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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요한의 탄생예고
누가복음 1:8-25
김동휘 선교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인으로 살았지만 아이가 없었던 사가랴 가정을 축복하십니다. 그것은 단지 아이가 없었던 가정에 아이를 주시는 것뿐만 아니라 그 아이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쓰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예언과 같이 엘리야가 오리라한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엘리야의 심정으로 오는 세례요한의 탄생을 소개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1. 제사장의 직무를 다하는 사가랴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 행할새,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8-10절)
사가랴는 아비야 반열로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서 행하였습니다(8절). 유대의 제사장들은 전체적으로 2만명 정도가 되고, 이들은 종가(宗家)에 따라 24반열(각 반열에 천명 정도)로 나눠집니다. 이러한 제도는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건국자라 할 수 있는 다윗 때에 정비된 것으로, 다윗은 초대 대제사장인 아론의 두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의 후손들을 24가족(반열)으로 나누고 그 각 가족으로 하여금 1년에 1주씩 2차로 성전봉사를 하게 했습니다(대상 23,24장 ; 대하 8장). 그런데 이러한 제도는 바벨론 포로 당시에 일시 끊어져 포로 귀환하면서 4반열만(하김, 예수아, 임멜, 바스훌) 귀국하게 됩니다(스 2:36-39). 그 후, 이 반열은 에스라의 주도하에 가능한한 본래의 모습대로 재조직하여 24반열의 이름만이라도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사가랴는 그 중에 아비야의 반열로 여덟번째 반열에 속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근원을 따져보면 사가랴가 속한 아비야 반열은 다윗 당시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가랴는 제사장의 전례대로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서 분향을 하였습니다(9절). 제사장들의 24반열 중 각 반열의 차례가 돌아오면 그 해당 반열의 제사장들은 제비를 뽑아 각각 수행해야 할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 제비뽑기는 미신적 의미에서 이뤼진 것이라기보다 항상 ‘여호와 앞에서’ 제비를 뽑는다는 신전 의식하에서 이뤼진 것입니다(신 18:10-12; 수 18:6,8). 제비를 뽑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구약의 성도들이 행한 방법이었습니다.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16:33). 구약에서는 여러 경우의 제비뽑기 사례가 등장하는데, 새로운 땅 분배시(민 26:55; 수 14:2), 죄인을 찾아낼 때(수 7:14; 삼상 14:42), 첫번째 왕 선택시 (삼상 10:20,21), 성도의 일을 다스리는 자나 노래 부르는 자 또는 문지기의 일을 맡을 자 등을 선택할 때 제비뽑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도 제비뽑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예수님의 11제자가 맛디아를 가룟 유다 대신에 제자로 선출할 때 등에서 나타납니다(행 1:26). 여기서 보듯이 이 제비뽑기는 모든 의사결정의 유일한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가 시행되던 시기,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필요했던 경우에 한해서만 시행되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인간들에게 알리시기 위해 제비뽑기를 부분적으로 허용하셨으며, 그 일의 배후에는 당신이 친히 섭리하셨으나(잠 16:33), 특별 계시인 성경이 완성되고 성령의 적극적인 역사가 시행되는 오늘날에는 이 제비뽑기가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여하튼 사가랴 당시에 제사장들은 제비뽑기를 통하여 대략 아침 일찍 제단과 불을 준비하고, 제물이나 성소의 기구들을 예비하며, 또 준비된 기구들로 분향하거나 제물을 드려 제사하는 일 등을 각각 분담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사가랴가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을 하게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각 제사장 가족들은 그 해(年)에 해당되는 기간 동안 성전 봉사의 책무를 맡게 됩니다. 즉 제사장들 중 그해에 봉사할 임무를 맡게 되는 제사장 가족은 일주일 동안씩(8일간; 안식일에서 안식일까지) 일년에 두 번 성전을 섬기게 됩니다. 그러나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등 절기 때에는 제사장들 모두가 함께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한 제사장 개인이 상번제를 위해 분향단에 향을 피운다는 것은 극히 희박한 경우이며 일생에 단 한번 주어지는 것조차 큰 행운으로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제사장의 수효(일설에는 약 2만명 정도였다고 함)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혹자에 따르면 한 제사장이 평생에 두 차례에 걸쳐 성전 봉사를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그 많은 제사장들 가운데 제비가 자신에게 떨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사장에게 있어 이 일은 자신의 생애에 최고의 영광이요 은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직무를 맡은 제사장 사가랴가 ‘하나님 앞에서’ 그 임무를 수행했다고 표현되었는데, 이것은 성전이 곧 하나님의 임재 처소로 이해되었던 히브리인들의 전통적 사상에 의한 묘사입니다(합 2:20). 여기서 '성소'란 성소와 지성소를 합한 성전 내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가랴는 이때 향단에 향을 지피기 위해 성전의 내부에 해당하는 성소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 확실합니다. 이와 같이 성소에 들어가 분향의 임무를 맡게 되는 제사장은 출 28:1-43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세마포및 에봇으로 된 성의를 착용하고 홀로 성소에 들어가 여호와께 봉사하게 됩니다.
분향 곧 향을 불사르는 일은(출 30:7, 8) 제사장의 고유 임무로서, 이때에 드려지는 향은 모든 백성들의 마음의 간구 곧 기도를 상징합니다(시 141:2; 계 8:3). 제사장으로서 분향을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성도들의 기도를 올리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장차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의 몸을 대속물로 드리시고 중보의 기도를 하실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성도들이 기도할 때 천사가 금향로에 모아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앞에 쏟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자비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의 기도를 들으시고 백성의 죄를 사하시면 제사장은 나가서 백성들에게 죄를 사하심과 축복을 선포합니다. 제사장이 이 분향의 절차를 밟는 동안 백성들은 그 축복의 말씀을 기다리며,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다리며 엎드린 채 그 향이 여호와 하나님께 흠향되도록 온전히 기도하였습니다(10절). 예배자들만이 성소 밖에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기도한 것입니다. 백성들은 기도하기 위해서 하루에 세번씩 성전 뜰이나 성소 바깥뜰에서 모였습니다. 이들의 첫째와 셋째 모임 시간은 아침과 저녁 분향 시간과 일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바로 이같이 하나님께 온 마음이 열려있을 때 사가랴는 천사로부터 요한의 수태 고지를 받게 됩니다.
2. 세례요한의 탄생예고
주의 사자가 저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11-17절)
그때에 사가랴는,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서 향단 우편에 서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11절). 주의 사자는 성경에서 '사자'(12:9; 마 2:13), 또는 '천사'(마 24:36; 막 12:25; 롬 8:38; 고전 4:9; 1:13,14)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누가복음 전체를 통해서 '천사'에 관련된 기사는 매우 많이 등장하며,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에서도 이러한 특징들이 눈에 띄게 나타납니다(행 10:4,7; 12:8-10).
여기의 향단과 번제단은 다릅니다. 번제단은 성소 밖에 위치합니다. 매일의 제사는 성막뜰의 번제단 위에서, 분향은 성소안에서 드려졌습니다. 분향을 드리는 제사장은 제사를 드린다는 표시로 번제단에서 향단으로 불을 가져가 향을 사릅니다. 주의 사자는 향단과 떡상(진설병을 놓는 상) 사이에 나타났습니다. 성소를 들어가면 왼쪽에 떡상, 오른쪽에 등대(촛대) 그리고 정면에 분향단이 있고, 그뒤에 휘장이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게 됩니다(출 30:1-10; 40:2-27).
사가랴는 주의 사자를 보고 놀라며 무서워 떨었습니다(12절). 여기서 '놀라며'라는 말은 '요동하다', '내적 동요를 일으키다', '마음의 평정을 없애버리다'는 의미입니다. '무서워하니'라는 말은 '두려움', '놀람', '경악', '공포를 일으키는 것'이라는 뜻을 갖습니다. 이로 미루어 사가랴는 천사의 출현 때문에 마음의 평정을 잃을 정도로 놀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현상입니다(삿 6:22; 13:22). 비록 그가 하나님 앞에서 흠없이 행했으나 죄인인 인간이 주의 사자를 만난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죄인인 인간이 거룩하신 주님을 만나는 것은 심판이요 곧 죽음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주의 사자가 사가랴에게 나타난 이 사건은 결국 역사의 분수령이 되는 사건의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실 구체적 일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주의 천사는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라고 말합니다(13절). 주의 천사는 사가랴의 믿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무서워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사가랴의 기도가 들렸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가랴가 일회적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기도해왔으나 그날은 평소와는 다른 특별한 기도를 드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가랴는 분향을 하면서 백성들을 위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자신이 ‘무자하다’는 사실에 부담을 갖고 있던 사가랴는 하나님께 자식을 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제사장 사가랴가 성소안에서 무슨 기도를 드렸는지를 알 길이 없습니다만, 천사의 응답을 통하여 그 내용을 추정 가능하게 합니다. 즉 그의 기도 내용은 자식이 없는 자신을 돌보실 것과 자신의 민족을 구원하실 메시아의 도래에 관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사는 사가랴의 간구 이상으로 응답하십니다. 즉 아들을 주시고, 메사아도 곧 오실 것인데, 그의 아들이 메시아의 오실 길을 예비하리라는 것입니다. 이는 분명히 사가랴에게 임한 축복으로서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약 5:16)는 사실을 절감케 합니다.
천사가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나아 주리니”라고 말합니다(13절). 이 말씀은 항상 엘리사벳이 자식을 낳아주지 못한 것에 대해 사가랴의 마음속에 서운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추측케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셨고, 나이가 많은 엘리사벳을 통하여 아들을 낳아주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사가랴에게 아들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의 선하신 계획 속에 이루어 주시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요한’이라는 아들의 이름까지 지어줌으로써 확신을 더해줍니다. 요한은 히브리어 '예호하난'과 같은 말로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시다'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은 '요난'(대상 3:24), '요아네스'(대하 28:12)등의 변형으로 히브리인들이 좋아하는 이름 중 하나입니다. 성경적인 사고방식에 의하면 이름이란 단순한 호칭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본성과 인격까지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 이름은 인격의 본질이자 내적 존재의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작명법은 바벨론 유수기를 전후에서 뚜렷한 차이점이 나타났는데, 초기에는 아이의 타고난 특성에 따라 특징있는 이름을 지어주었으나, B.C. 5세기 이후부터 아이의 이름을 친척이나 특히 조부의 이름을 따르는 관습이 생겼습니다. 이러한 관습에 의해 과거 인물들의 이름이 다시 등장하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사람들의 이름도 따서 쓰게 되었습니다.
천사는 요한의 탄생으로 사가랴와 많은 사람들이 기뻐하리라고 말합니다(14절). 요한의 탄생은 사가랴에게 '기쁨'이 될 것입니다. 이 기쁨은 '환희' 또는 '너무 기뻐 주체할 수 없는 기쁨', '기뻐서 뛰고 소리침'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기쁨의 최고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요한의 탄생이 사가랴의 개인적인 기쁨만이 아니라 민족 전체의 기쁨이 될 것을 암시합니다.
또한 사가랴에게 주시는 아들 ‘요한’은 하나님 나라 사역을 위해 이 땅에 오게 됨을 밝힙니다. 요한의 탄생은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데 그 이유는 요한이 주님 앞에 큰 자가 될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 때문에 큰 자가 될 것입니다. 요한은 주님 앞에 큰 자로 쓰임받기 위해서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않을 것입니다(15절).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않는 것은 나실인 규정과 관련이 있는데 나실인은 주를 위한 특별한 직무에 얼마동안 혹은 일생을 헌신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요한은 태어나면서 주님을 위해 헌신할 것으로 예언됩니다.
또 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것입니다(15절). 성령 충만은 포도주와 소주라는 말과 어울려 좋은 대조를 이루는데 특별히 엡 5:18을 통해서 술취함과 성령의 충만함에 대한 비교를 좀 더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성령이란 단어는 12회 사용되는데, 그 중 본장에서 4회(15, 35, 41, 67절)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누가의 저작 사도행전에서는 성령이란 단어를 무려 41회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메시야의 오심에 있어 성령의 활동은 그 핵심적 위치를 차지합니다. 또 한가지 놀라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아니한 태아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는 사실입니다.
선지자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가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렘 3:7,10; 겔 3:19; 단 9:13). 요한의 사역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회개의 사역이었습니다(16절). 요한은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를 연결하는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요한은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주께 돌아오게 하여 그의 뒤에 오실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일찍이 요한보다 더 큰 선지자가 없었다는 칭송을 듣게 됩니다. 요한은 제사장 가문의 출신이었지만 선지자의 직무를 행한 것입니다(눅 3:3).
말라기 선지자에 의해 예언된 것처럼, 요한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사역할 것입니다(17절). 즉 엘리야가 지녔던 기질이나 영향력, 그리고 엘리야가 하나님께 받은 능력같은 것을 가지고 사역을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엘리야는 아합왕 시대에 바알과 아세라 신상 앞에 절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던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열심을 품고 갈멜산에 제단을 쌓아 놓고 바알과 아세라 제사장들을 불러서 제단 위의 제물에 불로 응답하시는 신이 참 하나님이신 것을 가리자고 했습니다. 바로 그 엘리야의 심령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돌아왔던 것처럼 이제도 믿음도 잃고 영적 실재도 잃어버린 채 살고 있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시기 위하여 요한을 쓰실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메시야가 오시기전에 선지자 엘리야가 먼저 와서 주의 길을 예비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사 40:1;말 3:1-5;4:5, 6). 이것은 말라기 선지자때부터 요한이 탄생할 때까지 약 400년 동안의 유대인들의 소망이기도 했습니다. 요한은 전생애가 엘리야와 너무도 비슷했습니다. 삶과 사역을 통해 그 유사성은 더욱 확연히 들어납니다. 광야에서의 털옷과 가죽띠를 두르고 살았던 그의 삶이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회개를 선포한 사실 등이 그러합니다.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에게 회개를 요청하고 탄압을 당했으며, 요한은 헤롯과 헤로디아에게서 박해를 받습니다. 그렇다고 엘리야와 요한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은 아니며 엘리야가 요한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받은 능력들과 갖은 사역의 성격과 내용에 있어서 바로 엘리야를 지칭하는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뒤에 그를 엘리야로 말씀하십니다(마 17:12; 막 9:13).
요한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장차 오실 메시야의 앞에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합니다.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돌아오게 하다’라는 구절은 말 4:6에서 인용한 것으로 난해 구절에 속합니다. 일단에서는 이 부분을 로마의 식민지 통치 하에서 파괴된 이스라엘 가정의 회복을 알리는 이야기로 해석하는데 그 당시에는 로마와 결탁한 부모, 열심당에 가담한 아들, 바리새파 형과 사두개파 아우 등 가정은 4분5열이 되어 있었으나 이 분열이 요한을 통해서 회복되리라는 것입니다. 매튜 헨리는 유대인의 믿음을 이방인에게로 돌이켜 이방인들에 대한 뿌리깊은 편견을 극복하게 할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아무튼 요한은 분열과 불신, 배타와 독선 등을 끝내고 화합과 믿음, 사랑과 평화를 전해 줄 것입니다. 결국 세례요한의 사역은 주를 위하여 백성을 예비할 것입니다. 이 '백성'은 단순히 무리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하여 세운 구별된 백성, 즉 이제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복음으로 하나가 된 이방인들까지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3. 주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사가랴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하더라. 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의 성소 안에서 지체함을 기이히 여기더니, 그가 나와서 저희에게 말을 못하니 백성들이 그 성소 안에서 이상을 본줄 알았더라 그가 형용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벙어리대로 있더니,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18-23절)
사가랴는 천사의 말을 듣고도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라고 말합니다(18절). 이것은 불신앙을 말합니다. 사가랴는 증거를 요구하며 의심의 이유를 제시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늙었다고 말합니다. 민수기 4:3; 8:24,25에 보면 레위인들은 50세가 넘으면 현직에서 물러나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사가랴가 아직 현직에 있는 것으로 보아 물러날 때가 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현직에서 물러날 정도로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자식이 없다는 것에 대한 사가랴의 초조함이나 불신은 가히 짐작이 갑니다. 그러나 사가랴는 하나님이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이미 오래전 아브라함에게 늙은 사라를 통하여 이삭을 주셨던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아브람함은 하나님께서 사라를 통하여 자신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실 때, 믿음으로 이삭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동일한 상황인데 사가랴는 믿지 못한 것입니다. 분명히 그는 제사장으로서 율법에도 능통했을 것이니 창세기의 내용을 알고 있을 것이지만, 그 사실을 믿지 못하므로 동일환 사건이 자신에게도 일어나리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도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라고 반문합니다.
천사는 사가랴의 불신의 말을 듣고서 자신은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고 소개하며,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19절). '가브리엘'이란 이름은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상에서 천사의 이름은 '가브리엘'과 '미가엘' 둘 만이 등장합니다. 가브리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계시와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천사이며 미가엘은 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사단의 세력과 싸워 승리하는 하나님의 용사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구약 외경 에녹서에는 4명의 천사장 이름이 나옵니다. 그 이름은 미가엘, 라파엘, 우리엘, 가브리엘 등입니다.
‘하나님 앞에 섰는’이라는 말에서는 권위와 위엄이 느껴집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 있기 때문에 권위와 위엄이 있긴 있지만, 오히려 이곳에서는 조심스럽고 겸손한 표현으로 생각됩니다. “내가 비록 천사장이지만, 결국 하나님 앞에 있는 자이고, 단순히 하나님의 명령만을 받아 수행하는 자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너와 함께 만나고 있지만, 이 순간에도 나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그 앞에 서있는 자이다.” 그러므로 천사는 자신이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좋은 소식’이라는 단어는 '좋은 소식을 전하다'('유앙겔리조마이)라는 말 에서 왔으며, '복음의 선포'라는 뜻으로 번역됩니다. 여기서 8절에 나타난 사가랴의 불신앙의 질문에 천사 가브리엘이 즉각적으로 대답하고 있는 것은, 사가랴의 의심에 찬 말문을 막고 불신을 조기에 불식시키고자 하는 뜻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천사는 사가랴가 믿지 못하므로 ‘이 일이 되어질 때까지 벙어리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20절). '보라'라는 말은 말을 강조할 때나 좀 더 깊이 생각하기를 촉구할 때 사용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가브리엘 천사가 이 말에 얼마나 강한 강조점을 두고 있나를 보게 됩니다. 사가랴의 의심의 결과는 벙어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가랴가 벙어리가 된 것이 꼭 형벌이었다고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가랴가 표적을 원했기 때문에 그 표적에 대한 예시로 벙어리가 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의 벙어리됨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것입니다. 말 못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그는 오랜 침묵을 통하여 의심의 질문을 던지던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67-80절). 그리고 이 구절에서 살펴보면 천사의 말은 이루어지도록 예정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일의 되는 날까지'라는 말로 미루어보아, 다른 어떤 사람이 거부한다 해도 그 일은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엄청난 축복의 말씀을 듣고도 우리의 믿음이 약하여 그 축복이 우리에게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비록 사가랴가 벙어리는 되었어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신대로 이루시겠다고 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제사장은 백성들의 대표가 되어 성소 안에 들어가 분향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소 안에서 제사장이 오래 지체하게 되면 백성들은 제사장이 어떠한 잘못으로 인해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21절). 그래서 제사장들이 성소 안에서 오랫동안 머물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고 합니다. 탈무드에도 제사장이 성소 안에서는 잠시 동안만 머물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제사장들은 가능한한 성소에서 속히 나와 백성들을 축복하고 해산시킵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보면 분향이 행해질 때 밖에서 기도하던(10절) 백성들은 초조해하고 긴장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아마 그들은 사가랴가 성소 안에서 어떤 과오로 인해 죽지 않았나 걱정했을 것입니다(레 10:1, 2)
사가랴는 벙어리가 되어서 제사장으로서 백성들에게 기도후에 해야할 하나님의 축복을 선포하지 못하였습니다(22절).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는 백성들에게 축복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민 6:24-26). 그러나 사가랴가 성소를 나오면서 시종 일관 침묵을 지키자 백성들은 성소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사가랴가 성소에서 이상을 본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성경에서 사용된 '이상'이라는 말은 대개 정상적인 시각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본 것, 꿈이나 황홀경 중에 본 것, 혹은 선지자에게 계시된 것 등을 의미합니다. 사가랴는 말을 못할 뿐만 아니라 듣지도 못하기에 손짓, 몸짓으로 그의 뜻을 전달하였습니다. 사가랴의 말 못함은 백성들에게 성소 안에서 그가 지체한 원인에 대한 충분한 답변이 되었고 또 그가 이상을 보았다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사가랴는 제사장의 직무를 다하고 자기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23절). 여기서 직무는 원래 자신의 '공적인 사무'를 뜻하며 자신의 희생이나 비용으로 수행되는 '공적인 봉사'(성스러운 봉사)를 의미합니다(고후 9:12;빌 2:17, 30;히 8:6;9:21). 특히 여기서는 제사장적 사역의 의미를 나타냅니다. 사가랴는 듣고 말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직무를 끝까지 수행합니다. 사가랴의 희생적인 직무 수행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4. 엘리사벳의 잉태: 하나님의 응답
이 후에 그 아내 엘리사벳이 수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가로되,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인간에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24-25절)
엘리사벳은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있었습니다(24절). 엘리사벳이 왜 숨었는가에 관해서는 본문에서 밝혀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나이들어 임신한 것을 부끄러워해서 숨은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으나, 사사기 13:13,14의 내용처럼, 임신한 자신을 부정한 생활에서 구별하고 이와 아울러 태어날 아이의 양육 문제에 관해 경건한 마음으로 준비하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듯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엘리사벳이 잉태하게 되어 그녀의 부끄러움을 씻어 주십니다(25절). '내 부끄러움'이란 유대인 제사장 가문에서 아이가 없다는 세인(世人)들에 대한 부끄러움입니다(창 30:23;삼상 1:6-10). 여성의 불임은 유대 사회에서는 치명적인 약점이요 수치였으며 심지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까지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벳은 오랜 세월의 고통가운데서 큰 결실을 얻게 되었으며 그녀의 기쁨은 하늘에 닿아 있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사람들에 대한 부끄러움을 씻어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립니다.
적용: 하나님의 응답을 믿는 신앙
사가랴는, 주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이며, 엘리사벳이 사가랴에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라고 전할 때, 그의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의 천사가 전해준 하나님의 약속대로, 엘리사벳은 잉태를 하게 됩니다. 사가랴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한가지 교훈을 얻습니다. 비록 우리는 믿음이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너무 큰 응답을 주신다고 말씀하시면, 그 일을 그대로 믿고 “아멘”으로 대답하기 보다는 우리의 환경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의심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을 때, 그대로 믿고 ‘아멘’ 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의 생각으로 판단할 때 이해할 수 없고 너무 큰 응답일지라도 우리가 그대로 믿고 나아갈 때,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에게 현실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시고자 하실 때, 믿음이 없어 벙어리가 된 사가랴처럼 되지 말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통해서도 세례요한과 같은 위대한 사역자를 배출할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