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교회를 세운 나의 아버님권수도 장로에 대하여
권태각 (예천교회 원로장로)
아버님은 예천교회의 초대교인으로써 예천교회를 세운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아버님이 예천교회를 세울 만한 재력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예천읍 우계동에서 조선시대 말기인 무자년(1888) 동짓달에 태어나 일제시대와 해방과 독립 그 격동의 세월을 살아시다가 정유년(1953) 유월에 돌아가셨습니다.
태어나 농사를 지으면서 복숭아 과수원을 일구고 경영하셨습니다. 농사일을 하시다가도 주일에는 두루마기를 단정히 차려 입고 교회에 나가셨습니다. 한번도 주일을 범하는 일이 제 기억에는 없습니다.
집안의 남녀 아이들에게 헌금을 주며 교회로 인도하기도 하셨습니다.
우계동 중심이 되는 곳에 살았습니다. 읍에 있는 예천교회까지는 거리가 멀어서 저녁예배와 새벽기도 다니는 일이 힘들다고 마당 끝 텃밭에 20평 정도의 기도실을 짓고 우계동 사람들이 신앙생활 하는데 불편이 없도록 애썼습니다.
그 때는 우계동에 과년한 처녀들도 신앙생활을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일제시대 말기 신사참배 거부로 주재소(경찰서)에 연행되어 조사받고 투옥된 일도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 시대에 복음을 받아들이고 신앙생활을 하고 예천교회를 세우게 되었는지 자세한 말씀은 듣지 못했으나 열일곱 살 되던 해에 미국 선교사를 통해서 복음을 받고 예천읍에는 교회가 없으므로 용문 금곡교회에 다니셨습니다.
당시 농사를 지을 때 할아버지의 명을 어길 수가 없어 새벽에 거름을 지게로 들에 다 내어 놓고 주일을 지키기도 하셨다고 합니다.
당시 우계동에서 용문 금곡교회까지는 이십 리 길이었으며 한천에는 다리도 놓여 있지 않았습니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눈보라가 휘몰아쳐도 주일에는 금곡교회에 다니셨으며 당시 강사를 모시고 사경회가 있을 때면 우계동의 사람들을 전도하여 함께 참석하셨고 처음부터 끝날 때가지 그 곳에서 침식을 하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때의 특별한 체험이 그 어려운 역사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우계동의 그 후손들이 전국에 흩어져 신앙생활을 잘하고 축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예천교회를 세운 기록이 처음 교동댁 ㄱ자집 사랑방이라고 전해옵니다. 교동이라는 것은 당시 금곡교회의 이유인님의 아호이니 교동댁은 아마 그 집 따님댁이 아닌가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세력가요 재력가인 교동어른의 헌금과 금곡교회의 지원이 있어서 예천교회를 세웠다는 추론이 가능합니다만 이런 기록은 6.25 사변 통에 불타버리고 남아 있지 않습니다.
1929년에 예천교회 초대 장로로 취임하신 후에는 안동에서 경안노회가 개최되면 먹을 양식을 짊어지고 걸어서 안동까지 가셔서 숙식을 하며 참석하셨습니다.
첫댓글 귀한 정보, 감사합니다..
조회수 200 祝賀
교회의 역사적 자료를 보존하고 널리 후손들에게 알려야 함은 매우 성경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일을 등한시함은 우리모두의 잘못입니다. 우리의 기억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검증된 자료를 갖고도 보존하지 않음은 무슨 까닭인가? 무지하다면 지혜를 구하라(약1:5)
1911년 + 100년 =2011년 앞으로 4년이면 교회설립 100년을 맞이하는 예천교회의 역사성을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까? 2010년가서 준비하면 결국 못하거나 흐지부지 될 가능성 만치요(?) 과거 90년사 제작을 반대한 지도자들의 무지를 회개하오며 미리 예비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아멘!
지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둔하고 부족하고 미련한 모습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3년 안에 정리해야 하는데........두렵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