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플라톤주의란 무엇인가?
신플라톤주의는 플로티노스의 학통을 이어받은 그리스 최후의 철학유파를 가리킨다. 중심은 로마에서 시리아, 아테네로 옮겨갔고, 529년 아테네의 학교가 동로마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에 의해 폐쇄될 때까지 이교 사이에서 번성하였다. 대표자로는 포르피리오스, 얌블리코스, 배교황제 율리아누스, 프로클로스 등이 있고, 이들의 신비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 주해는 동서의 중세철학 및 근대 초기의 철학에 많은 자극을 주었다.
플로티노스(Plotinos;204/5-269/70) 그리스 철학자이며 신플라톤주의 학파의 시조
이집트에서 태어났으며, 로마에서 신비주의적인 범신론 철학을 강의하였던 그의 주안점은 영혼을 육체와 감성으로부터 정화하여 이성적으로 만들고 그 위에 사고가 없어지는 망아탈혼(엑스타시스)의 경지에서 신과 직접 교류하는 것에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신은 존재를 초월하며 사고를 초월한 절대의 일자, 최고로 완전한 선이다. 이러한 선에 어울리는 생활은 순수한 자기사고이다. 플로티노스의 이러한 사상은 중세 교부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를 움직였으며, 중세의 스콜라 철학과 신비사상 그리고 헤겔의 관념론과 변증법에까지 영향을 주었다.(임석진 감수,『철학사전』, 도서출판 이삭, 1988, p.401.)
◎ 르네상스와 신플라톤주의
이른바 문예부흥 시대였던 르네상스는 조형예술, 문학, 음악의 풍부한 창조적 성과를 보여주었으나 미학의 체계적 발전에 공헌한 것은 아니었다. 이 시대에 이르게 되면 토마스 아퀴나스, 스코투스, 오캄 등의 중세를 풍미했던 스콜라 철학은 더 이상 진취적 성격을 상실하고 고착상태를 맞이하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경화는 플라톤 철학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으며, 그 결과 신플라톤주의가 부활하게 된 것이다.
르네상스 신플라톤주의의 중심인물은 피치노였다. 그는 최초로 플로티노스의 저서를 라틴어로 번역하였을 뿐만 아니라 코시모 데 메디치의 후원을 받아 플라톤의 손으로 쓰여진 원고 역시 라틴어로 번역하였으며 여기에 덧붙여 풍부한 주석을 달았고, 1462년에는 새로운 아카데미를 설립, 여기에서 플라톤철학을 해석하고 가르쳤다. 대체로 그의 철학은 플라톤, 플로티노스, 아리스토텔레스, 성 아우구스티누스, 위 아레오파기투스 등으로부터 열정적으로 취해진, 그러나 새로운 열정으로 서로 맺어지고 때때로 참신하게 연결된 사상의 혼합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16세기에 널리 보급, 수용되었다. 피치노는 자신의『주석 Commentary』에서 신이 창조한 세계에 대해 "모든 형상과 이데아들의 합성체를 라틴어로 mundus, 그리스어로 cosmos, 즉 조화체라 부른다. 이 조화체의 매력이 아름다움이다. 이때 사랑은 ''미에 대한 갈망''으로 정의된다. 사랑은 아름다움의 상 하에서 선에 끌리는데 있다. 이제 아름다움의 매력은 여러 요소들의 조화에서, 즉 정신에서는 여러 덕목들의 조화에서, 가시적인 것에서는 색채와 선의 조화에서, 음악에서는 음조의 조화에서 발견된다. 정신의 아름다움은 마음에 의해 지각되고, 육체의 아름다움은 눈에 의해, 소리의 아름다움은 오직 귀에 의해 지각된다"고 했다. 피치노는 아름다움에 대하여 그것이 경치와 소리의 속성일 뿐만 아니라 덕목의 속성이므로 빛이 실체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움도 실체가 없다고 주장하고 논증한다. 그는 어떤 ''초월적 요소''를 통해 아름다움이 사랑을 불러들여 그 최고의 갈망에로 향하게 할 수 있고 또한 신의 관조에로 나아갈 수 있다며 플라톤의『파이돈』에 바탕을 둔 관조이론을 개관하였다. 관조는 어느 정도 신체로부터, 그리고 물질적인 것에 대한 관심으로부터의 영혼의 퇴출 혹은 분리에서 가능하다. 즉 관조는 신체로부터 영혼의 해방을 가능하게 한다. 피치노의 신플라톤 철학은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에 의해 계승되어 예술가를 장인이 아닌 특별한 천재로 파악하는 관점의 형성을 자극하였다. 즉 예술가는 규칙을 뛰어넘는 특유한 천재, 자유와 활동의 기회를 필요로 하는 영웅으로서 상위의 인간으로 판단되는 근거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신플라톤주의와 도상해석학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와 조각에 왜 그렇게 작가 자신의 모습(자화상)이 자주 나타나고 있으며, 또 대체로 이들은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가?
이를테면 시스틴성당의 천장에 그려진 선지자 예레미야의 모습을 한 미켈란젤로의 자화상
<최후의 심판>에 순교자 바르톨로메오가 들고 있는 사람의 껍질은 미켈란젤로의 자화상이라 한다.
뒤러의 <멜랑코리아Ⅰ>의 우울한 천사가 뒤러 자신의 모습이라고 한다.
뒤러의 <멜랑코리아Ⅰ> 1514

<최후의 심판>에 순교자 바르톨로메오가 들고 있는 사람의 껍질은 미켈란젤로의 자화상이라 한다

이들은 한결같이 턱을 괴고 앉아 우울에 잠겨있다.
왜 미켈란젤로는 <로렌초 데 메디치>의 묘를 장식할 조각에 로렌초를 턱을 괸 우울한 모습으로 표현하였으며, 그 아래에 늙고 게을러 보이는 노인과 젊고 생생한 여인의 형상을 대조적으로 배치하였을까? 또한 그는 교황 율리우스2세의 묘에 모세와 함께 <죽어가는 노예>를 놓으려고 했다. 현재 이 노예상은 분리된 채 루브르박물관에 전시되고 있지만 미켈란젤로는 어떤 의도로 교황의 무덤조각에 노예상을 놓으려 했던 것일까? 이 노예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로렌초 데 메디치>의 묘 로렌초의 초상

<죽어가는 노예>

파노프스키는 신플라톤주의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했다.
피치노를 중심으로 한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언젠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했던 멜랑콜리한 기질에 관해 관심을 나타내었다. "철학, 정치, 신학 혹은 조형예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던 정말로 탁월한 모든 인간들은 멜랑콜리한 자들었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멜랑콜리한 성향을 플라톤의 개념인 ''신적인 광기 furor divinus''와 동일시하였으며, 이러한 통합과정에서 새로운 개념인 ''신들린 듯한 멜랑코리'', ''멜랑코리한 광기''가 생겨났는데, 쉬운 말로 내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이 말은 창조적 천재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시대의 회화에 대해 서술한 한 책을 보면 ''멜랑코리는 천재를 의미한다 Melancolia significa ingegno''고 적혀 있다. 인문주의 시대에 멜랑코리가 높이 평가된 이유는 인문주의자들이 ''토성 Chronos(그) Saturn(영)''을 칭송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 점성술에 따르면 우울질의 사람은 토성성좌 밑에 태어난다. 사투르누스(그리스의 크로노스)는 땅의 신이었으며, 오래 전부터 석공과 목공의 수호자로도 여겨졌다. 그리고 사투르누스는 땅의 신으로서 지면의 분배와 측정, 다시 말해 기하학과도 상관이 있다.(A. Durer의 <멜랑코리아Ⅰ>의 경우)
1531년 아그리파(Cornelius Agrippa von Nettesheim)은 피치노의『세 가지 삶』에 근거하여『어둠의 철학 De Occulta Philosophia』란 저서에서 창조성을 지닌 천재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전개시켰다. 아그리파는 진리를 인식하기 위한 세 가지 단계에 대해 1) 낮은 단계로서의 예술가 2) 지식인 3) 가장 높은 단계의 신학자로 분류했다. 뒤러의 멜랑코리아는 첫 번째 단계에 속할 수밖에 없다. 힘과 이해력과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멜랑코리는 최상의 진리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뒤러는 말했다. "그러나 무엇이 아름다움인지를 나는 모른다. 그것은 신만이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켈란젤로의 노예상은? 노예는 현실세계에서 신분적으로 제약된 인간만 나타낸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영혼을 가두어놓은 육체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몸부림치는 인간의 모습을 상징한다. 신플라톤주의의 영혼불멸사상이 미켈란젤로의 이 작품에서 다시금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