甲午혁명 이래 최대 『民衆 蜂起』 80년 『5월 光州』한반도 전체아픔 "분출" 眞相규명 미룬 명예회복은 倫理벗어나 "歷史는 眞實 토해낸다" 本紙 민주大長征나서
『5.18』13주기를 맞이한다. 통한의 세월, 항쟁의 13년 세월을 통해, 光州시민과 全羅도민, 그리고 전국민들이 온몸으로 싸우며 부르짖어온 그날 그날들을 우리는 잊지 않는다. 本紙는 그런 뜻에서 『5.18』의 진상규명은 물론, 가해자와 피해자의 모습을 동시에 담아내는 大河장기시리즈를 마련한다. 앞으로 光州시민과 全羅도민, 전국의 많은 사람들이 저희들의 歷史的作業에 폭넓은 성원을 보내 주시길 부탁드린다. 80년『5.18민중항쟁』에 관계된 1차적 자료(각종 文件 사진 필름 서적(외국서적 포함) 신문(외국신문도 포함) 증언(日記 메모 등)을 언제든지 보내주시기 바란다.
역사는 한 사람의 天才가 쓰는 것이 아니라, 그 민족 그민중들 모두에 의해서 쓰여지기 때문이다. 자료제공 및 증언등의 제보는 光州시 西구 花亭동 134-8(우편번호 502-240)光州每日 편집국 경제부. 전화(062)361-0100. <편집자 註>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않았습니다.-韓龍雲의 詩『님의 침묵』』『역사는 발전한다. 단 역사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고자 하는 그 민족의 의지에 따라 발전할 뿐이다. -프리드리히헤겔』 올해는 1993년. 甲午동학혁명이 『보국안민』과『척외멸양』의 깃발을 휘날린지 1백년이 되는 해요. 3.1운동 광주학생의거를 거쳐『4.19』의 큰뜻을 보듬어 일으켜 세운 지 33년이 되는 해이다. 세계사로는 『프랑스 혁명』이 솟구쳐 전제봉건의 상징인 루이16세를 처단한 지 꼭 2백년이 되는 해이다. 그리고 잊을 수 없고, 오히려 끝없이 한국사와 세계사에『큰 봉우리』를 이룬 5.18민중항쟁이 13년을 맞이하는, 이른바 文民정부 안에서의 첫해가 아닌가.
『1980년 5월 21일 光州의 錦南路. 오후 1시. 계업군에 저항하며 달려가는『시민군』들의 시위트럭이 도청앞 저지선을 뚫으려는 순간, 『빵! 빠바 빵 빵! 펑 펑! 뜨르륵 뜩뜩!』무차별 사격의 총탄이 날아온다. 아아, 이 어인 일인가. 이 어인 일인가. 시위군중들은 도망치며, 『공포탄이 아니다』라고 외치고 외친다. 아수라장.아비규환.전쟁터다. 나는 금남맨션 도매상가 앞 골목에 있는데 아니 이골목에서도 15명의 사람들이 쓰러진다. 장미빛보다 더 붉은 피를 흘리며….
그 시체들은 주로 용감한 젊은이들에 의해서 때마침 달려오는, 아니 死線을 달려오는 트럭에 실려진다. 어깨나 다리에 총상을 입은 사람들은 『병원! 병원!』하며 주위사람들에게 부축되어 병원으로 옮겨진다. 지금 전시내의 병원이 사망자와 부상자로 만원, 심지어 금남로2가 宋산부인과 총상환자를 받아들인다.
오, 그러나 시위차량들은 또다시 밀려간다. 이미 죽음의 공포를 잃어버린듯한 저 빛나는 고을의 光州시민… 光州시민들. 총성이 터져나오는 全南도청을 향하여 거대한 강물처럼 넘실넘실 밀려간다. 그때마다 쏟아져 천둥치는 총소리, 총소리. 시위차량위에서 펄럭이던 태극기도 어느새 땅으로 떨어진다. 피에 얼룩진 태극기! 아아, 피에 얼룩진 우리나라의 태극기! 그때 가톨릭센터입구계단위에 어떤 건장한 중년신사가 서더니『광주시민들이여! 우리 총을 가지러 갑시다. 우리 이러다간 다 죽습니다』라고 울부짖는다.
불화살을 맞은 짐승처럼. 그런 즉석웅변이 금남로는 물론, 광주시내 도처에서 벌어진다. 그러나 뼛속까지 스며들어오는 저 계엄군들의 총소리….
하느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시길래 이렇듯 처참한 인간살육을 방관하고 있단 말인가. 그때 시민들은 웅성거린다. 光州시민들에게 총이 있어야 하는 데, 아니 글쎄 파쇼집단의 계엄군들이 광주시내안의 경찰서 총기들을 이미 모조리 빼내가버렸어요, 라고 동동 발을 구른다. -1980년, 月刊中央(강제 폐간된 잡지) 6월호에 싣기위해 필자가 인편으로 서울에 보낸 원고의 한 대목.』
1984년 甲午동학농민 혁명이래 최대의 민중봉기를 기록하는 1980년 5월 光州민중항쟁. 그리고 그후 13년. 우리는 예컨데 正史『5.18』의 첫장을 시작한다. 그동안 수많은 젊은이들에 의해, 각종 자료집하며 사진책자 혹은 체험담들이 간행되긴 했으나 그것들은 대부분 피해자중심의 글모음이 대종을 이룬다.
물론 위의 각종 자료집하며 다큐멘터리들은 우선 1차적 소중한 자료로 판단된다.
음산했던 어쩌면 『죽음과 죽임의 시절』이기도 했던 그 시절 진리를 사랑하는 용감한 젊은이들의 피나는 노고는 정녕 눈물겹다. 아, 얼마나 굶주리며, 얼마나 쫓겨다니며 이들 젊은이들은 광주의 그날 그날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던가.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항쟁 13주년을 맞이하여 좀더 냉엄하게 『역사』를 바라본다. 그리하여 예의『正史『5.18』』을 다시 쓰는 작업에 선뜻 나선다. 왜냐하면 역사는 그 시대의 요구에 따라, 얼마든지 다시 쓰여지기 때문이다. 가령 『프랑스혁명사』를 보라. 1879년부터 10년동안 계속된 프랑스혁명을 기록한 책들이, 한국의 웬만한 대학도서관을 가득 채울 정도가 아닌가. 한 나라의 하나의 혁명사를 쓰는데,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음을 뽈 때, 오늘의 우리는 가슴이 떨린다.
한 가지 더 밝힌다면『프랑스혁명사연구』라는 전문 月刊誌가 1993년 오늘까지도 꾸준히 간행되고 있는 사실을 들여다 볼때, 우리는 역사가 끊임없이 재조명되는 것을 알게된다.
때는 바야흐로 1993년5월15일. 우리는 金泳三현대통령의 『5.13특별담화문』을 되새긴다. 5共의 全斗煥정권, 6共의 盧泰愚정권에 비해 진일보한 金대통령의 담화문은 우선 수사적 의미가 짙다.『5.18광주민주화운동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되었음은 물론, 韓國민주주의의『우뚝한 한 봉우리』로 재표명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계속해서 金대통령은 『광주의 민주정신을 전국적으로 승화시키는 방향에서, 그리고 광주시민이 원하고 국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방향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거듭 천명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金대통령은 5.18의『진상규명은 역사에 맡기자』고 말했다. 진상규명이 우선 되지 않는 명예회복이야말로, 사실은 역사에의 기만인지를 그 역시 왜 모를까마는-. 金대통령 5.18진상규명부분을 일단『역사에 유보』시키고 있다.
역사는 논리를 요구한다. 먼 안목에서 바라보면 역사는 엉클어지거나, 뒤죽박죽이 아니다. 역사는 때론 보수반동세력이 출몰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大路를 비껴서지 않는다. 역사는 가시밭을 비껴서지 않는다. 역사는 바로 가시밭을 스스로 밟아가며, 그 아픔의 진실을 토해내게 마련이다.
그런뜻에서 우리가 오늘 大河장기시리즈로 시작하는『正史5.18』은 당연히『역사발전』의 논리에 초점을 맞춘다.『5.18』前後의 음험한 그림자들을 추적해 나가면서,『光州』를 한반도 전체의 아픔으로, 光州정신을 한반도 전체민중들의 희망으로 파악해 나가면서 역사의 갈길을 열어보일 것이다. 東西古今의 역사가들이 발견해낸『역사쓰기 방법론』을 모두 끌여들여『5.18』을 진상규명하고『5.18』의 명예와 그 드넓은 정신을 불밝혀 갈 것이다.
자아, 그럼 다시 확인하자. 『역사는 時間과 空間이 짊어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꿈틀거리는『사람들』에 의해 발전되고 쓰여진다. 그래서 歷史라는 사전에는『유보』라는 단어가 없다.』(김준태 부장)
"全民族 차원 眞實바탕 재정리를"
『5.18』13주기를 맞았지만 현실적 의미를 갖는 진상규명과 가해자책임부분은 여전히 뒷전으로 미뤄지고 있다.
金泳三대통령의 5.13특별담화에도 불구하고 부분적인 명예회복에 머물러 있으며, 80년 5월의 아픔은 오늘도 한반도 전체의, 민족의 아픔을 계속 끌어안고 진행되고 있다. 本紙는 大河장기시리즈『正史5.18』을 기획, 지난15일 프롤로그를 시작으로『歷史的事業』에 들어갔다. 본격적인 작업에 앞서 이번에는 각계전문가가 요구하는 시리즈방향과 조언을 듣는다.
姜萬吉고려대교수는 한국사를 집중연구하는 민족사학자이고 宋基淑전남대교수는 방대한 분량의 『光州五月민중항쟁사료전집』을 출간한바 있으며 李壽仁영남대교수는 그동안 光州문제의 전국화에 뜨거운 애정을 쏟아왔다.
(고려대교수.한국사 -姜萬吉) "냉철한 자세로 歷史발전에 기여" 사실과 함께 해석.論評도 곁들였으면
正史란 말은『정확한 역사』라는 의미에 한정되어야 할 것 같다. 민주주의시대에는 왕조시대와 같은 史官이 따로 없을뿐만 아니라 있어서도 안된다. 민주주의시대에는 어떤 의미에서는 신문기자가 바로 사관이라 할 수 있다. 그 말은 신문기자와 그가 ㅆ는 기사가 바로 중요한 史料가 되고, 따라서 역사적 책임이 그만큼 크다는 말도 된다,
5.18민중항쟁의 현장이었던 광주에서 발행되는 신문이『정사5.18』을 쓴다는 일 자체가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그 의미에는 책임이 따르게 마련이며, 책임이란 곧 정확성을 말한다. 현장에서 쓰는 역사일수록 감정의 개입없이 사실 그 자체를 추구하려는 냉철성이 요청된다. 피해자의 입장과 가해자의 입장을 모두 넘어 오로지 역사발전 방향에 초점을 두고 객관성을 높인다는 자세가 중요하다.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 그렇게 쓰기란 어려운 일이다. 차라리 절대 객관성이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쓰는 것이 그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쓰는 것보다 오류를 덜 범할수 있다는 이치까지도 터득하고 쓰는 것이 바람직 하다. 사실을 밝히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라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말이 되겠다.
그렇다고해서 사실을 밝히는데만 한정하라는 말은 아니다. 사실을 밝히기에 최선을 다한 후 그 사실에 대한 해석이나 논평이 있어도 좋다. 『정확한 역사』를 쓴다는 말은 사실만을 충실히 밝힌다는 뜻 뿐만이 아니다. 5.18 민중항쟁이 있은 10여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항쟁의 현장에서 밝힌 사실 그 자체와 함께 해석과 논평까지 합쳐서 다음의 역사서술을 위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비록 짧은 기간에 광주 일원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5.18민중항쟁은 거대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렇다 해도 거기에서 일어난 일의 모두가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많은 事實중에는 史實이 되는 일과 그렇지 못한 일이 있다. 事實과 史實의 차이는 관점과 시대에 따라 다르게 마련이며 그것을 정확하게 구분하기란 전문역사가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事實과 史實이 관점과 시대에 따라 다르고, 그 차이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음을 인식하면서 계획을 세우고 취재를 해서 5.18민중항쟁을 재구성하는 경우와, 그런 인식이 철저하지 못한 경우와는 그 결과가 달라진다는 점을 귀뜀해 주고 싶다. 역사서술에 공헌하는 경획이 되기를 기대해 마지 않는다.
(전남대교수.국문학-宋基淑) "과장없이『光州정신』선양 계기로" 특히 武裝과정에 세심한 추적있기를
역사서술은 1차 사료가 얼마나 충실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조건이겠는데 광주민중항쟁의 경우 아직도 결정적인 자료들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가해자들이 자료가 그렇다. 지금 진상을 밝히라는 것도 사료의 각도에서 보면 그 자료를 내놓으라는 것이 된다. 이 사건을 전체적으로 기록하는 결정적인 어려움은 바로 이점에 있을 것이다. 항쟁 당사자들에게 내란죄를 적용했는데 바로 이런 점만 보더라도 사실을 얼마나 왜곡했는가를 알수있다.
필자가 책임을 맡고 있는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에서도 그 1차서업으로 이 사건에 대한 사료를 조사 정리했으나 가해자측의 중요 자료는 찾아내지 못했다. 국회 광주항쟁청문회에서도 가해자들이 나와서 증언을 했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 증언으로 일관했다. 지금까지 알아낸 사실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 자료를 없애버렸거나 은폐하고 있는가를 확인한 일 정도라고나 해야 할 것이다.
자료면에서 이 사건과 정반대의 경우에 있는 것이 명년으로 1백주년을 맞는 동학농민전쟁이다. 이 사건은 가해자측 즉 관변측 자료만 남아있고, 피해자측의 자료는 거의 없다. 농민군들은 거의가 무식한 사람들이라 기록을 남가지도 않았고 70여년간 내란으로 규정되어 왔으므로 그런 자료를 보관하는 있는 것 자체가 죄가 될 지경이라 스스로 철저하게 없애버렸던 것이다. 농민군 측 자료로 남아 있는 것이라면 오지영의 『동학사』와 단편적인 기록이 있을뿐이고 구전이 많으나 구전은 신빙성이 약해서 방증자료로밖에 대접받지 못한다. 그런 사건과 비교해보면 광주민중항쟁은 자료면에서는 풍부한 셈이다. 지금까지나타난 자료만 가지고도 항쟁전체 모습을 어느만큼 사실에 가깝게 구성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첫불에 배부를 수 없으므로 지금 있는 자료만 가지고라도 충실하게 사건을 재구성한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더구나 지금 단계에서 신문이 이 일을 한다는 것은 시의에 맞는 일로 보인다. 기술을 해나가면서 피해당사자들의 증언 등 과범위한 협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일은 사건을 재구성한다는 일 자체에도 의미가 있지만 그 정신을 선양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만큼 중요한 일로 여겨진다. 그러나 역사서술인만큼 과장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특히 무장투쟁 같은 부분은 과장될 수 있으므로 무장과정 등 서술에 세심한 배려를 해야할 것이다.
호남 고립 극복 기틀 마련 기대 80년대 한반도 아픈 연대적 접목 중요 (영남대교수.정치학-李壽仁)
光州每日이『正史5.18』이라는 장기기획물을 연재한다는 사실에 뜨겁게 치하드린다. 光州每日이 이미 그 방대한 기획을 결심한 이상, 결실을 거두기위해서는 뚜렷한 정향이 절실히 요청된다.
무엇보다도 먼저 기획팀은 5.18항쟁이 광주의 전유물이 아니라 전민족의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한국현대정치사의 격량속에서 80년대는 민족의 민주.자주.통일문제를 비롯 농민 노동자 지식인 종교 여성 화이트칼라운동 나아가 주체적 학문운동이 폭발한 연대다. 이것은 5.18항쟁에 힘입어 민족의 잠재력이 분출되어 성장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기획팀은 이 문맥위에서 투철한 시민정신과 치열한 역사의식을 가져야된다. 광주시민, 나아가 온겨레에 대한 열렬한 애정, 역사벌전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이 기획취재의 성공의 전제다. 이 애정과 신념은 기획취재팀이 현장답사와 관련인물면담에 앞서 반드시 전문가들에 의한 기본교육을 받아야만 이론적 무장의 주체적 추동력으로 전화될 것이다.
다음으로 기획취재는 전문가들의 검증에 따라 거시적 정향과 미시적 정향을 정립함으로써 자신의 축적된 취재경험을 탁월한 취재능력으로 실현시킬수 있을 것이다.
거시적 정향의 으뜸은 두말할 나위없이 5.17신군부 쿠테타의 국내외적 역사적 배경문제다. 드러난 현상은 언제나 뿌리깊은 본질로부터 나오는 법임을 철저히 확인해야 된다. 온 국민이 광주시민학살에 분노의 공감대를 형성해야만 공주문제는 풀리기 때문이다.
둘째, 이 기획은 호남고립 문제를 극복하려는 불발의 정치적 의지를 가져야한다. 광주문제의 획책과 미해결은 아울러 이 점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이 점은 위해서 지적한바 광주시민의 희생위에 80년대가 모든 분야에서 민족의 저력이 상승된 선발된 시대로 승화되었음을 철저히 취재해야 한다. 오늘의 문민정권의 출현도 마찬가지로 5.18항쟁의 결실이다. 5.18항쟁이 광주가 아니라 전 민족의 역사적 자산이라는 평가가 확산될때 5.18항쟁과 호남고립은 극복의 기틀을 마련할 것이다. 셋째, 객관적인 역사적 청산의 개념을 적용해야 한다. 반세기의 한국현대사에서 역사적 노폐물을 청산할 수 있는 네차례의 호기가 있었으나 모두 무산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측1945년 8.15시기, 4월혁명시기,『80년의 봄』시기와 6.29선언뒤의 5공천산시기다. 광주문제를 통해 역사적 청산을 성공시켜야만 하는 과제는 민족사의 요구다.
미시적 경향은 너무나 많으나 간추리면 뺄수 없는 몇가지가 있다. 첫째, 12.12하극상사건의 진상규명은 광주시민학살문제와 직결돼있다. 둘째, 피해자의 정확한 숫자에 근접해야 함은 인도적 차원을 넘어 국민적 인식의 확산을 통해 광주민중항쟁의 역사적 고립화를 척결할 수 있는 열쇠다. 셋째, 보안사 안기부 육군 등 관련기관의 보관문서 녹음 보고서등 미공개 관련자료를 모두 발굴해야 한다.
넷째, 광주시민학살에 참가한 병사.장교들의 증언, 참회기록, 양심선언등 가해자의 자발적 육성이 나오도록 호소해야 한다.
모든 것을 접어두더라도 철저한 인식이 요구되는 바는 오늘날의 문민정권의 주체적 열량의 한계와 국민적 동의기반의 강력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광주시민이 개혁의시대에 왜 혁명적 요구를 절제해야 하는가에 대한 정답의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취재팀은 광주시민이 오늘날 최대한 실익을 확보하는 실사구시의 단계를 거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이 정권의 주체적 역량이 강화될때 광주문제의 진상규명, 책임자 처리라는 역사적 청산단계를 맞이할 것이라는 인식아래 취재팀은 활동해야할 것이다.
"『5월 불꽃』은 民族의 영원한 熱量" 新군부 사전시나리오說등 다각적 추적 민족사에 끼친『5.18』現在性부각최선 抗爭정신고양…『자문委』구성 철저한 檢證.자문거칠것
姜萬吉교수의 말대로 오늘날의 신문기자는『史官』그 이상의 역할을 수행한다. 本紙는『5.18』13주기를 즈음해 大河시리즈『正史5.18』을 시작했다.
지난 15일 첫글에서는 기획을 시작하는 이유와 역사적 의미를, 22일 두번째글에서는 전문가가 요구하는 시리즈를 방향과 조언을 실었다. 이번에는 그동안 본시리즈 특별기획팀이 수차례 논의를 거쳐 정리한 기획방향, 서술관점 및 방법, 주요내용, 1차목차 등을 실어 序說을 마무리 하고 시리즈 4회부터 본격 현장취재보도를 약속드린다.
본 기획의 궁극적 목적은 『5.18』의 역사적 의미와 성격, 민족사적 좌표와 위상을 드러내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5.18문제의 해결과 나아가 민족사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따라서『正史5.18』은 현재의 시점에서 그동안 밝혀진 진상과 자료를 재구성.보충.정리함은 물론 아직도 은폐.곡해된 채 깊숙이 숨어있는 가해자측 자료발굴과 방증취재 그리고 앞으로 계속될 5.18진상규명작업에 1차적인 초점을 맞출 계획이다.
새로 발굴, 취재되는 내용은 부분적인 사료에 그치지 않고 5.18의 총체적 歷史性을 밝히는데 보태지면서『5.18』의 현재성을 강하게 부각시켜 나갈 것이다.
『正史5.18』의 기본서술은 通史的체계를 유지하되 때에 따라 주요쟁점과 주제별로 분류사的 서술체계를 병행하면서 저널리즘의 특성에 맞는 쉽고 간결한 문체를 유지해 교훈이 되는 읽는 歷史를 만들어 갈 것이다.
『5.18』은 80년 5공화국의 『光州폭동사태』에서 6공화국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는 兩是論을 겨쳐 이제『5월민중항쟁』으로 그 성격이 변해가고 있다.
李壽仁영남대교수의 『5월항쟁의 불꽃은 민족의 영원한 열량이며 그 열매는 민족의 항구적 양식이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따라서『正史5.18』의 관점과 歷史인식은 외세를 등에업은 군부.폭압.독재에 항거한 다양한 민중들의 시각에서, 그리고 민주와 통일로 향하는 민족사적 입장에 서고자 한다.
『正史5.18』의 큰 구성은 80년 5월을 기점으로 維新시대를 중심으로 한 前史,80년5월 항쟁기간, 이후의 한국사회 전반에 끼친 영향과 계속 진행되고 있는 5.18문제 등을 後史로 연결한 예정이다.
전사는 20회가량 5개월, 항쟁기간은 70가량 1년6개월, 후사는 30회가량 7개월 총 1백20회 3년여 이상을 연재할 계획이다.
前史부분은 유신시대 질곡상황과 거기에 맞부딪치는 민족.민주운동, 특히 光州.全南의 조직적인 反유신운동을 생생히 서술해 5.18의 원인과 성격을 규정하는 중요한 부분이 될 것이다.
제2부『장엄한 항쟁』은 5.17쿠테타의 무참한 폭력에 맞서 민주와 통일을 염원하며 죽음으로 항거한 光州.全南시.도민 동시에 진행된 전국의 투쟁상황을 시차별로 정리한다.
이와함께 진상규명의 초점이 돼 있는 ▲사전 군부계획설(시나리오설) ▲美國배후조종설 ▲발포명령자 ▲정확한 사망자수와 암매장장소등에 대한 정확하고 진전된 서술 ▲항쟁의 주체 ▲민중자치질서 ▲무장투쟁의 성격 등이 폭넓게 주요쟁점과 주제로 서술될 것이다.
여기서『사전군부계획설』은 최근 韓相雲서울대교수의『신군부가 모종의 목적을 가지고 위기를 의도적으로 조성하기 의해 일련의 작전을 수행하고, 대중의식속에 깊이 쌓여 있던 지역편견과 레드콤플렉스를 이용해 위기를 관리하고 권력을 창출시키는 수법이 채택됐을 가능성』을 적시한 것이라든가 이를 뒷받침하는 당시 투입 군인들의 증언이 계속되고 있어 본 기획에서도 중요한 주제로 부각될 것이다.
마지막 3부『民主化와 統一로』부분은 80년대가 창출한 시대정신으로서 80년대는 물론 현재까지 민족과 사회도로 조명하는 장이다.
즉 항쟁의 진정한 의미를 밝혀내고 편입시키고자 하는 진상규명투쟁과 항쟁의 이념을 사회 전부문에 계승시키고자 하는 민족민주운동의 노력, 정치.사회.문화제 영역에 파급된 5.18의 결실들, 마지막으로 5.6共의 몰락과정들이 그것이다.
기획팀은 이 지난한 작업이 힘겹고 부담스런 것임에 틀림없지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5.18』의 지속적인 성리작업이면서 완전히 해결과 역사적 비전을 위한 이시대지역언론의 책무로 여기고 최대한의 역량을 모으기로 했다.
이런뜻에서『正史5.18』은『正史』로서의 충실을 기하기위해 전국 유수의 학자와 관련 전문인으로『자문위원회』를 구성해 수시로 검증과 자문을 거칠 계획임도 아울러 밝힌다. |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