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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환 장로님의 주일성수 이야기
김기대
장수마을 원목
먼저 이야기는 조카인 김기대 목사가 숙모님 생존시 직접들은 실화임을 밝혀둔다.
김성환 장로님은 형제가 5남 2녀셨는데 그중 차남으로 누이가 두분인데
작은 매제가 예천군 감천면 벌방동 문찬조 장로님이다.
그러니까 문찬조 장로님은 김성환 장로님의 매제가 된다.
이 이야기는 김성환 장로가 유동에 사셨을 때의 이야기다.
그때가 아마 여름철 어느 토요일 오후였는데 김 장로님은
매제인 문 장로님을 꼭 만나야 할 일이 있어서 벌방으로 넘어갔다.
유동에서 벌방을 가려면 ‘주마산’ 줄기를 넘어야 하는데
그 산은 높고 험하며 인적이 드문 산길이었다.
김 장로님이 벌방으로 넘어 갈때는 아직 오후라 아무 걱정이 없었으나
그곳에서 일도 보시고 이야기도 나누시다보니 어느덧 해가 벌방 동네 높은 앞산을 넘어가게 되었다.
갈길이 바쁘신 김 장로님은 서둘러 집으로 떠나려고 하는데
모처럼 매제가 자주오지도 못하니 주무시고 내일 아침 일찍 넘어가시라고 만류를 했다.
- 지인들과 함께. 오른쪽이 김성환 장로 -
김 장로님이 모처럼 간 매제집에서 하룻밤을 자지 못하는 이유는
내일이 주일(主日)이라 새벽기도부터 저녁예배까지 성수주일에 차질이 생기기에
어떻게 하든 유동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생각때문이었다.
두분은 집 마당에 나와서 가시지 말라느니 간다느니 하다가 보니
김 장로님이 유동으로 넘어가야하는 산 중허리에서
까마귀떼가 까악까악 하면서 떼를 지어 맴돌지 않는가.
이것은 그곳에 어떤 동물이 있기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문 장로님이 집으로 가시는 것을 만류하셨다.
마침 문 장로님은 그것도 김 장로님을 붙들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가시지 말라고 하니 주일 때문에 가야한다는 그를 끝내 붙들지는 못했다.
- 이당이 쌓은 덕은 그의 아들과 손자에게 까지 가업으로 이어져 집안의 가풍이 되었다. 중앙이 이당 -
그길로 김 장로님은 더 늦기 전에 산을 넘을 생각으로 바삐 걸어보았지만
험한 산을 중간쯤도 오르지 못하고 사방이 어두워졌는데
산이라 수목들이 우거져서 길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김 장로님은 전에 여러번 이 길을 다녀서 눈에 익은 길이라
아무 생각없이 올라가는데 왠지 갈수록 머리끝이 쭈빗쭈빗해지고
이상하게 몸에 전율이 느껴지면서 마음까지 괜히 불안해 지기 시작했다.
출발 직전에 까마귀 떼들의 소란도 있고해서 혹시라도 어떤 산짐승이라도 나오지 않을까
생각하니 발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때 이상하게도 무엇인가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것 같고 금방이라도
덥석 달려들 것 만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김 장로님은 금세 뒤에서 무엇이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느낄수가 있었다.
그렇더라도 이쯤되면 무어냐고 뒤를 돌아 볼 수 있는 용기도 그리 쉽게 생기지 않았다.
김 장로님은 마음을 크게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이를 어쩌면 좋을까?
하마터면 김 장로님은 기절할 뻔하였다.
그 물체를 제압할 소리도 지를 수가 없었다.
뒤를 따라왔던 것은 사람이 아닌 산에 사는 짐승이었다.
어두워서 짐승의 정체는 보지 못했어도 그리 작지는 않은 것같고
더 무서웠던 것은 그 짐승의 두 눈이 마치 자동차 헤드라이트 같이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 망배단을 찾은 김성환 장로 -
김 장로님은 그것을 보는 순간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지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벌방 동네로 내려갈 수도 없는 것은 그 짐승이 뒤에 따라오고 있었기 때문이고
유동까지는 아직도 산을 넘어 한참을 가야하고 사방이 어두워서 돌 하나도,
나무토막 하나라도 찾아볼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김 장로님은 그래저래 고민중에 자신의 손에 무엇인가 들고 있는것을
그제야 발견하고 다소 안심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우산이었다.
낮에 벌방으로 떠날 때 구름이 잔뜩 끼여 흐렸기에 비가 오지 않을까 하여 준비해 온 것이다.
우선 김 장로님은 그 짐승과 사람사이를 무엇인가로 막아야 했다.
언제 어떻게 해칠지를 알 수 없거니와 그 짐승의 두 눈에 흐르는
그 불길을 계속 주시하다보면 스스로 무너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그 불빛을 차단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들고있던 우산을 확 펼쳤다.
그 순간 따라오던 짐승이 그 소리에 주춤하고 뒤로 물러서는 것이 아닌가.
김 장로님은 우산을 펼 때 짐승이 물러서는 것을 보고 그 방법을 이용하여
짐승이 가까이 있다 싶을 땐 우산을 짐승 앞으로 내밀어 펼치며 짐승을 물리쳤는데
그 날 그 우산의 얇은 천은 어떤 견고한 성벽보다도 더 튼튼한 차단장치로 사용되었다.
- 성곡교회를 나서는 김성환 장로. 그는 항상 우리 전통옷을 입고 다녔다.
고무신에 두루마기 등 우리것을 아끼고 사랑했다.
자녀들에게도 우리것의 소중함을 늘 얘기했다. -
그러나 김 장로님에게 다른 걱정거리가 생겼다.
어떻게 하면 뒤따라오는 짐승을 놔두고 유동을 향해서
유유히 걸어올 수 있는 담력을 가질 수 있을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김 장로님 역시 따라오는 짐승을 무시하고 걸어올 수 없어서
우산을 펴든 채 뒷걸음으로 그 산길을 넘었다.
그러자니 수없이 넘어지고 자빠지고 했을 것이다.
김 장로님의 온몸에는 땀이 비오듯하여 입은 옷은 씻으려고
물에 담근 빨래처럼 땀이 흐르고 한 순간도
그 짐승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으니 몸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그 어려운 때를 넘기면서 김 장로님은 먼저 “주여 도와주업소서”라고 기도했을 것이고
속으로는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격언을 수 없이 되뇌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몇 시간 동안 뒷걸음으로 험한산을 넘어 집을 향해오는데
오다가 우산을 약간 놓고 보면 두 눈에 불을 켜고 짐승이 따라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래저래 오는데 어디까지 왔는지 목적지인 유동까지는 얼마나 더 가야하는지
알 수 가 없었는데 어느 동네인지 가까워지고 동네 개들이 무엇을 보고
짖는지는 모르나 개짖는 소리가 들려 우산을 들고 봤을 때 짐승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 이당이 말년을 보낸 장수면 소재지의 옛 장수한의원 뒷모습 -
그길로 유동을 향해 넘어지며 쓰러지며 가고 있을 때 유동집의
송 권사님(김성환 장로의 부인)은 낮에 일찍 다녀오겠노라고 떠난 장로님이
밤이 깊었는데도 오시지 않자 마당에 명석을 깔아놓고 나와서
기다리다가 아마도 주무시고 내일 아침에 일찍 오시려니 생각하고 밤도 깊고
이슬도 내려서 약간 싸늘한감도 있고해서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그제서야 기다리던 김 장로님이 나타나 깔아놓은 멍석위에 폭 쓰러지는 것이었다.
송 권사님이 “왜 이렇게 저물게 오십니까?”하고 물어보아도 아무 대꾸가 없어서
가까이 가서보니 어둠석에서도 장로님은 한없이 지쳐있고 말도하지 못하고
옷을 짜면 빨래감처럼 땀이 물처럼 흐르고 있어 이상하다 무슨일이 있었을까 의하해 했다.
한참 후에서야 김 장로님은 정신을 차리고 산을 넘으면서 겪었던
그 소름끼치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내가 이렇게 산을 넘었고
그 무서운 짐승은 다니엘이 들어간 사자굴의 사자처럼 다니엘을 해치지 못하게
하나님께서 입을 막았던 것처럼 김 장로님에게도 그 짐승은 해치려고 나온 동물이 아니라
대화를 못했을뿐 김장로를 그 험한 산을 넘는 동안 호위하는 임무를 위해
하나님께서 쓰신것이라 믿고 감사드리며 그날 주일(主日)성수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김성환 장로님을 말한다.
그의 신앙은 하나님께 절대순종, 성곡 경주 김씨 가문을 개종시킨 신앙이며,
어려서 혼자만 시작하여 지금은 김동선 할아버지(김성환 장로님의 부친) 이후로
대소가내에서 장로12명, 목사 7명 그 외 권사, 집사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
할아버지로 인해 현재 믿지않는 자손이 없음은 모두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서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 그대로 김성환 장로님이 뿌린 밀알이라고 고백한다.
김 장로님은 생활자체가 말씀의 실천이셨다.
부모 공경의 본보기가 되심
제가 어렸을 때 김성환 장로님은 유동에 사셨는데 성곡에서 그리 먼 거리는 아닐지라도
이따금 부모님을 뵈러 오시는데 그때마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방에 계시면
문을 열어 놓으시고 문밖에서 문안인사를 드리고 난 후 방으로 들어가시는 것이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다.
하나님께 순종하시는 신앙생활이었던 것처럼 부모님께도 항상 순종하셨다.
가정생활이란 수입이 많으면 많은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씀씀이가 많아지는 법인데
더구나 자녀 교육비 부담은 엄청난 지출인데도 할아버지, 할머니 세상 떠나시기까지 식사 때마다
고기반찬이 떨어지지 않게 정성으로 봉양해 오신 것은 부모님을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겼던 모습으로 참으로 귀감이 된다.
형제간 집안과의 관계
형제분들이 각가 분가해서 살아가는데도 김성환 장로님은 언제나 대가족을 한 가정으로 보시고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언제나 함께
참여하시고 격려하시고 장로님께서 보셔야 해결을 보게 되었다.
한의원을 경영하시면서는 대소가 전체가 가족 중에 누구하나 병이 나서 한의원에 가기만하면
약을 주시는데 그 많은 대식구가 무료로 약을 가져와서 먹고 치료받게 되었다.
또한 아무래도 현금 관리가 많은지라 갑작그럽게 지출이라도 할 일이 생기면
우선 한의원에 가서 장로님에게 편리를 보는것이 당시 다반사였다.
또한 집안에 길흉간 어려운 일이 있을때마다
김장로님은 많은 부담을 하셨는데 받은 측에서는 큰 힘이 되었다.
장로님의 형수님(김기원의 母)이 돌아가셨을 때도 당시 거금
일백 만원을 내놓으시면서 장례를 치룰 것을 당부하신 일도 있다.
언젠가 장로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수년전이라 생각되는데
구정 설날에 장로님이 중대발표가 있다고 하여
장로님의 직계자녀들 그리고 집안 어른 아이 할것없이 다 모인 가운데서
성곡 경주 김씨 종가인 김기원 장로(김성환 장로 조카)가 맏집인데 생활기반이 약해
조상 모시는 것이 어렵다고 보시고 자신이 경작하셨던 논 600평, 밭 1600평과
당시 일천 만원을 들여 집까지 지어 주시기로 약속하고 그날로 큰 조카에게 넘기신다고 발표하셨다.
이런 일은 사람마다 집안마다 다 있는 일이 아니다. 유독 우리 집안에 만,
김성환 장로님만 하실 수 있는 결단이셨다.
장로님이 그 많은 땅의 기득권을 포기하신것도 쉽지 않은데
더 귀한것은 그 자리에 장로님의 아들, 손자가 있었는데
그 누구하나 일언반구의 불만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할아버지에 그 아들, 그 손자 모두가 너무나도 장한 모습이었다.
아버지가 하시는 일인데, 할아버지가 하시는 일인데하며,
할아버지의 결정에 따르게된 이일은 요즘엔 보기 드믄 일이었다.
오늘날 상속, 분배문제가 부모 자녀간에도 힘들고 어려운 일로 대두되고 있는데
이 일은 김성환 장로님과 그 자녀들 집안내에 자자손손 전해가야 할 미담 중의 미담일 것이다.
그의 인간관계
김 장로님의 교통수단은 두 바퀴 자전거로 성곡에 계실때는 한 달 육장(六場)을 다 다니셔야 했다.
그런데 자전거를 타고 가시다가 지면있는 사람을 만나면 아이 어른 관계없이
자전거에서 내리셔서 인사하시고 가시는 것은 김 장로님이 가시고 안 계신 지금도 참 좋은 일이 되셨다.
교회에서는 언제나 담임목사님을 보필하시는 신앙생활로 어느 누구도 원만하게 대하셨다.
성곡교회 어느 목사님은 김 장로님이 장수(반구리)에 계실 때 내려오셔서
“장로님 이발하러 왔습니다.”하시면 이발비를, “목욕갑니다”하시면
목욕비를 주시면서도 단 한번도 우리 교회 목사님이 어떠하시다는
말씀을 하시는 법이 없이 보필하시는 신앙인이셨으며 일제 말기로 기억되는데
김 장로님의 모친 생신이 음력 6월 초2일인데 그때마다 형제분들이
성곡 큰댁에 모여서 생신을 차려 잡수시고는 헤어졌다.
- 이당과 증손자 연준, 증손녀 연진, 장남 기진, 영손 김덕호 박사 4대가 함께 성묘가는 길에서. -
이상한 일이 있었던 날은 음력 6월 초2일 생신때 비가 억수 같이 오는 이른 새벽에
김 장로님의 형님 김영환 집사님이 비 때문에 소먹이를 준비하지 못한 관계로
소를 큰집옆 안동 권씨 묘지에 소를 몰고가서 풀을 뜯기다가 준비하실 일이 있어서
소만 거기 놓아둔 채 집에 들어오셔서 큰 아들(김기원 장로)을
소풀을 먹이라고 깨워서 보냈는데 곧 나가보니 비가 계속 내리는 칠흑같은 밤이라
소가 보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소가 숨쉬는 소리도,
풀을 뜯어먹는 소리까지 들리지 않자 김기원 장로는 다시 집으로 들어와 소가 없다고 하자
늦게 잠들었던 식구들이 모두 일어나서 각기 흩어져 소를 찾기 시작햇다.
날이 밝아지자 안정방향으로, 예천방향으로, 장수방향으로 각각 나눠서 찾아보았으나
계속 내리는 비로 흙위에 나 소발자욱도 다지워져 버려 찾을 길이 없어 난감했다.
- 순흥 소수서원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이당 -
생신날 아침을 먹을 경황도 없이 서둘다보니 날이 밝은지 한 참되었을 때
큰댁 앞 남산에서 같은 마을 김상기 씨가 와서 큰댁의 소가
큰 골 입구 선돌바위 근처에 있다고 전해주지 않는가!
김상기 씨는 선돌바위 근처에 논이 있어서 비가 계속 오니까 논을 돌아보려고 갔다가
이상하게도 밭에 우리 소가 있는데 송아지를 분만했고
소 주변은 풀들로 둘러 막아 놓았다는 이야기다.
그가 큰집 소인 줄 쉽게 알아본것은 그 소는 얼룩무늬 검정소로
동네에 한 마리밖에 없으니 쉽게 알아보게 된 것이다.
이 소리를 듣자 마자 여러 사람이 단숨에 달려올라가보니 과연 암소와 송아지가 거기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비가 계속내리는데 어떤 남자가 우산을 쓰고
소 주변에 있다가 가족들이 소를 찾으러 올라가니 그 는 도망을 가는데
달려가서 잡고보니 모르는 사람이 아니더라는 것이다.
연유를 물어보니 소를 몰래 몰고서 가다가 소가 송아지를 분만하여
걷지 못해서 할 수 없이 응급처치하고 거기 있었다는 것이다.
소를 찾게되어서 감사한데 소도독을 잡았으니
관에 고발하자느니 여러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 소식을 집에서 들은 김 장로님은
소를 찾았으면 그만 감사할 일이고 도둑은 놓아주어야 한다고 하면서
무었 때문에 적을 만들 필요가 있느냐고 해서 용서해서 보냈던 것이다.
- 성곡 고택 앞에서. 좌로부터 이당, 차남 김기수 목사, 손자 김대호, 부인 송태령 권사 -
가족들은 소를 몰고 오고 송아지는 바지게에 지고 왔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김 장로님은 사소한 일이라 하더라도 내가 조금 손해보면될일을
남에게 절대로 섭섭해 하시게 하지 않는 삶을 살다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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