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난설헌 생가 터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 475-3, 문화재 자료 제 59호
겨울임에도 모처럼 따사로운 햇살로 인해 포근한 날씨에 강릉에 있는 조선시대 최고의 여류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의 생가터를 찾았다. 이 가옥은 허난설헌이 태어난 집을 헐고 다시 지었으므로 허난설헌의 생가라기보다는 생가터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지금 있는 가옥의 건립한 연대나 동기는 알려지지 않고 있는데 아쉬운 것은 허난설헌의 흔적과 체취를 느낄수가 없다는 점이다. 다만 그녀가 태어나고 자랐던 곳이기에 집터에 남아있는 나무들과 땅의 기운에서 시대를 초월한 그녀와의 교감을 가져보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기며 집의 이곳 저곳을 돌아보았다. 주차장에서 생가터로 다가가자 작은 협문 앞에 맨 먼저 허난설헌 생가터라는 안내문 옆에 우물이 하나 있다. 안을 들여다보니 아직도 물이 고여 있는 게 청소만 한번 하면 지금도 시원한 물을 길어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우물이 있는 쪽으로 난 대문이 협문인데 여자들만 출입하는 문이다.
가옥의 전체 배치는 ‘ㅁ’자형인데 남자들이 출입하는 솟을 대문앞에 있는 사랑채와의 사이에 담이 쳐져있다. 남녀의 구분이 엄격하여 출입하는 대문도 구분되었을 뿐 아니라 사랑채로부터 안채를 차단시켜 내외의 법도를 따진 것도 조선시대 유가의 풍습이다. 안채의 마루에는 그녀가 생전에 지었던 시들이 액자에 넣어져 전시되고 있었다. 자식을 잃고 지었다는 곡자(哭子)도 보인다.
<곡자(哭子)> 자식을 가슴에 아무리 파묻어도….
去年喪愛女(거년상애녀) - 지난해에 사랑하는 딸을 잃었고 今年喪愛子(금년상애자) - 올해엔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었네 哀哀廣陵土(애애광릉토) - 슬프고 슬픈 광릉 땅 雙墳相對起(쌍분상대기) - 두 무덤 나란히 마주하고 있구나 蕭蕭白楊風(소소백양풍) - 백양나무에 쓸쓸히 바람이 일고 鬼火明松楸(귀화명송추) - 소나무 숲에는 도깨비 불 반짝이는데 紙錢招汝魂(지전초여혼) - 지전을 태워서 너희 혼을 부르고 玄酒存汝丘(현주존여구) - 네 무덤에 맑은 술을 올린다 應知第兄魂(응지제형혼) - 그래 안다, 너희 남매 혼이 夜夜相追遊(야야상추유) - 밤마다 서로 따르며 함께 놀고 있음을 縱有服中孩(종유복중해) - 비록 지금 뱃속에 아이가 있다지만 安可糞長成(안가분장성) - 어찌 제대로 자랄지 알겠는가 浪吟黃坮詞(낭음황대사) - 하염없이 슬픈 노래를 부르며 血泣悲呑聲(혈읍비탄성) - 피눈물 나는 서러운 울음 삼키고 있네 마당 가운데 꾸며 놓은 조그만 화단이 아기자기하면서 정겹다. 중문을 나와 솟을대문으로 향하면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는 넓은 대청과 방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면에 툇간마루가 놓여 있다. 팔작기와지붕의 높은 처마로 전면 기둥은 둥글다. 사랑채 마당에 오래된 나무가 쌍으로 자라고 있어 문화재 안내원에게 물어보았더니 능소화라고 한다. 일제시대에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온 꽃나무라고 한다. 오래된 나무이기에 혹시 허난설헌의 숨결이라도 느낄수 있을까 기대했던 마음이 실망으로 다가온다. 사랑채의 마당을 지나면 행랑채와 솟을 대문을 나와 바깥 행랑채 마당으로 이어진다.
허난설헌의 생가터는 마을의 한 켠인 평지에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전통풍수이론에서 요구하는 사신사는 아예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풍수이론 중에서 평지룡을 찾아 수로서 터잡이를 해야 하는 곳이다. 한치만 높아도 용이요, 한치만 낮아도 수라는 풍수언대로 물길을 찾아 용을 정하고 그 위에 터를 잡아 집을 지었다. 집의 뒤 쪽과 옆으로 둘러싼 금강송의 숲은 현무와 용호를 대신하여 바람을 막아주고 있었다. 허난설헌이 태어난 집은 이미 헐리고 새로 지은 집이므로 허난설헌의 탄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까닭에 풍수적 길흉의 고찰은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그녀가 지었던 생전의 시들을 읽어 보며 엄격한 남존여비의 사상으로 여성에게는 잔혹하리만치 폐쇄적이었던 조선의 시대에 살았던 그녀에게 오직 시로서만 가슴에 맺히는 한을 나타내고자 했던 그녀만의 기개와 천재성을 생가터의 답사로 교감해 본다. 허난설헌이 밟고 지나간 자리에 그녀의 작은 발모양의 자욱이 찍혀있었던 바로 그 대지위에서 한스런 생애를 조감해 보자.
허난설헌의 생애 (이하의 글은 인터넷 자료를 인용하여 정리한 것임) 조선이 낳은 천재 여류시인 허난설헌은 양천(陽川)이 본관이고 본명은 초희(楚姬)이며, 자는 경번(景樊), 난설헌은 호이다. 명종 18년(1563), 강릉 초당동에서 허엽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아버지 허엽의 관직생활로 부유하였고, 그의 시세계 형성에 크나큰 영향을 준 친 오라버니 허봉도 난설헌 열살 때 대과에 합격하고 열다섯 살 때 교리가 되는데, 이러한 오라버니의 출세도 감수성이 예민했던 어린 난설헌의 꿈을 한껏 부풀게 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난설헌은 14살 되던 해, 한 살 위인 교리 김첨의 아들인 김성립과 결혼을 하게 된다. 김성립의 아버지 김첨과 허봉이 강당의 동창이었고 또한 각별히 사이가 좋았으므로 혼담이 이루어졌다. 안동 김씨 집안인 시댁은 5대가 계속 문과에 급제한 문벌 있는 집안이었고, 시어머니 송씨 역시 당내 경학으로 유명한 이조판서 송기수의 딸이었다. 허균은 누님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파 마지않는>, <오호라 살아서는 부부사이가 좋지 않더니, 죽어서도 제사를 받들어 모실 아들하나 없구나. 아름다운 구슬이 깨어졌으니 그 슬픔이 어찌 끝나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부부금슬도 좋지 않았고 시어머니와의 관계도 원만치 않았던 난설헌에게 설상가상으로 밀어닥친 불행은 사랑하는 두 자녀를 차례로 잃은 일이었다. 그 충격으로 유산까지 하게 되는 등 불운이 연속되었다. 난설헌을 애지중지하던 아버지 허엽은 난설헌 18세 되던 해 경상감사 벼슬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던 중 상주 객관에서 돌아가셨고, 가장 믿고 따랐던 둘째 오라버니 허봉 역시 난설헌이 21세 되던 해 동인에 속한 학자들과 율곡을 논하다 죄를 얻어 갑산으로 귀양갔다 풀려난 후에도 한양에는 들어갈 수 없어 금강산을 떠돌다가 끝내 38세라는 젊은 나이로 객사하는 비운을 맞게 되니, 난설헌의 비통한 심정을 누가 알았으리오. 난설헌은 허봉이 죽고 1년이 지나 27세 되던 해 이 세상을 하직했다.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 여성의 삶의 목표가 되던 시대에 현숙한 어머니와 어진 부인이 될 수 없었던 난설헌에게 단 하나의 탈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활화산처럼 넘쳐흐르는 시혼의 분출이었다. 난설헌의 시풍은 일찍이 오라버니 허봉과 당시 삼당시인으로 유명했던 이달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으로 주위의 사물을 매우 정감 있게 묘사하고, 시어에 있어서도 평이하고 간결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점이 특징이었다. 꽃다운 나이 27살에 요절한 누이 난설헌의 재능을 애석하게 여긴 동생 허균은 그 유작을 모아 <난설헌고>를 편집하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이 여의치 않아 초간본이 나온 것은 선조 41년(1608)으로 난설헌이 세상을 떠난 지 19년 후의 일이었다. 그 사이 난설헌의 시는 헌신적인 허균의 노력에 의해 멀리 중국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1579년은 정유왜란의 해로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명나라 원군이 조선에 들어오는데, 1598년 봄 명나라 시인 오명제가 조선의 시문을 모아 <조선시담>을 엮은 과정에서, 당시 중국의 장군들을 접대하는 관직인 경리감독이었던 허성과 병조좌랑이었던 허균의 집에 오명제가 머물게 된 것이 난설헌 시가 중국에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남편의 심한 외도와 핍박뿐인 시댁 살이, 친정의 몰락과 세 아이를 잃은 슬픔 속에 시로 한을 달래던 여인. 그녀는 스스로의 예언대로 선조 22년 3월 19일, 27세에 요절했다. 야사에 따르면 들보에 목을 매 자살했다고도 한다.
일곱 살 어린 소녀가 상상속의 하늘의 황제가 살고 있다는 백옥루를 연상하며 그 궁전을 건축하는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지어 그녀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고, 우리나라 규방문학의 금자탑으로 일컬어지는 <규원가>(閨怨歌)를 지어 국문학사(史)에 길이 남을 족적을 남긴 난설헌 허초희의 오늘의 위상이다. 조선에서 출판 금지된 그녀의 작품이 중국 사신으로 조선을 방문한 주지번(朱之番)의 손을 거쳐 중국 명나라에서 출판되어 낙양의 지가(紙價)를 올리며 대륙을 흔들었고 그 출판본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열도(日本列島)를 뒤흔들었던 동양 3국의 여류 시인이다. 주어진 시대의 모순에 순응하지 않고 시대를 앞서 나가며 남존여비를 당연시 하는 조선 사회를 통렬히 비판하는 작품과 환상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비단결 같은 불후의 작품을 발표하여 한중일 동양 3국에서 우뚝 선 여류 시인으로 추앙 받던 한국최초의 여류 시인 허난설헌의 시를 통하여 그녀의 천재적인 삶을 잠시 느껴보자. 기방에 파묻혀 사는 님을 그리며 기나긴 밤 독수공방으로 밤을 지새우다 등잔불 저음은 불 속에 빠진 나비 한 마리 구함이라 역시, 허난설헌다운 절창이다. 지아비를 하늘처럼 모셔야하는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안주인이 부군(夫君)을 바라보는 시각과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의 여인들보다 더 세련되고 더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몽유광상산>(夢遊廣桑山)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 기대었구나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하여라 부용삼구타(芙蓉三九朶)라는 구절이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나이 스물일곱 살 되던 삼월 열아흐레 날. 깨끗이 목욕하고 새 옷을 갈아입은 그녀가 “금년이 삼구에 해당하니 서리 맞은 연꽃이 붉게 되었구나” 라며 눈을 감았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3*9는 27, 바로 그녀의 나이 27세가 아닌가 광상산은 바로 난설헌이 살고자했던 이상 세계였는지 모른다. 여기 잠들어 있는 그녀는 아직도 상상의 세계를 배회하며 환상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 모르겠다. 주어진 시대의 모순에 순응하지 않고 시대를 앞서 나가며 살아야 했기에 비난을 감수해야 했으며 평탄하지 못한 삶을 살아야했던 그녀.
죽은 이후에도 남성 사회의 본류 조선(朝鮮) 선비들로부터 폄하와 비판으로 얼룩진 그녀의 작품은 위작과 표절로 매도되었다. 416년이 지난 현재에도 그녀의 작품과 인간 허난설헌은 완전한 명예회복을 이루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