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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명(한자) | 안음(安崟) | 본 관 (한자) | 죽산(竹山) | 자(한자) | 경진(景鎭) |
호(한 자) | 송촌(松村)·퇴우(退憂) | 생 몰 년 대 | 1622년(광해군 14) 6월 29일 ~ 1685년(숙종 11) 9월 9일 | ||
출생지 (거주지) | 전남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 솔매마을(출생지) 전남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 현촌마을 소주몰(거주지) | ||||
주 요 경 력 |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과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을 사사(師事)함. ●1657년(효종 8) 정유(丁酉) 식년시(式年試) 생원에 합격됨. ●1670년(현종11) 2월 5일 승의랑(承議義)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됨. ●1670년(현종11) 3월 18일 봉훈랑(奉訓郎)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됨. ●1670년(현종11) 4월 수의부의(修義副尉) 행(行) 충무위 부사용(忠武衛副司勇)에 임명됨. ●1670년(현종11) 7월 8일 병절교위(秉節校尉) 충무위 부사과(忠武衛副司果)에 임명됨. ●1670년(현종10) 7월 15일 봉직랑(奉直郎)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됨. ●1671년(현종11) 4월 수의부위(修義副尉) 행(行) 충무위 부사용(忠武衛副司勇)에 임명됨. ●1671년(현종12) 10월 분순부위(奮順副尉) 충무위 부사정(忠武衛副司正)에 임명됨. ●1672년(현종13) 3월 20일 통선랑(通善郎)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됨. ●1672년(현종 13) 12월 21일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에 임명됨. ●1672년(현종 13) 12월 22일 통덕랑(通德郎) 행(行) 사옹원 주부(司饔院主簿)에 임명됨. ●1673년(현종14) 6월 통덕랑(通德郎) 행(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임명됨. ●1673년(현종14) 6월 24일 통덕랑(通德郞) 행(行) 형조 좌랑(刑曹佐郞)에 임명됨. ●1679년(숙종 5) 6월 조봉대부(朝奉大夫) 예조 좌랑(禮曺佐郞)에 임명됨. ●1680년(숙종 7)에 복선군(福善君)을 추대하려던 허견(許堅) 일파를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워 보사원종공신(保社原從功臣) 1등에 녹훈됨. ●1680년(숙종6) 7월 14일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공조 좌랑(工曹佐郞)에 임명됨. ●1680년(숙종6) 10월 26일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운봉 현감(雲峰縣監)에 임명됨. ●1685년(숙종11) 7월 통정대부(通政大夫) 행(行) 병조참지(兵曺參知)에 임명됨. | ||||
출전(出典) 및 주요저서 | 출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여지도서(輿地圖書)》 ●《보성읍지(寶城邑誌)》 ● 안음(安崟)의 고신(告身)·공신녹권(功臣錄券) ●《죽산안씨족보(1994년)》 ●《정유 식년 사마 방목(丁酉式年司馬榜目)》
저서 ●《송촌집(松村集)》 | ||||
기 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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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제공자 | 족후손 안재중(011-628-54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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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전라도 유생 안음 등이 상소하여 예를 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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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羅道儒生安崟等上疏論禮。 掇拾時烈之論, 攻斥世哲之疏, 而請罪世哲, 以快國人之心, 以示王法之嚴, 上優答。
전라도 유생 안음(安崟) 등이 상소하여 예를 논하였다. 시열의 논지를 주워 모아 유세철의 상소를 공격 배척하고, 세철을 처벌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왕법의 준엄함을 보일 것을 청한 것이었는데, 상이 너그러이 답하였다.
전라도 유생 안음 등이 유세철을 죄 주기를 건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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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羅道儒生安崟等上疏論禮, 請罪柳世哲, 以快國人之心, 以示王法之嚴, 上優答之。
전라도 유생 안음(安崟) 등이 상소하여 예를 논하면서, 유세철에게 죄를 주어 온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스럽게 해주고 왕법(王法)이 엄하다는 것을 보이라고 청하였는데, 상이 관대하게 답하였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1. 현종 7년(1666) / 05월/12일(임진)
凶邪한 柳世哲 등을 懲惡하여 인심을 바로 잡을 것을 청하는 安崟 등의 상소
○ 全羅道生員安崟等四百七十人上疏。大槪, 敢陳柳世哲等兇邪之狀, 請施懲惡之典, 以正人心事。入啓。
2. 현종 7년(1666) / 05월/16일(병신)
安崟 등의 상소에 대한 비답
○ 答全羅道生員安崟四百七人等疏曰, 省疏具悉。已諭予意于館學之批矣, 須勿爲煩, 退修學業。
3. 현종 11년(1670) / 02월/05일(계해)
李柙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李明傳爲驪州牧使, 李明哲爲中部參奉, 金德遠爲正言, 洪柱三爲校理, 申晸爲修撰, 吳挺一爲宗廟提調, 李厚徵爲持平, 宋最爲忠淸都事, 沈棡爲西部參奉, 安崟爲童蒙敎官, 李時術爲惠民提調, 柳尙運爲慶尙都事, 玄慶後爲南部參奉, 閔弘道爲禮曹佐郞, 鄭斗卿爲歸厚提調, 宋奎濂爲吏曹佐郞, 朴長遠爲掌樂提調, 呂顔齊爲禮賓.....
4. 현종 13년(1672) / 12월/21일(임술)
成熙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簿, 安燦爲工曹佐郞, 柳星三爲鳳山郡守, 韓墍爲軍器僉正, 徐漢柱爲安岳郡守, 李粹全爲黃州判官, 金萬增爲兼右水運判官, 趙鉉爲碧潼郡守, 李墀爲掌苑別提, 安崟爲司圃別提, 安垕爲兵曹佐郞, 趙晟漢爲引儀兼漢城參軍, 洪萬里爲尙瑞直長, 李稙爲宗廟奉事, 李寅煥爲漣川縣監, 尹壽益爲司僕主簿, 趙遠期爲輔德, 柳以泰爲司僕主簿, 李維聃爲司宰主簿, 李光勗爲禮賓別提, 洪處容爲監察, 安崟爲尙瑞副直長, 睦林儒爲宗廟副奉事, 趙始文爲工曹佐郞, 韓柱爲渭原郡守, 洪柱震爲繕工監役, 廉振名爲戶曹佐郞, 李晩成爲宗簿主簿, 洪萬㝡爲司䆃主簿, 蔡翊俊爲司.....
5. 현종 13년(1672)/ 12월/22일(계해)
宋尙夏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兵曹佐郞, 姜汝㦿爲靈光郡守, 申厚載爲副修撰, 金汝亮爲奉常主簿, 徐後遠爲繕工監役, 閔重魯爲直講, 都擧元爲相禮, 李綸爲齊陵參奉, 李台長爲義禁府都事, 安崟爲司饔主簿, 李國昌爲童蒙敎官, 鄭維岳爲兵曹正郞, 李寅爀爲氷庫別檢, 許滌爲保安察訪, 洪夏明爲軍器僉正, 鄭公奭爲司䆃主簿, 孟胄瑞·李觀徵爲承旨, 李嵇爲.....
6. 현종 14년(1673) / 06월/09일(정미)
李英甲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 有政。吏批, 以李英甲爲禮曹正郞, 安崟爲監察, 柳命才爲安山郡守, 李世茂爲泰陵參奉, 宋昌爲司成, 鄭道成爲正言, 方泰重爲南部參奉, 金徽爲兼同知義禁府事, 崔俊衡爲奉常僉正, 李舜元爲兼春秋, 益平.....
7. 현종 14년(1673) / 06월/24일(임술)
鄭載嵩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 有政。吏批, 以鄭載嵩爲兵曹參知, 宋昌爲輔德, 閔重魯爲竹山府使, 徐文尙爲司書, 崔後亮爲戶曹正郞, 安崟爲刑曹佐郞, 李穦爲鐵原府使, 李光翼爲交河縣監。繕工參奉沈璛, 典牲參奉鄭莅[鄭涖], 相換。
8. 현종 14년(1673) / 07월/12일(기묘)
許壕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翼爲黃海監司, 安垕爲正言, 鄭徵爲承文著作, 朴賓爲內資主簿, 洪處豐爲尙衣別提, 洪天敍爲長興主簿, 朴純爲弼善, 韓翼世爲軍器主簿, 張鵬翼爲司圃別提, 安崟爲尙瑞直長, 趙爾重爲內贍奉事, 姜琛·李淰爲監察, 申以華爲禁府都事, 黃克順爲中部主簿, 柳沆爲司䆃主簿, 趙景望爲尙瑞副直長, 朴賓爲監察, 洪受湸爲尙衣主.....
9. 현종 14년(1673) / 08월/25일(임술)
啓覆文案의 분실과 관련하여 安崟의 從重推考 등을 청하는 刑曹의 계
○ 安縝, 以刑曹言啓曰, 本曹啓覆文案, 前期修正, 報議政府事, 累度申飭而詳覆, 一房所掌,.....於各房亂秩之中, 而終不得現出。莫重啓覆文案, 無端見失, 此是曾所未有之事, 不勝驚駭。南之翼, 則自本曹當爲考律定罪, 而郞廳, 雖無文書, 親自收藏之規, 亦難免不能檢飭之責。當該佐郞安崟, 從重推考。元啓本, 則令本道謄書啓聞後, 報議政府詳覆之意, 敢啓。傳曰, 依啓。當該郞廳, 先罷後推。
10. 현종 14년(1673) / 12월/28일(계해)
南龍翼 등을 서용하고 鄭知和 등의 職牒을 還給하라는 전교
..... 參議李端夏·李翊相, 府使李行登, 佐郞廉振名, 府使李球, 縣監姜邃學, 郡守崔元泰, 庶尹柳之慶, 別提李光勗, 縣令柳命天, 郡守李恢, 佐郞安崟, 說書尹趾完, 判官姜碩賓, 郡守元格·李郁, 敎授權愃, 郡守林益喬·柳卓然, 察訪孫志, 副正字李善溥·李宏·林泳·朴泰遜·李喜龍·弼善李.....
11. 숙종 6년(1680) / 07월/14일(신축)
韓泰東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 有政。吏批, 行判書李尙眞, 參判李敏敍, 參議李選, 都承旨吳斗寅, 竝進。以韓泰東爲正言, 李喜澤高靈縣監, 韓構爲兵曹正郞, 安崟爲工曹佐郞, 金萬重爲兼藝文提學, 李翊相爲同知成均, 洪萬鍾爲副校理, 朴世堂爲應敎, 李參徵爲宜寧縣監, 李行迪爲禁府都事, 尹嘉績爲義州府尹, 任埅爲掌樂主簿,.....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
[요약정보]
UCI G002+AKS-KHF_12C548C74CFFFFB1622X0
자 경진(景鎭)
호 송촌(松村)/퇴우(退憂)
생졸년 1622 (광해군 14) - 1685 (숙종 11)
시대 조선 후기
본관 죽산(竹山)
활동분야 문신 > 문신
[관련정보]
[생원진사시] 효종(孝宗) 8년(1657) 정유(丁酉)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12위
[상세내용]
안음(安崟)에 대하여
1622년(광해군 14)∼1685년(숙종 11). 자는 경진(景鎭), 호는 송촌(松村) 또는 퇴우(退憂). 본관은 죽산(竹山).
조부는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이고 아버지는 선교랑(宣敎郞) 안후지(安厚之)이며, 어머니 창녕성씨는 창랑(滄浪) 성문준(成文濬)의 따님이고, 처부는 해남윤씨 윤유방(尹惟方)이다. 형은 안전(安峑)으로 보성(寶城)에 살았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과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문인(門人)으로 문장에 능하였으며 1657년(효종 8) 정유 식년시(式年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였고, 관직이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이르었다.
1666년(현종 7)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에 대하여 서인측의 기년설(朞年說)을 반박하는 경상도 유생 유세철(柳世哲) 등 1,000여명의〈의례소(議禮疏)〉에 대해 470명의 전라도 유생들을 대표하여 반박 상소를 올렸다.
1680년(숙종 7)에 복선군(福善君)을 추대하려던 허견(許堅) 일파를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워 보사원종공신(保社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그 후 보성읍 우산리 택촌(宅村)으로 물러나와 퇴우당(退憂堂)을 짓고 강학(講學)하였으며, 사람됨이 강직(剛直)하여 사람들에게 추중(推重)을 받았다. 효제위본(孝悌爲本), 학문자수(學問自修), 물근권리(勿近權利), 불구문지(不求聞知)를 유언(遺言)으로 남겼다.
문집으로 《송촌집(松村集)》이 남아 있다. 묘소는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 현촌마을 검월등(劍月嶝)에 있다.
《정유 식년 사마 방목(丁酉式年司馬榜目)》
안음(安崟)
[생원시] 효종(孝宗) 8년(1657) 정유(丁酉) 식년시(式年試) [식년생원] 3등(三等) 12위(42/100)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2C548C74CFFFFB1622X0
자 경진(景鎭)
호 송촌(松村)/퇴우(退憂)
생년 임술(壬戌) 1622년(광해군 14)
졸년 을축(乙丑) 1685년(숙종 11)
합격연령 36세
본관 죽산(竹山[新])
거주지 보성(寶城)
[관련정보]
[사전] 인물 사전
[이력사항]
선발인원 100명
전력 유학(幼學)
관직 공조좌랑(工曹佐郞)
부모구존 엄시하(嚴侍下)
[가족사항]
[부]
성명 : 안후지(安厚之)
품계 : 선교랑(宣敎郞)
증직 : 증좌승지(贈左承旨)
[처부]
성명 : 윤유방(尹惟方)
본관 : 해남(海南)
[형]
성명 : 안전(安峑)
[제]
성명 : 안회(安𡼾)
[출전]
《정유 식년 사마 방목(丁酉式年司馬榜目)》
출처 : 조선시대 생진시방목(사마방목)-2 / 생진시 07(1650~1662) p.286
1994년 죽산안씨족보 4권 p.90~93 안음(安崟)의 기록
안음(安崟)
자(字) 경진(景鎭)
생(生) 광해 임술(光海壬戌, 1622, 광해군 14) 8월 15일
◯早承庭訓。受學于愼獨齋金文敬公集, 同春堂宋文正公浚吉門。
어려서부터 가정의 학문을 이었고, 그 후 신독재 문경공 김집(金集,1574∼1656)과 동춘당 문정공 송준길(宋浚吉,1606∼1672)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孝宗丁酉生員。以孝悌經禮。被薦除敎官, 博士。歷刑禮工佐郞。己亥, 上按律疏。肅宗乙卯, 上伸救疏。允曰; 古有汲黯今有安崟。己未以皐箕謨範陳對。批曰; 君子淸風。親題一葉春。于鶴頭扇賞賜之。庚申錄大逆元勳。辛酉, 補雲峰縣監。乙丑, 特拜兵曹參知, 不受。己巳追奪。甲戌命復。
효종 정유년(1657)에 생원(生員)에 합격했고, 효제(孝悌, 효성과 우애)와 경례(經禮, 예법의 근본)로써 천거를 받아 동몽 교관과 성균관 박사를 지낸 후 형조·예조·공조의 좌랑을 역임했다. 기해년(1659, 효종 10)에 안율소(按律疏)를 올렸고, 숙종 을묘년(1675, 숙종 원년)에 신구소(伸救疏)를 올렸는데, “옛날에는 급암(汲黯, 한나라 무제 때 바른말 잘하던 신하)이 있었고 이제는 안음(安崟)이 있구나”하셨다. 기미년(1679, 숙종 5)에는 고요(皐陶, 순 임금 때의 어진 신하로 옥관獄官의 장을 지냄)와 기자(箕子, 은나라의 태사太師로 주왕紂王에게 자주 간하다가 종이 된 현인)의 오전(五典)·구덕(九德)의 교훈과 팔정(八政)·오극(五極)의 모범을 조목조목 아뢰어 대양(對揚)의 책임을 다하니, 임금이 칭찬하고 가상히 여겨 ‘일엽춘(一葉春)’이라는 세 글자를 친히 써주었고, “가혹한 관리는 무더위와 같지만, 인자한 군자는 시원한 바람과 같다[君子淸風]”고 말하시며 학두선(鶴頭扇, 학의 머리 문양이 그려진 부채) 한 자루를 상으로 하사했다. 경신년(1680, 숙종 6)에 복선군(福善君)을 추대하려던 허견(許堅) 일파를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워 보사원종공신(保社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 신유년(1681, 숙종 7)에 운봉 현감(雲峰縣監)에 임명되었고, 을축년(1685, 숙종 11)에 병조참지(兵曹參知)에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기사년(1689, 숙종 15)에 남인들에 의해 경신년(1680)의 옥사를 모함하여 공의 보사공신(保社功臣)의 공신호(功臣號)를 추탈(追奪, 죽은 뒤에 그 사람생전의 위훈位勳을 깎아 없앰) 하였으나, 갑술년(1694, 숙종 20)에 훈작을 회복시키라는 하명을 받들어 녹권을 개수하여 관작이 복구되었다.
◯忌 九月九日
배(配) 淑人 海南尹氏。父 通政 惟方, 祖 司成 端中 曾祖 觀察使 復, 外祖 郡守 驪州 李志華。
배위는 숙인 해남윤씨(海南尹氏)로, 부는 통정(通政) 윤유방(尹惟方), 조는 사성(司成)을 지낸 윤단중(尹端中), 증조는 관찰사를 지낸 윤복(尹復,1512∼1577)이고, 외조는 군수를 지낸 여주 이지화(李志華)이다.
◯生 광해 신유(光海辛酉, 1621, 광해군 13)
卒 현종 계축(顯宗癸丑, 1673, 현종 14) 3월 16일
묘(墓) 寶城牛山里劍月嶝酉坐合窆
◯趾齋閔忠文公鎭厚撰行狀。成大司憲至行撰墓誌。李校理種文撰碣銘。
지재(趾齋) 충문공 민진후(閔鎭厚,1659∼1720)가 지은 행장(行狀), 대사헌에 증직을 받은 성지행(成至行,1640∼1722)이 지은 묘지(墓誌), 교리를 지낸 이종문(李種文,1868∼?)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전라도 보성 인물 편
출처 : http://db.history.go.kr/url.jsp?ID=sa_020_0120_0400_0220
牛山邦俊之後。中司馬。文正公宋時烈被誣之時。上疏歷陳。尹善噵搆陷儒賢之罪大被時。宰所忤。坎坷鄕曲。庚申以佐郞。參功臣一等。爲人剛直。能文章。爲世所推。
안음(安崟)은 우산(牛山) 방준(邦俊)의 손자로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문정공 송시열이 모함을 당할 때에 상소하여 유현을 모함한 윤선도의 죄상을 낱낱이 진달했다가 도리어 당시 집정자들에게 크게 미움을 받아 시골에 묻혀 지냈다. 경신년(1680, 숙종 6)에 좌랑(佐郞)으로 공신 1등에 기록되었다. 사람됨이 강직하고 문장에 능하여 세상에 추앙을 받았다.
《보성읍지(寶城邑誌)》전라도 보성 인물 편
峑之弟。爲人剛直。能文章。爲世所推。中司馬。文正公宋時烈被誣時。上疏歷陳。尹善道構陷儒賢之罪大被時。宰所忤。坎坷鄕曲。庚申以佐郞。參功臣一等。
안음(安崟)은 전(峑)의 아우인데 사람됨이 강직하고 문장에 능하여 세상에 추앙을 받았다.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정공 송시열(宋時烈)이 모함을 당할 때에 상소하여 유현을 모함한 윤선도의 죄상을 낱낱이 진달했다가 도리어 당시 집정자들에게 크게 미움을 받아 시골에 묻혀 지냈다. 경신년(1680, 숙종 6)에 좌랑(佐郞)으로 공신 1등에 기록되었다.
1961년 간행된 좌랑공 안음(安崟,1622~1685) 선조의 문집《송촌집(松村集)》3권 부록에 안음(安崟,1622~1685)의 행장(行狀)이 기록으로 남아있는데, 이 행장을 지은 분은 민진후(閔鎭厚,1659∼1720)이다.
퇴우안공음행장(退憂安公崟行狀)
민진후(閔鎭厚,1659∼1720)
파주(성혼成渾,1535∼1598)와 우산(안방준安邦俊,1573∼1654)의 두 가정에서 시례(詩禮)의 학문을 공경히 따르고 또 어진 스승을 따라 덕을 이루어 학문과 행실로 천거되고 숙종조에 공훈이 책록되었으나 한 번 물러나 거듭되는 소명에 굽히지 않는 사람이 있었으니 호남에 퇴우(退憂) 안공(安公)이 그 분이다. 공의 휘는 음(崟)이요 자는 경진(景鎭)이니 남주의 학자들이 송촌(松村) 선생이라 불렀고 퇴우는 그의 자호(自號)이다.
죽산(竹山) 안씨는 문혜공(文惠公) 원형(元衡)으로부터 족보가 시작되는데 좌찬성(左贊成) 면(勉), 제학공(提學公) 정생(挺生), 주부공(主簿公) 민(民), 퇴휴공(退休公) 범(範)으로 전해지면서 세상의 망족(望族, 명망있는 집안)이 되었다. 고조 축(舳)은 호가 둔암(鈍庵)이요 문과에 급제하여 목사를 지냈으며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과 더불어 전원에서 한가롭게 종유하니 세간에서는 이들을 호남의 세 고결한 선비라 불렀다. 증조 중돈(重敦)은 성균관 진사이며, 조부 방준(邦俊)은 호가 은봉(隱峯), 도학과 절의가 뛰어나 세상의 유종(儒宗)으로 추앙받았으며 좨주(祭酒, 주로 석전釋奠의 제향을 맡아보며 정3품 이상의 학덕이 높은 사람을 시킴)에 추증되었다. 고(考) 후지(厚之)는 호가 송음(松陰)이니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고 비(妣) 창녕성씨(昌寧成氏)는 좌찬성에 추증된 문준(文濬)의 딸이요 문간공(文簡公) 혼(渾)의 손녀이다. 천계(天啓) 임술년(1622, 광해군14) 6월 29일에 파주의 외가에서 낳으니, 해산하던 날 밤에 외할아버지는 북악산의 신선이 장경성(長庚星, 금성=태백성)의 유정(遺精)을 안아다 준 꿈을 꾸었고, 할아버지는 태산이 뜰을 누르고 금빛이 방안에 가득한데 한 청포(靑袍)를 입은 선비가 홀(笏, 관복을 착용 때 손에 드는 신표)을 들고 당(堂)에 오르는 기이한 조짐을 꿈꾸었으므로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을 지녀 인각봉취(麟角鳳嘴, 기린의 뿔과 봉황의 부리. 대단히 현철賢哲한 사람을 비유함)로 불렸다. 할아버지께서 가훈을 잇고 파주에서 사숙하여 이미 학문을 이루고 신독재(愼獨齋 金集, 1574∼1656) 선생에게 나아가 집지(執贄, 제자가 스승을 처음으로 뵐 때 '제자로 받아주십시오'하며 경의를 표하고 나서 예폐을 올리는 것)하여 《주서절요(朱書節要)》를 받아 읽었으며, 신독재가 세상을 뜨자 또 동춘당(同春 宋浚吉,1606~1672)을 사사(師事, 스승으로 공경하고 그 가르침을 받음)하여 정주(程朱)의 《가례(家禮)》를 강론하였다. 당시에 우암(尤庵 宋時烈,1607~1689) 선생 같은 분도 ‘사림의 근본[士林根柢]’이라고 칭송했으니 그가 종유(從遊)한 사람은 모두 명공(名公)이요 거유(巨儒)였다.
효종 정유년(1657)에 생원 시험을 첫 번째(3등 12위)로 합격하니, 남송(南松) 조상공(趙相公 조복양趙復陽,1609∼1671)은 ‘효제(孝悌)와 경례(敬禮)의 학문’으로 천거하여 동몽교관과 성균관 박사를 제수 받았고, 또 화곡(華谷) 이상공(李相公 이경억李慶億,1620∼1673)의 계청(啓請)으로 참봉을 제수 받았으며, 동궁의 가례(加禮, 성인식)를 당해 동춘 선생은 ‘박학명례(博學明禮)’로 천거하여 익위(翊衛)를 제수 받았으며, 주부(主簿)와 감찰(監察)을 거쳐 형조·예조·공조의 좌랑(佐郞)에 이르렀다. 운봉현감(雲峰縣監,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에 부임하지 않았고 또 참지(參知, 종3품 병조의 벼슬)의 벼슬을 받지 않았으니 공의 출처(出處)에 대한 크나큰 의리를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천품이 강직하고 불편부당하여 타인의 과실은 논쟁하지 않았으나 임금과 스승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반드시 소장(疏章, 상소하는 글)을 던져 힘껏 변론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러도 그만두지 않았다. 현종 경자년(1660)을 전후로 소를 올려 예의(禮義)를 통렬히 진달하고 간신배의 죄를 형률로 따졌으며, 당저(當宁, 현재의 임금)께서 보위를 잇던 초기에 남은 당인(黨人)이 연이어 날조하고 모함하니 우암·동춘 두 선생은 안심하지 못하고 원통함을 풀 길이 없었다. 그래서 공은 주나라 문왕(周文王)이 상보(尙父, 강태공)에게 했던 것처럼, 그리고 한나라 소열(昭烈 유비劉備,161~223)이 공명(孔明 제갈량諸葛亮,181~234)에게 했던 것처럼 선왕은 두 선생을 극진히 대우하였다고 변론하니 말이 자못 경직(勁直, 굳세고 곧음)하여 급암(汲黯, 중국 전한前漢의 명신名臣)과 같다는 교지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주상의 뜻이 정해지지 못해 우옹(尤翁 송시열)이 장사(長沙)의 액[한(漢)나라 문제(文帝) 때 장사(賈誼,BC201~BC168)는 나이 20에 소명을 받고 박사(博士)가 되었으나 대신들의 꺼린 바 되어 귀양 가서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가 되어 33살에 죽음]을 면치 못하고 춘옹(春翁 송준길)도 결국 삭탈의 화를 입게 되었다. 이때에 충언을 한 자는 모두 귀양길에 올라 다시는 감히 말할 자가 없었으니 오랫동안 울다가 아픈 마음으로 “선대왕의 영혼이 하늘에서 굽어보시거늘, 이를 두고 어찌 전하께서 하늘을 본받는 효도를 했다고 하겠습니까."라고 고하였으나, 홀로 우는 학 소리는 구중궁궐 깊은 곳까지 들리지 않았고, 곧 파직 축출되어 남쪽으로 돌아가 동춘 선생(송준길)의 묘소에 고유(告由, 큰 일 치르고 난 뒤 신명에게 보고함)하고 ”이미 능히 요순(堯舜)의 도(道)로 개진하여 바로잡아 구하지 못했고, 또 춘추의 의리로 죄를 성토하여 다스리지 못했으니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천인(天人)이 함께 분노할 뿐입니다."라고 했다. 아, 오당(吾黨, 서인)의 후생(後生)으로 하여금 이 글을 읽게 하면 일체(一體)의 의리[임금과 스승과 부모를 생삼사일(生三事一)의 의리로 보는 것]를 느껴 저절로 두 눈초리로 흘겨볼 것이다.
기미년(1679, 숙종5) 7월에 김상공(金相公) 서석(瑞石 김만기金萬基)이 경연에서 주청함으로 인해 소명을 받고 입대하여 종척(宗戚, 왕의 종친과 외척)의 근심, 분당(分黨)의 폐단, 공거(貢擧, 인재의 선발)의 실패, 군포(軍布)의 징발 및 외부 오랑캐와 내부의 적을 막는 것, 천지의 변괴와 재이(災異, 재앙이 되는 괴이한 일) 등 10여 조목을 반복해서 상세히 아뢰고, 오전[五典,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인륜(人倫). 곧 아버지로서의 의로움(부의父義], 어머니로서의 자애로움(모자母慈), 자식으로서의 효성(자효子孝), 형으로서의 우애(형우兄友), 아우로서의 공경(제공弟恭)]·구덕[九德, 아홉 가지의 덕. 충(忠), 신(信), 경(敬), 강(剛), 유(柔), 화(和), 고(固), 정(貞), 순(順)을 말함]의 교훈과 팔정[八政, 국가를 운영할 때 챙기지 않으면 안되는 8가지. 식생활(食), 재화(貨), 제사(祀), 국토관리(司空), 교육(司徒), 사법기관(司寇), 외교(賓), 군사(師)를 말함]·오극[五極, 사람이 지켜야 할 지극(至極)한 덕(德). 곧,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의 모범을 조목조목 아뢰어 대양(對揚, 임금의 뜻을 받들어 널리 알려야 하는)의 책임을 다하니, 아름답도다! 임금의 말이여. “인자한 군자는 시원한 바람과 같다.”는 교지와 “가혹한 관리는 무더위와 같지만, 인자한 군자는 시원한 바람과 같다”고 말하시며 학두선(鶴頭扇, 학의 머리 문양이 그려진 부채) 한 자루를 상으로 하사했다. 10월에 입대하여 붕당(朋黨)의 재앙을 강력히 아뢰니 주상께서 가납하고 ‘일엽춘(一葉春)’ 세 글자를 써서 내렸다. 천은(天恩, 임금의 은혜)이 융숭하여 방출했던 신하를 가까이에 모이게 하고 도유우불(都兪吁咈, 도유는 찬성, 우불은 반대의 뜻으로 요임금이 여러 신하와 정사를 논의할 때 쓰인 말)하니 삼대(三代, 중국 상대上代의 하夏, 은殷, 주周의 세 왕조)의 기풍이 보이는 듯 했다. 다음 해 경신(1680)에 윤휴(尹鑴,1617∼1680)와 허적(許積,1610∼1680)의 무리의 역모 죄를 토멸하여 정난보사(靖難保社)로 원훈(元勳, 나라를 위한 가장 큰 공훈)에 기록되고, 품계를 한 단계 더하였으며 고비(考妣, 부모)에게 추증(追贈)이 봉해지고 자손에게 음직이 내렸으며 후손의 죄를 용서해 주라고 하였다. 아, 군친(君親, 임금과 어버이)을 섬기는 데 효(孝)를 옮겨 충(忠)으로 하고, 충을 옮겨 효로 하니 효자(孝慈, 어버이에 대한 효도와 자식에 대한 사랑)가 함께 실현되었다. 이에 이르러 세상에 다시없는 광영을 얻었지만, ‘지족(止足, 제 분수를 알아 만족할 줄 앎)’의 일념이 자나 깨나 항상 맴돌았다. 마침내 ‘지수녹야(止水綠野)’의 유훈(遺訓)에 느낀 바 있어 운성(雲城, 전라도 남원 운봉현)의 외직에 부임하지 않고 사임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정백자(程伯子, 중국 송나라 유학자 정호程顥,1032~1085)와 범문정(范文正, 송나라 유학자 범중엄范仲淹,989~1052)의 소망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고, 주부자(朱夫子, 송나라 유학자 주희朱熹,1130~1200)의 ‘임금을 사람하고 나라를 걱정한다[愛國憂國]’라는 시(詩)를 모사하여 그 집에 ‘퇴우(退憂)’라는 편액을 걸었으니, 대개 관직에 나가든 물러나든 한 가지로 근심한다는 뜻이다.
갑자년(1684, 숙종10)의 분당(分黨, 송시열과 윤증의 논쟁으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뉨) 이후로 사문(斯文, 유학자들)의 기풍이 크게 손상된 것을 개탄하여 왕복하며 교수하는 일 따위를 사절하였다. 형조·예조·공조의 좌랑(佐郞)에 나아가지도 않고 분수를 편안히 하여 도를 지키며 살다가 을축년(1685) 중구절(重九節, 음력 9월 9일로 중양절이라고도 함)에 삶을 마감하였다. 이때 자손에게 경계하기를, “우리 동방의 관작과 시호는 너무 지나치게 꾸미니 통탄스럽다. 관계(官階)의 서식(書式)은 다만 역임한 관직만 쓸 것이요 사퇴한 관직은 쓰지 말라.” 하고, 또 “너희들은 효제(孝悌)를 근본으로 삼아 학문하고 스스로 수양하되, 권력과 사리(私利)를 가까이 말 것이요 이름이 알려지기를 구하지 말라.”고 하니, 이는 그의 유결(遺訣)이었다. 부음이 조정에 전해지자 특별히 훈신의 예로 부의할 것을 명하였다. 보성군의 남쪽 검월등(劒月嶝) 유좌(酉坐, 서쪽을 등지고 동쪽을 향하여 앉은 자리)에 장사하니 장례식에 모인 사람이 매우 많았다. 신주의 분면(粉面, 앞쪽)에 쓴 서식(書式)은 유결을 따라 써서 사람들의 뒤와 눈에 비추니, 그 맑은 기풍과 위대한 결의는 크게 울리고 환히 빛나 가히 탐욕꾼과 완고한 사람을 흥감(興感, 마음이 움직여 느낌)케 하는 바 있었으리라.
부인 해남윤씨(海南尹氏)는 통정(通政) 유방(惟方)의 딸이요 관찰사 복(復)의 증손인데, 정순(貞純, 마음이 곧고 순수함)한 부인의 덕이 있었으며 문자를 해득하여 제사를 모시고 빈객을 대접하는데 한결같이 예법을 따랐다. 계축년(1673) 3월 16일에 세상을 뜨니 묘소는 합폄이고 2남 5녀를 두었다. 적자(嫡子) 민상(敏相)은 벼슬이 익위(翊衛)요, 서자(庶子) 기상(箕相)은 벼슬이 교위(校尉)이다. 딸은 별제(別提) 최여천(崔與天), 감역(監役) 노찬(盧燦), 직장(直長) 임관(林洸), 참봉(參奉) 이태래(李泰來), 사과(司果) 임신(林藎)에게 차례로 시집갔다. 민상은 2남을 낳았는데 세철(世轍)은 벼슬이 집의(執義)이고 세보(世輔)는 통선랑(通善郞)이다.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공의 사행(事行)을 모두 거론할 수는 없지만 자의전(慈懿殿, 자의대비慈懿大妃 조씨趙氏,1624~1688.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莊烈王后)의 기년복(朞年服, 일 년 동안 입는 상복)을 정론으로 편 것과 정릉(貞陵, 태조비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능陵)의 추복(追復, 빼앗았던 위호位號를 그 사람이 죽은 뒤에 다시 회복하여 줌)에 관한 상소와 정종(定宗,1357~1419)의 존호(尊號)을 올리는 장계[정종은 사망 후 묘호도 없이 공정대왕으로 불리다가 1681년(숙종 7년) 정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또 병자년 강화조약에 분노의 눈물을 흘리며 하늘에 호소하던 시와 우리 숭정황제[崇禎帝,1611~1644. 중국 명(明)의 17대이자 마지막 황제]의 어필을 봉안하고 통곡한 절의는 모두 떳떳한 천성에서 나온 것이니, 이는 예를 좋아하여 명분을 밝히고 원통함을 참으며 의리를 생각하여 천지의 강상(綱常,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을 붙잡아 세운 것이 아니겠는가. 친필로 써서 상으로 준 맹부(盟府, 충훈부忠勳府의 별칭으로 공신도감이라고 불리기도 함)의 기적(紀績, 공적을 적은 기록)은 대대로 전해질 은전이요, 〈용학차의(庸學箚義)〉와 〈예의문답(禮疑問答)〉은 후생을 계도한 길이 많이 들어있다.
아, 기사년(1689)의 변란[1680년(숙종 6)의 경신출척(庚申黜陟)으로 실세하였던 남인(南人)이 1689년 원자정호(元子定號) 문제로 숙종의 환심을 사서 서인(西人)을 몰아내고 재집권한 기사환국(己巳換局)을 말함]은 통분과 박절함을 어찌 말로 다 하겠는가. 공에 대한 추탈(追奪, 죽은 사람의 죄를 논하여 살았을 때의 벼슬 이름을 깎아 없앰)이 저승에까지 미치더니, 다행스럽게도 태양이 갑술년(1694)에 다시 밝아 전지(傳旨)가 다시 내려오고 충효(忠孝)가 거듭 진달되었으며 유소(儒疏, 유생들이 연명하여 올리던 상소)로 신복(伸復, 억울한 죄를 풀어주고 삭탈한 벼슬을 도로 줌)하여 사문(斯文)이 온전함을 얻었다.[원래 1680년(숙종 7)에 복선군(福善君)을 추대하려던 허견(許堅) 일파를 제거하는 데 공을 세운 신하에게 내린 보사공신(保社功臣)의 공신호(功臣號)를 1690년(숙종 16)에 지웠다가 1694년에 이를 회복시켜 보사원종공신(保社原從功臣)의 개수녹권(改修錄券)을 다시 만들어 받게 된다.] 그렇다면 공의 존몰(存沒, 삶과 죽음)과 현회(顯晦, 현달함과 은둔함)는 진실로 보통이 아니요 세도(世道,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지켜야 할 도의)가 그와 함께 떠오르기도 가라앉기도 하였으니, 가히 백세(百世)의 법전이요 저울대가 될 수 있으리라. 이전에 관작을 올려 주길 청한 일은 비록 평소의 유결과 어긋나지만, 공론만큼은 대단히 아름다운 것이었다. 공의 손자인 집의(執義) 세철(世轍) 군이 나를 찾아와 공의 〈행장(行狀)〉을 부탁하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공은 우리 선자(先子, 아버지 민유중閔維重,1630∼1687)와 동문(同門)이요 동덕(同德)인데, 내가 늦게 태어나 공의 문정(門庭, 대문 안의 뜰)에 쇄소(灑掃, 물 뿌리고 비로 쓴다는 말로 나아가 배알하고 가르침을 받은 것을 말함)하지 못했다. 공을 흠모하고 숭상하는 마음이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니, 정의로 보아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문득 고루함을 잊고 공의 사행을 뽑아 기록함으로써 훗날 대군자의 입언(立言, 의견)을 기다릴 뿐이다.
민진후(閔鎭厚,1659∼172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정순(靜純), 호는 지재(趾齋).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좌참찬 송준길(宋浚吉)의 딸이다. 숙종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오빠이자 유수 민진원(閔鎭遠)과 현감 민진영(閔鎭永)의 형이다.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1681년(숙종 7) 생원이 되고, 1686년(숙종 1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기사환국이 일어나 아버지를 비롯한 일가친척들과 함께 관작을 삭탈당하고 귀양살이를 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로 인현왕후가 복위됨에 따라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로 다시 기용되었고, 사간원정언‧홍문관부교리‧부응교‧사헌부집의 등을 거쳐 1697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관찰사로 부임한 지 7개월 만에 사간원대사간이 되었으며, 이어 강화부유수‧형조참의‧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한 뒤 1706년 의금부지사(義禁府知事)가 되었다. 이때 유생 임보(林溥)가 세자모해설(世子謀害說)을 발설하여 일어난 옥사를 함부로 다루었다고 해서 소론측의 탄핵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났다. 1717년 또다시 기용되어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의금부판사‧돈령부판사‧홍문관제학‧예조판서 겸 수어사‧한성부판윤‧공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719년 의정부우참찬에 올랐으나 질병으로 사양하고, 그뒤 개성부유수로 재직중 죽었다. 그의 인품은 선비의 기운을 돋우고 사문(斯文)을 지키는 데 힘쓰며 외척의 호귀(豪貴)한 습속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글씨에 능하여 여양부원군민유중신도비(驪陽府院君閔維重神道碑)의 비문을 썼다. 경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지재집》이 전한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보사원종공신개수녹권(保社原從功臣改修錄券)
33×21.1cm·1694년·안병훈 소장
출처 : 조선대 박물관에서 개최한 은봉 안방준가 소장유물 특별전 “선비 안방준, 도를 묻고 의를 행하다”(2010.5.11~5.28)의 전시도록
보사공신은 1680년(숙종 7)에 복선군福善君을 추대하려던 허견許堅 일파를 제거하는 데 공을 세운 신하에게 내린 공훈 이름이다. 이 녹권은 공신 안음安崟에게 하사한 것으로 보사녹훈도감保社錄勳都監에서 편찬했다. 원래 보사공신에게 내렸던 공신호功臣號를 1690년(숙종 16)에 지웠다가 1694년에 이를 회복시켜 녹권을 다시 만든 것이다. 안방준의 손자 안음(1622-1685)은 1등 공신에 기록되어 있고, 이 녹권에 기재된 공신은 약 4,000명이다.
* 녹권 錄券
공신功臣의 공훈功勳을 기록한 문서. 일반적으로 공신도감功臣都監에서 왕명을 받아 발급하였다.
보사원종공신개수녹권(保社原從功臣改修錄券) |
좌랑공(佐郞公) 안음(安崟, 1622~1685)의 유물
출처 : 한국학자료센터 원소장처 : 보성 겸백 죽산안씨 송촌가
1670년에 이조에서 안음에게 발급한 임명문서 1670년(현종11) 2월 5일에 이조에서 임금의 명을 받아 안음(安崟)을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하는 내용으로 발급한 문서이다. 동몽교관은 조선시대에 어린이를 교육하기 위하여 한양과 각 군현에 둔 벼슬인데 동몽훈도(童蒙訓導)를 고쳐 부른 것이다. 조선시대에 하급관리를 천거, 임명하는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이는 조선조 중기의 관직 제도사와 문화사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吏曹爲差定事康熙▣…▣
1670년에 이조에서 안음에게 발급한 임명문서 1670년(현종11) 3월 18일에 이조에서 안음을 봉훈랑(奉訓郎)에 임명하는 내용으로 발급한 문서이다. 동몽교관은 각 지방의 군·현에 설치되어 아동교육을 담당하던 관원으로 종9품직이다. 봉훈랑은 종5품의 문관 품계이다. 이는 조선조 중기의 관직 제도사와 문화사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1670년에 병조에서 안음에게 발급한 임명문서 1670년(현종11) 4월에 병조에서 안음을 수의부의(修義副尉) 행(行) 충무위 부사용(忠武衛副司勇)에 임명하는 내용으로 발급한 문서이다. 수의부의는 종8품의 무관 품계이다. 충무위는 조선시대 중앙군인 5위(衛)의 하나이며, 부사용은 5위에 속해 있던 종9의품 무관직이다. 이는 조선조 중기의 관직 제도사와 문화사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1670년에 병조에서 안음에게 발급한 임명문서 1670년(현종11) 7월 8일에 병조에서 안음을 병절교위(秉節校尉) 충무위 부사과(忠武衛副司果)에 임명하는 내용으로 발급한 문서이다. 병절교위는 종6품의 무관 품계이다. 충무위는 조선시대 중앙군인 5위(衛)의 하나이며, 부사과는 5위에 두었던 종6품 무관직이다. 이는 조선조 중기의 관직 제도사와 문화사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1670년에 이조에서 안음에게 발급한 임명문서 1670년(현종10) 7월 15일에 이조에서 안음을 봉직랑(奉直郎)에 임명하는 내용으로 발급한 문서이다. 동몽교관은 각 지방의 군․현에 설치되어 아동교육을 담당하던 관원으로 종9품직이다. 봉직랑은 종5품의 문관 품계이다. 이는 조선조 중기의 관직 제도사와 문화사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1671년에 병조에서 안음에게 발급한 임명문서 1671년(현종11) 4월에 병조에서 안음을 수의부위(修義副尉) 행(行) 충무위 부사용(忠武衛副司勇)에 임명하는 내용으로 발급한 문서이다. 수의부의는 종8품 무관에게 주던 품계이다. 충무위는 조선시대 중앙군인 5위(衛)의 하나이며, 부사용은 5위에 두었던 종6품 무관직이다. 이는 조선조 중기의 관직 제도사와 문화사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1671년에 병조에서 안음에게 발급한 임명문서 1671년(현종12) 10월에 병조에서 안음을 분순부위(奮順副尉) 충무위 부사정(忠武衛副司正)에 임명하는 내용으로 발급한 문서이다. 분순부위는 종7품의 무관 품계이다. 충무위는 조선시대 중앙군인 5위(衛)의 하나이며, 부사정은 5위에 속해 있던 종7품 무관직이다. 이는 조선조 중기의 관직 제도사와 문화사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1672년에 이조에서 안음에게 발급한 임명문서 1672년(현종13) 3월 20일에 이조에서 안음을 통선랑(通善郎)에 임명하는 내용으로 발급한 문서이다. 동몽교관은 조선시대 각 지방의 군․현에 설치되어 아동교육을 담당하던 관원으로 종9품직이다. 통선랑은 종5품의 문관 품계이다. 이는 조선조 중기의 관직 제도사와 문화사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1672년에 이조에서 안음에게 발급한 임명문서 1672년(현종13) 12월 22일에 이조에서 안음을 통덕랑(通德郎) 행(行) 사옹원 주부(司饔院主簿)에 임명하는 내용으로 발급한 문서이다. 사옹원은 궁중(宮中)의 음식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관청이며. 주부는 종6품의 관직이다. 통덕랑은 정5품의 문관 품계이다. 이는 조선조 중기의 관직 제도사와 문화사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1673년에 이조에서 안음에게 발급한 임명문서 1673년(현종14) 6월에 이조에서 안음을 통덕랑(通德郎) 행(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임명하는 내용으로 발급한 문서이다. 통덕랑은 정5품의 문관 품계이다. 사헌부는 시정(時政)을 논의하고, 백관(百官)을 규찰하며, 기강과 풍속을 바로잡고, 억울한 일을 없애주는 일 등을 맡아보았으며, 감찰은 사헌부의 정6품 관직이다. 이는 조선조 중기의 관직 제도사와 문화사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1673년에 이조에서 안음에게 발급한 임명문서 1673년(현종14) 6월 24일에 이조에서 안음을 통덕랑(通德郞) 행(行) 형조 좌랑(刑曹佐郞)에 임명하는 내용으로 발급한 문서이다. 통덕랑은 정5품의 문관의 품계이다. 형조는 6조(曹)의 하나로서 법률, 사건 심리, 소송, 노예에 관한 정사를 관장하였으며, 좌랑은 6조의 정6품 관직이다. 이는 조선조 중기의 관직 제도사와 문화사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1680년에 이조에서 안음에게 발급한 임명문서 1680년(숙종6) 7월 14일에 이조에서 안음을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공조 좌랑(工曹佐郞)에 임명하는 내용으로 발급한 문서이다. 통훈대부는 정3품 당하관에 해당하는 문관 품계이다. 공조는 6조의 하나로서, 산림· 소택(沼澤)· 공장(工匠)· 영선(營繕)· 도요(陶窯)· 야금(冶金) 등에 관한 일을 관장하였으며, 좌랑은 6조의 정6품 관직이다. 이는 조선조 중기의 관직 제도사와 문화사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1680년에 이조에서 안음에게 발급한 임명문서 1680년(숙종6) 10월 26일에 이조에서 안음을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운봉 현감(雲峰縣監)에 임명하는 내용으로 발급한 문서이다. 통훈대부는 문관의 정3품 당하관에 해당하는 문관 품계이며, 현감은 종6품의 외직이다. 운봉은 현재의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이다. 이는 조선조 중기의 관직 제도사와 문화사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
송촌(松村) 안음(安崟)의 프로필과 한시
작성자 : 안동교
선생의 휘는 음(崟), 자는 경진(景鎭), 호는 송촌(松村) 또는 퇴우(退憂)이다. 광해 임술년(1622)에 태어나 숙종 을축년(1685)에 타계했다. 선생은 조부인 문강공(文康公) 은봉선생(隱峰先生, 安邦俊)으로부터 가학(家學)을 전수받았으며, 후에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김장생의 아들)과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을 사사(師事)하여 기호학(畿湖學)의 맥을 잇는 학자로 문명(文名)을 떨쳤다.
선생은 일생동안 동몽교관(童蒙敎官)ㆍ세자익위(世子翊衛)ㆍ박사(博士)ㆍ참봉(參奉)ㆍ주부(主簿)ㆍ감찰(監察)ㆍ형랑(刑郞)ㆍ예랑(禮郞)ㆍ공랑(工郞)ㆍ운봉현감(雲峯縣監)ㆍ이조참지(吏曹參知) 등 많은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고, 오로지 성리학(性理學)의 정치(精緻)한 연구와 의리학(義理學)의 적극적인 실천(實踐)에 온 힘을 쏟았다. 선생은 숙종 때, 조정의 간당(奸黨)을 논죄(論罪)할 것을 수차례 상소(上疏)하였으며, 윤휴(尹鑴)와 허적(許積) 등의 역죄(逆罪)를 성토(聲討)하여 정난보사공신(靖難保社功臣)에 기록되는 충의(忠義)의 표상을 남겼다.
선생은 만년에 주자(朱子)의 애군우국(愛君憂國)의 시(詩)를 모사(模寫)하여 ‘퇴우(退憂)’라 扁堂(편당)하고, 강학에 전념하여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자손들에게 “효제(孝悌)를 근본으로 삼아 학문과 수양을 할 것이요, 권세와 사리(私利)를 가까이한다거나 명성을 남에게 알리기를 구하지 말 것”을 유결(遺訣)로 남기는 철저한 유학자(儒學者)의 길과 삶을 제시했다. 당시의 대유학자(大儒學者)였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선생의 인격(人格)과 풍모(風貌)를 칭송하여 ‘사림(士林)의 근본’이라 한 말은 결코 허언(虛言)이 아니었던 것이다.
선생의 유고(遺稿)는 본래 증손 창혐(昌馦)이 3책으로 편집해 두었으나, 미처 간포(刊布)하지 못하고 수화(水火)의 액(厄)을 당해 거의 실전(失傳)되었다. 용학차의(庸學箚義)ㆍ예의문답(禮疑問答) 등 선생의 성리학에 관한 저술을 조명할 수 없음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 겨우 1책 3권으로 출간된 선생의 문집은 8대손 규호(圭灝)가 여러해 연원각가(淵源各家)를 탐방하여 수득(搜得)한 것이다.
聞南漢解圍號天痛哭 / 남한산성의 항복소식을 듣고 통곡하다
日星不見天 / 해와 별이 보이지 않는 하늘인가
雷霆莫問天 / 격렬한 천둥소리는 말해 무엇할꼬
魯史尊周義 / 노(魯)나라 역사는 존주의리(尊周義理)를 담은 것
忍何共戴天 / 어찌 적과 한 하늘을 같이 이리.
氷壺亭夢吟 / 빙호정의 꿈같은 노래
宦海風潮閱幾年 / 벼슬아치 풍파 속에 몇 년을 보내다가
歸來平地作神仙 / 전원으로 돌아와 신선이 되었다네
小舟移泊滄溟月 / 달 비친 큰 바다에 작은 배 닻 내리니
除是人間別有天 / 바로 이 곳이 인간세상의 별천지라.
坡山梅邊堂 / 파주 매변당에서
松下溪邊一樹梅 / 시냇가 솔 아래에 한 그루의 매화
恬靜非爲俗士家 / 고요한 자태는 속사(俗士)에 비할 바 아니네
雪裏常從春意早 / 눈 속에서 항상 이른 봄을 재촉하니
肯隨桃李向繁華 / 복숭아와 오얏처럼 번성하고 화려하리.
1961년 간행된 좌랑공 안음(安崟,1622~1685)의 문집《송촌집(松村集)》1권에 좌랑공 안음(安崟,1622~1685)이 1675년 정월에 올린「우암과 동춘이 당한 모함을 변론한 상소[陳辨疏]」라는 상소문이 남아있어 여기에 옮깁니다.
안음(安崟,1622~1685)
삼가 생각건대, 유신(遺臣) 송준길(宋浚吉,1606∼1672)과 송시열(宋時烈,1607∼1689)은 영릉(寧陵, 효종의 능호)으로부터 세상에 다시없는 예우를 받았습니다. 마치 주나라 문왕(周文王)이 상보(尙父, 강태공)에게 했던 것처럼, 그리고 한나라 소열(昭烈 유비劉備,161~223)이 공명(孔明 제갈량諸葛亮,181~234)에게 했던 것처럼 빈사(賓師, 왕에게 빈객으로 대우받는 학자)로써 대우하여 의기가 잘 투합하고 밝게 융화되었습니다. 게다가 선대왕의 예우를 갖춘 은전과 두 신하의 국가에 보답하는 충성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음은 신명에게 물어보아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전하께서 왕위를 이은 초기에 이르러 간신(姦臣)이 틈을 엿보아 헛된 사실을 날조하여 두 신하를 모함하기에 온힘을 다 쏟았습니다. 더구나 신의 스승 송준길은 이미 죽었는데도 말입니다.
신은 전하의 총명이 선대왕에 미치지 못하고 또 사특함과 옳음에 대한 분별이 흔들리고 있지 않나 조용히 걱정하고 있습니다. 기해년(1659, 현종 즉위) 복제(服制)는 고례(古禮)로는 증명할 수 없어 국제(國制, 나라의 제도)와 《대명률(大明律)》을 인용하여 기년복(朞年服, 일 년 동안 입는 상복)으로 의정하였고, 영릉(寧陵)의 옛 봉분은 밖은 비록 틈이 있어 새기는 하나 안쪽은 안온하여 현궁(玄宮, 임금의 관을 묻는 광중壙中)의 만년(萬年)의 터로 정할 수 있건만 봉분을 옮기기에 이르니, 이는 조정이 개정하여 이미 시행한 일입니다. 저들이 이제 이를 트집 잡고 기필코 두 신하를 추죄하려 하니 난신들의 극언이 어쩌다 여기에 이르렀습니까.
공자는 “오늘날 주나라 예법을 사용하고 있으니 나는 주(周)나라를 따르겠노라.” 하였고, 주자는 〈산릉(임금의 무덤)을 의논하는 글[議山陵書]〉에서 “별도로 초택(草澤)을 구하여 새로운 궁을 경영함으로써 수황(壽皇, 송나라 효종의 존호)의 유체(遺體, 죽은 몸)로 하여금 안에서 안온함을 얻게 하면 종사와 생령이 모두 밖에서 복을 얻을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두 신하의 행위는 진실로 공자와 주자의 의리에 합당하니, 어찌 감히 조금이나마 사심을 품었겠습니까. 비록 옛적의 어린 군주도 그 선신(先臣)에게 죄를 주었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는데, 하물며 전하의 거룩하고 명철하심으로 어찌 주공(周公, 중국 주나라 문왕의 아들. 무왕의 아우)의 현명함과 곽광(霍光, 전한시대에 한무제가 죽은 후 소제昭帝를 도운 충신)의 충성심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속히 자애로운 교지를 내려 이미 죽거나 아직 죽지않는 유신(遺臣)을 편안케 하십시오. -이하 원문 빠짐-
〇 주상께서 존경하면서도 꺼려하는 뜻으로 그의 상소를 급암(汲黯, 중국 전한前漢 한무제 때 직언을 자주했던 명신)의 직언에 견주었으나 끝내 윤허하지는 않았다.
1961년 후손들에 의해 간행된 안음(安崟, 1622~1685)의 문집《송촌집(松村集)》이 있고, 1999년에 《국역 송촌집(松村集)》, 2012년에《국역 증보 송촌집(松村集)》이 간행되었다.
간행사
오늘날 세계문명은 서구 중심에서 다극(多極)체계로 이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거대한 전환을 맞이하여 전통문화의 창조적 계승은 바로 시대적 요구라고 할 것입니다. 기실 우리 겨레는 다름 아닌 온고지신(溫故知新, 옛것을 익혀 그것으로 미루어 새것을 앎)·법고창신(法古創新,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함)을 통한 문화역량을 바탕으로, 중화체제에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간 다른 민족과 달리 고유한 문명을 유지·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세계체제에서는 국권상실과 민족분단이라는 엄청난 시련을 경험하였음에도 민족정체성을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전통문화의 계승과 창조적 대응의 차원에서, 퇴우당(退憂堂) 안음(安崟,1622∼1685) 선생의 문집인 《송촌집》국역본 간행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 고장의 학술 과제로 ‘호남학’의 진흥이 부상하고 있는 작금에 실로 소중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인조반정(1623) 한 해 전에 경기도 파주 외가에서 태어난 선생은 두 차례의 호란과 예송(禮訟)으로 국론이 분열되고, 상호 비판과 견제의 틀에서 운영되던 붕당정치가 상대를 적대하고 배제하는 환국정치(換局政治)로 이행하는 시대를 겪었습니다. 그만큼 선생이 살던 시대는 조선의 국내와 사정이 격변하고 정치 갈등과 사회 모순이 심각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생은 호한체제(胡漢體制, 대다수의 한족을 중심으로 한 수많은 소수민족들이 어우러진 다민족 국가)를 표방한 청제국의 팽창주의에 대항하고 조선의 고유성과 정신 자립을 위한 조선중화주의(朝鮮中華主義, 명나라가 멸망하자 조선이야말로 세계에서 유일한 중화국가)라는 외부적 추상적 명제에 앞서, 나라 밖의 위협에 대처하려면 먼저 나라 안의 폐단을 고쳐야 함을 제창하였습니다. 그래서 국왕에게 종척(宗戚, 왕의 종친과 외척)의 근심, 분당(分黨)의 폐단, 공거(貢擧, 인재의 선발)의 오류, 전부(田賦, 토지에 대한 세금)의 남설, 군포(軍布)의 징수 등 다양한 시무책을 깊이 개진하고 간곡하게 건의하였던 것입니다.
‘내정을 다스린 뒤에 외적을 물리쳐야 한다.[先內修後外攘]’ 이는 선생의 경세론(經世論)으로서 남을 다스리는 뜻을 펴기에 앞서 자신부터 닦아야 한다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국가화(國家化)였습니다. 이렇듯 인간의 도덕·정치의 책무와 국가의 생민(生民)·지존(至尊)의 당위를 하나의 틀에서 살폈기 때문에 국왕에게 체천(體天, 하늘을 본받음)의 효성과 군신의 의리를 거듭 설파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선생은 유교정치의 이상인 덕치(德治)와 예치(禮治)의 최고주재자인 국왕이라도 인간 보편의 윤리와 의례를 초월할 수 없다는 논리에 적극 동참하였습니다. 이러한 예론은 흔히 ‘왕·사동례(王士同禮)’로 표현되는데 선생이 남인(南人)의 예설을 단호히 비판한 연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한편 선생은 조선 역사에서 가장 참담했던 경신대기근(庚申大饑饉, 1670~1671) 이외에도 천재지변에 따라 흉작이 거듭되고 가축 전염병까지 창궐하여 민생이 도탄에 빠진 어려운 상황을 겪었습니다.그래서 “임진년 액난(厄難)이 이와 같았을까? 전쟁과 흉년은 상란(喪亂)이 한가지이다.” 하며, 집안 곡식을 풀어 한 고을을 구휼하였습니다. 바로 손상익하(損上益下,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함)의 모범이었던 셈입니다. 선생의 경륜과 의리는 《용학의의(庸學疑義)》·《예의문답(禮疑問答)》과 같은 저술을 통해 축적된 학문의 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저술이 전해지지 않아 아쉬울 따름입니다.
극기복례(克己復禮, 자기의 욕심을 누르고 예의범절을 따름)와 애군우국(愛君憂國, 임금을 사람하고 나라를 근심함)을 실천하고자 했던 선생의 일생은 몇 가지 연원(淵源)에서 유래하고 있습니다. 선생은 일찍이 조부의 가르침을 잇고 외증조를 사숙하면서 의리(義理)와 출처(出處)의 정도(正道)를 익혔습니다. 조부는 학문과 절의의 유종(儒宗)으로 우산 선생(牛山先生)이라 불린 은봉(隱峯) 안방준(安邦俊,1573~1654)이며,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와 더불어 도학의 적전(嫡傳, 정통)으로 문묘에 오른 우계(牛溪) 성혼(成渾,1535~1598)이 외증조가 됩니다. 그리고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1574∼1656)에게 집지(執贄, 제자가 스승을 처음으로 뵐 때 '제자로 받아주십시오'하며 경의를 표하고 나서 예폐을 올리는 것)하고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1606~1672)을 사사(師事, 스승으로 공경하고 그 가르침을 받음)하였으며,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시남(市南) 유계(兪棨), 석호(石湖) 윤문거(尹文擧),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 등이 산림종장(山林宗匠)에게 지우(知遇, 인격·재능 등을 인정받아 후대받음)를 입었습니다. 또한 당대의 택당(澤堂) 이식(李植), 남송(南松) 조복양(趙復陽), 북정(北汀) 홍처량(洪處亮), 화곡(華谷) 이경억(李慶億),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명재(明齋) 윤증(尹拯),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 둔촌(屯村) 민유중(閔維重), 서석(瑞石) 김만기(金萬基) 등 석학명유(碩學名儒)와 교유하였습니다.
선생은 일찍이 인각봉취(麟角鳳嘴, 기린의 뿔, 봉황의 부리와 같음)·사림근저(士林根柢, 사림의 근본)·거하승묵(巨廈繩墨)의 기대를 받았고, 행의효제(行義孝悌)와 박학명례(博學明禮)로 천거를 받았으며, 강직한 정론은 한나라 충신 급암(汲黯, 중국 전한의 명신)에 비견되었습니다. 그래서 박세채는 운봉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던 선생을 일컬어 “퇴우(退憂)의 올곧음은 급암(汲黯)에 비길 만하되, 만절(晩節, 늙어서)은 같지 않다.”고 높였던 것입니다. 그만큼 사환(仕宦)은 짧고 퇴거(退去)는 길었습니다. 그러나 시국과 나라에 대한 근심은 그치지 않았으니, 자호를 ‘퇴우(退憂)’로 삼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선생은 서인이 회니시비(懷尼是非, 조선 후기 노론의 우두머리인 송시열과 그의 제자이면서 소론의 우두머리였던 윤증 간의 갈등과 대립을 말한다. 당시에 송시열의 거주지가 충청도 회덕懷德이고, 윤증의 거주지가 이성尼城이었기 때문)의 여파로 노론과 소론으로 분립되기 시작한 숙종 11년(1685)에 보성 송산 택촌(澤村)에서 세상을 마감하였습니다. 임종할 때에 “우리 동방의 관작과 시호는 너무 지나치게 꾸미니 통탄스럽다. 관계(官階)의 서식은 다만 역임한 관직만 쓸 것이요, 사퇴한 관직은 쓰지 말라.” 하고, 또 “너희들은 효제(孝悌)를 근본 삼아 학문하고 수양하되 권력과 사리를 가까이 하지 말 것이요, 남에게 알려지기를 구하지 말라.”고 유결(遺訣)을 남겼습니다.
선생의 학문과 사상은 온전히 전해지지 못하였습니다. 증손인 지암공(止庵公) 창혐(昌馦)이 편찬한 유고 3권이 그만 수화(水火)를 입고 말았던 것입니다.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다가 1924년에 만회공(晩悔公) 성환(聖煥)의 뜻을 이어받은 8대손 둔사공(遁舍公) 규호(圭灝)의 헌신으로 수습된 연보(年譜) 초본과 소장(疏章) 및 시문 약간으로나마 선생의 학술과 정신을 살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생의 문집은 국권을 잃은 시기에 다시 묻힐 듯하다가, 둔사공의 둘째 아들 종은(鍾殷)이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문하에서 척사부정(斥邪扶正)의 학통을 이은 족숙 회봉공(晦峯公) 규용(圭容)에게 교정을 청하여 1961년에 비로소 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1998년에는 회봉공의 증손인 안동교(安東敎) 박사가《현종실록》과《미촌집(美村集)》에서 찾아낸 단편을 보유로 덧붙이고 국역하였습니다.
《송촌집》을 교정할 때에 회봉공은 실로 한탄스러운 감격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선생의 도학과 경술(經術)은 나라의 빛이 될 만하였고, 사정숙특(邪正淑慝)의 분별, 존화양이의 엄정함은 천지에 빛나고 일월처럼 밝았으나 세상에 크게 시행하고 온몸으로 펼칠 수 없었으니 실로 한탄스럽다.” 이를 읽는 후학 또한 송연(竦然)한 심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또 안 박사와 선생의 후손 안병훈(安秉勳) 씨는 몇 가지 사료와 편지, 만사 등을 증보하고 이전의 번역문을 수정하여 재간(再刊)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재간에 즈음하여 천학(淺學)의 후진으로 간행사를 감당할 수 없어 사양하였으나, 안 박사가 후손의 간곡한 뜻을 내세운 터라 감히 비견(鄙見)을 보태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무쪼록 이번 국역《송촌집》의 간행이 우리 선현의 올곧은 정신문화를 다시 살피고 오늘날의 교훈으로 삼는 뜻 깊은 기회가 될 것을 확신하며, 아울러 ‘호남학’ 나아가 ‘한국학’의 연구자에게 일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2011년 3월 1일에,
후학 함평인(咸平人) 문학박사 이종범(李鐘範)이 삼가 쓰다.
간행후기
근래에 학계 또는 각 가문에서 선현 및 선조의 문집을 수집하고 국역함으로써 그분들의 사상과 사적을 높이 들추는 사업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업을 통해 항상 순수한 학문을 지향하여 정의로운 행실을 구현하기를 소망했던 우리 선현과 선조들의 위대한 정신을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무척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송촌 부군[松村府君, 안음(安崟,1622~1685))은 은봉 선생의 현손(賢孫, 손자)이요,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1574∼1656)]·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1606~1672)] 두 선생의 고제(高弟, 뛰어난 제자)로, 일찍부터 도학과 절의의 요체를 터득하여 유자(儒者)의 정학(正學)을 꽃피웠을 뿐만 아니라, 호국숭현(護國崇賢)의 대도를 힘차게 걸어갔던 분입니다. 도학과 절의의 실현에 고투(苦鬪, 힘겨운 싸움을 함)했던 부군의 정신은 당시에 많은 대현(大賢)들로부터 찬사를 받은 바 있습니다.
그러나 부군의 도학과 절의 정신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문집은 증손자인 지암공[안창혐(安昌馦)]에 의해 유고(遺稿) 3권으로 편집되어 가정에 전해졌으나 불행하게도 수화(水火)로 대부분 잃어버렸습니다. 이를 복원하기 위해 7대손 만회공[안성환(安聖煥)]이 부군의 외가(外家)와 사우(師友) 등 연원(淵源)이 되는 각 집안을 탐방하여 문헌을 수집하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완성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후 아들 둔사공[안규호(安圭灝)]이 선친의 유업을 계승하여 필생의 사업으로 심혈을 다 쏟아 1924년에 약간의 저술과 연보·부록을 합쳐 《송촌집(松村集)》의 초고를 탈고하였고, 1953년부터 1955년간의 석학들이 교정 작업을 거쳐 1961년에 비로소 간행하였습니다.
이처럼 부군의 문집은 후손들의 수집하는 노고가 없었다면 거의 인멸(湮滅)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비록 현존하는 《송촌집》이 부군의 도학과 절의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 일편(一片)의 유문이지만, 우리 가문의 가장 고귀한 기록으로서 후손들이 널리 읽고 되새겨 자랑스런 선조의 유덕(遺德)을 기리고 후손으로서의 긍지를 간직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여러 후손들이 《송촌집》전체를 국역하여 가문의 보감(寶鑑)으로 삼고자 뜻을 모았습니다. 나아가 학계의 연구 자료에도 일조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끝으로 국역을 맡은 안동교(安東敎) 박사는 《송촌집》교정을 담당한 회봉[晦峰, 안규용(安圭容,1873∼1959)] 선생의 증손자로서, 바쁜 시간 속에서도 상세한 역주와 증보를 붙여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깊은 감사를 보냅니다.
2011년 동지절에,
후손 병훈(秉勳)이 삼가 적다.
≪차례≫
《송촌집》서문 / 송재직(宋在直)
《송촌집》제1권
시(詩)
할아버지가 빙호추월에 대해 읊어보라고 명하자 곧 소리 내어 호응하다[王父命吟氷壺秋月應聲輒呼]
우산정사에서 고송팔매를 노래하다[牛山精舍詠孤松八梅]
할아버지의 회갑 생신을 맞아[王父初度晬辰]
파주에서 섣달그믐 밤을 보내며[坡山除夜]
남한산성의 포위가 풀렸다는 소식을 듣고 하늘을 향해 울면서 통곡하다[聞南漢解圍號天痛哭]
신독재 문하에 모여 강론할 때[會講于愼獨齋門下]
죽원사에서 스님들과 이별하며 주다[竹院寺贈別諸僧]
파주 서당에서 서파 오도일, 우재 조지겸과 함께 얘기를 나누다[坡塾與吳西坡道一趙迂齋持謙共話]
노성을 지나다가 이구산에 올라[過魯城登尼丘山]
북당의 회갑 생신을 맞아[北堂初度晬辰]
파주의 매변당에서[坡山梅邊堂]
막내 외삼촌 매변당 성직의 망모시를 차운하여 드리다[次呈季舅梅邊堂稷望耄韻]
동춘 선생에게 올린 만사[同春先生輓]
외제 참봉 양우성에게 바친 만사[外弟梁參奉禹成輓]
문여화 희순의 태고정 시를 차운하다[次文汝華希舜太古亭韻]
외제 병사 양우급에게 바친 만사[外弟梁兵使禹及輓]
또[又] 큰형 소와공(邵窩公)을 대신하여 짓다
파주에서 옛날 감회에 젖어[坡山感舊]
화양동에서 의종황제의 어필을 봉심하고 통곡하며 감회를 읊다[華陽洞奉審毅宗皇帝御筆痛哭感吟]
빙호정에서 꿈에 읊다[氷壺亭夢吟]
소(疏)
윤선도를 법률로 처벌할 것을 청한 상소[請善道按律疏]
윤선도에게 형률을 더할 것을 청한 상소[請善道加律疏]
우암과 동춘이 당한 모함을 변론한 상소[陳辨疏]
사직의 뜻을 아뢴 상소[陳情疏]
동춘 선생을 위해 변론한 상소[陳辨同春先生疏]
서(書)
할아버지께 올리다[上王父]
큰 형 소와공 전에게 올리다[上伯氏邵窩公峑]
종형 회정와 희에게 올리다[上從兄晦靜窩]
동춘 선생에게 올리다[上同春先生]
우암 선생에게 올리다[上尤庵先生] 3통
민대수 정중에게 주다[與閔大受鼎重]
홍자회 처량에게 답하다[答洪子晦處亮]
김구지 수항에게 주다[與金久之壽恒]
김영숙 만기에게 답하다[答金永叔萬基]
오관지 도일에게 답하다[答吳貫之道一]
이양숙 이명에게 주다[與李養叔頤命]
기(記)
우계기[遇溪記]
제문(祭文)
신독재 선생에게 올린 제문[祭愼齋先生文]
동춘 선생에게 올린 제문[祭同春先生文]
동춘 선생의 묘소에 고유한 글[同春先生墓告由文]
시남 유계 선생에게 올린 제문[祭市南兪先生棨文]
큰 외숙 첨정 성공 륵에게 올린 제문[祭元舅僉正成公櫟文]
미촌 윤공 선거에게 올린 제문[祭美村尹公宣擧文]
석호 윤공 문거에게 올린 제문[祭石湖尹公文擧文]
정랑 송광식에게 바친 제문[祭宋正郞光栻文]
《송촌집》제2권
부록(附錄)
연보(年譜)
《송촌집》 제3권
부록(附錄)
만사(輓詞)
제문(祭文)
신미년에 원통함을 풀어주기를 청한 상소[辛未伸寃疏]
계유년에 훈작을 회복시켜 주기를 청한 상소[癸酉伸復疏]
을유년에 증작을 청한 상소[乙酉請爵疏]
사우를 세우자는 통문[建祠宇通文]
행장(行狀)
묘표(墓表)
묘갈명 병서(墓碣銘竝序)
《송촌집》 발문
《송촌집》 증보(增補)
《왕조실록》에서 뽑다[王朝實錄抄]
《승정원일기》에서 뽑다[承政院日記抄]
《여지도서》에서 뽑다[輿地圖書抄]
《보성읍지》에서 뽑다[寶城邑誌抄]
안경인 전과 안경진 음에게 보낸 편지 [與安景仁峑景鎭崟] - 윤선거(尹宣擧)
좌랑 안음에게 보낸 답장 [答安佐郞崟] - 서봉령(徐鳳翎)
송화현감 안전과 운봉현감 안음에게 보낸 답장 [答安松禾峑雲峰崟] - 서봉령(徐鳳翎)
좌랑 안음에게 보낸 답장 [答安佐郞崟] - 박세채(朴世采)
아우 음에게 보낸 편지 [與舍弟崟] - 안전(安峑)
좌랑 안경진 음을 애도하다 [挽安佐郞景鎭崟] - 서봉령(徐鳳翎)
간행 후기
《송촌집》 원문(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