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고추 숭숭 썰어 새우젓에 간을 맞춘 호박국에 밥 말아먹고 나가 놀았던 기억 나니?” 언니 장성숙씨의 말에 어린 시절 경북 영주에서 살았던 기억을 떠올리는 장미화.
“난 그거보다 엄마가 호박 채썰어 깻잎 뜯어 넣고 부쳐 주셨던 호박 부침개가 더 기억나.”
따가운 한낮의 햇살을 피하기 위해 평상에서 잠시 시간을 보냈다가 호박밭을 향해 나서는 사이, 자매는 두런두런 옛추억을 떠올린다.
“가을은 지붕 위에서 누렇게 익는 호박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튼실하게 잘 익은 놈 한 덩이를 골라 반을 쫙 가르고 넓적넓적하게 썰어 통째로 밥솥에다 찌면 ‘고구마 맛 저리 가라’였어. 그래서 난 지금도 뷔페 가면 호박죽부터 먹어.”
군침을 꿀꺽 삼키며 자매는 아이들 손을 잡고 호박밭으로 들어간다.
“입맛 없을 때 호박잎을 쪄서 쌈 싸먹어도 참 맛있어.”
유치원 교사를 하다 둘째 동규를 가지며 전업주부로 들어앉은 장성숙씨는 “우리 옛날처럼 호박잎 한번 따볼까?”하며 호박잎을 따기 시작한다.
“근데 누가 못생긴 사람을 호박꽃에 비유했을까? 호박꽃처럼 탐스럽고 예쁜 꽃도 드문데….” 말없이 호박잎을 따던 장미화가 호박꽃을 하나 꺾어 들고 언니에게 물었다. “그러게 말이야.” 성숙씨도 맞장구치며 호박꽃을 하나 꺾어 머리에 꽂는다. 무심결에 언니를 따라하던 장미화는 “우리 호박꽃 자매같다”며 깔깔 웃는다.
“이모, 나도 호박꽃 볼래” 하며 민규, 동규가 따라오자 장미화는 조카들에게 호박꽃과 호박잎, 호박을 보여주며 설명해준다.
조카에 대해 애정이 없는 이모가 어디 있을까마는, 장미화는 특히 언니의 아들인 민규, 동규에 대한 정이 유별나다. 고향 영주에서 살 때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기에 성숙씨를 가졌을 때 엄마가 제대로 못 먹었다고 한다. 그런 탓인지 성숙씨는 작게 태어났는데, 마음이 착해 자라면서도 늘 동생에게 양보하여 형제 중 키가 제일 작다는 것.
어느 집이건 언니보다 동생이 눈치도 빠르고 영악스럽게 마련. 그녀의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지 않으려고 장미화는 언니와 싸우기도 많이 하고 괜한 심통을 부리며 언니를 괴롭혔다고 한다. 때문에 장미화는 어렸을 때의 일이 마음에 ‘짠하게’ 남아있다는 것. 그런 언니가 결혼해서 안겨준 첫 선물인 민규는 장미화에게 있어 조카 이상 가는 사랑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장미화는 민규를 ‘애절한 대상’이라고 표현한다. 맞벌이를 하는 언니였기에 손이 달려 민규를 친정에 자주 맡겼는데 바쁜 엄마를 헤아려주기라도 하듯 민규는 순하고 똑똑하고 말도 빠른 것이 도무지 신경 쓰이는 짓을 하지 않는 아이였기 때문이란다. 방송이 없는 날에는 조카가 보고 싶어 동화책이나 옷을 사들고 언니의 집을 방문해 놀다 오는 일이 한때 그녀의 큰 즐거움이었다.
밭에서 식구들이 호박을 하나씩 땄다. “호박 같은 내 얼굴, 예쁘기도 하지요. 눈도 반짝, 코도 반짝….” ‘웃기는’ 재주가 탁월한 이모는 호박 한 통을 집어들고 반짝 쇼를 벌인다. 민규와 동규도 손에 호박을 하나씩 들었다. 어른 머리 만한 호박을 집어든 민규를 보고 동규도 비슷한 크기의 호박을 집었지만 힘에 부쳐 끙끙거리는 모습에 모두들 웃음을 터트렸다.
광주리에 호박잎, 호박을 담고 밭을 걸어 나오는 장미화와 성숙씨 가족. 손에 손을 잡고 밭 사이로 난 황톳길을 걸으며, 씨앗을 뿌리던 봄날의 따사로운 햇살과 여름날의 세찬 빗줄기, 그리고 눈부신 가을 햇살 뒤에 풍성한 열매를 거둬들이는 농부의 심정을 이해한 양 얼굴엔 기쁨이 가득했다.
“우리 호박에 멋진 그림 한번 그려볼까?” 이모의 제안에 민규, 동규의 눈빛이 반짝였다. 저마다 볼펜을 잡고 ‘화가’가 되어 호박에 그림을 그리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직접 밭에서 딴 호박으로 맛있는 부침개를 만들어 먹자는 농장 안주인 이혜란씨의 제안에 성숙씨의 손길이 바빠졌다. “톱질하세 톱질하세” 흥부네 가족처럼 아이들과 호박을 갈랐다. 호박이 갈라지는 순간 전래동화에서 처럼 금은보화가 나오진 않았지만 탐스럽게 익은 호박의 속내 모습에 아이들은 “야호!” 환호성을 질렀다.
손을 넣어도 좋다고 엄마가 허락하자 아이들은 호박 속에 손을 넣고 뭉글뭉글한 촉감을 즐기며 호박 속을 파낸다. 호박 속에서 딸려 나온 호박씨를 엄마가 깨끗하게 씻어 가지고 오자, 장미화와 민규 동규는 둘러앉아 ‘호박씨 까기’에 여념이 없다.
그 사이 성숙씨는 농장 안주인을 도와 호박 부침개를 맛나게 부쳐 들고 왔다. 아이들이 먹기 좋으라고 숟가락 크기로 동글동글 예쁘게 부친 부침개가 앙증맞아 보였다. 먹는 시간만큼 즐거운 시간이 또 있으랴. 서로 입에 넣어주며 사이좋게 오순도순 부침개를 먹는 사이 햇살은 석양을 향해 기울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