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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동지월(孟冬之月)인 음력 10월은 양력 2019년 10월 28일(음력 10월 1일)부터 11월 26일(음력 10월 30일) 까지입니다.
유교 경전인 예기에서는 겨울로 접어드는 음력 10월을 맹동지월(孟冬之月)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맹동(孟冬)이란 음력 10월의 초 겨울을 의미합니다.
[1]. 맹동지월(孟冬之月)인 음력 10월은 양력 2019년 10월 28일(음력 10월 1일)부터 11월 26일(음력 10월 30일) 까지입니다.
1]. 맹동(孟冬)은 국립국어원의 (주)낱말 국어사전에서, 음력 10월을 달리 이르는 말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영어로는
The 10th lunar month, October of the lunar year,
독일어로는 Oktober nachdem Mondkalender로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2]. 유교 경전인 예기에서는 겨울로 접어드는 음력 10월을 맹동지월(孟冬之月)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맹동(孟冬)이란 음력 10월의 초겨울을 의미합니다.
. 예기(禮記)에서 설명하는 맹동(孟冬)과 입동(立冬)에 대한 내용입니다.
孟冬之月 日在尾 昏危中 且七星中 其日壬癸 其帝顓頊 其神玄冥 其蟲介
其音羽 律中應鍾 其數六 其味鹹 其臭朽 其祀行 祭先腎
맹동(孟冬)의 달은 진(辰)이 미성(尾星)에 있다. 저녁에는 위성(危星)이 남방의 중앙에 있고 아침에는 칠성(七星)이 남방의 중앙에 있다. 그 날은 임계(壬癸), 그 제는 전욱, 그 신은 현명, 그 동물은 개갑을 가진 것들이며 그 소리는 우조(羽調), 그 율은 응종(應鐘)에 해당된다. 그 수는 6, 그 맛은 짠 맛, 그 냄새는 썩은 냄새고, 그 제사는 행신(行神)인데, 제사할 때는 희생의 신(腎)을 먼저 바친다.
水始氷地始凍 雉入大水爲蜃 虹藏不見 是月也 以立冬 先立冬三日 太史
謁之天子曰 某日立冬 盛德在水 天子乃齊 立冬之日 天子親帥三公九卿大夫
以迎冬於北郊 還反賞死事 恤孤寡
물과 땅이 비로소 언다. 꿩이 바다로 들어가서 신(蜃:이무기의 일종)이 되고 무지개는 숨어서 보이지 않게 된다.
이 달에는 입동이 있으므로 입동 3일전에 태사가 천자를 뵙고 말하기를, "모일(某日)은 입동입니다. 천지의 성덕이 수위(水位)에 있습니다."고 한다. 천자는 곧 재계한다. 입동에는 천자가 몸소 3공.9경.대부를 거느리고 북쪽 교외에서 겨울을 맞이하고(전욱 및 현명을 제사지낸다), 돌아와서 나라일을 위해 죽은자를 상주고
그 고아와 과부를 구휼(救恤)한다.
是月也 命大史釁龜筴占兆 審卦吉凶 是察阿黨則罪 無有掩蔽 命有司曰
天氣上騰 地氣下降 天地不通 閉塞而成冬 命百官謹蓋藏 命司徒 循行積聚
無有不斂
이 달에는 태사에게 명하여 거북껍질과 산가지에 피를 칠하고 이로써 조(兆)와 괘(卦)를 점쳐 소상히 길흉을 판단하고, 아부하거나 부동하여 길을 흉이라 하고 흉을 길이라 하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그 죄를 다스리는데, 엄폐하고서 사실을 고하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한다.
또 유사에게 명하기를, "지금은 하늘의 양기가 위로 올라가버리고 땅의 음기가 아래로 내려가 천지가 서로 통하지 않고 폐색(閉塞)되어 겨울철을 이루었다(그러니 삼가 추위를 막는 준비를 하라)."고 한다.그리하여 백관에게 명하여 삼가 창릉과 부고를 수리하여 저장시키고, 사도(司徒)에게 명하여 읍리(邑里)를 순행하게 하여 노적가리를 살펴서 창고에 거둬들이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한다.
飭喪紀 辨衣裳 審棺槨之厚薄 塋丘壟之大小高卑 厚薄之度 貴賤之等級
是月也 大飮烝 天子乃祈來年于天宗 大割祠于公社及門閭 臘先祖五祀 勞農以
休息之 天子乃命將帥 講武習射御角力
상례(喪禮)의 기율을 갖추도록 한다. 즉 의상의 다소를 구별시키고 관곽의 후박(厚薄)과 묘역의 크고 작음, 구롱의 높고 낮음과 의식의 후한것과 박한 정도, 귀천의 등급을 밝혀서 바로 잡는다(상은 사람의 종말이고 겨울은 그 해의 종말이다. 따라서 이때를 맞아 상례를 바로 잡는 것이다).
이 달에 증제를 올린 뒤 연회를 열어 크게 신하들과 마신다. 천자는 또 납제를 올린다. 즉 희생을 각뜨고, 일월성신의 신을 성대하게 제사지내서 내년의 풍작을 빌며. 또 지신(地神), 문려(門閭)의 신, 선조의 혼백, 5사(五祀)의 신을 제사드린후에 농부를 위로하여 휴식하도록 한다.
그리고 천자는 장수에게 명하여 무기(武技)를 강습시키고 사어(射御:활쏘기와 말 달리기)의 법을 연습시켜서 서로 힘을 겨루도록 한다.
. 출처: 신역(新譯) 예기(禮記), 譯解者(권오돈), 발행처:홍신문화사, 2003.10.30 발행
. 필자 주 1). 한자사전에서 사용되는 蜃에 대한 용례입니다.
蜃: 큰 조개 신
1. 큰 조개(판새류의 연체동물 총칭)
2. 대합조개(大蛤: 백합과의 조개)
3. 무명조개(백합,白蛤: 백합과의 조개)
4. 상여(喪輿: 사람의 시체를 실어서 묘지까지 나르는 도구)
5. 제기(祭器: 고기를 담든 제사에 쓰는 그릇)
6. 이무기(용이 되려다 용이 못 되고 물 속에서 산다는 상상의 동물)
3]. 용 못된 이무기
용이 되려다 인간의 방해로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 설화.
공부를 많이 했지만 벼슬을 못한 가난한 양반이 있었다. 어느 날 아내가 베를 짜서 남편에게 주면서 양식을 사 오라고 했다. 남편은 베를 팔았으나 양식을 안 사고 돈을 들고 집으로 오는데, 사람들이 모여 구렁이를 죽이려고 하였다. 양반은 사람들에게 구렁이도 하나의 생명인데 죽이지 말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간섭하지 말라며 양반을 위협했다. 양반은 구렁이를 죽이지 않는 조건으로, 사람들에게 베를 판 돈을 모두 술값으로 지불했다. 남편이 빈손으로 돌아왔기에 가족은 굶을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풍수라도 하라며 패철(무덤 자리나 집터를 정할 때 풍수나 지관이 사용하던 나침반)을 얻어 와서 남편에게 주었다. 양반은 풍수에 문외한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길을 나섰다.
가다가 어떤 집에 초상이 나서 가 보니, 좋은 묏자리를 정하기 위해 풍수쟁이를 불러 모으고 있었다. 양반도 그 자리에 갔으나 풍수에 아는 것이 없어 난감해 했다. 그 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있는데, 불쌍한 한 아이가 들어왔다. 양반은 자기 밥을 아이에게 나누어 주었다. 아이는 신통한 능력이 있어, 풍수에 문외한인 양반을 최고의 풍수가로 만들어 주었다. 양반은 엄청난 부자가 되었고, 아이는 자신이 지난번 양반이 구해 준 구렁이라고 정체를 말했다. 그때 사람들은 약속을 어기고 이무기인 자기를 죽이려고 했고, 그래서 용으로 변신하지 못했다고 했다. 아이는 은혜를 갚고자 찾아온 것이라 하며, 이제 더는 도움을 줄 수 없다며 사라졌다. 양반은 이무기 덕분에 부자로 잘 살았다.
이러한 유형의 설화는 많지 않다. 이무기가 용이 못한 경우, 이무기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이 설화처럼 과거에 자신을 도운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내용도 있지만, 다른 설화는 용이 되는 것을 방해한 사람들에게 보복하는 내용도 있다.
우리 문화에서 용을 지칭하거나 용과 관련된 말에는 ‘이무기, 이시미, 미리, 영노, 꽝철이, 바리’들이 있다. 보통 용은 긍정의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이무기는 부정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용 못 된 이무기 심술만 남았다.”, “용 못 된 이무기 방천 낸다.” 같은 속담이 생겨났다. 이 설화에서 주인공이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사람들이 구렁이를 죽이려고 할 때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며 구해 주고, 굶주린 아이에게 자신의 밥을 내어 주었기 때문에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다.
이무기가 용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의 도움을 받거나 최소한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아야 한다. 사람의 방해로 용으로 승천하지 못하면, 이무기는 보복하는 것이 일반이다. 그러나 이 설화에서는 자신을 도와준 사람에게 은혜를 갚고, 자신을 죽이고 방해한 사람들에게 보복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120792&cid=50223&categoryId=51051
[2]. 태음태양력[ lunisolar calendar , 太陰太陽曆 ]
큰달(30일)과 작은달(29일)을 조합하여 12개월(平年) 또는 13개월(閏年)을 1년으로 하는데, 평년에는 354일과 355일, 윤년에는 383일과 384일의 네 가지 1년이 있다....
태음태양력은 달의 차고 기울기를 주로 하면서 태양의 운행에 맞춰보려고 노력한 역법이다. 이 역법은 달과 태양의 두 운행을 동시에 고려해야 하므로 매우 복잡하게 되기는 하지만, 실지로는 고대의 여러 나라와 여러 민족이 이 역법을 채택하였다. 물론 1태양년이 12삭망월과 정확히 일치한다면 태음력·태양력·태음태양력의 구분이 없게 되겠지만, 실제로는 태양년과 삭망월과의 비는 12.36827(=365.24220÷29.53059)이다.
이 일수 6940일을 중국에서는 장(章)이라고 하여, 이미 BC 600년경인 춘추시대의 중엽에 발견한 주기이고, 그리스에서는 BC 432년경에 메톤주기라고 하여 아테네의 메톤에 의하여 발견된 주기이다. 그리하여 19년 동안에 윤달을 7회 넣는 방법이라 하여 19년 7윤법(十九年七閏法)이라고 하였다. 태음태양력에는 바빌로니아력, 유대력, 그리스력, 인도력, 중국력, 한국에서의 음력(陰曆) 등이 있다.
한국은 중국 문화권 내에 속해 있어서 역에서도 중국력을 수입하여, 이것을 그대로, 또는 약간의 손질을 하여 우리의 역으로 써왔다. 그 중 백제에서는 중국에서 들여온 역법을 다시 일본에게 전달해 준 일도 있었다. 이들의 모든 역이 태음태양력이다.
각 시대별로 채택된 역법을 간단히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신라시대 674년(문무 14)에 대나마덕복(大奈麻德福)이 당나라에서 역술(曆術)을 배워와서 역서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 역은 이순풍(李淳風)의 인덕력(麟德曆)일 것이라고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적혀 있다.
인덕력은 당나라가 665년에 반포하여 그후 64년간 쓰였던 역인데 1태양년을 489428/1340, 1태음월을 39571/1340이라는 일수를 주고 있다. 당시에는 소수(小數)를 다룰 줄을 몰라 이와같이 분수로 표현했는데 년과 월의 분모가 과거의 역에서는 달랐지만, 인덕력부터는 같은 값을 취하였다....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 서문(序文)에는 신라에서 대연력(大衍曆)도 쓰였다고 한다. 이 역은 인덕력의 일식예언이 맞지 않아 729년에 일행(一行)이라는 중이 엮었는데, 태양운동의 부등속을 나타내는 주요항인 중심차(中心差)를 밝혔다. 대연력은 729년 동안이나 채택된, 당의 대표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후주서(後周書)》와 《수서(隋書)》의 각 <열전(列傳)>에 백제는 송나라의 원가력(元嘉曆)을 썼고 인월(寅月)을 연초로 한다고 적혀 있다. 백제의 기록과 《니혼쇼키[日本書紀]》에는 일본에게 역박사를 보내어 역법을 알려준 후, 일본에 원가력이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백제가 원가력을 썼다는 증거이다. 원가력의 흔적은 무령왕릉(武寧王陵)의 지석에 있다. 원가력은 송나라 때 하승천(何承天)이 만들어서 445년 이래 65년간 송나라에서 채택되고 백제에서는 건국 초부터 계속 이 역을 썼다. 1일의 시작은 밤중이 되고, 갑자삭 오전 0시, 우수(雨水) 입기시각을 1년의 시작으로 하였다. 원가력에서는 평기법과 평삭
고려 태조 때 고려에서는 당의 선명력을 이어받아 썼다고 하는데 이것은 나당(羅唐) 사이의 국교로 보아 830년경에는 신라에서도 선명력이 사용되었으리라고 믿어진다. 선명력에서는 태음시차(太陰視差)를 고려하여 일월식 계산에 약간의 진보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특별한 과학사상이 새로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선명력은 고려시대에도 건국 이래 충선왕까지 근 500년간 쓰였다.
중국에서는 당(唐)·송(宋)이 자주 개력하던 시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 말기부터 고려 말기에 이르는 약 500년간 선명력을 계속 써왔다. 그러나 이 역법에 오차가 생겼을 때 고려에서는 해결하려고 매우 애썼을 것이다.
그후 1281년(충렬 7) 원나라 사신 왕통(王通)이 수시력(授時曆)을 가져왔었고, 이어 충선왕(재위 1309∼14) 때에 최성지(崔城之)가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수시력을 얻어와 이것을 준용하게 하였다. 원나라에서는 이 역을 1280년부터 88년간 채택하였다. 수시력은 곽수경(郭守敬)·허형(許衡)·왕순(王恂) 등이 여러 관측기계를 제작하여 면밀한 관측과 정밀한 계산을 하여 엮은 역법인데 중국력으로서 최선의 역이라고 알려져 있다. 역원(曆元)을 너무 멀리 잡지 않고, 소수를 활용하여 1년의 길이가 점점 줄어든다는 소장법(消長法)을 채택하였다.
대통력은 이 수시력의 소장법을 없앤 것인데 1370년(공민왕 19)에 성준득(成准得)이 명나라에서 얻어왔다. 그러므로 대통력은 수시력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시대까지 합치면 중국에서의 수시력의 수명은 근 500년이나 되며, 한반도에서는 1370~1652년(효종 3)의 약 350년간 쓴 셈이 된다.
1653년(효종 4)에 서양역법인 시헌력이 흘러들어오게 되었다. 시헌력에서는 처음으로 정기법(定氣法)이 채택되었고, 삼각함수에 의한 수식계산을 하였으며 천체운동에 관하여는 처음에는 이심원(離心圓:複合圓)의 사상을, 나중에는 타원궤도의 사상으로 전진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1896년 태양력의 실시까지 쓰였다.
. 출처: 태음태양력[lunisolar calendar, 太陰太陽曆] (두산백과)
* 본 글은 비영리적이며, 공익적인 글입니다. 한국이나 중국등지의 유교와 전통명절을 되돌아보고, 다방면으로 연구.검토하기 위하여 자료인용을 하였으니, 널리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1. 한국은 전통적인 세계종교 유교나라임. 불교는 한국 전통의 조계종 천민 승려와 주권없는 일본 불교로 나뉘어짐. 일제강점기때 창조주에 저항하는 부처Monkey의 불교에 토대한 후발.국지적 불교 신도국가 일본이 Monkey 일본 신도와 Monkey 일본 불교를 한국에 강제 포교시킴. 1915년 조선총독부 포교규칙은 신도.불교.기독교만 종교로 인정하였는데, 일본항복으로 이들 강점기 포교종교는 종교주권은 없는상태임.한국은 조선성명 복구령에 따라 모든 국민이 주민등록에 유교의 본관과 성씨를 등록하는 행정법상 유교국가이고, 설날.추석등 유교 명절 쇠는 유교국가임. 필자는 부모 모두 양반인 파평윤씨 양반가문 출신임[경반(京班)은 아니고 향반(鄕班)]. 성씨없는 마당쇠 일본 불교 신도(神道)의 천황이나 일제(日帝)가 세운 경성제대 후신 서울대등 일본불교 잔재가 한국에 남아 한국사람들이 조계종 천민 승려의 불교나 주권없는 일본 불교를 믿으면서 덤비는 현상도 발생하고 있는 문제가 발생함. 유교권 선교에 경험이 많은 가톨릭 예수회와 달리 조상제사를 거부하는 많은 기독교계파들이 일본 신도.일본 불교.일본 기독교의 일제 강점기 강제 포교종교를 믿으면서, 종교주권없이 유교나라 한국에 대항하고 있지만, 한국은 세계사 측면에서 한(漢)나라때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지역에 성립된 세계종교 유교를 믿어온 수천년 유교국가임은 변하지 않음.
http://blog.daum.net/macmaca/2746
2. 일본 신도는 일본 막부시절 전 주민을 절에 등록한후 일본의 종교체질이 왜곡된후 이를 기반으로 19세기에 독특하게 형성된 불교적.無神論的(後發局地的) Monkey사상으로 판단됨. 부처의 불교는 원래 창조주인 범천에 대항해 일어난 무신론적 Monkey사상인데, 고대에 여러 나라들에 왕성한 포교를해서 널리 퍼졌지만, 중국이나 한국같은 전통 유교국에서는 핍박을받아왔고, 승려들은 공식적인 교육기관도 없이 체계적인 교육도 받지 못해왔으며, 사회적 지위도 별로 높지 않았고, 유교에 빌붙어서 유교의 하부 사상으로 유교적 풍토에 적응해 온 외래 포교종교임.
미국은 적어도 창조주나 하느님을 부정하지는 않는데, 창조주보다 높다는 부처원숭이 불교국가가 된 일본. 막부시대 이후 전 주민을 절에 등록하여 기독교에 대항한 이후, 불교 원숭이 국가가 된 일본. 불교에 기반한 일본 신도는 원숭이 일본 천황이 하느님보다 높다고 예수보다 높다고, 한국 강점기때 기독교를 탄압함. 그리고 국지적 일본 신도와 일본 불교로 세계종교 유교(중국.한국.베트남.몽고 및 전세계 화교)의 일원이던 조선.대한제국 유교를 종교아닌 사회규범 정도로 오도하다가 패전국이 됨.
http://blog.daum.net/macmaca/2596
3. 한국인은 행정법상 모두 유교도임. 가족관계의 등록등에 관한 법률 제9조 제2항 등에 의해 그렇습니다.
http://blog.daum.net/macmaca/2179
4. 한국사와 세계사의 연계는 불가피함. 그 동안의 한국 공교육 전통을 감안하면, 지엽적인 마찰이 생겨도 수천년 인류역사를 담은 세계사와의 연계는 가장 옳은 정답에 해당됩니다. 한나라이후 세계종교로 동아시아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잡아온 유교전통.
해방후 유교국 조선.대한제국 최고 대학 지위는 성균관대로 계승, 제사(석전)는 성균관으로 분리됨. 최고 제사장 지위는 황사손(이 원)이 승계하였습니다. 한국의 Royal대는 국사에 나오는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정통을 승계한 성균관대. 그리고 세계사를 반영하여 관습법적으로 교황윤허 서강대.
http://blog.daum.net/macmaca/2575
5. 유교의 내세관(來世觀)과 기복신앙(祈福信仰) 측면에 대한 고찰.
http://blog.daum.net/macmaca/800
6. 유교국가의 전통적 특징중 하나는 호적(戶籍)제도였음. 한국과 중국의 호적제도에 관하여!
http://blog.daum.net/macmaca/2492
7. 세계사로 볼때,한나라때 동아시아지역(중국.한국.베트남.몽고)은 이미 세계종교 유교가 자리잡았음. 위만조선.한사군때 유교가 한국에 들어왔다고 하는데, 고려.조선시대는 기자조선도 인정했었음. 한자, 한문성씨사용,고인돌, 고대 부여 영고,고구려동맹, 예의 무천,삼한의 상달제등 제천의식이나 전통 유교풍속은 황하문명에서 피어난 상고시대 유교의 영향을 나타냄. 이후 삼국시대는 부여 및 삼한의 유교를 승계하여 난생신화같은 하늘의 아들 의식, 하늘숭배.조상숭배가 있는 설날.추석.단오.한식같은 유교 명절, 유교 교육, 한자의 사용, 한문성씨의 사용등이 있었고, 불교는 중국불교형태로 받아들였지만,거센 반발때문에, 신라의 경우 이차돈의 순교가 있고나서야 후발 외래 포교종교로 불교를 받아들임. 고려는 치국의 도가 유교, 수신의 도가 불교였는데, 유교의 각종 명절과 제사가 있었고, 교육기관으로 국자감이 있었음.
새롭게 종교인구 산출을 어떻게 해도, 한국인은 행정법상 모두 유교도임. 가족관계의 등록등에 관한 법률 제9조 제2항 등에 의해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