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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계 사랑방
청바지와 구름카페
-운정 윤재천 선생님과의 대담
대담 : 홍억선(본지 주간)
기록 : 강여울(시인․수필사랑문학회 회원)
사진 : 노경애(수필가․디카450 회원)
수필가는 오만하리 만큼 자기 자신을 노출시킬 수 있는 자신감이 있어야 하고, 자신의 치부를 과감히 제재로 삼을 수 있을 만큼 프로 의식이 투철해야 한다. ― 雲亭의 ‘수필론’ 에서
구름카페
8월 14일, 연일 계속되는 무더위에 창 밖의 가로수들도 가지를 늘어뜨리고 섰다. 오후 두 시, 서초구 르네상스 오피스텔 902호의 문이 열리고 청바지와 청회색 셔츠 차림의 윤재천 선생님이 우리 일행을 맞았다. 뒤이어 현대수필문인회 오차숙 회장이 함박꽃처럼 인사를 했다. 사무실 안은 이름 그대로 구름 속에 마련된 카페였다.
‘구름카페’ 현판도 그랬고, 마룻바닥의 은은한 무늬도 구름 빛이었고, 오래된 책에서 풍기는 묵은 종이 냄새, 잘 정돈된 책장들과 벽에 걸린 그림들이 문학이 있는 카페를 연출하고 있었다.
강여울 시인이 장미꽃 한 송이를 선생님께 내밀었고, 사진기를 든 노경애 수필가가 오랜만에 뵙는다며 인사를 드렸다. 선생님은 일 년 전 신인상 시상식 때 잠깐 본 노경애 작가를 한눈에 알아보시고 무척 반가워했다.
일행이 자리에 앉자마자 선생님은 이제 막 마무리를 했다며 두꺼운 원고 뭉치를 내보였다.
― 이게 말이지요, 보통 평설집이 아니예요. 수필 한 편을 가지고 원고지 80매씩 쓴 평설집이에요. 생각해 보세요. 이런 평설집은 처음일 거예요. 한 스무 편쯤 될까? 좋은 일 한다는 생각으로 2년 동안 준비를 해 왔는데 소름이 끼칠 정도로 힘들었어요.
지금까지 내가 써 준 평설이 120명 가까이 돼요. 그것도 묶으면 또 하나의 수필문학사의 자료가 되겠다 싶어요. 그래서 이 평설집을 만들고 나서 12권 시리즈로 ‘명수필 바로 알기’라는 책을 묶어 볼까 생각 중이에요.
마침 음료수와 과일을 내오던 오차숙 회장이 옆에서 말을 이었다.
― 선생님은 참 대단하세요. 열정도 열정이지만 보통 부지런한 분이 아니세요. 우리들은 선생님을 수필계의 신화적 존재라 생각해요. 선생님은 삶 그 자체가 예술이에요. 댁에 가 보면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문학관을 짓는다면 그대로 옮기기만 하면 될 정도로 수집품들이 많아요. 거의 박물관 수준이에요. 삼십대부터 수집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 대학교에 다닐 때 우표를 수집했었어요. 수집한 우표가 아마 한 6만 장 정도 될 거야. 내 취미가 바로 수집하는 거예요. 연적, 떡살, 그림, 파이프 등등 별별 것을 다 모아요. 저기 저쪽 책장에 있는 책들은 전국 각지에서 발간된 창간호들이에요. 파이프는 1,200점은 족히 될 거예요. 하여간 여자 빼고는 다 모아요.
그러자 오차숙 회장이 반색을 했다.
― 제가 작년부터 선생님의 작품을 연구하고 있는데요. 선생님의 작품을 보면 거의 80프로가 여자 이야기예요. 어떻게 보면 선생님은 여성 숭배자 같아요.
모두들 폭소를 터뜨리자 선생님은 손사래를 치며 “아무나 좋아하지는 않아.”해서 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 안성? 그래요. 내 고향이 경기도 안성이에요. 저 사진이 고향 안성에서 찍은 거예요. 작년에 안성예총 김유신 회장이 자비로 내 문학비를 세웠어요. ‘바람의 실체’라는 작품에 마광수 교수의 그림을 넣어 멋지게 만들어 놓았어요. 안성 ‘청류재 식물원’에 있는데 너무 잘 만들어서 나도 무척 놀랐어요.
선생님은 ‘윤재천 문학비’를 배경으로 가족이 함께 찍은 사진을 가리켰다.
― 이쪽은 아들하고 며느리예요. 손자이고, 내 옆에는 손녀예요. 아들은 여주대 교수로 있어요. 딸은 사위하고 같이 내과 의사예요. 아들도 하나 딸도 하나, 일남일녀, 남매지요.
사모님은 이화여대 삼 학년 때 선생님을 만나 결혼을 하셨고, 현재 동신대학교 의류학과 명예교수로 계신다고 했다.
이야기를 하는 사이 구름카페는 한결 편안하고 아늑한 분위기로 바뀌어 있었다. 마침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대구에서 뒤늦게 출발한 대구수필문학회의 이명희 수필가가 들어섰다. 두 분이 십 년 만에 만났다는데도 찾아오신 분이나 맞으시는 분이 모두 어제 보고 오늘 또 보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현대수필, 현대수필문인회
― 초청하는 대로 강의를 다 하려고 하면 일주일 내내 해야 할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은 보따리 장사 같은 기분이 들어 싫어요. 화요일은 서초동 신세계백화점 문화센터, 수요일은 분당 롯데백화점에서 이렇게 두 곳에서만 강의를 해요. 서초동, 분당 두 곳 다 수강생이 늘 서른 명이 넘어요. 수료한 사람들은 서초수필문학회와 분당수필문학회에서 문학회 활동하고 있어요. 강의를 들은 수강생들은 적어도 3년을 넘게 공부를 해야 비로소 등단할 수 있는 자격이 있어요. 그 정도는 공부를 해야 글을 제대로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지요. 서초, 분당 두 문학회에서 활동하다 등단을 하면 ‘현대수필문인회’ 회원이 되는 거예요. 내가 만들고 있는 계간지 ‘현대수필‘ 등단자 중에는 이 두 문학회 출신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다들 3년 이상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오히려 지방에서 올라오는 분들이 ‘현대수필‘로 등단하는 것이 쉽다고 볼 수 있어요. 현대수필문인회 구성원들을 보면 서울 경기 출신이 삼분의 이 정도이고 나머지가 지방 분들이에요. 지방 분을 피하는 것이 아니고, 거리가 있는 탓이기도 하지만 등단만 하고 작품 발표를 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 그렇지 않아도 지난번에 분당수필문학회에서 보내 준 동인지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다양하게 시도하고 있는 실험적 수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그림과 수필을 조합한 수화 작품들은 특이했습니다. 아마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계간 현대수필을 발행하신 지 십 년이 넘었지요? 어떻게 해서 현대수필을 만들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 다음에 나오는 겨울호가 60호니까 현대수필이 나온 지가 15년이 되었어요. 내가 중앙대학에 있을 때였는데 ‘현대문학’에서 주관하는 문예대학이 있었어요. 거기에서 감태준 씨가 잠시 수필수업을 맡아 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그래서 수필 강좌를 하게 됐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대학교 정년퇴임을 한 1992년부터 현대수필을 발행하게 된 거지요.
― ‘현대수필‘은 신인 등단이 까다롭다고 알려져 있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지요?
― 일 년에 등단자가 수십 명씩 나오는 잡지사가 많아요. 잡지가 지나치게 상업성을 추구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문단의 권력이나 명예까지 누리려 하는 것은 옳지 못해요. 그런 사람들 때문에 그렇지 않은 사람들까지 욕을 먹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현대수필‘은 창간 1년 동안은 등단자 없이 출판했고, 그 다음해는 매회 2명씩 8명을 뽑았어요. 그러다 응모자가 너무 많으니 한 사람만 더 하자 그래서 그 다음해부터는 매회 3명씩, 지금까지 1년에 12명씩 이어 오고 있어요.
씨 뿌리는 사람
선생님께서 수필활동을 시작한 것이 60년대 말이다. 그때만 해도 수필은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대학교에 재직하면서 수필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대학원 논문으로 고전시가인 ‘십이가사’에 대해 썼었어요. 논문을 쓰면서 가사가 외형적으로는 시적 운율을 가졌고, 내용적으로는 서사성을 가지는 점에서 수필과 연관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그 당시만 해도 수필을 비문학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어요. 남들이 소홀히 하고, 하지 않는 것을 해보는 것도 보람이 있겠다 싶어 시작하게 되었어요. 황무지에 씨를 뿌리는 마음이라고 할까. 나는 씨를 뿌리는 사람이에요.
이 사무실이 내 연구실이에요. 92년도에는 여기의 절반쯤 되는 작은 사무실이었는데 책도 있고 너무 좁다 싶었어요. 그래서 내가 이 사무실을 사비로 사서 옮겼어요. 여기 있는 책들은 다 연구 자료예요. 이것을 가지고 내가 돈을 벌거나 어떤 것을 누리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줄 거예요. 중요한 것은 주긴 주는데 누구에게 줄 것인가 그것이 요즘 내 고민이에요. 자식에게 물려줄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도 안 되고……. 하여간 고민이에요. 이 많은 자료들과 내가 쓰는 책들도 다 연구 자료가 되지 않겠어요. 이것들을 누군가 잘 활용해서 우리나라 수필 문학을 더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 했으면 하는 것이 내 바람이에요.
내가 ‘현대수필‘을 하기 전에 처음으로 한 일이 있어요. 나름대로 내가 수필문단에서 가장 보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일이지요. 1967년에 상명여자사범대학에 있으면서 국어교육학과 교육과정에 ‘수필문학’ 강좌를 넣었어요. 대학의 커리큘럼에 수필이 들어간 것이 상명여자사범대학이 처음이었지요. 그리고 내가 한국수필문학회를 처음 결성하였어요.
선생님은 일어서서 빛 바랜 책 두 권을 책장에서 빼 오셨다. 1975년도에 발행된 ‘현대수필 62인집’과 1977년도에 발행된 ‘현대수필 110인집’이었다. 선생님은 판권을 펼치면서 ‘한국수필문학회’라는 명칭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셨다.
― 책이 나오기 삼사 년 전이에요. 박연구 씨하고, 현대문학의 명기현, 그리고 정봉구, 박창구 등과 내가 종로의 양지다방에 모여 앉아 처음으로 수필동인지를 만들자는 제의를 하고, ‘현대수필’이라는 아주 얇은 책을 만들면서 결성한 문학회가 바로 ‘한국수필문학회’예요. 그런데 이걸 자신이 만든 것처럼 도용하는 사람이 있는데 사실은 내가 만들었다는 증거를 이 책들이 이렇게 보여 주고 있잖아요.
수필의 날 제정
― 선생님께서는 12월 1일을 ‘수필의 날’로 제정하고 매년 행사를 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 맞아요, 내가 수필의 날을 제정했어요. 2001년 12월 1일 처음으로 ‘수필의 날’을 선포하고 선언문을 낭독했지요. 올해 제6회가 되는 셈이네.
수필은 진정으로 살아 있는 음성이다. 진지한 삶의 돌아봄이다. 우리는 수필을 통해 다시 태어날 수 있고, 가슴에 불꽃을 피울 수 있으며, 강과 바다를 찬란히 여울지게 할 수 있다. 인류의 화해와, 자연과 신과의 만남도 이를 통해 이룰 수 있다. 지혜와 포용이 그 안에 있다. 또한 무한한 가능성이 수필과 함께함을 확신한다.
수필은 지나간 시간의 기록이 아니라,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미래를 향해 펼치는 사랑의 향연이고, 언어의 축제여야 한다. 모든 고뇌와 기쁨이 정제되어 수필의 품에 뿌리를 내릴 때, 우리의 삶도 빛날 수 있다.
먼 훗날에도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이 날이 온전한 향기로 살아 있고, 그때마다 보다 더 큰 빛이 사람들의 가슴을 안온히 휩쌀 수 있기를 소망하며, 이에 ‘수필의 날’을 제정한다.
― ‘수필의 날 선언문’ 전문
선생님은 수필의 날 제정 의도를 다음과 같이 표명했었다.
첫째, 우리는 우리의 이러한 열정이 인류의 미래를 위한 바람직한 준비라 믿고, 인간적 감동이 어린 작품을 창작하는 데 역량을 집중할 것이다.
둘째, 우리는 인간의 추악한 면모를 고발하는 일보다는 긍정적인 입장에서 인간에 대한 애정을 근간으로 하는 작품을 낳는 일에 최선의 힘을 경주할 것이다.
셋째, 우리는 우월감에서 비롯된 계도적인 글보다는 한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서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주제와 소재를 발굴, 형상화하려는 자세로 일관된 노력을 할 것이다.
넷째, 우리는 지금까지의 수필이 보여 주었던 전통적 면모를 고수하면서, 새로운 전통을 수립하는 일에도 나태하지 않을 것이다.
다섯째, 우리는 자기 주변의 일을 소개하거나 자기변명에 급급한 글보다는 인류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한 수필문학을 만들어 가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여섯째, 우리는 수필을 감정의 소산물에 그치지 않게 하기 위해 연구하는 자세와 지성적 면모를 구축해 갈 것이다.
일곱째, 우리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지구촌 모두를 애정 어린 관심의 대상으로 삼아 그들과 이웃해 한 가족으로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할 것이다.
여덟째, 우리 사회의 문제점 중의 하나가 가진 자와 덜 가진 자, 힘을 보유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갈등임을 명지해 이를 수필을 통해 해결하는 일에 매진할 것이다.
아홉째, 우리는 모국어 발전을 통해서만이 성숙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음을 인지하고, 이를 위해 끊임없이 정진할 것이다.
열째, 우리는 문학이 현상을 기록하는 수단에 그치지 않고, 견고하게 인간의 삶을 개선하는 데 기여함을 확신하고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한다.
― 에코브리지전도 내가 처음으로 시작했어요. 글 속에 그림이 들어간 수화전(隨畵展) 말이예요.
― 그렇습니까? 최근에 나온 작품집 ‘또 하나의 신화’와 ‘바람은 떠남이다’도 수화집으로 알고 있는데 맞지요? 아주 짧은 수필로 이것도 실험적 수필인 것 같던데요. 원고지 3매 미만이지요?
― 맞아요. ‘바람은 떠남이다’는 거의가 원고지 1 매 수필이에요. 김민이라는 시인이 있어요. 김수영 시인의 조카예요. 이 사람의 시는 거의가 한 줄이에요. 그것도 긴 것은 20자, 짧은 것은 8자지요. 수필이라고 해서 길어야만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수필도 얼마든지 짧게 쓸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낸 수화집이 거의 원고지 일 매, 길어도 삼 매를 넘지 않아요. 역시 실험적이지요. 나는 황무지를 개척하는 사람이고, 씨를 뿌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열매는 언제 거둘지 모르지만 내가 뿌린 씨들이 자양분이 되어 수필문학이 더 풍성해지면 좋겠다는 것이 내 바람이지요.
청바지와 청색시대
― 저 사진이 피천득 선생님하고 찍은 사진이에요.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고 존경하는 분이지요. 하지만 한국 수필이 피천득 선생님이라는 등식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은 잘못되었다 생각해요. 선생님의 글은 당시에 서정수필의 정수였던 것이 맞아요.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많이 바뀌었어요. 선생님의 수필이 좋은 수필, 그러니까 좋은 것의 하나이지 좋은 것의 전부는 아니라는 거예요. 진정 좋은 수필은 전통적인 것에다 시대적 새로움이 더해져야 한다고 봐요.
내가 이런 말을 하니까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데 전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아요. 나도 제자들이 많지만 누구든지 나를 비판하라고 해요. 모든 발전은 비판과 비판이 충돌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공부하는 제자들 중에 등단자가 더 많은데 늘 나를 비판하고 나를 뛰어넘는 작가가 되라고 강조해요. 자기를 뛰어넘는 제자를 보는 것이 스승의 기쁨 아니겠어요.
수필의 허구성은 이제 거론할 필요조차 없다고 봐요. 이제 수필은 수용의 문학, 더 나아가서는 해체까지는 아니더라도 수필적 다다이즘의 시대라고 할 수 있어요. 내가 이렇게 변화를 강조하니까 전통을 무시하는 것으로 아는데 그런 것은 아니예요. 전통도 그 당시에는 새로운 것이었을 테니 그대로 존중하고, 지금은 지금의 시대를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제는 시대가 변했어요. 이제 우리 수필도 골방 문학에서 벗어나야 해요. 나훈아나 조용필이 지금도 인기를 누리는 것은 시대의 흐름을 알고 자신을 시대에 맞게 변화시켰기 때문입니다. 옛날에야 무대에 가만히 서서 노래만 부르면 되었지만 지금은 옷도 화려하게 입고, 무희들이 나와서 춤도 추고 그래야 하는 것처럼. 수필도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고 영원히 살아 남기 위해서 시대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요즘은 앉아서 세계를 왔다갔다할 수 있는 인터넷 시대이고, 미국과 일본은 아직 좀 까다롭지만 비자 없이도 세계를 다닐 수 있는 시대잖아요. 이런 시대에 전통만 고집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봐요. 흐르는 물처럼 수필도 시대의 흐름에 맞춰 변해야 해요. 고여 있는 물은 썩는 것처럼 변화하지 않으면 사장될 수밖에 없어요.
문학도 마찬가지예요. 변화하지 않으면 독자보다 작가가 많아질지도 몰라요. 그것은 올바른 현상이 아니라고 봐요. 수필의 생명은 다양성입니다. 사람마다 얼굴이 다른 것처럼 작가는 시대적 상황과 그에 대처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해요. 수필에는 공식이 없어요. 이것은 되고 이것은 안 된다 그런 공식이 어디 있어요. 그러니 시대에 맞게 변화하고, 현실을 반영하자는 것이지요.
― 선생님의 연세를 알고 사실 놀랬습니다. 청바지 차림도 그렇고 훨씬 젊게 생각했었습니다. 지금도 청바지를 입고, 청색 모자를 쓰고 계시지 않습니까. 현대수필문인회의 동인지가 ‘청색시대’ 또, ‘피카소의 블루’인가 그렇지요? 무척 청색을 즐기시는 것 같은데 청색에 대한 무슨 상징성이라도 있습니까?
― 젊음이지요. 나는 피카소를 좋아해요. 피카소가 몽마르트 언덕에 있을 당시 그 곳은 창녀촌이었어요. 그때가 20대의 가난한 청년인 피카소에게는 암울한 시기였는데 그것을 극복하면서 그린 ‘아비뇽의 아가씨들’이 있잖아요. 그림 속의 여자들이 다 창녀예요. 그런데 얼굴이 이전의 그림들과는 달랐죠, 사람 얼굴 같기도 하고, 사람 얼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이상했죠. 처음에 동료나 친구 화가들이 그 그림을 보고 미친놈이 그린 그림이라 했어요. 그러나 일 년 뒤에, 그들은 말을 백팔십 도로 바꿔 최고의 그림이라 극찬했어요. 그러니까 피카소의 암울기인 그 청색시대가 바로 현대미술의 시초였어요. 피카소의 청색시대처럼, 새로운 시도는 처음에는 비판을 받지만 결국은 인정을 받게 되는 것과 같이 수필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지요. 비판 받기 두려워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으면 발전도 없어요. 내가 이렇게 수화집을 낸 것도 하나의 시도라고 할 수 있어요. 앞에서 내가 씨를 뿌리는 사람이라고 했지요. 씨를 뿌려서 내가 그 열매를 거두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싹을 틔우고 열매를 거두는 것은 후배들의 몫이겠지요.
‘수필학’과 ‘구름카페 문학상’
― 현대수필을 발행하고, 2년 뒤인 1994년 3월 20일에 수필 이론서인 ‘수필학’ 창간호를 발간했어요. 그리고 이것을 무료로 배부해 왔어요. 혹자는 수필에 무슨 이론이 필요하냐는 등의 좋지 않은 말도 하는데 나는 생각이 달라요. 이론이 뒷받침되지 않는 학문은 발전이 없는 것처럼 수필도 문학적 이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발전할 수가 없다고 봐요.
한국수필학회는 ‘수필학’ 필진으로 수필을 연구하는 사람들이에요. 이 학회가 활성화되면 수필인들에게 아주 큰 버팀목이 되겠지요. 수필학의 구심점을 만들기 위해 구상을 해 보고 있어요. 나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은 수필가보다 마광수나, 김우종, 구인환 등 주로 평론가들이 많아요. 수필인들이 서로 더 친해질 수 없는 이유는 서로 인정을 해 주지 않는 때문인 것 같아요. 서로 인정을 해 주고 존중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면 얼마든지 화합할 수 있을 텐데.
‘현대수필‘ 발간 14년 만에 ‘구름카페 문학상’을 만들었어요. 작년 12월 1일 수필의 날 기념행사 때 첫 시상식이 있었는데 얼마 전에 작고한 이규태 씨가 제1회 수상자가 되었어요. 상금이야 타문학상에 비하면 너무나 적지만 질적인 면에서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구름카페 문학상 이야기를 하시는 선생님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온화하고 진중한 모습을 보며 제주의 안성수 교수가 쓴 선생님에 대한 작품론이 생각났다.
그의 수필 세계는 청바지와 구름카페 사이에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다. 전자가 현실을 상징한다면 후자는 이상을 상징한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청바지를 입고 구름카페를 꿈꾸는 그의 작품은 결코 어느 한 쪽에 쉽게 경도되지 않는다. 문학은 언제나 이상과 현실의 중간지대에서 아름다운 향기를 잉태하는 꽃처럼 피어야 하기 때문이리라.” “그가 ‘청바지’와 ‘구름카페’의 주인이 된 것은 분명 행운이지만, 결코 쉽게 얻은 것이 아니다. 일생 동안 수필과 ‘함께 살면서’, 수필을 ‘목숨처럼 사랑하면서’ 머슴의 새경처럼 얻은 것이기에 더욱 매력적인 것이다.
전통과 새로움 그리고 수필적 다다이즘
― 선생님의 저서가 무척 많지요?
― 작품집과 수필이론서, 수필론은 벌써 40년 넘게 써 왔어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계속 새로운 수필론은 또 나온다고 봐요. 수필에는 수학과 같이 딱 맞아떨어지는 공식이 없어요. 그래서 내 생각은 그래요. 시대에 따라 수필도 변해야 한다는 거예요. 시대를 외면한 글은 더 이상 설자리가 없어요. 누가 보겠어요. 시대가 변하면 가치관도 변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수필작가는 시대의 흐름을 알고서, 독창적이고, 신선한 것을 찾아내는 안목이 있어야 해요. 나는 제자들과 후배들에게 그래요. 자기만의 색깔을 가져라, 차별성 있는 소재로 남과 다른 자기만의 목소리를 낼 줄 알아야 한다고 해요. 그러자면 창의적인 상상력이 있어야 하고, 그 상상의 폭만큼 감동도 커지는 거라 생각해요. 그리고 될 수 있으면 형용사나 부사의 화려한 수사를 하지 말고, 접속사의 빈번한 사용도 피하라 그래요. 시도 한 줄짜리가 나오는데 수필이라고 길어야 할 이유가 없다, 짧은 것 안에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해요.
시대가 변했어요. 수필도 메타와 퓨전으로 가는 거예요. 수필은 비유와 유추의 문학이에요. 더 짧은 글 안에 더 많은 은유와 상징을 통한 선명한 메시지를 담아야 한다고 봐요. 그리고 수필은 다양성의 문학이라는 거예요. 바로 수용의 문학이라는 거지요. 그러므로 시적인, 소설적인 어떤 요소도 담을 수 있는 그릇이지요. 바로 이러한 접목으로 수필은 변화하고 발전한다고 봐요.
여적
선생님과 말씀을 나누는 사이에 어느새 돌아오는 길을 걱정하게 되었다. 서울이 가까워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대구에서는 원행길이다. 더구나 사진을 찍기 위해 김천에서 합류한 노경애 작가를 중간에서 내려 주어야 한다. 고속도로가 막히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생님과 오차숙 회장은 엘리베이터까지 나오셔서 일행을 따뜻하게 전송을 해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이명희 작가가 선생님과의 인연을 소개했다.
― 제가 동두천에서 살 때 작은 문학모임에서 활동을 했더랬어요. 그때 선생님께 전화를 해서 특강을 해 달라고 부탁을 드린 적이 있었어요. 선생님은 얼굴도 모르고 누군지도 모르는 제 전화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오셔서 강의를 해 주셨지요. 초행길이라 차를 몰고 두 시간 가까이 헤매면서 오셨어요. 겨우 스무 명 정도의 회원이 모인 자리였는데 얼마나 고맙던지요. 그래서 선생님께는 늘 빚을 진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문득 선생님의 수필 ‘구름카페’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나는 꿈으로 산다. 그리움으로 산다. 가능성으로 산다. 오늘도 나는 ‘구름카페’를 그리는 것 같은 미숙한 습성으로 문학의 길을, 생활 속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
하늘에는 방금 떠나온 ‘구름카페’를 그리려는 듯 구름이 석양에 무더기로 몰려서 웅성거리며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경기도 안성 출생
전 중앙대 교수
한국수필문학회 회장
현대수필학회 회장
한국수필학연구소 소장
한국문인협회 이사
『현대수필』발행인 겸 주간
수상
한국수필문학상(1989)
노산문학상(1991)
한국문학상(1996)
문학 이론서
국문학 사전(1967), 명작을 찾아서(1969), 수필문학론(공저·1973), 수필작법(1973),신문장론(공저·1974), 신문장작법(1979), 문장개론(공저·1980), 세계 명수필의 이해(1981), 수필창작의 이론과 실제(1989), 수필문학 산책(1990), 수필작법론(1994), 수필문학의 이해(1995), 수필작품론(1996), 여류수필작가론(1998), 현대수필작가론(1999), 수필 이야기(2000), 수필의 길 40년(2001), 나의 수필쓰기(2002), 여류수필작품론(2003), 운정의 삶과 수필(2003), 운정의 수필론(2004), 한국여류수필작품론(2004)
수필집
다리가 예쁜 여인(1974)
잊어버리고 싶은 여인(1978)
문을 여는 여인(1980)
요즘 사람들(1982)
나를 만나는 시간에(1985)
처음과 끝, 그리고 그 사이(1986)
나뉘고 나뉘어도 하나인 우리를 위하여(1987)
구름카페(1998)
어느 로맨티스트의 고백(상·하 / 2001)
청바지와 나(2002)
또 하나의 신화(2005)
바람은 떠남이다(2006)
첫댓글 고맙습니다. 감동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