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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계획을 잘 실천하여 유익한 겨울방학이 되어야겠다.
[1] 방학이 시작되기 며칠 전에는 항상 이런 계획표를 짜서 검사 받으라는 선생님의 지시가 있었다.
1977년 12월 14일 수요일
오후에 고모할머니[1]께서 오셨다. 오실 때는 고등어[2]를 6마리 가져 오셨다.
우리 집 식구들은 인사를 드리고, 서로 안부 인사를 하셨다.
잠시 후 고모할머님께선
"세억아, 고등어 1마리씩 각각 두 큰집에 갖다 주어라."
이렇게 해서 나는 두 큰집에 각각 1마리씩 갖다 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큰 실수를 하였다. '1선'씩 갖다 주라고 했는데 그것을 잘못 듣고 '1마리'씩 갖다 주라고 내가 잘못 들은 것 같다. 나중에서야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오늘은 '듣기'가 꼭 필요하다고 느꼈다. 나중에 어머니께서는
"세억아, 내일 고등어 각 큰집에 1마리씩 더 갖다 주어라."
"예."
나의 힘없는 대답이었다.
'내일 두 큰집에 가서 나의 잘못을 말씀 드리고, 1마리씩 더 갖다 줘야지.'
[1] 할아버지 형제 3남 1여 중 바로 그 고모할머니다.
[2] 당시에는 멀리 있는 친척집을 방문할 때는 아이들에게 줄 과자류보다는 오히려 끼니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사들고 갔다. 특히, 고등어는 단골 메뉴였다. 우리 어머님도 나를 외가에 보낼 때는 외사촌들이 많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과자보다는 돼지고기 한두 근을 손에 쥐어 보냈다. 배불리 먹는 게 쉽지 않았던 시절이니 당연했을 거다.
1977년 12월 15일 목요일
선생님께서도 일이 있어서 학교에 못 나오시고[1], 우리들은 우리 마음껏 공부를 하였다.
둘째 시간 시작되었을 때 일이다. 아이들이 교무실에 어떤 선생님께서 앉아 계신다고 하였다. 그래서 내가 직접 가보니, 어떤 분이 앉아 계셨다.
'그렇다면 우리 학교 어느 선생님께서 전근하시지 않을까?'
나는 이렇게 의문에 싸였다. 그 뒤로는 나에게 거기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2]
저녁 때의 일이다.
내가 형과 공부를 하고 있는데, 6학년 진현이가 왔다.
"너, 어디 갔다 오니?"
내가 물었다.
"학교 갔다 왔는데, 거기서 떡도 먹고 했는데 우리 선생님께서 전근 하신데…."
나는 지난날 6학년 선생님[3]과 함께 놀던 때를 생각해 보았다.
'여름에 토끼 밥이 없어 함께 아카시아 잎을 따시던 선생님, 탁구를 나에게 가르쳐 주신 선생님….'
내 눈에는 이슬이 맺혔다.
[1] 모처럼 한번씩 담임 선생님께서 결근하시면 환호성을 질렀던 기억이 난다.
[2] 애들이나 어른이나 틀린 데가 없는 것 같다. 회사에서도 무슨 특별한 일이 벌어지면 무슨 소식이 더 있는가 안테나를 세우는 것과 똑 같다.
[3] 이분의 성함이 '박충성' 선생님으로 기억되며, 당시 총각으로 우리학교가 첫 부임지인 것으로 알고 있다.
1977년 12월 16일 금요일
아침 조회시간 때의 일이다.
6학년 선생님께서 마지막 인사말씀을 하셨다.
"여러분들도 6학년 언니의 뒤를 따라 훌륭한 사람이 되어 주시길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나는 참아야 했다.
내 속 심정이야말로 누가 알아 볼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울고 싶었다. 내 맘껏 울고 싶었다.
내 눈에는 이슬이 고요히 맺히기 시작했다. 나뿐만 아니라, 6학년 언니들도 역시 슬퍼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나도 고개가 숙여졌다.
나중에 공부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왜 선생님께서 전근하셔야 하나! 그냥 제자리에서 오래오래 가르치면 정이 두터워질텐데.'
물론 그 이유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선생님들께서 전근하셔야 할 이유를 우리 선생님께 일기에서 물어 본다.
※ 선생님들께서 전근하셔야 할 이유는?[1] -
[1] 일기장 검사를 1주일마다 하니까 그때 이유를 여기에 적어 달라고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으셨다.
1977년 12월 17일 토요일
오후 때의 일이다.
나는 심심하게 되어서 위로[1] 가 보았다.
그런데 이것이 웬 일인가? 큰할머니께서 양동이를 들고 샘[2] 쪽으로 가질 않는가?
나는 빨리 뛰어갔다. 이미 할머니께서 물을 퍼시고 계셨다.
"할머니, 그것 이리 주세요. 내가 퍼겠어요."
"그래라."
이렇게 해서 두리박[3]은 태진에게 맡기고 양동이의 물은 내가 가져왔다. 나도 마음이 흐뭇하였다.
"얘야, 저 윗 큰집[4]에 가봐라. 6학년 찬일이가 왔단다."
"그러셔요?"
나는 곧 윗 큰집으로 가 보았다. 역시 있었다.
키는 내보다 더 크고, 건강은(신체) 대략 나와 비슷한 것 같고, 6학년이면 나이는 나와 같은 애였다.[5]
내가 가니 좀 수줍어하면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오늘은 서로 말을 못했지만 좀 있으면 아주 친한 친구가 될 거야!'
꼭 찬일이와 친한 친구가 되어서 겨울 방학을 즐겁게 보낼 수 있도록 해야겠다.
[1] 마을 윗쪽으로
[2] 당시에는 상수도 시설이 전혀 없어서 우물에서 물을 길어 먹는 일이 시골 아낙네의 큰 일거리였다.
[3] '두레박'을 사투리로 '두리박'이라 하였다.
[4] 할아버지 형제 중 둘째 할아버지 댁이며, 둘째 할아버지/첫째 할아버지/우리 집 순으로 위치가 높은 곳에 있어서 '윗 큰집'이라고 불렀다. 서울에 사는 찬일이는 둘째 할아버지 맏딸의 아들(외손자)이며, 이날 그 녀석을 처음 보았다. 서울은 항상 방학이 경상도보다 먼저 시작되었고 늦게 끝났다. 서울이 북쪽이라 겨울방학은 그렇다 치더라도 여름방학마저도 그러니, 어린 마음에 참 불공평한 교육정책이라고 생각했었던 기억이 난다.
[5] 나는 실제 찬일이보다 1살 위다. 형을 제때(8살)에 입학시켰더니 키 큰 애들한테 자주 맞고와서 아버지께서는 한이 되셨는지 나를 9살에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 그 결과 아버지 뜻대로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같은 학년 친구들에게 맞고 다닌 적은 거의 없었다.
1977년 12월 18일 일요일
6학년 선생님께서 전근하신다고 해서 학교에 가 보았다 (아침 일찍).
벌써 짐도 모두 차려 놓으시고, 갈 준비를 다해 놓으셨다.
6학년 여학생들은 계속 울고 있었다.
드디어 6학년 선생님께서 차에 오르셨다.
아이들은 우르르 몰려갔다. 선생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손을 흔드시고, 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교문 앞을 차가 지나가니 6학년 여학생들은 더 세게 울고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뒤를 돌아보시며 우리들에게 손을 흔드셨다.
나도 손을 흔들었다.
운동장에 있는 아이들은 모두 눈에 이슬이 맺혔다.
'오늘이 마지막 이별이지. 이젠 또 언제 만나지. 정말 안타깝구나! 아니야, 아직 만날 기회는 있어.
1. 졸업식 때 오신다고 했으니, 오시고
2. 편지로 소식 (사진교환)'
선생님을 만날 날을 기다리면서 힘없이 집으로 돌아 왔다.
1977년 12월 19일 월요일
내 마음이 오늘은 기쁜 날이다.
윗 큰집에 있는 찬일이와 내가 서로 사귀게 되었다.
찬일이도 5학년이다. 지난 토요일 큰할머니 말씀으로 6학년으로 알았었는데…….
또 나이는 나보다 1살 적었다. 건강(신체)은 아직 12살이지만 나와 비슷하였다.
성격은 온순하고, 친절하였다. 나에게도 함부로 말을 쓰지 않고, 천천히 조용히 말했다.
나와 찬일이는 서로간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거기 학교 인구 몇 명이지?"
"약 4000명쯤 돼. 너희들 학교는 몇 명이야?"
"우리학교는 겨우 160여명밖에 안 돼."
이렇게 서로 친절하고 조용히 이야기했다.
"참, 너희들 주소는?"
"그래. 불러 줄께 적어.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장안동 138의 32호 8통 2반 전찬일'이야."
"그래, 우리 사이좋게 지내자."
나는 마냥 즐겁기만 하다.
참 유익한 일기구나. 곧 방학이 시작되는데 방학 때도 일기를 열심히 쓰면 좋겠다.
1977. 12. 21 신상환 (인)
1977년 12월 20일 화요일
(12. 20 일기장을 선생님이 학교에 보관해서 12. 21에 쓰는 것임)
학교에서 돌아온 후 오늘도 윗 큰집에서 찬일이와 놀았다.
한참 놀다가 찬일이가 방학 숙제를 해야 한다고 하였다.
나도 집에 가서 책가방을 가지고 왔다.
그런데 신통하였다.
찬일이의 국어책과 나의 국어책이 똑 같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넘겨 가면서 맞추어 보았다. 정말 틀린 곳이 한군데도 없었다.
우리는 산수책도 맞추어 보았다. 역시였다.
"우와!"[1]
아버지께서는 서울이 굉장히 멀다고 했는데, 어떻게 책이 똑 같은지 신기하기만 하다.
찬일이는
"교과서를 서울에서 만들기 때문에 전부 똑 같을 거야."
하고 여자애처럼 서울말로 얘기했다.
책도 똑 같은데, 그러면 왜 찬일이는 나하고 말은 다를까?
[1] 서울 아이들도 나랑 똑 같은 책을 가지고 공부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신기했었는지 지금도 그때 그 기분을 표현하기가 힘들다.
1977년 12월 21일 수요일
방학이 났다.
종업식 때의 일이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오늘 비로소 방학이 났는데, 여러분들은 흔히 방학이라면 노는 기간으로 생각하는데, 절대 노는 기간이 아닙니다. 이점 유의하기 바란다.
또 규칙적인 생활을 하도록! 예를 들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간단한 운동을 한다던가 등 모든 일을 규칙 있게 보내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것은 특별히 조심해야 된다. 깊은 곳에서 썰매를 탄다던가, 산에 가서 불조심을 하지 않고 불을 함부로 놓는 일이 없도록! 이상."
이렇게 긴 이야기를 하셨다.
또 나는 특별히 할 일과 꼭 지킬 일을 생각한다.
※ 특별히 할 일
① 일기를 계속 쓴다.
② 주산 향상 (덧셈)[1]
③ 그림 향상
④ 탁구
※ 지킬 일
① 외출할 때 부모님께 알리기
② 조기 청소 참석
③ 건강 관리
④ 불조심
⑤ 얼음 타기 삼가
이것과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잘 지켜 알찬 방학이 되어야겠다.
[1] 요즘같이 주산 학원이라는 게 있는 줄도 몰랐고, 나의 주산 실력은 집에서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덧셈이 전부다.
1977년 12월 22일 목요일
오후 때의 일이다.
나와 찬일, 태진, 세봉이와 산에 가서 나무를 해 오다니까 유산할머니[1]께서 나무를 해 가지고 오시고 계셨다.
나는 얼른 뛰어가서 받아오고 싶었지만, 내 짐 때문에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우리가 그 앞을 지나 가다니까
"애고, 너희들이 짐이 없으면 이것 좀 갖다 달라 하려고 했는데…."
나는 하도 딱해서 내 짐을 내려놓고 얼른 보따리를 들었다. 세봉이는 긴 나무 하나를 들었다.[2] 이렇게 나와 세봉이는 나무를 갖다 주었다.
갖다 주고 오는 도중 유산할머니께서는
"나는 긴 나무만 갖다 달라고 했는데 이렇게 다 갖다 줘서 고맙다. 고마와."
나는 세봉, 태진, 찬일이가 있는 곳에 가서
"그런 것이 바로 효도 또는 공경이라 하는 것 아니가!"
(모두 웃는다.)
오늘도 매우 뜻있는 날이라고 할 수 있다.
내 마음 흐뭇하기 그지없다.
※ 형, 고등고시 합격함.[3]
※ 줄넘기 수 - (산에 등산 감)[4]
[1]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할아버지 성함이 '유산'이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유산할매'라고 하였다. 슬하에 자식이 없어서 할아버지와 사별 후 혼자서 사셨고 당시에도 벌써 80세 정도의 꼬부랑 할머니였던 것으로 기억난다.
[2] 유산할매는 항상 조그만 나뭇짐 보따리 하나는 꼬부랑 등에 지고, 손에는 나뭇가지 하나를 끌고 오셨다. 어릴 때 몇 년 동안 보았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3] 웬 고등고시? 형이 고등학교 시험에 합격한 것을 그렇게 썼는가 보다.
[4] 매일 줄넘기를 하고 그 횟수를 일기장에 기록하는 일이 방학숙제였던가 보다. 이날은 산에 간 것으로 대체하고 있다.
1977년 12월 23일 금요일
저녁 때의 일이다.
윗 큰집에서 나와 찬일, 세봉이와 함께 붓글씨[1] 공부를 하였다.
붓이 2개라서 세봉이는 먹이나 갈고, 나와 찬일이는 글씨를 썼다. 그때 세봉이가
"내가 먹가는 법 가르쳐 줄까?"
그때 옆에 계신 할머니께서
"그 자식 그, 붓가는 법 가르치고 먹 쓰겠네."
나와 찬일, 세봉이는 그 말이 우스워서 한바탕 웃었다.
정말 생각할수록 신통한 말이었다.
'『붓갈고 먹쓴다』, 정말 이상한데…. 말이 반대로 되었으면서도 무언가 뜻이 숨어 있으니, 야! 그 재미나는 말이다.'
나는 너무 신통해 큰 소리로 다시 한번
"붓갈고 먹쓴다. 야, 세봉아 좀 이상하지 않니? 붓갈고 먹쓴다."
"그러게 말이네."
세봉이와 찬일이도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그래, 오늘 할머님 덕분에 좋은 것을 배웠어.'
나는 이 말을 다른 아이들에게도 말하겠다고 생각했다.
※ 줄넘기 수 - 63 개
[1] 대구 시내에서 부업(?)으로 붓글씨 학원을 경영하실 만큼 서예 실력을 갖춘 영어 선생님 지도 덕분에, 전국 고등학생 서예대회 한글부문에서 특선까지 수상한 바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특별활동시간 중인 서예반 앞을 지나치는데 4, 5, 6학년 형들이 붓글씨는 안 쓰고 붓에 먹을 묻혀 서로의 얼굴에 쳐 바르는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 광경이 얼마나 재미났는지 나도 4학년이 되어 특활을 하게 되면 반드시 서예반에 들어가겠다고 다짐했고, 실제 4학년이 되어 서예반에 들어갔다. 엉뚱하게도 이것이 붓글씨에 입문하게 된 진짜 동기였다.
1977년 12월 24일 토요일
저녁때의 일이다.
나는 어머님과 말다툼을 하였다.
내가 저녁도 안 먹고 놀러 돌아 다녔는데, 집에 오니 밥이 방에 없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일이 난 것이다.
"엄마, 밥 좀 갖다 줘요."
"네가 갖다 먹지. 자기 밥을 자기가 못 갖다 먹니?"
"좀 갖다 주면 어때."
나는 화가 나서 마구 말을 하였다.
"그래, 밥 먹지 마라."
"좋아, 밥 안 먹어. 두고 보지."
결국 나중에 어머니께서는 내 꼴을 보시고 부엌에서 밥을 가지고 오셨다.
결국 밥은 먹었지만, 후회가 된다.
'왜 내가 어머님께 해를 끼쳤을까? 왜 내 손으로 좀 못 갖다 먹었을까? 다시는 이런 일을 저지르지 말아야지.'
다만, 아까 있었던 일이 후회가 될 뿐이다.
※ 줄넘기 수 - 119 개
[주] 긴긴 겨울밤에 친구 집에 놀러갔다 와서 자기 전에 맛있게 먹었던 '차운밥'과 '김치'가 기억난다.
1977년 12월 25일 일요일
역시 저녁때의 일이다.
태진, 세봉, 찬일, 나는 재미나게 놀고 있었다.
한참 재미나게 노는데, 세봉이가 나의 ○○[1]를 찼다.
아마 장난이 너무 심해서인 것 같았다. 몹시 아팠다.
그래서 나는 세봉이의 얼굴을 때리면서
"야, 때려도 곳이 있지. 거기에 하필이면 때리니?"
나는 화가 나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세봉이도 몹시 아팠는지 엎드려서 일어나질 않았다. 나도 일어날 맘이 없어 그대로 누워 있었다. 그때 찬일이가
"어떤 애가 지나가다가 '뽕뽕' 방귀를 끼더라."
너무 우스웠다. 그래서 나는 웃음이 막 나왔다. 세봉이도 우스웠는지 막 웃었다.
나중에 나는
"세봉아, 미안하다. 내가 좀 참아야 했는데…."
"아니래. 내가 먼저 일을 저질러서, 이렇게 되어서 미안해…."
이렇게 서로 화해를 하였지만, 내 마음 역시 좋지 않았다.
지금 와서는 '내가 참아야 했을걸' 하는 생각뿐이다.
※ 줄넘기 수 - 161 개
[1]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동그라미 처리해둔 것을 보면, 초등학교 5학년인데도 불구하고 윤리관념이 있었던가 보다.
1977년 12월 26일 월요일
기분이 좀 상한 날이기도 하다.
아침에 큰 집에 가니 할머니께서
"오늘 세석이가 온다지."
"옛! 세석이가."
'세석이를 보게 되는구나!'[1]
또다시 큰집에 와서 여쭤 보았지만, 역시 같은 대답이었다.
"그런데 할머니, 어떻게 오늘 온다는 것을 알았는가?"[2]
"응, 신산 누나네 집으로 전화로 연락이 왔단다."[3]
그후 나는 저녁 7시에 큰집에 가 보았다.
"아직 안 왔는가요?"
"그래, 오늘은 안 오는가 보다."
또 그후, 8시에 가 보았지만 대답은 같았다.
'아니 이럴 수가! 그래 오늘은 못 와도 내일은 꼭 오기 바란다. 나는 믿는다. 꼭 내일은 와 주기 바란다.'
나는 힘없이 걸어오면서,
'내일 꼭 와 주어'
이렇게 꼭 믿으면서 힘없이 걸어 왔다.
※ 줄넘기 수 - 152 개
[1] 어렸을 때 남해에 사는 6촌형 세석이와 지내는 것을 광적으로 좋아했었다. 시골 아이들은 매일 자기 주변의 산과 들에서만 놀지 어디 먼 곳으로 외출은 거의 하지 못했다. 혹시 외부에 사는 친척이 오면 그것은 곧 새로운 세상을 체험하는 것이다. 세석이 형은 방학 때 시골에 오면 나에게 맛있는 과자를 많이 사 주었다.
[2] 당시 가까운 친척 어른들에게 사용하는 '∼는가?' 라는 말은 일종의 높임말이며, 친구 사이끼리는 예의 바른 말로 사용되었다.
[3] 1977년 당시에 우리 마을에는 전화가 1대도 없었으나, 태임 누나가 시집간 '신산'이라는 마을에는 몇 대 있었다. 아마도 매형이 우리 마을에 직접 와서 큰집 할머님께 소식 전한 모양이다.
1977년 12월 27일 화요일
아침에 있었던 일이다.
어제 저녁 찬일이가 간다는 것을 안 나는, 새벽 일찍 지난날 친하게 놀던 세봉, 태진이를 불러서 윗 큰집에 가 보았다.
6시 30분인데도 벌써 밥을 다 먹고 갈 준비를 하였다. 우리도 거기서 일을 좀 거들어 주었다.
마침내 찬일이는 우리집과 밑 큰집 할머님께 인사를 드리고 세덕이 형 자전거에 올라탔다.[1]
자전거는 속력을 냈다. 나와 태진, 세봉이는 자전거를 따라 마을 어귀까지 갔다.
"얘들아! 잘 있거라."
"그래, 그럼 만날 때까지 이만…."
나는 울고 싶었다.
아마 그때 내 심정을 알아 본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왜, 12월 달에는 이별이 이렇게 많지?'
세봉, 나, 태진이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지금 헤어지면 또 언제 만나지. 그래 편지[2]로 소식 전하기로 하고 만날 때까지 참자!'
※ 오늘 박충성 선생님을 뵘.
※ 줄넘기 수 - 184
[1] 당시 우리 마을에는 버스가 들어오지 않아서 어디 갈려면 6km 정도 떨어진 면소재지까지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가서 버스를 타야 했다.
[2] 그 이후 대학을 서울로 오기 전까지 찬일이와는 200∼300 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1977년 12월 28일 수요일
점심때의 일이다.
나는 아이들과 놀면서 점심 때 나무하러 가기로 했다.
집에 돌아와서 점심을 먹으면서 형에게 이 사실을 얘기했더니 형도 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형은 삭다구리[1]하러 가겠다고 했고, 나는 풀[2]을 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아이들과 산에 가서 풀을 한 지게 했다.
풀은 얼마 무겁지 않았다. 그러나 분량은 대단히 많았다.
나도 태어나서 나무한 것을 생각해 보았으나, 오늘만큼 한 적이 없었다. 아마 오늘이 제일 많이 하였는 것 같았다.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께서는
"히야…, 굉장히 많이 했는데…!"
그런데 형은 겨우 삭다구리 2단 밖에 못 해 가지고 왔다.
"에이, 이젠 나도 풀하러 가야지."
어머니께서는 우리 형제를 칭찬해 주셨다.
'내일도 하러 가야지. 정말 풀하는 것은 재미있더라.'
나중에 소죽[3] 끓이는 데 때어 보았지만, 정말 잘 탔다.
'내일도 꼭 하러 가야지.'
※ 줄넘기 수 - (못함) 학교 운동장 10바퀴 돔.
[1] 죽어서 마른 나무가지를 '삭다구리'라고 하였다.
[2] 겨울에는 풀이 말라 있기 때문에 좋은 땔감이 되었다.
[3] 시골에서 소는 가보1호이고 아이들보다도 더 좋은 대우를 받았다. 나는 철들고 부터 소를 중심으로 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의무적으로 소꼴을 베거나 산에 소를 데리고 가서 풀을 뜯게 해야 했고, 여물을 썰어야 했고, 소죽을 끓일 때 쓸 나무를 해와야 했고……, 저녁에는 형과 내가 번갈아 가며 여물을 끓여서 '소죽'을 주었고 서로 하기 싫어 많이 싸우기도 했다. 지금도 누가 나보고 어릴 때 일 중에서 가장 진절머리 나게 기억 나는 게 뭐냐고 물으면, 생각할 필요도 없이 '소죽 끓이기'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요즘에는 일손이 없기 때문에 여물을 날 것으로 주지, 끓여서 주는 집은 한곳도 없다.
1977년 12월 29일 목요일
저녁때의 일이다.
세봉이네 TV 보러 가니[1], 나의 1학년 때 친구였던 지중[2]이의 누나가 와 있었다.
"지숙이 누나, 지중이도 왔어?"
"그래, 빨리 가 봐라. 방에 있어."
그래서 나, 세봉, 태진이는 지목이네 집에 가 보았다.
역시 지중이가 있었다.
"지중아, 오래간만이다."
"그 동안 잘 있었나?"
이렇게 인사말을 하고 나, 세봉, 태진이는 악수를 하였다.
우리는 방에 들어가서 서로간의 소식을 전했다.
'올 겨울 방학에는 뭐가 좀 이상한데…. 친구가 없어지면 또 친구가 나타나고. 그래, 친구가 많을 때 재미나게 놀아보자.'
지중이도 왔고, 큰집에 세석이가 오면 이젠 친구가 많아 질 것이니 친구가 있을 때 재미나게 신나게 놀아보자.
※ 줄넘기 수 - 학교 운동장 10바퀴 돔.
[1] 당시에는 흑백 TV 였으며, 우리 집에는 아직 TV가 없었다.
[2] 초등학교 1학년 말 경에 대구로 이사 갔다. 지중이네 큰집이 시골에 있었다.
1977년 12월 30일 금요일
아침에 있었던 일이다.
아침 먹고 오후에 나무를 하러 가기 위해 준비를 해 놓았다.
'이번에도 많이 해서 어머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아야지.'
이렇게 나무하러 갈 준비를 해 놓았다.
점심때의 일이다.
나무를 하러 갈라고 하는데, 비가 오질 않는가?
'에이! 꼭 이때 비가 오는 것이 뭐람. 또 나무하러 가지 못 가나? 참말로….'
나는 비가 와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왜 하필이면 이렇게 비가 오지.'
화가 잔뜩 났다.
'비는 헤방꾼인가봐. 꼭 이럴 때 오니 말이야. 정말 비는 여름에는 농사를 지어주고, 겨울에는 헤방꾼인가봐.'
오늘 나는 여기서 또 한번, 비는 우리 일상 생활에 좋은 점을 줄 때도 있고, 나쁜 점을 주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 줄넘기 수 - 212
1977년 12월 31일 토요일
오늘은 아침부터 기분이 나쁜 날이라고 할 수 있다.
아침에 곧 일어나서 있었던 일이다.
내가 일어나니 동생 세호는 벌써 깨어서 놀고 있었다.
세호가 너무 일찍 일어나서 너무 떠들었기 때문에 내가 잠을 잘 수 없어서 화가 나서 세호를 때렸다. 세호는 아픈지 울기만 하였다.
나중에 세호는 부엌에 가서 긴 나무를 가져오더니, 나의 이마를 때렸다.
이렇게 결국 나중에는 세호와 싸움을 하였다. 그때 어머니께서
"큰놈이 작은놈과 똑 같다. 그만 떠들고 방 설걷이[1]나 해라."
이렇게 해서 싸움을 실컷 하고 나니 아침밥이 들어왔다.
밥도 먹기 싫어 졌다. 그래서
"이젠 매일 굶어야지."[2]
나중에 나는 누워 이불을 푹 덮어쓰고 있으니, 할머니께서 빨리 일어나라고 하셨다. 결국 아침도 안 먹고, 점심도 안 먹으니 나중에 배가 몹시 고팠다. 그래서 밥을 조금 먹었다.
맛이 꿀맛 같았다.
'아! 이렇게 밥을 맛있게 먹어 보는 것도 어머니 덕분이구나!'
나는 그제야 오늘 나의 잘못을 깨달았다.
앞으로 다시는 부모님께 불효는 하지 않겠다고…….
※ 줄넘기 수 - 비 관계로 못함.
[1] 방청소
[2] 야단맞고 난 후에는, '내가 아프면 엄마 아버지가 무척 슬퍼하겠지'라는 야릇한 보복(?) 심리에서 이런 종류의 생각들을 많이 했던 기억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