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캄보디아 국경을 넘으면서 충격을 받다
사전에 가이드로부터 충분한 교육(?)을 받았지만-
구걸하는 아이들에게 불쌍하다고 절대 돈을 주지 마라,
한 번 돈을 주면 주변에서 벌떼 처럼 달라붙어 낭패를 당할 수 있다
-이럴 정도로 비참할 줄은 몰랐다.
너무 충격적인 장면은 5~6세 정도 되는 여자아이가 어린 동생을 안고,
업고 머리에서 이를 잡아주는 광경이었다.
청년들이 손수레 주변에서 일거리를 기다리며 서성이는 모습 등
하나같이 얼굴색이 까맣고 깡마르고 옷은 넝마를 걸친 정도다.
그러나 눈빛만은 순수하다 못해 애처롭다.
차 안에서부터 눈을 맞춘 그 여자아이가 계속 따라 붙으며 손을 내밀고
“원 달러”를 외친다. 그러나 애써 외면하면서 가이드의 말을 충실히 따랐다.
세상이 바뀌고 시대가 바뀌는 기분이다.
이웃 나라 태국과는 시차도 없는데
경계선 하나 차이로 몇 십 년 전으로 돌아간다.

씨엠립으로 육로 이동
현지 버스로 갈아타고 강행군해야 했다.
그런데 우리를 태운 버스가 공교롭게도
우리나라에서 70년대에 생산 중단된 아시아 버스다.
차 전면에는“아시아 버스와 함께 즐거운 여행을”이란
문구가 그대로 적혀 있었다.
그러나 솔직히 즐거울 수가 없다.
국경을 넘으면서 받은 충격과 3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운 날씨 속에 태국에서와 달리
버스 상태가 좋지 않아 에어컨도 시원찮은데다
좌석마저 비좁아 온몸은 땀에 젖었다.
그런데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5시간 이상 차를 타고 가야 하는데 비포장 도로다.

그것도 노면 상태가 극히 좋지 않아 마치 말 타는 기분이다.
뒤에 실은 짐이 앞으로 쏟아져 사람 잡을 뻔하기도.
그래도 우리는 양반이었다. 아니, 호사스러웠다.
현지 주민들은 소형 트럭 위에 짐짝처럼 실려
우리가 흘린 흙먼지를 그대로 뒤집어쓰고 가야 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원망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유일한 대중 교통수단이라고 했다.
길가에는 황토 먼지를 뒤집어쓴 잡초나 야자수
그리고 움막 수준의 집들이 보인다.
여기도 태국처럼 식수가 귀해 집집마다 처마 밑에 항아리를 받혀놓았다.
‘해먹’이라는 그물망 위에서 낮잠을 자는 반라의 뼈만 남은 노인,
지뢰 피해로 다리가 잘린 남자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도중에 차가 고장 나 멈추기도 하고,
몽둥이를 든 동네 청년들이 길을 막고 통행료를 뜯어가기도 했다.
그래도 우리는 무사히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다.

톤레삽 호수에서 수상 가옥과 낙조를 보다
방콕 호텔을 출발한지 9시간 만에
캄보디아 제2의 도시 씨엠립에 도착했다.
긴 여정이었다.
호텔에 여장을 푼 다음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크다는 톤레삽 호수로 갔다.
야자나무 껍질을 엮어서 만든 수상 가옥들이 단연 눈길을 끌었다.
수상 마을을 벗어나자

수평선이 보일 정도의 넓은 호수가 끝없이 펼쳐진다.
이건 호수가 아니라 망망대해다.
배를 이동하여 선상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그곳 주위에는 온통 물위로 듬성듬성 솟아오른 관목 숲이 널려있었다.
선상 레스토랑에는 톤레삽에서 잡은 새우 요리를 맛볼 수 있었는데
그것보다는 갑판 위에서 본 환상적인 일몰 광경이 압권이었다.

앙코르 유적 답사에 나서다
아침 일찍 씨엠립을 출발하여
북쪽으로 6.5km를 달려가자 밀림지대가 나타났다.
여기가 그 유명한 앙코르 유적지다.
그러나 밀림 속을 통과하는 기분이 상쾌하지만은 않다.
저 안에는 아직도 지뢰가 다량 매설되어 있다니….

차가 밀림 숲을 빠져나오자 옥수수 모양으로 생긴
탑형 건축물이 측면으로 보인다. 아! 앙코르와트다.
멀리서 보아도 장엄하고 웅장하다.
그 주변을 둘러싸고 흐르는 ‘해자’가 보이고
물위에는 연꽃이 가득 피어올랐다.

첫 대면이지만 일단은 지나쳐야 했다.
일정상 앙코르톰부터 보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차는 앞으로 달리지만 고개는 계속 우측으로 향해 있다.

천년을 이어온 미소 - 앙코르톰
앙코르톰 남문 앞에서 차는 멈추었다.
앙코르는 ‘도읍지’란 의미이고 ‘톰’은 ‘거대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니까 앙코르톰은 ‘거대한 도시’를 말한다.
한 변의 길이가 무려 3km의 정사각형 구조를 이룬다.
성벽의 높이만 8m, 성벽을 따라 폭 100m 해자를 팠고
그 넓이만 해도 45만평이 된다.
서울의 남대문처럼 앙코르의 모든 길은 이 남문으로 통한다.
돌탑 구조물에는 머리 3개인 코끼리를 타고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그 위에는
미소 짓는 관음보살 사면상이 동서남북을 수호하고 있다.

바이욘 사원
바이욘은 앙코르톰 중앙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곳을 정점으로 폭 25m의 도로가 5개나 놓여 있다.
우리가 지나 온 길이 천년이 된 도로다.
바이욘의 자태가 서서히 드러났다.
거무틱틱한 돌무더기의 집합체가
작은 성채를 이루고 있는 모양이 마치 바위산 같다.

동쪽의 주출입구로 발길을 옮겼다.
아이들이 길목을 지키고 안내책자를 팔고 있었는데
처음에 $6에서 $5 그리고 $4까지 깎아서 불렀다.
여행지에선 언제나 처음 산 사람부터 억울하게 되어 있다.

바이욘은 앙코르 제국의 위대한 영웅 자야바르만 7세가
자신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사원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건축이
위정자들의 공적을 기리는 수단이 된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그는 또한 힌두교 대신 혁신 종교인 대승불교를
국교로 바꾸고 자신을 관음보살의 화신이라고 자처했다.
바이욘은 층고 43m의 3층 건물인데
1층은 인간의 영역으로 6개의 고푸라문과 민중들의 생활상,
참족을 무찌른 왕의 업적이 담긴 부조가 새겨져 있고
2층은 신들의 영역이며 힌두교 신들의 업적이 담긴 부조가 새겨져 있다.
3층 지성소는 앙코르의 미소이자 큰바위얼굴인 관음보살상이 세워져 있다.

따프롬 사원은 인공과 자연의 싸움터
따프롬은 자야바르만 7세가 어머니를 위해 1186년에 지어
브라만 신에게 헌납한 불교사원이다.
내부는 마치 영화에나 나올 듯한 폐허로,
발견된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기 위해 일부러 복구를 하지 않고 있다.
이곳에서는 자연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아니 무서운지를 목격할 수 있다.

무너진 돌 벽 위에 뿌리를 내린 거대한 명주솜 나무들이
인간이 만든 건물을 휘감거나 올라타고 앉아
처절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평소 유명 사찰보다 이름 없는 폐사지를
더 즐겨 찾곤 했던 내 입장에서 앙코르 유적 중
가장 진한 감동을 느낀 곳은 바로 여기다.
따프름이 아무리 파괴되었어도 돌덩이는 그대로 남아있다.
언젠가는 다시 세울 수 있지만

우리네 폐사지는 그런 흔적조차 찾을 수 없어 더욱 안타깝다.
목조 건축의 한계일 수 있지만
앙코르 유적이 부러울 따름이다.

앙코르와트
‘위대하고 성스러운 사원’을 뜻하는 앙코르와트는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국의 만리장성에 버금가는,
아니 능가하는 석조 건축물이다.

크메르 왕조 전성기인 12세기에 수리야바르만 2세(1113~1150년)가
37년간 공들여 지은 이 사원은
430년 간 밀림 속에 파묻혀 있다
최근에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 신비감과 황홀감으로
전 세계 유적 탐방객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사원의 구성, 균형, 설계기술, 조각과 부조 등의 완벽함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평가되고 있다.


멀리서 보면 웅장하고 가까이서 보면 빈틈없이 정교하다.
앙코르와트는 당시 크메르인의 우주관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사원을 이루는 5개의 첨탑은
힌두 신화에서 지상의 중심이자
신이 산다는 성스러운 산인 메루 산을, 이를 둘러싸고 있는 주벽은
장대한 히말라야를,
바깥의 해자는 길고 넓은 대양을 각각 상징한다.



앙코르와트는 신과 동일시되는
통치권자의 사후 살림집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사원과 달리 사원 입구가 해가 지는 서쪽으로 돼 있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기 전에
우리는 아쉬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비록 수박 겉핥기식으로 앙코르의 윤곽만 더듬고 돌아왔지만
그 여운은 길다.
앙코르는 일생을 통해 꼭 한번은 가볼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세상은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기 마련이다.
캄보디아에서 그것을 극명하게 느꼈다.

찬란한 앙코르 유적이 있다면 외침과 내전에 시달린 역사가 있었고
헐벗고 배고픈 주민이 여전히 이 땅을 살아가고 있다.
앙코르 유적 만큼이나 심금을 울린 크메르 사람들의 고단한 삶이
어쩌면 동족끼리 살육전쟁을 벌였던 50년 전 우리와 흡사하다.
역사의 과오를 반성하지 않으면
우리에게도 이런 아픔이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일이다.
이 글은 서울시 건축사 신문에 게제된 글 입니다.
글 : 이종호건축사 / 사진 : 정병협건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