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김씨의 시조 김수로왕
가야시대에 철이 많이 생산되어 철의 바다 ‘김해(金海)’라 불리게 된 김해시는 그리 크지 않은 도시지만 참으로 많은 문화유적과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은 성씨인 김해김씨의 시조 김수로왕에 관한 역사이자 이야기다.
김수로왕은 가락국의 시조이며 김해김씨의 시조인데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김수로왕의 탄생설화와 치적내용이 실려 있다. 우선 탄생설화부터가 신비롭다.
천지가 개벽한 이래 나라의 이름도 없고 구간(九干)이라 불리는 아홉 명의 촌장이 옛날 김해지역의 부락을 나누어 다스리고 있을 때였다. 부락의 규모는 대개 100호쯤 되었고 인구는 7만5천명 정도 되었다고 전한다.
서기 42년 3월경에 부락의 북쪽에 있는 거북처럼 생긴 구지산(龜旨山) 정상에서 무엇인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 구간과 마을사람들이 함께 그 곳으로 달려가 보았더니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말 소리만 들려왔다.
"이 곳에 사람이 있느냐?"
아홉 사람의 추장들이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
"구지봉이다."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소리는 또 들려 왔다.
"하늘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서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셨다. 그래서 이곳에 내려온 것이니 너희들은 봉우리 위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불러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 먹겠다.'라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너희들은 기뻐 뛰놀게 되리라."
구간들과 백성들은 소리가 시키는 대로 노래하며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하늘에서 자줏빛 줄에 매달려 붉은 보에 싼 금궤 하나가 내려 오는게 아닌가.
사람들이 그 금궤를 열어보았더니 그 속에는 해처럼 둥근 황금 빛 알 여섯 개가 들어 있었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 그 황금빛 알들은 모두 여섯 명의 잘생긴 사내아이로 변해 있었다. 백성들은 하늘이 내린 그 아이들에게 절을 드리고 정성을 다해 모셨다.
사내아이들은 날마다 커 갔는데 그 중의 한 아이는 10여일이 지나자 다른 아이보다 더 크게 자라나서 키는 9자나 되고 얼굴은 용과 같으며 눈썹은 여덟팔자로 아름답게 빛나고 눈동자는 겹으로 돼 있었다. 다른 다섯 아이도 처음 아이와 비슷하게 자라났다.
백성들은 맨 먼저 자라고 영리해 보이는 아이를 처음 났다고 하여 수로(首露)라 이름짓고 그달 보름날에 왕위에 올렸다. 이 사람이 바로 수로왕이었다.
수로왕은 나라 이름을 가락국(駕洛國)이라 불렀는데 이어 나머지 다섯 아이들도 각기 다른 지방으로 가서 모두 다섯 가야(伽倻)의 임금이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수로왕의 대가락 또는 가야국을 합쳐 여섯 가야가 건국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서기 43년 봄에 수로왕은 신답평이라는 곳으로 나아가 이곳을 도읍으로 삼았으며 궁궐과 관청을 짓고 나랏일을 보게 되었다.
그 무렵 완하국의 왕자로서 알에서 태어난 탈해(脫解)라는 사람이 가락국으로 왔는데 그는 키가 석자는 되었고 머리 둘레는 한 자나 되었다고 한다.
탈해는 궁궐로 들어가 수로왕에게 말했다.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왔소."
수로왕은 대답하기를
"하늘이 나를 명하여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한 것은 나라를 튼튼히 하고 백성들을 안락하게 하도록 함이라. 그러하니 하늘의 뜻을 어기고 임금의 자리를 넘겨 줄 수도 없고 백성들도 맡길 수 없느니라."
"그렇다면 서로의 재주를 겨루어 승부를 결정하자."
탈해의 말에 수로왕은 그렇게 하자고 대답했고 이어 탈해는 한 마리의 매로 변하여 달려들었다. 그러자 수로왕은 독수리가 되어 공격했고 탈해가 다시 참새로 변하자 수로왕은 새매가 되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탈해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자 수로왕도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마침내 탈해는 수로왕에게 잘못을 빌고 떠나갔다.
이로써 수로왕은 완전한 가락국의 왕이 되었으며 주변에 있는 다른 부족국가를 정복하여 금관가야를 세우고 마침내 금관가야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관직을 정비하고 도읍을 정하여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서기 48년의 어느 날 문득 가락국 앞 서남쪽 바다 위에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북쪽으로 오는 배 한 척이 있었으니 그 배에서는 인도 아유타국의 아름다운 공주가 시녀와 하인들을 데리고 내리는 것이 아닌가. 공주는 수로왕을 만나 말하기를
"저는 아유타 나라의 공주입니다. 성은 허이며 이름은 황옥이라 합니다. 나이는 열여섯 살입니다. 금년 5월 어느 날 저의 부모님께서 이상한 꿈을 꾸셨는데, 꿈 속에 하느님께서 나타나서 가락국의 수로왕은 하늘이 내려 보낸 임금인데 아직 짝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저를 보내어 왕비로 삼으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나는 공주가 멀리서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소. 아름답고 어진 공주가 왔으니 내게는 물론 나라 역시 행복한 일이오."
마침내 수로왕과 허황옥 공주는 혼인을 하였고, 수로왕은 금궤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성을 김씨로 하여 김해 김씨의 시조가 되고 허황옥 공주는 아홉 명의 아들 중에서 두 아들에게 허씨 성을 따르게 하여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허씨 왕후는 157세가 되도록 오래 살다가 189년 3월 1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 때 수로왕은 허씨 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슬픔 속에서 외로이 지내다가 10년 뒤인 199년 3월 23일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수로왕이 세운 가락국은 제9대 구형왕에 이르러 신라에 의해 멸망되었고 삼국통일에 으뜸가는 공을 세운 신라의 김유신 장군은 수로왕의 12대손이기도 하다.
이상으로 간략하게 살펴본 것이 삼국유사에 전하는 김수로왕에 대한 기록이다. 수로왕은 수많은 업적들을 남겼다고 하는데 기록이 소실되어 전하는 내용은 없다고 한다.
수로왕의 비인 허황옥이 실제로 인도에서 왔는가에 대해서 엇갈리는 설이 있다. 그러나 가야(伽倻)라는 나라의 이름과 가야를 상징하는 물고기 문양의 신어문(神魚紋)을 증거로 사실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그 먼 곳에서 배를 타고 가야국까지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문이 남아 있다.
가야(伽倻) 혹은 가락(駕洛)은 고대 인도의 언어인 드라비다어로 ‘물고기’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가야국이 인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세운 나라일 거라고 하며 수로왕이 이끄는 집단이 먼저 한반도로 옮겨왔고 그 뒤를 이어 허황옥이 왔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아니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유타국이 실제로 인도의 한 왕국으로 존재하였고, 가야와 인도는 서로 왕래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가야는 신어문을 나라의 상징으로 썼는데 이 문양은 고대 인도 지방에서 각종 장식에 흔히 사용하였던 문양이라고 한다. 이 신어문의 문양은 김수로왕의 무덤에도 그려져 있고 김해 은하사를 비롯하여 가락국의 옛 땅이었던 경상남도지역의 여러 불교사원에 신어문양이 남아있어 허황옥 왕비가 인도에서 왔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김해의 진산이 신어산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도 신령스런 물고기라는 신어에서 유래된 것이다.
김수로왕릉
가락국 시조이며 김해김씨의 시조인 수로왕의 능침으로 경남 김해시 서상동 312에 있으며 사적 제73호이다. 낙남정맥의 끝자락에 솟아오른 김해의 주산인 신어산에서 서쪽으로 뻗어나온 산맥은 분성산을 이루고 분성산에서 서남으로 힘차게 내려온 구지봉 아래 평지에 정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왕릉은 조선 선조(1580)당시 영남관찰사 허엽이 능을 수축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외형은 원형 봉토분으로 높이 7m, 둘레 16m에 이른다. 능 앞에는 문인석과 무인석이 좌우에 있고 그 앞으로 말과 양의 호신석이 양쪽으로 각각 3개씩 배치되어 있다. 묘비에는 ‘가락국수로왕릉(駕洛國首露王陵)’이라 새겨져 있다.
능의 경내에는 수로왕, 수로왕비의 신위를 모신 숭선전을 비롯 안양각 등 여러 건물이 있으며 왕릉의 정문인 남릉문에는 허황옥의 고향인 인도 아유타국 용왕을 표시하는 신어문양이 그려져 있다.
허황옥 왕비릉
가야의 시조 수로왕의 왕비무덤으로 경남 김해시 구산동 120번지에 있으며 사적 제74호이다. 지정면적 3만2920㎡이고, 외형은 김수로 왕릉과 같은 원형 봉토분으로 지름 6m, 높이 5m이다. 봉분의 밑둘레를 두르는 호석은 없고 능 주위에는 얕은 돌담을 방형으로 둘러 무덤을 보호하고 있으며, 전면에는 장대석(長臺石)을 사용하여 축대를 쌓았다.
분성산에서 흘러내린 용맥이 구지봉을 맺기 직전의 옆자락에 남쪽을 향하여 자리잡고 있다. 중앙에는 혼유석(魂遊石)을 놓았고, 아울러 묘비가 세워져 있는데, '가락국수로왕비진주태후허씨지릉(駕洛國首露王妃晋州太后許氏之陵)'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조선 세종 28년(1446)에 수로왕릉과 함께 정화되었으며, 임진왜란 시에 도굴되었다. 현존 능비와 상석은 인조 25년(1641)에 설치된 것이다.
능역내에는 내삼문, 숭선제, 외삼문, 홍전문 등의 건물이 있다. 능을 바라보고 오른쪽에 파사석탑(婆娑石塔, 오른쪽 사진)이라 전하는 것이 있는데, 김해시 중심에 있었던 호계사(虎溪寺)에서 옮겨 온 것이라고 한다. <삼국유사> 금관성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조는 48년에 수로왕비가 인도에서 올 때 풍랑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배에 싣고 왔던 것이 파사석탑이라 하고, 이는 우리나라에 없는 돌로 닭 벼슬의 피로 알아 볼 수 있다고 전한다. 김해시의 향토사학자 허명철(김해시 금강병원장)씨는 파사석탑의 돌가루에 닭 벼슬 피를 떨구어 응고되지 않음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매년 음력 3월 15일과 9월 15일 봄 ·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치러지는 숭선전 제례(崇善殿 祭禮)는 수로왕과 왕비의 신위를 봉안하고 제향을 받드는 의식으로 이때는 전국의 김해 김씨와 허씨, 인천 이씨, 유림 등 만여 명이 넘는 참석 객들이 모여 날을 기린다.
구지봉(龜旨峯)
김해시 구산동 산 81-2번지 일대에 있는 낮은 봉우리로 사적 제58호이다.
이곳은 신라 유리왕 19년(42)에 하늘에서 6개의 황금알이 담긴 금상자가 내려오고 그 알 속에서 김수로왕을 비롯한 6가야의 시조 왕들이 태어났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 곳으로 가야문화의 출발지이자 고대 국문학상 중요한 서사시인 '구지가'가 남아 있는 곳이다. 원래는 거북이 머리모양을 닮았다 하여 구수봉(龜首峯)이라 불리었는데 지금의 수로왕비릉이 있는 평탄한 위치가 거북의 몸체이고 서편으로 쭉 내민 곳의 봉우리가 거북의 머리모양이다. 1908년 참봉 허선이 세운「대가락국 태조왕 탄강지지」란 석비가 있으며 석비의 남동쪽에 있는 지석묘의 상석위에 한석봉이 썼다고 하는「구지봉석」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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