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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명사>(明史) |
<세계역사지명사전> 1990.6간 |
기록내용 |
조선은 箕子에게 봉하여준 나라이다. 漢나라이전에는 朝鮮이라하였다. 일찌기l 燕나라사람 衛滿에게 점거되어 있었으나 漢武帝(世宗)가 이를 평정하고 진번, 임둔, 낙랑, 현토의 四郡을 설치하였다. 漢末에 부여사람 高氏가 그 땅을 차지하여 국호를 高麗(고구려)로 고쳤다. |
조선(korea)......기원 4세기 신라, 고구려, 백제 3개 국가가 건립되었다. |
조선사 |
*고조선-부여-고구려.... |
*신라, 고구려, 백제... |
현재 중국교과서에도 ‘조선민족은 예로부터 조선반도에 거주했다. 기원 전후에 조선반도 북부를 통치하고 있던 것은 고구려 노예제국가였다. 후에 조선반도 서남부와 동남부에는 또 잇달아 백제, 신라 두 노예제국가가 나타났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조선민족이 조선반도에만 거주한 것으로 한정하여 서술하였고 삼국(三國-高句麗, 百濟, 新羅)이전 고조선과 부여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고문헌을 비롯, 유물, 유적, 지명, 문화 등을 통하여 상호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객관적, 논리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즉 BC 300년-연(燕)소왕 때 진개를 요동에 보내 장성을 쌓고 만반한(滿潘汗)을 조선과 경계로 삼음. 한반도에 한문자 전래. BC 221년-진왕 정(政), 제를 멸하여 중국을 통일, 황제로 칭함. 만리장성 완성. 조선후(朝鮮候) 처음으로 조선왕을 칭함. BC 219년-진시황 통일의 공덕을 각석(刻石) 방사(徐市)로 하여금 입해(入海)하여 신선을 찾게 함(1차 東渡-三神山; 瀛州, 方丈, 蓬萊). BC 210년-진시황 순유 중 죽음(2차 東渡)으로 진나라와 고조선과는 관련성이 있으며 그 지역이 중국의 요서지역임을 확인할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중국의 정사(正史)인 <사기>(史記)를 비롯 <한서>(漢書) 지리지 등 여러 역사서와 중국 요령성일대의 홍산(邀河)문명의 발굴 성과를 중심으로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도읍지 및 강역을 실증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고조선 요녕설과 평양설의 근거는 패수(浿水)
고조선이 처음 사서에 등장할 때 ‘조선’이라 하였다. 고조선이란 명칭은 <삼국유사>에서 처음 사용하였다. 이 때 고조선(왕검조선)이라 한 것은 기자조선이나 위만조선과 구분하기 위해서였다.
그 뒤 <제왕운기>에서는 단군조선을 ‘전조선(前朝鮮)’, 기자조선을 ‘후조선(後朝鮮)’이라 하였다.
고조선이란 명칭이 널리 쓰여진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였다. 이씨조선과 구분되는 고대의 조선이란 의미이다. 구체적으로 고조선이 포괄하는 범위에 대해서는, 서기전 2세기 초에 일종의 정변을 통해 등장한 위만조선 이전 시기에 존재한 조선만을 칭하는 경우와 위만조선까지를 포괄해 고조선이라 하는 경우로 나누어진다. 정치사적인 측면에서는 전자를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만 위만조선의 사회와 문화가 그 앞 시기 조선과 이어지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사회문화적인 면에서 고조선이라 할 경우 위만조선 시기까지를 포괄해 사용하고 있다.
고조선의 중심 위치에 대해서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논고에서 재요령성설(在遼寧省說), 이동설(移動說), 재평양설(在平壤說)이 제기된 이래, 논란이 거듭되어 오고 있다.
현재 남한학계에서는 이 세 가지 설이 모두 제기되고 있다. 북한학계에서는 그 동안 고조선 중심지가 남만주 지역에 있었다는 재요령성설이 정설이었다. 그런데 돌연 1993년 가을 평양에서 ‘단군릉’이 발굴되었다면서, 고조선의 중심지는 평양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평양에서 발굴된 ‘단군릉’에서 나온 인골의 연대측정을 통해, 그 기년이 서기전 3011년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평양의 ‘단군릉’은 모줄임고임 천장의 석실무덤이고, 그 곳에서 출토된 금동관도 삼국시대의 것임을 볼 때, 이 무덤의 주인공 역시 고구려 때 사람으로 보인다. 아무튼 갑자기 기존의 설을 바꾸었으므로 앞으로 고조선사와 단군에 대한 이해체계를 어떻게 새로이 내세울지 귀추가 주목된다.
고조선 중심지의 위치를 규명하는 논고에서 반드시 언급되는 지명 중의 하나가 패수(浿水)이다.
고조선 때 중국과 경계를 이루던 강인 패수(浿水)는 열수(列水 또는 洌水)와 함께 일찍부터 중국에 알려졌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조선전의 기록에 따르면, ‘한(漢)나라는 중국을 통일한 뒤 요동(遼東)지방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를 요동과 고조선과의 경계로 삼았다’고 한다.
패수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는 <수경>(水經)이 있다. <수경주>에는 패수에 대해 ‘패수는 낙랑 루방현에서 나와 동남으로 임패현을 지나 동쪽 바다에 흘러간다’고 하였고, 기원 1세기 후한대의 사람인 허신도 ‘패수는 루방현에서 나와 동쪽으로 바다에 흘어간다’고 하였다. 문제는 동쪽으로 흘러들어가는 강을 우리나라 서해안에서 찾을 수는 없다. 따라서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으로 주장하는 학자들은, 패수의 기록을 오류로 보았다. 하지만 <산해경>에도 ‘이 산은 초목이 없고 모래가 많은데 취(浿)수가 발원한다, 남쪽으로 열도에 흘러든다’로 기록되어 있다. 취수를 패수로 보는 것은 위만이 고조선으로 넘어올 때 취수를 건너왔다는 기록으로 확인된다. 그런데 한반도 내에서는 모래가 많은 반사막지역을 찾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조건을 대체적으로 만족시키는 강은 대릉하나 요하를 들 수 있다. 반면 <한서지리지>와 <삼국사기>에는 패수를 대동강으로 명시하고 있다. 이후 평양이 낙랑군임을 확인하는 각종 유물이 출토됨으로써, <수경>이나 <산해경>의 기록은 줄 곳 부인되어왔다. 이상의 견해를 요약해 보면, 패수라는 이름은 특정강을 지칭 하는 고유명사가 아니고, 평양이란 단어 역시 오늘날의 수도와 같은 일반명사란 것이다. 또 <한서지리지>에 나타난 요동군의 패수, 낙랑군의 패수, <수경주>의 패수와 대동강을 지칭하는 패수 등, 패수에 대한 지칭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또 강의 어원이 된 ‘피라, 벌라’ 등도 향찰식으로 표기하면 <浿패>가 되는 것도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한다. 여기에 한나라와 위만 조선의 치열한 싸움이 패수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그 기록은 한결같이 패수가 동서의 경계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대동강설이 우세한 이유는, 평양 일대에서 발굴된 낙랑 관련 유물 때문이다. 또한 그 유물들이 한나라 시대의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낙랑이란 단어역시 광범위한 해석이 가능하며, 평양에서 출토된 유물도 후한시대의 것이어서,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수경주>(水經注)는 5세기말부터 6세기 초에 활약한 북위(北魏, 386∼534)의 학자 역도원이, 3세기경에 쓰여진 수경(水經)이라는 문헌에 자세한 주석을 붙여서 쓴 책이다. 강물의 흐름과 그 주변의 지리에 대해서는 고대 중국의 지리서 중 가장 높은 평가를 얻고 있다.
원본 <수경>은 매우 짧은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도원은 이에 자신의 오랜 연구 경험을 통해 해석을 붙이고 고사와 경관 등을 함께 서술하여 이 <수경주>를 완성하였다.
먼저 ‘패수’에 관한 <수경>의 원문기록과 이를 해설한 역도원의 <수경주>의 원문기록을 제시한 후, 이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수경>원문; 浿水出樂浪郡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於海./ 패수는 낙랑군 누방현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임패현을 지나서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여기에는 패수가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고 지적되어 있다. 그런데 한반도 북부의 주요 하천들은 모두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한반도는 동쪽이 높은 지형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요하를 넘을 때 까지도 마찬가지이다. 발해만을 돌아 요서로 가기 전에는, 주요 하천들은 대개 서쪽으로 흐른다. 당연히 이에 대한 의문이 생겨나게 된다. 패수는 정말 동쪽으로 흐르는 어떤 강인 것일까?
이에 대해 역도원은 <수경주>에서 다음과 같이 해답을 내놓았다.
<수경주>원문; 武帝元封二年, 遣樓船將軍楊僕左將軍筍체(한자없음)討右渠, 破渠於浿水遂滅之. 若浿水東流, 無渡浿水之理. 其地今高句麗國治, 余訪蕃使, 言, 城在浿水之陽, 其水西流逕故樂浪朝鮮縣, 卽樂浪郡治, 漢武帝置. 而西北流. 故地理志曰, 浿水至增地縣入海. 考之古今, 於事差謬, 蓋經誤證也./ "한무제 원봉 2년에, 누선장군 양복과 좌장군 순체를 파견하여 우거(당시 고조선의 왕)를 토벌하게 했다. 패수에서 우거를 격파하여 마침내 이를 멸망시켰는데, 만약 패수가 동쪽으로 흐른다면 패수를 건널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땅은 지금 고구려의 수도인데, 나는 고구려 사신을 만나 물어보았다. 사신이 말하기를, 성이 패수변(陽-강북)에 있고 그 강은 서쪽으로 흘러 옛날 낙랑군 조선현, 즉 한무제가 설치한 낙랑군 치소를 지나간 다음 서북쪽으로 흐른다고 하였다. 옛 지리지에는 패수가 서쪽으로 증지현에 닿아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옛날과 지금의 이러한 증거들을 살펴볼 때 차이가 있으니, 수경은 잘못 고증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고조선 요령성설(遼寧省說), 평양설(平壤說) 중, 최초의 평양설을 주장한 사람은 <수경주>를 쓴 역도원이며 그 근거는 고구려사람의 말을 인용하였다는 사실이다. 즉 한반도설(平壤說)은 우리나라 사람, 즉 한반도인이 만든 설이라고 할 수도 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평얀설은 논외로 한다.
한편, 북한 학계는 수경에 묘사된 패수를 ‘대릉하’라고 주장한다. 대릉하의 본류는 산해관의 동쪽인 요령 서부에서 나와, 동북쪽으로 흐르다가 조양(朝陽)에 이르러 다시 동남쪽으로 꺾어져서 바다로 들어간다. 요령설은 요하를 비롯하여 대릉하, 난하(灤河) 등의 주장이 있다.
♤중국 역사서나 지도에 기록된 고조선의 도읍지 험독(險瀆)
중국의 최고의 역사서로 손꼽히는 사마천의 <사기>나 반고의 <한서>는 기원전 100년을 전후하여 편찬된 역사서로 무려 2천200년 전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고조선과 가장 가까운 시기에 편찬된 기록이다. 먼저 <한서>지리지나 <사기>의 기록에서 고조선의 ‘험독’ 관련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한서>(漢書)지리지에 ‘조선왕 위만의 도읍이며, 물이 험한 곳에 위치해 험독(險瀆)이라 한다.’ 이어서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으니 이를 바로 험독이라 한다.’
▶〈사기>(史記) ‘요동 험독현(險瀆縣)에 조선왕의 옛 도읍이 있다. 여기서의 요동은 당시 요수인 난하의 동쪽이다.’〈사기>(史記) 색은편에 ‘창려에 험독현이 있다.’
본 연구에서는 <한서>(지리지)의 ‘원문’(原文) 자료를 중심으로 고조선의 도읍지 ‘험독’을 비롯, 우리나라와 관련된 기록을 살펴보고자 한다.
<한서>지리지의 원문을 보면 고조선과 험독, 낙랑, 고구려, 서안평 등 우리나라 관련 지명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원문를 주석하거나 해설할 필요성은 없다. 즉 원문 그대로 사실을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어느 시대의 역사나 기록은 오류가 있을 수 있으며 지명(地名)은 고착성과 이동성이 있다. 즉 자연적으로 조성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필요에 따라 기록하고 상황에 따라 옮겨 다니기도 한다.
<한서>지리지 ‘요동군’편에서 우리나라와 관련된 내용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요동군(遼東郡); 요동군은 5만 5천9백72가구, 인구는 27만 2천5백39명이다. 18개 현이 있다. 양평현(襄平縣), 신창현(新昌縣), 무려현(無慮縣), 망평현(望平縣), 방현(房縣), 후성현(候城縣), 요수현(遼隊縣), 요양현(遼陽縣), 험독현(險瀆縣), 거취현(居就縣), 고현현(高顯縣), 안시현(安市縣), 무차현(武次縣), 평곽현(平郭縣), 서안평현(西安平縣), 문현(文縣), 반한현(番汗縣), 답씨현(沓氏縣)이다. 요동군은 진(秦)나라에서 설치했다. 유주에 속해 있었다.
►양평현은 목사관(牧師官)을 두었다. 왕망 때는 창평(昌平)이라 했다.
►신창현과 무려현은 서부도위가 다스렸다. 안사고는 무려현은 곧 의무려(醫巫閭)라고 했다.
►망평현은 대요수(大遼水)가 새외에서 나와 남쪽으로 안시(安市)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1천2백50리를 간다. 왕망 때는 잔열(長說)이라 했다.
►방현과 후성현은 중부도위가 다스렸다.
►요수현은 왕망 때는 순목(順睦)이라 했다. 안사고는 “요수(遼遂)현이라고 한다.”고 했다.
►요양현은 대양수(大梁水)가 서남쪽에서 요양에 이르러 요수(遼水)로 들어간다. 왕망 때는 요음(遼陰)이라 했다.
<한서>지리지의 원문
►험독현은 응소는 “조선왕(朝鮮王) 만(滿)의 도읍이라고 했다. 물길이 험한 곳을 의지하므로 험독이라고 했다.”고 했다. 신찬은 “왕검성(王儉城)은 낙랑군(樂浪郡) 패수(浿水)의 동쪽에 잇는데, 이곳을 ‘험독’이라고 한다.”고 했다. 안사고는 “신찬의 말이 옳다.”고 했다.
►거취현은 실위산(室僞山)에서 실위수가 나와 북쪽으로 양평(襄平)에 이르러 양수(梁水)로 들어간다.
►고현현과 안시현과 무차현은 동부도위가 다스렸다. 무차현은 왕망 때는 환차(桓次)라고 했다.
►평곽현은 철관과 염관을 두었다.
►서안평현은 왕망 때는 북안평(北安平)이라 했다.
►문현은 왕망 때는 문정(文亭)이라 했다.
►반한현은 패수가 새외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응소는 “한수(汗水)가 새외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다.
►답씨현은 응소는 “씨는 수(水)이다.”라고 했다. 안사고는 “무릇 씨(氏)를 말한 것은 모두 인연을 따라서 이름을 지은 것이다.”라고 했다.
13세기 송나라(960-1279)말기부터 원나라 초기에 걸쳐 활동했던 역사학자 증선지가 지은 <19사략통고>(十九史略通考)의 지도에 ‘만리장성(秦長城) 남쪽에서 북쪽으로 관통하는 강(난하추정)을 요수(遼水)로, 그 동쪽을 요동, 그 동쪽을 조선이라’표기하였다. 이 지도에서 ‘산해관’(현 진황도시)의 동쪽이며 발해만의 북쪽, 압록수(강)의 서쪽에 ‘조선’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요동반도, 산동반도의 그림은 생략되어 있으며 한반도지역에 ‘백제’ ‘신라’, ‘고려’가 표기된 것은 당시(宋)가 우리나라 고려시대인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발해나 황해가 표기되어 있지 않다.
<증선지의 <십팔사략>중의 고조선 위치 표기-원내>
‘조선’이라 표기된 지역은 고조선의 도읍지로 ‘험독’(王險城)으로 추정되며 이 지역은 ‘대능하 또는 요하’유역으로 추정된다. 그 까닭은 중국 지도에서 만리장성의 표기는 난하유역을 통과하고 그 동쪽 끝이 ‘산해관’이 위치한 진황도 노룡두(老龍頭)의 장성과 북쪽으로 내몽골 적봉지역의 요하를 통과하는 ‘진(秦)장성’ 또는 ‘연(燕)장성’으로 압록강가의 단동(虎山長城)에서 끝나는 장성으로 대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드디어 중국 학계(역사서와 지도)에서 인정하는 고조선의 도읍지인 ‘험독’을 확인한 셈이다. 그 험독의 위치는 대릉하나 란하, 요하 변에 위치하지 않고 ‘쌍태자하’(雙台子河)서쪽 강변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쌍태자하 하류의 도시는 반산(盤山)으로 현재의 요하(邀河)로 각종 지도에 표기된 요하하구(邀河口)인 영구시(營口市)와는 구별되는 강이라고 할 수 있다.
그후 요하는 두 번의 하류 물줄기를 바꾸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첫 번째는 험독 남서쪽에서 영구로 향해 흘렀고 두 번째는 험독의 상류인 심양의 서쪽, 망평(望平)의 서쪽에서 분기하여 영구로 물줄기로 바꾸어 요하 하구삼각주를 이루며 흘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강의 지류로는 심양의 남쪽으로 혼하(渾河)와 양평(襄平) 북쪽에서 동류하는 태자하(太子河)가 안산(鞍山) 남쪽에서 요하 본류와 합류하여 영구시에 이르러 바다(渤海)로 흘러든다.
위만조선의 도읍지, 험독은 현재 대안현(臺安縣) 성남쪽 11km 떨어져있는 신개하진 (新開河鎭) 리가요촌의 주성자, 손성자(孫城子城), 백성자 세개툰(屯)이 연결된 곳에 위치하고 있다.
동서길이는 230m, 남북길이가 250m, 높이가 2m, 면적은 약 5.7만평이 된다고 한다.
<중국역사지도집 제2책-요동군에 ‘험독’이 표기되어 있다/ 검정 글자는 古地名>
2007년 10월 11-15일, 필자를 비롯한 제7차 고조선유적답사단 10명(이승종, 우호용, 홍진기, 조흥만, 김석규, 임재영, 김세환, 이종호, 김영우)은 중국 요녕성과 내몽골일대의 위만 조선의 도읍지 험독과 홍산문화의 발굴성과로 확인된 단군조선의 개국시기와 연계된 하가점 하층문화 유적지일대를 답사하였다.
<현지 안내인 기씨-이름과 주소, 연락처는 결코 밝히지 않았다>
현지 안내자인 기(奇)씨라는 58세 되는 주민은 “이 마을에 몇 세대 동안 전해온 말인데 수나라가 당나라로 바뀔 때 이세민은 여기에 살던 고려사람을 보고 3년 만에 이 땅을 내놓으라고 하였는데 고려사람은 3일 만에 살던 마을을 묻어버리고 여기를 떠났다”고 하였다.
그리고 마치 대형 무덤같은 마을 매장터와 세 성의 위치, 성자산성의 4개문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또한 얼마전 험독유적에서 밭을 개간하면서 비(碑)가 출토되었다고 하면서 현지를 안내 해 주었다.
1999년 7월 6일, 서길수교수는 고구려성의 흔적을 찾아 험독을 답사하고 다음과 같은 답사기를 남겼다.
‘요하 건너 첫 답사지역은 태안현(台安縣) 신개하향(新開河鄕)에 있는 손성자성(孫城子城)이다.
우리가 이곳을 찾은 것은 손성자성이 한 나라 험독(險瀆)이라는 것이 중국 학자들에 의해 밝혀졌기 때문이다.
험독은 요동성에서 의무려산으로 가는 일직선상에 놓인 성으로, 고구려 광개토태왕의 군대가 요하를 건너 제일 먼저 공략의 대상으로 삼았을 곳이다. 우리가 험독을 찾은 것은 광개토태왕이 서북으로 진군하면서 격파한 한나라 성을 답사한다는 것 빼놓고도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험독은 옛 조선의 땅이기 때문이다. <한서> 지리지에 나온 험독의 주에 보면 험독은 “조선 왕 만(滿)의 도읍지다. 험한 강을 끼고 있기 때문에 험독이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험독이 옛날 조선의 서울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답사는 우리의 옛 조선이 요동 한 복판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조선이 망한 몇 백년 뒤 고구려가 다시 이곳을 회복했다는 사실을 밝힌다는 점에서 고구려사 뿐 아니라 우리 역사의 뿌리를 찾아 복원한다는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5시 30분 드디어 손성자에 도착하였다. 상당히 자세한 지도에도 손성자라는 지명이 나와 있지 않아 못 찾을까봐 걱정했는데 다행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올해 나이 60이 된다는 노인은 어렸을 때의 기억을 되살려 많은 얘기를 해 준다. "동성, 서성, 남성, 북성이 있고, 남성이 주된 성이다." "성 동쪽에 마르지 않는 강이 흐르고, 동남 모서리에서 휘어 남벽을 따라 흐른다." 성의 동쪽에서 남쪽으로 돌아 흐르는 강이 바로 요하이고 서남쪽으로는 유하(柳河)가 흐른다. 험독의 독(瀆)이란 '도랑'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험독이란 '험한 강'을 끼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자주 범람하는 요하와 유하 사이에 있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생긴 이름이었던 것이다. 4200㎡이면 큰 성은 아니지만 요하에서 가장 가까운 요새라는 점 때문에 그 중요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험독은 단군조선의 수도였다. "무덤이 있었는데 문화대혁명 때 모두 밀어버렸다." "옥수수밭 안에 불룩 솟아오른 보루 흔적만 남아있다"고 했으나 분간할 수가 없었고, 표지판은 옥수수밭 모서리에 쓰러져 있어 수 천년 역사의 현장이 불과 수 십년만에 속수무책으로 사라지고 있어 안타까웠다. 그러나 "이 성을 여기서는 무엇이라고 부르느냐?"는 질문에 "고려성(高麗城)이라고 부른다"는 대답에 귀가 번쩍 뜨이었다.그렇다. 단군조선 이후 한 때 한나라가 이곳을 차지했지만 그 뒤 오랫동안 고구려가 다시 이곳을 점령했던 사실을 우리는 왜 그 동안 속 편하게 잊고 있었던가! 우리가 잊고 있었던 역사를 현지 중국인들이 일깨워 주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이곳에서 벌어졌고, 사대주의 사관에 물들어 훌륭한 선조들의 역사를 잊고 살았던 필자는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통한의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단군조선 역사의 복원" "고구려 역사의 복원" 우리의 임무를 일깨워 주는 선조들의 준엄한 꾸짖음을 마음에 새기는 순간이었다. "화살촉, 도끼, 토기 같은 유물이 많이 나왔다." "해마다 한번씩 사람이 와서 토기조각 같은 것을 가져간다" 우리도 열심히 찾아보니 상당한 토기와 기와의 조각을 발견하였는데 고구려 기와조각과 같은 것도 발견되었다. 만일 깊이 발굴한다면 단군조선의 유물도 나올 수 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1999년의 태안현(台安縣) 신개하향(新開河鄕)은 2007년에는 신개하진(新開河鎭)으로 행정단위가 바뀌어져 있었다. 연구자 생각으로는 ‘신개하진’이란 요하의 하구로써 ‘바다로 통하는 물길이 열려’ 발해를 래왕하는 선박이 드나들었던 곳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며 ‘태안’ 또한 ‘크게 나라가 평안’하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긴 지명으로 풀이해 보았다.
위 창려의 험독 위치에 대하여 <한서보주>(漢書補註)에는 ‘금영주고성동남 170리’(今營州古城東南一百七十里)라고 적혀 있고, <후한서집해>(後漢書集解)에는 ‘금영주부의주서북경’(今錦州府義州西北境)이라고 적혀 있다. 이를 보면 위만조선의 도읍지는 의주(義州) 서북경에 있었다고 풀이되기도 한다.
2006년 2월 25일 발행, KBS HD 역사스페셜 <한국사, 신화를 깨고 숨을 쉬다>(효형출판)에는 ‘4. 첫 나라 고조선, 그 수도는 어디였나? -첫 도읍지 험독은 어디인가?’(93-98면)에서 ‘요하의 동쪽 대형고인돌이 있던 개주(盖州), 해성(海城)일대를 다시 주목해 보자. 북한 학계에 따르면 고조선의 부수도(副首都)가 개주일대에 있었다. 1929년에 간행한 신채호의 <조선사연구초>에서 해청부근을 고평양(古平壤), 즉 고조선의 옛 수도라고 지목했다. ... 그러나 오늘날 해청과 개주는 현대도시로 변모한 까닭에 험독이었다는 증거를 찾기 힘들다. 청나라 초기 고조우(顧祖禹)가 편찬한 역사지리서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 따르면 험독의 경계는 요하의 삼차하(三叉河)에 있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험독과 요하의 유역에는 주변에는 ‘요하’ 강이름을 유래하게 한 요양과 요중을 비롯, 우리 귀에 익숙한 양평, 망평, 안시, 해성, 개주, 영구, 반산, 심양, 신민, 본계, 철령 등의 지명이 남아 있다.
참고로 <사라진 역사 고조선>에서는 ‘이 전투가 벌어진 지역은 오늘날 요동반도나 요하유역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였으며 사마천의 <사기> ‘조선열전’의 해설 기록과 그 전쟁 상황을 분석적으로 정리한 결과, 패수의 위치는 ‘대릉하’(大陵河)로 정립, 전투상황을 예상한 지도(105면)를 게재한바 있다.
♤요하 문명의 발상지 요하유역과 요하의 발원지
‘요하’는 단군고조선 이후 우리 민족과 이민족간의 끊임없는 애환이 닮긴 요하다. 사서에는 요수(遼水) 라고 하는데 구려하(句驪河), 구류하(枸柳河), 거류하(巨流河)라고 했다. 현재 심양을 지나는 혼하(渾河)와 구별하기 위해 요하는 대요수(大遼水)라 하고, 渾河(혼하)는 소요수(小遼水)라고 구분하여 쓰기도 했다.
전장 약 1400㎞. 원류는 서요하와 동요하로 나뉘는데 서요하가 동요하보다 길다. 서요하는 대흥안령산맥 남부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길림성과 요령성 경계 부근에서 노합하 (라오하강, 老哈河)를 합치는데, 그 때까지는 시라무룬강(西拉木倫河)이라 불린다.
다음은 고구려연구회 초대회장인 서길수교수의 요하문명의 젖줄, 요하의 답사기이다.
“1999년 6월 30일, 실링호터를 떠난 거란의 본거지인 임동으로 가는 도중 요하의 근원지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실링호터를 지난지 1시간. 높은 산지들이 다시 출현한다. 대흥안령에 가 까이 가고 있는 것. 조금 있으면 서요하의 원류이자 대흥안령의 최고봉인 황강량을 찾아간 다. 황강량은 이름부터가 무슨 시렁이나 대들보같은 인상을 준다. 거의 사막화돼가고 있는 지역인데 군데군데 이를 막기위한 방풍림이 보인다. 오후 3시35분 실링호터를 떠난 지 7시간만에 커서커등시(克什克騰, 혹은 經棚)에 도착하였 다. 요하의 첫도시이다. 여기서 대흥안령의 최고봉 황강령으로 가는 길이다. 오후 4시10분 이도영자 안내판이 있는 곳에서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 계속 황강량을 향해 좁은 시골길을 올라간다. 말로 밭을 가는 농부, 산자락을 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밀밭. 산등성이와 밀밭 근 처엔 양들도 보인다. 그러나 산은 아직 면도한 듯하고 성긴 풀들만 자라 초원과 같은 풍경 이다. 초원과 농경지가 동시에 존재하는 경계선이 되는 것이다. 길을 따라 거꾸로 서요하를 거슬러 올라간다. 그 물줄기는 점점 가늘어진다. 오후 4시45분 드디어 황강량을 눈앞에 둔 전진(前進)10대 마을. 대들보 같은 산이 멀리 보인다. 탐사단은 여기서 멈추기로 하였다.
본격적인 수원지 탐사가 목적이 아닌데다 더 이상 마을이나 찻길 이 없기 때문에 위험 부담도 있기 때문에 멀리서나마 황강량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泌柳河라는 이 작은 실개천에서 출발한 물이 시라무룬 - 서요하 - 요하를 거쳐 발해 로 들어가는 1400㎞ 요하를 이루는 것이다. 동요하의 시원지는 이름도 요원(遼源), 요하의 발원지라는 뜻이다. 길림성 요원시 동쪽 경 계에 길림합달령(吉林哈達嶺)산맥이 뻗어있는데 이 산맥에서 동으로 흐르면 송화강 원류가 되고, 서쪽으로 흐르면 동요하가 된다. 요원시의 동요하 부근에는 고구려 성이 3개나 있어 동요하가 고구려의 서북 진출의 중요한 기지노릇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원에서 시 작한 동요하는 북쪽으로 흘러 고구려 천리장성이 시작되는 공주령을 서쪽으로 흘러 다시 서 남으로 흐르는 타원형을 그리면서 서요하와 만나는 합수지점에 도달한다. 탐사단은 시라무룬과 서요하를 몇 번이나 건너며 따라 내려오다가 7월 3일 오후 2시35분 동요하와 서요하가 만나는 지점에 도착하였다. 비가 오지 않아 초라하게 강바닥을 드러낸 합류지점의 서요하쪽은 자전거를 들고 강을 건널 정도로 물이 얕다. 물 자체는 동요하 쪽이 더 풍부해 보였다. 이렇게 동서 요하가 합쳐져 요하라고 부르는데 전국시대 이후부터 등장하는 역사의 강이 다. 우리 민족사도 이 합수지점으로 시작되는 요하에서 발원한다. 이 요하의 쟁탈을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가.
우리는 이를 列水라고 했다. 한강과 비교하며 요하는 그보다 몇 배 크리라고 상상했는데 뜻밖에 수량이 작고 규모가 작아 어리둥절했다. 노을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魯家遼河大橋(95년10월 시공)를 건너 심양으로 들어왔다.
요하 하구부인 요동만 연안 일대는 표고 2∼5m에 불과하여 개척이 진척되기 전에는 낮은 습지를 이루었다. 고대에는 충적평야인 요동벌을 요택(遼澤)이라고 해서 고구려 말에는 수· 당과 싸울 때 고구려 최전방의 목이었다.
645년(보장왕 4년) 당 태종이 침임했을 때의 상황을 보면 요하유역, 즉 늪지대인 요택의 정황을 잘 알 수 있다. 5월 황제가 요택(遼澤)에 이르렀으나, 진흙이 200여 리나 되어 사람 과 말이 통과할 수 없었다. 장작대장(將作大匠) 염입덕(閻立德)이 흙을 덮어 다리를 만들었 으므로, 군대가 머무르지 않고 요택의 동쪽으로 건너왔다. 도망갈 때는 더욱 힘이 들었다. 당 태종이 요동이 일찍 추워져서 풀이 마르고 물이 얼어 군사와 말이 오래 머물기 어렵고, 또 양식이 다 떨어져가므로 군사를 돌릴 것을 명령하였다.
요동에 이르러 요수를 건너는데 요택(遼澤)이 진창이 되어 수레와 말이 지나갈 수 없으므로, 장손무기라는 장수에게 명하여 1만 명을 거느리고 풀을 베어 길을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에 수레로 다리를 만들게 하 였다. 황제는 스스로 말채찍 끈으로 섶을 묶어 일을 도왔다. 10월에 황제가 포구(蒲溝)에 이르러 말을 멈추고 길을 메우는 일을 독려하였다. 여러 군대 가 발착수(渤錯水)를 건너니 폭풍이 불고 눈이 내려서 사졸들이 습기에 젖어 죽는 자가 많았으므로, 명령을 내려 길에 불을 피워 맞이하게 하였다.
상류부에서 다량의 토사가 유출되어 하구부 요동만에 광대한 델타를 형성하지만 자주 홍 수가 나서 사람들이 살기에 마땅치 않았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치수공사가 이루어 지고 대규모 방풍림이 조성되어 반산(盤山), 금현(錦縣) 부근의 범람원은 광대한 농경지로 개간되고 있다. 요하는 이제 상습 범람지가 아니라 농업생산지로 바뀌었다. 강바닥은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밭으로 변했고, 둑 아래는 벼논도 있다. 그것은 강 양쪽에 두 겹으로 쌓은 둑 때문이다. 둑 위에 [둑을 보호하고, 나무를 보호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책임이다(護提護林人人有責)]고 쓴 광고판이 그 역사를 대변해 주고 있다. 홍수를 막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는 남쪽을 바라보고 두 손을 모은 꼴을 한 [요하치수기념탑]이 대신 말해 준다. 대략 1991년 6월 낙성한 이 비는 "요하는 중국 7대 강 가운데 하나로 그 하류가 요령성 가운데를 관통하는데 1985년 요하에서 발생한 대규모 홍수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다.
국가는 "요하를 다스리지 못하면 요령성을 편안하게 지킬 수 없다"고 보고 1986년부터 4개시에서 참여해 1000km의 제방을 쌓고 12만 무(畝)의 보호림을 조성하는 작업을 했다]는 내용이다“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역사기록과 그 강역
단군조선의 서부변경인, 지금의 중국 북경 가까이에 있는 난하 동부유역에는 기자 일족이 서주(西周)로부터 망명하여 자리를 잡고 기자조선을 건립하였다. 기원전 1100년경에 건국한 왕조국가인 기자조선은 한국 고대 사회의 기원을 이루는 고조선의 하나로서 기원전 195년 위만(衛滿)에게 멸망될 때까지 900여 년 간 존속했던 것으로 이해되어 왔으며 이 왕조는 단군조선의 거수국(諸侯國)이라는 주장도 있다.
기자조선의 명칭이 ‘기자(箕子)’라는 중국 역사상의 인물과 ‘조선(朝鮮)’이라는 한국 역사상의 지역이 복합됨으로써 이 사회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많은 혼란을 가져왔다. 즉, 진(秦)나라 이전의 문헌인 <죽서기년>(竹書紀年)·<상서>(尙書)·<논어> 등에는 기자가 은(殷)나라 말기의 현인(賢人)으로만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한(漢)나라 이후의 문헌인 <상서대전>(尙書大傳) ‘은전’(殷傳), <사기>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 등에는 기자는 은나라의 충신으로서 은나라의 멸망을 전후해 조선으로 망명해 백성을 교화시켰으며 이에 주(周)나라는 기자를 조선의 제후에 봉했다고 함으로써 비로소 기자와 조선이 연결되었다.
한국사에서 기자조선에 대한 인식은 고려시대의 기록인 <삼국유사>에서 단군조선과 구분하지 않고 고조선이라는 표현 속에 포함시켜 이해하고 있으며, <제왕운기>에서는 후조선(後朝鮮)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성리학을 지배 이념으로 삼아 건국한 조선 왕조기는 왕도 정치의 구현과 사대 관계의 유지가 이상적인 정치와 외교로 인식되던 시대였다. 그러므로 기자와 같은 중국의 현인이 조선 왕조와 국호가 같았던 고조선에 와서 백성을 교화한 사실을 명예스러운 일이었다고 이해해 기자동래설이 긍정적으로 수용되었고, 고려 숙종 때 평양에 축조한 기자릉(箕子陵)에 대한 제사도 국가적 차원에서 거행하였다.
기자(箕子)조선은 주(周)왕조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고 하였으며 그 시기는 은(殷)말 주(周)초인 BC 1,100-BC 1,000년경의 인물로서 그의 족단은 난하(灤河)지역으로 부터 평양성으로 이동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한서>(漢書)에는 ‘전한 무제의 업적을 말하면서, 동쪽으로 갈석산을 지나 현도와 낙랑으로 군(郡)을 삼았다’고 기록되었으며 ‘갈석산은 한나라의 낙랑군 수성현에 있다.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를 끊고 이 산(碣石山)에서 일어났다’고 기록되었으며 순(舜)임금이 ‘갈석산’을 경계로 동쪽은 삼한의 땅이라 해서 경계로 삼았다’기록되었다.
또 <대명일통지>에는 ‘조선성이 영평부(永平府) 경내에 있으니 기자의 수봉지지(受封之地)로 상전(相傳)한다’고 기록된 것을 비롯, <성경일통지>에 ‘요서의 광녕현(廣寧縣)은 주대의 조선계이다’ <수서>(隋書)에 ‘고려(朝鮮)는 본래 고죽국이니 주(周)가 기자를 봉하여 조선이 되었다’고 하였으며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지지에는 만리장성의 안쪽, 영평 땅에는 ‘조선성’, ‘조선현’의 지명이 기록되어 있고 <구당서> <요사> <문헌비고> <속문헌비고> <월정만필>(月丁漫筆) 등에도 이와 비슷한 견해를 인용하였다.
그리고 병자, 정축호란 때, 납치되어 온 조선인들의 집단마을인 고려보(高麗堡)가 진황도와 북경시 중간에 있는데 ‘고려야’(高麗野)란 들판이름으로만 남아있다. 김창업의 <연행록>을 보면 ‘조선 사람들이 이곳에서 농사를 짓는 것을 보았다’고 기록하였다.
<고조선과 연나라의 국경하천인 난하>
♤백이숙제의 전설로 유명한 ‘고죽국’과 ‘영평부’를 찾아서
발해만 북안에 위치하였던 나라인 고죽국은 은(殷)나라 탕왕(湯王) 때에는 제후국의 하나였다.
군성(君姓)은 묵태씨(墨胎氏)로, 주(周)나라 초 고죽군(孤竹君)의 두 아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은나라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 위하여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고 수양산(首陽山)에 숨어 살면서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굶어 죽었다는 전설로 유명한 나라이다.
그 세력 범위가 난하(欒河) 하류에서 대능하(大凌河)에 걸치는 발해만 북안 일대이며 그 중심지는 대능하 상류인 오늘날의 요녕성(遼寧省) 객좌현(喀左縣) 지역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지역의 독특한 청동기문화와 은나라 영토가 중국의 장성(長城) 이북까지 미친 적이 없었다는 점을 들어 고죽국이 요녕성지방에 자리했던 것을 부인하는 견해도 있다.
1970년대에 중국 요녕성 객좌현 동북촌(北洞村) 고산(孤山)에서 ‘고죽’이란 명문(銘文)이 있는 은나라 말기의 청동제 제기(祭器)가 발견되어 그 지리적인 위치가 확인되었고 역사적으로 실재하였음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하려는 노력이 시도되고 있다.
특히 그와 가까운 지역에서 ‘기후’(箕侯)라는 명문을 가진 청동기가 함께 발견됨으로써 ‘고려 땅이 원래 고죽국이며 주나라 때 기자(箕子)가 책봉된 곳’이라는 문헌적 근거와 함께 고죽국지역에 기자조선(箕子朝鮮)이 있었다는 ‘기자조선 긍정설’의 새로운 근거로서 활용되고 있다. 1973년 중국 요녕성(遼寧省) 객좌현(喀左縣)에서 '기후(箕候)'와 '고죽(孤竹)'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방정(方鼎) 등 청동 예기(禮器) 6점이 출토되었다. 이들 유물의 제작 시기는 은나라 말기이므로 기자(箕子)의 생존 시기와 일치한다. 기자가 자신의 족속들을 데리고 피신한 곳으로 추측되는 지역은 난하(爛河)와 대릉하(大陵河) 사이의 객좌현으로, 하북성(河北省) 노룡현(盧龍縣)에서 멀지 않은 지역이다.
<기후라고 쓰인 방정><명도전>
연구자는 고조선-홍산문화유적답사단과 함께 2회(06. 10. 16-23/ 07. 8. 3-9)에 걸쳐 창여의 천고신악(千古神岳) 갈석산-난하-루룽현(盧龍縣)의 영평부성, 조선성, 조선현, 백이숙제기념비, 우물 등을 답사하고 자료를 수집하거나 현장을 확인, 사진을 촬영하였다.
<난하의 동쪽 영평부(조선성, 조선현) 앞에서>
♤단군조선의 도읍지로 추정되는 하가점 하층문화의 성자산유적들
앞에서 위만조선, 기자조선의 도읍지와 강역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보았다. 다음에는 고조선역사의 핵심인 단군조선의 도읍지에 대하여 접근할 차례이다.
즉 고교 역사교과서에 수정된 부분은 국사 32쪽의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기원전 2333년)' 는 부분이다.
2007년 10월 11-15일, 필자를 비롯한 제7차 고조선유적답사단 10명은 중국 요녕성과 내몽골일대의 홍산문화의 발굴성과로 확인된 단군조선의 개국시기와 연계된 하가점 하층문화 유적지일대를 답사하였다.
단군조선 산성 제단터로 추정되는 오한기 성자산(청츠샨)에서 바위에 새겨진 별자리로 추정되는 성혈(性穴)과 선돌(立石)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돌이 제단 가운데 세워져 있는 것을 확인, 단군조선의 연계성을 보다 깊게 자료라고 평가되었다.
즉 하가점하층문화와 단군조선과의 연계성은 개국년대(하가점하층문화유적(12개처) 탄소연대측정값; B.C. 2400~BC 1300년=고조선 개국년대; B.C. 2333년)를 비롯, 성벽, 돌무지무덤(積石塚), 석곽묘, 제단터, 건물터 등으로 금번 성자산의 성혈과 선돌의 발견은 단군조선과의 연계성을 한층 더 깊게 하였다.
연구자는 평소에 요동지역에는 고인돌이 산재(性穴包含)해 있으나 요서지역(紅山文化)에는 고인돌이 발견되지 않아 궁금해 하였으나 금번 성자산에서 2개 처에 성혈을 확인, 실마리를 어느 정도 해소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른 1개처는 거북바위(돼지바위) 위에 있었다.
►하가점 하창문화-성자산유지와 삼좌점유지와 단군고조선
이 城子山遺址의 위치는 敖漢旗 살력파 향(薩力巴 鄕)과 마니한 향(瑪尼罕 鄕)과의 경개를 이룬 곳에 있다. 북쪽으로는 합라구촌(哈拉溝村)에서 약 4Km 거리이다. 산의 정상부(頂上)부에는 성(城)과 같이 돌로 쌓은 울타리가 둘러진 곳이 있기 때문이다.
이곳을 속칭(俗稱) ‘城子山’이라고 한다. 城子山위에는 별들과 달이 얽히어 만든 것과 같은 고리모양으로 된 주거지가 아주 적기는 하나 10여개(餘個)가 있다.
또한 사소(些少)하긴 하나 산위에도 균등하게 분포(分布)되어 있다, 그리고 보존이 매우 잘되어 있다. 유지군(遺址群)은 6.6㎢ 범위 안에 분포되어 있다. 서요하발원(西遼河 發源)인 노함하 수계(老哈河 水系)에 가까운 곳에 있다. 이 부근에서는 높은 곳이다. 북향(北向)으로는 초원(草原) 사막지대(沙漠地帶)인 경관(景觀)을 볼 수 있다. 시야(視野)가 훤히 열려있는 곳이다.
城子山 주봉(主峰)의 정상부(頂上部)가 유지1호로 되어있다. 평면(平面)은 ‘아(亞)’자형으로 불규칙하다. 남북의 기리는 440m이고, 동서 폭은 340m다. 총면적은 15만㎡이고, 주위에는 계단식 돌담이 있다. 담의 기초 폭은 약15m이고, 남아 있는 높이는 약 2m이며, 10여개의 문길<문도(門道)>이 설치되어있다. 장체(牆體) 외측(外側)에는 반원형(半圓形)의 ‘마면식(馬面式)’ 건설치되어 있고, 中央, 東, 西, 南, 北, 東南의 6구역(區域)으로 분할되어 있어, 구역과 구역사이에는 돌담으로 서로 격리(隔離)되어있다.
그리고 門道로 상통(相通)하고 있다. 중앙구의 지세(地勢)는 다른 區보다 높게 되어 있으며, 아울러 ‘回字’形의 오르내리는 돌담으로 둘러싸여있다.
밖 앗 돌담은 변(邊)의기리가88~93m이고, 담의 남아 있는 높이는 약1m이다. 안쪽돌담의 변의기리는30m이다. 그리고 돌담내에는 10좌(座)의 건축지(建築址)가 분포되어 있다.
*담장주위 외측의 마면식(馬面式) 건축
기타 5區내에는 균등한 돌담이 몇 개 단위로 분포되어있다. 그리고 매(每)1단위 내에는 오르내리는 원형 담의 건축지가1~2개 식 있다. 매구(每區)의 총계는 적은 것이 10여개가 있다.
많은 구(區)는 수십 개(數十個)가 있다. 그중 東南區는 가장 장관(壯觀)으로 건축지의 분포는 73개이다. 따라서 6個區의원형계단식 건축지의 총계는232개다. 돌담의 직경은 5~6m짜리가 가장 많고, 제일 큰 것은 13m이고, 최소한 것은 1m내외 것도 있다. 또 東南區 담장 외측에는 비교적 낮고 왜소(矮小)한 담장이 붙어있으며 門道가 설치되어 있다.
담장외측에는 북, 서북과 동북쪽 삼군(三群)이 있는 데, 자연 노출(露出)된 거석(巨石)과 상면(上面)을 평편하게 연마(硏磨)하여 겨울면 같이 광활(光滑)하게 한 거석(巨石)이 있고, 오목하게 요면(凹면으로 硏磨한 것-성혈)이 균등(均等)하고 조직(組織)으로 나타낸 것도 있다.
城子山 1호 遺址 全景
東北 群에는 硏磨한 돌이 많으며 가장 크다. 아울러 중간의 巨石위에는 두 개의 방형(方形)과 적은 구멍(성혈?)이 파여있다. 둥근 巨石 외측(外側)에는 둥글게 큰 돌로 층을 이루게 쌓은 반원형(半圓形) 건축이 있다.
성자산 1호유지 東側 둘레 담
성내(城內)에는 이외에도 균등하게 입석(立石)으로 주위를 층계돌로 조성(組成)한 원형유지(圓形遺址)가 있다. 이따금 식 바위중간에 둥근 구멍(性穴)을 파놓는 것도 있다. 南쪽 담 밖에 있는 하나의 자연(自然) 巨石에는 조각(彫刻)으로 뚫은 흔적이 완연하다. 돼지머리 같은 것이 있는데 기리가 9.3m이고 주둥이의 입술폭은 2,1m이며 이마높이는 7.5m이다. 彫刻은 거칠으나 모서리의 선(線)은 분명하다. 이와 같이 갖춘 것은 극히 신비감(神秘感)을 준다. 그 정남(正南)쪽에 압계산(鴨鷄山)이 있는 데, 이 鴨鷄山에 서도 원형돌계단 건축지를 발견 했다.
기타 몇 개소의 山頂上가운데, 5호 유지는 비교적 큰 편으로, 城子山동남의 주능선(主陵線)의 중부(中部)에 있으며 城子山 頂上에서 서북쪽 약 1Km 거리에 있다. 외측에 있는 계단으로 축조(築造)한 산정(山頂)근처에 가지런히 살게 되어있다. 직경이 120m정도이고 돌계단 원형건축지가 완연하다, 동북 주능선의 끝부분에 하나의 장방형(長方形) 유지가 있는데 면적은 약 2만㎡이고, 안에는 원형건축지가 10여개소가 분포되어 있다. 北門밖의 巨石에는 硏磨한 것이 많이 있는데 평활하고 면이 광채가 있다. 나머지 몇 개의 유지는 적은 곳이라 생략(省略)하겠다. 山頂에 1좌의 원형건축지가 있을 뿐이다.
이 城子山 遺址群은 겨우 전야(田野)의 조사(調査)와 실측(實測) 단계(段階)로 한정되었다.
정식으로 고고학적 발굴은 못하고 있다. 다만 유적보호는 양호하다. 면적은 크고, 유적은 뚜렷하다. 장면(場面)은 장관(壯觀)이다. 20세기말(世紀末)에 마지막으로 하나의 중대한 고고학적 발견으로 명예로운 일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국무원(國務院)이 서기 2001년에 평가하여 제5 전국중점문화보호 단위(全國重點文物保護單位)<문화재 지정>로 결정하였다.
이곳의 유지의조사와 발견은 충분하고 중요한 학술(學術)가치(價値)가 있다.
더욱이 조기국가형성탐구(早期國家形成探究)와 이의 보답(報答)이 된다고 보며, 이는 매우 중요한 의의(意義)가 있다. 이는 하가점(夏家店) 하층문화(下層文化) 진입(進入)의 早期國家의 중요한 지표(志標)로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아울러 게시(揭示)하는 것은 국가의 최고층면(最高層面)에서는 하나의 사소(些少)한 비밀(秘密)이다. 이
내몽고 東구역(區域)에는 夏家店下層文化와 유사(類似)한 산성이 수천 군데가 있으며, 오한기(敖漢旗)
에도 근 천여 곳에 이르고 있다. 다만 이 많은 대소원형건축지가 밀집(密集)분포하고 있는 수량이다.
이 광대(廣大)하고 장관(壯觀)인 장면(場面)과 같은 규모(規模)는 오히려 많이 보지 못하고 있다. 1987
년 오한기박물관에서 조사 발견한 이래 학술계에 관심을 경주하게 일깨웠다. 매년 국내외의 전문가 들이
등산(登山) 고찰(考察)을 하기위하여 스스로 모여들고 있다.
城子算 호유지 평면도 김세환번역<敖漢 文物 精華>성자산유지(城子山遺址) 城子山 1號 遺蹟址 南區의門道
<참고>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고조선 추정 청쯔산·싼줘뎬 유적
<경향신문>
거대한 성, 수천년 전 韓민족을 증거하다- 월28일.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오후였다. 36도 불볕더위 속에 츠펑(赤峰) 인근 청쯔산(城子山) 유적을 찾아 나선 길. “일정에 없다”며 몽니를 부리는 버스 기사와 한바탕 큰소리가 오간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가도가도 끝 없는 길. 아는 길이라고 자신했던 안내인이 연방 고개를 갸웃거린다. 길을 묻느라 가다 서다를 반복하기를 무려 10여차례. 천신만고 끝에 쓰다오완쯔(四道灣子)역에 닿았다. ‘다 왔나’ 싶었더니 아니란다. 안내원이 뭔가 흥정을 하더니 다시 마을 6인승 승합차에 타란다. # 위험천만 역주행 황토먼지를 일으키며 10여분 달리더니 어라 이상한 곳으로 들어간다. 츠펑~퉁랴오(通遼) 간 고속도로 공사구간이다. 아직 공사가 한창인 미개통 도로라 출입금지 팻말을 달아놓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휙 진입해버린다. ‘어어!’ 탐사단은 비명을 질렀다. 역주행길이다! 고속도로를 역주행하고 있는 것이다. 모골이 송연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길. 그냥 소름 돋는 스릴을 즐길 수밖에. 20여분 ‘역주행’의 경험을 맛본 뒤 역시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웠다. 그리곤 등산이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수풀 가득한 청쯔산. 뛸 듯이 단숨에 올라갔다. 1분1초라도 빨리 올라야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는 그 놈의 욕심 때문에. 과연 그랬다. 서요하 상류, 평원을 조망할 수 있는 정상, 그리고 수풀 사이로 펼쳐지는 끊임없는 돌, 돌의 흔적. 10여개의 작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청쯔산의 전체 유적 규모는 6.6㎢다. 아(亞)자 형태인 주봉 유적만 해도 총 면적이 15만㎡나 된다. 주위에는 성벽 같은 반원형의 마면식(馬面式·치) 석축이 있다. 찬찬히 뜯어보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200기에 달하는 적석총과 석관묘, 그리고 하늘신과 조상신에 제사를 지냈다는 돌로 쌓은 제단터와 사람들이 살았거나 공무를 보았을 대형 건물터…. 많은 적석총과 석관묘…. 외성과 내성으로 잘 조성된 성벽…. 여섯구역에서 확인된 원형석축건물지만 무려 232개나 된다니….# 청쯔산 정상에 선 나라는?이형구 선문대 교수와 윤명철 동국대 교수는 “거대한 무덤터이자 제단터이며, 유적의 규모와 내용으로 보면 국가단계의 사회조직일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았다. “내성에서는 최고위층이 거주한 것으로 보이는 건물지 10개가 확인되었습니다. 중국 학자들의 말처럼 고국(古國)의 형태가 분명합니다.”(이형구 교수) 탐사단의 눈을 끄는 것은 우리와의 친연성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샤자뎬(夏家店) 하층문화의 대표적인 유적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다. 그런데 샤자뎬 하층문화는 학자들 간 논란이 있지만 늦춰 잡아도 대략 BC 2000~BC 1200년 사이의 문화이다. 눈치 챘을 테지만 고조선의 연대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적석총과 석관묘, 제단터는 물론이고, 성벽의 축조 방법을 보면 고구려·백제와 비슷합니다. 할석으로 한 면만 다듬어 삼각형으로 쌓고, 다음 것은 역삼각형으로 쌓는 형식 말입니다.” 이형구 교수는 “할석과 삼각석(견치석), 그리고 역삼각형의 돌로 견고하게 쌓은 성벽은 인천 계양산성의 축성 방식을 연상시킨다”고 밝혔다. 기자를 비롯한 탐사단은 청쯔산 정상에 널려 있는 이른바 덧띠무늬 토기편을 수습했다. 이 역시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문양이다. 그렇다면 혹 고조선? 기자는 솟구치는 의문점을 가슴에 담아둔 채 하산하고 말았다. 학자들도 기자의 구미에 맞는 속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 어마어마한 석성의 실체는? 그런데 청쯔산 탐사는 그저 리허설에 불과했다.
다음날. 츠펑에서 북서쪽으로 40㎞쯤 떨어진 싼줘뎬(三座店)으로 향했다. 역시 힘겨운 여정이었으나 탐사단은 소풍 가는 어린아이처럼 설●다. 지난해 정식 발굴을 끝낸, 그래서 발굴보고서도 아직 나오지 않았고, 국내 언론에도 소개되지 않은 ‘싱싱한’ 싼줘뎬 유적을 찾아가는 참이니…. 유적은 2005년 인허(陰河) 다목적댐 공사 도중 발견되었고, 지난해 말까지 발굴을 끝냈다. 과연 댐 공사가 한창이었다. 오른쪽엔 야트막한 야산이 보였다. 청쯔산과 비슷한 입지다. 기자 일행은 메마른 산등성이를 서둘러 올라갔다. “와!” 역시 1착으로 뛰어오른 기자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저 보이는 대로 카메라 셔터를 눌러댈 뿐. 마치 어제의 청쯔산 집터처럼 완연하게 드러난 집터와 적석총이 끊임없이 펼쳐져 있었고, 제사터와 그리고 도로 혹은 수로가 구획 사이에 조성돼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양념. 정상부에 오르자 거대한 성벽의 행렬이 꿈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학자들도 처음 보는 유적이라 흥분에 휩싸인 듯했다. “치(雉·적을 제압하려고 성벽 밖으로 군데군데 내밀어 쌓은 돌출부)가 도대체 몇 개야?”(이형구 교수) 이교수가 성의 행렬을 더듬으며 세어보니 확인할 수 있는 것만 13개나 되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성벽이다. 유적의 연대는 BC 2000~BC 1500년 사이(샤자뎬 하층문화)의 것이란다.# 고구려·백제를 빼닮은 전통 “전형적인 초기 형식의 석성이네요. 기저석을 쌓고 수평으로 기저를 받친 뒤 ‘들여쌓기’를 한 모습…. 횡으로 쌓은 뒤 다음 단은 종을 쌓았어요. 4000년 전에 이렇듯 성벽이 무너지지 않게 견고하게 쌓았다니….”(이교수) 윤명철 교수는 “주거지에 샤자덴 하층문화 때의 토기편들이 널려 있다”면서 “치가 촘촘하게 있다는 것은 육박전 같은 대규모 전투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교수가 실측해보니 치는 5m 간격으로 서 있었다. 대각선을 뚫은 문지(門址)도 발견되었는데, 이는 은신하면서 드나들 수 있는 출입문이다. 성이 무너지지 않게 견치석을 적절하게 배치한 석성의 또 다른 특징은 아군의 추락을 막고 적병의 침입을 방어하려고 여장을 쌓았다는 것이다.
유적의 전체 면적은 1만4000㎡였고, 건물지 수십기와 석축원형제단, 적석총, 그리고 석축 저장공(13개)이 확인되었다. 석성은 츠펑 지구를 포함한 발해만 북부지역에서 발전한 축성술이다. 이 전통은 고구려와 백제로 그대로 이어진다. 또한 조선시대에 쌓은 수원 화성의 공심돈(치의 역할)에서도 그대로 볼 수 있는 유서 깊은 우리 축성술의 전통이다. 놀라운 석성과 제단터, 주거지, 무덤…. 어쩌면 이렇게 어제 본 청쯔산성과 오늘 확인한 싼줘뎬 석성이 빼닮았고, 이 전통이 고구려와 백제로 이어질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또 한번 생기는 궁금증…. 고조선의 채취가 물씬 풍기지 않나. 정녕 고조선의 성은 아닌가.
# 중원엔 하(夏), 동북엔 고조선? 중국학계의 분석에서 어떤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랴오시(遼西)의 샤자뎬 하층문화는 하(夏)나라와 같은 강력한 방국(方國)이 존재했다는 증거이다.”(궈다순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 “(청쯔산 같은) 유적은 초기 국가의 형태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하(夏)~상(商)나라를 아우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우한치 박물관 도록) 이형구 교수도 “중원의 하나라(BC 2070년 건국)와 동시대에 청쯔산과 싼줘뎬 같은, 수천기의 석성을 쌓은 국가권력을 갖춘 왕권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중국 학자들도 동의하듯 제사 공간, 주거지는 물론 거대한 적석총·석관묘까지, 여기에 행정 조직과 공장을 갖춘 왕권 말이다. 이교수는 “산 위에 이런 큰 규모의 돌들을 운반해서 성을 쌓고 건축물과 돌무덤을 조성할 정도면 전제권력을 갖춘 국가가 아니면 어림도 없었을 것”이라고 부연한다. 그렇다면 고조선이냐. 이형구 교수나 윤명철 교수는 확언하지 못하지만 뉘앙스는 짙게 풍긴다. 여러 증거로 보아 “중원 하왕조 시기에 섰던 동이족의 왕권국가”가 분명하며, 이것은 ‘4000년 전의 고구려성’일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지만 고조선의 경우 ‘내가 고조선 유물·유적이요’하는 명문(銘文)을 달고 나오지 않는 이상 100% 확인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고구려의 것’을 빼다 박았지만 2000년의 시차가 있다는 점도 풀어야 할 과제이다.# 고조선 연구의 밑거름 그러나 지난해 싼줘뎬 석성과 청쯔산 유적을 보았던 복기대 단국대 박물관 연구원은 “백암성 같은 고구려의 성과 너무도 똑같지 않으냐”면서 한가지 시사점을 던진다. 즉, 샤자뎬 하층문화 인골 134기를 분석한 주홍(朱泓) 지린대 교수는 “샤자뎬 하층문화 인골은 정수리가 높고, 평평한 얼굴의 특징을 갖고 있으며 이는 ‘고동북유형’이 속한다”면서 “이 같은 유형은 랴오시 지역과 전체 동북지역에서 가장 빠른 문화주민”이라고 분석했다.
허베이성(河北省), 산시성(山西省), 산시성(陝西省), 네이멍구(內蒙古) 중남부 지구에서 보이는 ‘고화북유형’과는 다른 인종이라는 것이다. 결국 샤자뎬 하층문화인들은 동북유형의 문화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측정된 12곳의 샤자뎬 하층문화 유적 탄소연대측정값이 BC 2400~BC 1300년이라는 점이나, 고조선의 연대와 부합된다는 점도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어쨌든 막 발굴을 끝낸 싼줘뎬 석성과 청쯔산 유적은 우리 고대사와 고대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분명한 것은 이들 유적을 만든 이들의 문화전통은 동이의 것, 그 가운데서도 석성과 제단, 돌무덤의 전통을 쌓은 우리 민족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전통의 흔적은 청쯔산, 싼줘뎬에서 그치지 않는다. 지금으로부터 8000년 전까지 소급된다. 아니 그 이상 장구한 세월 동안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가야 할 탐사단의 여정은 그 머나먼 세월의 발자취를 찾는 것이다. 처음부터 “고조선이 아니냐”며 끈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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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12일 (금) 16:23경향신문
[코리안루트를 찾아서](2) 고조선 추정 청쯔산·싼줘뎬 유적
거대한 성, 수천년 전 韓민족을 증거하다-
월28일.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오후였다.
36도 불볕더위 속에 츠펑(적봉, 赤峰) 인근 청쯔산(성자산, 城子山) 유적을 찾아 나선 길. “일정에 없다”며 몽니를 부리는 버스 기사와 한바탕 큰소리가 오간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가도가도 끝 없는 길. 아는 길이라고 자신했던 안내인이 연방 고개를 갸웃거린다. 길을 묻느라 가다 서다를 반복하기를 무려 10여차례.
천신만고 끝에 쓰다오완쯔(사도만자, 四道灣子)역에 닿았다. ‘다 왔나’ 싶었더니 아니란다. 안내원이 뭔가 흥정을 하더니 다시 마을 6인승 승합차에 타란다.
# 위험천만 역주행
황토먼지를 일으키며 10여분 달리더니 어라 이상한 곳으로 들어간다. 츠펑~퉁랴오(통료, 通遼) 간 고속도로 공사구간이다. 아직 공사가 한창인 미개통 도로라 출입금지 팻말을 달아놓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휙 진입해버린다.
‘어어!’ 탐사단은 비명을 질렀다. 역주행길이다! 고속도로를 역주행하고 있는 것이다. 모골이 송연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길. 그냥 소름 돋는 스릴을 즐길 수밖에. 20여분 ‘역주행’의 경험을 맛본 뒤 역시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웠다. 그리곤 등산이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수풀 가득한 청쯔산. 뛸 듯이 단숨에 올라갔다. 1분1초라도 빨리 올라야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는 그 놈의 욕심 때문에.
과연 그랬다. 서요하 상류, 평원을 조망할 수 있는 정상, 그리고 수풀 사이로 펼쳐지는 끊임없는 돌, 돌의 흔적.
10여개의 작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청쯔산의 전체 유적 규모는 6.6㎢다. 아(亞)자 형태인 주봉 유적만 해도 총 면적이 15만㎡나 된다. 주위에는 성벽 같은 반원형의 마면식(馬面式·치) 석축이 있다. 찬찬히 뜯어보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200기에 달하는 적석총과 석관묘, 그리고 하늘신과 조상신에 제사를 지냈다는 돌로 쌓은 제단터와 사람들이 살았거나 공무를 보았을 대형 건물터…. 많은 적석총과 석관묘…. 외성과 내성으로 잘 조성된 성벽…. 여섯구역에서 확인된 원형석축건물지만 무려 232개나 된다니….
# 청쯔산 정상에 선 나라는?
탐사단의 눈을 끄는 것은 우리와의 친연성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샤자뎬(하가점, 夏家店) 하층문화의 대표적인 유적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다.
그런데 샤자뎬 하층문화는 학자들 간 논란이 있지만 늦춰 잡아도 대략 BC 2000~BC 1200년 사이의 문화이다. 눈치 챘을 테지만 고조선의 연대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적석총과 석관묘, 제단터는 물론이고, 성벽의 축조 방법을 보면 고구려·백제와 비슷합니다. 할석으로 한 면만 다듬어 삼각형으로 쌓고, 다음 것은 역삼각형으로 쌓는 형식 말입니다.”
<치가 13개나 되는 싼줘뎬 석성의 위용>
이형구 교수는 “할석과 삼각석(견치석), 그리고 역삼각형의 돌로 견고하게 쌓은 성벽은 인천 계양산성의 축성 방식을 연상시킨다”고 밝혔다. 기자를 비롯한 탐사단은 청쯔산 정상에 널려 있는 이른바 덧띠무늬 토기편을 수습했다. 이 역시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문양이다.
<싼줘뎬에서 수습한 덧띠무늬 토기편. <츠펑/김문석기자>이형구 선문대 교수와 윤명철 동국대 교수는 “거대한 무덤터이자 제단터이며, 유적의 규모와 내용으로 보면 국가단계의 사회조직일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았다>
그렇다면 혹 고조선? 기자는 솟구치는 의문점을 가슴에 담아둔 채 하산하고 말았다. 학자들도 기자의 구미에 맞는 속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 어마어마한 석성의 실체는?
그런데 청쯔산 탐사는 그저 리허설에 불과했다. 다음날. 츠펑에서 북서쪽으로 40㎞쯤 떨어진 싼줘뎬(삼좌점, 三座店)으로 향했다. 역시 힘겨운 여정이었으나 탐사단은 소풍 가는 어린아이처럼 설●다. 지난해 정식 발굴을 끝낸, 그래서 발굴보고서도 아직 나오지 않았고, 국내 언론에도 소개되지 않은 ‘싱싱한’ 싼줘뎬 유적을 찾아가는 참이니…. 유적은 2005년 인허(음하, 陰河) 다목적댐 공사 도중 발견되었고, 지난해 말까지 발굴을 끝냈다.
과연 댐 공사가 한창이었다. 오른쪽엔 야트막한 야산이 보였다. 청쯔산과 비슷한 입지다. 기자 일행은 메마른 산등성이를 서둘러 올라갔다.
“와!” 역시 1착으로 뛰어오른 기자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저 보이는 대로 카메라 셔터를 눌러댈 뿐. 마치 어제의 청쯔산 집터처럼 완연하게 드러난 집터와 적석총이 끊임없이 펼쳐져 있었고, 제사터와 그리고 도로 혹은 수로가 구획 사이에 조성돼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양념. 정상부에 오르자 거대한 성벽의 행렬이 꿈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학자들도 처음 보는 유적이라 흥분에 휩싸인 듯했다.
“치(雉·적을 제압하려고 성벽 밖으로 군데군데 내밀어 쌓은 돌출부)가 도대체 몇 개야?”(이형구 교수)
이교수가 성의 행렬을 더듬으며 세어보니 확인할 수 있는 것만 13개나 되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성벽이다. 유적의 연대는 BC 2000~BC 1500년 사이(샤자뎬 하층문화)의 것이란다.
# 고구려·백제를 빼닮은 전통
“전형적인 초기 형식의 석성이네요. 기저석을 쌓고 수평으로 기저를 받친 뒤 ‘들여쌓기’를 한 모습…. 횡으로 쌓은 뒤 다음 단은 종을 쌓았어요. 4000년 전에 이렇듯 성벽이 무너지지 않게 견고하게 쌓았다니….”(이교수)
윤명철 교수는 “주거지에 샤자덴 하층문화 때의 토기편들이 널려 있다”면서 “치가 촘촘하게 있다는 것은 육박전 같은 대규모 전투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교수가 실측해보니 치는 5m 간격으로 서 있었다. 대각선을 뚫은 문지(門址)도 발견되었는데, 이는 은신하면서 드나들 수 있는 출입문이다.
성이 무너지지 않게 견치석을 적절하게 배치한 석성의 또 다른 특징은 아군의 추락을 막고 적병의 침입을 방어하려고 여장을 쌓았다는 것이다. 유적의 전체 면적은 1만4000㎡였고, 건물지 수십기와 석축원형제단, 적석총, 그리고 석축 저장공(13개)이 확인되었다.
석성은 츠펑 지구를 포함한 발해만 북부지역에서 발전한 축성술이다. 이 전통은 고구려와 백제로 그대로 이어진다. 또한 조선시대에 쌓은 수원 화성의 공심돈(치의 역할)에서도 그대로 볼 수 있는 유서 깊은 우리 축성술의 전통이다.
놀라운 석성과 제단터, 주거지, 무덤…. 어쩌면 이렇게 어제 본 청쯔산성과 오늘 확인한 싼줘뎬 석성이 빼닮았고, 이 전통이 고구려와 백제로 이어질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또 한번 생기는 궁금증…. 고조선의 채취가 물씬 풍기지 않나. 정녕 고조선의 성은 아닌가.
# 중원엔 하(夏), 동북엔 고조선?
중국학계의 분석에서 어떤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랴오시(요서, 遼西)의 샤자뎬 하층문화는 하(夏)나라와 같은 강력한 방국(方國)이 존재했다는 증거이다.”(궈다순 랴오닝성 문물연구소 연구원)
“(청쯔산 같은) 유적은 초기 국가의 형태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하(夏)~상(商)나라를 아우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우한치 박물관 도록)
이형구 교수도 “중원의 하나라(BC 2070년 건국)와 동시대에 청쯔산과 싼줘뎬 같은, 수천기의 석성을 쌓은 국가권력을 갖춘 왕권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중국 학자들도 동의하듯 제사 공간, 주거지는 물론 거대한 적석총·석관묘까지, 여기에 행정 조직과 공장을 갖춘 왕권 말이다. 이교수는 “산 위에 이런 큰 규모의 돌들을 운반해서 성을 쌓고 건축물과 돌무덤을 조성할 정도면 전제권력을 갖춘 국가가 아니면 어림도 없었을 것”이라고 부연한다.
그렇다면 고조선이냐. 이형구 교수나 윤명철 교수는 확언하지 못하지만 뉘앙스는 짙게 풍긴다. 여러 증거로 보아 “중원 하왕조 시기에 섰던 동이족의 왕권국가”가 분명하며, 이것은 ‘4000년 전의 고구려성’일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지만 고조선의 경우 ‘내가 고조선 유물·유적이요’하는 명문(銘文)을 달고 나오지 않는 이상 100% 확인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고구려의 것’을 빼다 박았지만 2000년의 시차가 있다는 점도 풀어야 할 과제이다.
# 고조선 연구의 밑거름
그러나 지난해 싼줘뎬 석성과 청쯔산 유적을 보았던 복기대 단국대 박물관 연구원은 “백암성 같은 고구려의 성과 너무도 똑같지 않으냐”면서 한가지 시사점을 던진다.
즉, 샤자뎬 하층문화 인골 134기를 분석한 주홍(朱泓) 지린대 교수는 “샤자뎬 하층문화 인골은 정수리가 높고, 평평한 얼굴의 특징을 갖고 있으며 이는 ‘고동북유형’이 속한다”면서 “이 같은 유형은 랴오시 지역과 전체 동북지역에서 가장 빠른 문화주민”이라고 분석했다. 허베이성(하북생, 河北省), 산시성(산서생, 山西省), 산시성(섬서생, 陝西省), 네이멍구(내몽고, 內蒙古) 중남부 지구에서 보이는 ‘고화북유형’과는 다른 인종이라는 것이다. 결국 샤자뎬 하층문화인들은 동북유형의 문화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측정된 12곳의 샤자뎬 하층문화 유적 탄소연대측정값이 BC 2400~BC 1300년이라는 점이나, 고조선의 연대와 부합된다는 점도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어쨌든 막 발굴을 끝낸 싼줘뎬 석성과 청쯔산 유적은 우리 고대사와 고대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분명한 것은 이들 유적을 만든 이들의 문화전통은 동이의 것, 그 가운데서도 석성과 제단, 돌무덤의 전통을 쌓은 우리 민족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전통의 흔적은 청쯔산, 싼줘뎬에서 그치지 않는다. 지금으로부터 8000년 전까지 소급된다. 아니 그 이상 장구한 세월 동안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가야 할 탐사단의 여정은 그 머나먼 세월의 발자취를 찾는 것이다. 처음부터 “고조선이 아니냐”며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 기자의 조급함에 스스로 채찍을 가한다. 〈츠펑|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한국인의 고향, ‘신비의 왕국’ 찾았다(7)
고조선의 터전에 존재했던 국가
7차 답사-이종호박사
국가 성립 요건의 다섯 가지 중에서 평양의 경우 넷째와 다섯째는 청동시대의 유물로 간주하는 고인돌이 1만4천여 기나 발견되며 부장품으로 많은 청동유물이 매장됐다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또한 두 번째로 제시되는 도시 유적의 경우 북한측은 상당히 유리한 위치에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평양시 삼석구역 표대유적, 남경유적, 평안남도 덕천시 남양유적, 복창군 대평리 유적, 황해북도 송림시 석탄리 유적, 황주군 고연리 유적 등이다. 이들 유적에서 100~150여 호의 집터들이 발견된다.
<▲ 중국 오한기박물관의 하가점하층문화를 대표하는 토기. ⓒ>
그 중에서 남경유적, 대평리 유적, 고연리 유적 등은 면적이 2만~5만 제곱미터에 달하는 비교적 큰 부락터이며 표대 유적, 석탄리 유적, 남양 유적 등은 면적이 10만 제곱미터가 넘을 정도로 대규모의 유적을 갖고 있다. 표대 유적의 경우 확인된 집터만 200개 이상에 달하며 절대연대 측정법에 의할 경우 표대 유적의 8호 집터는 최고 528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지막으로 첫 번째의 경우 아직 단군 시대의 궁전 유적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라고 자인했다. 다만 북한측의 견해에 의하면 단군의 근거지를 평양으로 삼고 있는데 현 평양 지역은 고구려가 수도로 계속 사용했기 때문에 유물은 물론 궁전 터조차 발견할 수 없을지 모른다고 발표했다. 일반적으로 다른 고대 문명의 경우도 왕궁을 정확하게 발견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물론 앞에 설명한 5가지가 고대국가의 성립 요건으로 제시되지만 이들 모두 반드시 충족돼야 하는 것은 아니며 5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인식하는 것은 성벽이다. 성벽을 쌓았다는 자체가 정주 여건을 갖춘 것은 물론 외부와의 차별을 두는 내부 체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의 황대성보다 약간 시기는 늦지만 중국 홍산 지역 하가점하층(夏家店下層) 문화(4000~3500년 전)에서 성벽은 물론 돌무덤, 제단 등이 발견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부여받는다. 하가점하층과 상층 문화가 집중적으로 발굴되는 하가점은 과거 하씨가 많이 산다고 해 붙여진 이름으로 적봉에서 오한기(敖漢旗)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데 산 정상이 평편해 고위평탄면으로 불리는 산등성을 끼고 감싸는 형태의 중앙분지에 위치한다.
1981년부터 1988년까지 8년 동안 홍산문화의 중심지인 오한기 지역을 집중적으로 답사했다. 10여 개의 작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청쯔산의 전체 유적 규모는 6.6㎢다. 이들 중에 가장 중요한 해발 800미터에 있는 아(亞)자 형태의 성자산산성(城子城山城)은 1987년에 발견됐다.
답사단은 곧바로 사회과학원에 보고했고 2000년 유국상 박사 등 현지 실무단이 도착해 조사한 결과는 그들을 놀라게 했다.
성자산산성은 살력파향(薩力巴鄕)과 마니한향(瑪尼罕鄕)과의 경계를 이루는 곳에 있다. 북쪽으로 합라구촌(哈拉溝村)에서 약 4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시야가 열려져 있어 초원(草原) 사막지대를 볼 수 있는 장관을 연출한다. 더욱이 성자산산성의 유지군(遺址群)은 6.6㎢나 되며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성자산 주봉(主峰)의 정상부의 평면은 ‘아(亞)’자형으로 불규칙하지만 남북 440m, 동서 폭은 340m다. 총면적은 약 15만㎡나 되는데 주위에 계단식 성벽이 있다. 내성과 외성으로 나뉜 이중 성벽은 주로 맥반석으로 축조됐는데 기초 폭은 약 15m, 현재 남아 있는 높이는 약 2m이며 외성과 내성 각각에 5개의 문이 설치됐다. 하늘신과 조상신에 제사를 지냈다는 돌로 쌓은 제단터와 사람들이 살았거나 공무를 보았을 대형 건물터도 발견됐다.
놀라운 것은 외성에 반원형(半圓形)의 ‘마면식(馬面式·치)’ 석축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치는 고구려 성벽의 고유물처럼 알려져 있는 것으로 성벽을 방어하는 데 유리한 형태를 갖고 있다. 적석총과 석관묘, 제단터는 물론이고, 성벽의 축조 방법을 보면 고구려·백제와 비슷하다. 할석으로 한 면만 다듬어 삼각형으로 쌓고, 다음 것은 역삼각형으로 쌓는 형식을 말한다.
<▲ 성산자산성 모형. ⓒ 아쉬운 것은 아직 이곳에서 유적들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곳 조사에 직접 참여했던 오한기박물관의 양택 연구원은 유적이 15만 제곱미터나 돼 아직 완전한 발굴을 하지 못하고 있지만 본격적인 발굴에 들어가면 엄청난 유물이 발굴될 것으로 기대했다>
내성은 중심구(中心區)/동/서/남/북/동남 등 6구역으로 분할됐다. 구역과 구역 사이는 서로 돌담으로 격리했지만 돌문으로 연결된다. 중심 구역은 다른 구역보다 높은 지역에 있으며 ‘회(回)’자형의 오르내리는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외벽 돌담 변의 길이는 88~93m이고, 현재 약 1미터 높이의 담이 남아 있다. 내측 돌담의 변의 길이는 30m이며 돌담 내에서 10여 개의 건축지(建築址)가 발견되는데 이곳에서 최고위층들이 살았다고 추정한다.
중심구 외의 5구역 내에는 균등한 원형돌담이 몇 개 단위로 분포돼 있다. 각 구역 안에 건축지가 10여 개씩 발견되는데 그 중 동남 구역에서 발견되는 건축지는 73곳이나 되며 총 6구역의 건축지는 232곳이나 된다. 원형 건축지의 직경은 주로 5~6m이며 최장 13m에 달한다.
교미하고 있는 쌍돼지 대형 돌도 있는데 길이 9.3m, 주둥이의 폭은 2,1m이며 이마높이는 7.5m이다. 눈 부분은 거칠지만 모서리의 선이 분명할 정도로 인공적인 흔적이 있으며 등에는 대형 성혈이 발견됐다. 특히 동쪽 성벽 바깥에 대형 제단 3개가 있는데 이들 제단 위는 매끄럽게 연마돼 있고 별자리로 추정되는 성혈도 있다. 중국 측은 성자산산성을 20세기 말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 발견 중에 하나로 평가하며 성자산산성을 곧바로 전국중점문화보호단위(全國重點文物保護單位)로 지정했다.
이와 같은 건축유지는 성자산을 주변으로 약 10여 곳에서 발견된다. 성자산으로부터 약 1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5호 유적지에서도 계단이 있는 성벽이 발견됐는데 동북 주능석 끝부분에서 발견된 장방형 유적지의 면적은 약 2만㎡나 된다. 이곳에서 원형건축지가 10여 개소 발견됐는데 특히 북문에서 발견되는 거석들은 매끄럽게 연마해 제단의 용도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최근 발굴이 진행된 음하(陰河) 상류 삼좌점(三座店) 유적도 국가 성립의 개연성을 보여준다는 데 중요성이 있다.
<▲ 성산자산성의 동쪽 성벽 바깥에 있는 대형 제단. 이들 제단 위는 매끄럽게 연마되어 있고 별자리로 추정되는 성혈도 있다. ⓒ 이런 제사 공간, 주거지는 물론 거대한 적석총·석관묘 등은 사실상 치밀한 행정 조직과 공장을 갖춘 왕권이 존재하지 않으면 설명이 불가능하다. 특히 해발 800미터나 되는 산 위에 이런 큰 규모의 돌들을 운반해서 성을 쌓고 건축물과 돌무덤을 조성할 정도면 전제권력을 갖춘 국가라야 가능한 일이다>
이곳은 2005년 음하 다목적댐 공사 도중 발견됐고, 2006년 말 발굴이 완료됐다. 역시 하가점 하층문화로 추정하는데 유적의 전체 면적은 1만4000㎡이며 건물지 수십 기와 석축원형제단, 적석총, 그리고 석축 저장공(13개)이 확인됐으며 도로 혹은 수로가 구획 사이에 조성돼 있었다.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적석묘는 50~70㎝ 원을 중심으로 사방 20여m까지 확장될 만큼 거대해 제단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이다. 완벽한 형태의 우물과 60여 채의 집터, 부족회의 장소로 추정된 모임장소, 곡식창고와 문설주까지 완벽하게 보존돼 있는데 특히 외성과 내성으로 구분된 성벽 중에서 내성 북쪽 성벽의 ‘치’는 5미터 간격으로 13개나 발견된다. 더욱이 곳곳에 해독되지 않은 상형문자들이 널려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들 석성이 특별히 주목받는 것은 전형적인 초기 형식의 석성으로 기저석을 쌓고 수평으로 기저를 받친 뒤 ‘들여쌓기’를 했다는 점이다. 또한 횡으로 쌓은 뒤 다음 단은 종을 쌓았는데 이들의 추정 연대는 무려 4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아군의 추락을 막고 적병의 침입을 방어하려고 여장을 쌓았다는 것이다.
대각선을 뚫은 문지(門址)도 발견됐는데, 이는 은신하면서 드나들 수 있는 출입문이다. 하가점하층문화인들이 치가 촘촘하게 배치될 정도로 견고한 석성을 쌓았다는 것은 육박전 같은 대규모 전투를 염두에 둔 것으로 윤명철 교수는 추정했다. 유적의 전체 면적은 1만4000㎡이며 건물지 수십 기와 석축원형제단, 적석총, 그리고 석축 저장공(13개)이 확인됐다.
곽대순 요령성 문물연구소 연구원은 삼좌점 문화는 하(夏)나라와 같은 강력한 방국(方國)이 존재했다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또한 오한기박물관의 도록에는 성자산산성의 유적이야말로 하(夏)~상(商)나라를 아우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라고 적었다. 이는 중원의 하나라(BC 2070년 건국)와 동시대에 성자산과 삼좌점 지역에 수천 기의 석성을 쌓은 국가권력을 갖춘 왕권이 분명히 존재했다는 것이다.
중국은 내몽고 동부 구역(區域)에서 하가점하층문화와 유사한 산성이 계속 발견되며 오한기(敖漢旗)에만 천 여 곳에 이르는 등 밀집된 대소 원형 건축지가 발견되자 이 지역에서 국가가 성립됐다고 단정적으로 설명한다. 성자산산성 표지석에는 이곳 하가점하층문화에서 국가가 성립했음이 분명하다고 적혀 있다.
하가점하층문화는 하가점상층문화(기원전 1500~기원전 400년, 이형구 박사는 남산근문화(南山根文化)라고 칭함)로 이어진다. 하가점상층문화는 하가점하층문화의 요소를 내포하면서도 은말 주초의 청동기 문화가 강하게 배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청동기 문화야말로 요동지역이나 한반도지역의 청동기 문화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시기에 이른바 비파형청동단검이 석곽묘나 석관묘 그리고 고인돌 무덤에서 출토되고 있기 때문이다.7) 비파형동검을 포함해 이들 유물들이 우리 역사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한국인이면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해 더 이상 상술하지 않는다.
여하튼 하가점하층문화가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오한기지역은 소하서문화, 흥륭와문화, 조보구문화(새, 돼지, 노루 등 토템 동물이 조각된 제단용 신기(神器)와 뼈로 만든 망치, 칼 등이 다량 발굴된 지역), 소하연 문화 등 초기 홍산문화가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곳이다. 특히 오한기 사가자진(四家子鎭)은 사방 10여 미터의 홍산문화 초기의 적석총 3기가 발견된 지역이기도 하며 왕택 연구원은 이들이 동아몽골인이라고 설명했다. (계속)
참고문헌
김종혁, 「대동강류역일대의 고대부락터유적에 대하여」, 『조선고고학학회』, 1999년 1호
신형식, 이종호, 「‘중화5천년’, 홍산문명의 재조명」, 『백산학보』, 2007, 5~41쪽
이형구, 「발해문명 창조 주인공은 우리 민족」, 『뉴스메이커』 745호, 2007.10.16
군국전, 『Aohan China』, 내몽고문화출판사, 2004, 35~37 쪽
이기환, 「고조선 추정 청쯔산·싼줘뎬 유적」, 경향신문, 2006.10.13
<객관적, 합리적인 시각에서 본 고조선의 도읍지> -중국의 正史인 <史書>와 홍산문화의 발굴 성과를 근거로 추정-
단군이 개국한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이며 역사적 실체로서 등장한 고조선은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대별된다. 이 가운데 단군조선은 우리 민족사에서 최초로 역사에 나오는 국가이며, 개국시조는 단군인 것으로 나와 있다.
1. 단군조선의 첫 도읍지-내몽골 적봉시 성자산유지(하가점 하층문화. BC 2333년경) 2. 기자조선의 유적지-하북성 창여(영평)지역과 요녕성 객좌지역 3. 위만조선의 도읍지-요녕성 안산시 태안 신개하진(新開河鎭)-험독=왕험성=왕검성 |
►제7차 고조선유적답사(항공편)
*07.10.11-15(4박5일)/ 대련-수암-심양(서탑거리, 박물관)-백암산-험독-오한기박물관-성자산성-적봉박물관-홍산-하가점유적-옹우특기-능원-대형적석총-우하량유적지
❀김세환, 이종호. 김석규, 이형석. 임재영. 이승종, 김영우, 우호용, 홍진기, 조흥만-10명.
<최근 험독에서 발굴된 비석>
<성자산성 비문중 국가설립표기-비문뒷면>
<성자산성 북동쪽에 자리한 제단 추정바위의 성혈>
<완전형태로 남아 있는 성자산성의 외성벽>
<성자산성내 제단터 중앙에 세워진 선돌>
<7차 고조선유적답사단, 왼쪽 두 번째가 오한기박물관 왕택(王澤)연구원>
2008년 2월. 제8차 내몽골 고조선유적답사계획
“고조선을 찾아야 우리나라 역사가 일어선다” 단군고조선과 위만고조선의 도읍지답사.
►총경비/ 750,000원(단 팁, 여권발급비 별도) *항공비 및 비자대; 305,000원/ 중국여행수속; (주)황제여행사(마포 아현동 437-3 고려아카데미텔 628호) 송금구좌 : 우리은행 : 1002 - 430 - 073508 예금주: 신현덕 *중국현지경비(교통비, 숙식비, 입장료, 안내, 기타); 445,000원(송금구좌; 국민은행 059-05-0007-800 이형석); 고조선역사문화재단/ 서울 마포구 공덕동 105-94호(201호실) ☎ 711-3308. 전송; 762-9996. ☛문의. 추진/ 019-225-4845 이형석 ►때; 2. 15-21(6박 7일, 봄방학 중). ►출발장소; 인천국제공항 H카운터 앞 ►현지특강; 우실하교수인솔, 현지특강 ►예정코스; 대련-고조선 무덤(강상, 누상묘)-개주 대형 제단고인돌-태안 신개하진(위만조선의 도읍지); 험독(왕험성=왕검성)-의무려산-부신; 사해문화(장당경 추정지)-오한기(흥륭와문화-조보구문화, 소화연문화/ 단군고조선의 도읍지로 추정되는 성자산성-하가점 하층문화유적지-홍산일주-적봉 박물관-삼좌점산성-옹우특기(도로, 기상상태에 따라; 좌림파기-좌람우기-통료)-심양(심양 박물관)-대련공항 #참고/ 인천-심양공항 왕복의 경우; 약150,000추가 예상. 단 우하량지역은 코스밖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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