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문학어와 일상어의 번지수는 같다.
세상에는 널리 퍼져 있는 오해가 있다. 문학의 언어는 우리가 사용하는 말과는 좀 다른 특별한 말이라는 생각이다. 언어에는 과학적 용법과 정서적 용법이 있다는 식이다. 이런 오해가 생긴 것은 그 알량한 학자들 때문이다. 마치 천안에 서북구와 동남구가 있다고 해서 그 두 구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것은 행정하는 일의 편의를 위한 것이다. 그러니 그런 분류법은 그들 학자에게 맡겨두자.
학문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서 그렇게 나눌 따름이지 실제로 문학의 언어와 일상적 삶의 언어가 다를 까닭이 없다. 아니 오히려 일상인의 말에 가장 충실한 말이 문학의 언어다. 따라서 얼마나 적확하게 그것을 표현하는 말을 찾아냈느냐의 여부가 문학의 우열을 가름할 뿐이라는 말이 된다.
문학의 말은 딴 세상에서 구해 온 것이 결코 아니며, 그렇다고 엽기적 사용도 아니라는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 이문구의 동시 「산 너머 저쪽」을 보자.
산 너머 저쪽엔
별똥별이 많겠지
밤마다 서너 개씩
떨어졌으니
산 너머 저쪽엔
바다가 있겠지
여름내 은하수가
흘러갔으니.
이 중에 낯선 말이 있는가. 없다. 그렇다고 생각이 낯선가. 낯설지 않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면서 오래 잊어버리고 있었던 생각이라는 말도 된다. 문학은 이런 것이다. 우리 모두가 생각하는 것. 그러나 까마득히 잊고 있던 것을 우리 모두가 쓰는 말로 다시 일깨워 주는 것일 뿐이다. 그러기에 문학의 언어가 다를 리 없다.
그렇다면 이상(李箱)의 소위 ‘이상한 작품’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좋다. 이상의 시, 「가정(家庭)」을 예로 들어 보자.
문(門)을암만잡아다녀도안열리는것은안에생활(生活)이모자라는까닭이다.밤이사나운꾸지람으로나를졸른다.나는우리집내문패(門牌)앞에서여간성가신게아니다.나는밤속에들어서서제웅처럼자꾸만감(減)해간다.식구(食口)야봉(封)한창호(窓戶)어데라도한구석터놓아다고내가수입(收入)되어들어가야하지않나.지붕에서리가내리고뽀족한데는침(鍼)처럼월광(月光)이묻었다.우리집이앓나보다그러고누가힘에겨운도장을찍었나보다. 수명(壽命)을헐어서전당(典當)잡히나보다. 나는그냥문(門)고리에쇠사슬늘어지듯매여달렸다. 문(門)을열려고안열리는문(門)을열려고.
참 이상한 시다. 우선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일부러 그렇게 규칙을 위반하려고 작정을 해서 그리된 것이다. 틀린 것도 아니고 몰라서도 아니고 짐짓 그런 것이다. 그럴 만한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이를테면 속에다 집어넣던 와이셔츠 자락을 겉으로 삐죽이 내놓고 다니는 요즘 유행과 같은 심리다. 이런 것을 '낯설게 하기'라는 오히려 평범한 수법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다음은 "안에 생활이 모자란다"느니 "밤이 사나운 꾸지람으로 조른다"는 식의 말들은 아무래도 우리 주변에는 없는 말처럼 보인다. 이 또한 시인의 의도적인 비틀기에 해당한다. 거기다가 "수명을 헐어서 전당 잡힌다"는 말이나 "내가 수입되어 들어간다"는 말이 이해되지 못할 까닭이 없다. '유추(類推)'니 '전이(轉移)'니 하는 용어가 여기서 왜 필요하겠는가.
다만 일상어와 다른 점을 굳이 찾으라고 한다면, 일상어 속에 있는 여러 요소들이 고도로 압축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을 따름이다. 캐러멜이 왜 달며 그것이 왜 있는가 하면 세상 도처에 흩어져 있는 단 것을 모으고 압축해서 더욱 달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은 사탕수수밭에 가서 헤매 다니게 될 것이다. 더욱 시에서는…
5) 누가 읽는가.
정비석의 「자유부인」이라는 소설이 낙양의 지가를 올리고 있을 때, 내 마누라만은 읽지 말았으면 하는 심리가 독자를 제한했다고 한다. 이처럼 문학이 특수한 계층이나 교양인만의 것이라는 생각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착각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자유부인」을 자기 부인은 읽지 못하게 하고자 했던 저 어리석은 발상과 마찬가지로 문학의 실상에서 벗어난 비민주적이며 전근대적인 생각이다.
문학에 대한 편견이 여기에 이르게 된 데는 이른바 전문가들의 책임이 없지 않음을 솔직히 반성할 필요가 있다. 다구나 그들은 나름대로 그들만의 함정이 있고, 그들만이 쓰는 은어가 있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집을 사고 팔려면 의지하게 되는 곳이 공인중개사(복덕방)이다. 그렇다고 그들의 말을 그대로 믿으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조용한 주택지역”이라고 선전하거든, "아! 변두리 지역이구나"하고 알아들어야 하고, “직선거리가 30분”이라고 하면 "아, 진입로가 순탄치 못하구나!"하고 깨달아야 한다.
사실 문학이 무엇인가를 안내받고 싶어서 문학개론을 뒤져본 사람이면 생각날 것이다. 거기에 씌었으되 아리스토텔레스며 플라톤이며, 그리고 쟈끄 데리다에 이르기까지, 낯선 서양인들의 이름을 알게 된 거 말고 문학에 대해서 무엇을 알았던가? 그래서 이론만 남고 문학은 실종되었으며, 학교의 문학교육은 그래서 문학을 찾아 모여 들었던 많은 사람들을 흩어지게 만들었다.
문학은 가르치지 않고 쓰잘데 없는 용어나 암기하게 한다든지, 문학을 이해하는 데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 수사법이나 문법을 기억하게 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그런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가시리 가시리잇고 버리고 가시리잇고 날러는 어찌 살라 하고 버리고 가시리잇고 잡사와 두어리마는 선하면 아니올쎄라 설은 님 보내옵노니 가시는 듯 도셔 오소서”를 중얼중얼 외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아무런 설명 없이도 우리는 이 말을 다 알고, 가슴에 진하게 묻어나는 그 감정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은 문학이 본디 우리 일상인의 것이었지 전문가의 것이 아니었음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기도 한다.
6) 문학이 무슨 소용인가
“문학을 해서 옷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그런 면에서 문학이야말로 참으로 무용지물이 아닐 수 없다. 천박한 실용주의자들은 이 점을 부각시켜 강조한다. 그렇다면 저 유명한 콜럼버스의 달걀 얘기가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 이상의 뜻으로 우리에게 어느 세계를 알게 하듯이, 문학의 보람도 문학 자체를 넘어서는 데 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의 모든 삶, 모든 사람을 다 만나볼 수는 없어도 문학에서는 그 모든 삶을 두루 체험할 수 있다. 살아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할 수는 없지만 문학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문학은 우리에게 삶을 설계하는 방식을 일러준다. 바로 이것이 문학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는 옷이며 밥이다. 우리가 문학을 가까이 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궁극적 실용의 영광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문학을 사랑하고 즐기는 일이 어찌 거저 될 까닭이 있겠는가.
날씨를 신통하게 알아맞히는 인디언이 있었다. 날마다 그의 집 앞에 깃발을 달아서 사람들에게 그걸 알렸다. “맑음은 푸른 색, 흐림은 회색…”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신통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데 하루는 그의 집 앞에 깃발이 오르지 않았다. 사람들이 달려가 웬일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신통력을 가졌다는 인디언의 말. "음, 내 트랜지스터 라디오의 전지가 다 돼서 라디오 일기예보를 못 들었거든…"
일기예보를 들어야 날씨를 알듯이, 문학도 읽어서 아는 것이지 더 무슨 비법이 있겠는가. 읽는 이나 쓰는 이나 문학에 관한 한은 이것이 진리고 이 이상의 비법은 없다. 저 낮고 낮아 보이는 일상의 삶을 글로 체험하고, 그래서 알게 되고, 알아서 길을 잡게 되는 것이 문학이다. 읽으면 된다.
어떤 것을 읽을까를 물을 필요도 없다. 재미난 것을 찾아서 읽으면 그만이다. 어떤 것을 써야 값지냐고 물을 필요도 없다. 쓸 만하다고 여기는 것을 쓰면 그만이다.
문학은 일상적인 생활인의 것이므로 일상인의 삶에 충실한 사람이 쓰고, 또 그런 사람이 읽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창세 이래로 그러하였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첫댓글 매일 배우니 매일 새로워 집니다.
오늘도 하루를 새롭게 열 수 있어 고맙습니다.
배울수록 재미가 소올솔 합니다. 무료 강의라서 글로라도 인사드립니다.
' 낮고 낮아 보이는 일상의 삶을 글로…
그래서 알게 되고, 알아서 길을 잡게 되는 것이 문학이다.'라는 말이 와 닿습니다.
문학은 일상적인 생활인의 것이므로, 우리들의 노력 여하에 따라 감동과 전율의 세계가 펼쳐지리라 믿습니다. 문학이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감동에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