허공에서 나닐고
탈바가지 눈빛은 영원 속을 헤매네.
멀어라, 멀어라 탈 빛 어둠은 멀어라
깊어라, 깊어라 탈속의 혼돈은 깊어라
350
저기, 너울대는 탈춤을 보아라.
춤꾼이 춤추는 줄 아느냐,
울며 노래하는 줄 아느냐
멀리 뒷등을 보아라.
누가 와서 일렁이고 있느냐
춤사위를 보고, 춤 탈을 벗기지 마라
사람의 영혼이 맨얼굴로 시릴라
351
눈 덮인 나뭇가지 사이로 표시 낸듯한 까지 집 한 채
하늘에 돋을새김으로 큰 점 하나 불쑥 드러났다.
차가운 눈발 속에서 내 영혼의 까지 집은 밤처럼 어둡다.
352
좌우로 엇갈린 눈발이 갈 표를 그리면서 정신없이 퍼붓고 있다.
질서 없는 눈송이가 엉뚱하게 섞여 제멋대로 미친 듯이 날리면서,
넓은 들, 대형 화폭에 자신의 눈송이를 소재로 활용하여
쉴 틈도 없이 추상화 점묘를 수없이 그리고 있다.
353
포장도로에 깔린 꺼먼 빗물은 자동차 바퀴로 철벅거리고
눈꽃을 피운 비탈의 나무는 사십 오도로 기울었다.
시원찮은 늦겨울 싸락눈이 어설프게 그려낸
서글픈 자연 풍경은 떠내려가는 겨울의 아쉬움이네.
354
내리던 눈발이 그치고
미쳐 못 내린 미숙아 눈덩이가
하늘에 무거운 차일로 붕 떠서
출발 신호를 기다린다.
355
스키 군복 차림의 눈송이 낙하산 병력이
인해전술로 쏟아져 내리는 판국에
아파트 경비실은 침묵의 무대응 전술로
맡은 전선을 잘 지켜내고 있다.
356
아파트 15층에서 내려다보는 공원의 설경은
하늘을 날고 싶은 전설 속의 신선 기분이다.
357
매생이국 끓여 훌훌 저녁 먹자고 아내가 말한다.
늦사랑 노심(老心)이 절절히 솟아나서 흐믓하네.
지갑 챙기고 적립 카드 확인하고, 전복을 사려고
동네 마트로 눈길을 걸어간다.
358
2주 걸러서 화분에 물주는 일요일
안방의 꽃 화분은 교회로 가고 없네.
베란다의 남은 화분에 듬뿍 물을 뿌리면서
나는 지금 한가로운 자족의 시를 구상하네.
359
퍼붓던 눈발이 끝이고, 여기 저기 나뭇가지에 하얀 눈꽃이 피었다.
먼저 간 친구도, 속 깊은 시인도 눈처럼 하얗게 삼삼 떠올라서 많이 그립다.
시를 안주(按酒)삼아 소주 한 잔 하고 싶다. 문득, 생각되니 아쉬움으로 새삼스럽다.
술 없이도 취하는 눈 퍼붓는 날이 있다.
360
해남 땅끝 마을에 바다가 있었다.
바다 끝에는 길이 없어 가지 못하고
살아 있는 파도만 보고 왔다.
361
단시 300편을 쓰고 나서 볼펜 쥐었던 손바닥을 펴보네.
못 박힌 중지(中指)가 욱신거려 만지작거리며 보고 있으니
또 아프네.
362
눈 덮인 밤에 가로등 불빛이 길을 따라 길게 줄을 긋고, 어릴 적 들판으로 이어진다.
그 놈하고 옛날처럼 다시 걸으면서 푸석푸석 눈밭에 또 넘어지고 싶다.
363
주문진 어시장에서 영덕게를 사겠다니
영덕에 가도 영덕게는 없을 겁니다.
내역을 알고 나서
상인도 아내도 나도 웃었다.
364
자식들 애 먹이지 않고, 피해 없이 살다 갔으면 좋겠는데-
그럼요! 옳아요! 그렇지요-
공원 벤치에서 80대 할머니들
토론 없이 만장일치다.
365
신부님과 수녀님이
함께 걸어가는 뒷모습 본다.
부부 아닌, 부부처럼 걸어간다.
366
운동장에서 중학생들이 공을 찬다.
한 아이가 넘어진다.
굴러라 굴러
이 세상 견디고 살려면
미리미리 더 굴러 봐야 한다.
367
태몽과 운명에 연관된 내 시 “농기”를 시화전 출품작으로 정하고,
먹을 갈아 배꼽 탁본을 떴다
해놓고 보니 불만이다
태몽 속 내 영혼의 배꼽은 어디에 있는가.
368
손바닥 하나로 두 눈을 가릴 수 있지만
두 눈으로 한 손바닥 지문을 다 못 읽는다.
자기 손에 그려진 운명의 지도를 빤히 보면서도
해독 하지 못하는 인간의 오만은 비극이다.
369
지상의 사물을 다 볼 수 있는 두 눈을
폭삭 가릴 수 있는 손바닥은 얼마나 큰가.
손가락에 연필 한 자루 마음 깊이 깃들면
우주를 자극하여 움직일 수도 있다.
370
자신이 밟아 온 땅의 면적은 계산할 수 없지만
발바닥에 패인 주름을 천천히 짚어보면
걸어 온 삶의 궤적이 마음의 지도로 그려진다.
구비 구비 힘든 고갯길도 찾아 낼 수 있다.
371
목욕탕에서 몸을 담그고 시간을 보내면서
남자의 젖가슴에 대하여 공상했다
유두(乳頭)-유점(乳点)(남),
유방(乳房)-유벽(乳壁)(남)
유선(乳腺)-유맥(乳脈)(남)
남녀 상대어를 생각하면서 실소했다.
372
종소리
안개 속에서 종소리.
멀리서 바람 타고 오다가
고압선에 걸려 축 처진 종소리.
서리 낀 유리창에 미끄러지는 뽀얀 종소리.
373
나무가 쓰러지고, 산이 깎이고 들이 드러나고, 길이 솟았다
부룽 부룽 산이 무너졌다. 큰 돌이 굴러 논바닥에 처박혔다.
굴삭기도, 덤프트럭도 트레일러도
작동을 멈추고 누렇게 쉬고 있다.
374
필리버스터에 취한 야당
말로만 그러지 말고
차라리, 할복하라
끝을 보라.
375
수평선을 태우는 낙조의 선율은
선지피로 솟다가
산화한 병사의 혼백으로
번지는 바다에
기름이 타고
마음이 타고
수심 깊이 시간을 묻는다.
376
밤마다 산을 굴러 내리는 바위는
다시 오르지 못할 강 언덕에 처박혔다.
시 때 없이 피어나는 돌이끼는 파랗고,
모난 돌에 정 맞아 깨어진 돌조각은 구들장이다.
돌담 틈새의 청개구리는
온 몸이 젖었다
377
임진각 평화의 종이
전쟁의 상흔을 울고 있다
상투 끝 목매 달리어
주리 틀며 울고 있다
핏 빛의 쇠북 소리가
북쪽 벽에서 산화한다.
378
베란다의 선인장이 분홍색 꽃을 피웠다.
가시 돋친 축구공 정수리에 피어난 꽃이 오랜만이다.
사막은 멀고 아득하지만, 제 본색을 끝내 잊지 않고
끈질긴 생명력을 꽃으로 묘사하고 있다.
379
간밤에 눈이 내렸다
지붕이 하얗고, 들판이 하얗고,
나무가 하얗고, 멀리서 여러 산이 하얗다.
그런데, 내가 보는 높은 하늘은 색깔이 없다.
380
눈이 자잘하게 싸라기처럼 날리다가
눈발이 목화송이처럼 탐스럽게 퍼붓는다.
눈, 눈발이 끝였다.
땅, 땅이 하얗게 시리다.
381
탑이 솟는다.
백장사 삼층 석탑이
어제처럼 솟는다.
이루지 못하여 꼭 닿으려고
오늘 또 탑파(塔婆)가 솟는다.
382
탑은 기도(祈禱)하는 몸짓
울부짖는 울분의 현신불
하늘 바라 오죽함이 탑 끝에서 닳고
천 년의 발원(發願)도 속병으로 굳어
솟다가 좌절한 탑신의 허무는
이름값으로 무너지지도 못한다.
383
베란다에 꼽힌 3.1절 태극기는 화가 났다.
찝쩍대는 바람을 유관순 치마폭으로 깃대에 둘둘 말아 감고
태연하게 비스듬이 서 있다.
384
3.1절 태극기가 바람에 흔들립니다.
어제의 시련인가, 오늘의 부채춤인가
왔다 갔다 비틀거리는
분단 현실의 갈등입니다.
385
뒷동 아파트에 듬성듬성 국경일 태극기가 내어걸렸다
대한민국 애국심의 긍지가 태극문양의 깃발에 실려서
고귀한 개인의 자유를 유감없이 휘날리고 있다.
386
남원 광한루에 가보니 춘향이는 울고 있드라.
서 있기 무서워요 앉고 싶어요.
열녀 싫소, 만고 열녀 못하겠소.
놓아 주오 놓아 주오 눈물 나서 못살겠소.
서서 우는 춘향이 사당은 눈물 바다였다.
387
만복사지 풀밭을 헤치고 자세히 보니 아무것도 있는 것이 없다
허물리고 무너진 땅은 역사의 흙빛으로 검게 변색 되어 있었다.
이야기도, 불상도, 범종 소리도 죄다 풀뿌리에 깊이 깔려버리고
여느 묵정밭과 다름이 없었다.
388
새로 조성된 만인의총 사당에서 보았다
민족, 총칼, 권력, 힘, 민초, 자유-
그것들의 그림자는 혼란스럽다
개인의 삶도, 세상 더불어 살기도
비련의 역사 앞에서 무력할 뿐이다.
389
교룡산성 무너진 틈새에서 옛날의 피 냄새를 맡는다.
아버지들의 할아버지들의 잘린 손발이 토막으로 얽히고설켜서
성의 조각돌로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다.
390
서천리 당산 수호신은 무섭다. 풀밭에 앉은 듯 서서 왕방울 도깨비 눈을 치뜨고 있다.
겨드랑에 검은 이끼는 저승사자 옷자락이다. 덤비지 마라 곱게 살아라. 밤에도 잠들지 않고
서천리 사람들을 날이 날마다 경고하고 있다.
391
병원을 옮긴다고 산소마스크 쓰고 실려 가는
형의 손을 붙잡고
꼭 일어나야 돼
할 얘기가 아직 남았잖아요.
눈물이 하늘보다 무겁다.
392
치매 아내를 지키다
먼저 쓰러진 형
지고 갈 운명이라면
무엇으로,
어떻게,
그 까닭을 물어 볼 수 있을까
눈앞의 인간사를 말로 다할 수 없으니
이 무슨 운명의 저주인가.
393
눈물 훔치고 형의 쾌유를 비는
간절한 마음이
불혹의 그때와 다르다
고회의 깊이로 떨어지는
막막한 어둠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모르겠다.
394
볼펜 병으로 중지가 탈이 나서 일회용 밴드로 감았다.
못 박힌 손가락이 큰 상처라도 난 듯 볼품없다.
반평생 써 온 볼펜을 던질 수는 없고,
손가락은 아프다
견딜 만큼 아프다
395
큰애한테 전화 할려니
놀랠까봐 못하겠다.
무슨 일 있어요?
듣는 일도 대답하는 사연도
다 걱정의 빌미가 된다.
아무 일 없이 지내는
아비가 되고 싶다.
396
양다래 21개를 봉지에 담아 넣고 20개로 계산하였다.
계산 마치고나서 양심이 찡-했다
(한 개는 덤이다 덤 단골이니까)
작은 잘못에 대한 복잡한 가책이다.
397
냄새 나는 음식 쓰레기 3.2키로 버렸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부끄럽지 않았다
아내가 원하는 일을 하면 기분이 좋다.
398
아내가 잘 먹는 양미나리 두 단을 사들고 집에 왔다.
두 단이나 샀구려.
흐뭇한 그 말이 나는 듣기 좋았다.
399
형이 아프니까 부모님 생각 더 깊다.
아버지 곁에 묻히고 싶다는 말이 짠해서
내 생각 더 어둡다.
이런 말조차 입에 담기 싫어
쓰기도 죄스럽네.
400
사자들 먹이 다툼 같은 정치판 꼬락서니가 보기 싫다.
씨부렁대는 방송 채널을 돌려버리고
내 생각을 껌 씹듯 자근자근 삭혀냈다.
401
아버님과 두 시간 놀아드렸어요
며느리의 말을 듣고 씁쓸하다
무한효도와 의도된 배려 사이가
50년의 거리다
402
새벽 세시에 잠이 깨어 물 한잔 마시는데
앞 동 아파트에 불이 다 꺼졌다
32세대 가족이 함께 잠자는 숨소리도 들을 수 없고,
부스럭 거리는 잠 덧도 볼 수가 없다.
403
수평의 아파트 지붕이 동평선(棟平線)을 그어놓고
하늘과 교섭하고 있구나.
404
잘 지내던 친구 이름이 혀에 뱅뱅 도는데
끝내 포기하고 말았다.
지금의 내 설단현상(舌端現狀)이
치매 전조(前兆) 현상이 아닌가.
근심스럽게 의심해 보았다.
405
산으로 막힌 하늘은 능선의 곡선을 따라 경계가 드러나고
아파트 지붕 넘어 하늘은 수평의 일자로 잘려서 직선 감을 준다.
내 마음의 하늘은 끝없이 얽히고설키어 직선으로는 긋지 못하네.
406
고압선 긴 전선이 강을 가로질러
아래쪽으로 휘 능청 드리워져서
위로 휜 하늘과 만나 큰 원을 그려놓았다.
하늘과 인간의 합작으로 지구형상을 지어놓고
모르는 척하고 시침일 뚝 따고 있다.
407
380년 된 대복사 동종 겉면에 기둥뿌리로 얻어맞은
멍 자국이 하얗게 드러났다.
한곳에 집중 매를 맞는 비법을 써서
몸 전체를 보전하여 지금껏 살아남았다.
그렇게라도 전해왔으니 천만 다행이다
408
서산에 해가 지고 있다
호박같이 떼굴떼굴 구르거나
뉴톤의 사과처럼 뚝 떨어지거나
낙화암의 삼천궁녀 치마폭이거나
동해 바다 일출의 역동작이거나
아무런 상관도 없이
석양의 낙조는 붉다
409
까치가 여러 마리
낙목 가지 사이를
날아들어 노닐 때
흑백 모자이크 동영상을 연출해 낸다.
날 짐승의 생체 모자이크 행위예술은
흔하게 볼 수 없는 광경이다.
410
끼륵 끼르륵 기러기는 울지마
애끓는 소리로 밤하늘을 울리지 마
가슴 꿰뚫린 솟대새 위에서구천(九天)의 비음(悲音)으로
그렇게 울지
마내일 낮에 맑은 소리로 다시 울어 봐
서러움도 볼 수 있게 똑바로 울어 봐
411
완만하게 경사진 석벽의 폭포는
수직성 폭포의 절박감을 이해하지 못한다.
석벽을 타고 흐르는 듯 떨어지는 폭포는
체머리 찰찰 흔들며 여유롭게 제 몫을 다한다.
“끝”
단시 411편 完 (2016.3.25)
후기
탈고 하고나니 마음의 짐 하나를 벗은 느낌이고, 카타르시스 된 후련함이다.
단시에 대한 매력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시간을 갖고 동기와 소재를 축적해 나갈 것이다.
시간이 돈보다 귀중하다는 생각이 내 시심을 더 견인해 주었으면 한다.
단시에 대한 의욕과 동력을 잃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2016. 3. 30
교하 산우산방에서
김 성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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