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응봉성당 신앙의 발자취
1920년 한학 훈장으로 서당을 운영하여 생계를 꾸려가시던 한 가장인(필자의 증조부이신) 박영우님이 62세 되던 해에 방지거란 세례명으로 구 합덕성당 제3대와 제6대 본당사제로 계시던 프랜크 신부의 주례로 영세를 받은 10년 후
주령리 258번지에서 함께 생활하시던 (필자의 조부) 셋째 아들 박성화 39세 아오스딩이란 세례명으로 구 합덕 성당 제7대 본당 사제로 계시던 백문필 필립보(프랑스) 신부에게 1930년 세례를 받은 5년 후
1935년 (필자의 부, 모, 숙부, 고모) 한 가정에 4식구의 영세를 시작으로 12식구의 대가족이 5년 동안 영세를 받음으로써 교우집 혹은 성교집이란 호칭과 함께 신앙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
같은 부락 두 가정의 모자와 모녀 네 사람이 영세 받아 3가정 16명이 1941년 가을철 첫 판공을 치룬 후 1957년 3월 27일 주령리 강당 건립까지 약 27년 동안 한 가정집을 통해 교세가 확장 되어 가고 있었다.
주령리 강당 준공식이 있은 후 한 가정의 신앙생활이 밖으로 전해지면서 교우들의 자발적인 지역선교 참여와 실천은 1년 12달 궂은 날씨도 관계없이 저녁 시간을 이용하던 방문 활동은 시계바늘처럼 쉬지 않고 활동하시던 4분의 회장님들과 4분의(대모와 대녀 사이) 자매님들의 끊임없었던 선교활동은 잊을 수가 없다.
그분들은 방문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밤을 지새우며 기도하였고, 성서와 교리책에 마음을 묻고 생활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신앙열정에 불타고 있었다고 믿는다.
주령리 강당에는 매일 밤(대한등) 불을 밝히고 언제나 교우들이 몰려와 기도하며, 성가 부르고 연도 예행 연습 등으로 매일 밤 잔치 짓을 왕래하듯이 하였다.
주간 매일 낮 시간은 청년층과 아이들이 모이는 장소로 역기, 아령, 철봉, 수평, 배구 등으로 작은 공소 공동체 생활은 언제나 활기에 차고 있었다.
어른들은 자매님들까지도 교우 품아시로 노동을 하였고, 각 일터마다 교리에 관한 질문과 답변으로 사랑의 대화를 나누었고 아이들은 질문하기 위하여 회장님들은 답변하기 위하여 각 가정에서는 교리공부에 게을리 할 수가 없었다.
그 당시는 각 일터에서 혹은 놀이터에서 자매님들까지도 성가 부르기를 게일리 할 수가 없었다.
그 당시는 각 일터에서 혹은 놀이터에서 자매님들까지도 성가 부르기를 유행가 부르듯이 하여 어른들까지도 성가를 배워야 하였고, 언제나 신바람 나던 때였다고 회고해본다.
당시의 본당이었던 예산 오리동 성당에서는 약 30개 지역에 규모가 크고 작은 각 공소를 대상으로 연중(예수 부활)(성모승천) 2회로 나누어 교리경시대회와 배구(친목)대회를 개최하겠다는 연락을 받고 주령리 공소 청년회는 활기가 일고 있었다.
그때 이미 배구공 다루는데 숙련단계에 있었고, 교리 부분에 대해서도 청년회가 자체적 구상으로 해마다 예상문제를 약200문항을 기준으로 출제하고 가리방을 사용 등사하여 외우고 있어, 아무런 염려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청년회 안해순 안드레아 회장님을 중심으로 다져진 청년회는 2곳에 배구장을 만들고 날마다 연습으로 응봉 감리교회, 상리 교회, 삽교 성경고등학교, 분천리 공소 등을 초대하여 친목을 다지는데 힘써 1972년 삽교 본당으로 공소가 이관될 때까지 약 10년 동안 교리경시대회까지 두 대회를 모두 석권하는 기적을 이루었다.
그 당시의 청년들과 학생들이 성장하던 과정은 매일 매순간마다 웃어른들의 칭찬과 격려가 원동력이 되어 작은 공소 공동체 생활은 늘 행복한 나날이었다고 믿고 먼저 천국으로 가신 회장님들께 감사를 드린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