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필드 선교사 (Dr. Harold Schofield -해럴드 스코필드 박사)
해롤드 스코필드 선교사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 출신의 뛰어난 의사였다. 그러나 29살의 그가 장장한 장래를 접고 중국 선교사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이것은 당시 영국 대학생들에게 크나큰 충격을 준 중국 선교에 대한 엄청난 도전이었다.
최근 ‘울지마 톤즈’로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 아프리카 수단 선교사 이태석 신부, ‘내려놓음’이란 책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끈 몽골의 이용규 선교사. 그들이 단순히 신부요 교수였다면 그렇게 큰 파장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을까? 아마도 그들은 의사였고 서울대와 하버드대를 나온 수재였기에 사람들의 마음에 진정성으로 다가가지 않았을까?
이것만 생각해 보아도 당시 스코필드 선교사의 결단이 어떤 충격과 파문을 일으켰을까 짐작하고도 남는 것이다.
중국 선교의 아버지 허드슨 테일러 역시 의사였다. 허드슨 테일러는 스코필드가 의료 선교사로 온 것을 너무나 기쁘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가 중국에 온지 3년도 안돼 치료하던 환자로부터 장티푸스가 전염되어 1883년 8월 1일, 그의 나이 32세에 소천하는 일이 발생되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젊고 유망한 의사를 하나님께서 왜 데려 가셨는가 의구하였다. 또한 장래가 촉망되는 한 젊은이를 중국 선교란 명목으로 무모하게 희생시킨 것이라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의 죽음의 희생이 미칠 차후 일에 대해선 상상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스코필드 선교사가 죽던 날 호스트(훗날 허드슨 테일러의 뒤를 이어 CIM -1866년 허드슨 테일러가 창설한 중국 내지 선교회- 대표가 됨) 라는 사람의 선교 지원서가 런던 본부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 하였다. 6명의 지원자가 더 오고 있었으니 이들이 바로 그 유명한 ‘캠브리지 세븐’이었다.
당시 캠브리지는 영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우수한 인재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이곳은 모든 장래와 지위와 특권이 보장되는 곳이었다. 이런 자들의 중국 선교사 지원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지위와 특권을 버리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오늘날 하버드 출신자들이 AIDS등 온갖 병에 노출돼 있는 아프리카 오지의 땅에 들어가 벌거벗고 그들과 똑같이 살겠다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결정이었다. 그들의 결정은 당시 영국 대학뿐만 아니라 사회에 큰 충격과 파장을 일으켰다.
캠브리지 세븐 (Cambridge Seven) 중국에 도착한 1885년
뒷줄 왼쪽부터 C.T스터드, 몽타규 보챔프, 스탠리 스미스,
앞줄 왼쪽부터 A.T폴힐터너, 호스트, C.H폴힐터너, 캐셀스,
선교사 스코필드의 죽음은 너무나 애석하고 무모한 희생처럼 보인다. 이태석 신부의 죽음도 동일하게 느껴진다. 왜 하나님은 이와 같은 자들의 생명을 거두시는 것일까?
한 연로한 외국 신부는 이태석 신부의 죽음 앞에 이런 고백을 하였다. “젊은 신부대신 저같이 늙은 신부를 대신 데려가시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깊고 숭고한 뜻은 우리가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단지 안타깝기만 한 것이지요.”
젊고 유능했던 스코필드 선교사의 죽음 앞에 사람들은 무모한 죽음이라 하였지만 주님의 말씀처럼 그가 한 알의 밀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을 때 맺을 많은 열매에 대해선 알지 못했던 것이다.
스코필드 선교사 (Dr. Harold Schofield -해럴드 스코필드 박사)
첫댓글 스콜필드 같은 이런 선구자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중국땅에서 예배드릴 수
있고. 중국땅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음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