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명고을 - 외암리 민속마을
산천이 아름다워 삼천리 금수강산이라 불리는 우리나라 강토에는 사람이 살기 좋은 명고을이 많다. 더욱이 인물은 지령이라 하였듯이 수려한 산천정기가 서린 명고을에서는 훌륭한 인물도 많이 탄생하기 마련이다. 조선후기 실학자이며 지리학자인 청화산인 이중환은 그가 쓴 지리서인 택리지에서 경상도 지역은 특히 산수가 아름답고 생리가 풍부하여 사람 살기에 팔도에서 으뜸이고 인물이 많이 나기로 유명한데 조선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인재의 반은 선산에 있다고 하였다.
영남지방 중에서도 삼남의 사대길지를 꼽았는데, 서애 유성룡이 태어난 안동 풍산의 하회마을과 충재 권벌의 종택이 있는 봉화의 닭실마을, 의성김씨 종택이 있는 임하의 내앞마을, 그리고 회재 이언적과 우재 손중돈이 태어난 경주의 양동마을이 그곳이다. 네 곳 모두가 경상도 북부지방에 자리하고 있으며 태백산의 정기를 받고 있다는 것이 공통된 점이다.
전국적으로 알려진 명고을을 살펴본다면 하회마을, 양동마을과 더불어 우리나라 6대 민속마을로 지정된 강원도 고성의 왕곡마을, 전남 순천의 낙안마을, 충남 아산의 외암마을, 제주도 서귀포의 성읍마을 등이 있는데 모두 다 하나같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녔으며,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돤 한국의 명고을로 알려져 있다.
그 밖에도 널리 알려지진 않았으나 풍수적으로 명당길지에 자리잡아 오래도록 그 명성을 아는 사람은 다 알아주는 고을로는 지리산 자락의 남사마을, 칠곡 웃갓마을, 영양의 주실마을, 경북 영덕의 괴시리마을, 서울 남산의 한옥마을, 경북 영주의 수도리 무섬마을, 대구 남평문씨 세거지인 인흥마을을 비롯한 각 성씨들의 세거지 등 전국적으로 많은 명고을들이 수도 없이 많이 있다.
최근 들어서는 박사가 많이 배출되어 박사마을이라 이름 붙은 곳이 두 군데가 있는데, 100명의 박사가 배출된 강원도 춘천 서면의 박사마을과 88명의 박사를 배출한 전북 임실군 삼계면의 박사마을이 그곳이다.
우리나라 각지에 분포되어 있는 이런 명고을들을 일일이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풍수답사를 하다 보면 느끼게 되는 공통된 점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같이 산세와 수세가 우수하다는 것이다. 비단 산과 물이 어우러져 수려할 뿐만 아니라 산이든 물이든 제각기 나름대로 특징이 하나씩 있다는 점이다. 이로써 인물은 산천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다는 풍수언을 짐작으로나마 믿게 되고, 이처럼 자연이 조화롭게 잘 짜여진 명당길지에 터를 잡은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느끼고 탄복하게 된다.
여러 명고을 중에서 이번에는 충남 아산에 위치한 외암리 민속마을을 둘러보았다. 대풍연 회원님들과 함께한 이번 답사는 혼자서 다닐 때보다 훨씬 많은 지식과 정보를 알게 되고 또한 각자 나름의 안목으로 관찰하기에 다양하게 살필 수 있어서 좋았다. 특히 외암마을 입구에서 목을 추기기 위해 마셨던 동동주와 두부김치의 맛은 피로해진 여행객의 노독을 풀어주는 신선한 청량제가 되었으며 더욱이 정겨운 회원님들과 함게 하였기에 답사의 재미를 두 배로 늘려주었다.
1. 외암마을의 개요
500년 역사의 전통을 가지는 외암민속마을은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에 있다.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우리나라 대표적인 반촌(班村)으로 현재는 65가구의 초가집과 기와집들이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 외암마을은 1978년 충청남도 지정 ‘민속 마을'로 선정되었고, 1988년 전통건조물 보존지구 제2호로 지정되었으며 2000년에는 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자료 제236호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마을앞에 세워진 안내문에는 마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외암마을은 북쪽의 설화산을 주봉으로 그 남서쪽의 약한 구릉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마을 어귀는 낮고 마을 뒤로 갈수록 점점 높아지는 지형이다. 이러한 지형조건에 따라 마을의 집은 대개 남향 또는 서남향으로 배치되어 일조량이 많으며 겨울에는 서부계절풍을 막아 주는 좋은 기후환경 때문에 일찍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 조선 경종 3년(1723)에 이간선생이 쓴 외암기(巍巖記)에 마을 이름을 외암(巍巖)으로 기록한 사실이 있으나 그 후 언제부터인지 같은 한자지만 획수가 적은 외암(外岩)으로 고쳐서 부르게 되었다. 정월 보름을 전후하여 느티나무제와 장승제를 지내며 매년 10월에는 전통 짚풀공예와 민속놀이 등 농촌체험을 할 수 있는 짚풀문화제가 열린다.”
위 안내문에 적힌대로 외암(巍巖)이 외암(外岩)으로 변하였다는데 마을을 들어가는 다리 아래 바위에 외암동천(巍巖洞天)이란 글자가 암각되어 있어 이 말을 뒷받침하고 있다. 외암이란 우뚝 솟은 바위란 뜻으로 진산(鎭山)인 설화산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회원들과 동동주를 들이켰던 마을 입구에는 장승과 송덕비, 그리고 정려가 있고 매표소를 지나 다리를 건너면 좌측에 물레방앗간과 초가로 된 육각정인 반석정(盤石亭)이 내방객을 가장 먼저 반긴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초가집과 기와집들이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채 모여 있고 돌로 만든 나지막한 담장이 특이하게 다가온다. 총 길이 5.3km의 돌담장은 마을 전체에 걸쳐 집집마다 둘러져 있는데 옛날에 농지를 개간하고 집터를 조성하면서 나온 돌들로 쌓은 것이라 한다. 높이는 집안이 훤히 다 보일 정도로 낮은 높이여서 이웃을 경계하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살아가는 주민들의 인심을 보는 것 같아 정겨운 마을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마을의 전체적인 모양은 동서로 긴 타원형이다. 동북쪽의 설화산 자락이 마을에 이르러서는 완만하게 구릉을 만들면서 마을 앞쪽으로 흘러 내려간다. 따라서 서쪽의 마을 어귀는 낮고 동쪽의 뒤로 갈수록 높아지는 동고서저(東高西低)형상이다. 이러한 지형조건에 맞추어 집이 앉은 방향은 거의 서남향이다.
마을 안에는 2개의 정자나무(亭子木)가 있다. 하나는 마을 안길을 들어서면 샛길이 뻗어지는 곳에 자리잡아 있고, 또 하나는 마을 후면의 가장자리인 개천변에 있다. 안에 있는 것은 마을 동제나 마을 축제를 할 때 이곳에서 제를 지내 신성시되는 공간이다.
외암마을은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의 촬영지로도 유명한데 영화 ‘취화선’ ‘태극기 휘날리며’ ‘클래식’ ‘소릉’ ‘동첨’등과 드라마 ‘야인시대’ ‘옥이이모’ ‘임꺽정’ ‘찬란한 여명’ ‘당신’ ‘덕이’ ‘꼭지’ ‘새엄마’ ‘소문난 여자’ ‘여울’ ‘만강‘ 등의 한 배경이 되었고 삼성생명의 CF도 이곳에서 촬영한 바 있다.
2. 외암마을의 風水
무덤 한기나 주택 한 채를 기준하여 혈장의 뒤쪽에서 내룡이 내려와 터에 정기를 넣어주는 현무봉을 주산(主山)이라고 한다. 이에 비해 집이 여러 채가 모여 있는 마을이나 도읍지에 정기를 넣어주는 현무봉은 진산(鎭山)이라 한다. 예를 들면 경복궁은 건물은 많으나 임금 한사람이 주인이 되는 까닭에 하나의 주택으로 보게 되므로 경복궁의 현무봉인 백악산(북악산)은 경복궁의 주산이 된다. 그러나 서울이라는 도읍지를 기준하여 본다면 백악산은 서울의 진산이 되는 것이다. 즉 내 집의 뒷산은 주산이라 불러야 맞는 표현이 되고 내 집이 있는 우리 마을의 뒷산은 진산이라 불러야 맞는 말이 된다. 따라서 주산과 진산은 같은 산이지만 무엇을 대상으로 하느냐에 따라 명칭이 달라지게되는 것이다.
외암마을의 진산(鎭山)은 설화산(441m)이다. 설화산은 금북정맥(錦北正脈)에 속하는 산악으로 광덕산에서 갈라진 지맥이며 온양고을의 안산(案山)이기도 하다. 다섯 봉우리가 솟아서 오봉산이라고도 부르는 이 산의 반대편 자락에 조선초기 청백리(淸白吏)로 유명한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선생의 생가인 맹씨행단(孟氏杏壇)이 있다.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온 백두의 정기는 보은의 속리산에서 서북으로 한남금북정맥을 보내는데 이는 죽산의 칠현산에서 다시 한 번 분기하여 서쪽으로 금북정맥을 분맥한다. 안성의 서운산(547m)과 천안 성거산(579m)을 거쳐 태조산(421m), 흑성산(519m), 아산의 태화산, 망경산(600m)으로 이어지던 대간의 정기가 마침내 광덕산(699m)으로 넘어가기 직전에 수려하게 몸을 일으켜 외암마을에 혈을 결지시킨 산이 진산인 설화산이다.
청룡은 광덕산에서 분기한 맥 중 하나가 북서 방향으로 내달리어 외암 마을을 감싼 줄기이다. 청룡의 모양은 금성체(金星體)로서 부봉(富峰)을 형성하여 마을에 생리가 풍족함을 나타내고 있다.
백호는 설화산에서 갈라져 나와 나지막한 구릉을 이루며 외암(巍巖)선생의 묘소가 있는 삼성댕이골로 내려와 마을을 감싸 안았다. 마을이 자리한 곳이 오히려 높아서 백호는 아예 보이지 않는 부분도 있어 미약한 백호가 아쉬움이라 할 수 있는데 다행인 것은 외백호가 받치고 있어 허함을 어느 정도는 보완하고 있다. 백호의 끝자락은 둥글게 기를 모아 낮은 동산을 이루고 있다.
용호의 관계에서 청룡은 광덕산에서 분기한 맥이고 백호는 진산인 설화산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주합용호(湊合龍虎)를 이루고 있다. 주합용호는 진산이 아닌 다른 산에서 갈라져 나온 맥이 가까이 있어야 좋다. 그러나 외암리의 경우에 진산에서 내려온 백호자락은 마을에서 가까운데 비해 광덕산에서 분기한 청룡은 오히려 멀리 있어 주합용호로써는 좋지 못하다고 하겠다. 허지만 청룡이 높은 산맥을 이루어 있으므로 차라리 멀리 위치하는 것이 마을을 위압하지 않아 더 낫다고 볼 수 있다.
안산(案山)은 마을 정면에 있는 야트막한 봉우리로 마을의 남쪽에 솟아오른 면잠산(眠蠶山)에서 북으로 뻗어나와 일으킨 바람동산이다. 작지만 단정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진산에 비하여 높지 않아 안정감을 주고 있다. 면잠산을 주민들은 흔히 '먼적산'이라고도 하는데 주변 산악 가운에 가장 먼저 떠내려와서 머물렀다 하는 이야기도 전한다.
조산(朝山)은 외암마을의 태조산인 광덕산에서 분기하여 형성된 산맥으로 송악 저수지 앞의 유곡리에 우뚝 솟은 봉수산(347m)이다.
조산과 안산도 높이와 거리에 있어서 풍수의 국에 어울리는 형상을 하고 있다. 또한 안산이 진산에 엎드려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어, 현무수두(玄武垂頭)에 주작상무(朱雀翔舞)하여 음래양수(陰來陽受)하는 형국으로 매우 길한 형상이다.
풍수는 흔히 무덤자리를 중심하는 음택풍수와 산 사람의 집터와 집을 중심하는 양택풍수 두 가지로 크게 나뉜다. 또 도읍이나 마을의 입지조건을 논할 때는 양기풍수라고 한다. 모두 다 터를 잡는 기준은 장풍득수를 중요시 여기는데 특히 음택에서는 장풍을 중요시하여 산맥을 귀하게 보고 양기풍수나 양택풍수에서는 물을 중요시 여긴다. 이는 산은 음이요 물은 양이기에 죽은 사람은 음이고 산 사람은 양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물의 조건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릇 물이 없는 곳은 사람이 살 곳이 못된다. 산에는 반드시 물이 있어야 한다. 물과 짝한 다음이라야 바야흐로 생성하는 묘(妙)함을 다할 수 있다. 그러나 물은 반드시 흘러오고 흘러감이 지리에 합당해야 만 비로소 정기(精氣)를 모아 기르게 된다. ........ 물은 재록(財祿)을 맡아 큰 물가에 부유한 집과 유명한 마을이 많다. 비록 산중이라도 시내와 간수(澗水) 등 물이 모이는 곳이라야 여러 대를 이어 가며 오랫동안 살 수 있는 터가 된다.』라고 하여 산과 물이 만나는 곳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설심부(雪心賦)에서는『형세를 논함에 있어 산은 음이요 물은 양이다. 산과 물은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음양이 있는 것이 된다. 산과 물은 모두 정(靜)하면 음이고 동(動)하면 양이 되기 때문에 결국 산과 물은 모두 음과 양이 있는 것이다. 음래(陰來)하면 양수(陽受)해야 하고, 양래(陽來)하면 음수(陰受)해야 하니 음양도 상배(相配)해야 조화가 있게 되는 까닭이다.』라고 하여 산과 물에 의한 음양의 조화를 강조하고 있다.
또 금낭경(錦囊經)에서는『풍수의 법은 득수(得水)를 먼저하고 장풍(藏風)은 그 다음이다. 기가 바람을 타면 흩어지고, 물을 만나면 멈춘다』고 하였다.
즉 풍수적으로 좋은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가 모여야 하는데, 기가 모이기 위해서는 산에서 맥이 내려오고, 물을 만나 기가 멈추어야 하는 것이다.
외암마을의 수세를 보면 물은 두 곳에서 흘러 들어와 마을 바로 앞에서 합쳐져 천천히 마을을 돌아 흐른다. 두 갈래의 물줄기 중 한 갈래는 설화리(雪華里)의 강당골에서부터 내려오는 물이고, 다른 한 줄기는 외암 저수지에서부터 내려오는 물이다. 설화리의 강당골에서 시작되는 물은 마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내수로서 마을을 설화리에서부터 둥글게 휘감아 환포하는 모양으로 금성수가 되어 길수이다.
금낭경(錦囊經)에서『연못의 물은 장차 쇠하니, 유수(流水)는 가둔 다음에야 흘러가야 한다. 돌아옴은 끊어짐이 없으니, 한번 꺾이는 것이 법이며, 고였다가 후에 새어나가야 한다. 물은 넘치듯 가득 차서, 멀리 흘러가면서도 나를 보고 머물고 싶어 한다. 그 오는 것도 근원이 없고, 그 흘러가는 것도 없어 보이지 않는다. 경에 이르기를 산이 오고, 물이 돌면 귀하고 장수하고 부자가 된다.』라고 하여, 물이 멈추었다가 천천히 흐르고 마을을 전체적으로 휘감아 돌아갈 때 좋은 형상임을 강조하고 있다.
외암마을의 특징 중 하나는 마을의 내수를 집집마다 집 안으로 수로를 내어 끌어들이고 있는 점이다. 이 물을 이용하여 정원수를 가꾸고 생활용수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물줄기를 집안으로 끌어들인 데에는 풍수적인 비보(裨補)의 의미가 숨어 있다. 바로 진산(鎭山)인 설화산의 발음이 ‘화산(火山)’과 발음이 같아 마을에 화재가 빈번할 것을 우려하여 수(水)의 기운을 이용하여 강한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한 방책인 것이다.
마을의 구성 또한 개천을 경계로 하여 마을의 안과 밖을 구분하고 있는데 개천 건너편에는 수로를 벗어나기에 설화산의 화기를 막지 못해 재난을 피할 수 없다고 여겨 이 곳을 마을의 끝자락으로 삼은 것이 아닌가 싶다.
외암마을의 또 하나 결함은 수구가 관쇄되지 못하고 열렸다는 점이다. 이를 비보하기 위해 백호 끝자락에 솔숲을 조성하였는데 이를 풍수에서는 동수비보라 한다.
청화산인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외암 마을의 빼어난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차령에서 서쪽으로 뻗은 맥이 북쪽으로 떨어져 광덕산(廣德山)이 되고 다시 떨어져 설라산(雪羅山, 지금의 雪華山)이 되어 온양 동쪽에 위치하였다. 민중보전(閩中莆田)의 호공산(壺公山)이 중천에 빼어나 우뚝한 홀(笏)과 같은 형상인데, 이 산과 흡사하다. 이 산을 ‘동남쪽에 있는 길방(吉方)’이라 하는 것은, 아산과 온양 등의 여러 마을에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과 학문을 공부한 선비가 많이 나온 때문이다.』라고 하여 설화산의 형상을 따라 많은 선비들이 배출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3. 주요문화재(외암마을 홈페이지 자료 인용)
반석과 석각
반석은 외암마을의 입구에 있는 바위이다. 반석이 개천 바닥에 깔려있고 마을쪽으로 '외암동천(巍岩洞天)'과 '동화수석(東華水石)'이라는 글을 새겨두었다.
동화수석(東華水石) 석각은 높이 50cm, 너비 2m의 크기인데, 두께 50cm정도 되는 자연석에다 우측에서 좌측으로 큰 글씨로 새겼으며, 그 우측에 기미(己未), 그리고 그 좌측에 이백선서(李伯善書)라고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외암동천(巍岩洞天) 석각은 높이 52cm, 너비 175cm의 크기인데, 두께 50cm정도 되는 자연석에다 우측에서 좌측으로 새겼다. 끝에는 세로로 이용찬서(李用瓚書)라고 작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 글을 새긴 이용찬은 예안이씨 20세손으로 외암 이간의 직계 후손이며, 건재 이욱렬의 셋째 아들로 이승만정권 때 판사를 지낸 인물이다.
'열녀 안동권씨' 정려
마을의 입구 다리를 건너기 전 좌측에 열녀 안동권씨 정려가 있다.이 정려는 원래 다리를 건너 마을 안에 있었으나 옮겨져 지금의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정려 또한 선조의 선행을 누대에 걸쳐 모범으로 삼으려는 교육적 의미를 담고 있다.
정려는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으로 작은 규모이다. 정려 건물 안에는 명정 현판과 정려기가 있는데, 명정 현판에는 '열녀안동권씨정려(烈女安東權氏旌閭)'라 새겨져 있다.
열녀 안동권씨는 진사를 지낸 권연(權淵)의 딸로서 어려서부터 온순하고 부모님을 봉양함에 극진한 효성으로 섬기다가 13세의 어린 나이에 예안이씨 가문의 이용덕에게 시집으로 가게 되었다. 이용덕은 예안이씨 20세손으로 외암 이간의 후손이며, 퇴호거사 참판 이정렬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시집간 다음해에 남편이 15세가 되면서 요절하였다.
청상과부가 된 안동권씨는 늙은 시어머니를 봉양하면서 변변치 못한 제물이지만 죽은 남편을 위해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냈고, 나아가 집안을 화목하게 이끌었다. 평생 과부로 지내다가 나이 86세가 되어 조카인 이홍선을 아들로 삼았으나 불행히도 세상을 떠나 이홍선의 동생인 이득선의 아들을 손자로 삼아 가문을 일으켰다.
안동권씨 부인의 삶은 마을 사람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었으며, 마을 사람들이 문교부와 문공부에 특별히 천거하여 표창장과 함께 거액의 상금을 받게 되었다. 정려기는 안동권씨의 조카인 이득선씨의 부탁으로 1978년에 전원식씨가 글을 짓고 최병무씨가 글씨를 썼다.
건재고택(영암군수댁)
영암군수를 지낸 이상익(李相翼,1848~1897)이 살던 집이어서 '영암군수댁'이라고도 불리운다. 이상익은 예안이씨의 18세손으로, 외암 이간은 이상익의 직계 5대조이다. 현재 집주인은 이상익의 고손 이준경 씨이며, 그의 말에 의하면, 외암 이간이 태어난 곳도 바로 이 집터였다고 한다. 건재고택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건재(建齎)는 이상익의 아들인 이욱렬(李郁烈)의 호이다. 현재의 가옥이 완성된 것을 건재당 때라고 한다.
참판댁(큰댁)
이조참판을 지낸 퇴호 이정렬(1865~1950)이 살던 집이라 '참판댁'이라는 택호를 갖게 되었다. 이사종의 11세손인 이정렬은 할머니가 고종비인 명성황후의 이모이기 때문에 명성황후로부터 각별한 은총을 받았다. 참판댁은 이정렬이 고종황제로부터 하사받아 지은 집이라. 고종황제가 이정렬에게 하사해 '퇴호거사(退湖居士)'라는 사호를 영왕이 9세때 쓴 현판이 아직 남아 있다.
송화댁
송화군수를 지낸 이장현(1779~1841)으로 인해 '송화댁' 이라는 택호가 붙여졌다. 이장현은 이사종의 9세손으로 호사 초은(樵殷)이며 순조 10년 식년시에 진사가 되었다. 안채와사 랑채 사이의 동편에 중문간을 두어 전체적으로는 건물과 건물사이가 조금씩 떨어진 튼 'ㅁ'자 집을 하고 있다.
교수댁
이 집은 이사종의 13세손인 이용구(1854~?)가 경학으로 성균관 교수를 지냈다고 하여 붙은 택호이다. 원래 사랑채, 안채, 행랑채, 별채가 있었으나 다 없어지고 안채와 행랑채, 사당만 남아있다. 사랑채가 없어지기는 했지만 이 집도 마을의 다른 집처럼 앞에 'ㅡ'자 모양의 사랑채를 두고 뒤쪽에는 'ㄱ'자 모양의 안채를 둔 튼 'ㅁ'자 집이다.
병사댁(신창댁)
이 집은 홍경래난을 진압한 이용현(1783~1865)으로부터 유래한다. 이용현은 이사종의 9세손으로 무과로 급제하여 총관, 경연특진관 등을 지냈다. 이용현은 6세손인 이창선까지 현재의 신창댁에 살았으므로 전에는 이 집을 병사댁이라 불렀다. 그러나 현재는 그 후손이 서울로 이전하여 외암리에서 병사댁 택호는 없어졌다. 신창댁이라는 택호는 이사종의 12세손인 이세열씨의 부인인 보성임씨의 친정이 신창인데서 기인한다.
참봉댁
이사종의 12세손인 이중렬(1859~1891)과 그의 아들 이용후(1886~1955)부자가 참봉벼슬을 지낸 연유로 얻은 택호이다. 특히 이중렬은 1891년의 증광시에서 진사에 급제했다.
4. 외암마을의 인물(외암마을 홈페이지 자료 정리)
외암 이간
외암 이간 선생은 조선후기의 문신ㆍ학자로 본관은 예안, 자는 공거(公擧),호는 외암 외에 추월헌(秋月軒)이라고 하였다.
숙종 36년(1710)순무사 이만성(李晩成)에 의하여 장릉참봉(葬綾參奉)으로 천거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6년뒤인 숙종 42년(1716)에 다시 천거되어 세자시강원자의가 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가 젊은데도 벼슬이 뛰어오름을 논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온양 향리에서 주로 지낸 이간은 31세 되던 해 권선재를 건립하여 후학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영조 3년 51세로 일생을 마감했는데 정조는 이조참판과 성균관 재주를 증직하였으며 순조는 이조판서를 추증하였다. 시호는 문정공이고 저서로는 [외암유고]가 있다. 마을에는 외암 이간의 학문적 유업을 기리는 사당이 있고 매년 외암 이간 선생이 사망한 음력 3월14일 불천위제사를 지낸다. 외암 선생의 묘소는 외암리 오른쪽 산기슭에 있으며 입구에 신도비가 남아있다.
외암마을과 예안이씨
오늘날 외암마을에 거주하는 주민의 절반이 예안이씨다. 시작은 평택진씨 참봉 진한평의 사위인 이사종이다. 당시 진한평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만 셋 있었는데, 예안이씨 이사종이 진한평의 장녀와 혼인하면서 마을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외암 이간 선생이 쓴 [외암기]에 "예안이씨가 온양에 들어와 살게 된지 이미 5세가 되었다" 고 하였는데, 조선 명종 때 장사랑을 지낸 이연은 6대조이고, 이사종은 5대조가 된다. 그렇다면 이사종 때부터 이곳에 살았던 것이 분명하다.
또한 [외암기]에서는 선조 이사종이 그의 부친인 이연의 묘를 송악의외록에 정하면서, 별업을 외암에 지어 열승정(閱勝停)의 위치에 대해 읍지에서도 기록되어 있을 만큼 널리 알려져 있었다.
예안이씨는 전의 이씨에서 갈라져 나온 분파로 10세손인 익(翊)이 예안이씨의 시조가 된다. 7세손인 이연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는데 둘째 아들 이사종 계열만 번창하고 있는데, 이사종부터 예안이씨 온양파가 시작되었다.
외암리에서는 조선후기에 많은 과거 급제자들이 배출되었다. 예안 이씨 집안의 족보를 보면 문과 급제자로 이성렬과 이정렬이 있다.
이성렬
고종2년(1865)에 태어나 고종25년(1888)에 문과에 급제하여, 응교, 직각승지, 대사성, 참찬까지 지냈으며, 독립운동에 관여하였다.
이정렬(1868~1950)
고종 5년(1868)에 태어나 고종 28년(1891)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이조참판에 까지 이르렀고, 고종황제로부터 퇴호거사(退湖居士)라는 호를 받았다.
34세때 일본이 강제로 통상조약과 사법권이양을 요구하니 이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고종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당시의 책임인 외부대신을 탄핵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공의 뜻이 조정에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은 나라를 팔아먹는 조정의 신하가 될 수 없다며 관직을 포기하고 낙향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나 송악으로 낙향한 그해 11월 칠은계를 조직하여 충남일대의 항일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참판댁'이라 부르는 퇴호 이정렬이 살던 집에는 지금도 유품이 많이 남아있다.
기타 인물
조선시대 생원ㆍ진사 합격자의 명단인 [사마방목]을 통해 확인된 외암출신 생원ㆍ진사는 11명에 달한다. 이외에 이사병과 이건주가 학행으로 천거되었고 이건주는 1796년(정조20)에 충청도 관찰사 이정운이 국왕의 분부에 응해 천거한 3사람 중에 포함되어 있다.
|
첫댓글 감명 깊게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