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CPA 미야노우라다케 산행기
글 이종열 ‧ 다인회계법인 공인회계사, 수필가, 02-3446-3688, rjy48@yahoo.co.kr
<올해로 제12차를 맞는 한공회 해외산행은 일본 큐슈의 최고봉인 미야노우라다케(宮之浦岳, 해발고도 1,936m)를 다녀왔다. 총 37명이 참가했고, 10월 1일 출국하여 5일에 돌아왔다. 미야노우라다케가 있는 야쿠시마(屋久島)는 난세이제도(南西諸島)의 하나로 큐슈 본토에서 60여 킬로미터 남방에 있는 조그만 섬이다. 아열대성 생물과 특이한 지형으로 일본 국립공원인 동시에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
Ⅰ. 가고시마의 가을속으로
가고시마(鹿兒島)국제공항은 모든 안내판이 한글로 씌어있어 우리나라 지방공항에 온 것처럼 편하다. 그러나 때늦은 태풍이 야쿠시마(屋久島)로 향하고 있어 섬으로 가는 페리가 출항을 않는단다. 이렇게 쾌청한 날씨에 무슨 태풍예보를 했을까. 반년동안 준비했던 일정을 부랴부랴 조정해야 했다. 원래는 트레킹을 먼저하고 가고시마지방 관광을 할 작정이었으나, 부득이 선후를 바꿔 먼저 관광을 하고 제4일에 산행을 하기로 했다.
기상조화로 평소에 가고 싶었던 가고시마를 천천히 관광할 기회를 얻은 것도 행운이다. 방금 물청소를 한 것 같은 회색지붕은 때마침 영글어가는 황금빛 나락논과 조화를 이루며 선진일본의 산뜻한 농촌풍광을 연출한다. 일본 시골은 고층아파트가 안 보인다. 지진 때문이라지만 들녘에 불쑥 돌출한 우리 농촌의 아파트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내겐 이것마저 부러움을 자아낸다.
삼나무가 울창한 이부스키 계곡에서 ‘소멘나가시(흐르는 국수)’라는 재미있는 일본식사를 한 것을 시작으로, 사스마(薩摩)의 후지(富士)로 불리는 카이문다케(開聞岳, 해발 924m)화산을 보고, 이케다(池田)호수에서 뱀장어도 보았다. 지란(知覽)사무라이 마을에서 전통을 느꼈고, 땅끝 마을 ‘나가사키바나(長崎鼻)’ 등대까지도 갔다.
수나무시(砂むし) 검은 모래에서 파란 하늘을 보며 찜질도 했고, 해발 800m의 계곡온천유황증기 속에서 별을 보며 낭만과 우정을 피우기도 했다. 사쿠라지마(櫻島) 야외 족욕(足浴)온천에서 생맥주를 마시며 활화산 정상에서 금년 들어 81번째로 폭발하는 허연 화산연기도 보았다.
기리시마 신궁(神宮)에 들어가니 마당에 800살이 넘은 삼나무 신목(御神木)이 신궁의 위용을 더한다. 높이 35미터에 둘레가 7미터가 넘는 거목이다. 신궁 옆 계곡에도 아름드리 삼나무가 빽빽하다. 삼나무(杉, Japanese cedar, Cryptomeria japonica)는 낙우송과의 상록교목이다. 수피는 적갈색이고 가지와 잎이 빽빽이 나서 원뿔형으로 40미터까지 자란다. 잎은 굽은 바늘모양이 나선으로 배열되며 말라도 떨어지지 않는다.
삼나무는 일본 특산이지만 우리나라 남부에도 자생한다. 연평균기온 14℃, 강우량 3,000밀리미터 이상 되는 산지에서 자란다. 담양의 가로수 길로 유명한 메타세콰이어(미국삼나무)는 이 삼나무와는 다르다. 태백산 주목은 살아 천년, 죽어서 천년이라지만 야쿠시마에는 넓은 면적에 수령(樹齡) 2∼3천년생 삼나무가 많다.
신궁에 야쿠삼(屋久杉)으로 만든 항아리와 젓가락 같은 공예품이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삼나무 재목의 주 용도는 건축과 선박이다. 이율곡이 외가인 강릉앞바다에 삼나무 껍질이 떠밀려오는 것을 보고 일본의 내침을 예감했다. 선조대왕에게 주청한 십만양병론이 아쉽게도 수용되지 못하여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고초를 겪지 않았던가.
미야마(美山)에 있는 심수관도요지를 찾았다. 심수관은 임진왜란 때 왜군에 끌려 건너온 도자공(陶瓷工)으로 죽어서 도자기 신이 된 명인이다. 그 기예가 일본 도자기술을 선도했고 유럽의 본차이나가 되었다. 청송 심씨(靑松沈氏) 수관(壽官)이 일본 가문으로 정착하여 ‘심수관 15대’까지 업을 이어오고 있다. 우리 대통령이 수여한 훈장에다 정문에 ‘대한민국 명예총영사관’이란 전시장문패를 보며 늦었지만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을 해 본다.
과학문명으로 무장한 서양세력이 대항해의 끝점인 극동에 밀고오던 17세기 무렵 큐슈는 서양문물이 진입하는 일본의 관문이었다. 이탈리아의 지오반니 선교사가 야쿠시마에 상륙했고, 총포와 종자를 실은 포르투갈 무역선이 다네가시마(種子島)에 들어왔다.
여행은 자기가 사는 곳을 떠나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다. 서양과학의 낌새를 깨치지 못한 조선은 파도에 밀려온 하멜(Hamel)을 대접해서 돌려보내는 군자의 나라였다. 그동안 일본은 선진문명을 알차게 수용했다. 이 순간적 상황포착의 차이가 삼백년 후에 일제강점이라는 아픈 역사를 초래했다고 생각하니 아쉬움을 금할 길 없다.
가고시마에서 야쿠시마까지 130km해로를 날듯이 달린 제트페리는 두 시간이 채 못 되어 안개에 쌓인 미야노우라(宮之浦) 항구에 닿는다. 먼저 ‘환경문화센터’에 들어가 아이멕스 영화로 야쿠시마의 사계를 관람한다. 부슬비를 맞으며 섬 최대라는 센비로(千尋)폭포에 갔다. 높은 바위산을 뚫고 2단으로 떨어지는 폭포를 조망하며 내일의 산행결의를 다진다.
Ⅱ. 미야노우라다케를 오르다.
밤새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잠을 설쳤다. 쥐가 긁는 소린가 아니면 물이 흐르는 소린가하며 뒤척이다 아침에 보니 그것은 창을 때리는 빗소리였다. 아침산행을 서두른다. 산행은 종주팀과 왕복팀, 두 개 조로 나뉘었다. 산행이 능숙하여 미먀노우라다케(宮之浦岳, 1,936m) 정상을 종주하는 팀은 아침 다섯 시에 출발한다.
나는 왕복팀에 소속되어 일단 느긋했다. 먼저 나서는 룸메이트 차(車)선생에게 성공적인 종주를 격려하고 나중에 조몬스기(繩文杉) 밑에서 만나자며 악수로 전송했다. 밖에는 일본해류가 태평양으로부터 몰고 오는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친다.
남은 왕복조는 비교적 여유 있게 일곱시에 호텔을 나섰다. 총무단에서 정성들여 준비한 두 끼 분 도시락을 배낭에 챙기며 버스에 오른다. 바에 젖은 산봉은 운해에 잠겨있다. 산악지대 연강우량이 10,000밀리미터나 되니 매일 비가 내리는 것이 정상이란다. 안보우(安房)에서 임도로 들어 계곡을 건너고 벼랑을 돌며 한 시간 여를 넘게 달린 버스는 아라카와댐(荒川貯水池) 부근인 산행 출발지에 닿았다.
아침 8시 20분, 산행 시작이다. 산악 삼림철도를 8킬로미터가 넘게 걸어가는 코스다. 모두 우의로 무장하고 일렬종대로 이어서 묵묵히 걸었다. 삼나무를 벌채하기위해 건설한 철로의 대부분은 그대로 활용하는 것이라니 일본의 용의주도함을 새삼 느낀다.
바다의 알프스라는 야쿠시마는 면적 540평방킬로미터에 주민은 1만3천여 명이다. 미야노우라다케를 필두로 천미터가 넘는 봉우리 30여개가 운집해 있다. 섬사람들은 이 가운데 1,800미터가 넘는 여덟 봉우리를 ‘신들이 사는 세계’인 오쿠다케(奧岳)라며 신성시한다.
울창한 수림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것은 삼나무다. 젊은 나무는 하늘로 수십 미터나 곧게 뻗어 숲을 이루고, 굵기만 봐도 수백 년은 넘었을 법한 노거수(老巨樹)들이 곳곳에 웅거하고 있다. 산다이스기(三代杉)라는 나무는 잘린 밑동에 이대삼이 뿌리를 내렸고, 그 이대삼이 다시 잘린 그루터기에 삼대(三代) 삼나무가 또 싹이 돋아 자라는 기괴한 거목이었다.
산은 고사리와 이끼를 비롯한 야생초와 이름 모를 수목들이 빗방울을 머금고 넘치는 자양분이 반짝인다. 온 산은 폭포가 구르는 백색소음이 그칠 줄 모른다. 사슴이랑 원숭이는 사람을 봐도 피할 줄을 모른다. 사람과 원숭이와 사슴이 그 수가 같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동물과 인간이 함께 사는 현장이다.
두 시간 넘게 걸어가니 철길은 끝이 나고 이제부터 본격적인 오르막길을 두어 시간 올라가게 되어있다. 비는 쉬지 않고 내리는데도 천둥은 울지 않는다. 지금 쯤 종주팀은 구름위로 솟은 미야노우라다케 정상에서 태평양을 향해 사자후를 토하고 있으리라(이때 정상에는 비바람과 구름이 몰아쳐서 시야가 전혀 열리지 않았다고 했다).
10시 50분, ‘윌슨(Wilson)그루터기’에 도착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교토의 호오코오지(方廣寺) 대불전을 짓기 위해 베어낸 삼천년 묵은 삼나무의 밑동인데, 20세기 초(1914년) 미국 식물학자 윌슨이 발견하고 학계에 보고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직경 4.4미터인 그루터기가 400년 세월에 썩어서 가운데가 비어있다. 갈라진 그루터기 갈래사이로 걸어서 둥치 안에 들어가니 예의 촛대와 제단으로 단장된 신사(神社)가 있고, 위로 올려다보니 하늘로 트인 형국이 책에서 본대로 영락없는 하트모양이다.
또 산길을 오른다. 지도에 나와 있는 대왕(大王)삼나무와 부부(夫婦)삼나무도 지나간다. 물에 강한 삼나무로 만든 계단이나 사다리가 안전하게 잘 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비를 맞은 바위가 전혀 미끄럽지가 않아 등산하기 한결 쉬웠다. 일본열도의 대부분이 화산섬인 것과 달리 이 섬은 바다 밑의 충적층(沖積層)이 습곡(褶曲)작용으로 융기된 땅이라 그렇단다.
등산의 피로를 더 덜어준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일본사람들의 친절이었다. 좁은 외길에서 그들은 예외 없이 먼저 “도죠”하며 길을 내어주었다. 선진국 시민의 몸에 밴 양보습관에 “곤니치와”와 “아리가도”를 반복하며 오르다가 문득 생각하니 그들의 겸손함에 감춰진 강한 자부심이 보이는 듯하다.
정오가 조금 지나 왕복조는 목적지점인 조몬스기(繩文杉) 나무에 도착했다. 해발 1,300미터 고지에 살아있는 이 나무는 높이가 25.3미터이고, 둥치의 지름은 5.2미터에 둘레는 16.4미터란다. 그보다 놀라운 것은 추정 수령이 2,800내지 7,200년이나 된다는 점이다. 이 섬의 첫 번째 상징물인 이 나무는 주위 접근이 통제되고 뿌리를 둘러싼 토양의 유실을 막으려고 계단처럼 축대를 쌓아두었다.
조몬스기에서 조금 떨어진 ‘고총(높은 산꼭대기, 高塚)산장’에서 단체로 도시락을 먹는다. 삼나무와 다른 고목들이 삼렬한 숲은 운무로 가득하다. 이 산곡에도 ‘물의 심포니’가 잔잔하게 울려온다. 마음의 고요, 즉 해인(海印)을 꿈꾼다. 생명력이 넘치는, 아름답고 오묘한 자연세계는 살며시 문을 열어주는 것 같다. 그것은 바로 ‘공생과 순환’의 원점이다.
굵은 빗방울이 나뭇잎에 떨어진다. 물의 여행은 자연의 순환이다. 태평양의 물은 구름으로 올랐다가 미야노우라 산상에 떨어진다. 나뭇잎에 내린 빗방울은 개울이 되고 폭포가 되고 하천을 이루어 다시 대양으로 돌아간다.
어찌 그 뿐일까. 물은 초목을 가꾸고 조수(鳥獸)가 깃들게 하며 인간을 살찌운다. 대자연의 순환의 바퀴에 우리 인간도 함께 순환한다. 낯선 산에서 누리는 도시락과 잠간의 휴식…. 산행을 준비한 총무단이 고맙다. 이 잠시의 일탈이 끝난 다음, 나도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리라.
종주팀이 정상을 넘어 무사히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먼저 하산을 시작한다. 왔던 길을 되짚어 산길을 내려오고 철길을 걸어 등산로 입구에 당도하는 데는 거의 네 시간이 걸렸다. 삼나무 높은 우듬지 사이로 쪽빛 하늘이 잠시 드러났다간 곧바로 무지개와 함께 구름 속으로 사라진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