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장점을 많이 가진 민족입니다. 무엇보다도 끈기 있는 민족입니다. 그리고 굉장히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부지런하지는 외국에 이민 가신 분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민간 분들은 아침 저녁으로 쉴 틈도 없이 열심히 일을 합니다. 그래서 다른 민족의 사람들보다 훨씬 빨리 자수성가하게 됩니다.
그러나 반면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약점도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사대주의적인 사고'입니다. 옛날부터 강대국들 틈바구니에 끼어 살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사대주의적인 사고방식이 우리의 의식 구조를 이루고 말았습니다. 사대주의적인 생각이라는 것은 '내 것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다른 나라의 것을 굉장히 좋아하는 것'입니다. 외제라고 그러면 무조건 좋아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만든 상품에도 가짜 외제 상품을 붙여서 팔아먹는 사기가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외제를 가져야 어깨에 힘을 줄 수가 있습니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꼭 외국과 비교합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는데 왜 우리만 그러느냐'고, 마치 우리나라의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고, 미개한 것처럼 생각해버립니다.
요즘 매스컴을 보면, 서울 강남지역을 중심으로 어린 학생들이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하겠다고 조기유학을 떠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말이나 우리나라 문화도 제대로 익히지 않는 상태에서 영어 하나만 잘해도 성공한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돈 좀 있다는 사람들이 앞다투어 자식들을 외국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외국에 가서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배우는지도 모르고 무조건 외국에 가기만 하면 성공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아직 사춘기도 지나지 않는 아이들을 보내놓고, 그 아이들이 마약에 빠져드는지, 음란 문화에 젖어 사는지, 그런 것은 관심이 없고, 무조건 외국에 나가기만 하면 다 된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건 정말 큰 병중에 병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의 말씀에 보면 "실로아"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실로아는 예루살렘에 흐르고 있는 작은 개천의 이름입니다. 이 개천은 모리아산 남서쪽 계곡인 기혼에서 발원해서 예루살렘을 관통해 흐르는데, 예루살렘 성전예배 때에도 사용되는 아주 깨끗한 물입니다. 이 개천을 아하스 왕 때에 "실로암"이라고 바꾸어 불렀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에 진흙을 발라 주시면서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실로암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실로아입니다.
이 실로암이라는 개천은 큰 강이 아닙니다. 아주 작은 개천입니다. 물 흐르는 소리도 나지 않을 정도로 아주 고요하게 흐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실로암을 '실개천'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비록 작은 개천이지만, 이 실로암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 그리고 언약과 축복이 들어있는 생명의 물입니다. 예루살렘에 끊임없이 생명수를 공급해 준 것이 바로 이 실로암 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백성들은 작은 실개천에 불과한 이 실로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작고 보잘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나일강에 비하면 실개천인 실로암은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3,000km 가까이 되는 거대한 앗수르의 유브라데 강에 비하면 실로암을 개천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실로암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대신에 애굽의 나일강이나 앗수르의 유브라데 강을 더 좋아했습니다. 애굽은 나일강이 있고, 앗수르에는 유브라데라는 큰 강이 있기 때문에 그 나라들은 강대국이 되었고, 자기들에게는 실로암이라는 실개천에 불과한 작은 개천 때문에 강대국이 되지 못한다고 원망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제나 미제를 좋아하는 것처럼, 유다 백성들은 앗수르와 애굽을 흠모했습니다. 애굽의 나일강이나 앗수르의 유브라데 강만 좋아한 것이 아니라, 그 강대국이 만들어 놓은 문화나 문명을 좋아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종교까지도 흠모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그것 때문에 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나니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 위에 덮을 것이라."
강대국 앗수르를 흠모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국에는 자기들이 좋아한 그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당하고 말 것이라는 준엄한 심판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주하는 땅은 하나님께서 이미 오래 전 아브라함 때부터 약속하신 땅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에 걸친 기나긴 세월 동안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마지막 도착한 곳이 바로 가나안 땅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애굽의 젖줄이라고 말하던 나일강이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는 그 땅을 떠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다른 어느 땅과는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비록 애굽이나 시나이 반도에 비하면 아주 좁습니다. 또 나일강이 있는 애굽의 목초지에 비해서 결코 비옥한 땅도 아닙니다. 비가 내려야 농사를 지을 수 있고, 물이 아주 귀한 곳이 가나안 땅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비옥한 땅이기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과 축복이 보장된 땅이기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약속의 땅이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가나안에 들어온지 600년 이상이 지났습니다. 600여년 동안 살아오면서 그들에게 가나안 땅은 더 이상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닌게 되어버렸습니다. 점점 신앙적인 의미가 퇴색되어 가고, 마침내 주변 강대국들의 땅과 비교하면서 척박한 땅이라고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불평의 궁극적인 도착지가 바로 '실로암'물에 대한 것에 까지 이르른 것입니다. 실로암 시냇물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생명의 젖줄과도 같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벨 백성들은 생명의 젖줄인 실로암 시냇물보다 애굽의 나일강이나 앗수르의 유브라데 강을 더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그 땅에 발을 들여놓을 때에는 젖과 꿀이 흐르던 땅이라고 좋아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이제 와서는 거들떠보기도 싫은 땅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까? 생명의 젖줄인 실로암 시냇물까지도 싫어하게 되었습니까?
중요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의 태도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깃들어 있는 소중한 것들을 세상적인 기준으로 판단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신앙적인 의미로 생각할 때에는 - 하나님의 언약과 축복이 보장된 땅이라고 생각할 때에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는데, 그 신앙인적인 의미를 빼버리니까, 주변에 있는 그 어떤 땅보다도 좋은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게 현실적인 생각입니다. 가나안 땅은 주변의 어느 땅보다 결코 좋은 땅은 아닙니다. 심지어 아라비아 사막보도다 더 안좋은 땅입니다. 아라비아 사막은 지금 지하에서 석유가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사막이라 거들떠 보지도 않던 그 땅 지하에 매장되어 있는 엄청난 석유 때문에 그 사막에 자리한 나라들이 지금 세계적인 갑부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 나일강이 있는 애굽이나 유브라데 강이 있는 앗수르보다 비옥한 땅도 아닙니다.
그러니 자연 불평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것들을 싫어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때로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모든 것이 다 소중합니다. 세상적인 가치로 따져서 값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만으로도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것의 소중함'을 잘 모르고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 옛 속담에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꼭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 훨씬 더 커 보이고, 훨씬 더 좋아 보입니다. 내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초라해 보이지만, 그게 다른 사람의 손에 들려 있으면 웬지 더 멋있어 보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지금의 삶과 여건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의 삶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신약에서 읽은 말씀에 보면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욕심을 부린다고 해서 현재보다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족하는 마음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인 '욕심'을 버릴 수 있게 해 줍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맞는 말씀 아닙니까?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는 우리에게, 비록 내 집은 아니라 할지라도 잠을 잘 수 있는 집이 있고, 풍족하지는 못하지만 끼니마다 먹을 수 있는 양식이 있고, 또 다른 사람처럼 값비싸고 유명 메이커는 아니라 할지라도 입고 다닐 수 있는 옷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모습으로 만족하십니까? 지금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십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우리는 절대로 만족할 수도, 감사할 수도 없습니다. 지금 내게 베풀어주신 것만 바라볼 때에 만족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제가 결혼하고 나서 반지하 단칸방에서 살았습니다. 전도사로 봉사하고 있었는데, 심방을 할 때 제가 그런 유혹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때로 심방을 가다가 우뚝 우뚝 서 있는 아파트를 보면서 '서울 시내에 이렇게 많은 좋은 집들이 있는데, 나는 왜 단칸방 밖에 없을까? 그것도 650만원짜리 전세로...' 그런 생각을 하면 제 자신이 얼마나 초라해지는 모릅니다.
동년배의 교인들을 심방할 때 보면, 방 세 칸 짜리 빌라에 살면서 방이 남아 돌아 '방 한 칸을 창고로 쓴다'는 말을 들을 때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좁은 단칸방에 책상 하나 들어놓고 나니까 남은 공간이라곤 부부가 잠잘 곳밖에 없어서, 책을 박스에 넣은 채 쌓아 놓아야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방이 남아돌아 창고로 쓴다니. 그런 생각이 들면 그 날 심방을 하고 기쁘게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전혀 기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집에 와서 혼자 참으로 많이 회개를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니까 내 자신이 그렇게 초라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어떤 모임에 갖다 오면 부부싸움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 사는 모습을 보면서 괜히 속이 상해서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습니다. 좋은 집에 사는 친구를 만났다 오거나, 옛날에는 나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던 친구가 나보다 훨씬 더 화려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 속이 상합니다. 우리 같이 지방에 살다가 어느 날 도시에 사는 친구를 만났는데, 즐길 것 다 즐기면서 사는 모습을 보니까,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내 인생을 망친 것같아 바가지를 긁습니다. 나 자신도 초라하게 보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초라하게 만든 주범인 남편도 무능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텔레비전이나 잡지를 보면서 예쁜 탈렌트를 보면 자신이 너무 못나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뻐질 욕심으로 비싼 화장품을 사다 발라보기도 하고, 심지어는 성형 수술을 해서라도 탈랜트를 닮아가려고 합니다.
요즘은 어떻습니까? 남자가 여성을 동경해서 성전환수술까지 합니다. 하리수라는 사람이 성전환수술을 해서 인기를 얻으니까 성전화수술을 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잇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면 안될까요? '잘생겼든 못생겼든 이 얼굴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다. 돈을 잘 벌어오든 쥐꼬리만큼 벌어오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배필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지금 있는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삶이 휠씬 더 아름다운 삶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앗수르의 거대한 문화를 보고 자신들의 문화는 너무 초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애굽의 나일강이나 앗수르의 유브라데 강을 보니까, 예루살렘을 가로질러 흐르는 실로암이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신앙적으로 생각했다면 절대로 초라한 것이 아닙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이 실로암 시냇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결코 마른 적이 없습니다. 변함없이 흐르는, 말 그대로 '생명의 젖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물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셨습니다.
비록 초라하게 흐르는 물줄기이더라도 그걸 생명의 젖줄이요, 하나님의 언약과 축복이 약속된 시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초라한 실로암 시내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건 거세게 흐르는 나일강이나 유브라데 강보다 훨씬 더 축복의 물줄기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비록 초라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부자라고 축복을 많이 받은 게 아닙니다. 내 삶의 처지와 환경이 내가 보기에는 불행한 것같고, 초라하게 보일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환경이라면, 그 삶이 바로 실로암 시내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가난한 삶이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부자가 된다고 모두 행복해 집니까? 우리는 지금 힘들기 때문에 삶의 여건이 조금만 더 나아지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가난하기 때문에 불행하고 부자가 되어야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조사에 따르면 가난하게 살던 때가 부자로 살던 때보다 훨씬 더 많은 행복을 느끼며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한 때 잘 사는 축에 속해 있었습니다. IMF를 겪으면서 넉넉하게 살던 삶이 갑자기 어려워져서 불행을 많이 느끼지만, IMF 이전만 해도 우리나라는 사치하고 흥청망청 써대는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사치하고 쓰고 싶은 대로 마음껏 쓸 수 있는 넉넉함이나 부유함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렵게 살던 6-70년대에 훨씬 더 행복감을 느끼며 살았습니다.
펄벅 여사가 쓴 '대지'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인공 왕룽은 아주 진실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농부였습니다. 그런데 농사를 지어 놓으면 메뚜기 떼가 와서 곡식을 다 갉아먹어버렸습니다. 어떤 때는 홍수가 나서 농작물을 다 쓸어버리기도 하고, 어떤 해에는 가뭄 때문에 농사를 망치기도 했습니다.
할수 없이 왕룽 부부는 도시로 떠났습니다. 도시로 나온 이 젊은 부부는 리어카를 사서 장사를 했습니다. 남편은 앞에서 끌고 아내는 뒤에서 밀고, 그렇게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돈이 모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무척이나 고생하며 힘들게 사는 삶이었지만 이들 부부는 행복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돈을 벌어서 고향으로 내려가 많은 논을 사서 머슴을 거느리며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드디어 돈을 벌어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땅을 많이 사서 일꾼을 부리는 대지주가 되었습니다. 얼마 동안 이 부부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대지주가 되어 할 일이 없어진 남편이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는 여자 하나를 데리고 들어오더니 조강지처를 문간방으로 내보내고, 첩을 안방에 들어 앉혔습니다. 고생만 하던 조강지처는 아침 저녁으로 따뜻한 밥을 지어 올리고는, 자기는 차가운 부엌에서 밥을 먹어야 하는 신세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느 날 조강지처는 부엌 부뚜막에 앉아서 눈물을 흘리며 밥을 먹다가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그 때가 좋았는데, 그 때가 좋았는데." 가난하고 힘들게 살았지만, 남편이 앞에서 리어카를 끌고 아내가 뒤에서 밀며 행복하게 살던 그 때가 행복했었다는 중얼거림입니다.
이 부부에게는 많은 재산이 행복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니라 불행을 가져다 주는 재앙이 되고 말았습니다. 차라리 가난하고 없이 살 때, 고생하면서도 단란하게 살 때가 훨씬 더 행복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졸졸졸 흐르는 실로암 시냇물을 보면서 답답해 했습니다. 그들은 큰 물이 흐르는 유브라데를 흠모했습니다. 실로암에도 그런 물이 흘러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게 소원이라고 한다면 소원대로 이루어 주마. 대신 너희가 원하는 그 큰 물이 너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말아라. 그 물은 너희에게 복을 주는 물이 아니라, 너희를 덮쳐 너희를 망하게 하는 물이 될 것이다."
마치 펄벅의 대지에 나오는 왕룽 부부에게 많은 재물이 불행을 가져다 준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원하던 유브라데 큰 물은 그들에게 불행을 가져다주는 물이 될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침공을 받아서 엄청난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여러분, 작은 실로암 시냇물, 이게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축복의 샘터입니다. 그들은 그것으로 만족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렇게 생각하며 사십시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부요함뿐만 아니라 가난함도 행복입니다.
건강뿐만 아니라, 질병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축복입니다.
형통함뿐만 아니라, 고난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고마운 선물입니다.
초가삼간만 있어도 행복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공도 축복일 수 있지만, 때로는 불행하다고 생각되는 일까지도 축복으로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신앙입니다. 작은 실로암 시내를 축복으로 아는 것이 참된 신앙인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혹시 삶의 여건이 너무 힘들어서 불평하며 짜증내며 살고 계시지 않습니까? 질병 때문에, 가난 때문에, 고난 때문에 힘든 삶을 살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금 바로 그 상황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실로암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작거나 초라하다고 불평하지 말고, 작고 초라한 삶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느끼며 사시는 여러분의 생애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