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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연초에 단편을 하나씩 썼어요. 이렇게 이어서 쓴 것은 그동안 미루었던 단편을 몰아썼기 때문입니다.
연재를 시작하면 단편을 또 못 쓰게 되니까 약속을 몰아서 지키는 거지요. 그러니 얘기가 잘 될 리 있겠습니까.
이번에는 주제니 뭐니 그런 거 없습니다. 그냥 두 남자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썼을 뿐입니다.
아이고, 내일부터 연재 시작인데, 나 죽었다.
<단편소설>
바소 콘티누오
구 효 서
1.오전
거실 이쪽 벽에서 맞은편 벽까지 여섯 걸음. 김옹의 보폭은 언제나 크다. 느리긴 해도 움직임이 균일하다. 다리에 여전한 힘이 느껴진다. 윤동주랑 같은 해 태어났거든! 김옹이 자신의 나이를 말하는 방식이다.
자신감 밴 김옹의 어투를, 봉한 씨는 싫어한다. 1917. 그 숫자를 봉한 씨는 극구 러시아 혁명의 해로 기억한다. 어느 쪽이든 아득하기는 마찬가지다.
한 시간째 거실을 오가는 아버지가 봉한 씨는 못마땅하다. 큰 걸음 때문에 작은 거실은 좁게 느껴진다. 김옹의 키는 크다. 1917년생. 상체는 굽지도 흔들리지도 않는다. 천장이 낮아 보인다.
김옹은 20년 전 상처했다. 그 뒤로 하루도 거르지 않은, 김옹의 새벽 운동이다. 계절이 바뀌고 바뀌어도 거실을 오가는 김옹의 움직임은 달라지는 법이 없다.
조도를 낮춘 작은 스탠드램프가 접시만큼 둥근 불빛을 조리대 위에 떨군다. 장한나 첼로 연주회 티켓 두 장이 불빛 가장자리에 놓여 있다. 한겨울 새벽어둠이 가시려면 한 시간쯤 더 지나야 한다.
거실 창밖이 희붐하게 밝아 오면 김옹은 마침내 걸음을 멈추고 커튼을 열 것이다. 봉한 씨는 하루도 못마땅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20년 동안 그랬다.
그랬다는 걸, 김옹도 안다. 알면서도 그만두지 않는다. 알면서도 그만두지 않는다는 걸, 봉한 씨도 안다. 알면서도 체념이 안 된다. 닮지 말았어야 할 것만 닮은 경우의 전형. 두 사람 다 그리 생각하면서, 생각을 입 밖으로 낸 적이 없다는 것마저 닮았다. 봉한 씨 올해 나이 쉰 다섯. 친구들은 그를 숫총각이라 하지만 본인은 가타부타 말이 없다.
노구라는 말이 안 어울릴 만큼 95세 김옹은 건강하다. 병원에 가 본 적이 없다. 어쩌면 축복이랄 수 있는 것을, 봉한 씨가 못마땅해 할 이유는 없다. 봉한 씨의 못마땅함은 이유 없는 못마땅함이다.
아버지 얘길 하며 툴툴거리는 봉한 씨에게 친구들이 가끔 묻는다. 왜? 아버지가 왜 싫은데? 봉한 씨 대답은 언제나 짧고 단호하고 똑같다. 기냥!
그냥 아닌 기냥이라는 대답에 마력이 있는 걸까. 친구들은 금방 뭔가 잘 알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금방. 정말 잘 알겠다는 표정. 친구들이란 다 그럴만한 나이인 것이다.
김옹과 김옹의 아내는 조치원에서 살았다. 아들 둘 딸 둘 출가시키고 노부부가 초가집에서 살았다. 막내아들 봉한 씨는 짝이 없었으나 일찌감치 상경해 홍제역 근처 작은 아파트에서 혼자 살았다.
조치원 읍내뿐 아니라 충청남도 전체를 통틀어 한 채밖에 없을 초가집에서 김옹 부부는 살았다. 김옹의 아내는 부엌문을 넘다 쓰러졌다. 여닫기 버거웠던 구가옥 부엌문. 문턱은 무릎보다 높았다. 부엌 안팎에 몸을 반반씩 걸친 채, 김옹의 아내는 문턱 위에 몸을 꺾고 세상을 떠났다.
어째서 끝내 초가집이어야 하는지, 김옹은 말하지 않았다. 원래가 초가집이었잖니……. 가족이 들을 수 있었던 건 그 말뿐이었다. 대개의 경우 김옹의 고집에는 그처럼, 별다른 이유가 없다. 있다 해도 가족이 이해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갈수록 짚 구하기가 힘들었다. 이엉 엮고 지붕 이을 사람 구하기는 더 힘들었으나, 김옹이 조치원을 떠날 때까지 끝끝내 초가집이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김옹은 막내아들 집으로 올라왔다. 서울에는 큰아들과 둘째 아들이 살고 있었으나 왠지 막내와 사는 게 당연한 일처럼 되었다. 나이 오십이 훌쩍 넘도록 장가도 가지 못한 봉한 씨에게 노부를 맡기고 생활비조차 대주지 않는다는 두 형님을, 봉한 씨 친구들은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형님들은 왜 그러는 건데? 봉한 씨에게 이런 질문은 난감하기 그지없다. 질척질척 뭉클거리는 거대한 물고구마가 통째로 목구멍을 막아 버린다. 봉한 씨는 그럴 때 대체로 패닉에 빠져 아무 말 못한다.
프리랜서 피디라는 게 봉한 씨 직업이다. 한때는 공중파 방송에서 일했지만 지금은 케이블방송과 군소 프로덕션으로부터 가물에 콩나듯 일감을 얻는다. 의뢰가 들어오면 남양주 오남리아파트 지하상가에서 주업으로 생선을 파는, 역시 프리랜서 카메라맨을 부른다. 편의점 알바를 전전하는 조명 겸 음향 담당 미스터 박을 수배한다. 그렇게 촬영팀을 꾸려 단편 프로그램 하나를 겨우 완성하고 받는 액수에 대해 봉한 씨는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다.
봉한 씨의 어머니, 그러니까 김옹의 아내가 부엌 문턱에서 운명할 때 봉한 씨는 카이로 촬영지에서 거리의 슈샨보이에게 2백원 주고 낡은 구두를 닦고 있었다. 뒤늦게 귀국해 어머니 묘지에 흰 국화를 바치던 봉한 씨 구두는 밑창이 떨어져 덜렁거렸다.
동료였던 피디들은 제작 일선에서 물러나 개인 프로덕션을 꾸리거나 굴지 제작사의 기획고문 자리에 앉았다. 다들 충분히 그럴 나이였다. 봉한 씨는 아직도 콘티를 들고 언 손 호호 불며 촬영현장에서 밤을 새우기 일쑤다. 어째서 그리됐는가? 친구들이 물으면 또 그 놈의 것이 쳐들어와 목구멍을 막는다. 질척질척 뭉클거리는 거대한 물고구마. 가슴 가득 머리 가득 꾸역꾸역 몽롱하게 들어찬다.
20년 넘도록 잡초 우거진 조치원 초가집을 처분하지 않고 놔두는 까닭을, 김옹의 자식 며느리들은 알지 못한다. 알고 싶어 죽겠는데, 김옹은 대답하지 않는다. 어쩌면 김옹의 머리와 가슴에도 문득 문득 물고구마가 가득 들어차는 건지도. 이름하여 부자지간인 것이다.
윤동주랑 같은 해 태어났거든! 난 병원을 모르고 살지 않던? 자신감을 가질 만큼 김옹은 건강하다. 복잡하고 골치 아픈 질문에 맞서 뇌기능을 반사적으로 닫아주는 물고구마 덕분일지도 모른다. 고집스레 반복되는 일상도 그로 인해 가능한 건지도.
지나친 건강이 물고구마에서 오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마다 봉한 씨는 아연 아찔해진다. 건강에 관해서라면 봉한 씨 또한 친구로부터 빈축까지 살 정도니까. 건강이 싫은 게 아니라 김옹과 같다는 게 싫은 것이다. 친구가 어느 날 봉한 씨 허벅지를 만지며 말했다. 이 새끼 완전 돌덩이네 이거.
봉한 씨가 싫어하는 김옹의 말이 있다. 다시는 듣지 않았음 싶은 것. 드물게 네 시간이나 계속되는 연주회에 갈 수 있겠느냐고, 피로하지 않겠냐고 언젠가 봉한 씨가 물었을 때 김옹에게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난 갑상이야!
70년대 말 군에 다녀온 봉한 씨는 그 말을 대번에 알아챘다. 봉한 씨 신체등급이 갑종 일급이었기 때문이었다. 일제 때거나 정부수립 초기에는 최고 등급이 갑종 상급이었을 거라는 것. 그 말을 들었을 때 봉한 씨는 혼자, 왠지, 수치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김옹이 끝내 못마땅한 까닭. 새벽 마다 좁은 거실을 오가기 때문이 아니었다. 초가집을 고집해 어머니를 부엌에서 운명하도록 내버려둔 때문도, 형님들 집 아닌 자기 집에서만 기거하기 때문도, 조치원집 팔아 아파트 평수를 늘려주지 않기 때문도 아니었다. 40년 앞선 자신의 모습을 고스란히 비추는 고약한 마법의 거울이라면, 봉한 씨뿐 아니라 누구라도 싫어할 것이다.
텔레비전 놓인 거실 벽 한 귀퉁이에 기묘하게 큰 액자가 걸려 있다. 액자 안에 실물 크기의 자부동이 들어 있다. 아닌게 아니라 실물이다. 소나무와 학이 그려진 방석을 김옹은 자부동이라 부른다.
김옹의 아내가 오색실로 수놓은, 시집올 때 가져왔다던 방석이다. 유리 안에 모셔져 있다. 유물 같다. 거실에 걸자는 생각을 낸 건 김옹이고, 액자를 제작해 벽에 붙인 건 봉한 씨다.
액자 아래 작은 사각 어항이 있다. 날렵한 은빛 물고기 한 마리가 검은 점박이 지느러미를 유려하게 흔든다. 한 마리뿐이다. 석 달 전, 영월군 어라연 촬영지에서 봉한 씨가 몰래 반출한 쉬리다.
쉬리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촬영 스케줄 따위 어찌 되도 좋다는 식이었다. 봉한 씨는 그때 그랬다. 촬영을 서둘러 마쳤다. 저녁도 먹지 않고 내쳐 서울로 향하는 봉한 씨를 팀원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과연 무사히 서울에 닿을 수 있을지. 봉한 씨는 생수 페트병에 든 쉬리 걱정뿐이었다. 병 속 물 온도가 자꾸 오르는 것 같았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냉커피 값을 내고 얼음 한 컵을 얻었다. 오도독 씹은 얼음 알갱이를 페트병 주둥이에 정성껏 밀어 넣었다.
어항 속 쉬리를 볼 때 김옹은 반드시 봉한 씨를 흘끗거렸다. 팀원들의 흘끗거리던 눈빛과 다르지 않았다. 사람의 눈에 여간해서는 띄지 않는 보호종 물고기라는 걸 김옹도 알았다. 낯선 환경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곧 쉬리의 생명을 앗아갈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김옹이 그리 생각한다는 걸 봉한 씨도 알았다. 그러나 서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쉬리는 열대어 사료를 잘 먹었다. 처음의 은빛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김옹의 마뜩찮은 눈빛은 오래도록 달라지지 않았다. 정확히 두 달 두 주 동안 그랬다.
김옹이 숙은 눈빛으로 손수 먹이를 주기 시작했던 게 두 주 전 어느 날이었다. 그날 말했다. 공연한 짓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말은 그리했으나 쉬리를 알뜰히 생각하는 것만은 분명했다.
거실 이쪽 벽에서 맞은편 벽까지 여섯 걸음. 그 작은 공간을 두어 시간 배회하고 나서야 김옹은 걸음을 멈춘다. 봉한 씨가 오디오로 다가가 전원을 넣는다.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1번. 키신의 실황 앨범. 김옹이 커튼을 연다. 1악장 후반, 관객의 작은 기침 소리에 김옹은 여지없이 인상을 찡그린다. 그 부분에서 매번. 겨울 여명이 자부동과 어항과 조리대 위의 티켓을 비춘다.
김옹과 봉한 씨는 음악을 좋아한다. 역시 닮은 점인데, 닮았으면서도 서로 유일하게 싫어하지 않는 점이다. 대화 없이도 살 수 있는 건 음악 때문인지도 모른다.
김옹의 아버지며 봉한 씨의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목사였다는데, 직업에 관련한 추억이나 사연이 없다. 김옹이 젊어 한 때 잠깐―1년 2개월쯤?―조치원 읍내 제분회사 부장 직함에 있었다는 사실도 봉한 씨는 마흔이 넘어서 우연히 알았다. 그동안 어떻게 자식을 키우며 먹고 살 수 있었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먹고 사는 일에는 한사코 무심한 게 봉한 씨인 것이다.
목사 아들인 김옹이 교회에 나가는 것도 본 적 없다. 그래도 봉한 씨는 음악 좋아하는 취향의 기원을 은근히 할아버지에게 두고 있다. 그 어느 교회였는지는 몰라도 그곳엔 최소한 오르간이 있었을 것이고, 작으나마 성가대가 있었을 것이고, 날마다 찬송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 모두는 어쨌든 서양음악이었을 것이고……. 이런 식으로.
조치원 집에는 단칸짜리 행랑채가 있다. 초가인 본채와 다르게 양철집이다. 봉한 씨가 상경하기 전까지 쓰던 곳. 지금은 빈 채로 녹슬어가고 있다.
건축비 절감하려고 양철로 지은 집이었다. 빗방울이 지붕을 두드리면 시끄러워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래도 음악듣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양철집 전체가 거대한 공명통이었다. 봉한 씨의 그 양철집 방에는 오래된 진공관 전축이 있었고 엘피판이 수두룩했다. 김옹이 쓰던 거였다.
양철집 방문은 창호지 바른 격자문이었다. 문손잡이 옆에 화투 두 장 이어붙인 것 만한 투명유리가 달려 있었다. 밖의 동태를 살피는 유일한 구멍이었다.
그곳으로 봉한 씨는 안마당을 내다보곤 했다. 초가지붕 넘어오는 아침 해를 보았다. 본채와 양철집 행랑 사이에 놓인 두레박 우물터, 우물터 곁의 화단, 화단 안에 줄지어 핀 튤립을 보았다. 아침 햇살 받은 튤립은 지등처럼 빛났다.
본채 방문 열리는 소리가 나면 봉한 씨는 유리구멍에 눈을 댔다. 김옹은 툇마루로 나와, 꽃을 맴도는 나비에게 말을 걸듯 중얼거렸다.
에이에프케이엔 봐라.
호칭도 이유도 생략된 말이었다. 봉한 씨 양철집 방에는 텔레비전이 없었다. 성능 좋은 진공관 전축에 텔레비전 음파가 잡혔다. 사이클을 맞추면 베를린 필 하모닉의 연주가 흘러나오곤 했다. 봉한 씨는 그렇게 에이에프케이엔을 들었고 케이비에스를 들었다.
전축과 엘피를 봉한 씨에게 몽땅 건넨 김옹은 안방에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라디오를 들었다. 자목련이 꽃망울 터뜨리는 아침, 라디오에서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흐르면 김옹은 방문을 열고 툇마루로 나왔다. 봉한 씨는 유리구멍에 눈을 댔다.
케이비에스 에프엠 틀어봐라.
김옹은 꽃그늘 진 본채에서, 봉한 씨는 슬슬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양철집에서 사계를 들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음악을 가까이 했다.
밖에 아무런 기척이 없어도 봉한 씨는 가끔 유리구멍에 눈을 댔다. 빈 툇마루에 오후의 낙조가 들기도 했고, 김옹이 소리 없이 앉아 담장 너머 하늘을 바라보기도 했다. 봉한 씨는 숨을 죽이고 그런 툇마루거나 김옹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지지난 해 폴 모리아 내한공연은 두 사람에게 각별했다. 40년 나이 차이를 건너뛸 수 있게 해 준, 중간 징검돌 같은 게 폴 모리아였다. 김옹이 50초반이었고 봉한 씨가 중학생이었을 적, 둘은 두레박 우물터와 튤립 화단을 사이에 두고 똑같이 폴 모리아에 열광했다. 함께 열광했던 당대 뮤지션으로선 폴 모리아가 유일했다.
그 때를 회상하면 함께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레너드 번스타인의 청소년 음악회. 청중에게 해설을 하고, 직접 피아노 시연도 하며, 땀 흘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흑백 필름 속의 번스타인. 자녀들과 동석해 해설과 연주를 경청하던 중년의 미국 청중들.
중년의 김옹이 중학생 봉한의 손을 잡고 연주회에 동행했던 기억이, 마치 사실처럼 느껴질 만큼 폴 모리아는 김옹과 봉한 씨에게 각별한 존재였다.
그런 폴 모리아였음에도, 지지난 해 내한공연에 함께 갔을 때 김옹은 박수를 치지 않았다. 연주가 끝나도 박수 치는 법 없는 김옹. 봉한 씨는 끝까지 김옹이 못마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폴 모리아 서거 3주년 추모연주회라서 박수는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을까. 폴 모리아 없는 폴 모리아가 폴 모리아답지 않아서였을까. 남들이 기립박수로 환호할 때 김옹은 팔짱을 낀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늘 그랬다. 봉한 씨는 언제나 연주자들에게 미안했고, 흘낏거리는 청중들 눈빛이 민망했다. 커튼콜이 그치지 않고 있는데도 김옹은 슬며시 자리를 떴다. 폴 모리아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공연, 다시는 함께 가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도 봉한 씨는 늘 두 좌석 분을 샀다. 웬만한 오디오 세트 한 대 가격에 해당하는 보청기를 김옹에게 선물한 것도 형님들이 아닌 봉한 씨였다. 수년 전 김옹은 몸소 청각 장애인 등록을 했다. 한 사람분의 입장료로 표 두 장을 살 수 있었다. 명색 피디인 봉한 씨였으므로 종종 연주회 초청장이 생기곤 했다. 혼자 가는 법이 없었다. 어둔 조리대 위에 놓인 첼로 연주회 티켓이 두 장인 까닭도 그래서다.
연주회 아닌 영화를, 봉한 씨 혼자 본 적이 있다. <아바타> 화면은 화려하고 영롱하고 찬란했다. 보던 중에 봉한 씨는 생각하고 말았다. 아버지에게 보여드리면 좋겠다……. 처음 보는 척, 아버지와 다시 그 영화를 봤다.
봉한 씨가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토마토와 사과를 흐르는 물에 씻는다. 전날 김옹이 시장 봐 온 것들이다. 양파를 채 썬다. 오이피클 토마토 사과 에멘탈 치즈 모두 납작하게 썬다. 토스트에 삶은 계란을 썰어 넣기 시작한 건 독일 촬영을 다녀온 뒤부터다. 바흐의 오르간곡이 흐른다. 라이프치히에서 산 음반이다.
시장 보는 일, 식사 준비, 빨래, 청소……. 어느 것 하나 분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말하기 싫은 것이다. 서로 알아서 할 뿐이다.
봉한 씨는 에멘탈 치즈를 얇게 썬다. 봉한 씨는 뭐든 얇게 썰지만 김옹은 뭐든 두껍게 썬다. 아무 말 않고, 각자 자기가 준비할 때 굳이 얇게 썰고 굳이 두껍게 썰 뿐이다. 아버지와는 살림 분업이 되지 않는다. 여자와 함께 산다는 건 어떤 걸까, 봉한 씨는 잠깐 생각한다.
김옹의 새벽 기척이 아니라, 실은 친구 전화 때문에 잠에서 깼다. 친구와 그의 아내가 밑도 끝도 없이 전화에다 대고, 화음까지 넣어 노래를 불렀다. 윤형주의 ‘우리들의 이야기’였다. 노래 사이사이로 자동차 굉음이 스쳤다. 새벽 고속도로를 달리는 모양이었다. 학창 시절 봉한 씨가 종종 불렀던 그 노래를 친구가 더 잘 기억했다.
잠이 달아났다. 결혼하는 것만으로도 도인이 되는 거야. 짓궂고 쓸쓸히 웃던 친구였다. 겨울 새벽잠을 급습한 노래에 때 아닌 라일락꽃이 어이없게 흩날리고 있어서, 그리고 윤형주와 윤동주가 6촌간이라는 사실이 다시 한 번 1917년을 떠올리게 하는 바람에, 눈이 번쩍 떠졌다. 반갑잖은 친구 내외의 집요한 생음악 알람이, 문득 결혼을 목전에 두고 떠나버린 그녀를 떠올리게도 했으므로.
주방용 칼이 토마토 양파 사과 오이피클을 베어낼 때마다 봉한 씨는 김옹의 시선을 느낀다. 못 미더워 김옹은 거실을 떠나지 못한다. 그래도 봉한 씨는 얇게 썬다. 습관일 뿐이다.
저녁은……셰프 잘츠부르크에요.
봉한 씨가 끝내 한 마디 한다. 셰프 잘츠부르크는 예술의 전당 건너편에 있는 퓨전레스토랑이다. 그곳의 바질 연어 테린을 김옹은 좋아한다. 셰프 잘츠부르크라는 말을 듣고서야 김옹은 조리대에서 시선을 거둔다.
연주회를 고르고 좌석을 예약하는 일만큼이나 봉한 씨는 외식에 신경을 쓴다. 부드럽고 달지 않고 야채가 풍성한 메뉴를 미리 검색해 둔다. 연주회 나들이가 잦아 외식은 일상이 되었으나 봉한 씨는 한 번도 그 일을 소홀히 한 적이 없다. 조용한 자리를 예약하고 아버지를 모신다. 음식을 먹는 동안 지휘자와 악단, 연주자와 레퍼토리 정보를 전한다. 도쿄 메트로폴리탄 심포니가 왔을 때는 부타노 가꾸니라는, 통삼겹 요리를 대접했다.
조치원 초가집에는 구식 부엌에 어울리지 않는 신식 오븐이 있었다. 오븐 요리 전문가는 김옹의 처제, 봉한 씨 이모였다. 일찍 남편을 여읜 봉한 씨 이모는 미국인 선교사가 건립한 대전의 한 신학교 후문 밖에서 혼자 살았다. 홀몸이 되어 그곳 친정으로 돌아간 이모는 부모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도 줄곧 그 집에 살았다. 미국인 이사장 사택의 하우스키퍼가 된 이모는 양식요리 전문가가 되었고, 틈틈이 언니에게 기술과 재료를 전했다.
김옹과 봉한 씨는 70년대부터 머핀과 그라탕과 원두커피에 익숙했다. 요즘도 가끔 조치원집 오븐에서 익혀낸 것 같은 음식을 우연히 만날 때가 있다. 그럴 적마다 김옹과 봉한 씨는 환호성 따위 지를 줄 모르는 성격답게, 묵념하듯 조용히, 초가집 높은 부엌문턱에서 운명한 고인을 떠올린다. 그리고 수첩을 꺼내 식당이름과 전화번호를 적는다.
매번 김옹과 연주회 나들이를 함께 하는 봉한 씨. 메뉴를 하나하나 살펴 간곡히 저녁을 모시는 봉한 씨에게, 언젠가 친구가 말했다. 효도 인격 하나는 노벨상 감인 걸……. 효도라는 말에 깜짝 놀란 봉한 씨는 또 물고구마를 삼킨 듯했다. 다른 친구가 얼른 말했다. 인격이라기 보단……성격 아닐까? 봉한 씨는 간신히 질식을 모면했다.
2.오후
셰프 잘츠부르크에 들러 미리 검색해 두었던 메뉴로 조금 이른 저녁 식사를 할 것이다. 일찌감치 아파트를 나선다. 바질 연어 테린 대신 오늘은 그릴에 구워낸 롤빵과 소시지, 사워크라우트와 오스트리아 머스터드를 곁들일 것이다. 하이든 아버지가 수레바퀴 만드는 가난한 목수였고 어머니는 마을 지주의 요리사였다는 사실을, 봉한 씨는 김옹에게 들려줄 것이다. 김옹과 아파트 단지를 나란히 걷는 봉한 씨 등 뒤가 편안하다.
봉한 씨 혼자 집을 나설 때면, 김옹은 현관 앞 복도 난간에 서서 멀어지는 봉한 씨를 바라보곤 했다. 봉한 씨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그런다는 걸 봉한 씨는 알았다. 김옹의 시선이 등 뒤에 달라붙어 성가셨다. 어쩌다 돌아보면, 김옹은 그저 바람을 쐬거나 먼산바라기 할 뿐이라는 듯, 짐짓 태연했다. 번번이 그러는 김옹이 봉한 씨는 싫었다.
부러 김옹의 시선이 미치지 못하는 길로 접어들곤 했다. 아파트 건물 모서리에 가려진 몇 개의 샛길이 있다. 좀 더 걷는 불편을 겪더라도 샛길을 택했다. 샛길로 들어서기 전까지는 등 뒤의 이물감을 어찌할 수 없었다.
김옹이 봉한 씨의 지금 나이였을 적, 김옹은 유리구멍을 통해 바라보이는 사람이었다. 봉한 씨는 양철집 방문 유리구멍에 눈을 대고 초가집 툇마루에 나앉은 김옹를 오랫동안 바라보곤 했다. 그 사실을 그때, 어쩌면 김옹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봉한 씨는 생각했다. 등 뒤에 닿는 김옹의 눈길이 점점 거북해지면서부터.
아버지도 그때 거북했을까…….
바라보이던 사람이, 이즈음엔 바라보고 있다. 40년 시차를 두고 두 사람은 서로를 번갈아 바라보는 셈이다. 김옹이 세상을 떠나 없게 될 때 봉한 씨에겐 바라볼 일도 바라보일 일도 따라서 없게 되리라는 것, 알지만 봉한 씨는 등 뒤에 달라붙는 당장의 시선이 싫을 뿐이다. 미구에 닥쳐올 김옹의 부재 따위도 생각하기 싫다. 굳이 사각(死角)의 샛길로 접어드는 까닭이다.
마주 보는 일은 예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한쪽이 한쪽을, 아닌 척 번갈아 바라보았고 바라볼 뿐이다. 마주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왜 그래야 하는지는 고집스레 알려하지 않은 채, 서둘러 외면할 뿐이다.
나란히 걷는 것, 시선이 서로를 향하지 않게 되어 편하다. 곁에 함께 앉더라도 눈길은 두 시간 내내 무대를 향할 수 있어서 연주회는 거북하지 않다. 김옹과 함께 외출하는 오후, 아파트 복도에 김옹이 서 있을 리 없다. 봉한 씨의 등 뒤가 편안해지는 이유다.
함께 아파트 화단 곁을 지난다. 주목의 침엽들이 추위를 견디느라 더욱 짙다. 김옹이 잠깐 걸음을 멈추고 인왕산 자락 겨울나무들을 바라본다. 봉한 씨도 눈을 들어 산 위의 겨울하늘을 바라본다. 눈이 올 듯, 흐리고 낮다. 그렇게 그들은 나란히 같은 것을, 혹은 같으면서도 다른 것을 바라볼 때가 있다.
두 주 전, 라 트라비아타 공연 때도 전막이 끝나도록 두 사람은 무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조슈아 벨의 여름 내한공연 때도 그랬다.
나비부인 공연 때는 무대를 바라보느라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지난 봄이었다. 파올라 로마노, 마리오 말라니니 열창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비부인은 지금껏 네 차례나 함께 보았다. 그때마다 그랬다.
숨죽이며 몰입했으면서도 김옹은 박수를 치지 않았다. 몰입의 이유가 연기와 연주에 있지 않았다는 뜻일까. 공연 내내 김옹이 자신만의 상념 안에 깊숙이 빠져있었다는 것을, 봉한 씨는 알았다. 다 다른 공연단이긴 했으나 같은 제목과 내용의 오페라를 네 차례나 관람한 것은 나비부인이 유일했다. 앞으로 몇 차례 더 보게 될지도 모른다. 어째서 나비부인 공연을 매번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지, 두 사람은 말한 적이 없다.
남자 관객이 나비부인에 제대로 빠지려면 극중 여인 초초상을 남자로 바꿔 보거나, 관람하는 자신을 여자로 여겨버리는, 인식의 전도(顚倒) 같은 게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쉽지 않은 일이나 그게 가능하다면 몰입이 그만큼 깊어질 테고, 따라서 빠져나오기 힘들어질 것이다.
봉한 씨는 알고 있었다. 김옹이 그런 식으로 나비부인에 이입되었더라도, 그건 김옹의 자기암시 노력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오페라 나비부인에는 절로 그리되게 하는 힘이 있다는 걸.
한 사람을 향한 모질고도 처절한 그리움. 하염없는 기다림. 그것이 남자들까지 빠져들게 하는 힘이라고, 봉한 씨는 생각했다. 전편에 흐르는 애절함이 나이와 성별 따위 아랑곳 않고 관객의 몸 안으로 육박해 들어오는 거라고.
이모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신학재단 교사 신축 부지로 흡수되어 버린 대전의 봉한 씨 이모 집. 봉한 씨에겐 외가고 김옹에겐 처가인 그 집 울안에 감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그 집은 길에서 한참이나 내려다 보였다. 내려다보이는 감나무는 그다지 커 보이지 않았다. 언덕을 내려가 대문을 열고 울안으로 들어서야 제법 큰 나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뭇잎 다 떨어진 앙상한 가지 끝끝마다 주홍빛 감들이 별만큼이나 달려 있곤 했다. 이모는 힘들고 위험하다 하여 그것들을 따지 않았다. 감 좀 따 줘요……. 어느 날 김옹의 아내가 김옹에게 말했다. 장인 제사를 지내고 난 아침이었다.
좀처럼 그렇게 말하는 아내가 아니었다. 아침 햇살 머금은 주홍빛에 취한 나머지, 듣는 사람일랑은 잊고 그만 아동극 대사처럼 살갑게 읊조렸던 것이다. 김옹은 그런 아내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대신 짙푸른 하늘에 주렁주렁 열린 감들을 올려다보았다. 어딘가 묘했던 그때 그 분위기를 봉한 씨는 잊지 않고 있다. 별을 바라보는 동방박사처럼 김옹이 감나무 가지 끝을 그윽이 우러르던 순간을.
김옹의 아내가 이승을 떠날 때까지 김옹은 장인 제사에 맞추어 감을 땄다. 다 따진 못했고 손과 장대가 미치지 못하는 곳의 감들은 까치밥으로 남겨두었다. 김옹의 아내는 감 보다는 감빛을 좋아해 만지고 만지고 또 만졌다. 만질수록 감은 유리처럼 빛났다. 이모 집을 나와 길 위에 선 봉한 씨 눈에 어느새 듬성듬성해진 감나무가 내려다보이곤 했다.
아내가 죽은 뒤로 김옹은 감을 따지 않았다. 감나무는 다시 붉은 감을 다닥다닥 매단 채 속절없이 서리를 맞았다. 외조부 제사에 참예하기 위해 김옹과 함께 이모 집을 방문할 때마다 봉한 씨는 길 위에서 잠깐 쉬며 감나무를 내려다보았다. 김옹이 먼저 발길을 멈췄기 때문이었다. 감나무에는 때아닌 붉은 꽃이 불탔다.
어떤 개인 날/바다 저 멀리에서/연기가 피어오르고 배가 나타납니다…….
나가사키 항을 내려다보며 울듯 노래하는 나비부인의 절창을 들을 때마다 봉한 씨는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감 좀 따 줘요. 아동극 대사처럼 읊조리던 어머니의 묘한 음성을. 잠시 걸음을 멈춘 채 속절없게 붉기만 한 감나무를 언제까지고 내려다보던 김옹의 눈빛을.
전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연주회장에 도착할 때까지 눈을 마주친 기억이 없다. 두 사람은 장식 전구 반짝이는 셰프 잘츠부르크 출입문으로 나란히 들어선다.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창가 테이블에 앉는다. 어쩔 수 없이 마주 앉았으나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큰 길 건너 예술의 전당 건물 전면에 대형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인다. 장한나가 환하게 웃는다.
초가집 툇마루에 나앉은 김옹을 한 때는 봉한 씨가 바라봤고, 이즈음엔 아파트를 나서는 봉한 씨의 먼 등을 김옹이 바라보는 것. 함께 걸으며 앞만 보고, 연주회장에서도 나란히 앉아 말없이 무대만 응시하는 것. 식당에 마주 앉더라도 공연히 두리번거리거나 웬만하면 창밖의 차량과 인파 쪽으로 눈길을 돌리는 것.
마주보기는 분명 아니지만 외면도 아니다. 마주보기 보다 더한 마주보기라는 걸, 알려 하지 않을 뿐이다. 완강히 마주보기를 꺼리는, 두 사람에게 작용하는 동일한 종류의 의지가 실은 모종의 연대거나 유대라는 걸. 그리움, 혹은 면구(面灸)의 유대.
나비부인 공연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으면서 라 트라비아타는 매번 회피해왔던 것. 그 또한 유대라면 유대의 한 모습이었다. 라 트라비아타를 함께 본 건 두 주 전이 처음이었다. 엘레나 로시와 안드레아 까레를 놓칠 수 없다는 이유로, 겨우.
김옹이 걸음을 멈추고 내려다보던 감나무에는, 조치원 집 부엌 문턱에 지친 몸을 걸친 채 먼저 떠난 사람, 말은 없었으나 수(繡) 솜씨와 음식 솜씨가 남달랐던 아내의 모습이 어렸다. 돌아올 수 없고 돌아오지 않는 이를 못내 떠올리는 건 봉한 씨도 마찬가지였다. 감나무를 내려다볼 때마다 어디선가 흐르기 시작하는 나비부인 허밍코러스를 두 사람은 함께 들었다. 눈을 마주치지 않았으나 같은 감나무를 보았다. 떠올리는 대상은 달랐으나 들리는 노래 소리는 같았다. 그들의 유대란 함께 걷고 함께 멈추고 함께 바라보며 함께 듣는 거였다. 함께 그리워하는 거였다.
봉한 씨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수원의 한 피아노 학원 강사였다. 종일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일기장 쓰듯 혼자 곡을 만들고 혼자 치고 혼자 들었다. 그녀의 곡을 처음 들은 타인이 봉한 씨였다. 그녀의 첫곡이었고 곡명은 쉬리였다.
물고기 이름, 이라고 그녀가 말했을 때 봉한 씨는 송어나 숭어만큼 큰 고기를 떠올렸다. 쉬리라는 영화가 나오기도 전이었다. 1급수에 살며 사람의 눈에 잘 띄지 않는 물고기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여자에게 다가갈 줄도, 다가오는 여자를 받아들일 줄도 몰랐던 봉한 씨는 그런 자신을 한 번도 이상하다고 여긴 적 없었다. 이상했던 건, 그런 봉한 씨에게 어느 날 여자가 생겼다는 거였다. 가까워질 수 있는 상대라는 걸 단번에 알아봤다는 거였다. 그것도 전철 안에서.
당신이 발끝을 까딱거리고 있었기 때문 아닐까, 라고 그녀가 말한 적 있다. 전철 손잡이를 잡고 선 채 봉한 씨가 발끝을 까딱거렸다는 것. 차내 안내방송 시그널이 짧게 흐를 때였고 수원행 열차는 금정역을 막 출발하던 참이었다.
시그널은 스케이팅 왈츠였다며, 누군가를 제대로 바라본 적 없던 자신이 봉한 씨를 먼저 세 번인가 네 번 연거푸 바라봤기 때문 아니었겠느냐고, 그녀는 말했다. 눈이 마주쳤을 때 그래서 뭔가를 그만 왕창 들킨 게 아니었겠느냐고.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봉한 씨는 말했다. 하지만 하필 그날 그 시각 그 열차였을까. 그녀와 말할 때 봉한 씨는 하필이라는 부사어에 힘을 실었다. 화성(華城)을 답사하러 가던 날이었겠느냐고, 하필.
차내 안내방송 시그널, 스케이팅 왈츠에 맞추어 발을 까딱거린 것, 그리고 그녀가 그런 봉한 씨를 바라보았던 것은 숱한 하필 중 극히 작은 하필의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두 사람은 알게 되었다.
상대에 따라 내 태도에 적절한 변화를 줄 줄 몰랐던 것, 그래서 그동안 연애에 젬병이었던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려나 그렇게, 그녀는 목성처럼 혼자 서른 여덟이라는 나이를 먹고 있었고 봉한 씨는 토성처럼 애맬무지 마흔 살에 이르고 있었다. 도무지 만날 수 없는 궤도였던 만큼 두 사람의 만남은 두 행성의 충돌만큼이나 불가사의한 것이었다. 우주의 모든 ‘하필’을 다 끌어다 대 보려 했던 게 그들의 연애였다.
그러나 세상의 연애 치고 그와 같지 않은 것도 없었다. 그런 면에서 그들의 만남과 연애는 지극히 평범했다. 평범하지 않은 게 있었다면 이별이었다.
하!
친구들이 이별의 사유를 물었을 때 봉한 씨가 보인 반응이었다. 많은 양의 공기가 한꺼번에 좁은 목구멍을 빠르게 빠져나오다 급작스레 정지하는 소리. 그래서 종종 학! 으로도 들리는 그 소리는, 기가 막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을 때 봉한 씨가 내뱉는 탄성이었다. 세상을 향한 주체할 수 없는 고소(苦笑)와 격한 자괴감이 순간적으로 뒤섞였다. 리드 고장난 관악기의 삑 소리 같은 그것. 누구도 필적 못할 만큼 소심하고 내성적인 봉한 씨가 어쩌다 자신의 억압된 감정을 응축하여 쏟아내는, 그만의 고유한 하! 였다. 그럴 때만큼은 물고구마도 그의 탄식을 막을 수 없다.
그녀는 수원의 한 피아노 학원 강사였다. 그녀의 부모는 수원의 한 식육점 주인이었다. 식, 육, 점. 봉한 씨는 스타카토로 발음했다.
식, 육, 점, 이라고 끊어 발음했던 이유는 김옹이 굳이 정, 육, 점, 이라 고집하며 두 사람의 교제를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식당을 겸하는 정육점을 식육점이라 부른다는 걸 친구들은 처음 알았다.
식육점이든 정육점이든 그런 게 결혼 반대 사유가 될 줄 봉한 씨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아버지는 결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믿었다. 가족 간 믿음이란 오랜 세월을 두고 켜를 이뤄 다져진 것인 만큼 단단할 수밖에 없었다. 김옹의 완강한 반대가 개그 같았다. 농담이 지나면 잠시 낯 뜨거웠던 통속 신파도 끝날 줄 알았다. 그러나 김옹의 정, 육, 점, 은 몇날 며칠이 가도록 그치지 않았다.
개그가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 봉한 씨는 길 가다 뺨을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어디서 날아온 건지도 모를 손찌검에 비틀거리다 속수무책 시궁창에 처박혔다.
봉한 씨는 김옹을 설득하지 않았다. 자신이 하려는 말과 그 말의 타당성까지, 김옹이 더 잘 알고 있을 거라 믿었다. 이 믿음 또한 오랜 세월을 두고 켜를 이뤄 다져진 거였다. 그녀와 살아버리자고 다짐했다. 그러면 통속이든 신파든 개그든 하루아침에 평정될 거라고.
그러나 신파는 결말까지 신파다움으로써 결국 영원이 끝나지 않을 통속이 되었다. 그녀가 연락을 끊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김옹이 여덟 시간 동안 슬그머니 집을 비웠던 날 이후로 그녀는 피아노 학원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알프레도의 아버지 제르몽이 비올레타를 찾아간다. ‘천사같이 순수한 아이’를 부르며 비올레타에게 알프레도와 헤어져 줄 것을 간청한다. 비올레타는 떠난다. 절망에 빠진 알프레도를 달래던 제르몽의 ‘프로벤차 고향의 하늘과 땅을 너는 기억하느뇨’. 봉한 씨는 그 노래를 다시 듣고 싶지 않았다. 누구하고도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라는 말로 봉한 씨는 이래저래 통속에 지나지 않았던 자신의 라 트라비아타를 끝냈다.
나비부인 허밍코러스가 흐를 때마다 부자의 심중에는 감나무 붉은 빛이 함께 흘렀다. 두 주 전 라 트라비아타 아리아들을 마침내 함께 들었을 때 두 사람 사이에는 저음의 첼로와 하프시코드가, 화음인 듯 충돌인 듯 흘렀다. 그리움처럼 부끄러움처럼.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룬 연주회장으로 봉한 씨가 바삐 걸음을 옮긴다. 두 걸음 걷다 멈추고 세 걸음 걷다 멈춘다. 건강하기는 해도 김옹의 걸음은 새벽마다 거실을 오가는 속도 이상 낼 수 없다. 가다 멈추고 가다 멈추는 봉한 씨와, 아무려나 등속으로 천천히 움직이는 김옹의 걸음은, 같으면서 다른 두 개의 저음 성부(聲部) 같다.
무리 끝에 합류한 김옹이 하얀 입김을 토해낸다. 연주자의 명성에 어울리는 성황. 줄지어 입장을 기다리는 진풍경이 두 사람 모두에게 오랜만이다. 기대로 한껏 상기된 봉한 씨도 흰 입김을 토해낸다. 어쩔 수 없이 번스타인의 청소년음악회가 다시 떠오른다. 카네기 홀에 들어서기 위해 부모의 손을 잡고 길게 줄을 서던 소년 소녀들.
하이든 어머니가 마을 지주의 요리사였단 말이지. 식사를 마칠 때까지 김옹이 한 말은 그게 전부였다. 하이든은 다섯 살에 사촌의 집에 맡겨졌고, 가난했고, 음식 보다 매가 더 많이 주어졌다, 고 봉한 씨는 말했다. 김옹은 고개도 끄덕이지 않고 롤빵에 사워크라우트를 얹어 먹었다.
해돋이 극장. 장내에 슈만의 아다지오와 알레그로가 흐른다. 햇살이 퍼진다. 봉한아. 어머니는 양철집 좁은 툇마루 위에 소반을 가져다 놓고 아들 이름을 불렀다. 미닫이문을 열면 어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담장을 넘어온 햇살이 소반 위의 음식에 떨어져 내리곤 했다. 낡은 소반은 어머니의 혼수였고 머핀과 비스킷은 이모가 보내준 재료로 만든 거였다. 어머니의 복분자잼과 홍시 셔벗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었다.
김옹은 눈길을 무대에 고정시킨 채 한 손을 들어 가끔씩 턱을 쓰다듬는다. 입술을 오물거린다. 뭔가 충분하고 넉넉하다 싶을 때 자신도 모르게 짓는 표정이다.
김옹도 홍시 셔벗을 좋아했다. 달고 차가운 맛에 빠져 작은 숟가락을 연신 움직이던 김옹은 어린애 같았다. 홍시를 유별나게 좋아했던 건 맏딸이었다. 다섯 살 나던 해, 혼자 두레박을 긷다 우물로 빨려들어 죽었다. 두레박 우물은 메워졌고 펌프를 박았다. 저녁 어스름이 내릴 때 김옹 부부는 가끔씩 두레박 우물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승객의 하중으로 곧 가라앉을 듯한 범선. 빈자리 하나 없이 들어찬 청중들로 연주회장은 침몰할 것처럼 무겁다. 쇼스타코비치의 첼로가 균형을, 피아노 반주가 안정을 지탱한다. 무대 위의 두 연주자가 능숙하게 돛줄을 올리고 내리며 객석에 시원한 바람과 햇살을 보낸다.
피아노 협주곡이나 소나타 보다, 피아노가 반주를 맡는 현악독주를 그녀는 더 좋아했다. 일기처럼 혼자 쓰고 혼자 치고 혼자 듣던 곡들, 봉한 씨가 첫 청자였던 쉬리, 바람 부는 언덕에서 흥얼거리던 즉흥 허밍. 그녀의 곡들은 변주의 폭이 적은, 단순하면서도 반복적인 저음 성부 선율에 가까웠다. 앞이 아닌 뒤, 위가 아닌 아래, 전경이 아닌 배경이었다. 그녀의 인상, 그녀와의 추억도 도드라진 데가 없었다. 아스라하여 외려 사무치는 묘한 그리움이, 뒤숭숭한 꿈과 한숨과 첼로의 반주음 같은 데서 끈질기게 되살아나곤 했다.
연주자와 청중 사이의 교감이 객석 어둠에 은근한 밀도를 더한다. 때맞춰 선택한 공연, 기대를 뛰어넘는 연주, 열성 팬들과 함께 한다는 설렘이 조용한 열기로 피어오른다. 진작부터 흡족한 눈빛이었던 관객들의 표정이 시간이 흐를수록 숙연히 깊어간다. 김옹은 연주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턱을 쓰다듬으며 입술 오물거리는 횟수가 잦아진다. 쇼팽의 첼로 소나타가 끝난다.
막간 휴식 시간. 연주회장을 빠져나갔다 온 누군가가 눈이 온다고 작은 소리로 말한다. 눈. 잠시 뗐다 다문 김옹의 입술에서 따라 나온 소리라는 걸 봉한 씨는 얼른 알아채지 못한다.
조치원집 초가지붕에도 눈이 내렸지, 그날. 김옹이 혼자 중얼거린다. 라 트라비아타를 보려하지 않았던 건 너지 내가 아니다. 왜 그랬었는지, 두 주 전 공연을 보고 알았지 뭐냐. 봉한 씨가 김옹을 바라본다. 김옹의 눈길은 협주단 배치로 분주한 무대에 멈춰 있다.
그날……. 여덟 시간 동안 슬그머니 집을 비웠던 날을 말하는 거냐고 물으려다, 김옹의 말이 이어져 봉한 씨는 입을 다문다. 지붕에 널어놓은 홍시에 눈이 내리면 그대로 셔벗이 되곤 했잖니. 그날도 마침 눈이 내렸다만 그곳에 홍시가 있을 리는 없었지. 니 어머니가 간 지 꼭 5년째 되던 날이었다.
지휘자에 이어 붉은 드레스를 입은 첼로 연주자가 무대 중앙으로 들어선다. 김옹의 말이 끊긴다. 관객의 마지막 기침도 잦아든다. 파리근교 알프레도의 집, 아버지 제르몽은 그곳에 나타나지 않는다. 콘솔 앞엔 비올레타 혼자다. 제르몽은 비올레타를 만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날의 ‘조치원 고향의 눈 내리던 하늘과 땅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하이든 첼로 협주곡 D단조가 흐른다. 비올레타는 없다. 이별을 간청하는 아버지의 노래도 있을 리 없다. 어깨의 붉은 꽃 장식이 귀여운 장한나와 협주단이 있을 뿐이다. 사과처럼 팽팽하게 익은 짧은 침묵의 휴지(休止) 속에서 하이든이 악장을 바꾼다.
어째서 초가집을 고집했던 건지, 김옹은 말하지 않았다. 1917년생. 시간이 얼마나 더 흘러야 말할까. 눈이 왔었다던, 그날의 얘기를 15년도 더 흘러 입을 열었듯 다시 15년이 흐르면 입을 열어 말할까. 결혼한 두 아들 집을 마다하고 굳이 막내와 함께 사는 이유, 새벽마다 거실을 걷는 이유, 박수를 치지 않는 이유, 감나무가 내려다보이는 길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던 이유, 해질녘 두레박 우물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유, 아파트 복도에 서서 멀어지는 아들의 등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이유를.
눈이 왔었다던 그날의 얘기도, 어쩌면, 끝내 삼켜버리는 것이 김옹에겐 더 어울리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말한다고 세상이 달라지지 않으며 말을 안 한다 하여 삶 또한 달라지지 않을 거라면. 달라질 것은 어찌하든 달라지고 달라지지 않을 것은 어찌하든 달라지지 않을 거라면. 말이 없어도 자부동을 벽에 거는 이유와 쉬리를 곁에 두는 이유를 알 수 있는 거라면. 마주 보지 않는 것이 더한 마주보기라는 사실을 끝내 외면할 수 없는 거라면. 음악만으로도 초가집과 양철집 사이에 뭔가 오갈 수 있는 거라면. 40년이라는 세월의 편차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거라면. 닮았어야 할 점만 닮는 것과 닮지 말았어야 할 점만 닮는 것에 별 차이가 없는 거라면.
여섯 살도 되지 않아 집을 떠난 하이든, 사랑과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한 하이든, 동료의 다락방에서 춤곡과 소야곡을 작곡하던 하이든, 세 벌의 낡은 내의와 오래된 코트 한 벌이 전 재산이었던 하이든, 헐값 레슨으로 생활했던 비참한 하이든, 그러나 인내심 강하고 낙천적이었던 하이든이 단조의 선율로 되살아나 배회하고 있다. 김옹과 봉한 씨가 나란히 응시하는 무대 위에서.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을 시각, 마지막 레퍼토리 마지막 악장이 종지(終止)를 향해 숨 가쁘게 치닫는다. 연주자의 활과 현 사이에 푸른 불꽃이 튄다. 응시. 두 사람에게 오랫동안 익숙한 것이다. 그렇게, 함께하는 응시의 순간들이 모여 세월이라는 시간의 숲을 이루었다. 숲은 길어지고 우거지고 깊어졌으나 등 뒤 풍경으로만 저물어갈 뿐, 그들은 그것을 뒤돌아보지 않는다. 나란히 앞을 바라보는 사이 배경의 숲은 저 홀로 그윽해질 뿐이다.
비명에 가까운 환호가 폭죽처럼 터진다. 비로소 보면대에서 눈을 뗀 협주단원들이 늠름하다. 관객들은 이미 모두 일어섰다. 봉한 씨도 자리에서 일어선다. 박수 소나기로 연주회장은 금세 홍수를 이룬다. 콩 볶는 듯한 갈채가 파도처럼 쓸려갔다 쓸려온다. 붉은 연주복의 첼리스트가 떠밀리듯 일어선다. 김옹도 일어선다. 박수를 친다. 그가 처음으로 박수를 친다.
환호와 갈채에 묻힌 김옹의 짧은, 한 번의 목소리를 봉한 씨는 듣지 못한다. 그들 사이를 스쳐갔던 숱한, 미묘하고 민감한 순간이 또 한 차례 그렇게 지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봉한 씨는 안다. 알 수 있다. 들린다고 다 알 수 있는 게 아니고 안 들린다고 다 모를 수 없는 거라면.
봉한 씨가 읽었던 김옹의 입술. 달뜬 한 마디였다.
갑상이다!
바깥은 더 어두워졌고 더 추워졌다. 눈은 더 이상 내리지 않는다.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탄다. 두 사람은 여전히, 말없이 갔던 길을 말없이 되돌아온다.
봉한 씨는 오전의 전화를 떠올린다. 거실의 전화벨이 울렸다. 김옹이 수화기를 들었고 봉한 씨는 자신의 방에서 귀를 기울였다. 김옹은 수화기를 붙들고 놓지 않았다. 누구십니까? 김옹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누구든 더 이상의 통화는 불가능했다. 송화자는 아흔 넘은 수화자의 기억력을 배려해, 신분과 용건을 밝히는 대신 다시 걸겠다며 공손히 전화를 끊곤 했다. 대개는 봉한 씨 친구들의 전화였다. 김옹은 슬그머니 수화기를 내려놓고 입을 다물었다.
송화자의 지나친 배려가 김옹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김옹의 발음은 언제나 정확했다. 뭐라고 전할까요? 거기엔 아무리 긴 용건도 충분히 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대부분의 송화자는 얼른 용건을 말하지 않았다. 배려 아닌 배반인 셈이었다. 김옹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입을 꾹 다무는 것으로 언짢은 맘을 삭혔다. 늘 그랬다.
늘 그러한 집으로, 두 사람은 돌아간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공간이라면 식당이나 공연장도 집과 다를 바 없다. 덜컹거리는 전철 안 역시.
오전의 전화에 대해 봉한 씨는 묻지 않는다. 곧 자신의 휴대폰이 울릴 거라 생각했지만 끝내 휴대폰은 울리지 않았었다. 그래도 묻지 않았고 여전히 묻지 않는다. 짐작 가는 친구들에게, 전화걸었니? 물어보는 게 쉽다. 하지만 봉한 씨는 그러지도 않는다. 시간이 걸리긴 해도, 누구였는지 결국 밝혀지게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다만 동행할 뿐이다. 마주보지 않고, 나란히, 앞을 응시하며.
홍제역에 내려 지상으로 오른다. 아파트 단지 쪽으로 난 길로 접어든다. 길 양쪽에 눈이 희끗희끗하다. 사람의 발길이 닿았던 곳만 검게 녹았다. 더 좁아진 길은 두 사람이 걷기에 빠듯하다. 행인이라곤 김옹과 봉한 씨가 전부다.
아침에 쉬리 밥 줬더냐? 라는 것만 같아 봉한 씨는 귀를 기울였으나 김옹에게선 아무 기척이 없다. 외투에 턱을 묻고 앞서 갈 뿐이다.
늦은 오후. 그렇게 하루가 갔다. 지나온 많은 날들과 다르지 않은 하루가. 오전 또한 그렇게 다시 올 것이다.
나란히 밤길 걷는 두 사람 어깨 위로 주황색 나트륨등 불빛이 떨어져 내린다.*
첫댓글 잘 읽을게요.
고맙습니다. 우와 .......... 부자가 어쩜 그리 닮았나요. 저렇게 고요하게 사는 법도 있군요.^^*
조치원에 가보고 싶어요. 아버지가 그곳에서 군청공무원으로 일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그곳에서 큰언니는 유년시절을 보냈었고요.
아버지도 살아 계시면 90이 넘었을텐데요. 얼마전에 아버지와 절친했던 오촌아저씨가 95세에 돌아가셨어요. 소리를 잘 못듣고 늘 누군가의 부축을 받아야만 거동을 하셨었죠.
이 얘기 거의 실화에요. 조치원 가면 아직 그 집이 있지요. 본채는 초가집 사랑채는 양철집. 그 양철집에서 봉한 씨와 1박 했어요. 그의 어머니가 차려주는 아침을 맛있게 먹었었지요.
잔잔한 일상이 부러워요. 딸이 조치원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어서 조치원에 두 번 갔었는데 저는 조치원보다 서울이 더 좋은 것 같아요.
이 글을 왜 못봤을까?
천천히 또박또박, 행간을 쉬어가며 읽었습니다.
눈 앞에 선한 풍경과 음악 소리가 들려서 줄줄 읽을 수 없었어요.
봉한 씨가 친구 같이 느껴지기도 하네요.(동갑이라 그런가...?)
자부동과 번스타인, 쉬리와 라트라비아타, 양철지붕과 폴모리......
생뚱맞게도 지리산 친구에게 전화가 하고 싶어집니다.
친구랑 함께 하던 음악, 책, 소소한 잡담들, 친구가 꺼내주던 달콤하고 시원한 홍시가 아른아른...
ㅋㅋ자부동:거의 잊었던 말이었습니다.
모녀가 함께 사는 것이 요즘의 세태죠. 저의 초등동창생이 아버지 모시다 돌아가시고 지금도 아직 결혼도 못하고 혼자 살지요. '기냥' 싫은 아버지와 알콩달콩 사느 모습도 좋아 보이네요. 장한나 첼로 연주회에 함께한 기분이에요. 잘 읽었습니다..^^*
이제야 읽었어요. 진작에 다운받아 놓고도.... 아 언젠가 구 샘이 올리셨던 손바닥 소설 '봄밤의 협주곡'의 진판 같군요.
1917년생인 김 옹이 고전음악을 즐길 줄이야. 대단한 인테리입니다. 1913년생이시던 내 아버님은 곧잘 시조를 들으셨죠. 라트라비아타.. 듀마피스의 춘희을 읽은 게 중3 때던가.. 라트라비아타와 묘하게 어우러지는 봉한 씨의 이별... 이 잘 짜임! 역시 구 샘!
자부동- 늘 그러셨던 내 어머니, 자부동 바로 하여 똑바로 앉으라고 하셨던가, 양철집 - 마을 저 아랫돔, 한 집안이었으나 우리보다 훨씬 부자였던 그 양철집, 그 집에는 오래전 그 시절, 국민학교 여선생을 하던 집안 언니 둘이 살았는데, 결코 한 집안 처녀같지 않았던 긴 생머리의 그녀들. 홍시 셔벗 - 아, 그래, 우리 엄마가 해 주던 것은 셔벗이 아니었는데, 뭐였더라. 그 겨울 내장을 시원하게 달래주던 그 홍시... 무엇. 기냥 - 어린 도회지로의 유학으로 잃어버린 내 태내적 모국어. 그리하여 나 스스로 고향이 불분명하게 여겨지는데.
이제야 읽었습니다. 모태 모국어 여럿 만나 기쁩니다. 여러 음악, 쌤과 김옹이 무지 부럽습니다.
무지 많은 것들을 떠올리게 하는 글입니다. 아련한 기억들과 함께 읽었습니다. 양철집 창구멍 소년 봉한씨가 참 부럽습니다. 뭐, 우선, 결혼 좀 안 하면 어떻습니까? 끈질기게 되살아나는 그녀의 기억있으니 곧 다시 만날 듯.
어느 날 아침, 봉한씨 어쩌다가 배당 받은 단편 찍으러 떠나는 아침, 전화벨 소리, 받는 김옹,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봉한씨에게 돌려지는 전화. 그리하여 곧 둘 함께 하리라. 이런 신파인들 어떻습니까?
아, 오늘부터는 하이든 좀 열심히 들으렵니다. 그는 늘 내게 평온함 쪽이었는데, 글쎄 그의 세월을 매치시키면 쉽게 어울리지 않는 그의 음악. 좀 더 듣고 느껴보렵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하, 그래요, 실화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지요.
조치원. 고 녀석, 내 전생에 맺지 못한 인연이었는지 현생에 늘 인연의 끈 내게 늘여뜨려 오는 조치원. 아마 앞으로도 꽤 긴 세월 조치원 역을 오르고 내릴 것인데...... 조치원에 가면 봉한씨와 김옹을 만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