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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의 결성이래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많은 애국가류의 시가 발표되었지만 모두가 민간인의 애국심의 발로에서 개인이 작사하였고 더군다나 정식으로 악보를 작곡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에 대한제국 정부는 에케르트 초빙을 계기로 민영환이 작사하여〈대한제국 애국가〉를 제정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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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서 정식으로 국가(國歌) 제정을 공식 발표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렇게 제정된〈대한제국 애국가〉의 가사와 악보가 실린《대한제국 애국가(大韓帝國愛國歌)》가 1902년 7월 1일 민영환에 의해 한글본과 로마자본 두 가지로 발행되었다.
상뎨(上帝)는 우리 황뎨(皇帝)를 도으 성슈무강(聖壽無疆)? ?ㅣ옥듀(海屋 )를 산(山)갓치 으시고 위권(威權)이 환영( 瀛)에 쓸치싸 오천만셰(於千萬歲)에 복녹(福祿)이 일신(日新)케 ?소셔 상뎨는 우리 황뎨를 도으소셔
이〈애국가〉역시 현재의〈애국가〉와는 다르지만 최초로 공식 발표되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고‘상례 (上帝)는 우리 황제(皇帝)를 도우소셔’는 현재〈애국가〉의‘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와 일맥 상통하고 있다. 1919년 중경에서 발행된《신한청년》창간호에 현행 애국가와 같은 노래가 실려 있다.
제8회《임시의 정회의록》개원식에서 “총의장의 사회로 개식을 선하고 일동 기립하야 애국가을 창(唱)한 후 국기에 향하 최경례(催敬禮)를 행하였다.” 는 기록으로 보아 임시정부에서는〈애국가〉를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제69호에‘애국가 신곡보 사용’에 대한 기사가 실렸는데 이는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 신곡보의 사용을 의결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사실로 보아 이미 1940년부터 임시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현행〈애국가〉를 국가로서 정식으로 공인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애국가〉의 곡조는 영국 민요인〈Auld Lang Syne〉에 맞추어 불리다가 1936년 안익태에 의하여 작곡되었다.
《독립운동사 자료집》제8집〈임시정부사〉편에 “3월 26일 발표에 의한 즉 필라델피아에 체류한 음악가인 안익태씨는 5년 전에 미주(美洲)에 왔는데 그 동안 성심으로 연구하여 대한 애국가 곡조를 작성하여 발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작곡된 악보는 우리 교포들이 펴내는《새한민보》를 통하여 교포들과 유학생들 사이로 번졌다. 대한국민회는 이 악보를 상해 임시정부로 보냈고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각지의 우리 동포들에게 전했다. 이리하여 민간에 알려진 애국가는 자연발생적으로 불리다가 1948년 정부수립과 동시에 국가로 결정되었다.
애국가에 관한 이견(異見)
현행 애국가는 작사자, 규명, 곡조에 대한 재검토, 국가에서의 공포 여부에 따른 정통성에 대한 시비(是非) 등 많은 논란이 있었다. 애국가 가사에 대한 변천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899년 6월 29일《독립신문》에〈무궁화 노 ㅣ〉라는 제목의 시가 발표되었다.
노랫말은 전혀 다르지만 후렴구가 현행 애국가와 같기 때문에〈애국가〉의 원형으로 보고 있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1. 성 신손 오박년은 우리 황실이요 산고슈려 동반도 우리 본국일셰
2. 국? 렬심의긔 북악 치 놉고 융군한는 일편단심 동? 치 깁허
3. 천만인 오직 ? 나라 랑?샤 롱공샹 귀천업시 직분 다?셰
4. 우리 나라 우리 황뎨 황뎐이 도으샤 국민공략 만만셰에 태평 독립?셰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 대한으로 길이 보천?셰
이와 비슷한 내용의 노래는 도산 안창호의《구한 말 애국창가집》과 1907년 10월 13일자《대한매일 신보》에〈무궁화가〉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1908년 3월 11일자《공립신보》와 1908년 발표된 윤치호의《찬미가》집에도 같은 형식과 내용의 노래가 발표되었다. 이 노래들은〈무궁화 노 ㅣ〉와 거의 같으며 찬송가나 영국 민요인〈Au1d Lang Syne〉에 맞추어 불려졌다.《구한말 애국창가집》에 실린〈무궁화가〉는 같은 책에 실린〈권학가〉에‘무궁화가와 같은 곡됴’라고 표기되어 있어 이들 노래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03년 지어진《기설》에 현행 애국가와 문체, 철자가 거의 같은 노래가〈애국충성가〉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동해수와 백두산에 해돋고 달뜨니 신민이 보호하사 우리 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에서 길이 충성하세 ◀도산안창호의 <구한말 애국창가집>중의 무궁화가 |
908년 발행된 윤치호의《찬미가》집 14편에 노랫말과 후렴이 현행〈애국가〉와 같은 노래가 실려 있는데 이 노래는〈Au1d Lang Syne〉에 맞추어 불려졌으며 곡조 표시 위에‘Patriotic Hymn(애국가적 찬미가)’라고 표기되어 있다. <찬미가>집 14편, 윤치호 ▶ |
1 1.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나라 만세
2. 남산 우헤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 이슐 불변함은 우리 괴상일세
3. 가을 하날 공활한대 구름업시 놉고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4. 이 긔상과 이 마음으로 님군을 섬기며 괴로우나 질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오로 길이 보전하셰
현재 우리가 부르고 있는〈애국가〉의 가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윤치호나 안창호에 의해 지어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두 설을《국사편찬위원회 자료집》에서 발췌하여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1. 당시 윤치호가 원장으로 있던 한영서원(韓英書院) 출신 박두화(朴斗華)는 1907년 윤치호가 발간한 《찬미가》집을 가지고 있었으나 분실하였다.
2. 한영서원 출신의 신영순(申泳淳)의 말에 의하면 당시 윤치호가 작사한《특별 찬미가》집을 전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그 제l장에 애국가를 실었다.
3. 주영환(朱榮煥)의 말에 의하면 윤치호는 1908년 15장으로 된 자작(自作) 찬미가집을 그의 이름으로 발간하였는데 재판 인쇄이므로 첫판은 그 이전 일 것이며 그 14장에 애국가를 수록하였다.
이상이 윤치호설이고, 안창호설은 아래와 같다.
1. 허영숙(許英蕭 이광수 부인)이 1908년 진명 학교(進明學校)때와 그후 상해시대에 두 번이 나 도산(島山)한테 자기가 지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2. 이광수(李光洙)의《도산 안창호》전기에 애국가의 작사자는 도산 안창호라고 기술되어 있 다.
3. 1950년에 간행된《도산 안창호 웅변 전집》에 현행 애국가 가사 중 임금을 섬기며를 충 성을 다하여로 수정하였다고 적혀 있다.
이 두 설을 비교해 보면 윤치호의 설이 유력하다.
그러나 1985년 도산 안창호 선생의 장녀 안수산 여사가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도산의 유품 중 가칭《구 한말 애국창가집》에 실린〈무궁화가〉는 애국가 작사자규명에 커다란 이견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책명 발간 연도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정부에서 압수한 노래’라는 주석이 달려 있는 것으로 미루어 구한말에 일제와 친일 내각에 의해 압수당한 자료로서 1905년에서 1910년 사이에 비밀 출관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여기에 실린〈무궁화가〉는《독립신문》에 실렸던〈무궁화 노 ㅣ〉와 철자만 틀릴 뿐 거의 똑같다.
그러므로 애국가 가사에 대한 시비는 윤치호설로 굳어지는 듯하지만 아직까지 발견되지 못한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때의 자료가 발굴된다면 더욱 명확히 밝혀질 것이다.
애국가에 대하여 국가에서 법령으로 규정한 바가 없기 때문에 국가(國歌)로서의 정통성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애국가를 국가의 대용곡으로 일컫거나 새로 제정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국가(國歌)의 성격은 대부분 위정자의 제정의도나 작사자, 작곡자의 의식적 창작보다는 국민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애창되었던 노래가 급기야는 국가의 제정으로 유도되거나 범국민적 관행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외국의 경우를 살펴보면 미국, 프랑스 등은 성문 규정을 가지고 있지만 영국이나 독일에서와 같이 관행으로 사용하고 있는 나라도 있다.
미국의 국가인〈Star Spang1ed Banner〉는 1814년 워싱턴의 변호사인 F.S.키가 미국이 영국 함대의 공격으로 궁지에 몰렸을 때 볼티모어 항에 나부끼는 성조기를 보고 작시하여 1780년 영국의 작곡자인 J.S.스미스가〈To American in Heaven〉시에 붙이려고 작곡한 곡조에 맞춰 대중공연에서 처음 발표하였었다.
이 노래를 1890년 육·해군에서 공식 의전시에 연주할 것을 규정화하고 1931년 3월 3일 미국의 국가로 공식 채택하였다. 프랑스의 국가〈La marseil1aise〉는 1792년 공병대위인 Rouget de Lisle가 군대 행진곡으로 작사, 작곡한 것이 프랑스 남부지방에 소개되어, marsei1laise의 민병들이 파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파리에 입성하는 동안 불려졌다.
이 노래는 파리 시민의 애국심을 크게 불러일으켜 곧‘La marsei1laise’로 일컬어지게 되었고, 1795년 7월 4일 국가로 제정되었다. 관행으로 국가를 사용하고 있는 나라를 보면, 영국을 들 수 있다.
〈God Save the Queen〉은 작사, 작곡자 미상이고 1745년 런던에서는 공공 연회시에 발표회를 갖고 정부의식에서 사용하였고 1800년 초부터 국가로 사용하였다. 한때 영국의 세력권에 들었던 많은 나라가 국가로 썼고 스위스는 아직도 이 곡을 국가로 쓰고 있다.
독일의〈Deutschland Lied〉는 1797년 Haydn 이 작곡한〈황제송가〉에 1841년 Hoffmann Fallers1ebe이 작사하였다. 1922년부터 공식 국가로 사용되었고 히틀러 시대에는 군가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애국가〉는 민족의 자주의식이 싹튼 구한말부터 계몽 단체나 학생들이 부르던〈무궁화가〉,〈애국충성가〉가 모체가 된 것으로 국민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전파되어 애창되고 있는 민족사적 전통이 있다.
일제시대, 광복, 6·25 동란 등 우리 민족 독립사· 애난사와 더불어 고난과 영광을 같이 해오면서 국민 의식 속에 뿌리 깊게 새겨져 있다.
더욱이 법령으로 성문규정화하지는 않았으나 1948년 정부 수립 기념식상에서의 연주 및 이후의 정부 주관 공식행사는 물론 민간행사에 이르기까지 범국민적으로 파급되어 사실상 국가로서 애창되고 있다.
처음 독립문 정초식에서 불렸던〈성자신손 애국가〉는 1899년에서 1907년까지〈무궁화 노 ㅣ〉,〈무궁화가〉,〈애국가〉로 각 신문과 책자에 소개되었다. 1903년《기설》과 1908년《찬미가집》의 발간을 기점으로 현행과 같은 노랫말이 영국 민요에 맞추어 불려졌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안익태에 의해 1936년 애국가의 곡조가 작곡되었고 마침내 임시정부에서는 국가로써 공포하게 되었다. 우리가 임시정부의 법전통을 인정하고 또 정부수립 기념식 행사에서 연주했다는 점을 상기할 때 우리 나라의 국가는 현행의 애국가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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