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관에 대하여
1. 자전거 도둑
내 직관이 하나의 행동으로 이어지기까지는 <도벽>이라는 용
매가 작용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도벽. 마치 독일군에 저항하
는 레지스탕스처럼 이제껏 의식의 골짜기 속 깊숙히 잠복해 있다
가 권태라는 일상바이러스가 잠시 의식체제의 기능을 저하시키는
사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모습을 드러내 신도시처럼 단정하게
구획된 내 의식을 총으로 마구 난사하는 게릴라.
그러니까 그날 새벽. 신림동에서 자전거를 훔쳤다. 그 과정은
이랬다. 그날 나는 함께 술을 마신 한 여자를 뒤쫓고 있었다. 시
간은 아마 자정이 약간 지났을 무렵. 난 어지간히 취해 있었다.
내가 다니고 있는 출판사에서 한때 같이 근무한 적이 있는 그녀
는 칸막이된 술집에서 나와 함께 술을 마시면서 내 몸을 잔뜩 달
궈놓고서 화장실을 간다며 도망쳤다. 시간이 지나도 화장실에서
돌아오지 않자 그제서야 나는 그녀가 가버린 것을 깨달았다. 나
는 술집을 나와 그녀를 찾아나섰다. 그녀의 집은 우리가 술마신
술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녀는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지
만 난 그녀의 부모들이 며칠 여행을 떠난 사이 회사의 동료들과
그녀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땐 편집실의 김대리를 비롯,
회사 동료들과 함께였기 때문에 나는 그녀와 함께하는 은밀한 시
간을 가지지 못했다. 그로부터 얼마후 그녀는 다니던 출판사를
돌연 그만두었다. 그렇지만 난 계속 그녀와 연락이 이어져 우린
퇴근길 저녁에 그녀가 사는 신림동에 들러 함께 술을 마시곤 했
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녀와 함께 술을 마셨다. 그리고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한 이유로 인해 그녀와 조금 다툰 것 같았
다. 그녀는 자꾸 집으로 가려고 했고 난 그녀를 계속 붙잡았다.
그러다가 그녀가 술집을 빠져나간 것이다. 난 그녀의 집으로 향
하는 길로 발걸음을 빨리했다. 그녀를 발견한 것은 신림시장으로
이어진 신림교를 막 지나서였다. 그녀 집에서 1백미터 남짓 남은
거리였다. 그녀는 술에 취한듯 약간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난 틈을 보아 그녀를 강간할 작정을 하고 있었다. 으슥한
골목이 시작되자 곧 달려가 그녀를 덮쳤다. 일단 땅 위로 쓰러뜨
리고는 그녀에게 내 얼굴을 확인시켜줬다.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
해서였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알아보고도 완강하게 저항했다.
여기선 싫어. 우리 다른 데 가서 해.
그 말에 내가 잠시 몸을 늦추는 사이에 그녀는 어디서 그런 힘
이 솟아났는지 날 밀치고 어둠 속으로 도망가 숨어 버렸다. 마치
죄수의 몸을 항문까지 <샅샅히> 수색하는 교도관처럼 그 날 밤
난 그녀를 찾아 어둠속 골목 구석구석을 <샅샅히> 뒤졌다. 그러
다 툭, 갑자기 기억의 필름이 끊어졌다.(F O)
다시 기억의 필름이 시작될 때(F I) 나는 신림천 다리 밑에 웅
크리고 앉아 있었다. 10월의 선선한 날씨임에도 새벽의 냉기가
뼛속까지 침투하고 있었다. 간밤에 몸 속으로 퍼부어댔던 술기운
이 아직 혈관속에서 남아있는 탓이리라.
아직 지하철 첫차를 타려면 두어시간은 기다려야 했다. 뜨거운
물로 샤워라도 하고 태아처럼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고 싶은 마
음이 간절했다. 택시를 타기 전에 늘 하던 것처럼 습관적으로 주
머니 속에 손을 넣어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주머니 속
엔 10원 한푼도 남아있지 않았다. 내 수중에는 택시비는 커녕 지
하철조차 탈 돈이 없었다. 순간, 머리속에서 <증발>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런걸 사람들은 <증발>이라고들 한다.
증발이란 말을 처음 만난건 아마도 초등학교때 물의 증발이란
제목의 자연교과서였을 것이다. 증발과 기화, 승화, 풍화와의 차
이점을 알지 못해 나는 시험에 나올 때마다 문제를 틀리곤 했다.
물이 끓는 점, 즉 비등점 이상의 온도에서 비등할때 그것을 증발
이라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고체표면이 기화하는 것도 증발임
을 알게된 건 국어사전을 찾아보고서야 알았다. 기화와 승화, 증
발, 또 나중에 배운 풍화작용에서 보여지듯 모든 질료는 비등하
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생명을 가진 인간은 말할 것도 없고,
말 한마디 못하는 바위, 흙, 물, 불 등 기본적인 원소들도 모두
비등되어질 존재였다.
국어사전에서 찾아본 증발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뜻이 있었다.
증발[蒸發] : 액체나 고체가 그 표면에서 기화(氣化)함 .
(속) 사람이나 물건이 갑자기 없어져 소재 불명이 되는 일. (배
우가 ∼하다)
물론 내 주머니에서 <증발>한 지갑은 아마도 의 의미임은
분명함에도 난 첫번째 쪽으로 상상력이 날개를 폈다. 지갑은
분명 물이 아닌, 고체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비등점에 도달해 수
증기로 변해있을 거라는. 그리고 냉각된 공기로 인해 다시 지갑
은 물방울과 같은 짧은 여행을 끝내고 내 주머니 속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상상. 그러나 그러한 상상계를 벗어난 현상계에서 바라
보면 분명 어디엔가 지갑을 빠뜨린게 틀림없었다. 그것은 집에까
지 갈 일이 아득하다는걸 의미했다. 눈을 들어 새벽 하늘을 보았
다. 제법 굵은 빛줄기들을 난사하며 별들이 저마다 아우성을 치
고 있었다. 손목시계의 시간은 새벽 2시가 막 지나고 있었다. 북
두성을 축으로 하여 이미 별들이 하늘을 한바퀴 돌고는 사라질
시간이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아직 이처럼 많은 별들이 남아있
는 걸까. 그때였다. 갑자기 히히힝 말 우는 소리라도 들었던 것일
까. 순간적으로 어떤 직관들이 섬광처럼 머릿속을 관통했다. 그러
자 눈 앞에는 수많은 자전거들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서있는 장
광이 펼쳐졌다. 그러고 보니 다리 밑은 자전거 주차장이었다. 크
고 작은 자전거들이 마치 마굿간에 일렬로 서있는 말처럼 저마다
나란히 앞바퀴가 쇠사슬에 채워져 있었다. 나는 내 눈 앞의 자전
거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자전거는 그다지 크지도 그렇다고 작지
도 않은 검은 빛을 띤 채 앞바퀴가 자물쇠로 채워져 있었다. 힘
껏 자물쇠를 당겨보았으나 쇠사슬에 매인 자물쇠는 좀처럼 끊어
지지 않았다. 하긴, 내 보잘 것없는 손아귀 힘에 끊어질 자물쇠
같으면 자전거 주인은 애초에 자전거를 자물쇠로 매어놓는 번거
로운 일 따위는 하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자전거 주인은 마음만 먹으면 그까짓 자물쇠를 끊는
것은 일도 아니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 주위를 둘러보니 여
기저기 각목조각이 널브러져 있었다. 자물쇠에 각목을 X자로 엇
갈려 놓고 힘을 조금 가했다. 그러자 손으로 열 때는 그처럼 완
고하게 닫힌 자물쇠는 싱겁게 '툭'하고 끊어졌다. 세상에 이처럼
쉬운 일이 있었다니. 완만한 결과론이긴 하지만 그러고 보면 자
전거 주인이 자물쇠를 채워놓는 일은 그냥 요식적인 행위에 다름
아니었다. 왜 있잖은가. 남자와 함께 침대에 드는 여자가 곧 벗어
던질 나이트 가운을 일부러 몸에 살짝 걸치는 그런 행위 말이다.
결국 그날 난 훔친 자전거를 타고 구로동에 있는 자취방으로
갈 수 있었다. 물론 집 가까이 와서는 개천에 자전거를 던져 버
리고 말이다. 그렇게 버려진 자전거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 가
져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버려진 자전거는 아주 많을 테니까
말이다. 만약 자전거 주인이 자전거가 없어진 사실을 알고 경찰
에 신고한다고 해서 경찰이 개천에 자빠진 자전거까지 인양(?)해
지문조사 따위를 하는 등의 수고 따윈 없을 것이었다. 대한민국
경찰이 나같은 좀도둑이나 잡아다니는 그러한 멍청이들은 아닐
테니 말이다. 설령 자전거 주인으로 부터 신고가 들어왔다손 치
더라도 그들은 적당히 찾는 척 흉내만 내다 시간을 보낼 것이다.
무릇 모든 사건이란 잊혀지기 위해 존재하는 거니까. 이처럼 싱
거운 행위도 범죄라는 꼬리표를 달아준다면 난 완전범죄를 한 셈
이다. 홀리 헌트가 여형사로 등장하는 카피켓이란 영화가 기억
속에 떠오른다. 살인에 있어서 예술성을 자부하는(정확하게는 전
설적인 살인범의 수법을 카피하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연쇄살인
범은 뜻밖에도 엣된 인상의 지식인 청년이었다. 마찬가지로 누구
도 나를 절도범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단단하게
몸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녀를 겁탈하려다 실패한 것만 빼면 그
날 일진은 무척 흡족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취하는 것도 최
근 그녀가 내게 취해오는 행동으로 보아 그 일은 그리 어려운 것
은 아닌듯 싶었다.
솔직히 자전거 하나 훔친 일이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라고 용
매니 하는 화학용어와 직관, 논리같은 철학용어, 거기에다 게릴라
니 하는 전투용어까지 동원하여 거창하게 들먹거리냐고 말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게릴라들의 공격은 내게 있어
서 뜻밖의 기습이었고 그 결과로 꺼내기 싫은 낡고 너덜너덜한
기억까지 복사에 복사를 거듭해 이제 막 현상된 포시티브 필름처
럼 영사기의 빛을 받고서 의식속의 스크린에 생생하고 선명한 영
상이 되어 다시 나타났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때, 그러니까 그 때가 여덟살쯤이었을
것이다. 그즈음 내겐 심각할 정도의 도벽이 있었다. 장난감 물총
부터 시작하여 12색 싸인펜, 색연필, 크래파스, 동화책 등 그 대
상은 마치 국립박물관에 진열된 선사시대의 유물 만큼이나 광범
위했다. 난 눈에 띄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훔쳐야 속이 시원했다.
그리고 신통할 정도로 난 물건을 잘 훔쳤다. 그리고 물건을 훔치
다 걸린 적이 한번도 없을 정도로 난 완벽하게 기회를 탈 줄 알
았고 또 그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의 신중함도 있었다.
당시 내게 있어서 훔친다는 행위는 신성함 그 자체였다. 훔쳐야
할 대상이 불쑥 눈에 들어올 때면 난 한동안 그 대상을 주시하였
다. 아마도 내가 훔쳐야 할 그 물건들과 고래 뱃속같은 깊은 이
야기를 나누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지금 그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히 그것은 대화의 형식을 띄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가 나눈 대화는 일반적인 논리를 갖춘 언어행태로 정리되어질 성
격은 아닐 거였다. 물건들은 내게 훔쳐야 할 방법까지 소상하게
가르쳐주었으나 그것은 마치 압축해서 전송받은 프로그램처럼 내
가 행동의 단계에 들어서야 비로소 압축이 풀리면서 제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말이다. 그건 참으로 얼토당토 않은, 이상한 직관이
었다. 어쩌면 그것은 단순히 어린 내가 영화에서 본 장면을 흉내
내는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내가 훔쳐야 할 물건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을 훔쳐야 할 가장 완
벽하고 이상적인 방법이 자연스럽게 머리속에 떠오른다는 거였
다. 그리고 그 방법은 나중에 내가 생각해봐도 불가사의할 정도
로 평소 때의 내 능력 이상이었던 것이었다. 평소때 같았으면 생
각해내지 못할 방법들이 어떻게 그런 신성스런 기분이 들면서 그
처럼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되는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예감들이 행위로 이어질때까지 내겐 실수라는게
없었다. 개개의 독립한 위치에 자리잡은 점들이 어떻게 그처럼
매끄러운 곡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었는지. 그 불가해한
차수 높은 함수를 난 일생동안 과연 도출해낼 수나 있을지.
방은 점점 훔친 물건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내 부모들이었다. 처음엔 친구집에서 놀다가 잠시 빌려왔다고 둘
러대도 그런가 보다 하던 어머니는 어느날 내 방에 그처럼 많은
물건들이 쌓여있는 것을 보고는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나 보
다. 하긴, 그네들이 내게 주는 용돈으로는 도저히 그러한 물건들
을 구입하지 못할 것이 뻔한데 그런것 한번 눈치 못채는 부모는
없을 거였다. 아버지는 다짜고짜 내게 매질을 시작했다. 아버지
는 이 낯선 물건들의 출처를 어린 내가 보기에도 가혹하게, 그리
고 집요하게 내게 다그쳤다. 난 끝까지 친구집에서 빌려왔다고
말했다. 매질은 계속 됐다. 그래도 난 친구집에서 놀다가 빌려온
것들이라는 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한술 더떠서 내 진
실을 믿어주지 않는 아버지를 원망하는 듯한 표정과 함께 그렇게
믿기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이 물건들을 친구집에 돌려주겠노라고
말했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밀리면 부모와의 관계
에 있어서 내 도덕적인 위상은 끝장이라는 위기감이 나를 엄습했
던 것이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경쟁적으로 자신을 뜻을 관철시키
는데 있어서 누가 먼저 도덕적 규범의 우위에 올라서는가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그때 어린 나는 이미 채득하고 있었다. 그
건 지금 생각해봐도 서글픈 인식이었다. 결국 아버지는 그럼 당
장 친구집으로 가서 이 물건들을 돌려주라는 말로 그 혹독한 매
질을 멈췄다.
난 그리 아프지도 않는 다리를 일부러 절뚝거리면서 방안의 물
건들을 들고나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모두 버렸다. 사실,
처음부터 훔친 물건들에서 애착이나 미련 따윈 없었다. 어차피
내 것이 아닌 것들이었다. 진작부터 버렸어야 할 물건들이었다.
그냥 두고 있으면 언제고 화근이 될 것들. 아마도 뒷산 중턱 어
디였을 것이었다. 내가 훔친 물건들을 파묻은 것은. 파묻은 물건
들을 흙으로 덮자 그것은 마치 무덤처럼 돌출되어 있었다. 갑자
기 뇨의를 느꼈다. 길게 하향곡선을 그리며 내 오줌줄기가 갈라
지듯 부서지며 무덤처럼 봉긋한 부분을 서서히 적셔가기 시작했
다. 그날 이후 난 물건 훔치는 놀이가 왠지 시들해졌다.
동숭동에 있던 국립 서울대학교 캠퍼스가 관악산 아래로 이전
을 시작한 것은 그 즈음이었다. 내가 살던 관악산 주변은 온통
공사판이었다. 집값이 크게 오르기 시작했고, 동네사람들은 하숙
을 치기 위해 그때까지 판자집이나 다름없는 헌집을 이층으로 올
리는 공사를 시작했다. 아이들은 공사판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벽돌을 쌓아 집이나 자동차 모양을 만들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
냈다. 여느 동네사람들처럼 내 부모님들도 먹고 살기에 바쁜 시
절이라 아침 일찍 나갔다가 밤 늦게 시든 파같이 몸을 이끌고 집
으로 들어오곤 했다. 그 덕분에 우리는 거의 무한정으로 자유로
워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가 너무 불안할 정도였다. 그즈음 내게
또 하나의 새로운 놀이가 시작됐다. 그 역시 내게 있어선 물건을
훔치는 일만큼이나 신성스런 거였다. 도벽으로 시작하여 충분히
단련된 내 직관이 바야흐로 기지개를 치며 바빠지기 시작한 그런
시절이었다.
이웃에 봉래라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봉래는 나보다는 두살이
많았는데 딸만 셋인 집에서 봉래는 막내였다. 봉래엄마는 대가
무척 센 여자였다. 그녀의 악다구니는 뼈가 으스스 떨릴 정도로
공포스러웠다. 그때 내 눈에 비친 봉래는 매일 엄마에게 매를 맞
곤 했었다. 봉래엄마는 공포스런 악다구니 만큼이나 매질도 무섭
게 해댔다. 마당에 있는 빨래방망이로 봉래의 머리고 가슴이고
무릎이고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팼다. 그녀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때 내 기억속의 봉래는 늘상 엄마에
게 흠씬 두들겨 맞기만 했다.
거의 매일, 봉래와 난 어른들의 눈을 피해서 병원놀이를 했다.
우리들의 병원놀이는 은밀할 수 밖에 없었다. 우선 봉래엄마는
어린 봉래가 아이들과 노는 꼴을 보지 못했다. 봉래엄마가 집에
있는 날이면 봉래는 크고 잡은 집안일을 해야 했다. 걸레를 빠는
일부터 마루를 닦고 빨래를 널고 마당을 쓰는 일들을 하는 봉래
를 난 자주 보았다. 봉래는 일을 하는 중간중간에도 봉래엄마에
게 그 저주스런 악다구니를 들어야 했고 또 모질게 두들겨 맞기
까지 했던 것이다.
우리 엄만 미국갔데.
봉래 가슴 만지는걸 좋아하던 난 봉래 가슴에 장난감 청진기를
댔다. 그럴때면 봉래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듯 바닷물을 들이마
시는 고래처럼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그러나 내 장난
감 청진기로는 그녀 가슴 속은 가슴에 귀만 갖다대도 두리런두리
런 거리는 심장 박동소리 조차도 들려오지 않았다. 의사들이 사
용하는 진짜 청진기를 난 가지고 싶었다.
지금 엄만 그럼 누구야?
이상하게도 봉래 가슴은 내 또래의 여자아이들과는 달리 조금
부풀어 있었다. 난 봉래의 그런 가슴을 만지고 있노라면 왠지모
를 신성스런 기분이 들곤 했다.
몰라. 큰 언니가 그랬어. 내가 장차 미국으로 가게 될지도 모른
대.
청진기가 봉래의 가슴에서 점차 배로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다
른 한손은 의사가 환자의 배를 만지듯 이리저리 봉래의 배에 손
을 갖다댔다. 난 내 자신이 신비스런 어떤 기분에 이끌리고 있다
는 것을 깨달았다. 내 손이 나도 모르게 봉래의 팬티속에 들어갔
다. 매끄러운 봉래의 피부가 손끝에 닿았다. 그러자 봉래가 일어
나 내 팬티 속으로 손을 넣었다. 하지만 이건 늘상 있는 일이었
다. 그녀는 내 고추를 빳빳하게 세우더니 자신의 팬티 속으로 넣
었다. 이것도 늘상 있는 일이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봉래의 감
촉이 전해졌다. 우리는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마냥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러고 있는 시간은 왠지 다른 일상적인 시간과는 달랐
다. 뭐가 다르냐고 물으면 정확하게 대답할 수 없는, 그런 시간이
우리 둘 사이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그
시간은 일상적인 시간과는 분명히 구분된, 그 무엇이 있었기에
그 시간은 분명 신성한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