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봉의 환희와 눈물의 기도 - 박찬동
지금부터 제2차 이산가족 북측 가족으로 21번 명패를 달고 온 박찬수
형에 관한 한을 풀어본다.
그 때 형은 열다섯 살, 나는 열 살. 고모와 누나는 여자라는 이유로 형의 향학의 제물로 희생양이 되어 국민학교를 중퇴하고, 형은 시골학교에서 영주국민학교로 전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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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은 어릴 적부터 성적이 뛰어나 반에서 최우수 등급을 받을 정도로 아주 똑똑한 학생이었다. 형은 우리 집의 기둥이고 희망이며 미래였다.
형은 나를 무척이나 사랑했었다. 나도 지나칠 정도로 형을 따랐다. 밀짚으로 만든 여치집을 천정 꼭대기에 매달아 놓고 상추잎을 물에 적셔 여치 먹이를
주던 형, 마을 뒤 조그마한 연못에서 수영을 가르쳐주며 장수 잠자리를 잡아 주던 형. |
형이 친구 집에 놀러 갈 때면 나는 꼭 따라 가겠다고 집을 나섰다. 동네 한 가운데 안동어른댁 큰 배나무 밑을 지나간다. 그 배나무 가지에
옛날에 시집 못간 노처녀가 목을 메어 죽었다고 겁을 주지만 나는 막무가내로 울며 쫓아가 보면 세월이 형네 사랑방에 형친구 여럿이 모여 나를 놀림감으로 괴롭혀도 나는 형들을 좋아했다.
형은 한 살아래인 열다섯살의 순이 누나를 좋아했다. 나보고 연애 편지를 전해달라고 했었다. 나는
형의 연락병으로 형의 심부름을 시키면 거절할 줄
몰랐다.
형은 영주중학교 4학년에 다니다 전쟁을 맞았다.
뜨거운 여름이 지날 즈음 어느 날 형은 친구를 만나러 갔다 오겠다며 교복 아닌 사복차림으로 집을 나갔다. 사흘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자 어머니는 첫 돌 지난 동생 찬도를 등에 엎고 며칠동안이나
형 친구집과 친척집을 찾아 다녔으나 행방이 묘연했다. 오십년 동안이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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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께서는 한천사라는 절에 가서 무릎과 손발이 다 닳도록 형의
무사생존을 기원했고 점장이에게 퍼주기를 수십 가마. 결국 십년을
채우지도 못하고 "갑술생 찬수야 찬수야 부디 너만은 살아있어다오"
하시다가 눈도 감지 못하시고 세상을 떠나셨다.
고모님은 영주 이산면 신천이라는 동네로 시집을 가고, 누님은 같은
마을 착실한 매형감을 만나 시집가고, 나도 열아홉살에 스무살 색시와 결혼하여 형이 없는 집에 작은 말이 큰말 역할을 하게 되었다. 누이동생은 학마산 더벅머리 총각에게 주고 막내 남동생은 충남 보령 색시와 결혼시켰다. 4남매 모두 많은 자식과 손자들을 훌륭하게 키워 사회의 일원으로써 열심히 일하며 대대로 이어진 이산의 슬픈 고통을
달래가며 우리만은 한 곳에서 매일 만나며 정답게 살자고 모두 서울
하늘 아래서 이웃하며 당당하게 살고 있다.
조부모님과 부모님, 남의 부모님처럼 오래 사셨으면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형을 만나실 수 있었을텐데. 형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속에
묻은 채 세상을 떠나고 마셨으니 통곡하지 않을 수 없다. 형이 북으로
끌려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남들 앞에 나서지 못하고 납짝엎드려 차별받고 가슴조이며 살아오길 오십년. 온 가족이 기다림 속에 저물어저간 일만팔천여일의 나날들...
6.15 남북 정상간의 평양 공동 선언은 우리 이산 가족들의 오십년 가뭄에 촉촉이 내리는 단 비 바로 그 것이었다. 내일부터 새 싹이 돋아나
금방이라도 꽃 피울 듯한 희망에 찬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그 후 곧 8.15 1차 상봉때 현실로 이루어져 이백명의 이산 가족이 남과
북에서 그리던 가족들을 만나는 모습을 신문과 방송으로 보면서 마치
내 일처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제2차 상봉을 50년이나 기다렸는데 못 기다릴 이유가 없다. 더 늙기
전에 생사 확인만이라도 하면 더 한이 없을 것 같다. 이러한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데 남북관계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 식량과 돈을
보따리로 주고도 얻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을
반대한다,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도 반대한다는 등의 말들이 주변에서 들릴때면 입에 침이 마르고 혹시 이산 가족 상봉이 무산되지나 않을까 하는 조바심 속에 음식맛까지 읽어버린 듯 했다.
제2차 이산 가족 상봉(11.30-12.2) 일백명 명단중 '박찬수'형이 서울에
온다는 대한적십자사의 안내문을 받아놓은 상태에서 몸에 이상증세가 일어날 정도로 피가 마르는 기다림의 고통, 내 생애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소용돌이 쳤다.
신문의 명단 발표로 평소에 가까이 지내던 모든 사람들이 서울에서,
대구에서 부산에서 전국 각지에서 전화통에 불이 날 정도로 며칠간은
계속 축하 전화가 이어졌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더니 백만 분의 일에도 해당할 수 없는 행운을 얻었으니 기쁘고 설레이는 마음 한이 없으나 다른 이산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11월 30일 그날이 다가왔다.
세계적으로 역사적인 그 날 그 현장에 우리 가족이 영광을 함께 하고
있다. 첫 만남의 장소 21번 원탁 테이블에 형 자리를 비워놓고 우리가족 5명은 자리에 앉았다. 내외신 기자들의 대형 카메라 후렛쉬가 계속
터지고 정말 환영의 분위기였다. 우리 가족은 출입문 쪽을 향해 안절부절하며 기다렸다. 안내원을 따라 형이 나타났다. 명찰이 없었더라면 전혀 알아보지 못 했을 만큼이나 변한 형의 모습이었다, 옆 모습을
자세히 봤더니 돌아가신 어머님의 모습을 빼닮아있어 형이 틀림없었다. 잠시동안 할 말이 없었다. 아니 할말을 잊었다. 서로 얼싸안고 가슴속의 수많은 사연들을 통곡의 눈물로 풀어야 했다. 여섯이 서로 누군가를 확인한 후 형이 자세를 바로 했다. 형은 경상도 사투리를 잊었는지 "울지 말라우. 지금 이렇게 당당하게 살아왔쟎니?" 그 특유의 말
솜씨에 어리둥절하면서도 속이 상했다. 어릴 적 날 사랑하고 다정했던, 정말로 포근한 형을 기대했는데 말과 생각이 너무나 변해버린 것이다. 이렇게 첫 상봉은 내일 롯데호텔에서 만나자고 약속하며 헤어졌다. 그날 밤잠이 오질 않았다.
다음 날 두 번째 만남은 롯데호텔에서 이뤄졌다. 오기 전부터 준비 가족 사진첩, 족보, 필기구, 화장품, 약, 카메라, 라디오, 약품, 내의, 오리털 잠바, 코트 등등... 북쪽에서 추운 겨울 따뜻이 지내라고 4남매가
정성껏 준비한 선물을 큰 가방에 잔뜩 가지고 갔다."밤에 잘 주무셨습니까?" 인사를 했다, 방에서 사진도 찍고 울리고 웃기도 하면서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다 선물 가방을 전했더니 형은 북에서 가져온 선물을 내놓았다. 그 가방은 조그만 트렁크였다. 그 가방에 우리가 가져간 선물을 옮겨 담으라고 했다. 하지만 그 가방에는 우리가 준비한 선물의 반도 들어갈 수 없었다. 꼭 필요한 선물만 골라 담으며, "나는 이렇게 많은 선물이 필요없다우" 이렇게 말하셨다. 아마도 선물의 양과
질에서 규제를 받지 않는가 싶고 혹시 형이 북쪽에 가서 괴로움이 있어서겠지 하고 생각하니 더 이상 권할 수가 없었다.
호텔방에 준비된 과일 바구니는 포장도 뜯지 않았다. 형은 특별한 자존심으로 무장되어 있는 것 같았다.
점심 시간에는 호텔 만찬장으로 장소를 옮겼다. 맛있는 음식들을 들지 않고 술도 입에 대지 않으셨다. 물만 자꾸 드신다. 형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어린 나이에 전쟁통에 허리가 부러져 6개월간 기브스를
할 정도로 큰 상처를 입어 나이가 들수록 몹시 힘들고 심장이 많이 아프다"고 말씀하셔서 계속 가슴을 만지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북쪽에 마음 착한 형수와 아들 딸 남매가 있으니 내가 몸이 안 좋아
통일의 그 날까지 살지 못하더라고, 서로 자식들 간에는 우리처럼 헤어지지 말고 서로 위로하고 도우며 화목하게 살다가도록 전해다오"라며 눈물을 흘리시며 말씀하셨다. 처음 만나던 날의 당당하시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불편한 형의 모습에 너무도 애처로워 또 한번 얼싸안고 울고 또 울었다.
다음 날, 이제는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는 마지막 작별의 순간, 버스 맨 뒤편의 한 뼘쯤 열린 차창으로 반쯤 비친, 눈물과 콧물로 뒤범벅된 형의 애처로운 모습이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이 떠오른다.
욕심을 부려 한번 더 만날 수 있다면 호화로운 호텔이 아닌 고향 마을
뒷산에 잠드신 조상 님께 성묘도 하고 어릴 적에 뛰놀던 고향집 마당에 멍석을 까고 어머님 손맛 빼어닮은 누님이 만든 음식을 둘레상에
가득 차려놓고 한나절 만이라도 우리 가족 모두 모여 앉아 어릴 적 옛
이야기를, 총성과 불바다 속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살아남은 형님의 가슴 속에 담긴 하고픈 말씀을 들으며, 형님의 아픈 허리를 만져주고 위로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 아직도 간절하다.
2001년에는 어렵게 시작된 남북 관계의 해빙이 구체적인 평화와 통일을 향해 화해와 용서로 진전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면회소 설치, 서신교환, 최소한 안부만이라도 주고 받을 수 있는 그 날을 간절히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