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시대의 수필작가
권남희
전북 전주 출생
『월간문학』 수필 당선(1987)
한국문인협회, 문학의 집 서울, 대표 에세이,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송파문학회 부회장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수필집 『미시족』 『어머니의 남자』
『시간의 방 혼자 남다』 외 공저 다수
문화센터 수필 창작반 지도
│대표 작품│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 외4편
낯설다. 열아홉 소녀의 순박함과 청순함, 첫사랑의 아스라함을 남겨 두고 떠났던 고향에서 도리어 나는 이방인처럼 소외감에 빠지고 만다. 고향은 언제나 무성영화의 정지된 한 컷이지를 않았던가. 나는 혼란스러움에 어쩔 줄 몰라 한다. 산과 밭을 밀어내고 빼곡이 들어선 아파트 단지, 매연과 소음, 교통체증에 시달리는 고향의, 서울을 닮아 버린 얼굴을 보며 돌아와 안주할 곳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고향은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을 느낄 수 없는 곳으로 떠났던 나를 자꾸만 뒤돌아보게 했다. 아, 어머니. 나 몰래 눈물짓던 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다시 달려들고파 스무 살 봄 아지랑이 속에서 그리움의 키만 키웠던 날들이 흔들린다. 고향을 떠나던 날부터 나는 밤마다 어머니 꿈을 꾸었다. 가마솥이 걸려 있는, 개량도 안 된 아궁이 앞에서 누런 광목 앞치마를 두른 채 밥을 짓고 있을 어머니가 보고 싶어 밤마다 환청을 듣기도 했다. 한밤중에도 벌떡 일어나 하숙방 한구석에 웅크린 채 눈물 찔끔대던 내가 오목거울 저편으로 오므라져 있다.
어머니의 생신을 겨우 기억해 낸 채 허둥지둥 달려온 내게 등불 밝힌 초파일 거리는 혼령처럼 떠도는 찬바람을 안겨 준다. 나는 왜 어머니를 위해 등불 한 번 밝혀 달지 못하는 걸까.
지금의 내 나이보다 더 새파랗게 젊었던 어머니는 가족을 위해 등불을 켜고 기도했다. 새 등불을 달고 돌아온 날 어머니는 우리에게 덕담과 기원을 나눠주셨다.
이제 등불은 있지만 내 젊은 어머니가 걸어 둔 등불은 보이지 않는다. 임자도 모르는 등불만 내걸린 거리에 서면 젊은 어머니와 어린 딸이 지나쳤던 길은 어디로 가고 혼자 서 있는 황량함이 밀려온다. 하얀 칼라의 단발머리 소녀가 걷던, 저물 녘 성당 종소리와 어머니의 기도소리가 내려앉는 그 길은 어디로 숨어 버린 걸까. 열아홉 해 동안 나를 여물게 했던, 나를 부르던 어머니의 목소리, 햇빛과 바람, 오가던 실개천 길은 어디에도 없다. 병석에 누운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던 친구를 만나곤 했던 우체국도, 소식을 끊고 숨어 버린 Y처럼 흔적이 없다. 그나마 앓아 누운 어머니를 잃고 새 어머니를 맞아야 했던 Y를 위로한답시고 ‘난 네가 제일 좋아’ 그런 쪽지를 전하며 수줍어하던 나를 향해 느닷없이 깔깔대던, 하얀 얼굴의 Y도 이제는 어머니가 되어 어머니를 그리며 나처럼 이 거리에 서 보았을지 궁금하다.
고향의 흔적이라도 찾으려는 듯 화려하고 번잡해진 시내를 쏘다녀 본다. 노후대책으로 어머니가 탐을 냈던 시장통 거리, 그러나 딸의 학비를 대느라 사지 못했던 곳에는 백화점과 고층빌딩이 들어섰다. 단발머리에 하얀 칼라 대신 군화를 신고 색색으로 머리를 물들인 소녀들, 검은 재킷,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소년들. 세련되고 유복해 보이는 젊은 어머니와 귀공자 같은 아이들이 붐비고 있다.
이들을 보며 나는 잘못 들어선 듯 이곳 저곳을 서성일 뿐이다. 통유리로 벽을 두른 외국체인의 피자점포 앞에서 나는 어머니가 단골 삼았던 국수가게의 무엇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광목 앞치마를 두르면 집안 잔치쯤이야 시원하게 치러 내던 내 어머니의 생기 넘치던 젊음도 국수가게와 함께 무너진 것이다.
조금은 서러운 마음으로 떠밀려 들어선 고향집 내가 쓰던 방에는 육순의 어머니가 말수가 줄어든 채 살고 계신다. 내 쉴 곳은 여기라는 듯 활기에 넘치는 거리를 내어 준 어머니는 오래된 집을 지키고 있다. 유배를 즐기는 늙은 성주처럼 고요히 남은 삶을 기다린다.
흰머리가 부쩍 많아진 늙은 성주의 등에는 남동생 부부가 맡긴 손녀가 잠들어있다. 제 앞가림도 할 줄 몰랐던, 스물을 갓 넘긴 딸이 엉겁결에 안겨 주었던 손녀를 돌봐야 했을 때 어머니는 아마 검은 머리의 사십대 초반이었지.
어머니의 성은 낡아 가고 얼굴은 주름투성이다. 검은 머리 때 돌보던 손녀는 슬금슬금 자라서 제 어미 옷을 탐내는 고등학생이 되었는데 어머니는 아버지가 쓰시던 돋보기를 코끝에 걸치고 우편물을 살핀다.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박물관처럼 톤이 가라앉고 고즈넉한 방을 기웃거린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다투는 소리, 어머니의 꾸짖음이 액자 속에 갇혀 있다. 어머니의 젊음은 우리를 위해 등불을 달던 그날부터 저당 잡혔을지 모른다.
어머니의 굼뜬 행동과 검버섯 핀 얼굴이 어색하다. 지난 가을 왼팔이 마비되었다가 겨우 나았다는데 아직 신통치 않은지 어머니가 손써야 하는 살림살이는 나동그라진 쪽박 모양새다. 반들반들 윤이 나던 부엌살림들은 높다란 선반 위에 올려져 있고 플라스틱 소쿠리와 2인용 전기밥솥만이 덩그마니 놓여 있다. 나는 이런 속절없는 흐름을 어디서부터 되돌려 놓아야 할지 두서를 찾지 못해 허둥거린다.
무언가에 떠밀리듯 다시 서울살이로 돌아와 뒤돌아보면 홀로된 어머니가 돋보기를 쓰고 흰머리를 빗는다. 손녀를 어르고 있다. 어머니가 남아 계시는 고향은 점점 작아지고 주인 없는 등불만 깜빡거린다. 어머니는 꼭 살을 에는 겨울바람 속에 홀로 서 있는 듯 서럽다. 나는 어인 일인지 자꾸만 어머니가 있는 고향을 낯설어 하며 두려워한다.
버리며 사는 나날
낙엽을 몰고 오는 바람은 역시 낙엽 빛깔이다. 그런 울적한 낙엽 빛의 바람이 내게로 스며들어 가슴을 헤집을 때면 나는 빈 들에 선 나무가 된다. 가지 끝에 매달린 갈잎의 떨림으로 몸을 가눌 수가 없어진다.
다람쥐 쳇바퀴처럼 갇힌 일상의 반복과 가져도 가져도 성 차지 않는 욕망으로 마음이 뒤흔들리는 날은 으레 그렇다. 그럴 때면 나는 버릇처럼 손때 묻은 지난날 소지품들을 끌어내 놓곤 소중하게 매만지기도 하고 속절없이 버리기도 하며 마음을 달래곤 한다. 한참 동안을 그러노라면 흐트러진 마음이 채곡채곡 개켜지기도 하고 곰삭은 감정의 찌꺼기들이 걸러지기도 하니까. 버릴 것은 과감하게 버리고 취할 것은 다부지게 끌어안을 줄 아는 현명, 그게 현대인의 지혜라던가…….
사람은 항상 마음 한구석을 비워 두는 것이 좋다. 다소의 여지를 남겨 두어야 한다. 물이 차면 넘치는 것처럼 가득하기만 바란다면 이내 기울어지는 것이다.
채근담의 충고처럼 우리는 물질이나 정신에서나 너무 많은 것을 가지려 하고 있다. 무엇이든 자기 것으로만 채우려 함에 다함이란 있을 수 있을까. 원하던 것이 손에 들어와도 며칠이 못 가서 또 새로운 것에 욕심을 드러내는 우리의 일상임에랴. 미련과 애착으로 쓸모 없는 것에 매달려 되새김만 한다면 그 얼마나 탄력 잃은 일상이 되고 말 것인가.
그런 저런 까닭에서인지 나는 십여 년이나 모아 두었던 내 구두를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아마도 어머니 젖을 빨 때부터라고 생각해 본다. 내 것에 대한 소유의식이 싹트면서 나는 뭐든지 버리지 못하고 모아 두는 습성을 갖게 되었다. 그런 버릇은 예민한 신경 탓으로 약간 귀에 거슬리는 말만 들어도 가슴에 접어 두곤 하는 성격과 일맥상통하여 나를 더욱 내성적으로 만들었다.
책상서랍은 늘 껌 포장지나 사탕을 쌌던 비닐, 알록달록한 헝겊조각과 다 쓴 볼펜 등이 차 있었다. 소중하게 모아 두었던 그것들은 한 번도 무언가에 제대로 씌어진 적은 없다. 결국 먼지가 쌓인 채 달을 넘기고 해를 보낸 뒤 신선한 감각의 새로운 소지품에 밀려 버려지곤 했다.
구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삼 년 신다 보면 유행이 지나고 낡아서 새 구두를 사들이면서도 선뜻 버리지를 못했다. 구두를 신고 다닌 세월만큼의 가버린 내 젊음을 묶어 두기라도 할 듯 헌 구두를 간직해 두곤 했다. 쌓이는 먼지와 어둠 속에서 묵묵히 기다려 준 구두들이지만 한 번도 다시 햇빛을 본 일이 없다. 빛 바랜 구두에는 서로 다른 마음이 고집스레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래도 헌 구두에는 습하게 웅크려 털어내지 못한 추억들이 담겨 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어머니 …” 윤동주의 시구처럼 구두하나 하나에도 별의 얼굴이 걸려 있다. 한쪽에 조심스럽게 놓여 있는 까만 구두는 처음으로 교단에 설 때의 떨림을 달래며 신중하게 골랐던 구두였다. 그 구두는 출근 시간 전 시아버님이 닦아 두어서 앞부리가 유리알처럼 빛났다. 현관 밑 디딤돌이 대리석이라 차갑다며 난로 옆에 두었다가 신게 하셨다. 만원버스를 타고 가며 구두를 밟히지 않으려고 애쓰던 기억이 새롭다.
뒷굽이 코르크로 된 슬리퍼 모양의 샌들도 눈에 띈다. 모양새가 새침하다. 처녀 선생인 줄 알고 호감을 보이던 남선생과 걷던 플라타너스 길이 햇살 아래 부서지고 있다. 목이 짧은 브라운 색 부츠는 보기만 해도 아찔하다. 눈이 유난히 많이 내린 겨울 시내에서 뒷굽 한쪽이 떨어져 수선할 곳을 찾느라고 남편에게 업혀 다니던 기억이 생생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구두가 있다. 남편의 대학축제 때 신고 갔던 구두다. 복고적이고 클래식한 분위기가 내 마음처럼 남아 있다.
모닥불과 솜사탕 그리고 잔디에 어우러져 피어 오른 청순한 젊음의 러브 로망이 살아 숨쉬는 듯하다. 슈베르트의 ‘숭어’처럼 생동감 있게 파닥거리면서…….
차마 버리기가 아깝다는 생각이 또다시 고개를 들었다. 딸에게 나의 유물로 빨간 구두를 남겨 줄까도 생각했지만 부질없는 애착으로 마음을 바꾸었다. 언제까지나 내 소유의 공간만 채우고 넓히며 살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어느 한때 러브 로망이 깨뜨려졌다고 하늘이 무너진 양 고통스러워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상대방의 가슴에 번지는 황혼녘 허무를 내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지금이다. 이런 걸 마음의 여유라고 할는지. 참신했던 젊음이 빛 바래짐은 마음 아프지만 의연히 묻어 두고 싶다. 남편의 등에 업혀 다녔던 젊음의 러브 로망도 아름다웠지만 이제는 두 아이의 어머니로서 사는 삶이 더욱 아름답겠지.
아이들을 업고 내일로 활기차게 달리는 생활인으로서의 꿈이 소중할 것이다.
시간의 흐름 탓인지 아름다운 추억들이 담긴 구두를 버린다고 해서 내가 가진 순수를 잃게 되거나 마멸당하지는 않을 거라는 자신이 선다. 그렇다면 과감히 버려야겠다. 가장 귀한 내일에 대한 꿈 하나를 간직하기 위해서라도 병적이니 집착과 이기적 아집일랑 아낌없이 버려야겠다.
물처럼 흐르는 시간 속에서 나는 이런 방법으로나마 일상의 한 모퉁이를 방황하는 사념들을 비워낸다.
바람든 무로 굴러 본 세상
무는 잘 보관해야 한다. 신문지에 꼭 싸서 두어도, 비닐 랩으로 싼 후 냉장고에 갈무리해 두어도 일주일 이상 지난 뒤 잘라 보면 바람이 들거나 물러 있다.
무는 양상추나 샐러리 등 비싼 야채처럼 귀한 대접을 받지는 못하지만 요리를 할 때 여러모로 쓰임새가 있다. 국물이나 매운탕을 시원하게 맛낼 때나 생선 찜, 갈비찜, 설렁탕에 곁들여 먹는 큼직한 깍두기, 갈비집에서 빼놓지 않고 내놓는 무채, 초절임 무쌈, 포기김치 담글 때 켜켜이 박는 무채 등 갖가지로 변신한다.
대충 보관해 두었다가 괜찮겠거니 하며 요긴하게 쓸려고 꺼내 보면 겉모습은 틀림없는 무인데 속은 구멍이 숭숭 뚫려 솜방망이가 되어 있다. 꼭 무로 요리를 해야 제 맛이 나는 경우에 무는 그렇게 망가져 있다. 바람든 무는 무슨 요리를 해도 아무런 맛이 나지 않고 푸석하다.
어머니는 봄날이면, 겨우내 저장해 둔 무를 꺼내 손질하느라 댕겅댕겅 잘라내면서 혼자말을 중얼거렸다. “바람든 무수는 먹잘 것이 없당께. 무말랭이도 못 돼. 꼭 자식 하나 건사 못하고 늙어빠져 혼자 궁글어 댕기는 영감탱이 같당게…….”
나의 삼십대는 바람든 무나 다를 바 없었다. 허깨비의 삶처럼 바람이 뚫고 간 자리는 다른 무엇으로 채워지지 않아 가볍기 짝이 없었다. 차돌처럼 단단하다던 나의 속도 믿음을 잃어버리자 무엇에든 흔들렸다. 내 생각에 깊이가 없어지자 모든 행동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마음이 약해지고 귀도 얇아져서 누군가 조금만 심기를 건드리는 말을 해도 상처를 받아 만나지 않고 혼자 지내기 일쑤였고 조금만 따뜻하게 대해 주어도 눈물을 펑펑 쏟았다.
‘여우하고는 살아도 소하고는 못 산단다.’ 나의 반쪽은 내게 함부로 말을 해대며 이리 차고 저리 굴렸다. ‘네가 망가질수록 좋고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어느 날부터 나는 삶을 함께 하는 반려자가 아닌, 소보다 못한 천덕꾸러기였다. 천성적으로 타고난 무뚝뚝함과 눈치껏 아부하지 못하는 나의 태생을 원망하기도 했다. 가슴에 구멍이 숭숭 뚫려 버려 밀도가 없어진 내 생활은 어떤 삶의 양식에도 중심을 두지 않은 채 바람을 탔다. 예쁜 꽃을 보면 무작정 사들여 놓지만 가꾸지를 못해 자꾸 죽고 그것조차도 내게는 상처로 남고 절망이 되고 말았다. 겉멋을 부리며 여행을 떠났는데도 그것은 가출처럼 공허한 후유증을 남겼다.
나의 슬픔에 취해 무작정 타인에게 나를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맹목적인 사람으로 바뀌어 갔다. 심약해진 채 나를 받아 줄 이성 친구가 없을까 세상을 기웃댔다. 세상은 야박하여 바람든 무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무의 소원은 한 가지 따뜻함이었지만 그들은 호락호락하게 무가 바라는 정을 주지 않았다. 마치 물건을 고를 때 혹시 싸구려 인데 속아서 사지 않나, 겉은 멀쩡한 과일이 속이 썩지 않았나 들어 보고 가벼움을 알아채기 위해 뒤적일 때처럼 이리 재 보고 저리 테스트하면서 마음을 열지 않았다. 가식을 덮은 독한 술에 고도로 위장된 영혼 없는 사랑만 있을 뿐이었다.
바람든 데다 강추위에 어는 꼴이었다. 차라리 쓰레기 더미에 묻혀 쓰레기가 내는 열기에 자신을 맡긴 채 새싹을 내는 일이 더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쓰레기를 뿌리 삼아야 내 삶을 피울 수 있어 만만치 않았다. 이혼으로 끝난 바람든 무,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났다가 상처투성이로 돌아온 무, 동병상련의 바람든 짝을 찾았지만 서로에 대한 기대만 있을 뿐 서로의 아픔에 도움도 되지 못한 채 헤어진 무… 세상 어디에도 위로는 없었다.
어떤 길도 태고의 세계로 돌아가지는 못한다.
그대의 영혼에 위로와 행복을 주는
별들의 무리도
숲이나 강물, 바다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 마음에 와 닿을 수 있는 것은
나무도 아니고, 강물이나 동물도 아니다
그대 마음에 위로가 되는 것은
오로지 그대와 같은 존재들 뿐이다.
―헤르만 헤세 「어디에도 위로는 없다」 전문
어느 누가 따뜻이 불러 주지도 않건만 분주하게, 정처 없이 어울려 돌아다니던 버림받은 무들은 홀로 서야 한다는 데 생각을 모으고 흩어졌다. 바람이 들어 세상을 굴러다니던 30대는 이렇게 끝이 났다.
참는 것에 대한 분노
나는 좀 아둔한 편이다. 대체로 이해관계를 따지는 일에 서툴다.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스스로를 위해 변명하거나 이익을 챙기는 일은 더 둔하다. 그리고 큰 손해 없으면 어지간한 일은 참고 견디면서 그냥 넘겨 버린다. 참는 일에 익숙해서인지 불평을 하거나 대드는 쪽보다 참는 게 더 편했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맏이인 네가 참아라.’라는 다독거림을 많이 들었다.
언제나 ‘네가 누나니까 동생에게 양보해라, 참는 사람에게 복이 온단다, 악한 끝은 없어도 참고 착하게 지내면 좋은 끝을 본단다.’ ‘참을 인(忍)자 셋이면 살인을 면한다’ 등 잘 참는 사람이 좋은 사람 대접을 받는 것처럼 세뇌를 받은 편이다. 참는 일이 진정 어떤 것인지도 모르면서 참기만 하면 좋은 일이 내게 벌어지려니 믿었다.
참으라는 말을 귀가 아프게 들었던 경우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부싸움을 할 때였다. 말귀를 알아들을 무렵 나는 ‘참는 게 무엇일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아버지, 어머니가 부부싸움을 시작하면 옆집, 앞집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달려와서 아저씨는 아버지를 붙들고 무조건 참으라며 무마시키느라 애를 쓰고 아주머니는 어머니를 부엌으로 데리고 가서 여자니까 무조건 참으라며 달래고 다독거렸다. 동네 어른들이 모두 입이 닳도록 했던 말이 ‘그저 참아야 한다’는 몇 마디였다.
그런 소동을 겪을 때마다 나는 참는 일이 무얼까 의아해 하며 생각에 빠졌다. 참는 일은 굉장히 두렵고 어려운 그 무엇, 도달하기 어려운 대상으로 느껴졌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 아버지, 어머니 동네 사람들이 저렇게 매달려 쩔쩔매는 것이겠지 판단하며 ‘참는 것’에 경이감을 가졌다. 부모님이 부부싸움을 벌일 적마다 나는 속으로 다짐을 하곤 했다. 나는 꼭 참는 일을 잘 해내서 저렇게 온 동네를 발칵 뒤집어 놓지는 않을 거야.
언제부터인가 내 귀에 익숙해진 칭찬은 거의 ‘애가 참을성이 강하다’라는 말뿐이었다. 그것은 마치 닳아 빠진 책상 모서리처럼 나는 점점 잘 참아내는 일에 대해 긍지를 가지게 되었다.
결혼을 해서도 나는 당연히 참을성의 대가처럼 나를 내세우기보다 순종하고 견뎌내는 일에 진면목을 보였다. 차남인 남편이 여러 가지 이유로 부모님을 모셔야 했을 때도 묵묵히 따랐다. 집안 대소사를 혼자 거뜬히 해낸다든지, 질투심 많은 시누이가 퍼뜨리는 험담과 부당한 언사에도 참는 게 대수인 양 말을 삼키고 있을 뿐이었다. 어떤 대응을 한다든가, 항변을 하고 이치를 따지는 일은 엄두를 못 냈다. 시부모님도 ‘여유가 있고 더 배운 네가 참아라’ 이런 당부를 수시로 하며 내 참을성을 칭찬했다. 친정어머니도 ‘배운 여자일수록 네가 참고 잘 처신해야 한다’며 참을성의 덕목을 앞세웠다. 그렇게 참아내는 일에 길들여진 내가 어느 날인가 아이의 친구들을 놀러 오지 못하게 막는 시아버지에게 강한 어조로 나의 의견을 내세우는 사건이 일어났다. 상당히 이유 있는 제안인데도 그 일은 집안을 시끄럽게 하고 말았다. 시아버지는 앓아 누운 채 아들을 불렀고 가족들은 내 태도를 문제 삼았다. ‘실망했다’ ‘교양 있는 사람은 그러면 안 된다’ ‘다른 사람 모두 함부로 행동해도 너만은 그러지 않을 줄 알았다’ 등 비난 섞은 윽박지름에 곤욕을 겪고 할 수 없이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들은 부모에게 대들고 때로 칼부림을 해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이해받는 사람들이었고 나는 무슨 일이든 참고 견뎌야 하는 대상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런 나를 남편이 지겨워하기 시작했다. 분명하게 의사표현을 하지 않고 우물거리는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나도 내 자신이 싫어졌지만 무언가 보이지 않는 억압 속에서 하루아침에 자신을 바꾼다는 일이 쉽지 않았다. 참기만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일이 상대를 얼마나 숨막히게 만들고 있었던가.
내게 슬슬 형체도 없는 분노가 일기 시작하면서 ‘나는 바보였을까’ 그런 피해의식까지 생겨났다. 친구들과 비교하면서 나는 참고 침묵하며 자기 할 일만 하는 사람보다 자기 표현을 지혜롭게 하면서 당당하게 사는 친구가 낫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이제는 사회가 달라졌다. 어디에서건 누군가를 붙들고 참으라고 곁에서 달래는 사람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다만 곳곳에서 큰 목소리로 자기가 옳다는 주장을 하며 소리지르는 광경만 눈에 띈다.
자동차가 질주하는 대로에서 자동차끼리 접촉사고가 나면 사람들은 먼저 우기고 고함지를 태세부터 갖추고 자동차에서 내린다. 참고 조용히 무마하려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신세대들은 더욱 참고 견디는 것을 무능하다고 생각한다. 어디가 부족하니까, 자신이 없거나 겁나니까 당하고만 있지, 이렇게 여긴다.
참는 자의 덕이 사라져 버렸다. 참는 자에 대한 가치 기준이 달라졌다. 잘 참아내는 것에 대한 분노만 있을 뿐이다.
주식시장의 남자들
그의 정신을 빼앗고 혼을 담보로 대박 꿈을 버리지 못하게 붙들고 있는 기류는 무엇일까. 코스닥, 벤처 열풍, 인터넷 사업, 카지노, 로또복권 등… 이 사회의 부추김은 한 판 벌이고 있는 푸닥거리다.
세상 뿌리나 다를 바 없는 서민들의 삶을 뒤바꿀 것같이 떠들썩한 기운은 머지않아 어떤 형태로든 혁명을 벌일 눈치다. 틈만 나면 컴퓨터 앞에 앉아 유망종목을 발굴하고 미로 같은 데이 트레이딩에 돈을 흘려 넣으며 계산기를 두들겨대는 그는 시대의 농간에 휘둘리고 있는 희생자임에 틀림없어 마음이 아프다. 너무 깊이 빠져 들어간 그를 꺼내 오려면 우화에 나오는 ‘공주 구해 내기’처럼 지옥을 건너고 뿔이 백 개쯤 달린 악마를 물리친 다음 수천 년 묵은 뱀을 속이는 지혜까지 써서 구해 내야 할 것 같다.
그는 가족과 상의도 없이 작은 아파트 한 채를 날리고 딸의 혼수 밑천이라고 생색을 냈던 땅을 담보로 주식투자를 한 것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집까지 은행에 맡기고 주식을 한다. 그는 십 수억의 돈을 잃은 자신에게는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한없는 연민을 보내며 너그럽다. 하지만 십만 원대의 옷을 사 달라고 쭈뼛거리는 아이에게는 분수 모르는 사치에 허영이라고 단호하게 결박짓는다. 속아서 잃은 돈만큼 지혜를 산다고 했지만 그만큼 잃었으면 지혜는 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비상시에 자기 몰래 금쪽같이 쓰고 있다는 비자금도 만들 줄 몰랐던 아내에게 딴 주머니라는 동기부여를 하며 주식을 사고 파는 남자. 이제 어디를 가건, 크건 작건, 주식 신드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남자를 만난다. 그들은 직장 사무실에서 컴퓨터 모니터 가득 주식시세를 띄워 놓은 채 독대를 하고 있다.
그들을 보며 노신의 소설 ‘아Q정전’의 주인공 아Q를 생각한다. 아큐는 중국이 근대화로 넘어가던 과도기의 희생자다. 아Q라는 이름도 상징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중국은 이름자에 영어 글자 하나 안 들어가면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할 만큼 개화에 열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뿌리도 없는 자신의 출생을 가지고 마을 사람들이 놀리는 게 싫어 근사한 족보를 꾸며낸다. 그것은 돈을 주고 사는 수완도 아닐뿐더러 남의 집에 양자로 입적하는 합리적이고 절차적인 방법도 아니다. 그냥 마을의 유지와 가까운 친척이라고 거짓말을 떠들고 다닌다. 하지만 그 거짓말은 금방 들통이 나 오히려 마을 유지의 명예를 손상시킨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가진 것도 없이 동네 사당에서 겨울을 나는 그는 벌금에 해당되는 여러 가지를 마을 유지와 촌장에게 바치고 만다.
아큐의 삶은 늘 그렇다. 속이 뻔히 보이는 잔머리만 굴리다가 사람들에게 당하고 손해를 본다. 또한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아큐는 쓸데없는 자존심은 높아서 싸움에 질 때는 정신적인 승리법으로 자신의 비겁함을 합리화시킨다.
마을에 혁명 기운이 불자 혁명이 무언지, 세상으로부터 왜 그런 기운이 닥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덩달아 혁명한다고 날뛰고 다닌다. 마치 이번만은 자기도 세상으로부터 절대 소외당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듯 마을로, 비구니만 사는 절로 뛰어다니며 혁명을 해야 한다고 부추긴다.
그러나 혁명의 기운이 사라지고 다시 정부가 정립되자 혁명을 주도한 세력의 색출이 시작된다.
정작 혁명에 가담했던 마을 유지는 빠지고 아큐는 혼자 모든 죄를 뒤집어쓴 채 총살을 당하고 만다. 우리는 아큐를 읽으면서 그의 어리석음과 번번이 당하는 창피와 손해를 비웃어 주지만 그런 아큐는 우리의 모습이지 않을까.
지금 우리가 의연하지 못한 채 휩쓸려야만 하는 여러 가지 이상한 기류를 볼 때 우리 시대도 어쩔 수 없이 아큐 같은 사람들로 꽉차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
나스닥이 어쩐다고 코스닥이 떨고 미국 부시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세계가 흔들리며 나라의 미래를 점쳐야 하는 아큐들. 부시의 취임식 날 거창한 초청장을 받은 듯 미국으로 단숨에 날아간 우리 나라 의원들을 보면 마치 아큐가 마을 유지의 친척이라고 거짓 자랑을 하며 우쭐해 했던 모습과 영락없다. 부시와 악수 한 번 했다고 그의 족보가 달라질까. 기념사진 찍고 아큐처럼 거들먹거리면서 사무실에 걸어 두는 어리석음을 본다.
염색을 하지 않으면 완전한 백발인, 주식 투자에 목숨 건 남자를 보면서 우리 시대의 또 다른 아큐를 떠올린다.
│권남희 작품론│
생명·삶·문학의 아름다운 어우름
―권남희의 수필세계
최 원 현
삶은 수많은 만남의 흔적이다. 사람, 시간, 자연,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그런 만남에서 행복하기도 하고, 고통을 당하기도 하고, 사람은 그렇게 원하건 원치 않건 수많은 만남 속에 살아간다. 수필은 그 만남의 이야기다. 한 수필가의 수필을 읽는다는 것은 그런 만남의 행적 내지 내용을 나의 만남과 비교하며 희로애락에 공감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니 수필은 체험의 문학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체험이란 굴레에 묶여 자칫 자유롭지 못한 글쓰기가 되거나 누구나 아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수필의 격을 떨어뜨리거나 여타 문학의 여기란 말에 반박도 못 하며 좋은 수필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의 의기를 소침케 하기도 한다.
우리 삶에서 만남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그 소중한 만남 곧 삶의 체험을 문학으로 승화시키는 수필은 문학 중의 문학이 아닐 수 없다. 체르니셰프스키는 “생활은 곧 미다”라 했다. 삶 곧 만남은 여러 색채를 지닌다. 저마다 지닌 색깔들과의 만남 속에 흘러간 시간의 흔적들을 수필이란 ‘미’로 재생해 낸다. 그래서 수필은 대단히 부담스럽기도 하다. 순수 창작이라기보다는 자기 삶과 체험을 문학이란 이름으로 진솔하게 공개해야 한다는 이중 부담의 문학이다. 여느 장르보다 더 기술적인 글쓰기 작업이 필요하다.
경영학계의 지성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피터 드러커 박사는 “어떤 시대에서도 인간이 특정 분야에서 한 획을 그을 정도로 대가의 반열에 들기 위해서는 숙련 상태가 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선 반드시 일정 기간 동안의 집중적인 연마 과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이런 숙련상태를 ‘탁월’이라 했는데 그것은 “인간의 마음과 손과 정신의 질에 관련된 문제”로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오직 인간만이 지불할 수 있는 노력, 결단, 양심의 대가(代價)라고 했다. 따라서 장사를 하건, 운동을 하건, 공부를 하건, 어떤 분야에서 탁월함의 경지란 “한 인간이 전부를 걸 정도로 전력투구할 충분한 기간을 가질 수 있느냐 하는 점”이라고 했다.
어떤 일이건 집중적으로 에너지를 모아서 한 가지 목적을 향해 매진할 때에 비로소 원하는 해답도 얻게 되는데 이러한 선택과 집중은 경영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문학에서 더욱 필요할 것이다.
문학에서 어느 장르가 특별하다 할 수 있으랴. 어떤 작품, 그것이 시건 수필이건 소설이건 빼어난 작품이라면 그 작품으로서 오히려 장르가 돋보일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의 천재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피나는 노력의 대가로 문학을 이루어 낸다. 수필인구가 급증한 현실에서 수필 장르의 문학적 위치가 여태 시나 소설보다 약하다고 생각된다면 아직도 좋은 작품, 피터 드러커가 경영에서 말한 것과 같은 집중적인 연마가 부족하여 문학적 탁월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고, 그래서 그런 탁월한 작품이 생산되지 못한다는 말일까.
권남희 수필을 만난 것은 기쁨이다. 무엇보다 그는 열심히 수필의 숙련을 위해 쉼 없이 연마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피터 드러커 말대로 “인간의 마음과 손과 정신의 질에 관련된 문제”에서 집중적으로 에너지를 모아 한 가지 목적을 향해서 매진하며 원하는 해답을 얻는 이러한 선택과 집중의 전력투구에서 권남희는 ‘탁월’을 향해 부단히 한 길을 내닫는 작가라는 것이다.
그는 대학 주최 문학상 공모에서 소설 입선을 했었으나, 1987년 『월간문학』에 수필이 당선되면서 본격 수필만을 쓰고 있는 수필가이다. 대표에세이 회장, 송파수필문학회장, 한국수필문학상 수상의 문단경력답게 그의 수필문학을 향한 열정은 대단하여 이미 수필집 『미시족』 『어머니의 남자』 『시간의 방 혼자 남다』 등 수필집과 『글쓰기를 돕는 창의력 그림 자료집』, 『실전 논술쓰기 33가지』 등 글쓰기 자료집을 출간했고, 현재 MBC 롯데잠실, 광명시 평생학습원, 성북여성회관, 서울시 교사연수회 등에서 수필창작과 문학특기 적성지도를 하고 있다.
그런 그여서일까.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제일 먼저 느낀 것은 삶이 곧 문학임을 아는 작가, 아니 자신의 삶을 문학과 더불어 가꾸어 가고 있는 작가라는 것이다. 그는 삶과 문학을 똑같은 비중으로 끌어안고 아주 조용하게 그러나 그냥 보통으로가 아닌 ‘탁월’을 향해 나아간다. 그래서 그에게서 삶과 문학은 똑같이 숨 가쁜 생명의 몸짓이다.
1. 권남희의 수필
소설을 쓰기 원했던 그는 이야기가 있는 수필을 쓴다. 그가 지금까지 낸 수필집 제목인 「미시족」 「어머니의 남자」 「시간의 방 혼자 남다」만 보아도 수필집 제목으로보단 다분히 소설(집) 제목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이야기꾼으로 수필을 만든다. 만든다는 의미는 의도적이고 구조적이라는 말이다. 그만큼 그는 수필쓰기에 심혈을 기울인다는 말이다. 그에게 수필은 자연스러움이 배어나는 조형물이다. 생명이 있는 그만의 집을 짓고자 한다. 생명이 없는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래서 그의 마음과 머무는 시선에선 늘 따뜻함이 묻어난다. 그의 삶의 이야기들은 처음 학교에 온 초등학교 신입생이 선생님의 구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 같은 신선함으로 조화를 이룬다.
이상과 실제, 현실과 소망, 그것들은 한결같이 권남희에게는 쓴 나물과도 같았다. 먹어야 하되 먹으면 쓴맛이 나는, 그렇다고 먹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 그것을 붙들고 권남희는 포기와 수용과 극복을 함께 어우르며 삶이란 이름의 천을 짜낸다. 그것은 경험적인 이미지를 심상으로 통하게 하여 언어의 조탁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난해하지 않되 친근감이 있으면서 부드러움도 지니게 한다. 그러한 정서는 잠재된 재능에 따라 다양성을 연출해 내게 되며 이는 삶에 대한 보다 진실한 응시와 수용의 이해를 통해 스스로를 의미 있게 한다.
그가 자선한 다섯 편의 수필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1992) 「버리며 사는 나날」(1987) 「바람 든 무로 굴러본 세상」(2003) 「참는 것에 대한 분노」(1997) 「주식시장의 남자들」(2000)은 작품적 대표작이라기보다 그런 자기 삶의 다섯 부분을 보여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이야기가 있는 수필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에서 그에게 고향은 열아홉 살바기 소녀의 눈에 비쳐진 하나의 풍경이다. 그 풍경 속에 갇혀 있는 자신과 어머니는 자식을 싣고 무정하게 떠나 버리는 기차를 뒤쫓아가는 무성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작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개량도 안 된 아궁이 앞에서 누런 광목 앞치마를 두른 채 밥을 짓고 있을 어머니” 그 어머니가 보고 싶어 “한밤중에도 벌떡 일어나 하숙방 한구석에 웅크린 채 눈물 찔끔대던” 열아홉 살의 소녀, 그런데 그런 소녀가 스물을 갓 넘긴 어느 날 엉겁결에 안겨 주던 손녀를 받아 든 사십대 초반의 어머니, 어머니는 그렇게 자신의 삶이기보단 타인을 위한 존재였다.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에서 작가는 자신에게로 돌아올 어머니의 삶을 두려워한다. “나는 어인 일인지 자꾸만 어머니가 있는 고향을 낯설어 하며 두려워한다.” 그것은 고향에 대한 두려움이기보단 ‘어머니의 성’이 자꾸만 자신의 성이 되는 것을 부정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등불은 있지만 내 젊은 어머니가 걸어 둔 등불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의당 없을 것, 보이지 않을 것으로 알면서도 굳이 ‘보이지 않는다’란 표현으로 무언가에 정당화시키려는 듯 좀 의뭉한 몸짓을 한다. 기실 그에게 고향은 현실적인 것으로보단 상징적 의미로 더 크게 의미화되고 있음이다. 살을 에는 겨울바람 속에 홀로 서 있는 듯 서러운 어머니는 바로 작가가 서 있는 살을 에임의 현실이고 어머니란 이름의 자신이었던 것이다.
「버리며 사는 나날」은 그의 등단작이다. 그러니까 이 다섯 편 중 제일 먼저 씌어진 작품이랄 수 있다. 그런데 ‘버림’의 이야기다.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이 오히려 애착에 가까운 얘기라면 그보다 훨씬 전 곧 훨씬 나이가 덜 들었을 때의 작품인데 ‘버림’은 작가의 삶의 변화를 읽게 한다. 「버리며 사는 나날」은 30대의 작품이다. 그는 20대 초반에 어머니가 되었다. 어머니는 40대 초반이었다. 20대 초반에 어머니가 되었던 그는 그만큼 삶의 행복과 아픔과 슬픔과 고통 그리고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아주 일찍이 파악케 되었던 것 같다. 그에게 10년여의 세월은 어쩌면 다른 사람의 30년 세월보다 더 길고 많은 내용이 담긴 세월이었으리라. 그런 그에게 구두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단순한 구두로서의 기능성 의미가 아니라 그의 삶 곧 희망, 꿈, 희로애락을 함께한 생명의 존재였다.
처음으로 교단에 설 때의 떨림을 달래며 신중하게 골랐던 구두였다. 그 구두는 출근 시간 전 시아버님이 닦아 두어서 앞부리가 유리알처럼 빛났다. 현관 밑 디딤돌이 대리석이라 차갑다며 난로 옆에 두었다가 신게 하셨다. 만원버스를 타고 가며 구두를 밟히지 않으려고 애쓰던 기억이 새롭다.
―「버리며 사는 나날」 중
남편의 대학축제 때 신고 갔던 구두다. 복고적이고 클래식한 분위기가 내 마음처럼 남아 있다. 모닥불과 솜사탕 그리고 잔디에 어우러져 피어 오른 청순한 젊음의 러브 로망이 살아 숨쉬는 듯하다. 슈베르트의 ‘숭어’처럼 생동감 있게 파닥거리면서…….
―「버리며 사는 나날」 중
얼마나 행복하고 아름다운 추억인가. 처음으로 교단에 서는 날 신기 위해 산 구두, 그 구두를 시아버지가 닦아 주는 것뿐 아니라 난로 옆에서 따뜻하게 데워 주며까지 며느리의 첫 출근을 축하하고 격려한다. 천 마디 말보다 더한 사랑의 표현이다. 그 시아버지의 사랑을 품고 행여라도 그런 신발이 만원버스에서 밟혀 더럽혀질까 봐 애쓰는 모습이 영화의 화면처럼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가. 그래서 권남희의 수필이 이야기가 있는 수필이라 했다.
그런데 “언제까지나 내 소유의 공간만 채우고 넓히며 살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런 아름다운 추억, 젊음의 러브 로망도 아름답지만 두 아이의 어머니로서 사는 삶이 더욱 아름다울 거라고 생각한다. 그의 결론은 “아름다운 추억들이 담긴 구두를 버린다고 해서 내가 가진 순수를 잃게 되거나 마멸당하지는 않을 거라는 자신이 선다.”였다. 물론 그렇게까지 꼭 버려야 하느냐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작가는 다른 하나를 택하기 위해서 그걸 버린다고 했다. 그것이 ‘마음의 여유’라고 했다. 언제까지나 내 소유의 공간만 채우고 넓히며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버림의 미학은 새로운 단계로의 비약이다. 어쩌면 그는 이 작품을 통해 그때까지의 삶의 단계 하나를 정리하고 새로운 한 삶을 열고자 한다.
「바람든 무로 굴러 본 세상」은 작가의 30대 이야기다. 30대는 작가에게 상당한 시련과 엄청난 변화의 때였다. 하기야 어느 누구에게건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의 30대는 다 그랬을 것이다. 권남희는 그런 그때의 삶을 ‘바람든 무로 굴러 본 세상’이라 했다. 왜 그는 하필 “자식 하나 건사 못하고 늙어빠져 혼자 궁글어 댕기는 영감탱이” 같다는 어머니의 푸념 속 대상에서 자신이 그런 존재라고 생각했을까.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되고 아내가 되고 주부가 되어 삶을 꾸려 갈 수 있었던 힘은 믿음이었을 것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은 희망이고 사랑이고 생명의 불길인데 그 믿음을 잃어버리게 되자 그는 힘없이 주저앉고 만다.
‘여우하고는 살아도 소하고는 못 산단다.’ 나의 반쪽은 내게 함부로 말을 해대며 이리 차고 저리 굴렸다. ‘네가 망가질수록 좋고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어느 날부터 나는 삶을 함께 하는 반려자가 아닌, 소보다 못한 천덕꾸러기였다. 천성적으로 타고난 무뚝뚝함과 눈치껏 아부하지 못하는 나의 태생을 원망하기도 했다. 가슴에 구멍이 숭숭 뚫려 버려 밀도가 없어진 내 생활은 어떤 삶의 양식에도 중심을 두지 않은 채 바람을 탔다.
―「바람든 무로 굴러 본 세상」 중
그가 맞은 상실감, 그는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속이 꽉차서 단단한 무 같은 존재라 생각했는데 한 순간 그에게 다가온 상실감으로 하여 그는 여지없이 가슴에 구멍이 숭숭 뚫려 버린 무 같은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정말 바람든 무였다. 그러나 그로 인한 그의 방황은 바람든 데다 강추위에 어는 꼴로 더욱 초라해졌다. 그런데 권남희의 문학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일어섬’이라는 데 있다. 수필이 인간의 문학이라는 것도 그렇지만 그는 사람에게서 해답을 찾되 그것도 꼭 자기로부터 해법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대 마음에 와 닿을 수 있는 것은 나무도 아니고, 강물이나 동물도 아니다. 그대 마음에 위로가 되는 것은 오로지 그대와 같은 존재들뿐이다.
―헤르만 헤세 시 「어디에도 위로는 없다」 중
어쩌면 권남희는 40대가 되기까지 다른 사람들과는 거꾸로의 삶을 살았는지도 모른다. 사춘기 때는 사춘기가 뭔지도 모르게 지내 버리고 사춘기가 한참 지난 후에야 남들이 다 겪고 다른 삶으로 살아갈 때 사춘기를 앓는 것처럼 권남희는 그렇게 20대와 30대를 살았던 것이다. 권남희의 아픔은 그 시대 공통적 아픔일 수 있지만 그는 늘 그렇게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곤 했다.
「참는 것에 대한 분노」에서 그는 상실의 아픔을 말한다. 여성에게 있어서 ‘참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타의적인 멍에인가에 분노한다. ‘순종’과 ‘참음’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던 그에게 그것을 가장 아름답게 보아 주리라고 생각했던 남편으로부터의 동의마저 잃고 오히려 그것이 자신이 바보스런 존재로 보여진다는 사실 앞에 배반을 느끼는 순간 참았던 분노가 일어난다.
그는 맏이이기에, 누나이기에, 배웠으니까 참아야 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압력에 순명하는 자세로 살아왔다. 그것은 오직 하나 남편만은 그런 자기를 충분히 이해할 것이고 그런 자기를 대단한 존재 고마운 존재로 생각할 것이기에 그에 대한 믿음은 격려와 사랑이 되어 그를 지탱케 하는 힘이었는데 그게 아닌 것을 발견하면서 결국 분노하고 만다. 그의 분노는 상대에 대한 것이기보단 지금까지의 자기에 대한 것이다. 그는 자기 외의 다른 누구도 원망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대단히 비정할 정도다.
권남희의 수필은 그래서 자신의 생각을 터트려 버리는 것으로 독자를 시원하게 한다. 슬픔조차도 통쾌하다. 슬픔의 미학이다. 그는 슬픔을 통해 아프고 고통스럽고 원망스런 자신을 정화시킨다. 메아리 같은 잔잔한 여운보다는 화통한 마무리, 답답하던 가슴이 뚫어지는 시원함을 준다. 그의 슬픔, 아픔으로부터 그렇게 탈출 한다. 그렇게 희망을 연다. 산의 정상에 올라 목청껏 ‘야호’를 외치는 것처럼 숨막힌 가슴을 열게 한다. 그래서 슬퍼지다가도 밝게 돌아온다. 눈물이 얼굴 가득 열린 채 웃게 한다.
「주식시장의 남자들」 또한 그렇다. 그는 노신의 소설 「아Q정전」의 ‘아Q’를 화자로 불러들인다. 남편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을 대신하여 아큐를 내세운다. 약간의 시험적인 시도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데 제3자적 위치로 물러나 앉아서 다른 화자를 통해 역시 3자적으로 말하게 하는 소설적 기법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수필적 문제가 있다. 서정수필은 일반적으로 자기에게로 돌아오는데 그렇지 못하고 엉거주춤 바로 앞에서 머물러 버리면 ‘수필적 화자=나’에서 ‘소설적 화자=그’처럼 되어 버려 ‘나의 감동’과 ‘그의 감동’의 차이를 보이게 된다. 이는 내포작가와도 다른 의미의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어디에선가 나로 돌아오는 장치를 만들었을 때 수필의 감동은 작가나 독자에게 다 같이 ‘나의 감동’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수필이 필요 이상의 많은 대화체 문장으로 채워져 버렸을 때의 허전함과도 같은 것이다. 하기 어려운 내 이야기일수록 추하거나 야하지 않게 그것을 오히려 슬프거나 고통스러운 아름다움으로 승화해 내는 갈무리의 기술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시험적 글쓰기가 어려운 것이다. 짧은 수필 한 편 속에 어떠한 경로로든 남의 이야기가 자리를 크게 차지해 버리면 결국 내 자리는 그만큼 없어져 버리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의 감동’이 아니라 ‘그의 감동’을 전하는 역할밖에 안 되는 것이다.
3. 권남희 수필의 메시지
이상 살펴본 다섯 편의 수필을 통해 권남희의 수필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서두에서 언급했듯 삶은 만남이고 수필은 그 만남의 이야기다. 만남의 이야기는 희로애락의 여러 색깔과 무늬를 지닌다. 뿐 아니라 떫기도 하고 쓰기도 하고 달기도 하고 까칠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 맛이 바로 독자에게 전해지는 맛거리 곧 감동이다.
권남희는 자연스럽게 읽히되 의도적인 수필을 시도한다. 씌어지는 수필보다 쓰는 수필 쪽이다. 그의 가슴에는 한이 많다. 그만큼 꿈도 크고 욕심도 많다. 마음도 급하다. 권남희는 삶과 문학을 동일시한다. 독립된 분리의 상태가 아닌 하나인 삶과 문학, 그래서 그의 수필은 투박하고 설익어 보이기까지 한다. 삶이란 어느 누구에게나 생소한 것으로 매끄러울 수가 없는 것이다. 참으로 말하기 어려운 쑥스러운 자기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마냥 매끄럽게 써낸다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런데 권남희는 과감하게 이를 써낸다. 마치 수필 속 화자가 자기가 아닌 지어낸 소설 속 화자인 양 써낸다. 그는 문학을 함에 있어 상당히 전투적이다. 치열하다. 묵묵히 담아 둘 때는 그냥 없는 것처럼 담아 두지만 정작 써야 한다고 생각하면 거침없이 과감하게 써낸다. 그에겐 ‘적당히’라는 게 없다. 늘 자신이 해야만 할 일로 몫을 짓는다.
특히 수필에 대한 그의 사랑은 유별나다. 수필 강좌를 한다는 개연성 때문이 아니라 수필을 쓰는 사람, 수필을 쓰고자 하는 사람은 최소한의 목표를 ‘드러커’의 ‘탁월’에 두고 글쓰기에 임하고 또 그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당위성을 주장한다. 한 가지 평자가 그의 수필에 ‘과감’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조금은 거칠다는 뜻이다. 여성적 섬세함과 부드러움이 있는가 하면 남성적 거칠음이 느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의 수필들이 가슴 아리도록 슬프면서도 재미있고, 잡으면 읽고 또 읽게 되는 것은 그 거칠음으로 느껴지는 그의 화통함과 활달함이 마력처럼 독자를 붙들기 때문이리라. 이야기가 있고 표현이 거친 것 같으나 재미있고, 문장이 거침없는 권남희의 수필이 독자의 사랑을 받는 이유이리라.
권남희는 근원적으로 인간 본질의 자유로움을 추구하면서 본성적 야성이 인간 실존에 삶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 뿐 아니라 자아와 삶의 지각으로 새로운 생각을 낳고 순수 곧 진실을 향하여 삶을 펼친다.
다섯 편의 수필은 그의 다양한 삶의 지극히 작은 한 부분을 본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가 수필을 향해 어떻게 진력하고 있는가를 쉽게 판단할 수 있다.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다양하게 글감과 주제를 펼쳐 나가는 수필쓰기, 그에게서 평자는 ‘집중적인 연마’의 자세와 ‘탁월’의 예기를 내다본다.
그의 수필쓰기는 더욱 새로운 시도와 연마로 자신을 발전시킬 뿐 아니라 수필이 안주하는 것을 참지 못한다. 그에게 있어서 수필은 먹고 살게 하는 삶일 뿐 아니라 수필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생명의 몸짓이요 끈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그는 누구보다도 수필에 목숨을 걸고 쉬지 않고 나아감이리라. 그게 권남희 수필의 맛이기도 하다.
치열한 작가정신이 어찌 수필에는 없으랴. 그것은 수필을 경시하는 자세다. 작가가 시를 쓰건 소설을 쓰건 수필을 쓰건 그건 목숨을 거는 치열한 작업이어야 한다. 그것은 ‘드러커’의 ‘탁월’을 향한 연마처럼 끊임없는 자기희생과 투자 곧 노력을 말함이다. 권남희에게선 그게 보인다. 수필의 희망이다. 생명과 삶과 문학을 아름답게 어우르는 권남희 문학의 희망찬 내일이다.
│문학적 자전│
수필과 나
권 남 희
내 글쓰기의 정서적 배경은 수필적 접근에서 시작되었다. 왜냐하면 펜을 들고 집중적으로 무언가 쓰기에 몰두했을 때 일기와 편지쓰기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다른 문학 소녀들과 나는 본질적으로 달랐던 것 같다. 떠오르는 영감으로 시를 짓거나 풍부한 상상력으로 소설을 쓰기보다는 가족들과 헤어진 후 난생처음 맞닥뜨린 외로움에서 벗어나려고 하루에도 몇 통씩 고향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밤마다 올빼미처럼 이불 속에서 일기를 쓰면서 나를 추스르느라 버거워했다. 그런 연유로 시작한 나의 글쓰기지만 그 동안 써 온 수필의 큰 줄기를 따져 보면 세 가지로 압축된다. 외로움과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학적 글쓰기, 배신감의 고통을 이겨내려 다시 내 문제에 골몰한 채 글을 써댔던 것이다. 이쯤 되면 나의 글쓰기는 무언가 늪에 빠질 때마다 나를 건져 올리는 심정인 ‘극복심리’가 작용하고 그럴 때마다 끄적이는 일이 왕성하게 이루어졌다고 해야 옳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나는 글쓰는 아이가 따로 있는 줄 알았다. 항상 백일장에 나가서 상을 받고 돌아와 전교생이 있는 자리에서 상을 탄 작품을 읽는 친구는 정해져 있었고 나는 미술반 활동을 하고 있었다. 딱 한 번 내가 쓴 글을 인정받은 일이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국어 선생님이 국어 시험 대신에 시짓기를 한다며 ‘세월’이라는 제목을 주었다. 제목이 너무 어울리지 않고 낡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던 나는 장난기를 섞어서 세월이 너무 빨라서 ‘장군이 쏜 화살 같구나’ 그런 탄식을 애늙은이처럼 늘어놓았다. 선생님은 그 글을 잘 썼다며 높은 점수를 주었는데 그것이 글쓰기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나의 고등학교의 글솜씨는 그걸로 끝이었다.
외로움
대학생활은 부모에게서 벗어나는 자유를 선물했지만 대신 한동안 감당하기 힘든 외로움도 함께 주었다. 하숙생활을 하는 동안 가족과의 이별이 무엇인지 서서히 깨달아 가며 소외감과 고독에 몸부림치는 나날을 보내야 했다. 용돈이 넉넉하지 않고 아르바이트라고는 학생을 가르치는 일이 전부였던, 여간해서 공부를 잘하지않고는 그런 자리를 얻지 못하던 그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어쩔 줄 몰라 하며 카뮈처럼 청춘을 몽상과 방황에 바친 채 흔들렸다. 비로소 세상이 얼마나 나를 비참하게 만들고 사랑을 주지 않는 매몰찬 곳인가 깨닫고 있었다. 인간이 지닌 ‘모순’에 우울해 하며 주기적으로 찾아드는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혼자 지내면서 일기 쓰고 편지 쓰는 일에 대학생활의 반을 보냈다. 헤세와 전혜린, 루이제린저의 글을 일기장에 베끼면서 수시로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달랬다.
삶에서 느끼는 모순과 부조리를 꼬집으며 역설적으로 한 젊은이의 순수한 영혼을 말하려 했던, 치기 어리고 저항적이었던 글을 소설의 형식을 빌려 대학문학상에 투고했는데 그 원고를 오탁번 교수님이 뽑아 주셨다. 그 뒤로 나는 교내에서 글쓰는 친구로 통했고 한동안 신춘문예병을 앓기도 했다.
죄책감
교통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지금까지도 나는 빚을 졌다는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다. 전적으로 딸을 믿어 주고 서울에서 공부하는 딸이 대견해서 허리가 휘는 줄도 모르고 농사를 지어 학비와 용돈을 보냈던 아버지에게 나는 치명적인 상처를 주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 남편과의 자취방 동거와 임신 사실은 졸업식장에서 탄로가 나고 그 사실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충격에 빠트리고 폭삭 늙게 만들었다.
하늘이 무너졌다는 편지를 내게 보낸 후 아버지는 맏딸을 향한 마음의 문을 닫았다.
그 후유증은 막내 여동생에게 남아 절대 마지막 딸은 서울에 보내지 않는다는 으름장과 대학도 보내지 않을 거라는 화풀이식 언사가 주기적으로 터지는 바람에 여동생은 아직도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혼자 살아가고 있다. 언젠가 여동생은 내게 ‘너 때문이야’라는 외마디 비명을 질러대며 내면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그것까지도 내게는 죄의식으로 남아 늘 마음이 아프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자 나는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렸다. 맏딸로서 만회할 기회를 영영 잃은 나는 다시 글을 쓰며 아버지를 생각하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더듬으며 아버지 일생을 책으로 내리라 결심했다. 틈틈이 아버지에 대해 써 두었던 글이 바탕이 되어 한국여성문학인회 주최 전국 여성 백일장에서 상을 받아 등단의 계기를 만들었다.
귀신보다 무서웠던 ‘배신’
남편은 결정적으로 나에게 작가활동을 하도록 원인을 제공해 준 사람이다.
남편의 혈액형은 B형이다. 요즘 ‘B형 남자’ 노래를 부른 모 가수 때문에 B형 혈액형을 가진 남자에 대해 의견이 많고 연예인에게 많은 B형 남자와 바람기에 대해서도 의견이 많다.
굳이 혈액형을 빗대서 따지고 싶지 않지만 남편은 연애를 할 때는 좋은 사람이다. 싫증을 잘 내고 기분파에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써 가며 이런 저런 재미를 주기 때문이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강한 의지까지 갖추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어디 그런 완벽한 남자가 있을까.
시부모를 모시고 살아가는 일도 쉽지는 않았는데 이혼한 손위 누님과 결혼한 시동생 부부까지 같이 사는 상황에서 남편은 늘 내 편이 되어 주지 않은 채 귀찮은 상황은 일단 피하려 들었다. 게다가 손위 누님과 잘 알고 지내면서 우리 집에 드나들던 여자와 사랑에 빠진 남편은 결혼생활에서 일어난 모든 문제를 나에게 떠넘겼다. 그 파장은 일파만파가 되어 나의 존재는 벼랑 끝에 몰리고 있었다. 게다가 일거수일투족을 그 여자와 비교당해야 하는 절망에 짓눌리고 그의 비겁함과 무책임함, 배신에 기진한 나는 물만 마셔도 토할 만큼 충격을 받아 마르고 초췌해지면서 이대로 죽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든 견뎌내야 했는데 길은 그와 있었던 일을 글로 써서 결코 잊지 않는 것이었다. 아이들을 붙잡고 살아야겠다는 의지와 함께 다시 나의 극복심리가 글쓰기 쪽으로 움직였다.
나는 공부하는 것이 나를 살리는 길이라는 집념으로 문학공부를 하러 다녔다.
수필인의 길
등단한 지도 20여 년이 되어간다. 그 동안 존경하는 선배작가도 만나고 수필집도 3권 냈다.
수필쓰기 지도도 하지만 누군가를 지도하는 일은 자신을 단련시키는 또 다른 방법일 뿐이다. 글쓰고 책 읽고 공부하는 일은 즐겁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강하게 단련시키는 도구로 삼을 수 있어 외롭지 않다.
수필을 쓰면서 나는 자신을 치료하고 내면을 키우고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한 나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지금까지 쓴 수필이 내 아픔을 달래고 타인에게서 같은 공감대를 끌어내는 일상의 이야기였다면, 이제부터는 폭 넓고 깊은 안목을 가지고 자신을 좀더 객관적으로 투영하면서 베이컨처럼 시공을 초월하는 수필을 쓰도록 노력해야겠다.
2004년도 하반기 신인상
초헌(初獻)의 의미 외2편
소진기
우리 나라는 장자상속의 유풍(遺風)이 지배해 온 나라다. 아마도 3대의 제사를 장자가 모실 수 있도록 선대의 재산을 물려주려는 조상들의 현명한 의도가 아닌가 생각된다. 간혹 장자 중에는 재산만 물려받고 도리를 다하지 않는 망나니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나는 위로 형님이 한 분 계신데 형님께서는 장자 노릇을 썩 잘해 오고 계신다. 재산을 물려받지 않고도 장자라는 이유로 아무런 불평 없이 정성껏 제를 올리는 형님은 정말 조상신이 계신다면 천복을 받지 않을까 생각된다.
기일이 되면 특히 형님의 표정은 무척 근엄한 것이어서 나 또한 절로 근엄해지기 마련이다. 어떤 날엔 질펀한 술자리를 끝내고 업무상 늦었다는 이유를 들이밀면 “아! 그랬나?”하시는 것외에는 아무 말씀이 없으실 정도로 타인에게 관대하고 법 없이도 살 분이 우리 형님이시다. 물론 술을 먹고 제사에 참석했던 적은 아주 오래 전 총각시절이라 자애로우신 조상님들도 이미 면죄부를 주셨다. 물론 내 마음대로의 생각이지만 귀여운 손자에게 벌이라도 내리시겠는가.
우리 집안은 소(蘇)씨 가문의 정통을 잇는 장자집안이라 옆으로 아무리 봐도 형님이 제주(祭主)가 되신다. 안타깝게도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족보는 아주 오래 전에 사라졌다. 돌아가신 아버님은 “네 할아버지가 돈 몇 푼에 어디로 넘기셨다”며 거의 진실에 가까운 말씀을 자식들에게 해 주셨는데 어린 마음에도 참으로 딱하게 여겨져 아쉬워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어린아이의 족보에 관한 질문을 그저 슬쩍 넘기지 않고 거의 진실에 가까운 말씀을 해 주신 부친의 의도는 너희들은 그런 식으로 살지 말라는 교훈을 주시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그리 탓할 일도 아닌 것 같다.
어찌 됐든 나 또한 어릴 때부터 제사지내는 모습을 일 년에도 여러 번씩 보면서 자랐고 유풍에 젖어 왔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어릴 때부터 제사를 모실 때의 근엄함은 애국가를 부를 때나 개천절 날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보다 더 엄숙했으면 했지 덜했던 적이 없었다. 결혼 후에도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제사에 참석해 오고 있는데 누구나 그러할 것이지만 나 또한 으레 가족의 건강이라든지 명복이라든지 내 개인의 출세를 빌어 본다.
어떤 때는 다소 쑥스럽기도 하고 미안스럽기도 하다. 알고 보면 빌어서 될 일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또 가만히 생각해 보면 조상님들께 내가 특별히 해 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돈을 많이 벌어 큰 비석을 세워 드린 것도 아니고 벌초에 충실히 임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근엄히 빌고 열심히 머리를 조아리면 아니 한 것보다는 마음이 편하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 같다.
처음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께 술잔부터 올리며 절을 하는데 소원과 명복을 비는 강도는 그리 간절하지 않다. 아마 직접 얼굴을 뵌 적이 없어 현실감이 없기 때문일까? 그러고 보면 기독교나 불교를 믿는 자들도 그들의 신을 대면한 적이 없을 건데 지극 정성인 걸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넘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아버님, 어머님 차례가 오면 다시 옷깃을 여미고 마음을 가다듬는다. 나의 신체발부를 주셨고 나에게 이름을 주신 분들이 아닌가. 이 때는 아직 당신들이 내 옆에 계신 것 같은 느낌이 오는데 자식 둘을 둔 나이에도 괜스레 슬퍼져 눈가에 이슬이 설핏 맺히기도 한다. 그만큼 당신들의 인생이 고단하였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몇 년 전부터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사실을 하나 깨닫고는 잔잔한 물결이 가슴을 적셔 왔다. 형님은 아버님, 어머님 차례가 오면 항상 초헌(初獻)의 영광을 나에게 주었던 것이다.
“진기야! 인자 니가 먼저 한잔 올리거라!”
나는 별생각 없이 형님의 분부를 수행해 왔었다. 그러나 단순한 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마도 형님은 조상신 중에서 가장 영검하신 분들이 아버님, 어머님이라 굳게 믿고 있던 터이었고, 나에게 초헌의 자리를 양보하여 그 영검함을 입을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이다. 미관말직의 이 아우가 그 영검함을 입어 출세가도를 달렸으면 하는 소박한 형님의 바람이 아니었겠는가?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나 족보 부존재(不存在)의 추억을 같이 소유하고 있는 형님이라는 이유 하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당신 또한 미관말직의 직장에 다니시는 분이고 바라는 소원이 많을 것임에도 그런 마음을 써 주는 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느꼈던 것이다. 형제애에 대하여 말이다.
아무튼 아직 이 나이에도 부모님이 구존하시어 재롱을 떠는 친구들을 보면 참으로 부럽고 부럽다. 부모 복이란 무엇인가? 건강하게 오래 살아 자식들이 결혼하고 난 한참 후까지 후견인 노릇을 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면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
90 먹은 아버지가 60 먹은 아들을 걱정한다고 했으니 과히 틀린 말은 아닌 것이다. 어느 전직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어 당선증을 아버지께 바치며 큰절을 올리는 장면을 방송에서 보았는데 나는 솔직히 대통령 당선이 부러운 게 아니라 큰절을 그렇게 받아 줄 아버지가 계시다는 사실이 부러웠던 것이다.
아들 준하나 정인이, 그리고 조카들이 사회로 나가 조그만 것이라도 이루었을 때 세상에서 가장 밝은 미소로 그들의 가슴을 안아 줄려면 조금은 오래 살아야겠다. 그런데 책상 위의 재떨이에는 수북한 담배꽁초가 날 조롱하듯이 바라보고 있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갈등은 이런 순간에도 오는가 보다.
이 세상의 수많은 소년, 소녀 가장들이 용기를 잃지 말고 의젓하게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순리(順理)가 아니겠는가?
수박의 소리
누가 나에게 ‘가장 맛있는 과일이 무엇이오?’ 하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이렇게 답하고 싶다.
‘익을 대로 익어 더 견디지 못하고 쩌억 갈라진 수박이 바로 그것이오.’
어린 시절, 무서움을 감내할 만한 나이가 되었을 무렵 원두막에서 수박밭을 지키는 임무가 나에게 주어지곤 하였다. 가끔씩 인기척을 내라는 선친의 엄명에 주기적으로 전등을 상하좌우로 비추고 흔들며 한여름 밤을 새우곤 했는데, 모든 감각기관이 귀에 집중되어 있는지라 거기서 듣는 풀벌레소리의 어우러짐은 들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대악(大樂)이었다.
뜨거운 여름의 열기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선선한 공기가 살갗을 보송보송하게 할 때쯤이면 저 멀리 마을의 불빛이 하나 둘씩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장면이 그림이라면 나는 제법 오랜 시간을 애잔한 마음으로 명화를 감상한 것이다.
뒷집의 불도 꺼지고 우리 집도 꺼지고 최후에 남은 어느 집의 불빛마저 꺼지면 칠흑의 밤 속에 별빛들은 더욱 찬란하게 빛났다. 이제 자연의 소리도 잦아들 때쯤 여름 햇볕에 익을 대로 익어 가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쩌-억’ 갈라지는 수박의 소리!
인생이란 게 뭔지 전혀 몰랐던 소년의 가슴에도 왠지 그 소리는 내가 들었던 어느 판소리보다 구성지고 어떤 곡조보다도 가슴에 와 닿았으니 그것도 생명의 끝이라고 느꼈기 때문일까?
미명의 아침, 그 놈을 따다 보면 그 갈라짐이, 그 결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또 한 번 감탄을 하게 된다. 밤새 찬이슬로 냉장된 그 놈의 가장 부드러운 속살을 퍼서 한입을 물면 달콤하고도 차가운 기운이 몸 전체로 퍼지며 잠자는 세포를 깨운다. 입 안엔 달콤한 첫 키스의 여운 같은 것이 남는다. 온몸이 감전된다고 해야 옳은 표현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요즘도 수박을 보면 풍요로움과 정겨움을 느낀다. 시장으로 팔려 나간 수박은 다시 돈이 되어 돌아와 내 학비가 되었으니 그렇지 않으랴!
경험상 수박은 클수록 맛있다는 것이 내 지론이지만 아내는 큰 수박을 싫어한다. 냉장고에 넣을 자리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참 합당한 이유이지만 냉장고야 내 소관이 아니므로 나는 여름만 되면 큰 수박을 사 들고 집에 들어가기를 즐긴다. 솜털이 달린 손톱만한 열매가 큰 수박으로 자라기까지의 과정을 눈으로 직접 보고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수박 맛에서 원두막의 운치까지 느낀 셈이니 수박에 관한 한 최고의 호사를 누린 셈이다.
그래서 어느 날 ‘원두막’이란 제목으로 이런 시를 썼었다.
팔월은 뜨거웠다
응달이 귀했으므로
고명 같은 바람이
흐뭇한 그늘로 불어올 때는
거기엔
원두막 언저리엔
뜨거워
속으로 뜨거워
몇 날을 익어 와
허연 엉덩이를 드러낸
아, 기다림!
하룻밤을 이기지 못하고
쩌-억
갈라져 버린 자멸(自滅).
제대로 성숙되고 익은 수박은 줄기를 단 그 기다림을, 그 인내를, 그 속내를 마지막 단 한 번 보여 주는 것이고 단 한 번 소리 하는 것이리라.
말 많은 것들과 설익은 것들이 설쳐대는 세상이다. 세상의 말없는 것들에 위대함이, 조용히 익어 가는 것들에 삼라만상의 질서가 있음을 안다. 생명줄기를 잡고 있는 내 인생이 그러했을까! 내 사랑이 그러했을까! 아직은 소리 없이 조용히 익어 갈 뿐이다.
막막한 기다림은 팔월의 햇볕처럼 아직도 내겐 뜨겁다.
내 편
텡레비전을 보다가 아내가 불쑥 아버지 꿈을 꾸었다고 하기에 나는 반색을 하고 돌아앉았다.
“밥을 차려 달라고 하셔서 밥을 차려 드렸더니 아주 좋아하시던데요…….”
평소 아내의 이야기에 건성건성 대답하던 내가 새로운 장난감을 본 아이의 눈망울처럼 적극성을 가지고 꼬치꼬치 물었다. 표정은 어떠하시더냐, 차림새는 어떻더냐, 다른 말씀은 안 계시더냐…….
아내는 생뚱맞은 얼굴로 하루가 지났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기억이 안 난다며 나의 호기심에 찬물을 끼얹었지만 나는 아내가 돌아가신 아버님께 꿈에서나마 밥을 차려 드렸다는 이야기 자체로도 충분히 흐뭇하고 기뻤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집안에는 때도 없이 황량한 바람이 불었고 어린 나는 밤마다 악몽을 꾸곤 했다. 어머님의 빈자리는 여러 형태로 가족들을 괴롭혔고 당장 조석(朝夕)의 밥상에 놓인 반찬을 보면서도 슬픔은 울컥 나의 목젖을 때리곤 했다. 당시 열다섯 난 누님이 그럭저럭 살림을 꾸려 갔으나 손맛을 내는 음식이었을 리 만무했던 것이고 아버님은 제대로 된 밥상을 대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성인이 되어 국 없이는 밥을 못 먹는 지금, 당시의 아버님을 생각하면 맥없이 쓸쓸해진다. 해장국 한 그릇 사 먹을 수 없는 농촌에서 일 년의 생계를 걱정하며 애진 마음 삭이며 한껏 취하신 후의 그 속쓰림을 어린 우리들이 생각할 수나 있었겠는가?
자식을 둘 둔 나이에 이제서야 조금씩 아버지 사랑을 느낀다. 평생 흙을 파시고 사신 당신의 어깨에 내려앉은 짐이 얼마나 무거웠으며 곡주 한잔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그 이면에 두 겹 세 겹 인간으로서의 삶이 있었다는 걸 모르고 지내 온 철없던 날들이었다. 소위 잘 나가는 아버지였으면 애달픔도 덜하리라.
그러나 어쩌랴! ‘子欲養而親不待’란 말이 이런 연유로 생긴 뜻임을 절실히 깨닫는 일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없게 되었다.
요즘엔 딩크족이 유행이라고 한다. 결혼한 부부가 아이를 갖지 않는 족속들인데 그 이유가 참 시사하는 바 크다. 요즘같이 경쟁이 심한 사회에 자기 아이를 내보내기 싫어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것이고 부부가 맞벌이를 해서 안정된 생활을 누리겠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 대한 지극한 배려의 뜻이 숨어 있는 것 같기도 하나 그렇지 않다면 고고성을 울리며 태어나 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있었을 그 아기에게는 참 불쌍한 생각이 든다. 이유 있는 이유에 대한 이유 같지 않은 설명이지만 이러한 단면이 대가족사회에서 핵가족화되고 이젠 가족 해체로까지 이어지는 현대의 신산함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자리에 누워 아내가 꾼 꿈을 내가 다시 꾸고 싶다. 그러면 그저 ‘아버지! 저, 아버지 아들 맞지요?’라고 여쭙고 싶다. 사나이들끼리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언젠가 어느 여류소설가의 산문집을 읽다가 한 구절에 가슴이 울렁거린 적이 있다.
“세상에 유일한 내 편은 아버지다. 어떤 경우라도 진정 나의 편에서 생각해 주고 도와 줄 수 있는 존재, 그것이 아버지다…….”
내 고독의 실체가 이런 것일 수도 있겠다는 발견의 기쁨도 있었다.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표현되는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이란 건 동물이라 해서 진배없을 것이다. ‘동물의 왕국’ 등 방송에서 접하는 어미와 새끼 간의 지극한 사랑에서 오히려 우리 인간들이 많은 감동을 느끼곤 한다.
우리 나라 역사에서는 왕이 되기 위하여 아버지를 죽인 경우는 없지만 중국의 경우에는 그런 경우를 흔치 않게 만나 볼 수 있다. 동물의 세계에서 새끼가 어미를 죽이는 경우를 나는 보지 못하였다.
아내가 아버지 꿈을 꾸었다고 했을 때 내가 왜 그렇게 반색을 하고 꼬치꼬치 물었는지를 아내는 모를 것이다. 아내에게는 사랑을 받을 기회가 없었던 부재의 시아버지일 뿐이지만 나에게는 세상에 유일한 내 편인 것이다.
오늘은 퇴근하면서 아들놈에게 이렇게 말해야겠다.
‘니 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