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주막의등불
 
 
 
카페 게시글
죽령대로 스크랩 <나의 옛길탐사일기 Ⅰ-Ⅱ>
양효성 추천 0 조회 25 10.03.07 11:3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나의 옛길탐사일기 Ⅰ-Ⅱ>

몸의 길, 마음의 길, 그리고 만남과 헤어짐들.|

 

 

양효성 선생님(이하 편의상 저자로 약함)이 이번에 쓴 <나의 옛길 탐사일기>는 책 제목에서 보듯이 일기다. 일기란 그날그날의 느낌과 생각들을 일정한 틀없이 쓰는 미셀러니와 에세이의 중간쯤이라고나 할까. 남에게 다 보여주기에는 프라이버시가 담겨진 글이다.

 

자신의 내면적 독백이 드러나는 일기를 공개하는 것은 마치 처녀가 잠옷을 걸친 채 자신을 보이는 것처럼 적잖이 망설여지는 일인데...

 

한양을 수도로 한 조선 왕조는 약 600년간 존속했으니, 경부 옛길의 모습과 역할, 의미도 조금씩 변천해 갔을 것이다. 조선시대는 전기와 후기로 보통 나눈다. 저자가 30년 전쯤 구했다는 책의 광해군 때 지도는 조선후기 초입 무렵의 것이다.

어쨌든 먼저 눈에 들어온 정보는 최영준이라는 지리학자의 ‘영남대로’에서 따온 옛 경부3로에 대한 아주 기본적인 지도다.

 

잠시 조선시대 조.일간 사절단을 간단히 정리해 보자.

 

조선 전기에는 조선 사절의 일본 파견이 18회에 달하였고, 일본국왕사의 조선 파견이 71회에 달한다. 그러나 조선 국왕이 파견한 사절이 모두 통신사의 호칭을 갖지는 않았으며, 이중 쇼군(將軍)에게 간 것은 8회 뿐이다. 명칭도 회례사(回禮使)·회례관(回禮官)·보빙사(報聘使)·경차관(敬差官)·통신사·통신관(通信官) 등 일정치 않았고, 목적과 편성도 다양했다.

 

한편 조선 후기의 경우는 임진왜란 직후, 1607, 1617, 1624년에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는 이름으로 국교 재개를 위한 강화교섭과 포로 귀환을 위해 사절단을 파견했다. 그 뒤에도, 국정탐색, 막부장군의 습직 축하 등 역시 정치·외교적인 목적에서 뜸하게 통신사를 파견했다.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1603-1868) 체제 하에서 모두 12회 쯤 파견되었으니 약 20년에 1번꼴로 파견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조선 후기 일본으로부터 일본 국왕사의 조선파견은 금지되었다. 일본국왕사의 상경로가 왜군의 침략 루트로 이용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대체로 문경새재(조령)를 넘는 노선이 사신단의 주요 노선이었다.

 

한편으로 대마도와의 실질적이고 간편한 통교를 위하여 우리 쪽에서는 문위행(問慰行)과 팔송사(八送使) 가 있었고, 일본에서는 차왜(差倭)제도가 있었다.

 

이렇게 정리해 보면 조선시대의 옛 경부길은 국제적으로 자주 이용했던 길이라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그만큼 일본과의 관계가 퍽이나 냉랭했음을 반증한다.

 

특히 고려말 왜구의 침략이 우리 민족구성원들에게 일본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 경계심을 적지않게 부러일으켰던 것같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이성계는 왜구 격퇴로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고 조선 왕조를 개창했다. 게다가 유교적인 폐쇄적 대외정책까지 곁들어져 일본과의 관계는 더욱 소원해졌을 것이다.

 

나의옛길 탐사일기 1권 표지 

 

그럼 누가 이 경부 옛길을 이용했을까.

 

나의 짧은 지식정보에 한정해 볼 때, 조선 전기에는 그렇게 활성화되지 못했을 것이다.

 

낙동강과 남한강으로 이어지는 수로, 즉 지도 안의 중로는 특히 중앙 정부의 세곡이나 공납 운송로로 크게 활용되었을 것이다. 이것도 1년에 2번정도였다. 그외 수령의 부임이나 관의 문서수발에 이용되었을 것이다.

 

본격적으로 이 길들에 사람들의 오고감이 활발해진 것은 조선후기에 와서일 것이다. 조선 후기 경제적 생산력이 일정하게 증대함으로써 지방의 5일장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민중 또는 서민들의 경제. 사회. 문화적 역량이 성장하면서 서민들의 발자국 자국이 한량없이 쌓여져 민중의 길이 되어 갔을 것이다.

 

옛 경부3로 중 죽령을 중간에 두고 있는 좌로는 그중에서도 가장 오고감이 뜸했을 것이다.

저자는 그 좌로를 탐사길로 택했다.

가보지 않았고 제일 먼 길이라서...

 

저자는 자신의 힘에 겨운 배낭을 짊어진 그림자 모습으로 아무말없이 첫페이지를 열었다.

고독하게 걷고 싶어서였을까.

그림자는 몸에 대해 마음 같은 것이다. 그림자는 평면으로 투영된다. 하지만 어떤 면에도 투사된다. 곡면에도 직각면에도 카오스적인 면에도. 우리 몸은 그럴 수 없지만 그림자는 요상한 것이다.

그림자는 마음과 같다.

저자는 옛길 탐사를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찾으려 하는 것일까.

그리곤 마음의 여정을 일기로 남긴 것일까.

 

이어지는 ‘주막의 등불’이란 자작시의 마지막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밤바람 가는 길마다

그림자 없는 내가 간다.”

 

마음마저 어둠 속에 던져 무심해지고 싶어서였을까.

글은 글쓴이의 실체와 사유를 비춰주기 마련이다. 물론 그 모두를 볼 수는 없지만.

 

주막의 모습은 요즘 눈높이로 볼 때 참 작은 공간이었을 것이다.

부엌 딸린 두서너 칸 정도 되는 초가 건물이 아니었을까.

손님이 북적이면 앞마당 평상에서 술자리가 펼쳐졌을 것이다.

저자는 주막에 대한 애틋한 향수를 갖고 있나 보다.

그에게 주막은 뉴스센터이자 터미널이다.

이런저런 세상 소식과 설들을 전해듣고 또 전해주고. 그래서 세상만평이 오가고.

그리곤 잠시 풀었던 여행길을 다시곤 하는.

마치 소피스트들이 세상사 여행을 많이 한 자들이었듯이.

오늘날에도 얼마나 떠돌며 보고듣고 경험했는가가 중요한 세상만평의 가늠자가 되곤 한다.

하지만 걸죽한 육자배기가 흘러나오고, 침튀기는 만평이 오가며 세상 소식을 주고받는

그런 주막은 오늘날 사라지고 없다.

사람들은 집에서 tv나 모니터를 통해 세상 소식을 보고들으며,

tv 토론이나 다음의 아고라같은 이런저런 사이버 공간에서 만평을 대리만족한다.

 

저자의 모든 길을 따라 가면 또다른 기행문이 될 것이고,

기억에 남는 몇몇 단상들을 끄집어내 볼까.

 

많이 알지 못하지만 내가 아는 저자의 두드러진 장점은 몇가지 있다.

하나는 어릴 적부터 몸에 익혔다는 한문 실력.

다른 하나는 폭넓게 오가며 넘나드는 문화적 상상력.

그리고 세상사에 대한 나름의 각도 있는 비평력 등.

그래서 벼익은 양평의 황금 들녘에서 저 세상 고흐를 불러오고, 남한강 늦가을 경사진 밭의 부부를 보며 오르세 미술관에 걸려 있는 밀레 ‘만종’의 환영을 오버랩시킨다.

그리고 글 사이 사이의 사진들이 글과 어우러지며 그렇게 상상력을 자극한다.

 

남한강에서 제일 아름다웠다는 여주의  부라우나루 

 

우리에게 인생을 마감한다는 건 뭘까.

누구나 그렇지 않겠지만 사람들은 부모 사후에 비로소 이 화두를 실감하며 안고 살게 된다.

유전자를 몸에 전해 남겨준 부보의 죽음은 이제 다음이 곧 자신들 차례임을 동물적으로 직감토록하기 때문이다.

2005년 10월 11일, 벼베기가 끝난 여주 들녘에서 필자는 이 화두를 던진다.

가지런히 마감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저자의 이번 옛길 여행도 그러한 ‘화두풀이길’이었을까.

 

저자가 ‘옛 시인의 노래’를 들으며 거닐었다는 단양의 남한강변 아스팔트 산책로를,

높은음자리표 거꾸로 한 가로등이 불 밝히기 전쯤에 낙엽을 바스락이며 쓸쓸이 걷고 싶다.

장미터널로 이어질 때까지.

그 시각쯤이면 해가 서(西)로 기울며 남한 강물에 헤적일 것이다.

 

어떤 똑똑한 서울토박이가 나에게 이렇게 되물었다.

“우리나라 땅에 군위군이란 곳이 있어요?”

나는 언젠가부터 우리나라(남한)의 군단위 이름은 거의 그 위치와 함께 머리속에 암독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구 북-서-동쪽 군위와 청송군은 사실 밟아보지 못한 것 같다.

책 가운데 저자가 2005년 11월22일 찍은 사진은 나에게 고마운 적선을 해주었다.

팔공산 북서편으로 있는 군위의 제2석굴암은 꼭 가고 싶다. 흑백 사진으로 표상된 암벽과 그중 큰 점같은 석굴이 인상적이다. 굳이 한 말 덧붙이면 돈황 막고굴이나 룽먼, 윈깡 석굴들보다 더 고독해 보이는 군위, 그리고 석굴... 붓다.

 

가는 김에 대한민국 오지 중 한 곳이라는 청송(靑松)에도 들러 소나무가 얼마나 푸른지 보고 싶고 진보(眞寶)면에 정말 진짜 보물이 있는지도 확인하고 싶다. 이 해 가을이 가기 전, 11월쯤에는.

<나의 옛길탐사일기>는

요즈음 유행하는 옛길 복원과 같은 사회문화적 유행과 일정하게 관계는 있는 것일까.

근자에 제주도 올레길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있으며, 지리산 둘레길도 그러하다.

그러자 이곳저곳 지자체들이 옛길 복원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우리 사회와 사람들, 그동안 참 바쁘게 앞만 보고 살아 왔다.

숨가빴던 그 달음질에서 이제 좀 숨고르며 걸어온 길을 돌아볼 때가 된 것은 아닐까.

 

그래서 우리 자신 그리고 이웃들, 우리들이 살아왔던 살림살이들, 우리 길과 땅, 나무와 숲, 새와 들짐승들. 많이 멀어진 것들에 대한 향수가 우리의 몸들에 스며오는 것은 아닐까.

 

또 그래서 이쯤에서 20세기 우리의 삶과 문화에 대해서도 곱씹음과 사유함이 깊고 넓게 필요한 건 아닐까.

 

반도의 잘린 반쪽에서 거칠게 땀흘리며 죽기로 싸우다시피하며 살아온 우리네 사람들이 20세기 말에 자가용이 대중화되자 자동차로 국내를 바삐 헤집고 다녔다.

기마민족의 피같은 본성이 되살아 난 것일까. 팩키지 여행으로 또 바삐 해외를 다녀왔다.

 

이제 ‘걸어서 세계 속으로’ 가기도 하고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세계 구석구석의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물론 경제적 여유가 있거나 혹 많지 않지만 돈도 조금 있는 사람들이, 시간도 짬낼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면 나름의 취향과 목적을 가진 사람들로 제한되지만 말이다.

 

21세기가 들어오면서 이제 우리 사회는 문화적 호흡을 조금씩 고르고 있다는 느낌이다.

차로 달리기보다는 걷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모두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자동차로 스쳐지나기 보다는 가는 길에 하늘도 좀 바라보고, 바람결도 맞으며, 만나는 이웃과 한번 말도 건네며, 그 지역의 먹거리도 진득하게 맛보며, 그렇게 걷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자신을 돌아보고 또 때때로 자신에게 말 걸며.

현무암 사이로 불어오는 제주 바다바람을 살갗으로 느끼며, 파도 소리 벗삼아 그렇게 올레길을 걷고 싶으며, 지리산 골 사이 스며 있는 진한 숲향을 맡으며, 또 그 골짝골짝 담겨 전해지는 아픈 사람 이야기들을 듣고 되새김하며 그렇게 걷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뒤틀린 마음 자락을 곱씹고 휘둘린 집착의 그림자를 바람결에 날려 보내려 하는 것이다.

우리 몸은 그렇게 자연이다.

 

부산 초입의 선돌 - 소박한 것이 아름답다는 국가의 이념을 보느듯하다.

 

[곁들임 말]

 

1. 죽령 이남을 다룬 책 2부의 영천 터미널쯤에서 ‘쌍놈의식’을 목도하고는 양선생님이 좀 화가 났던 모양이다. 버스운전수와 가게 노인과의 대화 속에서, 그리고 버스운전수들의 맹목적인 영호남 지역감정 발언까지 곁들여졌으니. 그리고 Y일보의 P와L을 만나 저녁식사와 술도 곁들이고.

유럽과 일본의 소도시들에 산재한 많은 박물관들.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 천민들은 여유없이 그저 바삐 왔다갔다한다는 것. 영호남 부자들은 서로를 오가며 여흥을 즐기며 문화적 음미까지 한다는 것. 여행이란 그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느끼고 배우고 온다는 것. 왕오천축국전, 삼국유사, 열하일기, 서유견문이 그러한 소산이라는 것.

그날 글은 그동안 선생님이 말하고 싶었으나 꾹 참았던 것을 토해내는 것 같았다.

훈화조의 말걸기지만 진지한 분위기는 잃지 않았다. 좀 취했던 것 같다.

 

2. 왕숙천(王宿川),, 역(驛)과 참(站), 시조(時調)는 시(詩)가 아니라 時節歌調라는 것 등등.

사소하지 않은 한자어들에 대해서도 흥미있게 배웠다.

 

3. 범인(凡人)은 다가서기 힘든, 그리고 나로선 무척 부러운 양 선생님의 큰 장점은 카리스마(?) 있는 특유의 친화력이다. 본인은 애써 그렇지 않다 하겠지만.

항상 사람들과 소통하길 좋아하고 또 모르는 이에게 은근한 훈화조의 말걸기를 좋아한다.

그래도 상대방이 그렇게 기분나빠하지 않고 오히려 진지해 진다는 것.

그 바탕엔 인문적 사유와 자세가 탄탄하게 자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풍부한 입심으로 상대방이 대체로 지루해 하지 않는다는 것은 금상첨화다.

무엇보다 준수하신 외모, 자신만의 격조 있는 패션까지.

책 후기 뒤편의 만났던 많은 사람들의 한 컷(cut) 한 컷들이 그러함을 대변한다. <*>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