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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職憂堂 安昌勳과 松梅亭" ; 안동교 교수가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安奉淳...[등]편
安東敎 역
죽산안씨우봉파종친회
2003
124p
ISBN : 8995418230
도서관 소장정보 : 국립중앙도서관 | 국회도서관
가격 6,000원
職憂堂(직우당) 安昌勳(안창훈)과 松梅亭(송매정)
발 간 사(發刊辭)
우리들은 직우당(職憂堂) 안창훈(安昌勳, 1748~1828) 선조의 위업을 흠모하면서도, 정작 선조와 관련된 사실(史實)들을 잘 알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던 차에 『직우당(職憂堂) 안창훈(安昌勳)과 송매정(松梅亭)』이라는 책자를 편찬하여 국역(國譯) 발간하게 되니, 후손으로서 만시지탄(晩時之歎)과 함께 기쁜 마음이 한량없습니다.
직우당은 우산(牛山) 안선생(安先生)의 5대손입니다. 우산선생은 광해군 6년(1614)에 소뫼[牛峯] 마을에 착하자마자, 우산전사(牛山田舍)의 동쪽에다 단(壇)을 쌓아 소나무 한 그루와 매화나무 여덟 그루를 심고 은둔하면서 학문에 정진하였습니다. 직우당은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이곳에다 정자를 짓고 송매정이라 편액을 달았습니다. 직우당의 맏아들 오봉(五峰) 수록(壽祿)은 송매정의 상량문(上樑文)을 지었는데, 여기에서 송매정을 지은 이유를 “곧은 절개를 지켜 유유히 살아가면서 시례(詩禮)의 가르침을 길이 전하려는 뜻”이었음을 밝혔습니다. 또 이 정자를 일명 초당(艸堂)이라고 부르면서 수천 권의 책을 마련하여 학문을 강론하였으며, 후손들에게 효제(孝悌)의 도를 가르치고 손님을 영접하는 장소로 활용하였습니다.
직우당은 어려서부터 재능이 특출하여 경전을 깊이 연구하고 부모를 효성으로 섬겼습니다. 부인인 영인(令人) 진원박씨(珍原朴氏)와 함께 검소한 마음으로 몸소 농사를 지어 생활이 넉넉해지자, 아버지의 사당으로부터 먼 조상의 묘소에 이르기까지 석물(石物)을 갖추고 제전(祭田)을 두어 제향(祭享)을 빠뜨리지 않았으며, 가난한 친척과 친구에 대해서도 마음을 다해 구휼하였습니다. 을축년(1805)에는 향약(鄕約)과 사창(社倉)의 일을 주장하였는데, 매계처사(梅溪處士) 후상(後相)이 세운 옛날 규모를 한층 증보하여 수십 마지기의 전답을 마련하고 수백 섬의 곡식을 저축함으로써, 부역(賦役)을 막아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우산선생에게 내려야할 절혜(節惠)의 은전(恩典)이 시행되지 않자, 둘째 아들 수택(壽宅)을 서울로 보내 선비들의 상소문을 임금께 올려 정경(正卿, 정 2품의 관직)을 추증받았을 뿐만 아니라, 맏아들 수록(壽祿)과 함께 적극 노력하여 을사년(1821) 2월에 문강(文康)이라는 시호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오봉의 출후증손(出後曾孫)인 소산(蘇山) 성환(成煥)은 송매정의 기문(記文)에서 “정유년(1897)에 오봉의 5대손 종민(鍾珉)이 다시 정자의 창문과 벽, 꽃나무와 연못, 섬돌 중에서 옛날의 모습과 같지 않은 것을 보수하였다. 그리고 나서 곧 일가들을 모아놓고 말하기를 ‘우산선생이 심은 소나무와 매화나무가 여기 뿌리를 내린 지 언언 204년이 되어 먼 훗날에 흥망성쇠를 보장할 수 없을 것이니, 우리 문중이 어떻게 이를 수호해야 합니까’ 라고 말했다. 성환은 말하기를 ‘참으로 어려운 일일세. 그러기는 하나 우리 모두 네 분 선조의 정신과 기맥(氣脈)을 물려받았으니, 그 뜻을 잘 새겨서 아침저녁으로 흠모하고 추앙한다면 그 해가 비쳐서 여기에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네’ 라고 답했다”고 적었습니다.
기문을 적은 후로 또 107년이 흘렀지만, 소산의 말은 참으로 옳았습니다. 지금 후손들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중건과 보수를 게을리 하지 아니하여 잘 보존해 왔습니다. 앞으로도 자손들은 뜻을 모으고 더욱 협력하여 만에 하나라도 차질이 없도록 유지관리에 만전을 기할 것입니다.
끝으로 오봉(五峰) 선조의 행적을 빠뜨릴 수 없어 간략히 몇 마디 수록(收錄)할까 합니다. 오봉(五峰) 수록(壽祿)은 말을 배울 무렵부터 어른을 섬기는 예절을 알아서, 부모가 명하면 반드시 무릎을 꿇어 받았고 금지시킨 일은 뒤에 다시 하지 않았습니다. 약관에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선생의 제자가 되었는데, 선생이 공부에 정진하면 학문의 조예가 깊어질 것이라고 기대하자, 스스로 분발하여 말하기를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이유는 인의(仁義)가 있기 때문이다. 인의가 아니면 사람의 도리를 세울 수 없어 사람이라는 이름을 더럽히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기유년(1849)에 영희전 참봉(永禧殿參奉)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기묘년(1855)에 수직(壽職)으로 품계를 올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임명하였습니다.
공은 『오봉유고(五峰遺稿)』 7권을 남겼는데, 『독서조약문(讀書條約文)』에서 엄격한 규율을 정하여 독서를 장려하였고, 「대학교책(對學校策)」에서는 국가의 정책으로 학교를 건실하게 운영하여 인재의 양성에 매진해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교육정책에 반영할만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이러한 글들을 우리 후손들은 자세히 살펴보고 자랑스럽게 여겨야할 것입니다. 국역(國譯)을 맡아준 안동교(安東敎) 교수는 바쁜 가운데서도 상세한 주석을 붙여주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그 노고에 심심한 감사를 표합니다.
계미년(2003) 6월 일
7대손 태순(泰淳) 근지(謹識)
차 례
1. 송매정(松梅亭)에 관한 기사(記事)
1) 송매정의 연혁(沿革) 1
2) 松梅亭開基祝文 3
송매정 터를 닦을 때의 축문 3
3) 松梅亭上樑文 4
송매정의 상량문 5
4) 義契序 9
의계의 서문10
5) 松梅亭記 12
송매정의 기문13
6) 松梅亭重建記15
송매정을 다시 건립한 뒤 붙인 기문16
7) 謹次晦翁賦梅韻咏松梅壇事實18
회옹(주자)이 매화를 노래한 시의 운을 삼가 빌려서 송매단의 사실을 읊다18
8) 송매정의 원운(原韻)20
9) 송매정 원운을 빌려 지은 시(詩)들21
10) 소당(小塘)을 읊은 시30
11) 사우(士友)들이 오봉(五峯)에게 준 시(詩)30
12) 송매정의 주련(柱聯) 32
2. 직우당(職憂堂)에 관한 기사(記事)
1) 答從姪壽麟兼寄諸從姪33
종질 수린과 여러 종질들에게 답한 편지34
2) 社契記事39
사계에 관한 기사41
3) 安氏義庄記實47
안씨 의장에 관한 사실을 기록함49
4) 薦狀一53
추천장 154
5) 薦狀 二57
추천장 259
6) 行 狀 62
행 장66
7) 墓碣銘 幷序76
묘갈명 (서문을 덧붙임)78
8) 贈令人珍原朴氏墓表82
영인에 추증된 진원박씨의 묘표83
3. 오봉공(五峰公)에 관한 기사(記事)
1) 贈仲弟汝仁勉學說86
아우 여인에게 준 면학설87
2) 讀書條約文89
독서에 관한 조약을 담은 글90
3) 對學校策91
학교에 대한 대책94
4) 行 狀102
행 장104
5) 墓碣銘 幷序109
묘갈명 (서문을 덧붙임)110
6) 淑夫人吳氏墓表 115
숙부인 오씨의 묘표116
■ 인명록(人名錄)118
1. 송매정(松梅亭)에 관한 기사(記事)
1) 송매정의 연혁(沿革)
우산(牛山) 안(安)선생은 광해군 6년(1641) 소뫼[牛峯]마을에 정착하자마자, 우산전사(牛山田舍)의 동쪽에 단(壇)을 쌓고 소나무 한 그루와 매화나무 여덟 그루를 심었다. 우산의 5대손 직우당(職憂堂) 창훈[昌勳: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추증함]은 선조의 유지를 받들어 정자를 짓고 송매정(松梅亭)이라 편액을 달았다.
직우당의 맏아들 오봉(五峯) 수록(壽祿)은 「송매정상량문(松梅亭上梁文)」을 지었는데, 여기에서 송매정을 지은 이유를 “곧은 절개를 지켜 유유히 살아가면서 시례(詩禮)의 가르침을 길이 전하려는 뜻”이었음을 밝혔다. 또 이 정자를 일명 초당(艸堂)이라고 부르면서 수천 권의 책을 마련하여 학문을 강론하고 손님을 영접하는 장소로 활용하였다.
직우당은 어려서부터 재능이 특출하여 경전을 깊이 연구하고 부모를 효성으로 섬겼다. 부인인 영인(令人) 진원박씨(珍原朴氏)와 함께 검소한 마음으로 몸소 농사를 지어 생활이 조금 넉넉해지자, 아버지의 사당으로부터 먼 조상의 묘소에 이르기까지 석물(石物)을 갖추고 제전(祭田)을 두어 제향(祭享)을 빠뜨리지 않았으며, 친척과 친구 중 가난한 자에게 대해서도 마음을 다해 구휼하였다.
을축년(1805)에 향약(鄕約)과 사창(社倉)의 일을 주장하였는데, 매계(梅溪) 후상(後相)이 세운 옛 규모를 한층 증보하여 수십 마지기의 전답을 마련하고 수백 섬의 곡식을 저축하니, 부역(賦役)을 막아 백성을 돕는 것이 이전보다 훨씬 확대되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우산(牛山)선생에게 내려야할 절혜(節惠)의 은전이 시행되지 않자, 둘째 아들 수택(壽宅)을 서울로 보내 선비들의 상소문을 임금께 올려 정경(正卿: 정 2품의 관직)을 추증받았다. 아울러 작시(爵諡)에 관한 일을 도맡아 맏아들 수록(壽祿)과 함께 적극 노력하여 을사년(1821) 2월에 문강(文康)이라는 시호를 받기도 하였다.
그 후 계사년(1897)에는 종족들이 송매정에 모여 의계(義契)를 만들고, 선산(先山)을 돌보는 동시에 관례(冠禮)․혼례(婚禮)․상례(喪禮)를 행하기 어려운 자를 구휼하였다. 매월 12월 4일에는 이곳 정자에 모여 잔치를 즐기고 계문(契文)을 점검하였을 뿐 아니라, 종족의 돈목(敦睦)을 도모하기 위해 의전(義田)과 의택(義宅)을 마련하여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러한 사실은 소산(蘇山) 성환(成煥)이 지은 「의계서(義契序)」에 잘 나타나 있다. 또 갑자년(1924) 12월 5일에는 송매정 화수회(花樹會)를 조직하였는데, 매년 동지(冬至) 날에 회원들이 정자에 모여 잔치를 즐기면서 화합과 친목을 돈독히 하였다.
경인년(1950)에 여순(麗順)사건으로 정자가 소실되는 불운을 겪기도 하였으나, 6대손 종기(鍾箕)가 화염 속에서 현판 40개와 고서(古書) 천여 권을 무사히 꺼내어 보전하였다. 4년이 지난 갑오년(1954)에는 그 동안 준비해온 재목을 가지고 송매정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정자는 두 칸 겹집의 방과 마루로 만들어졌는데, 뜰에는 연못 소당(小塘)이 있고 연못 옆에는 180년이 된 영산홍 두 그루가 있어 정자의 운치를 더해 준다. 또 40여 개의 크고 작은 현판 중에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가 쓴 ‘은봉유장(隱峰遺庄)’과 ‘시례전가(詩禮傳家)’가 있고,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쓴 ‘매화동심(梅花同心) 괴석지기(怪石知己)’가 있으며,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이 쓴 주련(柱聯)이 붙어있어 고아(古雅)하면서도 유한(幽閑)한 멋을 자아낸다. 이중에서도 창암이 쓴 주련의 시(詩)는 송매정의 경관을 잘 묘사하고 있다.
정묘년(1987)에 정부의 주암댐 건설로 마을 전체가 수몰되었으나, 이 정자는 마을의 높은 곳에 자리하여 민가 7호와 함께 영구히 보존되고 있다. 그 뒤 정부에서 마을 높은 곳에 취락 주택단지와 고인돌 공원을 유치함으로써 경관을 손상시킨 아쉬운 점이 있지만, 빙월정(氷月亭)․목미암(木美菴)과 더불어 옛 모습의 유적을 그대로 간직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다행스럽다.
계미년(2003) 6월 일
8대손 병오(秉五) 근지(謹識)
2) 松梅亭開基祝文
五峯 安壽祿 撰
惟我先祖隱峰府君 始卜玆土 牛山之名 聞于通國 所謂地以人顯者 豈不信歟 今將就舊築松梅壇之側 營立數間小亭 以爲不沫先休引進後學之計 惟爾有神 尙冀鑑佑 錫以休祥 大小康寧 上以克闡先烈 下以啓佑後人 永世無斁 卽事之初 謹此虔告
송매정 터를 닦을 때의 축문
오봉 안수록 지음
우리 선조 은봉부군(隱峰府君)께서 비로소 이 땅에 터를 잡아, 우산(牛山: 소뫼)이라는 이름이 온 나라에 알려졌으니, 이른바 “땅은 사람으로 인해 밝게 드러난다”는 말을 어찌 믿지 않겠나이까? 이제 옛적에 쌓은 송매단(松梅壇) 곁에다 두어 칸 조그만 정자를 지어서, 선조의 아름다운 자취를 사라지지 않게 하고 후학을 인도하여 앞으로 나아갈 계획을 세웠나이다.
아! 신(神)께서 계시다면 굽어살피시고 보우하사 길한 상서(祥瑞)를 내리시고 크고 작은 일에 편안함을 주시길 바라나이다. 그리하여 위로는 선열(先烈: 선조의 열렬한 정신)을 들춰내고 아래로는 후인들을 이끌어 세상 영원히 썩지 않게 하소서. 일을 시작하기 전에 경건한 마음으로 이를 알리나이다.
3) 松梅亭上樑文
五峯 安壽祿 撰
仰賢祖藏修之區 桑梓起敬 作後生依歸之所 松梅揭扁 非徒自適於幽貞 要以永傳乎詩禮 恭惟先祖隱峰先生府君 淵源克正於北學 趨向有賴於南儒 痛天地飜覆之時 春秋義數十 憂朋黨傾軋之習 混定編二三 炳幾微於吉凶消長之間 介石寧俟終日 關風俗於出處辭受之際 入山惟恐不深 結長想夢中 溪山人間 何處有此 久不露峽裏 慳秘世上 遙望空雲 乃於萬曆甲寅之秋 卜玆一區卯酉之境 三邑之地勢相錯畇畇 橘洲膏腴 兩里之人烟不驚 家家桃源 制度四面 名山環合 望之蔚然 深脩一帶 晴川抱廻 逝者如斯 不舍居然 我泉我石 至今某樹某邱 非無名花異卉之叢蒙 獨愛寒松疎梅之姱節 氷腮列羲畫排布 肯與爭春風於少年 蒼髥儼陶撫 盤桓凜然更變故之志士 吳學士堂記之跋 旣稱能久能終 姜先生樑偉之文 亦謂善頌善禱 惟杖屨之經歷 尙草木之昭回 矧薖軸之托玆窮深 宜樹木之猶爲愛惜 荊棘蓬蒿之不入 猶是故山煙霞 日月棟樑之高懸 永作後人模範 舊廬遷徙 嗟堂室之莫徵 小壇淸幽 幸澗阿之不變 地不忍荒 水不忍廢 嗚呼其可忘 小學成始 大學成終 庶幾乎無忝 爰謀爰度 以經以營 闢地形之背艮面坤 與前峰而拱揖 攷堂制之北墉南牖 挾後溪而循除 旣稟命於家君 絶勝疏廬之舊 亦董工於羣從 寧興澤門之謳 規模只取乎苟合苟完 程科亶在於非高非遠 聊罄鄙頌 助升小樑 兒郞偉抛樑東 氤氳春色滿山紅 濂庭翠草程川柳 要識乾坤造化工 兒郞偉抛樑西 釣臺千尺俯晴溪 蒼葭白露依依處 苦竹丹楓極望迷 兒郞偉抛樑南 巖巖鷄足繞蒼嵐 梅陰竹際淸風過 月滿前簷水滿潭 兒郞偉抛樑北 煌煌太一居辰極 人心寂感無邊方 晦父詩中要用力 兒郞偉抛樑上 滿天風露回淸想 宛然當日夢中看 道體高堅曾鑽仰 兒郞偉抛樑下 桑麻雨露迷平野 無非日用着工夫 肯作馳心玄妙者 伏願上樑之後 山川獻奇 花樹生色 風雨攸除 鳥鼠攸去 長護滿架上圖書 父師在上 鬼神在傍 益勉己分內工業 允莘摯巷顔之道 惟在敬義與誠明 嗟圃隱重峰之風 當識學問中節義 庶可存心於美木之夜氣 何必沾衣於黃花之重陽 伯吹塤仲吹篪 一堂之和氣可掬 仁樂山智樂水 平生之事業無窮 幸將曰余有後乎 方可謂不虛生矣
五峰公製此文 手書而刻揭之 不幸佚於兵燹 故更書而刻焉 時大韓民國六十年戊午孟夏月也
송매정의 상량문
오봉 안수록 지음
그리워라! 어진 선조께서 은둔하며 학문을 닦은 곳. 뽕나무․가래나무[桑梓][옛날에는 담 아래에다 뽕나무와 가래나무를 심어 자손에게 물려줌으로써 생계의 자료로 삼게 하였는데, 자손이 이를 보면 부모의 유물임을 알아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킨다는 뜻. 『시경(詩經)』 「소아(小雅)」 ‘소변(小弁)’장에 “뽕나무 가래나무도, 반드시 공경함이 있거늘, 우러러보느니 아버지요, 의지하노니 어머니로다.”(維桑與梓, 必恭敬止, 靡瞻匪父, 靡依匪母)”라 했다.]가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네. 지어보세! 우리 후손이 의지하여 돌아갈 곳. ‘송매정(松梅亭)’이라 현판을 내걸었네. 이는 곧은 절개 지키며 유유히 살아가려는 뜻일 뿐 아니라, 시례(詩禮)의 가르침[가정에서 부모의 훈계를 듣는 것인데 공자의 아들 이(鯉)가 시례(詩禮)의 가르침을 들은 일에서 연유한다. 논어 「계씨편(季氏篇)」 13장에 보면, 진항(陳亢)이 백어[伯魚: 공리의 자(字)임]에게 “그대는 또한 특별한 가르침을 들은 적이 있는가?”라고 묻자, 대답하기를 “없었다. 일찍이 홀로 서 계실 때에 내가 빨리 걸어 들을 지나는데[趨而過庭], ‘시(詩)를 배웠느냐?’고 물으시기에 ‘못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였더니,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다.’ 하시므로 내가 물러나 시를 배웠노라” 하였다.]을 길이 전하려는 것이로다.
삼가 생각건대 선조이신 은봉(隱峰)선생의 연원은 북학(北學, 은봉은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학문을 계승하였는데, 우계는 당시 서울 북쪽인 파주(坡州)에서 강학(講學)하였으므로 여기에서 북학이라 했다.)을 계승하여 매우 올바르고, 학문방향은 남유(南儒)들의 의지처가 되었네. 천지가 뒤집어진 시절을 통분하여 수십 차례 춘추대의(春秋大義)를 밝히고, 붕당이 다투던 폐습을 우려하여 두세 차례 시비를 분별하였네. 길흉소장(吉凶消長: 길함․흉함․쇠함․성함)하는 사이에서 기미(幾微)를 밝혀 굳은 지조로 마칠 날을 기다렸고, 출처사수(出處辭受: 나아감․물러남․사양함․받음)하는 즈음에 풍속을 생각하여 숨은 산이 깊지 못했는가 걱정했더라. 오랫동안 꿈꾸고 상상해온 땅. 시내와 산, 그리고 인간들이 어디 이처럼 들어맞는 곳이 있으랴! 긴 세월 감춰진 산골짜기. 하늘이 아껴두고 땅이 숨겨둔 세상인양 뜬구름만 아스라이 보일 뿐이네.
이리하여 만력(萬曆) 갑인년(광해군 6, 1614) 가을에 이곳 우산 땅 묘방(卯方: 동쪽)을 등지고 유방(酉方: 서쪽)을 품은 곳에 터 잡으셨네. 3읍(邑: 보성․순천․동복)의 지세가 서로 교차되어 드넓은 귤주(橘洲) 땅[우산 땅을 귤주에 비유하고 있는데, 귤주는 원래 중국 호남성 장사현(長沙縣) 서쪽에 있는 고을로 여름에 물이 범람하여도 이곳은 잠기지 않고 토지가 기름진 곳이었다.]은 비옥하였고, 두 마을 사람들은 병란에도 놀라지 않은 채 집집마다 무릉도원(武陵桃源)의 모습이었지. 명산(名山)이 사방을 둘러쳐 바라보면 초목만이 울창하였네. 깊고 긴 한 줄기 맑은 시냇물이 안고 돌아나가, 쉬지 않고 흘러 흘러 한적한 자연의 경치를 이뤘구나.
지금 이곳저곳 나무와 구릉에는 화사한 꽃과 신기한 풀들이 어우러져 더북하건만, 홀로 한송(寒松)과 소매(疎梅)의 아름다운 절개를 사랑하였네. 차가운 뺨을 한 채 팔괘(八卦)를 그리던 복희(伏羲)는 기꺼이 소년처럼 봄바람을 다투었고, 흰 수염을 근엄하게 날리며 고송(孤松)을 어루만지던 도연명(陶淵明)은 늠름한 옛 지사(志士)로 변하였네. 오학사(吳學士, 이름은 오희도(吳希道), 자는 득원(得源), 호는 명곡(明谷)․망재(忘齋), 본관은 나주(羅州), 벼슬은 한림(翰林)을 지냈다. 1583-1623.)는 「우산전사기(牛山田舍記)」의 발문에서 이미 오랜 은둔생활과 올바른 끝맺음을 칭송하였고, 강선생(姜先生, 이름은 강항(姜沆), 자는 태초(太初), 호는 수은(睡隱),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은봉과는 동문이다. 1567-1618.)은 「상량문(上梁文)」에서 또한 훌륭하게 송축하고 기도하였도다.
오직 지팡이 짚고 노닐며 지내던 곳에 아직 초목이 뚜렷이 보이는데, 하물며 벼슬을 그만두고 숨어든 이 궁벽하고 깊숙한 곳, 한 그루 수목도 오히려 사랑스러워라. 가시나무․쑥 뿌리가 침범하지 않아 여전히 옛 산의 경치이니, 해와 달 같은 대들보를 드높이 매달아 길이 후인의 모범으로 삼노라. 옛집을 옮겨버렸으니 당실(堂室)을 찾을 수 없음이 애달프지만, 조그만 단(壇)이 청유(淸幽)하게 남아, 변치 않은 시냇물을 볼 수 있음이 다행스럽네. 땅을 차마 묵혀버릴 수 없고 물을 차마 마르게 할 수 없으니, 아! 이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소학(小學)』으로 처음을 이루고 『대학(大學)』으로 끝을 맺으면, 아마도 욕됨이 없으리니 이에 도모하고 요량하여 집 지을 것을 경영하였네. 간방(艮方: 동북쪽)을 등지고 곤방(坤方: 서남쪽)을 대면한 지형을 개간하니 앞산 봉우리와 읍(揖)하듯 마주보고, 북쪽에 담을 쌓고 남쪽으로 문을 내는 당제(堂制)를 생각하니 집 뒤 시내를 끼고 빙빙 돈다.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거친 옛집보다 번듯하게 짓고, 또 집 짓는 무리를 감독하여 택문(澤門)의 노래[공사를 속히 끝내도록 독촉한다는 뜻. 원래 택문은 춘추시대에 송(宋)나라 동성(東城)의 남문(南門)을 말함. 『좌전(左傳)』 양공(襄公) 17년 조를 보면, “송나라 에서 황국보(黃國父)가 태재(太宰)가 되자, 평공(平公)을 위해서 별장(別莊)을 짓느라고 농사일에 방해가 되었다. 자한(子罕)이 농사일이 끝나기를 기다릴 것을 청했으나 평공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일에 종사하는 자들이 노래하기를 ‘택문(澤門)의 흰 사나이(황국보)는, 우리의 일을 일으켰는데, 읍 안의 검은 사나이(자한)는,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네’라고 했다.”]를 부르게 하노라. 규모는 다만 형식에 합치되고 완전함만을 취하나, 공부과정은 고원(高遠)한 이치만을 추구하는 데 두지는 않으리라. 애오라지 나의 보잘것없는 송축을 표현[이를 육위가(六偉歌)라고 이르는데 문체(文體)가 동․서․남․북․상․하를 들어가며 아랑위(兒郞偉)의 ‘위’자가 여섯 번 들어 붙여진 이름이다.] 하여 조그만 대들보 올리기를 돕노라.
어기어차… 대들보를 동쪽으로 던지니, 기운도 왕성하게 봄빛은 온 산을 붉게 물들이네, 염계(濂溪, 북송의 유학자 주돈이(周敦頤)의 호. 그는 뜰의 잡초를 뽑지 않고 풀을 통해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는 이치를 본다고 말했다.) 뜰의 푸른 풀과 정자(程子, 역시 북송시대의 유학자 정호(程顥)와 정이(程頤)의 형제를 말함.) 냇가의 버들은, 천지조화의 오묘한 이치를 알고자 함이라.
어기어차… 대들보를 서쪽으로 던지니, 천 자[尺]나 되는 낚시터가 맑은 시냇물을 굽어보네, 푸른 갈대 흰 해오라기가 넘실대는 곳엔, 참대와 단풍만 아스라이 바라보이고.
어기어차… 대들보를 남쪽으로 던지니, 깎아지른 듯한 계족산(鷄足山)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싸네, 매화꽃 지고 대나무 성할 제 맑은 바람은 불어오리니, 둥근 달은 앞 처마에 그득한데 물은 연못에 가득하구나.
어기어차… 대들보를 북쪽으로 던지니, 반짝반짝 태일성(太一星) 북극에 자리했네, 인심(人心)의 고요함과 움직임은 일정함이 없으니, 주자(朱子)의 시구에서 힘써 공부할 곳 찾아라.
어기어차… 대들보를 위로 던지니, 온 누리에 바람과 이슬 분분하건만 홀로 맑은 생각을 돌이켰네, 뚜렷하게 체득하였지 그 날 꿈속에서 보았던, 높고 견실한 도체(道體) 일찍이 따를 자가 없었네.
어기어차… 대들보를 아래로 던지니, 뽕나무․삼에 내리는 비이슬에 아스라한 저 들판. 모두다 일상 속의 공부 아님이 없거늘, 어찌 현묘(玄妙)한 곳으로 마음을 몰아가랴.
엎드려 바라건대, 대들보를 올린 뒤에 산과 냇물은 기이한 멋을 주고, 꽃과 나무는 아름다운 빛을 발하며, 바람과 비는 그치고 새와 쥐를 막아, 오래도록 시렁에 가득한 도서(圖書)를 지켜주소서. 부사(父師)가 위에 계신 듯 귀신이 곁에 있는 듯, 자기를 완성하는 공부에 더욱 힘쓰도록 하소서. 진실로 신지(莘摯)와 항안(巷顔)[신지는 은(殷)나라의 어진 재상 이윤(伊尹)을 말함. 이름은 지(摯)인데, 처음에 신야(莘野)에서 밭을 갈다가 탕(湯) 임금의 초빙을 받았다. 항안은 공자의 제자 안연(顔淵)을 말하는데, 그는 누항(陋巷)에 살면서도 인(仁)을 지키며 도 (道)를 즐겼다고 함.]의 도리는 오직 경의(敬義)와 성명(誠明)[『주역(周易)』「곤괘(坤卦)」에서는 “군자는 공경함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로움으로써 밖을 방정하게 한다”(君子敬以直內, 義以方外) 하였 고, 『중용(中庸)』에서는 “성실함으로 말미암아 밝아지는 것을 성(性)이라 이르고, 밝음으로 말미암아 성실해짐을 교(敎)라 이르니, 성실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성 실해진다”(自誠明, 謂之性, 自明誠, 謂之敎, 誠則明矣, 明則誠矣) 하였다.]의 실천에 있고, 아! 포은(圃隱: 정몽주)과 중봉(重峰: 조헌)의 기풍은 학문(學問) 중의 절의(節義)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네.
미목(美木)의 야기(夜氣)[『맹자(孟子)』「고자상(告子上)」편에 나오는 말이다. 인간 의 본래 마음[本心]은 우산(牛山)의 아름다운 나무[美木]처럼 아름답고 순수했으나, 물욕(物慾: 물질적 욕구)의 침입으로 질곡(桎梏)을 당해 선(善)하게 마음이 드러나지 않게 되었으므로 청명한 밤 기운[夜氣]을 길러 본래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는 뜻이다.]에서 본심(本心)을 보존할 수 있는데, 하필 황국(黃菊) 꽃이 피는 중양(重陽)에 옷을 적실 것인가. 형은 질나팔[塤]을 불고 아우가 화답하여 저[篪]를 불어 한 집안의 화목한 기운을 움켜쥘 수 있고,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이는 물을 좋아하여 평생의 사업을 무궁하게 한다면, 다행스럽게도 나에게 쓸만한 후손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고, 바야흐로 내 삶은 헛되지 않았다고 이를 수 있으리라.
오봉공이 이 글을 지어 손수 쓰고 새겨서 내걸었으나, 불행하게도 병란으로 불에 타버렸으므로 다시 써서 새기니, 때는 대한민국 60년 무오(戊午) 초여름이다.
4) 義契序癸巳
蘇山 安成煥 撰
古人於收族之道 無所不用其極 而其法要以密邇會合爲先 蓋人不相見 則情不接 情不接 則骨肉日疎 故必爲是以係固之爾 然貧富之不齊 亦其勢也 苟無設方而預待之 則吉凶之需 不虞之費 力不贍者 每不能無憾 而所係固者 或由以解散 此又義田義宅所爲起也 吾族同出敎官公者 見且四五十人率 窶乏不能爲禮 間有殊鄕而異井 歲時伏臘不復能相聚源源也 於是則相與病之人 出貲若干 裒以畀勤信能幹者 使之斂散而發其息 始以今年癸巳 期及十五年 迺得需用 蓋將上自丘壟 下至冠嫁凶喪 與夫卹難周窮 靡不品節以取具焉 每歲以十二月之四日 會于松梅之亭 考其籍記 因相勉以慈孝友恭 相勞以上下安否 又各隨其豐約 山肴野果 以供燕歡 自非甚有故 無或不與 約旣成 成煥揖長少而進之 曰凡吾人人者 各身其身 自敎官公視之 固皆一身之分也 欲其皆親而無疎 通其有無而無不平 宜無遠近賢不肖之殊矣 今不能然者 非夫人之罪歟 玆契之設 吾屬庶其免乎 雖然 事固難於善始 莫甚難於善終 而人情鮮不見利忘義 在座今日之志 能各保其久而不遷乎 久而遷 奈約何 身且不可保 能以遺之後乎 欲其無至是 是亦不可以他求也 今之約 旣奉體祖先之意矣 但能各檢其心 遇貪吝萌 則曰先公有是否 忿嫉起 則曰先公有是否 曰此於先公無害否 隨處隨時 常若祖先之嚴臨而在上 則雖欲求遷不可得 約之不守 非所憂矣 吾旣以祖先之心爲心 繼吾者又以吾之心爲心 則古人能事 將於是焉見之 而永遠無替 又復過之 吾屬盍相與圖諸 咸曰諾 俾成煥敍其意以冠其案 庶善者持循 不善者知所警焉
의계의 서문계사년(1893)
소산 안성환 지음
옛 사람이 종족을 모으는 방도에 대해 최선의 노력을 다 기울이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그 방법은 반드시 친밀하게 자주 회합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다. 대개 사람은 서로 만나보지 않으면 정(情)이 붙지 않고 정이 붙지 않으면 부모형제도 날로 소원해지기 때문에 반드시 단단히 묶으려 하였다. 그러나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가 일정하지 않은 것도 또한 피할 수 없는 형편이다. 만일 어떤 방도를 마련해서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경조사나 뜻밖의 재난으로 인해 필요한 비용에 대해 재력이 넉넉지 않은 자는 항상 근심을 품지 않을 수 없어, 단단히 묶어 놓은 것이 간혹 이로 해서 풀어져 느슨해지기도 하니, 이 때문에 또한 의전(義田)이나 의택(義宅)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 종족 가운데 교관공(敎官公: 안창훈)으로부터 함께 갈라져 나온 사람이 현재 40-50명 가량 되는데, 가난한 살림에 예법을 차릴 수 없어 간간이 고향을 떠나 떨어져 살다가 세시(歲時)와 복랍(伏臘)[세시는 설을, 복은 삼복(三伏)을, 납은 납일(臘日) 곧 동지 후 제 삼의 술일(戌日)을 말한다.]에도 서로 단란하게 모일 수 없게 되었다. 이를 서로 마음 아파한 사람들이 재물을 약간씩 모아 부지런하고 믿음 있고 일 처리에 능숙한 사람에게 주어 그로 하여금 사들이기도 하고 팔기도 하여 이자를 불리도록 하니, 올해 계사년(1893)부터 시작하여 15년에 이르기까지 용도에 충당할 수 있었다. 대개 위로는 선산이나 묘소로부터 아래로는 관례․혼례․상례 및 어려운 일이나 곤궁한 자를 구휼하는 데 차등을 세워 도움을 주지 않음이 없었다.
해마다 12월 4일에 송매정(松梅亭)에 모여 문서의 기록을 점검한 뒤, 서로 자애로움과 효성, 우애와 공경을 권면하고 서로 상하의 안부를 위로하였다. 또 각각 넉넉하면 넉넉한대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산에서 난 안주와 들에서 딴 과일을 가지고 와 잔치를 즐겼는데, 매우 다급한 사정이 아니면 모두 참여하였다.
약속이 정해지고 나서 성환(成煥)이 어른과 젊은 사람들에게 읍(揖)하고 나아가 말하기를, “무릇 우리들은 각자 자기의 몸을 갖고 살지만 교관공(敎官公)으로부터 보면 본래 모두 한 몸에서 갈라져 나왔으니, 다 친근히 대하여 소원함이 없게 하고 있고 없음을 살펴서 공평하게 나누고자 한다면, 마땅히 멀고 가까움, 어질고 어리석음의 차별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능히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사람들의 죄가 아니겠습니까? 이 의계(義契)를 만들었으니 우리들은 아마도 그걸 면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일이란 첫 발을 내딛는 것이 어려울 뿐 아니라 끝을 잘 마무리하는 것도 매우 어려운데, 사람의 마음은 이익을 보고 의리를 잊지 않은 자가 적으니, 여러분이 오늘의 뜻을 각각 오랫동안 간직하여 변치 않게 할 수 있을는지요? 세월이 흘러 변해버린다면 약속을 맺어본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자신도 간직할 수 없는데 하물며 이를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 마음을 없애고자 한다면 이 또한 다른 데서 구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의 약속은 이미 선조의 뜻을 삼가 본받는 것입니다. 다만 각각 자기의 마음을 점검하되 탐욕과 인색한 마음이 싹트면 ‘선조에게도 이런 마음이 있었던가’라고 물어보고, 분노와 질투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선조에게도 이런 마음이 있었던가’ 또는 ‘이런 마음이 선조에게 해가 되지 않겠는가’라고 물어봅시다. 어느 곳이나 어느 때나 항상 선조의 영령이 뚜렷이 임하여 위에 계신 듯이 여긴다면, 비록 변하고자 해도 그렇게 될 수 없고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도 걱정할 바 아닐 것입니다. 내가 이미 선조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고 나를 잇는 사람도 또한 나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는다면, 옛사람이 능히 했던 일을 장차 여기에서 볼 수 있고 영원히 변치 않는 마음도 또한 더 낫게 될 것이니, 우리들이 어찌 서로 이를 도모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모두 “그렇다”고 말하고, 성환(成煥)으로 하여금 그 뜻을 적어서 계안(契案)의 서문으로 삼아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에겐 항상 간직하여 행하도록 하고, 잘 지키지 않는 사람에겐 경계할 바를 알리도록 하였다.
5) 松梅亭記
松梅亭者何 我牛山先生手植 而梅溪公所築護者也 其數松一而梅八 其亭者何 職憂公所起 以遺其胤子五峰公者也 亭爲間者四 規後半爲室 行泉於松梅之間 注之庭而爲圓塘貯魚 用室之前半爲堂檻以臨之 挾以花石 圍以冬靑 其中無長物 惟古書一千卷 後人世守之 歲丁酉五峰公之五代孫鍾珉 益修其窓壁 幷及卉木陂砌之不如故者 旣乃聚族而語曰 松梅之隨先生而根于玆 非萬曆甲寅乎 亭之起 非其後之二百有四年丁丑而距今八十有一年乎 今亭幸無恙 松也梅也 已非當日之舊 而四祖遂不可以得見 凡祖吾祖而入於斯者 孰不悔然而興感 自今而日遠以至千百年之久 則亭之興廢 又不可保翼 屬與吾後 其將何以守諸 成煥曰果哉其難矣 雖然有一焉 彼松梅之存於今者 孰非當日之子根孫枝 則其遺澤依然故者也 吾屬雖微 均是四祖精神氣脈之所遺 以遺氣撫遺澤 朝夕而羹牆焉 雖謂其日臨而在玆可也 而亭待人者也 繼吾而老老者 果能以今日之心爲心 必能以今日之修爲修 則斯亭也 其庶幾乎 鍾珉曰可矣 曰猶未也 吾亭之爲吾亭 非謂有窓壁陂砌之謂也 正以先人之重而重焉爾 乃先人則又有所以重者存焉 萬一荒墜其所以者而推跡之循 卽高冠長袖日趨乎翼然奐然之間 吾未見其善守也 然則若之何 曰夫架上之紅綠其籤而埋吾頭者 非先人所畀以期無窮者歟 後人所爲嗣述 不其在是 是惟無求 求之則得 但使千百年之後登斯亭者 咸曰幸哉 詩書之澤不替 則斯可矣 鍾珉曰善夫此爲無文 盍次是語以諗同志 遂記
崇禎五丁酉流頭日 五峰公出後曾孫成煥 謹記
송매정의 기문
송매(松梅)란 무엇인가? 우리 우산(牛山: 안방준)선생이 손수 심고 매계공(梅溪公: 안후상)이 단(壇)을 쌓아 보호한 것이니, 그 숫자는 소나무가 한 그루요 매화나무가 여덟 그루이다. 정(亭)이란 무엇인가? 직우공(職憂公: 안창훈)이 세워서 맏아들 오봉공(五峰公: 안수록)에게 물려준 것이다.
정자는 네 칸으로 지어졌는데, 그 뒤의 두 칸을 나누어 방을 만들고, 소나무와 매화나무 사이로 샘물을 흐르게 하여 뜰로 끌어대고 거기에 둥근 연못을 만들어 물고기를 담았다. 방 앞의 두 칸으로 마루를 만들고 난간을 달았으며 꽃과 돌로 치장하고 동청(冬靑, 여름에 황백색 꽃이 피는 감탕나무. 동청(凍靑)이라고도 함.)으로 둘러쳤다. 그 가운데서 쓸모 없는 물건은 없었으나, 고서(古書) 1천 권만은 후세 사람들이 대대로 지켜왔다.
정유년(1897)에 오봉공의 5대손 종민(鍾珉)이 다시 정자의 창문과 벽과 꽃과 나무와 연못과 섬돌 중에서 옛날의 모습과 같지 않은 것을 보수하였다. 그리고 나서 곧 일가들을 모아놓고 말하기를, “저 소나무와 매화나무가 선생을 따라 여기에 뿌리를 내린 것이 만력(萬曆) 갑인년(광해군 6, 1614)이 아닙니까? 정자의 건립은 그 후 204년이 지난 정축년(순조 17, 1817)에 이루어졌으니, 지금까지 81년이 지나지 않았습니까? 지금 이 정자는 다행스럽게도 아무 탈이 없지만, 소나무나 매화나무는 이미 옛날의 그 모습이 아니고 게다가 네 분 선조(우산 선생, 매계공, 직우공, 오봉공을 말함.)를 뵈올 수 없으니, 우리 선조를 할아버지로 여기고 이곳에 참석한 사람이라면 누군들 서글픈 감정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오늘부터 시간이 흘러 천백 년의 먼 훗날에 이르렀다고 해 봅시다. 정자의 흥망성쇠를 또한 보장할 수 없을 것이니 우리 문중과 후손들은 장차 어떻게 이를 수호해야 합니까?”라고 했다.
성환(成煥)이 말하기를, “과연 그렇지. 참으로 어려운 일일세. 그렇긴 하나 한 가지 방법이 있네. 오늘까지 보존된 저 소나무와 매화나무는 당시부터 ‘자손처럼 뿌리와 가지를 친 나무’(子根孫枝)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그 유택(遺澤)은 여전히 옛 모습대로 남아있는 것일세. 우리 문중이 비록 미약하긴 하나, 우리 모두 네 분 선조의 정신(精神)과 기맥(氣脈)을 물려받았으니, 물려주신 뜻을 잘 새겨서 그 유택(遺澤)을 어루만지며 아침저녁으로 흠모하고 추앙한다면, 그 해가 비쳐서 여기에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네. 더구나 정자는 사람의 보호를 기다리는 것이니, 우리들을 이어서 대대로 오늘과 같은 마음으로 마음을 다지고, 오늘처럼 보수하는 노력으로 보수를 계속할 수 있다면, 이 정자는 아마도 괜찮을 것이네”라고 했다.
종민은 “옳은 말씀이지만 그래도 미심쩍습니다. 우리 정자가 정자의 가치를 지니는 것은 창문이나 벽이나 연못이나 섬돌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바로 선인(先人)들이 소중히 여긴 뜻으로 이를 소중히 여길 뿐입니다. 선인들께 또한 ‘소중히 여긴 까닭’이 있을 것이니, 만의 하나라도 그 소중히 여긴 까닭을 버리고 오직 발자취만 따른다면, 이는 곧 높다란 관을 쓰고 긴소매의 옷을 입고서 날마다 ‘새가 날개를 펼친 듯’(翼然) ‘성대히 빛나는 듯’(奐然)한 정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꼴이니, 저는 이를 두고 잘 수호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대답하기를 “저 시렁 위에 붉고 푸른 쪽지를 붙여 머리를 묻어버린 것(아마도 송매정 시렁에 보관된 ‘책’을 말한 듯함.)은 선인들이 우리에게 내려주어 무궁토록 공부하기를 기대한 것이 아닌가? 후인이 이어받아 기술할 것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는가? 이는 오직 구함이 없었을 뿐 구하면 얻을 수 있네. 다만 천백 년이 지난 뒤에 이 정자에 오른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다행스럽게도 현명한 후손이 있었구나!’라고 말하게 해야 할 것이니, 이렇게 할 수 있다면 괜찮을 것이네”라고 했다.
종민이 “좋은 말씀입니다. 이곳에 예로부터 글(기문)이 없었으니 어찌 이 말을 기록하여 ‘뜻을 같이하는 사람’(同志)에게 알리지 않으리요?”라고 청하였다. 그래서 이렇게 적는다.
숭정(崇禎) 후 오정유(五丁酉: 1897년) 유두(流頭: 6월 보름) 날에 오봉공(五峰公)의 출후증손(出後曾孫) 성환(成煥)이 삼가 적음.
6) 松梅亭重建記
隱峰安文康先生 當昏朝嘉遯于寶城 入夢中所得之牛山 築壇種孤松八梅 左右圖書 若將終身 盖梅取氷質凍蘂 懷貞姸保寒香 羞與桃李媚春色 松則生意殆盡而屹立不僵 如志士仁人 更歷變故 而剛毅獨立 凜然不衰者也 先生之寓意深矣 壇歲久頹圮 後孫處士職憂公 修築而新之 就其西北數步地 鑿塘引水植蓮 起亭于塘上 扁以松梅 而胤子五峰先生 恒處斯亭 以寓羹牆之慕 啓門講道 無復當世之意 若先生之明靈 儼若陟降之蚤夜于玆者也 五峰公後孫 世守而嗣葺之 不幸灰燼於己丑禍燹 甲午仲春 圭湜氏與鍾箕倡諸族 因舊址重建三架五梁 瓦墁甃礎 不侈不陋 視前增倍恢然而裕矣 經史子集 溢宇充棟 以資子姓講習 箕弓裘治 篤業而勿失墜 思有以無忝其先德 足爲五峰公之永有後不棄基也 今夏余登斯亭 而不覺志氣灑落 而想先生霽月光風之淸德 後孫肯構趾美之懿行 怡然神會 而未嘗不三致意也 圭湜氏使永善一言記之 嗣孫思淳又申之 永善蕪識不文 懼不敢爲役於先賢遺躅 噫 今天下陰而晦矣 禮義倫常 掃地盡而淪焉爲翔走 痛矣其慘也 後生小子之益加勉學 誠至而不透 則天意悔禍 終始雷陽之不遠而復也 余願居斯亭者 忠信惇篤 立循理之基 莊肅齊一 立明理之本 以至左右逢源 果行育德 則先生之心之學之有傳有守於無窮 而五峰公之純孝正學 盖與之增光矣 嗚呼 道之不明不行於天下 而士無所於歸矣 余於斯亭 不能不爲之咨嗟興感 而爲安氏諸公勗焉 謹書此以須之
時上章困勉重陽節 後學高興柳永善 敬書
송매정을 다시 건립한 뒤 붙인 기문
은봉(隱峰) 안문강(安文康) 선생은 광해군의 혼란한 조정을 만나 보성으로 숨어들었는데, 꿈속에서 우산(牛山: 소뫼)을 얻어 단(壇)을 쌓아 소나무 한 그루와 매화 여덟 그루를 심고 좌우에는 책을 쌓아놓고서 마치 세상을 마치려는 듯했다. 대개 매화나무는 자태가 얼음처럼 깨끗하고 꽃술은 얼어붙었으나 올곧은 아름다움을 품고 차가운 향기를 지니면서 복숭아나 오얏과 더불어 봄빛을 아첨하기를 부끄러워하는 뜻을 취했고, 소나무는 생명에 대한 의지가 거의 소진되어 가는 시절에도 우뚝 서서 쓰러지지 않는 모습이 마치 지사(志士)와 인인(仁人)처럼 변고를 겪으면서도 꿋꿋이 홀로 서서 늠름하게 시들지 않는다는 뜻을 취했으니, 선생이 은연중에 가탁(假託)한 뜻이 깊다 할 것이다.
단(壇)이 세월이 오래되어 허물어지자, 후손 교관공(敎官公, 직우당(職憂堂) 창훈(昌勳)은 사후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추증되었다.)이 보수하여 새롭게 단장하고 서북쪽으로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다 조그만 연못을 파고 물을 끌어들여 연꽃을 심었으며, 연못 위에다 정자를 지어 ‘송매(松梅)’라고 편액을 달았다. 맏아들 처사(處士) 오봉공(五峰公: 안수록)은 항상 이 정자에 거처하면서 선조를 흠모하는 마음을 덧붙였으며, 문을 닫고 도(道)를 강론하느라 세상을 경륜할 뜻을 보이지 않았으니, 마치 선생의 밝은 영혼이 엄연히 이곳에 조석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듯했다.
오봉공의 후손들이 대대로 지키면서 수리를 해 왔으나 불행하게도 경인년(1950)의 화재로 불타버렸다. 을미년(1955) 봄에 규식(圭湜)씨와 종기(鍾箕)가 여러 일가들을 불러모아 옛 터에다 3가5량(三架五梁)으로 중건하니, 흙을 바른 기와나 초석을 놓은 돌이 사치스럽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았으며, 이전의 정자보다 곱절이나 확장되어 넓고 넉넉하였다. 경전(經傳)․사서(史書)․제자(諸子)․문집(文集)이 방안에 그득하여 자손들의 강습(講習)을 돕고, 가업을 이어 독실히 학문하여 실패하지 않으니 선조의 음덕에 누가 되지 않기를 생각한 것이다. 이를 위해 오봉공은 오래도록 후손을 두어 이 터를 버리지 않도록 한 것이다.
금년 여름에 나는 이 정자에 올랐는데 저절로 뜻과 기운이 상쾌해 졌다. 선생의 제월광풍(霽月光風, 비가 갠 뒤의 바람과 달이란 뜻으로, 깨끗하고 맑은 마음을 비유함. 송사(宋史) 「주돈이전(周敦頤傳)」에서 “인품은 매우 고결하고 마음은 쇄락(灑落)하였는데 마치 광풍제월(光風霽月)과 같았다”고 했다.) 같은 맑은 덕과 후손의 긍구지미(肯構趾美, 긍구(肯構)는 긍구긍당(肯構肯堂)의 준말로, 아비가 업(業)을 시작하고 자식이 계승함을 비유.)의 아름다운 행실을 우러러 생각하면서 화락한 정신으로 내 뜻을 거듭 전하지 않음이 없었다. 규식씨가 영선(永善)으로 하여금 한 마디를 기록하도록 하고 사손(嗣孫)인 사순(思淳)도 또한 신신당부했지만, 영선은 아는 게 부족하고 문장에 능하지 못하여 두려운 마음에 감히 선현의 유촉(遺躅)에 글 짓는 일을 하지 않았다.
아! 오늘날 천하는 그늘지고 어두워졌다. 예의와 윤리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은 짐승처럼 변해가니 그 참혹한 재앙이 가슴 아프다. 젊은 후학들이 한층 학문에 힘써 지극한 정성으로 돌을 뚫을 수 있다면, 하늘의 뜻도 재앙을 뉘우쳐 우레와 같은 양(陽)의 기운이 머지 않아 돌아올 것이다. 내 소원은 이 정자에 거처하는 사람들이 진실하고 믿음이 있으며 순후하고 독실한 몸가짐으로 순리(循理)의 기초를 세우고, 장중하고 엄숙하며 가지런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명리(明理)의 근본을 세워서, 좌우의 모든 사물을 학문의 자원으로 삼고 과단성 있는 행동으로 덕을 기른다면, 선생의 마음과 학문은 영원히 전해지고 지켜질 것이며, 오봉공의 순수한 효성과 올바른 학문은 그와 더불어 더욱 빛을 더할 것이다.
아! 도(道)가 밝지 못해 천하에 행해지지 못하니 선비들은 의지할 곳이 없다. 나는 이 정자를 보고 탄식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으며 안씨 여러분께 노력하기를 권면한다. 삼가 이러한 뜻을 적어 보낸다.
상장 곤돈(上章困敦: 경자년, 1960) 중양(重陽) 절기에 후학(後學) 고흥(高興) 유영선(柳永善)이 삼가 씀.
7) 謹次晦翁賦梅韻咏松梅壇事實幷小序
五峰 安壽祿 撰
昔我隱峰先生 當光海甲寅 上則東朝幽廢 下則師門誣衊 遂決遯世自靖之計 大歸夢中所得之牛山 築壇種孤松八梅 左右圖書 若將終身 今之所謂松梅壇者 是已 其後梅則隨枯隨補 松則去三甲寅 忽然自枯 政晦翁所謂 生意殆盡 而屹立不僵 如志士仁人 更歷變故 而剛毅獨立 凜然不衰者也 壇亦傾圮 去甲寅年間 我家君修築新之 且就壇下西北偏數步地 鑿小塘種蓮 方欲於塘上作亭數椽 扁以松梅 而今姑未就 昔程子作顔樂亭銘曰 水不忍癈 地不忍荒 嗚呼正學 其何可忘 凡爲我先生後孫者 其於此當共勉乎桑梓之敬 而尤可不盡心於所嘗用力之正學也耶
회옹(주자)이 매화를 노래한 시의 운을 삼가 빌려서 송매단의 사실을 읊다짤막한 서문을 덧붙임
오봉 안수록 지음
옛날 우리 은봉(隱峰)선생이 광해군 갑인년(1614)에 위로는 동조(東朝, 황태후(皇太后)나 왕대비(王大妃)를 일컫는데, 여기서는 인목대비(仁穆大妃)를 말함. 한(韓)나라 때 태후(太后)가 미앙궁(未央宮)의 동쪽 장락궁(長樂宮)에 거처하였으므로 태후를 ‘동조’라 칭하기 시작함.)가 유폐되고 아래로는 스승(우계 성혼)이 모함을 당하자, 마침내 세상을 피해 살면서 자신의 지조를 깨끗이 하려는[遯世自靖] 계획을 결정하고 꿈에 얻은 우산(牛山) 땅으로 돌아왔다. 선생은 단(壇)을 쌓아 소나무 한 그루와 매화 여덟 그루를 심고 좌우에 도서(圖書)를 비치하여 마치 생을 마치려는 듯하였으니, 오늘날 이른바 송매단(松梅壇)이 바로 이것이다.
그 뒤 매화는 말라죽는 대로 곧 보충하여 심었고, 소나무는 지난 3갑인년(정조 18, 1794)에 갑자기 저절로 말라죽으니, 바로 회옹(晦翁: 주자의 호)이 이른바 “생명에 대한 의지가 거의 소진되어 가는 시절에도 우뚝 서서 쓰러지지 않는 모습이 마치 지사(志士)와 인인(仁人)처럼 변고를 겪으면서도 꿋꿋이 홀로 서서 늠름하게 시들지 않는” 모습이다.
단(壇)도 역시 허물어져 지난 갑인년 무렵에 우리 아버지가 새로 보수하여 쌓고, 또 단 아래 서북쪽으로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다 조그만 연못을 파서 연꽃을 심었다. 바야흐로 연못 위에다 두어 칸 정자를 짓고 ‘송매(松梅)’라는 편액을 달고자 하였으나, 아직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옛날 정자(程子)는 「안락정(顔樂亭)」의 명(銘)[「안락정」은 『이정전서(二程全書)』 권38, 「외서(外書)」에 실려있는 정명도(程明道)의 시(詩)인데, 그 시의 끝 부분에다 명(銘)을 붙인 것이다.]을 지어 말하기를, “물도 차마 버릴 수 없고 땅도 차마 묵힐 수 없거늘, 아! 올바른 학문[正學]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무릇 우리 선생의 후손이 된 자들은 이 점에서 마땅히 함께 조상의 유물을 공경하기에 힘써야 하고, 더구나 일찍부터 힘을 기울여온 올바른 학문[正學]에 마음을 다 쏟지 않을 수 있겠는가?
황폐한 마을에 심은 몇 그루 솔과 매화 數株松梅寄荒村
전인의 미덕을 추억하니 절로 마음 상하네 追想前徽暗傷魂
선생은 옛날 지조가 없어지던 날을 당해 先生昔當蔑貞日
나라에 인륜이 어두워짐을 아프게 생각했지 痛念家國彛倫昏
꿈에 얻은 깨끗한 땅으로 훌훌 떠나가니 夢中眞境決長往
천지 가득한 풍파도 깊은 산촌엔 잠잠했네 滿天風露淸幽園
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산은 높고 높은데 有水源源山嶷嶷
아담한 송매단 맑고 시원해 세상사 잊누나 小築瀟灑忘寒溫
복희가 그린 매화는 섣달 눈을 능멸하고 梅列羲畵凌雪臘
도연명이 어루만진 솔은 아침 햇살 펼치네 松立陶撫排霜暾
이백 년을 내려오며 황폐하지 않은 땅에 二百年來不荒廢
아직도 시례(詩禮)를 전하는 가문이 있지 尙有詩禮傳家門
선비들 임금께 고하여 도가 더욱 드러나니 多士叫閽道彌彰
차례로 벼슬과 시호 내리는 은전이 있으리 次第爵諡垂恩言
언제일까. 연못 가에 띠 집을 엮어서 何日臨池茅棟成
옛 학문 연구하며 거문고와 술을 즐길 날이 溫理舊學開琴樽
8) 송매정의 원운(原韻)
송매정을 짓고 삼가 회옹의 백록동 낙성운을 빌리다
[松梅亭成謹次晦翁白鹿洞落成韻]
옛날 시냇가에 쌓은 단을 떠올리는데 憶曾幽築傍溪成
꽃 아래 찬 물은 꼬불꼬불 흐르며 우네 花下寒流曲曲鳴
아직도 시내 굽이엔 조상의 체취 남았으니 尙有澗阿餘體勢
어찌 집 지으며 참 마음을 표하지 않으리 詎無堂構表心誠
버들 바람․오동나무 달에도 정신이 있고 柳風梧月精神在
뜰 국화․못의 연꽃에도 색깔이 피어나네 階菊池荷色態生
방 가득한 도서에 진정 활로가 있으니 滿壁圖書眞活計
다리 끊고 중을 막아 맹약을 굳게 지키세 斷橋閑釋好尋盟
숭정 후 4정축(1817) 한여름에 崇禎後四丁丑仲夏
주인 안수록 지음 主人稿
9) 송매정 원운을 빌려 지은 시(詩)들
(1) 삼가 송매정 원운을 빌리다[謹次松梅亭韻]
은봉의 어진 후예들 유지를 따라 정자 짓고 隱峰賢裔克遵成
송매의 뜻 본받아 학문으로 명성 드날렸네 志取松梅以學鳴
얼어붙은 겨울에 굳센 기운이 없었다면 不有凍天嚴勁氣
어디에서 참되고 정성스런 마음을 보랴 却於何處見眞誠
옛적 편액을 걸던 깊은 뜻이 여기에 있어 伊昔揭扁深意在
오늘 조상의 업 이으니 더욱 빛이 발하네 如今肯構倍輝生
어두운 북녘의 구름이 온 누리 드리울 제 漠北頑雲垂八宇
이 정자와 더불어 세한의 맹세를 지키리라 斯亭同守歲寒盟
은진 송병선 지음 恩津宋秉璿
(2) 삼가 송매정 원운에 화답하다[奉和松梅亭韻]
후손을 가르칠 큰 생각으로 정자를 짓고서 牖後遠謨亭以成
닭이 울 때까지 밤마다 경전을 연구하네 硏經夜夜趁鷄鳴
암혈에서 귀를 씻으니 속티 벗음을 알고 奇巖洗耳知超俗
옛 거울로 마음 닦아 진실함을 발휘하네 古鏡磨心可用誠
온 골짜기의 솔 파도는 바람 속에서 일고 滿壑松濤風裏起
한 창문의 매화 그림자는 달 속에서 생긴다 一窓梅影月中生
오봉이 남긴 기풍으로 영걸․준재도 많아 五峰遺響多英俊
대대로 선비 가문으로 옛 맹세를 이어가리 世世儒門續舊盟
화돈 전우 지음(미처 다듬지 못한 글임). 자필 華遯田愚未定稿 自筆
(3) 초당에서 현판의 원운을 빌리다[艸堂次板上韻]
백년 전 호수 왼쪽에 이 집을 지으니 百年湖左此堂成
원숭이․학이 문득 시냇가에서 울었네 猨鶴翛然溪澗鳴
대대로 시골집에 살며 중엄(仲淹)을 따르고 歷世田廬追仲淹
사람을 금석에 비추어 명성(明誠)을 적네 照人金石記明誠
산이 비어 계수나무엔 옥 거문고 소리 끊어지고 山空桂樹瑤絃斷
달이 차가워 매화엔 쇠 피리 소리가 나는구나 月冷梅花鐵笛生
나를 굽히지 않고 한 줌의 향을 피우면서 不枉下吾香一瓣
후손들 아직도 갈매기와 맹세를 지킨다네 雲孫尙保白鷗盟
병신년(1896) 유화(음력 7월) 절기에 丙申流火節
황현 삼가 지음 黃玹謹稿
중엄(仲淹): 북송(北宋) 초기의 명재상이요 의장(義庄)을 만들어 종족을 보살폈던 범중엄(范仲淹)을 말함. 자(字)는 희문(希文), 벼슬이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고 죽은 뒤에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왔고 공자(孔子)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송원학안(宋元學案) 권1을 보면 “선생은 안으로는 강직하고 밖으로는 부드러웠으며 뭇사람을 사랑하고 선행을 즐겼다. 베풀기를 좋아하여 마을에 의장(義莊)을 설치하고 일가 종족들을 넉넉하게 보살피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의 이름을 일컫기를 좋아하였다”고 적혀있다.
(4) 송매정 시를 차운하여 주인 민옥 씨에게 주다[松梅亭板韻次贈主妙民玉甫]
이 집이 일찍이 꿈속에서 이루어져 此屋曾從夢裏成
시냇물 흐르는 소리 지금까지 울리네 溪流不斷至今鳴
가래나무․뽕나무를 어찌 공경할 뿐이랴 梓桑豈止斯須敬
꽃과 돌도 잘 지켜 정성스레 보호하리 花石留看戒護誠
연못 고기 솟구치니 가을 연꽃이 맑고 潭魚對擲秋荷淨
산새가 지저귀니 봄 풀이 피어오른다 山鳥數聲春草生
삼지(三芝) 캐며 저문 해를 상심하니 爲採三芝傷歲晩
누가 다시 참여하여 약속을 맺을꼬 參同誰復契中盟
중광 적분약(1901) 동지 하순에 重光赤奮若南至下浣
임정 정운오 지음 臨汀鄭雲五
민옥: 후송(後松) 안종민(安鍾珉)의 자(字)임.
가래나무․뽕나무: 옛날에는 담 아래에다 뽕나무와 가래나무를 심어 자손에게 물려줌으로써 생계의 자료로 삼게 하였는데, 자손이 이를 보면 부모의 유물임을 알아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킨다는 뜻. 전(轉)하여 향리의 주택 또는 고향을 일컫기도 함.
삼지(三芝): 영초(靈草) 또는 선초(仙草)로 알려진 운지(雲芝)․수지(水芝)․토지(土芝)를 말함.
(5) 삼가 송매정 원운을 빌리다[敬次松梅亭韻]
옛적에 쌓은 송매단에 정자를 새로 짓고 松梅壇古屋新成
유허에 숨어 지내니 골짜기가 진동하네 薖軸遺墟澗壑鳴
손수 심어 북돋은 두터운 교훈을 전하여 尙傳手澤栽培厚
이손이 가업으로 지은 정성을 경하하네 爲賀耳孫肯構誠
동산에 숲은 이미 명현을 따라 무성하고 園林已逐名賢好
산에 나무는 일찍이 야기로 인해 생장했네 山木曾因夜氣生
고가의 시례(詩禮)에 선조의 가르침 있으니 故家詩禮貽謨在
남녘의 선비들이 이를 맹주로 삼으리라 南紀斯文是主盟
무인년 늦여름에 사촌산인 지음 黃虎季夏沙村散人稿
이손: 현손(玄孫)의 아들 곧 5대손을 말하는데 고조․증조와 점차 멀어지면 얼굴은 볼 수 없고 다만 귀로 듣는다는 뜻에서 이손(耳孫)이라 함. 내손(來孫)과 같은 뜻. 참고로 6대손은 곤손(昆孫), 7대손은 잉손(仍孫), 8대손은 운손(雲孫)이라 함.
(6) 삼가 송매정 원운을 빌리다[敬次松梅亭韻]
주인의 온화한 기상은 자연스레 이루어지고 主翁和氣渾天成
연못을 높이 내려다보니 콸콸 물소리 울리네 軒枕方塘活水鳴
백발 노인은 초당에서 후손의 학업을 드리우고 鶴髮草堂垂後業
우산의 옛 터에서 선조의 정성을 흠모하네 牛山古址慕先誠
가슴 속 바람과 달은 둘 다 아름다움 뽐내고 襟懷風月全雙美
몸으로 행하는 가법과 글은 평생을 만족케 하네 身計法書足一生
또 송매의 만년의 외로운 절개를 보노라니 且看松梅孤節晩
그대 너그러이 숨어 마음으로 맹세함을 알겠네 知君肥遯定心盟
정해년 9월 하순에 하우당 지음 丁亥菊月下浣 下友堂
(7) 삼가 송매정 원운에 화답하다[奉和松梅亭韻]
은거지 곁에다 조그만 단(壇)을 쌓았는데 爲傍菟裘小築成
선생이 떠난 뒤에도 샘물 소리가 울리네 先生去後枕泉鳴
만년의 절개 품은 소나무는 심어 북돋은 힘이요 松苗晩節栽培力
남은 향기 머금은 매화는 사랑해 보호한 정성이라 梅挹餘香愛護誠
글소리 밤을 여니 산에는 달이 떠오르고 經笈夜開山月在
낚싯줄 아침에 떨치니 시내엔 구름이 이네 釣絲朝拂澗雲生
그대 집은 본래 고귀한 가업을 이었으니 君家自有靑氈業
원숭이나 새도 응당 옛 맹세를 알리라 猿鳥惟應識舊盟
용집 계미년 중추절에 龍集癸未仲秋
기헌노창 삼가 지음 寄軒老傖謹稿
용집: 용성(龍星) 곧 목성(木星)의 별자리가 일년에 한 번씩 깃 드는 일. 곧 세차(歲次)를 이름. 집(集)은 차(次)의 뜻.
(8) 송매정 시를 차운하여 안자옥에게 부치다[松梅亭次寄安子玉]
소 뿔 같은 이 정자를 누가 지었나 苽牛一角是誰成
집안 가득한 솔․매화에 옛 비를 뿌리네 滿院松梅舊雨鳴
장후(蔣詡)의 정원에는 오히려 길이 있었고 蔣詡園林猶有逕
양공(楊公)의 집안은 대대로 충성을 전하였지 楊公家世共傳誠
배가 도는 강 여울에 가을 빛이 솟구치고 漕回江瀨秋光聳
발처럼 걷히는 산 구름에 밤 기운이 생동하네 簾卷山雲夜氣生
승냥이․범이 많아 갈매기․백로 멀리 떠나니 豺虎政多鷗鷺遠
백년 전 첫 맹세를 저버려 매우 부끄럽구려 百年深愧負初盟
오천 정해만 지음 烏川鄭海晩
장후(蔣詡): 한(漢)나라 두릉(杜陵) 사람으로 자는 원경(元卿). 애제(哀帝) 때 연주자사(兗州刺史)가 되었으나 왕망(王莽)이 섭정(攝政)하자, 병을 핑계로 삼아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문 밖을 나서지 않았다. 일찍이 집 앞 대나무 숲 아래에 세 갈래 오솔길을 만들었다고 한다.
(9) 삼가 송매정 어른의 원운을 빌리다[敬次松梅亭丈丈韻]
어느 날 슬그머니 초가집을 짓고 一日居然草閣成
솔․매화의 옛 흔적을 시로써 읊었지 松梅往迹以詩鳴
국과 담에 선현을 흠모하는 마음 펼 수 있고 羹牆可寓先賢慕
쌓은 단(壇)에서 후손의 정성을 보겠네 壇築從看後裔誠
대나무 섬의 맑은 바람 거문고 위에서 움직이고 竹嶼淸風絃上動
연 못의 가을달은 거울 속에서 솟아오른다 蓮塘秋月鏡中生
주인 어른은 자연의 멋에 흠뻑 젖어 主翁剩得溪山趣
물고기․새와 이웃하기로 맹세를 하였다네 魚鳥爲隣好結盟
경술년(1850) 중추절 상순에 庚戌仲秋上澣
정환필 삼가 지음 鄭煥弼謹稿
국과 담: 사모하는 마음을 펼만한 곳. 『후한서(後漢書)』 「이고전(李固傳)」을 보면, “옛날 요(堯) 임금이 죽은 뒤, 순(舜) 임금은 3년 동안 추앙하여 사모했는데, 앉으면 요임금을 담장[墻]에서 보고 밥을 먹으면 국[羹]에서 보았다” 하였다.
(10) 삼가 송매정 현판의 원운을 빌리다[敬次板上韻]
솔․매화 남은 터에 대 이어 정자를 지으니 松梅遺址肯堂成
시례(詩禮)의 가풍이 길이 대대로 울렸네 詩禮家謨永世鳴
꿈에서 터 잡을 당시 별장을 열었는데 占夢當年開別業
띠 풀을 베어 언제나 깊은 정성을 펴볼꼬 誅茅何日展深誠
대부의 곧은 절개에 구름은 천 발이나 일고 大夫直節雲千丈
고사의 맑은 마음에 달이 한 번 떠오르네 高士淸標月一生
아름답게 받아주니 덕을 배양하는 뜻이요 驚廈納美培德意
그대 조상 이어 옛 맹세 실천함을 알았네 知君繼述踐前盟
신미년이 저물 무렵에 정조원 지음 辛未暮 鄭祚源
(11) 삼가 송매정 원운을 빌리다[謹次松梅亭原韻]
옛날 지어진 산중의 맑은 정자를 축하하러 淸淨山樓賀舊成
가까운 사람 조용한 새가 절로 찾아와 우네 近人幽鳥自來鳴
솔은 겨울의 푸름을 머금어 절개를 온전히 하고 松含晩翠能全節
연은 남은 붉은 빛 지키며 참 마음을 드러낸다 蓮守殘紅底效誠
낮에 크는 관아 버들엔 천가지 바쁜 일 모이고 晝長官柳千忙集
한해 늦은 물가 난초엔 백가지 후회가 생기네 歲晏汀蘭百悔生
나 또한 예전에 서호에서 오래 머물렀지만 我亦西湖曾久住
지금엔 꿈에도 갈매기와 노니는 맹세를 한다오 至今夢作狎鷗盟
청전의 유생 이학래 삼가 드림 靑田生李鶴來盥呈
서호: 강 이름. 서울의 서강(西江)을 달리 이르는 말. 또는 수원(水原)에 있던 호수 이름.
(12) 송매정 시를 차운하여 오봉 안형에게 드리다[次松梅亭韻呈五峯安兄]
옛터에 이름난 정자를 대를 이어 지으니 舊址名亭肯構成
높은 소나무 늙은 매화 가에 샘물이 흐르네 松喬梅老玉泉鳴
고기가 대나무 섬에서 노니 그 즐거움을 보고 魚遊竹嶼觀其樂
손님이 꽃 그늘에 이르니 정성으로 대접하네 客到花陰接以誠
맑은 의견 내세워 성인 세상을 잊은 적 없고 淸議未嘗忘聖世
경전을 궁리하며 곧장 한평생 보내려 하네 窮經直欲送平生
내 살 곳을 고른다면 여기가 좋으련만 吾如擇里於焉可
세파에 나부껴 맹세를 저버릴까 두려워라 但恐飄蓬竟負盟
이병규 여구가 삼가 지음 李秉規汝矩謹題
(13) 삼가 아버지의 송매정 원운을 빌리다[敬次家君松梅亭韻]
솔․매화 어우러진 정자를 새로이 짓고 松梅堂起落新成
물 따라 울리는 거문고 소리 조용히 듣노라 靜聽絃歌水以鳴
마음에 흠뻑 배인 향기는 세 겹의 악보요 馥馥心藏三疊譜
뼈처럼 우뚝 솟은 정자는 백 년의 정성이네 亭亭骨立百年誠
혼란한 세상 꿈속에서 아름다운 터를 잡고 夢中風露占佳境
벽에 가득 책을 갊아 후생들을 가르치네 壁上圖書詔後生
남녘의 강과 산에 원기(元氣)가 쌓이니 南斗江山元氣積
가문에 전해온 시례(詩禮)를 지키길 맹세한다 傳家詩禮守前盟
아들 명윤 삼가 지음 子命允謹稿
(14) 삼가 할아버지의 송매정 원운을 빌리다[敬次王考松梅亭韻]
기억하지 아이 적에 지어진 이 정자 記憶兒時此屋成
여전히 시냇물 흘러들어 연못을 울리네 溪流依舊入塘鳴
시내 가엔 아직도 재배한 흔적 남았으니 尙留澗畔栽培澤
꽃이 만발하면 늘 흠모의 마음 간절하다 每切花陰感慕誠
만 권의 시와 글을 후손에게 물려주고 萬軸詩書貽後裔
바람 이슬이 하늘 가득할 제 선생을 꿈꾸리 一天風露夢先生
마음 공부를 이어받은 가정의 학문 心工相襲家庭學
당시 은근한 맹세를 저버릴까 두렵네 恐負當年辟咡盟
불초 손자 형수 삼가 지음 不肖孫瑩洙謹稿
(15) 삼가 증조의 송매정 원운을 빌리다[敬次曾王考松梅亭韻]
솔․매화를 아끼려 이 정자를 지으니 爲惜松梅此屋成
시냇물 단(壇) 가를 돌아 베갯머리 울리네 澗廻壇畔枕頭鳴
지금도 나무 심어 북돋은 흔적이 남았으니 至今尙有栽培澤
옛날처럼 어찌 추앙하는 정성이 없으랴 倣古那無景仰誠
꿈에 얻은 시내와 산에다 별장을 만들고 夢裏溪山開別業
산수의 경치와 어울려 내 인생을 즐기네 箇中泉石樂吾生
고기 보고 대나무 심는 건 오히려 취미이니 觀魚種竹猶餘事
만 권의 시와 글로 영원히 맹세하리 萬𨋀詩書世世盟
불초 둘째 증손 인환 지음 不肖次曾孫寅煥
(16) 삼가 증조의 송매정 원운을 빌리다[敬次曾王考松梅亭韻]
대대로 내려온 가업을 고귀하게 지키니 世業從來貴守成
이 산의 멋진 나무도 지명으로 인해 울리네 此山美木地因鳴
그윽한 향기 퍼뜨려 술과 시흥을 돋구고 暗香遺與觴吟趣
늘그막 절개 지켜 보호하는 마음 드러내네 晩節維持愛護誠
매축과 근편은 우정을 더욱 도탑게 하고 梅𨋀芹篇增契篤
연공과 담묵은 빛을 한층 발하게 한다 淵笻潭墨倍輝生
하늘 가득한 바람 이슬은 옛날과 같으니 滿天風露今依古
일장춘몽일런가 뉘라서 이전의 맹세를 알리 一夢誰知是宿盟
불초 셋째 증손 기환 삼가 지음 不肖三曾孫琦煥謹稿
매축과 근편: 매축(梅軸)은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이 오봉에게 준 시를 뜻하고, 근편(芹篇)은 근와(芹窩) 김희(金憙)가 오봉에게 보낸 편지를 뜻한다.
연공과 담묵: 연공(淵笻)은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이 우산 땅을 찾아온 일을 말하고, 담묵(潭墨)은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가 오봉에게 써준 글씨를 말한다.
(17) 삼가 오봉부군의 원운을 빌려 스스로 경계하다[敬次五峯府君原韻自警]
후손들 장차 이 터를 어찌 지켜나갈꼬 來裔將何答守成
바람맞은 난간 아래로 구슬같은 시냇물 흐르네 風欄依舊玉溪鳴
부처의 은혜 갚는 길은 묵은 사찰을 받드는 것 佛恩報在奉塵刹
성인의 교훈 따르려면 경과 성을 찾아야만 하리 聖訓要須尋敬誠
늙은 솔은 공중에 늘어서 학이 울길 기대하고 松老參天期鶴唳
마른 매화는 눈 맞으며 꽃이 피길 기다린다 梅枯經雪待花生
우리 집안 옛 유물이 어찌 여기에서 그치랴 吾家故物寧斯止
다시 평천(平泉)을 웃어보며 간절히 맹세하네 還笑平泉淺切盟
정자가 지어진 뒤로 97년이 지난 맑은 가을에 亭成後九十七年高秋
불초 5대손 종민 삼가 지음 不肖來孫鍾珉謹稿
(18) 삼가 송매정 원운을 빌리다[謹次松梅亭韻]
일찍이 궁벽한 땅을 잡아 목미암 지었는데 曾卜幽居木美成
송매정이 또 빙월정과 함께 명성 드날리니 松梅又與月亭鳴
어진 조상이 열어준 두터운 가르침을 알겠고 從知賢祖開來篤
유약한 후손의 가법 잇는 정성을 깨닫겠네 始覺孱孫繼往誠
옹기종기 모인 봉우리들 뒷 산에 솟아있고 簇簇羣峰聯後立
넓고 가득한 호수 물은 눈 앞에서 출렁댄다 洋洋住水直前生
흔들리는 등불, 물거품 같은 덧없는 세상에 風燈泡沫今如許
시례(詩禮)의 귀한 교훈 더불어 지키리라 詩禮靑氈共守盟
임오년 동짓달 갑자일에 壬午至月甲子
7대손 태순 삼가 지음 七代孫泰淳謹稿
10) 소당(小塘)을 읊은 시(詩)
돌을 쌓고 물을 끌어다 연못 하나 만드니 帖石引流成一塘
송매단 오른쪽 조그만 시내의 남쪽이라 松梅壇右小溪陽
아침이 되어 옥경(玉鏡)이 새 상자를 열고 朝來玉鏡開新匣
초승 후에 달이 먼 산봉우리에 떠오르네 弦後氷輪上遠岡
나는 새 잠긴 고기에서 움직임과 고요함을 보고 飛鳥潛魚看動靜
밖은 하늘 안은 땅에서 둥긂과 모남을 안다 外天內地認圓方
가장 사랑할 손 꾸밈이 없는 군자이니 最愛君子無雕飾
두어 떨기 연꽃이 가을 물에 향기롭구나 數朶芙蓉秋水芳
오봉 안수록 지음 五峯
옥경(玉鏡): 옥 같은 거울이라는 뜻과 달[月]의 별칭으로 쓰임.
11) 사우(士友)들이 오봉(五峯)에게 준 시(詩)
(1) 여필의 시에 화답하다[奉和汝必]
산으로 그댈 전송하고 나니 늦봄이 되어 送子還山屬暮春
보내기에 앞서 언제나 다시 만날까 물었는데 前期而問更何因
이별 뒤에 서로 사모하는 마음을 느껴보니 也知別後相思處
아마도 경전을 펼쳐 이치 탐구하고 있겠지요 應是經床玩理辰
그대 지조와 학업은 높고 깊은 경지이니 看君志業造高深
유학의 가르침을 스스로 걸머지길 바라오 更願斯文須自任
부귀를 뜬구름으로 여기고 성훈을 간직하니 富貴浮雲存聖訓
화사한 봄날에 고사리도 소뫼에 그득하리라 春回薇蕨饒牛岑
은봉의 기상과 절개는 남쪽에서 으뜸이니 隱翁氣節冠南州
늠름한 도끼로 추상처럼 간신을 제거했네 肅斧鋤姦凜若秋
어찌 백년 뒤 공론이 정해지길 기다리리 何待百年公議定
옳고 그름을 마땅히 책 속에서 구해 보라 是非宜向卷中求
사람 사랑하면 그 집 까마귀도 사랑스러운데 愛人猶愛屋之烏
하물며 후손이 또한 가업을 이은 선비임에랴 何況雲孫又業儒
말을 몰아 천리 먼 길을 찾아와서 命駕來尋千里外
등을 밝히고 사흘 밤 동안 정․주를 말하네 懸燈三夜說程朱
그대 찾아오니 매화 일찍 머금고 君來梅花早
그대 떠나니 매화가 피었다네 君去梅花着
그대를 사모해도 볼 수 없으니 思君不可見
뜨락 가득히 부질없는 봄빛이라 滿庭空春色
경신년 늦봄 25일에 庚申暮春念五日
홍백응 지음 洪伯應稿
(2) 안아사에게 주다[贈安雅士]
소학 공부는 정밀함을 다하려는 것이요 小學工夫欲盡精
중용을 묻는 것은 참마음을 알고자 함이라 中庸思問莫非誠
뿌리 배양은 다만 존심하는 방법에 달리니 培根祗在存心法
목미암 이슥할 제 야기(夜氣)가 맑구나 木美菴深夜氣淸
무오년 늦봄 초순에 민와 지음 戊午暮春上浣 民窩
12) 송매정의 주련(柱聯)
뛰는 잉어에게 지시하여
매화비 속으로 가게하고 指揮躍鯉行梅雨
깃 든 까마귀에게 분부하여
대나무 숲을 지키게 하네 分付棲鴉護竹林
이슬이 연꽃 방에 떨어져
백 명의 자식을 품에 안고 露滴蓮房涵百子
연기가 솔 장막에 자욱하여
천 명의 손자를 기르네 煙深松幕長千孫
휘감아 도는 물은 푸른 담쟁이
족자를 펼친 것 같고 縈廻水展靑蘿幅
높이 솟은 산은 푸른 옥비녀를
뽑는 듯하네 突兀山抽碧玉簪
새들은 산 빛 속에서 이리저리
나르고 鳥去鳥來山色裏
꽃들은 물 그림자 가운데서
피고 지네 花開花落水影中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씀
2. 직우당(職憂堂)에 관한 기사(記事)
1) 答從姪壽麟兼寄諸從姪 丁未十一月九日
職憂堂 安昌勳 撰
觀來書云云 無非自警將進之意 可愛也亦可敬也 雖然其中有未當然者 可不明言 大凡治心之要 專在於自家方寸上誠信固執而已 勉齋黃氏所謂 眞實心地刻苦工夫八箇字 至矣盡矣 旣知不固不誠 則河不做誠之固之之方乎 不知者 非其人之罪也 知而不改者惑也 一懦字爲主證云者 實中其病 夫庸醫傷人 非不用心於藥也 不知病之所在也 旣知其病而不能思治之之方 則豈不爲庸醫之罪人乎 世常說古今人不相及 然古之視今 猶今之視昔 豈古無惡人 而今無君子耶 顧爲與不爲之如何爾 別歧斜徑 昏衢駐車 誠或然矣 然其由出於本源之不治也 夫治水必濬其源 然後導其所歸 不能治其心 何能利其行乎 自處中知之下 指點上知之域 視若登天 以爲不可幾及 若是而止 則堯桀之相去 自如舜顔之同歸 何望 遏去惟危 善養惟微 今日明日 念玆在玆 無少間斷 是乃入頭下手地 此事豈專待師友之導率而爲之也 先從自己實下工夫 然後質之先覺 漸磨而切磋 則自入於正路 得之惟艱 失之不易矣 不然 徒隨人之影響而爲之 豈不爲無本之水 朝滿而夕除乎 性稟不同 誠亦然矣 然古先論性 只有三品之分 則萬殊之云 何其煩也 下等之人 旣云不移 非所論也 使中知之人 推而納之上知之域 雖非爲長者折枝之易 又非挾泰山超北海之難也 爾何居焉 父兄之過云云 豈無所見 然過亦有時而有無焉 敎子弟自童蒙至于弱冠 則專在父兄敎導之勤不勤 過是則父兄之過漸輕 而子弟之責漸重 蓋自有知思自能 不待勸勉而漸進也 爾兄弟旣抱子焉 而猶且稱過於上 不思自力 何其惑也 然使其本志不立於正路 彷徨於域外者 敎失於小學大學之年而然也 是則不得辭其咎矣 講室之築 誠吾有志而未就者也 但必待築講室立科程 然後爲之學 何以異於月攘一雞 以待來年者也 苟立本志 坐處無非讀書之地 到處無非講論之地也 大樹本非習禮之所 夫子於是焉習之 麥畝本非誦讀之所 重峰於是焉誦之 古人爲學 皆以勤且力而得之 今人則不勤不力 而但慕虛名 學何能就 業何能成 呂蒙江東之一武士也 一感孫仲謀之言 能就學於軍務倥傯之中 使魯肅刮目而對 爾輩旣以儒家子枝 優遊安閒之中 一無所成 寧甘爲呂蒙之罪人乎 言之至此 流涕而太息 猶屬歇後語也 然旣多悔罪自警之語 而又發歎賢祖後孫 盡入於無識貿貿之域 則桑楡之效 庶其可望 私自賀吾先祖之將有肖孫也 叔一無似人也 少嬰疾病 弱冠以來 奔走於衣食荏苒之間 已近中身 雖欲盡心於文字上閱盡艱辛 便失精神 甘爲醉生夢死 同歸於草木鳥獸之澌盡泯沒而已 古人謂枉己者未有直人者也 身旣不直 其何能直人乎 雖然厲之人 夜半生子 急急然擧火而視之 猶恐其似己 此其眞情也 古人又云 善惡皆吾師 以惡爲戒 豈非師乎 勉之哉勉之哉 嗚呼
종질(從姪) 수린(壽麟)과 여러 종질들에게 답한 편지
정미년(1787) 11월 9일
직우당 안창훈 지음
보내준 편지의 내용을 살펴보건대, 모두 자신을 경계하여 앞으로 나아가려는 뜻이 아님이 없었으니, 참으로 애틋하고 또한 공경할만하였다. 그렇긴 하지만 그 가운데 온당치 못한 내용도 있으니, 분명히 말해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개 마음을 다스리는 요령[治心之要]은 오로지 자기의 마음 위에서 진실함과 믿음으로 견고하게 지켜나갈 뿐이다. 면재(勉齋) 황씨(黃氏)[주자의 제자 황간(黃榦, 1152-1221)을 말함. 자는 직경(直卿), 호가 면재(勉齋). 젊어서 유청지(劉淸之)에 배우다가 나중에 주자에게 수업할 때, 주자는 “우리의 도(道)를 부탁할 사람이 여기에 있으니 나는 아무 여한이 없다”고 했다.]가 말한 “진실한 마음으로 애써 공부하라”(眞實心地 刻苦工夫)는 여덟 글자에 지극한 뜻이 다 들어있다. 이미 견고하지 않거나 진실하지 않음을 알았다면, 어찌하여 진실하고 견고해지는 방법을 찾지 않느냐? 이를 알지 못하는 자는 그 사람의 죄가 아니겠지만, 알고도 고치지 않는 자는 미혹[惑]한 것이다.
“‘나(懦: 나약함)’ 한 글자가 온 몸의 주요 병증(病證)입니다”라고 한 말은 참으로 그 병을 잘 맞춘 것이다. 용렬한 의원[庸醫]이 사람을 다치는 것은 약을 쓰는 데 마음을 기울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병의 원인을 몰라서이다. 이미 그 병을 알고도 능히 치료할 방법을 생각지 않는다면, 어찌 용렬한 의원의 죄인이 되지 않겠느냐? 세상은 항상 “오늘날 사람은 옛사람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옛날의 관점에서 오늘을 보는 것과 오늘의 관점에서 옛날을 보는 것은 같으니, 어찌 옛날이라고 악인(惡人)이 없겠으며 오늘이라고 군자(君子)가 없겠느냐? 돌이켜보면 ‘하려고 하는가[爲]’, ‘하려고 하지 않는가[不爲]’의 차이일 뿐이다.
“큰길에서 갈라져 비스듬히 난 작은 길을 걷다가 어두운 길거리에 수레를 멈추고 방황한다”고 한 말은 참으로 그럴 법도 하다. 그러나 그 이유는 본래 근원[本源]을 다스리지 않은 데서 나온 것이다. 대저 물을 다스릴 때에도 반드시 그 수원을 준설한 뒤에 흘러갈 물줄기를 잡게 되니, 그 마음을 다스릴 수 없다면 어찌 행실을 이롭게 할 수 있겠느냐?
스스로 중지(中知, 상지(上知)와 하우(下愚)의 중간인 보통 슬기를 지닌 사람.)의 아래에 있으면서 상지(上知)의 영역을 지향하는 것은 마치 하늘을 오르려하다가 “거의 미칠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하고 그쳐버린다면 요(堯: 고대의 성군)와 걸(桀: 하나라의 폭군)의 차이가 저절로 순(舜: 고대의 성군)이나 안자(顔子: 노나라의 현인)와 같아져 버리니, 무엇을 바라겠는가?
막아서 버리는 것은 오직 위태롭고, 잘 기르는 것은 오직 은미하니, 오늘 또 내일 항상 이를 염두에 두어 조금도 간단(間斷)이 없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본래 근원을 찾아 공부해 들어가는 것이니, 이 일을 어찌 오로지 스승과 벗이 이끌어주길 기다려서 해야겠는가? 먼저 자신이 실제로 공부를 해 본 뒤에 선각(先覺)에게 질문하여 점차 절차탁마(切磋琢磨)하게 되면 저절로 올바른 길로 들어갈 것이니, 이를 얻기는 대단히 어렵지만 이를 잃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 않고 한갓 남의 영향(影響: 그림자와 울림)을 따라서 행하게 되면, 어찌 수원이 없는 물처럼 아침에는 가득하다가 저녁에는 없어져버리지 않겠느냐?
“타고난 본성[性]이 같지 않다”는 말도 또한 참으로 그럴듯하다. 그러나 옛날 선현은 본성을 논하면서 삼품(三品)으로만 나뉘어진다고 하였으니, “만 가지로 달라진다[萬殊]”고 한 말은 너무 번잡하지 않느냐? 하등(下等)의 사람은 이미 “변화시킬 수 없다”[이 구절을 『논어』 「양화(陽貨)」 3장에서는 “오직 지극히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는 변화시킬 수 없다”(唯上知與下愚 不移)고 말했다.]고 했으니 논할 바 아니지만, 중지(中知)의 사람을 상지(上知)의 영역으로 밀어 넣는 것은 비록 “장자(長者)를 위해 나무 가지를 꺾는 것과 같은 쉬운 일”[이 구절은 『맹자』 「양혜왕상(梁惠王上)」 6장에 나오는데, 주자는 “장자(長者)의 명령에 따라 초목의 가지를 꺾는 것이니 어렵지 않음을 말한다”고 풀이했다.]은 아니지만 또한 “태산(泰山)을 끼고 북해(北海)를 뛰어넘는 것과 같은 어려운 일”[역시 위와 같은 곳에 나오는데, 태산과 같은 큰산을 옆구리에 끼고 북해와 같은 넓은 바다를 건너뛰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뜻한다.]도 아니다. 너희들은 어디에 속해 있느냐?
“부형(父兄)의 허물입니다”라고 한 말은 어찌 소견이 없다 하겠느냐? 그러나 허물은 때론 있기도 하지만 때론 없기도 하는 것이다. 자제(子弟)에 대한 교육은 어린 아이로부터 약관에 이르기까지는 오로지 부형이 부지런히 가르쳐 이끌었는가 그렇지 못한가에 달려있지만, 이때를 지나면 부형의 허물은 점차 가벼워지고 자제의 책임은 점차 무거워진다. 대개 스스로 인지하고 사고하는 나이에 이르면 권면(勸勉)함을 기다리지 않고도 점차 나아갈 수 있어야 하는데, 너희 형제들은 이미 자식을 품었으면서도 오히려 허물을 윗사람에게 전가하여 자신의 힘을 생각지 않으니 어찌 그리 미혹하단 말이냐?
하지만 그 본 뜻[本志]을 올바른 길[正路]에 세우지 못하고 영역 밖에서 방황하게 만든 것은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을 배우던 나이에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때문이니, 이는 그 허물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강의실[講室]을 짓는 일은 참으로 내가 뜻한 바이지만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이다. 다만 반드시 강의실을 지어 학과 과정[科程]을 세우길 기다린 뒤에 학문을 하고자 한다면, 어찌 “달마다 닭 한 마리를 훔쳐먹다가 내년을 기다린 뒤에 그만두는 것”[차일피일 미루지 말라는 뜻인데, 이 구절은 『맹자』 「등문공하(滕文公下)」 8장에 나온다. 그 내용을 보면, 대영지(戴盈之)가 말하기를 “10분의 1의 세제(稅制)와 관문(關門)과 시장의 세금을 철폐하는 것을 금년에는 능히 할 수 없으니, 청컨대 세금을 경감하고 내년을 기다린 뒤에 그만 두려고 합니다. 이것이 어떻습니까?” 하자, 맹자가 대답하기를 “이제 어떤 사람이 날마다 이웃집의 닭을 훔치는 자가 있거늘 혹자가 그에게 ‘이는 군자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그 수를 줄여서 달마다 닭 한 마리를 훔쳐먹다가 내년을 기다린 뒤에 그만두게다’고 하는 것이로다” 하였다.]과 다르겠느냐?
진실로 본 뜻을 세웠다면 지금 앉은 곳이 독서할 곳이 아님이 없고, 발길 닿는 곳이 강론할 곳이 아님이 없다. 큰 나무[大樹] 아래는 본래 예(禮)를 익히는 장소가 아니지만 공자(孔子)는 여기에서 학습하였고, 보리 밭두둑[麥畝]은 본래 글을 읽는 장소가 아니지만 중봉(重峰: 조헌)은 여기에서 낭송하였다. 옛사람의 학문은 모두 부지런히 애써 얻은 것인데, 요즘 사람은 부지런히 애쓰지도 않으면서 다만 헛된 이름만 사모하니, 학업(學業)을 어찌 성취할 수 있겠느냐?
여몽(呂蒙, 삼국시대 오(吳)나라 부피(富陂) 사람. 자는 자명(子明). 손권(孫權)이 말하기를 “그의 학문은 널리 보탬이 되고 지략은 기발하니 주유(周瑜)에 버금간다고 할 수 있다” 하였다.)은 강동(江東)의 일개 무사(武士)였지만 한번 손중모[孫仲謀: 중모는 손권(孫權)의 자(字)임]의 말에 감동을 받고, 군무(軍務)로 바쁜 가운데서도 능히 학문의 길로 나아가 노숙(魯肅, 삼국시대 오(吳)나라 사람, 자는 자경(子敬). 주유(周瑜)가 손권에게 천거하자 홀로 의견을 내어 유비(劉備)와 결속하여 조조(曹操)를 격파했다.)으로 하여금 눈을 비비고 자세히 보도록 만들었다.[이는 여몽이 손권의 말에 자극을 받아 부단히 노력하여 괄목(刮目)할만한 발전을 이루었다는 뜻이다.] 너희들은 이미 선비 가문의 자손이건만 안일하고 한가로움만 즐기다가 한가지도 성취한 바 없으니, 어찌 기꺼이 여몽(呂蒙)의 죄인이 되려고 하느냐?
말이 여기에 이르니 눈물이 앞을 가리고 장탄식이 나오지만 이는 오히려 헐후(歇後, 어떤 성어(成語)의 끝을 생략하고 그 윗 부분만으로 전부의 뜻을 갖게 하는 일종의 은어(隱語). 예컨대 『서경(書經)』의 우우형제(友于兄弟)라는 말의 뜻을 우우(友于)만으로 나타내는 따위.)한 말에 속한다. 그러나 이미 죄를 뉘우쳐 자신을 경계하는 말을 많이 하였고 또 어진 조상의 후손들이 모두 무식하여 어리석게 되었다고 한탄하였으니, 말년의 보람은 우리 선조를 닮은 어진 후손이 장차 생겨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숙부(叔父)는 일개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젊어서는 질병에 걸렸고 약관 이후에는 오랜 기간 동안 의식(衣食)을 장만하는 데 분주하였다. 이미 중년에 가까워져 비록 문자(文字)에 마음을 다 쏟아보지만 책을 보고 나면 고통스러워 하다가 정신을 잃기도 하니, 기꺼이 취생몽사(醉生夢死, 술에 취하여 꿈을 꾸다가 죽음. 곧 일생을 의미 없이 보내는 것을 비유함. 『정자어록(程子語錄)』에 보면 “비록 높은 재주와 밝은 지혜를 지녔다 하더라도 견문(見聞)에 사로잡히게 되면 자신이 취생몽사하고 있음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 하였다.)하다가 풀이나 나무, 새나 짐승과 함께 얼음처럼 녹아 없어질 뿐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자기 몸을 굽힌 자가 능히 남을 곧게 펴는 경우가 없다”[이 말은 『맹자(孟子)』 「등문공하(滕文公下)」 1장에 나온다.]고 하였으니, 내 몸이 이미 곧지 않은데 어찌 남을 곧게 할 수 있겠느냐? 그렇긴 하지만 “문둥이가 밤중에 아이를 낳고 급히 불을 끌어다가 살펴보는 것은 자기를 닮았을까 걱정하기 때문”[이 구절은 『장자(莊子)』 「천지(天地)」편에 나온다.]이라고 했으니, 이는 거짓이 없는 마음이다. 옛사람이 또 이르기를 “선(善)이나 악(惡)이나 모두 나의 스승”[이 구절은 『논어(論語)』 「술이(述而)」편의 공자의 말씀 중 “세 사람이 길을 감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으니, 그 중에 선한 자를 가려서 따르고 선하지 못한 자를 가려서 자신의 잘못을 고쳐야 한다”는 구절을 축약한 것이다.]이라 하였으니, 악으로 자신을 경계한다면 어찌 스승이 아니겠느냐? 부지런히 공부할지어다. 아! 슬프다.
2) 社契記事
職憂堂 撰
嗚呼 文田之有社契 我王考梅溪府君 所刱設者也 本面僻在郡之一隅 間於四邑 山多野狹 村落蕭條 以大川之在其北 官供川魚 數數作弊 重之以吏校橫侵 誅求多端 謀避之民 不北走順同 必東走于樂 雖有若干除役之名 萬無成村實面之道矣 面之牛山 卽我先祖隱峰先生遯世之所也 梅溪府君以家傳心學 宿抱經綸 遯守舊庄 慨然有化民成俗之志 以爲民情有恒産 然後有恒心 有恒心然後 可以導之於廉恥禮讓之域 而有恒産之道 必先寬其力 使之安堵耕種而後可致也 肅廟甲戌 捐家財正租二十斛 會面之可以幹事者數人 鳩聚若干財穀 作社契設鄕約 逐年拮据 行之五六年 財穀稍饒 於是防其徭役 救濟其貧窮不能治喪營葬者 民稍稍安集歡如也 歲辛巳 使面中諸人 與本郡吏廳 修好防役 防役自是法禁 而吏廳本是凋殘 每當使客應接之時 廳用有數 而元無應出財穀 又無自上劃給 此爲營邑之所不能禁也 旣成完文 定其條約 每年以正租九十石 防一面之役 除惟正供元軍保之外 各種諸役 盡爲許頉 官納川魚 以銀口魚六十束 定爲歲數 統租役價 又自契中劃給 自是之後 四方民還至 里有新屋 野有新墾 反有地狹人多之稱 於是創立學舍 擇博識有文行者爲之師 而以正租五十石 爲供養之資 聚俊秀之可敎者 敎之以文學 六七年之間 閭里藹然有孝悌文雅之風 信乎君子學道則愛人 小人學道則易使也 嗚呼 英廟丙午 王考下世 一面之人 聞喪奔走 如悲親戚 克襄之日 各村爭具奠物 致其哀敬 可見恩德入人之深也 我伯父居憂 契事主張無人 是時陶谷李丈奎明氏 自京南下 與吾家契誼甚篤 伯父泣送文案於李丈 俾主其事焉 越三年戊申 面中諸人 咸告于伯父曰 鄕約自是先君子所刱施 而垂惠吾民者也 公盍率修之也 伯父素多疾病 言于衆曰 吾不能强疾 且旣屬李友 又何還取也 固辭不許矣 數年之內 穀物多入於殘民 逋負不足於公私之用 衆議齊發 有上下道分貳之擧 嶺之西及可川謂之上道 嶺之東謂之下道 防役所入 分半爲之 面人復告于伯父曰 先君子作之之事 公不可以執嫌不述 請之益固 辭之不獲 遂强疾視事 還修其約束 收刷其逋負 數年之間 漸復舊規 而以其分貳之故 供師之穀 減三分之一矣 越三年庚戌 可川民又來訴于下道曰 可川旣在嶺東 當屬下道 收其穀物而來附 事系民願 則上道之不能追 下道之不能拒也 可川旣附 則下道稍實於上道 故防役之物 五分其三而有餘焉 適丁乙丑之歲 七八月之間 恒雨大饑 民戶流亡 穀總太半無徵 菫充防役之數 而不足於學舍供師之用 自是厥後 逐年饑饉 未能復前日好樣子矣 歲壬午伯父又居繼祖妣喪 時朴戚豪錫氏居長洞 使之管領其事 朴丈徒善而闊於事 穀物盡入逋負 防役所需 至於斂民 民怨大起 殆不能支 而伯父宿痾纏綿 春秋已邵 家事已傳 何可暇及乎此也 嗚呼 丙戌伯父下世 越三年戊子 公論大發 以伯從氏任其事而蘇其弊 從氏辭之不得 仍起主事 而蕩敗之餘 措手無策 收其若干逋租 多方拮据 菫免斂民之患 而無望復其舊也 正宗戊申 李侯弘遂爲吏本郡 盖以凶歲納粟活人之功也 侯凡爲政 專以惠民 捐私錢千餘緡 分與一郡各面 俾補民役 本面所受 爲六十兩也 兩道分之 年例取息 六七年之間 財用稍足 方將修復學舍供師之節矣 郡吏來言 本廳殘敗特甚 當秋防役之租 春間引用 代錢不滿五十兩 雖有防役之名 實無所補 見今面樣 稍勝於前 請倍加助給 以爲支保之道 顧此除役之不少 想其情勢之必然 故甲寅歲 除其租石名色每年分兩等 二月初以錢九十兩 八月初以錢九十兩出給 以備使客應接之用 吏議咸以爲德焉 當宁乙丑 從氏奄忽違世 悲傷之餘 衆議以無似之人 居於年行之高 俾掌其事 旣是吾家世業 則雖不敢當 亦何忍辭焉 但當一遵約束 守而勿失可也 然財穀之在於民間者 一經變年 率歸於逋負 存贏餘備不虞之道 不如一邊取土 收禾穀以待之也 故六七年之間 錢之息者 穀之剩者 或拮据之 或儲蓄之 取土收穀以補用 自是而漸就增衍 則可無僨事之患矣 在昔壬寅間 學舍已頹壓無餘 故猥不自量 欲復王考時舊事 以諸兄之命 擔着重刱之任 增其舊制於舊址 經數歲而工告成 於是擇洞中可以敎童蒙者爲之師 以若干穀爲之糧資 然後一家子弟及四方之來者 居業有所矣 又出正租五十餘石 劃給年分時考卜之資 使不得收斂於民間 其餘弊瘼 次第救之 是可以免夫忝先之譏也否乎 當其始事也 金尙基表天奎以舊任從事於我 而天奎遭其父喪 以表天翊代爲公員 己巳夏尙基以老乞遞 天翊代爲典穀 而河宗澤爲公員 備同甘苦 大有勞勩焉 嗚呼 此乃我王考 傳心學抱經綸之餘事 而伯父曁從氏繼述之遺意也 吾何力焉 惟恐歲久無徵 記此顚末 吾家後來子孫 遵守修潤 庶幾無忝焉 嗚呼
崇禎四癸酉季秋下浣
사계(社契)에 관한 기사
직우당 지음
아! 문전면(文田面)에 있는 사계(社契)는 나의 할아버지 매계부군(梅溪府君: 안후상)이 처음으로 만든 것이다. 본 면은 군(郡)의 한쪽 모퉁이에 치우쳐 있고 네 개 읍(邑)에 끼어있어 산은 많고 들은 좁아 촌락이 쓸쓸한데도, 그 북쪽에 큰 하천이 있기 때문에 관청에 바칠 천어(川魚)가 여러 가지로 폐단을 일으키고, 게다가 이교(吏校, 조선조 때 지방 관아에 딸린 아전(衙前)과 장교(將校). 이들은 직업과 신역(身役)을 세습하는 관료와 평민의 중간 계급에 속하는데, 특히 장교는 지방 관사(官司)에서 군무(軍務)에 종사하였다.)들이 멋대로 침범하여 여러모로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았다. 이를 피하려는 백성들이 북쪽으로 순천(順天)․동복(同福)으로 도주하지 않으면 반드시 동쪽 낙안(樂安)으로 도주하니, 비록 부역에서 제외된 몇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결코 마을을 이루어 면민을 채울 방도가 없었다.
면내 우산(牛山) 땅은 곧 우리 선조 은봉(隱峰: 안방준)선생이 세상을 피해 숨어든 곳이다. 매계부군은 가정에 전해져온 심학(心學, 마음의 본체(本體)를 인식하고 몸을 수양(修養)하여 인의(仁義)의 도리를 실천하는 것을 공부하는 학문.)으로 일찍부터 경륜(經綸)을 품고, 은둔하여 옛 터를 지키면서 개연히 백성을 교화하여 풍속을 이루려는 뜻을 두었다. 부군은 말하기를 “백성의 마음은 항산(恒産: 일정한 생업)이 있은 뒤에 항심(恒心: 변치 않는 마음)이 있고, 항심이 있은 뒤에 염치(廉恥)와 예양(禮讓)의 경지로 이끌 수 있는데, 항산의 방도는 반드시 먼저 힘을 너그럽게 써서 그들로 하여금 편안히 밭을 갈고 씨를 뿌리게 한 뒤에 이룰 수 있다”고 하였다.
숙종 갑술년(1694)에 벼 20섬의 집안 재산을 출연하고 면민 중에서 일을 맡아볼 수 있는 사람 몇 명을 모아, 약간의 재물과 곡식을 거두어 사계(社契)를 만들고 향약(鄕約)을 설치하여 해마다 어렵사리 꾸려나갔는데, 그렇게 한지 5-6년 만에 재물과 곡식이 조금 넉넉해졌다. 이에 요역(徭役, 국가가 국민에게 무상으로 그 노동력을 사용하는 것. 전세(田稅)를 표준으로 하였는데 1년에 6일을 초과하지 못함.)을 막아 가난하여 초상과 장례를 치를 수 없는 사람을 구제하니, 면민들이 점차 안도하고 기뻐하였다.
신사년(숙종 27, 1701)에 면내 여러 사람을 시켜 본 군의 이청(吏廳: 아전이 사무를 보는 청사)과 방역(防役, 시골의 백성들이 부역(賦役) 대신 돈이나 곡식을 미리 바치고 입역(立役)을 면 제받는 일.)을 돈독히 체결하도록 했다. 방역은 원래 법률로 금지하였다. 그러나 이청(吏廳)은 본디 형편이 미약하여 사객(使客, 연로(沿路)에 있는 고을의 수령이 ‘다른 나라로 가는 사신(使臣)’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을 맞아 대접할 때마다 비용이 여러 가지로 필요했지만, 지출을 감당할 수 없고 또 위로부터 배급도 없었기 때문에 영읍(營邑, 감영(監營)․병영(兵營)․수영(水營)과 각 고을을 말함.)이 이를 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미 완문(完文, 조선조 때 부동산(不動産)에 관한 관청의 증명서. 관문서(官文書)라고도 함.)을 만들고 조약(條約)을 확정하여 해마다 벼 90섬으로 한 면(面)의 부역을 막으니, 유정(惟正)․군보(軍保)[유정은 해마다 의예(儀禮)로 궁중 및 서울의 고관(高官)에게 바치는 공물(貢物)을 말함. 군보는 조선조 때 정병(正兵)을 돕기 위하여 둔 조정(助丁). 원래는 병역을 면제받는 대신에 현역병의 농작(農作)에 노동력을 제공하도록 했으나, 후에 군대의 비용으로 쓰기 위하여 역(役)을 면해주고 그 대가로 삼베나 무명 따위를 받아들임. 인보(隣保) 또는 향보(餉保)라고도 함.]를 제외한 각종 부역들은 모두 면제되었다. 관청에 바치던 천어(川魚)는 은어(銀魚) 60속(束)을 매해 수량으로 확정하고, 통조역가(統租役價, 벼를 한 곳으로 모으는 일에 대한 품삯. 이는 백성이 경저리(京邸吏)와 영저리(營邸吏)에게 주는 보수이다.)도 또한 사계(社契)에서 나누어주니, 이로부터 사방의 백성이 돌아와 마을에는 새집이 들어서고 들판에는 새로 개간한 땅이 생겨나 도리어 땅은 좁은데 사람이 많다는 말이 나돌았다.
이에 학사[學舍: 목미암(木美菴)을 말함]를 새로 지은 뒤 문행(文行: 문학과 덕행)을 갖춘 박식한 사람을 택하여 스승으로 모시고, 벼 50섬으로 공양(供養)의 밑천을 삼았다. 가르칠만한 준수한 인재들을 모아 문학(文學)으로 가르치자, 6-7년 사이에 마을이 효제(孝悌)와 문아(文雅: 풍치가 있고 아담함)의 기풍으로 가득하니, “군자가 도(道)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가 쉽다”[이 구절은 『논어』 「양화(陽貨)」편 4장에 나오는데 공자의 말씀이다.]는 말은 참으로 그러하다.
아! 슬프게도 영조 병오년(1726)에 할아버지가 세상을 떴다. 온 면민들은 초상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바삐 달려와 마치 친척을 위해 슬퍼하듯 하였고, 장사지내던 날에는 마을마다 앞다투어 제물을 갖추어 슬픔과 공경하는 마음을 표하니, 은덕(恩德)이 사람들에게 깊이 스며들었음을 볼 수 있다.
우리 백부(伯父: 안세림)는 상을 치러야했으므로 사계(社契)의 일을 주장할 사람이 없었다. 이때에 도곡(陶谷) 이규명(李奎明) 어른이 서울에서 남쪽을 내려와 우리 집안과 정의(情誼)가 매우 돈독하였는데, 백부는 울면서 문안(文案)을 이규명 어른에게 보내 그 일을 주장하도록 했다. 3년이 지난 무신년(1728)에 면내 여러 사람들이 백부에게 고하기를, “향약(鄕約)은 본래 선군자(先君子: 작고한 남의 아버지)가 만들어 시행하여 우리 면민에게 혜택을 준 것이거늘, 공은 어찌하여 대를 이어 이를 추스르지 않습니까?” 하였다. 평소에 자주 질병에 시달리던 백부는 면민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병든 몸을 이끌고 억지로 나설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이미 친구에게 부탁하였는데 어찌 되돌려 받겠습니까?” 하고, 굳이 사양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몇 년 사이에 곡물이 대부분 쇠잔한 백성의 미납세로 들어가 버려 공사(公私)간의 비용이 부족하게 되자, 중론(衆論)이 한꺼번에 일어나 상도(上道)와 하도(下道)로 나뉘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고갯마루 서쪽과 가천(可川) 마을을 상도라 부르고, 고갯마루 동쪽을 하도라 부르면서 방역(防役)에 들어가는 비용을 반으로 나누어 맡게 되니, 면민들이 다시 백부에게 고하기를 “선군자(先君子)가 일으켜 놓은 일을 공이 혐의 때문에 계승하지 않으려 할 수는 없습니다” 하며, 한층 거세게 요청해오자 사양할 수 없었다. 마침내 병든 몸을 억지로 이끌고 일을 주장하여 다시 그 약속(約束)을 고치고 미납세를 징수하니, 몇 년 사이에 점차 옛날 규모를 회복하게 되었으나, 상․하도로 나뉘어졌기 때문에 스승을 공양하는 곡식이 3분의 1이나 줄어들었다.
3년이 지난 경술년(1730)에 가천(可川) 사람들이 또 찾아와 하도에 하소연하기를, “가천은 예전부터 고개 동쪽에 있어 마땅히 하도에 속해야 하니, 곡물을 거두어 가지고 와 하도로 붙으려 합니다” 하였다. 민원(民願)에 관한 일은 상도에서 추궁할 수 없고 하도에서 거부할 수 없었다. 가천이 붙게 되자 하도는 상도보다 조금 충실하게 되었으므로 방역의 곡물도 5분의 3이 넘게 되었다.
마침 을축년(1745)을 맞아 7-8월 사이에 긴 장마로 기근이 크게 들었다. 유리걸식하는 면민 때문에 곡물을 태반이나 징수하지 못해 겨우 방역의 수량은 채웠으나, 학사(學舍)를 유지하고 스승을 공양하는 비용은 부족하게 되었다. 그 후로 해마다 기근이 들어 이전의 좋은 모습을 회복할 수 없었다.
임오년(영조 38, 1762)에 백부가 또 계조비(繼祖妣)의 상을 치르게 되었다. 당시 인척이 되는 박호석(朴豪錫)씨가 장동(長洞)에 살아 그에 일을 맡겨 주장하도록 하였는데, 박씨 어른은 착하기만 했지 일에는 어두워 곡물을 미납세로 다 넣어버리고 방역에 필요한 수량을 면민에게 거두기에 이르렀다. 면민의 원망이 크게 일어나 거의 버틸 수 없는 지경이었지만, 백부는 숙환이 떠나지 않고 춘추(春秋)도 너무 높아 집안 일을 이미 물려주었으니, 어찌 여기에 겨를을 낼 수 있었겠는가?
아! 병술년(1766)에 백부가 세상을 떴고, 3년이 지난 무자년(1768)에 공론(公論)이 크게 일어나 백종씨(伯從氏: 안창징)에게 그 일을 맡겨 폐단을 치유하려고 했다. 백종씨는 사양할 수 없게 되자 떨쳐 일어나 그 일을 주장하였지만 탕진하여 실패한 나머지 속수무책이었다. 약간의 미납세를 거두어 여러모로 애를 써 겨우 면민에게 곡물을 거두는 걱정은 면했으나 옛날 규모를 회복할 가망이 없었다.
정조 무신년(1788)에 군수 이홍(李弘)이 마침내 본 군을 다스리게 되었는데, 대개 흉년에 납속(納粟, 흉년이 들거나 병란이 있을 때 나라에 곡식을 바치는 것. 곡식을 많이 바친 자에게 당상관(堂上官)의 품계를 내려주는 것을 납속가자(納粟加資)라 부른다.)하여 사람을 살린 공이 있었다. 군수는 정사를 볼 때 오로지 백성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 개인 돈 천여민(緡: 동전 꿰미)을 출연하여 군내 각 면에 나누어주어 백성들의 부역을 보조하도록 했다. 우리 면이 받은 60냥(兩)을 상․하도가 나누어 해마다 이자를 불리니, 6-7년 사이에 재용(財用)이 조금 넉넉해져 비로소 학사(學舍)와 공사(供師: 스승 공양)의 예절을 회복하게 되었다.
군(郡)의 아전이 찾아와 말하기를 “우리 청사(廳舍)는 쇠잔함이 특히 심하여 가을에 거둔 방역(防役)의 세금을 봄 사이에 끌어다 사용하니, 대전(代錢: 물건 대신으로 주는 돈)이 50냥도 되지 않습니다. 비록 방역의 명목이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보탬이 되는 바 없습니다. 현재의 상황은 이전보다 조금 나아졌으니, 갑절이나 더 지급해주시어 보존할 방도를 찾아주십시오”l하였다. 부역을 면제받은 사람이 적지 않아 필연적으로 그런 형편이 되었으리라 생각하였으므로, 갑인년(1794) 섣달 그믐날에 그 세금 명목을 해마다 두 차례로 나누어 2월 초에 돈 90냥, 8월 초에 돈 90냥을 지급하여 사객(使客)을 맞아 대접하는 비용으로 충당하도록 하니, 아전들의 의견은 모두 덕스럽다고 여겼다.
당저(當宁, 현재의 임금, 곧 금상(今上) 순조(純祖)를 말함. 당저는 “천자가 조회할 때에 제후왕(諸侯王)이 오기를 기다리고 서 있는 곳(天子當宁而立)”이란 말. 『예기(禮記)』 「곡례(曲禮)」 참고.) 을축년(1805)에 백종씨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 슬픔으로 상심하던 차, 중론(衆論)이 보잘것없는 나를 연항(年行: 나이와 항렬)이 높다하여 그 일을 주장하도록 했다. 이미 이는 우리 집안에서 대대로 맡아온 일이니, 비록 감당하기는 어렵지만 또한 어찌 차마 사양하겠는가? 다만 한결같이 약속(約束)을 준수하여 실수하지 않아야만 옳을 것이다.
그러나 재물과 곡식이 민간에 있는 것은 일단 해가 바뀌면 모두 미납분으로 처리되니, 나머지를 보존하여 뜻밖의 재난에 대비하는 방도보다는 오히려 한쪽에 땅을 사서 벼 곡식을 수확하여 대비하는 것이 더 나았다. 따라서 6-7년 사이에 돈의 이자와 곡식의 잉여분을 어렵사리 늘리기도 하고 저축하기도 하여, 땅을 사서 곡식을 수확하여 비용을 보충하였다. 이로부터 점차 재물을 늘려나가 일을 그르칠 걱정을 없앨 수 있었다.
지난 임인년(1782) 무렵에 학사(學舍)가 이미 무너지고 내려앉아 볼품이 없었으므로, 외람되이 자신의 처지를 헤아리지 않고 할아버지 시절의 옛 규모를 회복하기로 했다. 여러 형들의 명을 받아 중창하는 임무를 떠맡고 옛 터에다 옛날의 규모보다 확장시켜 여러 해만에 공사를 마쳤다.
이에 동네에서 어린아이를 가르칠만한 사람을 뽑아 스승으로 삼고 약간의 곡식으로 양식 밑천을 대주었다. 그런 뒤에 한 집안의 자제(子弟)와 사방에서 찾아온 자들이 거처하며 학업을 하게 되었다. 또 벼 50여 섬을 연분(年分, 그 해의 농사의 풍흉(豊凶)에 따라 해마다 토지를 상상(上上)․상중(上中)․상하(上下)․중상․중중(中中)․중하․하상․하중․하하(下下)의 아홉 등급으로 나누는 제도. 조선조 세종 28년(1446)부터 실시함.)할 때 고복(考卜, 결부(結負: 토지의 면적 또는 토지세를 의미함)에 변동이 생겼을 때에 실지로 이것을 조사하는 것. 걸복(乞卜)이라고도 함.)의 자금으로 나누어주어 민간에서 거두어들이지 않도록 하니, 그 나머지의 폐단은 차례로 구제되었다. 이로써 선조를 욕보였다는 조롱을 면할 수 있을는지?
처음 이 일을 담당했을 때에 김상기(金尙基)와 표천규(表天奎)가 옛날 임원으로 나를 따라 일을 보았는데, 천규가 그 아버지 상을 당하여 표천익(表天翊)으로 대신 공원(公員, 어떤 단체나 모임의 사무를 맡아 처리하는 직무, 또는 그 직무를 가진 사람. 참고로 조선시대에는 보부상(褓負商) 조합의 한 직임(職任)으로도 쓰였다.)을 삼았다. 기사년(1809) 여름에 김상기가 늙어 교체를 바라자 표천익이 대신 전곡(典穀, 사창(社倉)의 곡식의 출납을 담당하는 사람. 원래는 조선시대 내수사(內需司)의 종 8품 벼슬이었다.)이 되고 하종택(河宗澤)이 공원(公員)이 되어 동고동락하며 크게 수고하였다.
아! 이는 곧 우리 할아버지가 심학(心學)을 전하여 경륜(經綸)을 품은 나머지의 일이요, 백부와 백종씨가 선조의 뜻을 이은 것이니, 내가 무슨 힘을 썼겠는가? 오직 세월이 오래되어 증거가 없어질까 두려워 이 전말을 기록해두니, 우리 집안의 후손들은 이를 잘 준수하고 가다듬으면 아마도 욕됨이 없으리라. 아! 슬프다.
숭정(崇禎) 4계미년(순조 13, 1813) 늦가을 하순에 적음.
3) 安氏義庄記實
職憂堂 撰
嗚呼 吾家義庄 昔先君之所命也 我伯父善病在攝 家事專委於先君 伯從氏成立之前 宗家大小事務 先君實主張是 歲在丁丑 隱峰先祖墓祀 吾大小家協力奉行 後伯從氏往宗中 受祭租五石 換錢六兩而還 先君召諸子姪敎誡曰 吾家孤孑餘 至吾兄弟 又生汝曹七人 豈非皇考積善之餘慶也 大凡人家 無別庄門穀 奉先之道 應接之方 無所措手 其以是錢爲門穀之本 以爲日後不虞之備 群從兄弟 承命而出 同心同力 斂散無失 五六年之間 子母銅已至半白兩矣 歲壬午先君下世 攀號未逮之痛 豈忍言之哉 厥後門穀漸殖 各項財用 隨處支應 而歲漸增益 大有將來保門戶之望 己丑庚寅之間 仲從氏以先集刊布爲己任 往來京洛 經用甚煩 癸巳年間 始設刊役 遠近響合 而事巨力綿 經歲之間 工未告訖 財用先乏 不得已傾盡門材 僅乃就緖 而集是五冊 印不過百餘帙 不能廣布 恨未得徐圖而多印也 文契旣破之後 餘存只山上一斗落 從氏多有未了之債 故仍以委之 自是十餘年之間 門有用錢處 則名下收斂 氣象可悶 周思重創之道 計無奈何 故甲辰秋 言告從氏推收一斗畓所出一石租 乙巳春取息出貸 當秋又收畓禾一石 而倂收取息 租合二石十斗也 丙午歲飢 丁未春穀貴土賤 以是租買登坪畓三斗落 秋捧爲四石 以是爲張本 或儲蓄而待時 或換錢而取息 自是之後 不復名錢收斂 而七八年之間 能復舊時貌樣 先代歲事之輪奉 宗中不時之收斂 遠近不已之求請 及其他應接 撙節用下 宗黨吉凶 量宜出助 盖漸有頭緖矣 宗家勢難支保 故出錢二十五緡 退還舊賣祭田五斗落 每當各位 諱辰出錢穀助祭 以爲保宗之道 先祖請爵請諡兩度疏 擧十餘年之間 補用爲四百餘緡也 前後所用 若是夥多 而積年儲蓄 待時而用 故亦無所損焉 先是尺沙先山四世歲祀 以居近子孫 定有司奉行 而吾派以遠居數少 初不擧論矣 丙戌年宗議出付有司於吾派 伯氏躬往宗中 與宗孫及諸宗人相議曰 爲後孫而奉行先祀 何說之辭 雖然享祀之道 儀物俱備 然後乃可謂之享 七十里之外 麵餠鼎熟 三日後陳設墓前 色味俱變 神理不歆 是豈享祀克誠之道乎 吾意則奉行之節如前日 而吾派歲出四石租 各助四有司 是爲便宜之策 未知宗議如何 咸曰允若是夫 誰曰不可 遂以四十五兩 卽地買沃土四斗落 定禾穀四石完約而還 纔經三十餘年至甲子 以吾付有司 吾借手族孫命紀 俾具庶品 躬往奉行 後謂諸宗人曰 賴命紀之力 今日安行祀事甚幸 然歲以四石租助有司者 以財用言之 倍蓰於輪次奉行 所以爲此者 只爲祀事之便於行爾 約言猶在耳 今何爲而棄之 一座憮然不能答 余又謂之曰 隱峰先祖墓祀 輪奉於遠近子孫 亦猶尺沙之於吾派也 此後則吾派專奉此墓 歲以爲常何如 皆斂衽曰 有是哉 長者之言 正合情禮 敢不于從 仍爲定規而虔奉 今幾二十年矣 未知後日復出何議論也 閭巷有塾古制也 重刱書室 貿取書冊 以爲興學之本 設紙釜紙桶 以爲補用之資 而猶未見實效 無乃斅學之無其本 遜志之無其人而然歟 可歎 嗟吾半世之間 費盡心力 亦云勞止 嗚呼 吾諸子孫 若從姪從孫諸人 體念余積年苦心 如曺丞相之一遵蕭相國約束 又能增益之張大之 則范文正之義庄 何足多讓也 大抵根固則枝繁 源深則流長 右所云云 豈吾自成就也 吾門祖乎文成 宗乎文康 而王考先君 傳受心法 積累旣厚 後來子孫那無食報之慶耶 嗚呼 先君所命 庶俟符驗於將來也
崇禎四癸未二月上浣 昌勳 謹識
안씨 의장에 관한 사실을 기록함
직우당 지음
아! 우리 집안 의장(義庄)은 옛날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명한 것이다. 우리 백부(伯父: 안세림)가 자주 병을 앓아 섭생하느라 집안 일을 선군(先君: 돌아가신 아버지. 곧 안세집)에게 일임하니, 백종씨(伯從氏: 안창징)가 자립하기 이전에 종가의 크고 작은 일을 돌아가신 아버지가 실제로 주장하였다.
정축년(1757)에 은봉(隱峰: 안방준) 선조의 묘사(墓祀)를 우리 대소가가 힘을 합쳐 봉행한 뒤, 백종씨가 종중(宗中)으로 가서 제조(祭租) 5섬을 받아 여섯 냥으로 환전하여 돌아왔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자식과 조카들을 불러 훈계하기를 “우리 집안이 고단하게 내려오다가 우리 형제에 이르러 너희들 7명을 낳으니, 어찌 할아버지(매계공 안후상)가 적선(積善)하여 얻은 경사가 아니겠느냐? 무릇 사람 사는 집안에 별도의 전답[別庄]과 문중의 곡식[門穀]이 없어 조상을 받드는 도리나 손님을 응접하는 방도에 손을 쓸 수 없으니, 이 돈으로 문중 곡식을 마련할 밑천으로 삼아 훗날 뜻밖의 재난에 대비하도록 하거라” 하였다.
여러 종형제들이 하명을 듣고 나와 마음과 힘을 합쳐 곡식을 사들이거나 내다 팔 때에 착오가 없으니, 5~6년 사이에 본전과 이자가 이미 50냥에 이르렀다. 임오년(1762)에 아버지가 세상을 뜨니 주체할 수 없는 애통한 심정을 어찌 차마 말로 다하랴? 그 후 문중 곡식이 점차 불려져 여러 가지 항목의 비용을 필요할 때마다 지출하게 되었고, 해마다 점차 보태지고 늘어나 장래에 문호를 보존할 희망을 크게 갖게 되었다.
기축년(1769)과 경인년(1770) 사이에 중종씨(中從氏: 안창현)가 선조의 문집[1773년(영조 49년)에 안창현(安昌賢)이 은봉(隱峰) 선조의 원집(原集) 초고를 목산(木山) 이기경(李基敬), 본암(本菴) 김종후(金鍾厚)에게 부탁하여 교정을 받고 5책 10권으로 편차한 뒤, 보성 대계서원(大溪書院)에서 목활자(木活字)로 『우산집(牛山集)』을 간행하여 세상에 보급했다.]을 간행하여 배포하는 일을 자기의 책임으로 여겨 서울을 왕래하느라 경비가 매우 많이 들었다. 계사년(1773) 무렵에 비로소 간행소를 설치하니 원근에서 서로 호응해 주었으나, 사업은 거대하고 재력은 미약하여 한 해가 지나가도록 일을 마무리짓지 못하고 쓸 돈이 먼저 바닥났다. 하는 수 없이 문중 재산을 다 쏟아 겨우 일을 끝냈는데 문집 5책을 백여 질 밖에 인쇄하지 못해 널리 배포할 수 없었으니, 천천히 계획을 세워 대량으로 인쇄하지 못한 게 한스러웠다.
문계(門契)가 이미 깨진 뒤에 남은 것이라고는 산 위의 한 마지기뿐이었건만, 종형에게 아직 끝내지 못한 부채가 많았으므로 이 땅을 그대로 넘겨주었다. 이로부터 10여 년 사이에 문중에 돈을 쓸 곳이 생기면 명단을 보고 돈을 거두니 기상(氣象)이 괴롭고 답답하여, 다시 일으켜볼 방도를 두루 생각하였으나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갑진년(1784) 가을에 종형에게 고하여 한 마지기 논에서 생산한 벼 한 섬을 받아다가 을사년(1785) 봄에 이자를 받고 빌려주었으며, 가을에 또 벼 한 섬을 거두어 함께 이자를 받으니 벼가 도합 두 섬 열 말이었다.
병오년(1786)에 흉년이 들어 정미년(1787) 봄에 곡식은 비싸고 땅 값이 싸자, 이 벼로 들판의 논 세 마지기를 사서 가을에 네 섬을 수확하였다. 이것을 밑천으로 삼아 저축하여 때를 가다리기도 하고 돈으로 바꾸어 이자를 받기도 하니, 이 후로 다시는 명단을 보고 돈을 걷지 않았는데도 7-8년 사이에 옛날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었다. 선조의 시제(時祭)를 돌려가며 모시거나, 종중(宗中)에서 불시에 돈을 걷거나, 원근의 끊이지 않는 구원 요청이나, 기타 손님을 맞아 대접하는 일에 대해 절제하여 비용을 쓰고, 문중 일가의 길흉(吉凶)에도 적절히 헤아려 부조하니, 점차 두서가 잡히게 되었다.
종가(宗家)가 지탱하기 어려운 형편인지라 돈 25민(緡)을 내주어 옛날에 팔았던 제전(祭田) 다섯 마지기를 다시 사서 각위(各位)에 배당하고, 기일에 돈과 곡식을 내어 제사를 도와 종가를 보존할 방도를 마련하였다. 선조의 벼슬과 시호(諡號)를 청하는 두 차례 상소가 10여 년 동안 이루어져 4백여 민(緡)이 비용으로 지출되니, 두 차례에 들어간 비용이 이처럼 매우 많았지만 해마다 저축하여 때를 기다려 사용하였기 때문에 또한 손실을 입은 바 없었다.
이에 앞서 척사(尺紗)에 모신 4대 선조의 시제를 가까이 사는 자손으로 유사(有司)를 정하여 봉행하였는데, 우리 파(派)는 멀리 살고 숫자가 적다 하여 애초부터 거론하지 않았다. 병술년(1766)에 종중(宗中)의 의견으로 우리 파에도 유사를 맡기자, 백씨(伯氏: 안창규)가 몸소 종중으로 가서 종손 및 여러 종인(宗人)들과 서로 논의하기를, “후손이 되어 선조의 시제를 받들어 거행하기를 어찌 마다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시제를 모시는 도리는 예의와 제물이 다 갖추어진 뒤에야 제사를 드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70리 밖에서 국수와 떡을 만들고 솥에다 고기를 삶아서 3일 뒤에 묘소 앞에다 펼쳐놓으면 색깔과 맛이 모두 변하여 귀신도 흠향하지 않을 것이니, 이 어찌 정성으로 제사를 드리는 도리라 하겠습니까? 우리의 뜻은 봉해하는 절차는 예전처럼 하되 우리 파에서 해마다 벼 4섬을 내어 네 명의 유사를 돕는 것이 간편하고 적절한 방책이 될 듯한데 종중의 의견은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모두 말하기를 “참으로 이처럼 한다면 누군들 옳지 않다고 하겠는가?” 하니, 마침내 45냥으로 곧장 옥토(沃土) 네 마지기를 사고 벼 넉 섬을 주기로 약속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겨우 30여 년이 지난 갑자년(1804)에 나에게 유사(有司)가 부여되었다. 나는 족손(族孫) 명기(命紀)의 손을 빌려 여러 제물을 갖추어 몸소 찾아가 봉행한 뒤에 여러 종인(宗人)들에게 말하기를, “명기의 힘에 의지하여 오늘 시제를 편히 거행하니 매우 다행입니다. 그러나 해마다 벼 넉 섬으로 유사를 도운 것은 재물의 비용으로 말하면 차례대로 돌려가며 봉행하는 것보다 몇 갑절이나 됩니다. 그래도 그렇게 한 이유는 단지 시제를 간편하게 봉행하기 위해서였을 뿐입니다. 약속한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이제 어찌하여 이를 폐기하는 것입니까?” 하니, 온 좌중이 놀라 능히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또 말하기를 “은봉(隱峰) 선조의 묘사(墓祀)를 원근의 자손들에게 차례대로 돌려가며 봉행하도록 시키는 것은 또한 척사(尺紗)가 우리 파에게 했던 것과 같습니다. 이후로는 우리 파가 이 묘사를 전담하여 해마다 일정하게 봉행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모두 옷섶을 여미면서 답하기를 “이런 방법이 있었군요! 어르신의 말씀이 정례(情禮: 정감과 예절)에 합당하니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어 규약을 정하여 경건히 봉행해 온지 올해로 거의 20년이 되었는데, 훗날 다시 무슨 논의가 나올지 모를 일이다.
“여항(閭巷)에 숙(塾)을 두는” 것[『예기(禮記)』 「학기(學記)」편을 보면, “옛날에 선왕(先王)이 교육을 하면서 가(家)에는 숙(塾)을, 당(黨)에는 상(庠)을, 주(州)에는 서(序)를, 국(國)에는 학(學)을 두어 …”라고 했다. 여(閭)는 25호(戶)의 마을을 말하는데 각자의 집에 있는 자는 학업을 숙(塾)에서 받았기 때문에 ‘여’라고 하지 않고 ‘가’라고 했다.]은 옛날의 제도이기에, 서실(書室)을 중창하고 서책을 사들여 학문을 일으키는 근본으로 삼고, 지부(紙釜)와 지통(紙桶)[지부는 닥나무를 삶는 큰솥을 말한 듯하고, 지통은 종이를 뜰 때에 원료를 물에 풀어 담는 큰 나무통을 말함.]을 설치하여 비용을 보충하는 자료로 삼았다. 하지만 아직도 실제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가르치거나 배움에 근본이 없고 뜻을 겸손히 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러한 것이 아닐까? 탄식할 일이로다. 내가 반평생 동안 마음과 힘을 온통 기울였지만 또한 수고만 끼쳤으니 아! 슬프다. 우리 자손들과 종질(從姪)․종손(從孫)들이 내가 여러 해 동안 고심해온 바를 깊이 생각하기를 마치 조승상(曺丞相: 위나라의 조조)이 한결같이 소상국(蘇相國)을 따르듯이 하여, 약속(約束)을 또한 능히 늘려서 보태기도 하고 펼쳐서 키우기도 한다면, 범문정(范文正)의 의장(義庄)[북송(北宋) 초기의 명재상인 범중엄(范仲淹)을 말함. 자(字)는 희문(希文), 벼슬이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고 죽은 뒤에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 려왔고 공자(孔子)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송원학안(宋元學案)』 권1을 보면 “선생은 안으로는 강직하고 밖으로는 부드러웠으며 뭇사람을 사랑하고 선행을 즐겼다. 베풀기를 좋 아하여 마을에 의장(義莊)을 설치하고 일가 종족들을 넉넉하게 보살피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의 이름을 일컫기를 좋아하였다”고 적혀있다.]에 어찌 많이 뒤지겠는가?
대저 뿌리가 굳건하면 가지가 번성하고 수원이 깊으면 지류가 길게 흐르는 법이니, 위에서 말한 것들을 어찌 우리 스스로 이루겠는가? 우리 가문은 문성공(文成公: 회헌 안향)을 조(祖)로 삼고 문강공(文康公: 은봉 안방준)을 종(宗)으로 삼아 할아버지와 선군(先君)이 심법(心法)을 전수하여 은혜를 이미 두텁게 쌓았으니, 훗날의 자손들에게 어찌 보답을 받는 경사가 없겠는가? 아! 선군께서 하명한 바가 아마도 장래에 징험이 될 날이 있으리라.
숭정(崇禎) 4계미년(1823) 2월 상순에 창훈(昌勳) 삼가 지음.
4) 薦狀一 辛巳五月 日 儒生李憲鎭等二十五人
伏以 我聖朝五百年樹風聲勵世道之方 專在於彰其德明其善而已矣 凡有一行一節之士 皆有甄拔襃揚之典 德以之日興 善以之日勸 式克至于今日休 今日閤下之政 亦當以此爲先務矣 今日生等之論 亦當以此爲首件矣 玆以生等博採一道之公議 特取一世之最著 齊聲仰龥于按節旬宣之下 伏願閤下俯賜鑑納焉 本郡幼學安昌勳 卽文康公牛山先生五代孫也 平生實行 自成君子 營門曾已擧之於道薦之首 銓家曾已擬之於齋郞之首 萬口之公頌已發 一世之公案已成 而獨乃能於人不能於天 尙此淪落寂廖於草野之中 使斯人終若如斯而止 則於斯人不足爲多少 而顧世道不亦慨然也哉 朱夫子有曰 開千眼者 必有後 況能開一國之眼者 尤豈無闡揚旌別之擧乎 生等請言斯人素履之大槪也 大抵斯人也 乃全德人也 以言其修身也 則率性溫嚴 制行淳正 早謝科業 不求聞達 汎覽經史 深究疑義 抱負甚大 規模謹拙 口不言官吏之得失 足不到城市之紛鬧 名利不足以累其志 威武不能以屈其操 此則善行之著乎身者也 以言其齊家也 則事親克孝 躬極滋味 奉先克敬 身致祭田 友于兄弟 務盡雍睦 訓其子孫 俾篤忠孝 同堂之貧乏者 必分田而賑濟之 同閈之愚頑者 不下杖而化誘之 此則善行之施於家者也 乃若所居之地 僻在一隅 界接三邑 官吏之徵督太煩矣 人民之聚散無常矣 遂與面中人 刱出大經綸 一遵朱子社倉法 又倣呂氏鄕約禊 逐年出財 以應公役 民力賴是而紓焉 民口由是而殖焉 禮法興行 風俗丕變 此可謂君子之得輿也 至若勸學之方 廣開書塾 別立科條 鄕隣之俊秀者 拔而聚之 遠方之從學者 受而敎之 朝晝講習 日月刮劘 以成其美 文章賴是而蔚興焉 科聲由是而相繼焉 此可謂君子之育英也 頃當已甲 盡出私穀 無論同異族姓 遠近親戚 及隣里與故舊 或計口而分給 或量力而周恤 此正所謂仁者之積而能散也 嗚呼 凡此修身也 齊家也 利民也 誨人也 恤貧也 五件事卽斯人之平日所行也 爲今之人者 雖有此一德 亦足爲善士 況五德全備 至老彌篤者乎 惟其所性案於韜晦 惟恐人之或知 而好是之心 人之所同 則人孰不爲斯人而求知於人哉 乃者生等略擧其實德 先呈于本官 官題雖有轉報之意 而只俟其報 亦涉緩忽 遂乃裹足遠到 敢此拜手幷陳 伏乞閤下勿謂言者之卑微 特念賢者之卓越 拔例啓達 俾卽褒闡收用之地 不勝幸甚
추천장 1신사년(1821) 5월 모일에 유생 이헌진 등 25명이 올림
삼가 아룁니다. 우리 조정이 5백년 동안 가르침을 세워 도리를 장려한 방법은 오로지 덕(德)을 표창하고 선(善)을 천명한 데 있을 뿐입니다. 무릇 한 가지 덕행이나 절개를 행한 선비가 있으면 모두 적절히 발탁하여 포상하는 은전을 베푸니, 덕이 이 때문에 날로 흥성하고 선이 날마다 권장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날마다 아름다워지고 있습니다. 오늘 합하(閤下: 정 1품 벼슬아치를 높여 부른 말)의 정치도 또한 이를 급선무로 여겨야만 하고, 오늘 저희들의 논의도 또한 이를 으뜸 안건으로 삼아야만 합니다. 이에 저희들은 한 도내의 공론을 널리 채집하되 특별히 당세에 가장 현저한 사람을 취하여 이구동성으로 관찰사에게 천거하오니, 삼가 합하께서 굽어살펴 채택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군(郡)의 유학(幼學) 안창훈(安昌勳)은 곧 문강공(文康公) 우산(牛山: 안방준) 선생의 5대 손입니다. 평생 참된 행실로 스스로 군자(君子)가 되니 영문(營門: 관찰사가 집무하는 관아)에서 일찍이 도천(道薦, 감사(監司)가 자기 도내(道內)의 학식이 높고 유능한 사람을 임금에게 추천하 는 일.)에 으뜸으로 천거하였고, 전가(銓家, 조선조 때 문관과 무관의 전형(銓衡)을 맡은 이조(吏曹)와 병조(兵曹)를 일컫는 말. 전조(銓曹)라고도 함.)에서도 이미 재랑(齋郞: 참봉의 별칭)에 으뜸으로 의망(擬望, 관원을 임명할 때 먼저 문관은 이조(吏曹), 무관은 병조(兵曹)에서 후보자 세 명을 정하여 임금에게 올리는 일.)하였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이 공공연히 칭송하고 세상의 공안(公案, 원래는 관아의 조서(調書)였는데 선종(禪宗)에서는 큰스님이 제자를 인도하던 사실을 기록하여 후세에 공부하는 규범으로 삼게 한 것. 여기서는 공정하여 범하지 못할 법령처럼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표준이라는 뜻이다.)이 이미 이루어졌건만, 어찌하여 사람들에게는 인정을 받고 하늘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여 오히려 이처럼 초야에 버려 쓸쓸히 지내게 한단 말입니까? 이 사람으로 하여금 끝내 여기에 그치게 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득이나 해가 되지 않겠지만 세상의 도리를 되돌아볼 때 또한 개탄하지 않겠습니까?
주부자(朱夫子: 주희)는 말하기를 “천 명의 눈을 뜨게 해준 자는 반드시 후사(後事)가 좋으리라” 하였습니다. 하물며 능히 온 나라의 눈을 뜨게 해준 자라면 어찌 들춰내어 선악을 따지는 일이 없겠습니까? 저희들은 이 사람이 평소에 보여준 행실의 대강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대저 이 사람은 곧 덕(德)을 온전히 갖춘 사람입니다. 그의 수신(修身)을 말해보면, 본성을 따라 온화하면서도 엄숙하였고 행동을 규제하여 순박하고 정직하였습니다. 일찍이 과거공부를 끊어 입신 출세를 꿈꾸지 않고 경사(經史: 경전과 역사책)를 널리 보아 의심난 뜻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포부는 매우 컸지만 규모는 겸허하였습니다. 관리들의 득실을 말하지 않고 시끄러운 도회지를 밟지 않았으니, 명예와 이익도 그 의지를 더럽힐 수 없었고 위세와 무력도 그 지조를 굴복시킬 수 없었습니다. 이는 선한 행실이 몸에 드러난 것입니다.
그의 제가(齊家)를 말해보면,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겨 몸소 맛있는 반찬을 준비했고, 선조를 공경으로 받들어 몸소 제전(祭田)을 마련했으며, 형제와 우애하여 힘써 화목을 다했고, 자손을 가르쳐 충효를 돈독히 행하도록 했습니다. 같은 집안의 가난한 자를 반드시 전답을 나누어 구제하였고, 같은 마을의 어리석은 자를 매를 때리지 않고 말로 순순히 교화하였습니다. 이는 선한 행실이 가정에 베풀어진 것입니다.
그가 살고 있는 땅은 한 쪽 모퉁이에 치우쳐 있어 3읍(邑: 순천․보성․동복)과 경계를 접하고 있는 만큼, 관리들의 세금 독촉이 매우 심하고 백성들의 모였다 흩어짐은 일정치 않았습니다. 마침내 면내 사람과 커다란 경륜을 발휘해 한결같이 주자(朱子)의 사창법(社倉法)을 준수하고, 또 여씨(呂氏)의 향약계(鄕約禊)를 모방하여 해마다 재물을 내어 공역(公役, 국가 또는 공공단체로부터 명령을 받은 의무나 부역(賦役).)을 충당하니, 백성들의 힘이 이에 의지하여 펴지게 되었고 백성들의 숫자가 이로 해서 불어나게 되었으며, 예법(禮法)이 일어나 행해지고 풍속이 크게 변화하였습니다. 이를 군자(君子)의 득여(得輿: 많은 사람을 얻음)라 말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학문을 권장하는 방법을 보면, 서당을 넓혀 개방하고 별도로 과목과 조약을 세워, 고을에서 준수한 자를 뽑아 모으고 먼 곳에서도 배우려온 자도 받아서 가르쳤습니다. 밤낮으로 강습하고 쉬지 않고 연마하여 훌륭하게 키워내니, 문장(文章)이 이에 의지하여 성대하게 일어나고, 과성(科聲: 과거시험에 합격한 명성)이 이로 해서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를 군자(君子)의 육영(育英)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근래 기갑(己甲)년을 맞아 자기의 곡식[私穀]을 모두 내어, 같은 일가인가 아닌가, 먼 친척인가 가까운 친척인가, 마을 사람인가, 옛 친구인가를 불문하고, 식구를 계산하여 나누어주기도 하고 힘을 헤아려 구휼하기도 했습니다. 이를 두고 “어진 이는 재물을 쌓았다가 잘 풀어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 무릇 수신(修身: 몸을 수양함)․제가(齊家: 가정을 다스림)․이민(利民: 백성을 이롭게 함)․회인(誨人: 사람을 가르침)․휼빈(恤貧: 가난한 자를 구휼함)하는 다섯 가지 일은 곧 이 사람이 평소에 행하던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 중에 한 가지 덕만 있어도 충분히 선한 선비[善士]가 되는데, 하물며 다섯 가지 덕을 두루 갖추어 늙어서도 더욱 독실한 사람이겠습니까? 오직 그의 성품이 숨어 지내는 것을 편안히 여겨 오히려 남들이 혹여 이를 알까 두려워하지만, 옳은 것을 좋아하는 마음은 사람마다 같은 것이니, 사람이라면 누군들 이 사람을 남에게 알리려 하지 않겠습니까?
이전에 저희들은 대략 그의 실제 덕행을 들어서 먼저 본관(本官)에게 글을 올렸습니다. 관제(官題)에서 비록 “전달하여 보고하겠다”는 뜻을 표했으나, 단지 그 보고를 기다리기만 하는 것도 또한 느슨하고 소홀한지라, 마침내 발을 싸매고 먼길을 걸어와 감히 절하고 아뢰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합하께서는 말하는 사람을 비천하고 미약하게 여기지 마시고 어진 이의 높은 덕행을 깊이 생각하여, 전에 없는 특별한 예(例)로 아뢰어 곧장 포상하고 거두어 쓰도록 해주신다면 무척 다행이겠습니다.
5) 薦狀二 丙申九月日 儒生朴奎煥等四十八人
伏以 士有卓犖之行 而生未需用於當時 死未旌褒於後世 公議愈鬱 誦義無窮 則齊聲一龥於旬宣之下 以冀闡揚之方者 烏可已乎 玆將寶城故孝子安昌勳實蹟照人耳目者 一一陳達 而前後所呈營邑繡衣文狀 幷爲帖聯 伏惟閤下特賜省覽焉 言其家世 則牛山先生文康公五世孫也 蓋其傳家詩禮 濟世經綸 百行俱備 而究其本源頭腦 則何莫非一孝字中做出來也 第其童年失怙 哀慕執喪 無異成人 就傅課讀 若在親傍 時或登高號哭 遑遑靡逮 萱闈就養 克盡誠敬 家雖不贍 而甘旨之供 務盡誠心 及其慈癠 以帶下症積年沈痼 百藥無效 日與其弟釣得川魚 稍有微效 醫云鱉湯最利於病 一日來釣於川邊巖石上 投之一竿 竿絲沒入水中 曳而出之 則幾至巖前 絲斷鱉墜於水中 乃以手探之巖前 則潛伏入手 歸供藥餌 終得天和 此或有至誠所感歟 至於衣服之節 預爲營辦 無所闕乏 比諸古人 體無全衣 親極滋味 豈足多讓乎 及其後喪 送終諸節 務盡孝心 哭泣之哀 弔者感歎 粢盛之潔 禮經是從 風樹之感 老而冞篤 未嘗不對人泫然傷痛 見人之孝於親者 則雖在下輩賤隸 必尊異而揄揚之 其於知舊間貧乏者 以其親爲辭 則輒施其所請焉 致祭田於宗家 俾供祀事 每當忌辰 不以衰老自畫 躬自行事 追慕之私 如在袒括之日 而扁堂以思亭者 亦取其瞻望先楸也 此於終身慕者 不其近之乎 兄弟有甚貧窶者 分其所有田地 至於出嫁姊妹亦如之 先先生贈爵諡也 雖因士林公議 而蓋其苦心血誠 有足以感神格天者矣 遠代墓所 亦致祭田 以供歲祀 而自五世以下石物 一一營建 窮經行義 克述家學 至或有經史疑奧處 對案忘飯 達夜不寐 期於透到 不喜著述 務自韜晦 然砥礪矜式 士林有所倣仰 惟其聰明强記 逈出人上 雖經史之佶屈灝噩者 一二閱眼 便得成誦 至於末年 瞭然不忘 每朗誦寧陵誌 萬東廟文 以寓感慨 凡其器量甚偉 鑑見出等 諸所施爲 莫不鑿鑿中窾 平生怡靜自守 若無意於世事 然愛君憂國 出於至誠 粵在壬申西變 南土騷動 遠近士友 皆有擧義之論 欲推爲義兵將 輒慨然奮發曰 吾南素是士夫 冀北倡義 常爲諸道先 今亦豈可無敵愾踵武之擧乎 某雖草野閒蹤 奔國家之急 以承先烈 素所蓄積也 其敢辭乎 旣而賊平乃已 凶歲周窮 遠近親戚 歸之如家 設書塾而敎以義方 作成人才 修社倉而申明鄕約 補民徭役 蓋其享年大耋 無少間斷 表裏如一 動容周旋 日用事物 無或近於邊幅 而自有得於天賦者 玆豈非推孝而及物之仁 而不待求之日用常行之外矣 肆於去庚午 式使家擧之以道薦之首 銓曹擬之於陵齋之首 雖不幸未蒙一命而沒 而一鄕之公議 卽一道之公議 一道之公議 卽一國之公議也 當聖朝野無遺之世 使廟堂之姿 老於蓬蓽而沒 又與草木同腐 則尤豈不爲可惜者乎 今者幸逢閤下恢公之日 郵當式年抄啓之時 此誠千載一時不可失之好會也 伏乞閤下俯察生等之公議 特擧安昌勳孝行 啓聞天陛 贈以美職 樹之風聲 利礪頹俗 世道幸甚 士林幸甚
추천장 2 병신년(1836) 9월 모일에 유생 박규환 등 48명이 올림
삼가 아룁니다. 선비에게 뛰어난 행실이 있는데도 살아서는 당시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죽어서는 후세에 포상을 받지 못하여 공론은 더욱 막혀가지만 행의(行義)를 칭송함이 그치지 않는다면, 이구동성으로 관찰사에게 호소하여 선양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이에 보성(寶城) 출신으로 고인이 된 효자(孝子) 안창훈(安昌勳)의 실제 행적이 사람들의 이목에 잘 알려진 것을 하나하나 아뢰고, 두 차례에 걸쳐 영읍(營邑)과 암행어사에게 올린 글을 함께 첨부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합하(閤下)께서는 특별히 살펴주십시오.
그의 가세(家世)를 말해보면, 문강공(文康公) 우산(牛山: 안방준) 선생의 5세 손으로 시례(詩禮)의 가르침을 전수 받아 세상을 구제할 경륜을 쌓고 백 가지 행실을 두루 갖추었는데, 그 근원이 되는 핵심을 탐구해보면 모두 하나의 ‘효(孝)’라는 글자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애모(哀慕: 슬퍼하며 사모함)의 정으로 상을 치느니 어른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스승에게 나아가 글을 읽을 때에는 마치 어버이가 곁에 계신 듯이 여겼으며, 때때로 높은 산에 올라 슬피 곡하느라 몸을 가누지 못하였습니다.
어머니를 봉양할 때에는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으니, 살림이 비록 넉넉하지 못하였지만 맛있는 반찬을 드리기에 성심을 다 기울였습니다. 어머니가 병이 들어 대하증(帶下症)으로 여러 해 동안 고생하여 백약(百藥)이 무효하자, 날마다 아우와 함께 천어(川魚)를 낚아 반찬으로 해드려 약간의 효험을 보았습니다. “자라탕[鱉湯]이 그 병에 가장 이롭다”는 의원의 말을 듣고, 하루는 냇가 바위 위로 가서 낚싯대를 한 번 던졌는데 낚싯줄이 물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이를 끄집어내어 거의 바위 앞에 왔을 때 낚싯줄이 끊어져 자라는 물 속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곧 손으로 바위 앞을 더듬어 잠복한 자라를 잡아 집으로 돌아와서 약으로 다려 올려 끝내 원기를 되찾으니, 혹 지극한 정성에 감응한 것일까요?
심지어 의복도 때에 맞추어 미리 마련하여 부족함이 없게 하니, 옛사람이 몸에 온전한 옷을 걸치지도 못하면서 몸소 맛있는 음식을 준비한 것과 견줄 때, 어찌 많이 양보해야할 것이겠습니까? 어머니 상을 당하여 장사지내는 모든 일에 슬피 애도하는 효자의 마음을 다 쏟으니 조문하러 온 사람들이 감탄하였습니다. 제사 음식을 깨끗이 장만하여 『예경(禮經)』에 따라 행하였고, 부모를 그리는 마음은 늙어서도 더욱 독실하여 사람을 대해 눈물을 흘리며 가슴 아파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사람을 보면 비록 아랫사람이나 천한 백성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존경하여 선양해 주었고, 옛 친구 중에 가난한 자가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말하면 곧 청을 들어주었습니다. 종가에 제전(祭田)을 주어 제사에 이바지하도록 했으며, 항상 기일을 맞아 늙어 쇠약하다고 말하지 않고 몸소 행하니, 추모하는 마음은 단괄(袒括)하던 날[초상(初喪)이 났을 때의 매우 슬픈 심정을 말함. 단괄은 초상 때 웃옷 의 왼쪽 소매를 벗는 일[袒]과 관을 벗고 머리를 묶는 일[括].]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집의 편액을 ‘사정(思亭)’이라 한 것도 또한 선조의 묘소를 바라본다는 뜻을 취했으니, 이는 ‘몸이 다하도록 사모하는[終身慕]’ 자에 가깝지 않습니까?
형제 중에 매우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가지고 있는 전답을 나누어주고, 시집간 자매에 대해서도 꼭 같이 하였습니다. 우산(牛山) 선생의 증작(贈爵)과 증시(贈諡)를 청할 때에도 비록 사림(士林)의 공론을 따른 것이지만, 대개 그의 고심과 혈성으로 신명과 하늘을 감동시킬 수 있었습니다. 먼 조상의 묘소에도 제전(祭田)을 마련하여 시제를 모시도록 하였고, 5세 이하의 석물(石物)을 하나하나 세웠습니다.
경전을 연구하고 의리를 행하여 능히 가학(家學)을 이었는데, 혹 경전과 사서에 의심난 곳이 있으면 책상을 마주하여 밥 먹는 것도 잊고 밤이 되어도 잠자지 않은 채 분명하게 알려고 노력했습니다. 저술을 좋아하지 않고 스스로 숨어살려고만 했으나 학덕을 갈고 닦아 본보기가 되니, 사림(士林)들은 본받아 우러를 곳이 있었습니다. 총명함과 암기력은 남보다 훨씬 뛰어나 비록 경전과 사서의 난삽한 구절이라도 한두 번 읽어보면 곧 암송할 수 있었는데, 말년이 되어서도 환히 기억하였습니다. 항상 「영릉지(寧陵誌)」와 「만동묘문(萬東廟文)」을 낭송하면서 감개무량한 마음을 되새겼습니다.
재주와 도량은 매우 크고 학식과 견문이 남달라 시행하는 일마다 조리가 명확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평생 편안하고 고요히 자신의 지조를 지켜 세상사에 뜻을 두지 않는 듯하였으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습니다. 지난 임신년(순조 12, 1812)의 서쪽 변란[용강(龍岡) 사람 홍경래(洪景來)가 박천(博川)․정주(定州) 등지에서 일으킨 난 리. 이 난리는 정확히 신미년(1811) 12월에 일어났다가 이듬해 5월에 평정되었다.]으로 남쪽 지방이 소란하게 움직이자, 원근의 사우(士友)들이 모두 의병을 일으키기로 논의하고 그를 의병장에게 추대하려고 하니, 문득 개연히 분발하여 말하기를 “우리 남도는 본래 사대부(士大夫)가 북쪽을 돕기 위해 의병을 일으킬 때 항상 여러 도(道)보다 앞장섰으니, 이번에도 또한 어찌 적개심으로 뒤를 이어 거의(擧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비록 초야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지만 나라의 위급한 곳에 달려가 선대의 열사(烈士)를 잇기를 평소부터 생각하였으니, 감히 사양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얼마 후 역적이 평정되어 그만두었습니다.
흉년에는 궁핍한 자를 구휼하니 원근의 친척이 자기 집처럼 몰려들었고, 서당을 세워 의로운 방법으로 가르쳐 인재를 양성했으며, 사창(社倉)을 보수하여 향약(鄕約)을 다시 밝히고 백성들의 요역(徭役: 나라에 제공해야할 노동력)을 도와주었습니다. 향년이 대질(大耋: 70-80세의 노인)에 이르러서도 조금도 간단(間斷)없이 겉과 속이 한결같아, 자신의 행동거지나 일상의 사물을 대함에 외양(外樣)에 치우친 적이 없이 스스로 하늘이 부여한 본성에 따랐으니, 이 어찌 효(孝)를 미루어 남에게 인(仁)을 베풀되 반드시 일상의 행실 속에서 구하려고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침내 지난 경오년(1810)에 관찰사가 도천(道薦)에 으뜸으로 천거하고, 전조(銓曹)에서도 재랑(齋郞: 참봉의 별칭)에 으뜸으로 의망(擬望)하여 비록 불행하게 한 번의 은명도 받지 못하고 죽었으나, 한 고을의 공론(公論)은 곧 한 도(道)의 공론이요 한 도의 공론은 곧 하 나라의 공론인 것입니다. 재야에 유현(遺賢)이 없는 성조(聖朝: 거룩한 헌종의 조정)의 세상을 맞아 묘당(廟堂: 나라의 정치를 다스리는 조정)의 자질을 가진 이로 하여금 가난한 집에서 늙어죽게 하고 또 초목과 함께 썩어가게 한다면, 어찌 더욱 애석한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요사이 다행스럽게도 합하(閤下)의 회공(恢公, 과거시험을 볼 때나 도목(都目: 국가적인 범위에서 벼슬아치의 성적이 좋고 나 쁨을 기록해 놓은 것)할 때에 지극히 공정하게 함.)할 날을 만났고, 또 식년(式年)의 초계(抄啓)[식년은 자(子)․오(午)․묘(卯)․유(酉)가 드는 해로, 이 해에 과 거시험을 보이고 호적(戶籍) 등 정기적인 정리를 한다. 초계는 초록(抄錄)하여 상주(上奏) 함. 곧 인재를 선발하여 아뢰는 것이다.]할 때를 당했으니, 이는 참으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놓칠 수 없는 좋은 기회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합하께서 저희들의 공론을 굽어살펴서, 특별히 안창훈의 효행(孝行)을 전하께 아뢰어 아름다운 관직을 내려주시고 올바른 기풍을 세워 무너진 풍속을 바로잡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세도(世道: 세상의 도리)에 매우 다행이겠고 사림(士林)에게도 무척 다행이겠습니다.
6) 行 狀
本貫京畿道竹山府
高祖諱逸之故宣敎郞 妣宜人新平宋氏
曾祖諱崴故不仕 妣光山李氏
祖考諱後相故不仕號梅溪 妣昌寧曺氏咸陽朴氏光山金氏
考諱世楫故不仕 妣廣州李氏光山李氏
先君諱昌勳 字德老 姓安氏 其先蓋出順興 有諱子美 高麗興威保勝別將 追封神虎衛上護軍 歷上護軍諱永儒 太師諱孚 至諱裕 修文殿太學士 海東儒學提擧 號晦軒諡文成 從祀文廟 歷順平君諱于器 順興君文淑公諱牧 至竹城君文惠公諱元衡 政堂文學 三重大匡輔國門下侍中 以功移封 遂貫竹山 德業爵秩 奕葉相承 傳十世而至諱邦俊 自號隱峰 學者稱爲牛山先生 受業牛溪成文簡先生 擧隱逸 拜翊衛持平掌令工議不就 贈吏參加賜吏書諡文康 寶綾同三邑皆建院而享之 賜額致祭 宣敎府君隱峰府君之季子也 天資卓異 體得庭訓 明於詩禮 不幸早世 人皆嗟惜 以爲斯文衰矣 曾祖府君事親至孝 鄕隣至有咏歌者 梅溪府君孝友篤至 不事擧業 專意於劬書飭躬 鄕約社倉大爲一坊之蒙惠 至今稱之 連入繡衣道臣之薦聞 未及獲受一命而卒 性潭宋先生撰墓誌 極其揄揚 考府君篤學力行 甚爲士友推重 奉親盡其誠 事兄極其友 嘗拜陶庵李文正 深被期詡 早用力於賦策 思以榮親 及親沒盡棄擧業 專心爲己之學 隱遁無憫 妣光山李氏萬成之女 以英宗戊辰十一月初四日 生先君於寶城牛山里第 自幼剛毅正直 動止異常 六歲患黃疸瀕危 擧家憂遑 考府君夢族叔同福公而告之藥 同福公諱壽相精於醫 時下世已久 依其方治之卽效 人皆大以爲異 及就傅受課讀于隣塾 塾在大川西偏數里 逐日涉水往來 雖祁寒未嘗少懈 勵志刻苦皆類此 甫成童丁外艱 執喪如成人 弔者莫不歎服 旣免喪 生事益廖落 奉養母夫人 甘旨之供 未能如宜 遂幹蠱躬稼 不暇於書冊 以此不得大肆力於文章 終身以爲恨 甲午丁內艱 制除益無復當世意 遂謝絶擧業 晦迹林園 專以溫理舊業訓誨子姪爲務 舊有書塾在山中 卽梅溪府君所刱者也 歲久頹落 甲辰先君發議重修 大其規模 使學者遊處其中 遠近來會 文學蔚興焉 先是隱峰府君 當光海甲寅 遯迹于牛山 築壇於溪上 列植松梅 杖屨逍遙 經歷百有餘歲 壇圮而溪堙 鞠爲蕪草 崇禎三甲寅春 先君就其故址 修治如舊 又鑿池于其北 其後作亭于池上 扁以松梅 景致幽暢 甚有溪山之趣 歲乙丑幹鄕約社倉事 因梅溪府君舊規而增益之 取土數十石 貯穀數百斛 補民防役 比前尤益大焉 隱峰府君貤贈節惠之典 積世未遑 當癸酉歲 卽府君嶽降五周甲也 先君慨然曰 爲先大事 苟非至誠 萬無有成之理 而亦不可推諉於人也 於是送仲子壽宅於京師 封儒疏叫閽 加贈正卿兼帶如例 秋奉敎旨 焚黃于家廟 翌年春又爲疏擧請諡 至丙子該曹始爲回啓 庚辰春諡命乃下 辛巳二月行延諡於花樹軒 前後所入錢財不貲而皆取辦於家矣 嘗曰世人有財 盡失之浮華 甚可惜也 是以平生衣食 絶袪華美 如未合義 財雖少未嘗放過 苟合於義 財雖多未嘗少吝焉 當已甲大無全以周窮恤匱爲務 遠近宗族知舊 逐日沓至 先君左酬右應 少無苦厭之色 且癘疾大熾 方病者新經者 無不闌入盈門 左右愍之 請少加防閑 先君不聽曰 是有命焉 終不少變 亦終無恙 前後士林 擧先君行義 累呈于營邑 歲庚午巡相李公冕膺 擧爲道薦之首 其臘政長銓朴公宗慶 擬於恭陵齋首望 未蒙恩點 士流莫不慨惜 丁丑秋疾病 數朔沈重 一坊之人 日日候問相續 旣愈遂設宴而慶之 丁亥夏患泄痢甚重 少間曰吾嘗以暑月死爲甚難 今幸免夫 翌年戊子五月復患泄痢 竟以六月二十七日考終 享年八十一 豈大運有限而先有所感於心者歟 方屬疾自知必不起 而略無怛化之色 從容整暇 無異平日 旣卒遠近聞者 咸曰君子亡矣 來弔者必盡聲焉 下至氓隸之賤 莫不悲號致奠焉 仁德之入人深者 亦可驗矣 嗚呼尙忍言哉 先君資稟 純實沈靜 莊重嚴毅 自少人不敢以戱嘲加之 初嘗自以爲頗殤下急 晩年更濟以寬和 其見於儀形辭氣者 薰然可親 至其臨事 斷以義理 則有截然不可犯者 孝友之誠 出於天賦 當貧約時 所以事大夫人 左右無違 及至衣食稍饒 常以未及終養爲至恨 每語及必感傷泫然 追遠之誠 至老彌篤 優致祭田於禰廟 從姪壽五 以宗子貧且無子 先君以第二孫使之後 而且致祭田 至於遠代墳墓 亦皆致田 俾得薦享無闕焉 文康府君爵諡之擧 挺身擔夯以至竣事 而墓所石物 積年經紀以備立 其齋舍則臨終遺囑從子壽行族孫洙再從孫命集等 指授區劃以得成就 季氏性多忤 先君委曲將就有人所難能者 終得其歡心 至於出嫁姊妹 曲盡友愛 有貧乏者 則爲買田宅而居之 撫孤甥授之室而經理其家事 俾不失 所與人交重然諾 不以死生窮達二其心 平居簡重肅穆 或竟日夜 嗒然無一語 家衆畏伏 闃然若無人聲 敎導諸子 必以學問爲主 嘗曰擧業是學問中一事也 今世分而貳之 甚可歎也 又曰無識無食 俱不可也 名爲學問 而闊於生事 是豈爲己之道也 又曰人之所以相傳者 只是仁而已也 凡物之種而可生者 必謂之仁 如醫書所云桃仁杏仁等類可見矣 天地生物之心 而人得以爲心者 豈不信哉 又曰 日用應接當以不欺人爲第一心法 見欺於人者 其害猶小 欺人之害甚大 可不戒哉 省事以來 居常點檢 則福善禍淫之理 甚昭昭 或有遲速 或有遠近 而大抵符驗不僭焉 世之謂天道無知 而自懈於爲善者 何足道哉 聞人之善 推借如不及 雖在閭巷下賤 苟以孝烈有實行者 則必爲之思所以闡揚之方 與老者言 必語其敎誨子弟之道 與少者言 必語其劬書飭躬之法 人家子弟 或有優遊惰業者 則必正色直斥 無少饒假 尤長於譬曉 家僮之頑鈍者 村民之愚騃者 不下一杖 諄諄敎誡 使之感化 平生恬靜自守 若無意於世事 然愛君憂國 出於至誠 傷時論事 感激動人 至其識見思慮 必本於義理 而參以事情 故若燭照數計而無不脗合 於日用事物之理 無不通曉 下至農工技藝土木金石等事 亦皆察其情僞 而知其所以然之妙 故人樂爲之用而不忍欺負 家間凡百器用 至微細物 莫不精緻 曲有理致 於書聰明强記 絶出等倫 雖古人聱牙者 一二覽輒成誦 久而不忘 至大耋未嘗少衰焉 其利澤之及物者 則宗禊洞穀 皆無中生 有大爲久遠之圖 至鄕約社倉 則因舊制而潤色之 以惠乎一坊者 將及於無窮矣 初號三愧 蓋謂仰愧天 俯愧人 內愧心也 晩號職憂 蓋取唐風職思其憂之義也 先君初年 貧窮無以聊生 將議親伯仲氏及羣從氏 咸以爲生理如此 不可不從俗取財 以爲生有所指擬 先君不肯曰 婚娶論財 旣云不可 且大丈夫不能自爲身謀 而欲依人生活 不亦可羞之甚乎 終不聽 同郡珍原朴公守彧 卽竹川先生六世孫也 聞而賢之 以女女焉 我先妣婦德甚備 事姑孝 事先君敬以順 處娣姒信以惠 敎子弟必以義方 接待妾御下至婢使 莫不各有恩義 先妣生於丁卯十一月初九日 以戊辰八月二十五日卒 享年六十二 其十月葬于牛山下庚坐原 有男三人 長壽祿次壽宅皆業儒 次壽國有篤志明經 不幸早殀 女壻高哲鎭李象休許銘 庶子壽朋壽身壽欽 庶女壻崔養秀一女幼 而壽朋壽身崔室皆殀 壽祿有子命允命修命常 命修卽先君所命爲宗家後者也 二女壻朴應休韓友儁 壽宅有子命敎 餘子女皆幼 壽國有子命庸女幼 高哲鎭有子濟儒餘子女幼 李象休有子鎭岳餘子女幼 許銘有子女幼 命允有子彙餘皆幼 嗚呼 以先君志行之高 抱負之重 使見知於世 有所展布 功業所就 有不可量 而不知不慍 遯世無憫 才不爲世用 志不得少伸 以歿其世 無乃世道之舛耶 抑所謂名數者使然耶 嗚呼痛哉 獨其遺訓炳然 使後人不迷於趨向者 可謂至矣 而不肖等質魯才下 行之不力 無以副疇昔之望 而慰泉壤之思 不孝之罪 孰大於是也 葬時以日家所拘 未得雙塋 而其年八月 聊且權安於先妣兆下而坐酉焉 未免位次之失序 故方營別求新穴 遷奉而姑未能焉 不肖子等寃號追慕 無所逮及 [辛卯四月初九日辛卯 移窆于順天松廣面 倒龍洞辛坐之原] 竊惟納銘幽堂 揭表墓前 以告後世 蓋自近古以來 未之有改 而先君平生言行 實有不可不傳者 故用敢述其一二 以告于當世立言之君子 伏惟幸垂憐而擇焉
庚寅十二月日 男壽祿 謹錄
행 장
본관은 경기도 죽산부(竹山府, 지금의 경기도 안성군과 용인군 지역에 있었다. 조선조 중종 38년(1543)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켰다. 연창(延昌) 또는 음평(陰平)이라고도 함.)
고조의 휘(諱)는 일지(逸之). 작고함. 선교랑. 고조비는 의인 신평송씨이다.
증조의 휘는 외(崴). 작고함. 벼슬하지 않음. 증조비는 광산이씨이다.
할아버지의 휘는 후상(後相). 작고함. 벼슬하지 않음. 호는 매계(梅溪). 할머니는 창녕조씨․함양박씨․광산김씨이다.
아버지의 휘는 세집(世楫). 작고함. 벼슬하지 않음. 어머니는 광주이씨․광산이씨이다.
선군(先君: 돌아가신 아버지)의 휘는 창훈(昌勳)이요 자는 덕로(德老)요 성은 안씨(安氏)이다. 그 선계는 순흥(順興)에서 나왔는데, 자미(子美)가 고려조에 흥위보승별장(興威保勝別將)이 되었다가 나중에 신호위 상호군(神虎衛上護軍)에 봉해졌다. 상호군(上護軍) 영유(永儒)와 태사(太師) 부(孚)를 지나 유(裕)에 이르는데, 수문전 태학사(修文殿太學士)를 지내고 해동유학의 제거(提擧)가 되었으며, 호는 회헌(晦軒)이요 시호는 문성(文成)이요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순평군(順平君) 우기(于器)와 순흥군(順興君) 문숙공(文淑公) 목(牧)을 지나 죽성군(竹城君) 문혜공(文惠公) 원형(元衡)에 이르는데, 정당문학(政堂文學)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공(功)으로 봉지(封地)를 옮기니 마침내 죽산(竹山)이 관향이 되었다.
덕업(德業)과 벼슬아치가 여러 대에 걸쳐 이어지더니 10세(世)를 지나 휘(諱) 방준(邦俊)에 이르는데, 스스로 은봉(隱峰)이라 부르고 학자들은 우산선생(牛山先生)이라 불렀다. 문간공(文簡公) 우계(牛溪) 성선생(成先生: 성혼)에게 수업하고, 은일(隱逸)로 천거를 받아 익위(翊衛)․지평(持平)․장령(掌令)․공조참의(工曹參議)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이조판서로 올려 추증되고 문강(文康)이라는 시호가 내렸으며, 보성․능주․동복 세 읍에서 모두 서원을 세워 제사를 드리고 있다. 그 중에서 보성의 대계서원(大溪書院)은 사액(賜額)을 받았고 임금이 제사를 지낸 곳이다.
선교랑 부군은 은봉 부군의 막내아들인데 타고난 자품이 높아 부모의 가르침을 몸으로 터득하여 시(詩)와 예(禮)에 밝았으나 불행하게도 일찍 세상을 뜨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하며 “사문(斯文: 유학의 도)이 쇠약해졌다”고 말했다. 증조 부군은 어버이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는데 고을 사람이 이를 노래로 읊기도 하였다. 매계부군은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과거공부를 일삼지 않고 오로지 경서를 읽고 몸을 단정히 하는 데 뜻을 두었다. 사창(社倉)과 향약(鄕約)을 설치하여 한 고을에 커다란 혜택을 끼치니 지금도 이를 칭송하고, 잇달아 암행어사와 관찰사의 천장(薦狀)을 조정에 올렸으나 한 차례 은명(恩命)도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성담(性潭) 송선생(宋先生: 송환기)이 묘지명(墓誌銘)을 지어 덕행을 지극하게 들춰냈다.
고부군(考府君)은 학문에 돈독하고 행실에 힘써 사우(士友)의 추앙과 인정을 깊이 받았으며, 어버이를 봉양할 때엔 효성을 다하고 형을 섬길 적엔 우애를 극진히 하였다. 일찍이 도암(陶庵) 이문정공(李文正公: 이재)을 배알하여 기대를 한 몸에 받았고, 일찍부터 부․책(賦策: 과거시험의 형식)에 힘을 썼으나 이는 어버이를 영광스럽게 해드리기 위한 생각이었다. 어버이가 돌아가시자 과거공부를 다 버리고 위기지학(爲己之學: 자신을 위한 학문, 곧 성리학)에 전념하여 숨어살면서 세상사에 번민이 없었다. 어머니 광산이씨는 만성(萬成)의 딸인데, 영조 무진년(1748) 11월 4일에 선군을 보성 우산리 집에서 낳았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굳세고 정직하여 행동거지가 보통 아이와 달랐다. 6세에 황달을 앓아 위험한 지경에 이르니 온 집안이 걱정으로 정신이 없었는데, 고부군(考府君)이 꿈에서 족숙(族叔) 동복공(同福公)을 뵙고 치료약을 물었다. 동복공은 휘(諱)가 수상(壽相)으로 의학(醫學)에 정통[숙종(肅宗) 갑오년(1714)에 임금의 소명을 받고 어전에 나아가 병세를 진찰하여 평상으로 회복시켰다는 내용이 『족보(族譜)』에 실려있다.]하였으나 당시에 세상을 뜬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의 처방에 따라 치료하여 곧 효험을 보니 사람들이 모두 매우 이채롭다고 말했다.
스승에게 나아가 공부할 적에 일과(日課)에 따라 이웃 서당에서 글을 읽는데, 서당이 큰 하천 서쪽으로 3-4리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날마다 물을 건너 왕래하였으며, 추위가 매서운 날에도 조금도 게으름을 피운 적이 없었으니, 굳센 뜻으로 힘들게 공부함이 모두 이와 같았다. 겨우 성동(成童)의 나이[15세 이상의 소년을 지칭함. 『예기』 「내칙(內則)」에서 말하기를, “열다섯 살이 되거든 상시에 맞춰 춤을 추며, 활쏘기와 말타기를 배운다.”(成童, 舞象, 學射御)하였다. 때로는 8세 이상의 소년을 가리키기도 하나, 우산은 16세에 과거공부를 포기하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한 것으로 보아, 여기에서는 15세 이상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에 아버지 상을 당해 마치 어른처럼 상을 치르니, 조문한 사람들이 탄복하지 않음이 없었다.
탈상한 뒤로는 살림이 더욱 나빠져 어머니를 봉양할 적에 맛있는 반찬을 올리는 것도 여의치 못하였다. 마침내 무너진 살림을 일으키기 위해 몸소 농사를 짓느라 서책을 가까이할 겨를이 없었으므로 문장(文章)에 힘을 크게 쏟을 수 없었음을 평생 한으로 여겼다.
갑오년(1774)에 어머니 상을 당하였는데 탈상한 뒤로는 더욱 당시 세상에 뜻을 두지 않았다. 결국 과거공부를 끊고 자연 속에 묻혀 오로지 선조의 덕업(德業)을 익혀 자질(子姪)을 가르치기에 힘썼다. 예로부터 산중에 있던 서당은 곧 매계부군(梅溪府君)이 세운 것인데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져 내렸다. 갑진년(1784)에 선군의 발의로 다시 보수하여 그 규모를 확대하고 학자들로 하여금 거기에서 공부하도록 하니, 원근에서 모여들어 문학(文學)이 흥성하게 되었다.
이에 앞서 은봉부군(隱峰府君)이 광해군 갑인년(1614)에 우산(牛山) 땅으로 자취를 감추고 시내 위에다 단(壇)을 쌓아 소나무와 매화나무를 심고서 이곳을 찾아 노닐며 수양하였다. 그런데 백여 년이 지나 단이 허물어지고 시내는 막혀 온통 잡초 밭으로 변하였다. 숭정(崇禎) 3 갑인년(1794) 봄에 선군이 옛터를 찾아 옛날처럼 보수하고, 또 그 북쪽에다 연못을 판 뒤 연못 위에다 정자를 짓고 ‘송매(松梅)’라는 편액을 다니, 경치가 그윽하면서도 화창하여 제법 시내와 산이 어우러지는 풍취가 있었다.
을축년(1805)에 향약(鄕約)과 사창(社倉)의 일을 주장하였는데, 매계부군이 세운 옛 규모를 한층 증보하여 수십 마지기의 땅을 마련하고 수백 섬의 곡식을 저축하니, 부역(賦役)을 막아 백성을 돕는 것이 이전보다 훨씬 확대되었다.
은봉부군(隱峰府君)에게 내려야할 절혜(節惠, 임금이 죽은 신하에게 시호(諡號)를 주는 일. 또는 그 시호. 절일(節壹)이라고도 함. 『예기(禮記)』 「표기(表記)」편에 보면, “子曰, 先王諡以尊名, 節以壹惠, 恥名之浮於行也”라 하였다.)의 은전이 여러 대가 지나도록 이루어지지 않자, 계유년(순조 13, 1813) 곧 부군의 탄생 5주갑(周甲)을 맞아 선군이 개연히 말하기를, “선조를 위하는 큰 사업은 지극한 정성이 아니면 결코 이루어질 이치가 없고 또한 남에게 맡겨버릴 수도 없다” 하였다. 이에 둘째아들 수택(壽宅)을 서울로 보내 선비들의 상소문을 임금께 올려 정경(正卿: 정 2품의 관직)에 추증하고 관례에 따른 겸직(兼職)을 내려줄 것을 청하였는데, 가을에 교지(敎旨)를 받들어 가묘(家廟)에서 분황제(焚黃祭, 관직이 추증될 경우, 사령장(辭令狀)과 누런 종이에 쓴 사령장의 부본(副本)을 주면, 그 자손이 추증된 이의 무덤 앞에서 이를 고하고 누런 종이의 부본을 불태우면서 행하는 제사.)를 거행하였다. 이듬해 봄에 또 상소문을 만들어 시호(諡號)를 청하였으나 병자년(1816)에 이르러 해당 부서가 비로소 회계(回啓, 임금의 하문(下問)을 재심(再審)하여 상주하는 것.)하여 경진년(1820) 봄에 시호를 논의하라는 어명이 내렸고 신사년(1821) 2월에 연시(延諡, 선시관(宣諡官)이 시호(諡號)를 전달하면 그 본가에서 시호 받는 이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나와 의식을 행하고 맞아들이는 일. 본래 시호는 당국이 결정하여 그 본가에 연시(延諡)의 여부를 물어 받겠다면 선시관을 보내 선시하고, 가세가 곤란하여 연시할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경우에는 부득이 거절하게 되며, 따라서 신주에 그 시호를 첨서(添書)하지도 못함. 그러나 특별한 경우는 근신(近臣)이 왕에게 “아무개가 가난하여 연시하는 데 곤란이 있을 것”이라고 아뢰면, 어명으로 전곡(錢穀)을 내린다든지 수령(守令)으로 제수케 하여 그 관아에서 연시하도록 하는 수도 있었다.)의 잔치를 화수헌(花樹軒)에서 거행하였다.
두 차례의 일에 들어간 돈과 재물이 셀 수 없이 많았지만 모두 가산(家産)으로 충당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은 재물이 있으면 천박하고 화려한 일을 꾸미다가 다 잃어버리니 매우 안타깝다” 하였다. 이 때문에 평생 화사하고 아름다운 의식(衣食)을 접하지 않았으며, 만일 의리에 합당하지 않다면 재물이 비록 적다하더라도 슬쩍 넘어간 적이 없었고, 의리에 합당하다면 재물이 비록 많다하더라도 조금도 아낀 적이 없었다.
기갑(己甲)년을 맞아 크게 흉년이 들어 궁핍한 자를 구휼하기에 힘쓰니 원근의 종족과 오랜 친구들이 날마다 몰려들었으나, 선군(先君)은 이리저리 두루 응접하면서도 조금도 고통스럽거나 싫어하는 빛이 없었다. 또 전염병이 크게 번져 병을 앓는 자나 새로 걸린 자들이 모두 허락 없이 들어와 집안에 가득 찼다. 좌우에서 이를 근심하여 조금 막아야 한다고 청하자, 선군은 듣지 않고 말하기를 “이는 천명(天命)이로다” 하며 끝내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또한 탈이 없었다.
앞뒤로 사림(士林)들이 선군의 행의(行義)를 들어 누차 영읍(營邑)에 글을 올리고, 경오년(1810)에는 순상(巡相) 이면응(李冕膺)이 도천(道薦)에 첫 번째로 거론하였다. 그 해 섣달 인사정책에서 장전(長銓: 이조판서의 별칭) 박종경(朴宗慶)이 공릉참봉(恭陵參奉)에 의망(擬望, 관원을 임명할 때 먼저 문관은 이조(吏曹), 무관은 병조(兵曹)에서 후보자 세 명을 정하여 임금에게 올리는 일.)했으나, 은점(恩點: 임금의 낙점)을 받지 못하니 선비들이 애석해 하지 않음이 없었다.
정축년(1817) 가을에 병이 들어 여러 달을 위중하니 한 고을의 사람들이 날마다 안부를 물었고, 얼마 후 병이 낫자 마침내 잔치를 열러 경하하였다. 정해년(1827) 여름에 설사병을 앓아 매우 위중했다가 조금 뜸해지자 “내 일찍이 더운 여름에 죽을까 몹시 걱정했는데 이제 면하게 되어 다행이다”라고 말하였다. 이듬해 무자년(1828) 5월에 다시 설사병을 앓고 끝내 6월 27일에 목숨을 마치니 향년이 81세였다.
커다란 운명[大運: 죽음]은 한계가 있어 먼저 마음에서 느낌을 갖게 되던가! 바야흐로 병석에 눕자 결코 일어나지 못할 것임을 스스로 알아, 조금도 놀라거나 애태우는 빛이 없이 조용히 추스르며 때를 기다림이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이윽고 세상을 떠나자, 원근에서 소식을 들은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군자(君子)가 돌아갔다” 하였고, 조문 온 자들은 반드시 목놓아 울었다. 아래로 천한 백성에 이르기까지 슬피 울며 전(奠)을 드리니, 어진 덕이 사람에게 깊은 영향을 줌을 또한 징험할 수 있다. 아! 이를 차마 말로 다하랴!
선군(先君)은 타고난 바탕이 순수하고 침착하였으며 장중하고 굳세어, 젊어서부터 남들이 감히 희롱하거나 비웃지 않았다. 일찍이 스스로 “조급한 성격에 큰 고통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만년에는 다시 너그러움과 화목함으로 다스리니, 거동이나 말투에 나타나는 것이 훈훈하여 가까이할 수 있었으나, 일에 임하여 의리로 판단함은 칼로 자르듯 하여 범할 수 없었다. 효도와 우애의 참마음은 하늘에서 타고 나, 가난할 때에는 어머니를 섬기면서 좌우에서 떠난 적이 없었고, 의식(衣食)이 조금 넉넉해지자 항상 종양(終養: 부모가 죽을 때까지 봉양함)하지 못했음을 통한으로 여겨, 이를 말할 때마다 반드시 감상에 젖어 눈물을 줄줄 흘렸다.
조상을 추모하는 정성은 노년이 될수록 더욱 돈독하여 예묘(禰廟: 아버지를 모신 사당)에 제전(祭田)을 넉넉히 바쳤고, 종질(從姪) 수오(壽五)가 종자(宗子: 적장자)로 가난한데다 아들까지 없으니, 선군이 둘째 손자로 뒤를 잇게 하고 또 제전(祭田)을 마련해주었다. 심지어 먼 조상의 분묘에 대해서도 또한 모두 제전을 마련하여 제향을 빠짐없이 드리도록 하였다. 문강부군(文康府君)의 작시(爵諡: 벼슬을 추증하고 시호를 받는 것)에 관한 일을 앞장 서 걸머지고 끝을 보았고, 묘소의 석물(石物)을 여러 해 동안 경영하여 완비하였으며, 재사(齋舍)를 세우는 일은 임종할 무렵 조카 수행(壽行), 족손(族孫) 수(洙), 재종손(再從孫) 명집(命集) 등에게 부탁하고 경영할 계획을 지시하여 완성시켰다.
막내 동생의 성정에 거스르는[忤] 부분이 많으니 선군은 자세히 타일러 올바르게 나아가도록 하여 끝내 그의 환심을 얻었는데, 이는 사람들이 능히 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심지어 출가한 자매에게도 곡진히 우애를 펴 가난한 자가 있으면 전답과 집을 사서 살게끔 해주었고, 외로운 생질을 어루만져 장가를 들도록 하고 그 집안 일을 관리하여 잃지 않도록 했다. 남과 교제할 때는 (인품의) 무거움[重]으로 허락하였지, 죽음과 삶, 궁함과 통달함으로 두 마음을 먹지 않았다.
평소 거처할 적에 간중(簡重)하고 엄숙하여 간혹 온종일 멍하니 아무 말이 없으니, 집안 사람들은 두려움으로 고요하여 마치 사람소리가 없는 듯하였다. 여러 자식을 가르쳐 인도할 때는 반드시 학문을 주안점으로 삼아 항상 말하기를 “과거공부는 학문 중에 한 가지 일이건만 지금 세상에는 이를 둘로 나누니 참으로 한탄할 일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지식이 없는 것이나 의식이 없는 것이나 모두 옳지 않다. 학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살림에는 어두우니 이 어찌 자기를 위하는 방도[爲己之道]이겠는가?”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사람이 서로 전할 것은 단지 이 인(仁)일 뿐이다. 무릇 사물이 종자로 생겨나는 것을 반드시 인(仁: 씨앗)이라 부르니, 예컨대 의서(醫書)에 이른바 ‘복숭아씨[桃仁]’나 ‘살구씨[杏仁]’ 따위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늘이 만물을 낳는 마음을 사람이 얻어서 자기의 마음으로 삼았다는 것을 어찌 믿지 않겠느냐?” 하였고, 또 “일상에서 응접할 때에 마땅히 ‘불기인(不欺人: 남을 속이지 않음)’ 석 자로 마음을 닦는 첫 번 째 법으로 삼아야 한다. 어려서부터 죽 일상생활을 점검해보면 복선화음(福善禍淫: 선을 쌓으면 복을 받고 악을 지으면 재앙을 받음)의 이치가 매우 분명하다. 간혹 더디거나 빠르기도 하고 간혹 멀거나 가깝기도 하지만 대체로 부절(符節)처럼 들어맞아 어김이 없었다. 세상에서는 ‘천도(天道)는 무지하다’고 말하면서 스스로 선을 행하는 데 게으른 자가 있으니 어찌 말할 거리가 되겠느냐?”라고 말했다.
남의 선행을 들으면 추앙하여 마지않았는데 비록 시골 마을의 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효열(孝烈)을 실제로 행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 그들을 위하여 들춰낼 방법을 생각하였다. 늙은이와 말할 때는 반드시 자제를 가르칠 방도에 관해 언급했고, 젊은이와 말할 적에는 반드시 글을 읽고 몸을 추스를 방법에 관해 언급했다. 남의 집안의 자제 중에 혹 한가롭게 노닐며 학업을 게을리 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정색하여 곧은 말로 꾸짖되 조금도 너그럽게 봐주지 않았다. 더욱이 비유를 들어 일깨우는 데 능하여 아주 우둔한 집안 종이나 마을 사람에겐 매 한 대도 때리지 않고 순순히 가르치고 타일러 스스로 느껴 변화하도록 만들었다.
평생을 편안하고 고요히 자신을 지키면서 사느라 마치 세상사에는 아무런 뜻이 없는 듯하였으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지성(至誠)에서 나와 시국을 근심하여 정사를 논할 때면 감정이 격동하여 사람을 움직이게 하였다. 그 식견과 사려(思慮)는 반드시 의리에 근본을 두고 당시 정세를 참고하였기 때문에 마치 촛불을 비추어 셈을 하듯 정확히 들어맞지 않음이 없었다.
일상에 활용할 사물의 이치에 대해 두루 깨닫지 않음이 없었고, 아래로 농공(農工)․기예(技藝)․토목(土木)․금석(金石) 등의 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드러난 모습을 관찰하여 그렇게 된 오묘한 이치를 알아내었으므로, 사람들이 기꺼이 그를 위해 쓰이려고 하였지 차마 속이거나 저버리려고 하지 않았다. 집안의 수많은 기물(器物) 중 지극히 작은 물건에 대해서도 정밀하게 이치를 따져보지 않음이 없었다. 서책에 대해 남보다 뛰어난 총명함으로 잘 기억하여 비록 옛사람의 난삽한 어구라 할지라도 한두 차례 읽어보면 곧 암송하여 오래도록 잊지 않았는데, 대질(大耋: 80세의 노인)에 이르러서도 조금도 쇠약해진 적이 없었다.
이익과 혜택을 사람에게 베푼 것 중에서 종계(宗禊)와 동곡(洞穀)은 모두 무(無)에서 유(有)를 창출하여 크게 구원(久遠)의 계획을 세운 것이요, 향약(鄕約)과 사창(社倉)에 이르러서는 옛날 제도를 따라 윤색(潤色)하여 한 고을에 혜택을 주되 장차 무궁하게 베풀려고 한 것이다.
처음에는 ‘삼괴(三愧)’라 호를 지었으니 대개 우러러보니 하늘에 부끄럽고[仰愧天], 구부려보니 사람에게 부끄럽고[俯愧人], 속을 들여다보니 마음에게 부끄럽다[內愧心]는 뜻한다. 만년의 호는 직우(職憂)이니 대개 「당풍(唐風)」의 “어려울 때 제 직분을 생각하네”(職思其憂)[이 구절은 『시경(詩經)』 「당풍」 ‘실솔(蟋蟀)’ 3장에 나오는데 “귀뚜라미 방에서 우네, 농사 일도 끝났는가. 지금 내 즐기지 않으면, 세월은 가고 말리. 지나친 일 없는가, 어려운 때 제 직분 생각하게. 즐겨해도 지나치지 말 것이니, 저 양반들 편안하소”라고 했다. 이는 세모(歲暮)의 잔치에서 부르던 노래이다.]라는 뜻을 따온 것이다. 선군은 초년에 가난으로 편안히 살 수 없어 장차 큰형, 둘째 형 및 여러 종형과 상의하였는데, 모두 말하기를 “살림살이가 이와 같으니 풍속을 따라 재물을 얻어 생활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선군이 분격하여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하기를 “장가들면서 재물을 논함은 이미 옳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게다가 대장부는 스스로 내 몸을 위하여 도모할 수 없거늘 남을 의지하여 생활하려고 한다면 또한 매우 수치스럽다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끝내 듣지 않았다.
같은 군(郡)의 진원(珍原) 박수욱(朴守彧)은 곧 죽천(竹川: 박광전) 선생의 6세손인데 이를 듣고 어질게 생각하여 자기의 딸을 아내로 주었다. 우리 선비(先妣: 돌아간 어머니)는 아내의 덕을 두루 갖추어 시어머니를 효성으로 섬기고 선군(先君)을 공경과 순종으로 섬겼으며, 제사(娣姒:손아래 동서와 손위 동서)를 믿음과 은혜로 대하고 자제를 반드시 의로운 방도로 가르쳤다. 첩과 종들을 대할 때에도 각각 은혜와 의리로 하지 않음이 없었다. 선비는 정묘년(1747) 11월 9일에 태어나 무진년(1808) 8월 25일에 뜨니 향년이 62세였다. 그 해 10월에 우산 아래 경좌(庚坐)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3남을 낳았는데 장남 수록(壽祿)과 차남 수택(壽宅)은 모두 학업을 통해 선비가 되었고 그 다음 수국(壽國)은 뜻으로 돈독히 하여 경전을 공부했으나 불행하게도 요절했다. 사위는 고철진(高哲鎭)․이상휴(李象休)․허명(許銘)이요, 서자는 수붕(壽朋)․수신(壽身)․수흠(壽欽)이요, 서녀서는 최양수(崔養秀)요 딸 한 명은 아직 어리다. 수붕․수신․최실(崔室)은 모두 요절했다.
수록의 아들에 명윤(命允)․명수(命修)․명상(命常)이 있는데, 명수는 곧 선군의 명으로 종가의 뒤를 이은 자이다. 사위 두 명은 박응휴(朴應休)와 한우준(韓友儁)이다. 수택의 아들은 명교(命敎)요 나머지 자녀는 모두 어리다. 수국의 아들은 명용(命庸)이요 딸은 어리다. 고철진의 아들에 제유(濟儒)가 있고 나머지 자녀는 어리다. 이상휴의 아들에 진악(鎭岳)이 있고 나머지 자녀는 어리다. 허명의 자녀는 어리다. 명윤의 아들에 휘(彙)가 있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아! 선군의 높은 지행(志行)과 무거운 포부(抱負)가 당시 세상에 알려져 펼칠 수 있게 되었더라면 성취한 공업(功業)을 헤아릴 수 없었을 터인데,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고 세상에 숨어 번민하지 않았으며 재주는 세상에 쓰이지 않고 뜻을 조금도 펴보지 못한 채 세상을 마감하니, 세상의 도리가 어그러진 것인가? 아니면 이른바 운명이 그렇게 시킨 것인가? 아! 애통하다.
홀로 그 유훈(遺訓)이 밝게 빛나 뒷사람으로 하여금 나아갈 방향을 잃지 않도록 해주니 지극하다고 말할 만하나, 불초한 우리들은 바탕이 어리석고 재주가 낮아 힘들여 행하지도 못해 옛날의 희망에 부응하여 저승의 생각을 위로해 드리지 못하니, 불효한 죄가 이보다 무엇이 더 크겠는가?
장사지낼 적에 일가(日家)에 구애를 받아 쌍분으로 모시지 못하고 그 해 8월에 우선 선비(先妣)의 묘소 아래에다 임시로 안장하니 유좌(酉坐)의 언덕이다. 위차(位次)의 질서가 어긋났으므로 별도로 새로운 묘지를 구하여 옮겨 모시려고 경영했으나 아직도 그렇게 하지 못하였으니, 불초한 자식들이 슬피 울며 추모하여도 미칠 곳이 없다. 신묘년(1831) 4월 9일 신묘에 순천 송광면 도룡동(倒龍洞) 신좌(辛坐)의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가만히 생각건대 광(壙) 중에다 묘지명(墓誌銘)을 넣고 묘 앞에다 묘표(墓表)를 세워 후세에 알리는 것은 가까운 옛날부터 널리 해온 일이지만, 선군의 평생 언행(言行)은 실로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으므로 감히 한두 가지를 적어서 당시 세상에 올바른 평가를 해줄 군자(君子)에게 알리니, 불쌍히 여겨 채택해주길 간절히 바란다.
경인년(순조 30, 1830) 12월 모일에 아들 수록(壽祿)이 삼가 기록함.
7) 墓碣銘 幷序
士生詩禮之門 飭躬禔行 父有蠱而子克幹 祖有烈而孫克紹 以之敦倫範俗者 可謂孝矣 近古贈童蒙敎官職憂處士安公其人也 公諱昌勳字德老 職憂其號 安氏蓋出順興 以高麗別將諱子美爲鼻祖 歷二世有晦軒文成公諱裕 從祀文廟 爲東方倡學之祖 傳文順公諱于器 文淑公諱牧 至文惠公諱元衡 以功移封竹城君 因貫竹山 傳至鈍庵諱舳 除持平掌令皆不就 與金河西林石川竝稱三高 有諱邦俊 卽文康公隱峰先生 道學節義爲世儒宗 寔爲公五世祖也 高祖諱逸之宣敎郞 曾祖諱崴隱德不仕 祖諱後相世稱梅溪處士 贈司僕正 考諱世楫贈吏議 三世俱以孝聞 妣光山李氏萬成女 婦德甚備 以英祖戊辰生公 自幼歧嶷 大異凡兒 及就傅受讀 勵志刻苦 夙夜靡懈 雖奧辭佶倔 覽輒成誦 甫成童遭外艱 哀毁踰節 早而失怙 家事旁落 不得大肆力於文章 爲終身恨 養偏慈體無完衣 而甘旨相繼 及丁內憂 益無意於世 廢棄擧業 晦迹林樊 深究經傳 博極群書 至疑奧處 仰思俯讀 至忘寢食 融會內已 修梅溪公舊學舍 大其規模 使學者不失趨向 文風丕興 蔚然爲鄒魯之鄕 其鄕約社倉則克述先志 仍其舊而增益之 以惠坊民 又勤儉躬穡 家力稍舒 則自禰廟及遠墓 備石儀置祭田 薦享無闕 至於親戚知舊之貧乏者 亦盡心賙恤而不少吝焉 隱峰先生貤贈節惠之典 歷世未遑 而挺身擔夯 竟霑恩數 晩就隱峰手植松梅舊壇 起亭於側 扁以松梅 藏書累千卷 爲終老計 前後士林擧公行義 累呈營邑 道牘薦之繡啓 褒之恭寢郞擬首 而未蒙恩命 以戊子六月二十七日 考終于寢 享年八十一 遠近聞者咸曰 哲人萎矣 君子亡矣 上自韋布下至氓隸 莫不奔走悲號 執紼致哀者 以千數計 其仁德之入人深者 亦可驗矣 始厝于牛山之阡 辛卯移窆于順天松光面道龍洞負辛之原 憲宗壬寅 以金相公興根道啓 趙相公寅永筵奏 贈童蒙敎官朝奉大夫 噫公議之久而不泯 有如是耶 令人珍原朴氏 竹川文康公光前后守彧女 婉順有德行 閨法斬斬 女士罕儔 生丁卯卒戊辰 壽六十二 墓在牛山庚坐阡 擧三男 壽祿號五峰 以學行除參奉不赴 陞僉知 壽宅壽國 三女高哲鎭李象休許銘 側室男壽身壽朋壽欽 女崔養秀任慶材 壽祿子命允命浹命河 俱通德郞 命浹出系宗家后 女朴應休韓友儁 側室子命洛 女李炳夏李 壽宅自命和命天命直命舜命驥 女朴源喆宋懿萬 壽國自命庸女朴徠休 內外曾不盡錄 公後孫圭達甫 齎家狀徵余牲石之文 其至意烏可辭乎 竊念公以剛毅純正之姿 早承庭訓 專心爲己之學 一切勢利紛華 視之若浼 在家爲政則孝友敦睦 內外齊整 秩秩然有法度 其接人之容 春和如也 鎭物之量 海泓如也 恕以爲心 怒不遽色 至其臨事 斷以義理 則有截然不可犯者 嘗以不欺人三字爲一副心法曰 見欺於人 其害猶小 自我欺人 其害甚大 以是居常點檢 苟非學力有所蓄積 而能如是乎 若使之出爲世用 則其所展布 有不可量矣 而不慍不憫 以沒其世 嗚呼惜哉 銘曰 孝者人道之常 然而不于常者 胡不臧 惟公之孝 述家風而植人綱 而常于常 餘皆可以擧而張 不待余言而傳之長
歲戊辰扐月日 嘉義大夫 吏曹參判 兼 同知經筵 春秋館 成均館 義禁府事 奎章閣直提學 侍講院檢校輔德 驪興閔丙承 撰
묘갈명서문을 덧붙임
선비가 시례(詩禮)를 가르치는[가정에서 부모의 훈계를 듣는 것인데 공자의 아들 이(鯉)가 시례(詩禮)의 가르침을 들은 일에서 연유한다. 『논어』 「계씨편(季氏篇)」 13장에 보면, 진항(陳亢)이 백어[伯魚: 공리의 자(字)임]에게 “그대는 또한 특별한 가르침을 들은 적이 있는가?” 라고 묻자, 대답하기를 “없었다. 일찍이 홀로 서 계실 때에 내가 빨리 걸어 들을 지나는데[趨而過庭], ‘시(詩)를 배웠느냐?’고 물으시기에 ‘못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였더니,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다.’ 하시므로 내가 물러나 시를 배웠노라” 하였다.] 가문에서 태어나 몸을 추스르고 행실을 편안히 하되, 부모가 만든 일을 자식이 능히 도맡고 할아버지가 펼친 업적을 손자가 능히 이어서, 이로써 윤리를 돈독히 하여 풍속에 모범이 된 자를 효자[孝]라고 부를 수 있다. 가까운 옛날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추증된 직우처사(職憂處士) 안공(安公)이 그런 사람이다.
공의 휘는 창훈(昌勳)이요 자는 덕로(德老)요 직우(職憂)는 그의 호이다. 안씨는 순흥(順興)에서 갈라져 나왔는데 고려조에 별장(別將)을 지낸 자미(子美)를 비조(鼻祖)로 삼는다. 2대를 지나 문성공 회헌(晦軒) 유(裕)가 태어나 문묘에 배향되고 동방에 처음으로 학문을 일으킨 원조가 되었다. 문순공(文順公) 우기(于器)와 문숙공(文淑公) 목(牧)을 지나 문혜공(文惠公) 원형(元衡)에 이르러 공(功)으로 죽성군(竹城君)에 옮겨 봉해지니, 자손이 이를 따라 본관을 죽산(竹山)이라 했다.
전승되어 둔암(鈍庵) 축(舳)에 이르는데 지평(持平)과 장령(掌令)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으니, 김하서(金河西)․임석천(林石川)과 더불어 호남삼고(湖南三高: 호남 지방의 세 명의 높은 선비)라 불렸다. 휘(諱) 방준(邦俊)은 곧 문강공(文康公) 은봉(隱峰)선생으로 도학과 절의로 세상에 유종(儒宗: 선비의 으뜸)이 되었으니 이 분이 공의 5세조이다. 고조 일지(逸之)는 선교랑이요 증조 외(崴)는 은둔하여 덕을 닦느라 벼슬을 하지 않았고, 할아버지 후상(後相)은 세칭 매계처사(梅溪處士)로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 세집(世楫)은 이조참의에 추증되었는데 3대가 모두 효자로 알려졌다. 어머니는 광산이씨 만성(萬成)의 딸로 부인의 덕을 두루 갖추었다.
영조 무진년(1748)에 공을 낳았는데 어려서부터 재주가 특출하여 보통 아이와 크게 달랐다. 스승에게 나아가 글을 읽을 적에는 뜻을 굳건히 하고 힘써 공부하여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니, 비록 몹시 어려워 읽기 힘든 글이라 하더라도 읽어보면 곧 암송하였다. 겨우 성동(成童: 15세 이상의 소년을 지칭함)의 나이에 아버지 상을 당해 너무 슬퍼하다 몸을 상할 정도였고, 일찍 아버지를 여의면서 살림이 더욱 나빠져 문장(文章)에 힘을 크게 쏟을 수 없었음을 평생 한으로 여겼다. 홀어머니를 봉양할 적에는 몸에 온전한 옷을 걸치지 못하면서도 맛있는 반찬을 계속 올렸다.
어머니 상을 당하자 더욱 세상에 뜻이 없어 과거공부를 끊고 산림 속에 자취를 감추고서 경전(經傳)을 깊이 연구하고 많은 서적들을 널리 탐구하였는데, 의심난 부분에 이르면 이리저리 읽고 생각하느라 침식을 잊기도 하였으나 풀려야만 그만두었다. 매계공(梅溪公)이 지은 옛 학사(學舍: 목미암)를 보수하고 규모를 확대하여 학자로 하여금 나아갈 방향을 잃지 않게 하니, 문풍(文風)이 크게 일어나 추로(鄒魯: 공자․맹자의 유학)의 고을로 성대히 변하였다.
향약(鄕約)과 사창(社倉)은 선조의 유지를 잘 받들어 옛 것을 따르되 더 보태어 고을의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었다. 또 근면하고 검소한 마음으로 몸소 농사를 지어 살림살이가 조금 펴지자, 아버지 사당으로부터 먼 조상의 묘소에 이르기까지 석물(石物)을 갖추고 제전(祭田)을 두어 제향을 빠트리지 않았다. 친척과 옛 친구 중 가난한 자에게 대해서도 마음을 다해 구휼하여 조금도 아끼지 않았다.
은봉(隱峰)선생에게 내려야할 증직(贈職)과 시호(諡號)의 은전이 여러 대가 지나도록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앞장서 그 일을 걸머져 끝내 임금의 낙점을 받았다. 만년에는 은봉이 손수 심은 옛 송매단(松梅壇) 곁에다 정자를 지어 송매(松梅)라는 편액을 달고 수천 권의 책을 쌓아놓고서 늙어 세상을 마칠 생각을 하였다. 전후로 사림(士林)들이 공의 행의(行義)를 들어 누차 영읍(營邑)에 글을 올려 도독(道牘, 감사나 관찰사가 그 지방의 유현(儒賢)을 조정에 천거하는 글. 도천(道薦)이라고도 함.)으로 천거하고 수계(繡啓, 암행어사가 여러 고을의 학덕(學德)이 있는 자를 뽑아 조정에 보고한 장계(狀啓)를 말함.)로 포상을 청하니, 공릉참봉(恭陵參奉)에 으뜸으로 추천되었으나 미처 은명을 받지는 못했다. 무자년(1828) 6월 27일에 정침(正寢)에서 목숨을 마치니 향년이 81세였다.
원근에서 부음을 들은 사람들이 다 말하기를 “철인(哲人)이 시들고 군자(君子)가 죽었다”고 했다. 위로는 선비로부터 아래로는 천한 백성에 이르기까지 달려가 슬피 울지 않은 이가 없었고 상여 줄[紼]을 붙잡고 애도를 표한 자가 천여 명에 달하니, 어진 덕이 사람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음을 또한 징험할 수 있다. 처음에 우산(牛山)의 언덕에다 장사지냈다가 신묘년(1831)에 순천 송광면 도룡동(道龍洞) 신좌(辛坐)의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헌종 임인년(1842)에 상공(相公) 김흥근(金興根)의 도계(道啓: 관찰사의 장계)와 상공(相公) 조인영(趙寅永)의 연주(筵奏: 임금의 면전에서 사연을 아룀)로 동몽교관(童蒙敎官) 조봉대부(朝奉大夫)에 추증되니, 아! 공의(公議)는 오래되어도 없어지지 않음이 이와 같은가? 영인(令人) 진원박씨는 문강공 죽천 광전의 후예인 수욱의 딸인데, 부드럽고 화순(和順)한 성품으로 덕행을 펴고 규방의 법도를 엄숙히 하니 여사(女士: 여자로서 군자의 행실이 있는 사람)로서 짝이 드물었다. 정묘년(1747)에 태어나 무진년(1808)에 뜨니 향년이 62세였고 묘는 우산(牛山) 경좌(庚坐)의 언덕에 있다.
3남을 낳으니 수록(壽祿)․수택(壽宅)․수국(壽國)인데 수록은 호가 오봉(五峰)이요 학행으로 참봉(參奉)을 제수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나중에 첨지(僉知)에 올랐다. 3녀는 고철진(高哲鎭)․이상휴(李象休)․허명(許銘)에게 시집갔다. 서자는 수신(壽身)․수붕(壽朋)․수흠(壽欽)이요, 서녀는 최양수(崔養秀)․임경재(任慶材)에게 시집갔다. 수록의 아들에 명윤(命允)․명협(命浹)․명하(命河)가 있는데 모두 통덕랑(通德郞)이요 명협은 종가의 뒤를 이었다. 딸은 박응휴(朴應休)와 한우준(韓友儁)에게 시집갔다. 서자는 명락(命洛)이요 서녀는 이병하(李炳夏)와 이(李) 아무개에게 시집갔다. 수택의 아들은 명화(命和)․명천(明天)․명직(命直)․명순(命舜)․명기(命驥)요, 딸은 박원철(朴源喆)․송의만(宋懿萬)에게 시집갔다. 수국의 아들은 명용(命庸)이요 딸은 박래휴(朴徠休)에게 시집갔다. 내외(內外)의 손자와 증손자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공의 후손 규달(圭達)씨가 가장(家狀)을 들고 나를 찾아와 묘갈명(墓碣銘)을 부탁하니, 그 지극한 뜻을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가만히 생각건대 공은 굳세고 순수한 자품으로 일찍이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 위기지학(爲己之學: 자신을 위하는 학문, 곧 성리학)에 전념하여 모든 권세와 이익, 부귀와 영화를 마치 더러운 오물처럼 보았다. 가정을 다스릴 때는 효도와 우애로 화목하고 안과 밖을 가지런히 하여 질서정연한 법도가 있었고, 사람을 접대하는 포용력은 따사로운 봄바람 같았으며 사물을 진정시키는 도량은 바다처럼 깊었다. 항상 용서하는 마음으로 노기를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지만 일에 임하여 의리로 판단할 때는 칼로 자르듯 범할 수 없었다.
일찍이 ‘불기인(不欺人: 남을 속이지 않음)’ 석 자로 첫 째 심법(心法)을 삼아 말하기를 “남에 속임을 당하는 것은 그 해가 오히려 작지만 내가 남을 속이는 것은 그 해가 매우 크다” 하고, 이로써 일상을 점검하니 참으로 학문의 힘을 축적하지 않고서 이처럼 할 수 있겠는가? 만일 출사하여 세상에 쓰였더라면 포부를 한량할 수 없을 만큼 펼쳤을 터인데,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고 세상에 숨어 번민하지 않은 채 세상을 마감하니, 아! 애석하다. 명(銘)을 단다.
효는 사람의 변치않는 도리지만
상도(常道)를 지키지 않는다 해서
어찌 선하지 않으랴.
오직 공의 효도는
가풍을 이어 기강을 세우니
상도를 항상 지킨 것이라.
나머지를 들어서 펼쳐보면
내 말을 기다리지 않아도
기리 전할 수 있으리.
무진년(1928) 늑월(扐月) 모일에 가의대부(嘉義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겸(兼) 동지경연(同知經筵) 춘추관(春秋館) 성균관(成均館) 의금부사(義禁府事) 규장각직제학(奎章閣直提學) 강원(侍講院) 검교(檢校) 보덕(輔德) 여흥(驪興) 민병승(閔丙承)이 지음.
8) 贈令人珍原朴氏墓表
贈令人朴氏 故職憂堂贈童蒙敎官安公諱昌勳之賢配也 令人以英祖丁卯十一月九日 生于文康公竹川先生詩禮世家 夙著令儀 擇對過期 年二十三 考樂圃公聞職憂公之賢而送之 時職憂公早失怙世業落 而克家幹蠱 求配協相 際遇令人 夫婦相得 攻苦耕織 振起産業 而先闡文康先祖遺德而無遺 又就文康手植松梅傍 起亭而庤書數千卷 垂啓後昆 繼以擴敞考梅溪公所刱學舍鄕約及義倉 使學者無缺於講學 坊民無憂於災凶 自後儒風振而俗尙化 蕭然一窮谷 丕變爲鄒魯鄕 其功化之盛大 有光於世道 嗚呼休哉 夫夫君道也 婦臣道也 相得而相成 理勢之自然 而惟令人輔佐之功 特有關於世道 故尙公誦而未沫 是亦秉彛之天也 令人在室 孝敬祥順 一移以事姑與公 處族姓 一於敦睦而無間 窮約甚而安之 力於蠶麻綿紵 而未嘗勞形于色辭 御下寬而無訶 遇夫妾媵林氏及其所生 恩愛俱至 林氏每誦其德行曰 言語不能形容 丹靑不能畵描 求諸史策 實罕其儔 推此一事 可以知其令德之全體矣 嗚呼其賢矣哉 朴爲珍原望族 文康公之曾孫 有曰濟亨通德郞 曰萬恒 曰圭錫 考以上三世也 樂圃公諱守彧 從陶庵李文正公學 世以文行相承 妣昌寧曺氏 禮曹判書繼殷后 錫琮其考也 令人以六十二之戊辰八月二十五日卒 葬槽洞庚原者 百八十年丁卯二月四日 因住巖湖浸水患 遷祔于夫公兆下 將樹之以表 其六世孫鍾聲 屬鍾宣記其陰 自惟耄昏雖不堪當 平日景慕者深 亦不敢辭 遂掇長孫蓮亭公命允所撰遺事 及世之公誦者 俾刻諸陰 公世德後承 閔侍郞俱著于公碣 故不復贅
夫黨族後孫 安鍾宣 述
영인에 추증된 진원박씨의 묘표
영인(令人)에 추증된 박씨(朴氏)는 작고하여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증직 받은 직우당(職憂堂) 안공(安公) 창훈(昌勳)의 어진 배필이다. 영인은 영조 정묘년(1747) 11월 9일에 문강공(文康公) 죽천(竹川: 박광전) 선생의 시례(詩禮)의 세가(世家)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착한 모습을 보였으나 짝을 고르다가 기한을 넘겨, 나이 23세에 아버지 낙포공(樂圃公)이 “직우공이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시집을 보냈다. 이 당시 직우공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대대로 이어온 가업이 몰락하여 살림을 일으키려고 여러모로 힘쓰면서 협력할만한 배필을 구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영인(令人)을 만나 부부가 서로 화합해 경작과 길쌈에 열중하여 산업(産業)을 일으키고, 먼저 문강선조(文康先祖: 안방준)의 유덕(遺德)을 들춰내어 빠트림이 없게 하였으며, 또 문강공(文康公)이 손수 심은 소나무와 매화 옆에다 정자를 지어 수천 권의 책을 비치하고 후손들을 가르쳤다. 이어 할아버지 매계공(梅溪公: 안후상)이 창립한 학사(學舍)․향약(鄕約)․의창(義倉)을 확대하여 학자로 하여금 강학(講學)하는 데 부족함이 없게 하고, 고을 백성으로 하여금 흉년에도 걱정이 없게 하였다. 이후부터 유풍(儒風)이 진작되고 풍속이 교화되어 쓸쓸한 일개 궁벽한 골짜기가 크게 변하여 추로향(鄒魯鄕: 공자와 맹자의 유학이 꽃피는 고을)이 되니, 그 공덕과 교화의 성대함은 세상의 도리[世道]에 빛을 남겼다. 아! 얼마나 아름다운가.
대저 남편은 임금의 도(道)요, 아내는 신하의 도이니 서로 화합하여 일을 이루어감은 이치의 형세로 보아 자연스럽지만, 영인(令人)이 보좌해준 공은 특별히 세상의 도리와 관계가 있기 때문에 널리 칭송되어 없어지지 않는 것도 본성의 자연스런 이치이다. 영인은 집안에 거처할 때에 효도와 공경, 자상함과 순종으로 한결같이 시어머니와 직우공을 섬겼고, 일가와 친척을 대할 때는 항상 돈후함과 화목을 내세워 틈이 없었으며, 가난이 심해도 편안히 여기면서 누에․삼․목화․모시 벌이에 힘쓰되 피곤한 모습을 표정이나 말에 드러낸 적이 없었다.
아랫사람을 너그럽게 통솔하여 꾸짖음이 없었고, 남편의 첩인 임씨(林氏)와 그 자식에게도 은혜와 사랑으로 대하였다. 임씨가 항상 그 덕행(德行)을 칭송하여 말하기를, “말로 이루 다 표현할 수 없고 단청(丹靑)으로도 자세히 묘사할 수 없으니, 역사책에서 구해보더라도 실로 그 짝을 찾기가 드물다” 하였다. 이 한 가지 일을 미루어보면 그 선한 덕의 전체를 알 수 있을 것이니, 아! 참으로 어질구나.
박씨는 진원(珍原)의 명망이 있는 집안이다. 문강공(죽천 박광전)의 증손에 통덕랑(通德郞) 제형(濟亨)이 있고 만항(萬恒)과 규석(圭錫)이 있는데 이들은 고(考) 이상 3세(世)이다. 낙포공(樂圃公)의 휘는 수욱(守彧)으로 도암(陶庵) 이문정공(李文正公: 이재)을 좇아 배웠으며 대대로 문학(文學)과 행의(行義)를 이어왔다. 어머니 창녕조씨(昌寧曺氏)는 예조판서 계은(繼殷)의 후예요, 석종(錫琮)이 그의 아버지이다.
영인은 62세 되던 무진년(1808) 8월 25일에 세상을 떠 조동(槽洞) 경좌(庚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그로부터 180년이 흐른 정묘년(1987) 2월 4일에 주암호(住巖湖)로 인해 침수되는 걱정이 있어 남편의 묘소 아래로 옮겨 부장(祔葬)하고, 장차 묘표(墓表)를 세우기 위해 6세손 종성(鍾聲)이 종선(鍾宣)에게 비석 후면을 적어달라고 부탁하였다.
스스로 생각건대, 나이가 많고 정신이 어두워 감당하기는 어렵지만, 평소에 깊이 추앙하고 흠모한지라 또한 감히 사양할 수 없었다. 마침내 큰손자 연정공(蓮亭公) 명윤(命允)이 지은 유사(遺事)와 세상에 널리 칭송되는 것을 얽어서 후면에 새기도록 하였다. 공의 세계(世系)와 손록(孫錄)은 민시랑(閔侍郞: 민병승)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에 모두 드러나 있으므로 다시 덧붙이지 않는다.
남편의 문중 후손 안종선(安鍾宣)이 적음.
3. 오봉공(五峰公)에 관한 기사(記事)
1) 贈仲弟汝仁勉學說
五峰 安壽祿 撰
夫子傳易曰 立天之道曰陰與陽 立地之道曰柔與剛 立人之道曰仁與義 盖此三者所以經紀三才 而不可一息間斷者也 是以天不能行其陰陽之道 則只是一介高大之物 而不足謂之天也 地不能盡其剛柔之道 則只是一塊深廣之物 而不足謂之地也 故天地不言 而四時行焉 百物生焉 此所以天之立地之立 而不過盡其道而已矣 然則人之所以爲人者 不但以其耳目鼻口四肢百骸 屹然六尺之軀殼者 不亦明乎 人人必行仁義之道 參天地出萬化 以盡其所以立人之道 然後可以無忝乎人之名矣 而世之爲人者 何其行之者絶少 而知之者亦僅有也 嗚呼 此豈非人之過歟 雖以天之高地之廣 苟無其道 則不可爲天地 況此藐然血肉之身 不能盡其仁義之道 獨可以爲人乎 言語動息不足爲人 衣服飮食不足爲人 只此仁義二者 稟得陰陽剛柔之全而爲性於吾 天下之善無一不統於此 天下之理無一不本於此 然其所以求之者 不在空玄渺茫之域 而只在於日用當然起居動靜 君臣父子之間而已也 故聖賢立言垂訓 必欲使天下後世讀其書者 講明究索 以存諸心 行諸身 見諸事業 而千言萬語 莫非所以明夫二者之道 而要使盡其職而已也 竊觀今之君子 所以自期而期人者 必欲擺脫於仁義科臼之外 而每每與古人爲己之學 一切相反 父之詔子 兄之勉弟 子弟之所以學者 不過於功利進取之計 務爲掇緝纂組之工 以求懷黃結駟之榮 滔滔流俗 日就下而不知反 於是人不爲人 而仁義之道 或幾乎墜矣 今吾弟以妙年壯氣 發軔進塗 正其可以有爲之時 而觀其所以察其所安 則甚孤平昔期望之意也 以其立志 則不能持於常久 以其行己 則不能期於上品 且一語一黙 一動一靜 無一出於安詳恭敬之地 而惟此躁進之心 以致妄意凌躐之弊 已不是樂學 便無可望之理 不足多言 然而道之在天下者 無古今智愚之殊 而猶四海九州百千萬人 當行之路耳 若能興起奮發 自有意做好人 而屈首念讀於聖賢之書 先難後獲 勿忘勿助 以求在我之仁義 以立其道 則以淸明之美質 將必有所至矣 天之陰陽 地之剛柔 亦豈外於是哉 至於立身揚名 顯親事君 又不過自家性分內得之 其不必滯心於浮藻文詞之末 以爲一段區區應擧之計 而求之也決矣 若曰此非人人所可爲 而惟此奔走於僥倖之門 馳騁於得失之場 以畢其生 其亦可以爲仁義 而足以盡人之道 則非愚昧所敢聞 而所敢知也 莊子曰生無所聞 則死不足惜 從古以來 虛生於天地者多矣 惟吾弟勉之哉
아우 여인(汝仁)에게 준 면학설
오봉 안수록 지음
공자는 『주역(周易)』 「설괘전(說卦傳)」에서 “하늘의 도(道)를 세워서 음(陰)과 양(陽)이라 부르고, 땅의 도를 세워서 강(剛)과 유(柔)라 부르며, 사람의 도를 세워서 인(仁)과 의(義)라 부른다”고 말했다. 대개 이 세 가지는 삼재(三才: 하늘․땅․사람)를 다스리면서 한순간도 끊어질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이 그 음양(陰陽)의 도를 행할 수 없다면, 하나의 높고 큰 사물일 뿐이어서 하늘이라 부를 수는 없다. 땅이 강유(剛柔)의 도를 다할 수 없다면, 한 덩어리의 깊고 넓은 사물일 뿐이어서 땅이라 부를 수는 없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은 말은 없지만 사계절이 운행되고 만물이 생겨나니, 이것이 바로 하늘이 서고 땅이 서서 그 도리를 다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것은 단지 귀․눈․코․입․사지․백해(百骸: 몸에 있는 모든 뼈), 우뚝 솟은 6척의 몸뚱이 때문이 아님은 또한 분명하지 않는가? 사람마다 반드시 인의(仁義)의 도를 행하여 하늘과 땅의 작용에 참여하고 만물의 화육(化育)을 도와서 사람의 도리를 극진히 발휘한 뒤에 사람의 명칭을 더럽히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어찌하여 이를 행하는 자가 매우 적고 이를 아는 자도 근소하게 되었는가? 아! 이 어찌 사람의 허물이 아니겠는가?
비록 하늘이 높고 땅이 넓다고 해도 만일 그 도리가 없다면 하늘과 땅이 될 수 없는데, 하물며 피와 살로 이루어진 작은 몸으로 그 인의(仁義)의 도리를 다할 수 없다면 홀로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말하고 움직이고 쉰다고 해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옷을 입고 밥을 먹는다고 해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인(仁)과 의(義) 두 가지만이 음양(陰陽)과 강유(剛柔)의 온전함을 품부 받아 나의 본성[性]이 되니, 천하의 선(善)은 모두 여기에 모여있고 천하의 이치[理]도 모두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구하는 방법은 텅 비거나 어둡거나 아득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사람의 일상생활의 행동들,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사이에 있을 뿐이다. 그래서 성인과 현인들이 말로써 교훈을 내릴 때에 반드시 천하 후세에 그 글을 읽는 자로 하여금 강론하고 탐구하여 이를 마음[心]에 간직하고 몸[身]으로 실행하도록 하였는데, (성현이 남긴) 천만 가지 말은 모두 인의의 도리를 밝혀서 자신의 직분을 다하기를 바랬을 뿐이다.
가만히 살펴보건대, 오늘날의 군자가 스스로 기약하고 남에게 기대하는 것은 반드시 인의(仁義)의 보금자리를 벗어나서 항상 옛사람이 ‘자기를 위해 하던 학문[爲己之學]’과는 반대로 가려고만 하니, 부모가 자식을 가르치거나 형이 아우를 격려하거나 자제(子弟)가 학문하는 것도 공리(功利: 공명과 이욕)를 향해 나아가려는 생각으로 글귀나 주워 엮는 공부에 힘을 기울여 높고 화려한 벼슬에 오르는 영광을 구하는 데 불과하다. 세속은 도도하게 날로 아래로 흘러가 돌아올 줄 모르니, 이에 사람이 사람답게 되지 않아 인의의 도리는 거의 땅에 떨어져버렸다.
이제 우리 아우는 묘년(妙年: 스물 안짝의 꽃다운 나이)의 씩씩한 기운으로 길을 떠나 앞으로 나아가니 장래에 포부를 펼칠 때가 있을 법도 하건만, 행하는 것을 보고 즐기는 것을 살펴보면 평소에 기대하고 소망한 뜻을 많이 저버렸다. 아우는 뜻을 세우되 능히 오랫동안 지니지 못하고, 몸을 행하되 능히 최선을 바라지 않았으며, 또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움직이거나 고요한 갖가지 작용이 하나도 편안하고 자세하고 공경하고 경건한 곳에서 나오지 못하고, 오직 조급히 나아가려는 마음으로 망령되이 건너뛰는 폐단을 만들었을 뿐이다.
즐겁게 학문하지 않으면 곧 가망이 없다는 이치는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도(道)가 천하에 있음은 예나 이제나 지혜로운 이나 어리석은 이나 할 것 없이 사해(四海)와 구주(九州) 내의 모든 사람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일 따름이다. 만일 능히 떨쳐 일어나 분발하여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뜻을 두고 머리 굽혀 성현(聖賢)의 글을 생각하고 읽되, 먼저 어려운 일을 처리하고 나중에 얻으며[先難後獲] 마음에 잊지도 말고 억지로 조장하지 말아서[勿忘勿助] 나에게 있는 인의를 구하여 그 도리를 세운다면, 맑고 밝은 아름다운 자질로 장차 반드시 도달하는 바가 있으리라. 하늘의 음양과 땅의 강유도 또한 어찌 여기에서 벗어나겠는가?
출세하여 이름을 드날려 어버이를 영광되게 하고 임금을 섬기는 것도 또한 자기의 타고난 성품 안에서 얻을 뿐이요, 반드시 화려한 문장공부에 집착하여 한층 구차하게 과거에 응시할 계획을 세운 뒤에 구해지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만일 “이는 사람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오직 요행의 문(門)을 분주히 드나들고 득실의 장(場)으로 치달리는 데 한평생을 다 보내면서도 인의(仁義)를 행할 수 있고 사람의 도리를 다 할 수 있다고 한다면, 나는 감히 듣고 싶거나 알고 싶지 않는 바이다. 장자(張子, 북송(北宋)의 유학자 장재(張載)를 말함. 호는 횡거(橫渠), 자는 자후(子厚)로 관학(關學)의 창시자이다. 젊어서 병법과 노불(老佛)에 심취했다가 범중엄(范仲淹)의 훈계로 『중용(中庸)』을 읽고 문득 유도(儒道)에 뜻을 두게 되었다. 「정몽(正蒙)」이나 「서명(西銘)」과 같은 저명한 글을 남겼다. 1020-1077)가 말하기를 “살아서 명성을 날리지 못하면 죽어서도 애석할 것이 없다. 예로부터 천지에 헛되이 산 자가 많다”고 하였으니, 오직 우리 아우는 힘써 공부하라.
2) 讀書條約文
五峰 撰
大凡讀書之法 日課爲要 苟不齊之以約束 道之以勸懲 則初學蒙蔽者 固狃乎悠泛遣日 而年紀長大者 亦歸於牽補度時矣 以之日月如流 伎倆依舊 則古人窮廬之歎 豈非大可懼者乎 玆倣晦翁嚴立課程之意 與一塾冠童立約 分爲兩接 東西相對 互相規戒 一人有闕 則一接共任其責 一人受罰 則一接均蒙其恥 逐日喚醒 各自勉勵 則實是古者同井相助相扶之支流餘裔 而晦翁所謂無面目是長久人情者也 毋或以管商一切之法而譏之也
독서에 관한 조약을 담은 글
오봉 지음
무릇 독서하는 방법은 일과(日課)를 정하는 것이 중요하니, 만일 이것을 약속(約束)을 정해 바로잡고 권징(勸懲,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준말. 착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일을 징계한다는 뜻.)을 통해 이끌어주지 않으면, 처음 학문하는 어리석은 자들은 한가롭게 날을 보내기 일쑤이고, 나이 먹은 어른들도 살림에 골몰하다가 시간만 보내게 된다. 이렇게 흐르는 물처럼 세월만 보내다가 기량(伎倆)이 옛날 그대로라면 옛사람이 궁려(窮廬)에서 탄식[궁려는 가난한 집을 말함. 제갈량(諸葛亮)의 「계자서(誡子書)」를 보면, “나이는 시절과 함께 치달리고 뜻은 세월과 더불어 가버리니, 마침내 늙어 병든 몸으로 가난한 집에서 슬피 탄식해보지만[悲歎窮廬] 장차 다시 어찌하겠는가?” 하였다.]하는 꼴이니, 어찌 크게 두려워할 일이 아닌가?
이에 회옹(晦翁: 주자의 호)이 엄격하게 과정(課程)을 세운 뜻을 본받아 서당의 모든 관동(冠童)과 함께 조약(條約)을 정하고, 양접(兩接, 접(接)은 글방 아이들이나 유생(儒生)들이 모여 이룬 동아리. 『경도잡지(京都雜誌)』1, 「풍속」을 보면, “유생들이 여름에 시(詩)와 부(賦)를 과작(課作)하기 위해 산사(山寺)나 야정(野亭)에 모이는데 이를 접(接)이라 한다”고 했다.)으로 나누어 동서(東西)로 마주보고서 서로 규제하고 경계하였다. 한 사람이 결석하면 한 접(接)이 함께 꾸지람을 듣고, 한 사람이 벌받으면 한 접이 같이 부끄러움을 당하면서, 날마다 일깨워서 각자 힘써 노력하니, 실로 이는 옛날에 상부상조하던 동정(同井, 여덟 집이 한 곳에 모여 사는 것을 이름. 정(井)은 정전(井田). 『맹자(孟子)』 「 등문공상(滕文公上)」 3장을 보면, “죽거나 이사함에 시골을 벗어남이 없으니, 향전에 정을 함께 한[鄕田同井] 자들이 나가고 들어올 때에 서로 짝하며, 지키고 망볼 때에 서로 도우며, 질병이 있을 때에 서로 붙잡아준다면 백성들이 친목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의 지류요 후예이며, 회옹(晦翁)이 “대할 낯을 없게 함은 인정(人情)을 길고 오래가게 한다”고 한 것이다. 그러니 혹여 관상(管商)의 일체법(一切法)[관상은 관중(管仲)과 상앙(商鞅). 모두 중국 고대에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주장한 법가(法家) 사상가들이다. 일체법은 백성들을 엄격하게 통제하기 위해서 임시로 5호(戶) 또는 10호씩 묶어서 서로 감시하고 고발하도록 유도하는 법률.]으로 비난하지는 말라.
3) 對學校策
五峰 撰
有其名而有其實者 三代以前之學校也 有其名而無其實者 三代以後之學校也 自夫命敷之敎不脩 而五品不遜 賓興之禮不講 而三物不行 臨雍拜老之漢帝 雖有尊師之名 而所問者 祗是章句之末而已也 設館置士之唐宗 雖有重儒之名 而所取者 不過詞藻之習而已也 滔滔千載 學校之名 無世無之 而所存者虛套也 所傳者浮文也 世徒知服堯服言堯言 則可以爲堯 而不知其行堯行 然後方可爲眞堯也 士徒知冠儒冠衣儒衣 則可以爲儒 而不知其行儒行 然後方可爲眞儒也 故使其君子 不得聞大道之要 而所以敎者 不得其方 使其小人 不得蒙至治之澤 而所以學者 不得其術 左庠右序 世所謂學校 而非吾所謂學校也 家塾州校 世所謂學校 而非吾所謂學校也 此朱先生之所以與呂伯恭書 而歎其名存實亡者 豈但爲當世學校之制而發也 愚也亦嘗遊學校 而有所興慨于中 思欲與當世之君子 商確而講究之者久矣 今承明問 敢不對揚 乃言曰人非學不成材 敎無所不得施 盖學校者 所以成人材而施敎化者也 天性之本善者 必於學校而明之 氣稟之未齊者 必於學校而修之 百姓乃親彛倫攸敍 則曷嘗有化民成俗 而不以學校者乎 肆昔帝王 莫不以學校爲重 敎人爲務 作庠作序 而使之有依歸之所 立塾立校 而使之有講習之地 其法禮樂射御書數之文 其術窮理修己治人之道也 司徒之職 典樂之官 創之於上 而制度寢備 愛敬之方 隆親之義 行之於下 而倫常大明 于以化民 于以成俗 則若是乎學校之所以爲重也 雖然徒知學校之可以敎人 而不知敎人之必有其術 則欲求化民 而民無以化矣 欲求成俗 而俗無以成矣 其本有在 其非在上者之導率乎 請因明問而條列焉 噫 風行於上 先王取其象 而有省方之敎 山下有雷 聖人法其象 而有及民之道 則設敎之處 養賢之所 其不在於學校之中乎 噫 天子之學 是謂辟雍而有敷文之敎 諸侯之學 乃是泮宮而有尙文之德 則敎民之事 獻馘之功 其不由於學校之化乎 噫 三德三行 師氏之所以敎國子也 六藝六儀 保氏之所以養國子也 至德孝行 爲德行之首 禮樂祭祀 居藝儀之先 則其餘節目 詳載春官 亦何必覶縷也 噫 詩書禮樂 先王之所以造士也 七年九年 聖人之所以成才也 春夏秋冬 有陰陽之殊時 小成大成 隨高下之異稟 則寒暑遲速 自有攸當 又何必致疑也 噫 以世代而殊稱者 米廩也序也瞽宗也泮宮也 以方里而別名者 塾也庠也序也學也 敎養之方 立名之意 自不無古今之不同 而亦必有都鄙之各異矣 噫 國學大學 博士不同者 唐制之各置也 內舍上舍 生徒各異者 宋法之分置也 均是博士 而才學有殊 則其所各置者 固其宜矣 同爲生徒 而科第有次 則其所分置者 不亦可乎 噫 胡安定之在湖學 竝列水利邊防之目 程先生之看學制 乃有解額鐫罷之請 水利邊防 俱是窮格中一事 則竝列學舍者 固不足疑也 科試解額 乃是奔競之痼弊 則必請鐫罷者 亦豈無所見乎 大抵學校之設 其制甚備 天下賢才 必關於是矣 一國之敎化 必源於斯矣 而其所以敎之之道 節目詳盡 所以灑掃應對之節 大而修齊治平之術 而人倫以之盡焉 物理以之明焉 盖自上古聖神建立 明哲繼作 發於政施於敎者 行其道善其俗者 莫不以是爲重 上自王宮國都 下至州閭鄕遂 必有學校 王公卿士之冑子庶子 凡民俊秀之奇才異質 入之學而受之敎 丕率聖人之遺訓 誕明先王之禮樂 有以盡其性分之固有 有以成其才德之非常 則學之無不講 而敎之無不明矣 其爲敎化之要務者 豈不較然乎 邵子有云 旣往已歸閒商量 後來猶可別枝梧 愚請舍古而談今 可乎 恭惟我朝 尤重學術 聖祖闡明於前 神孫繼述於後 遵洪範敍倫之敎 明宋儒開來之學 家塾黨序 遹追三代之美制 州庠國學 悉去後世之虛名 雖是十室之小 而皆務設置之方 雖是五尺之幼 而猶知誦法之道 敎導備擧 誦讀相聞 環東土數千里 無不鼓舞於鳶飛魚躍之天 是宜躬行心得之士 博識多聞之儒 比肩接跡 歌詠太平 而獨奈何 俗趍日薄 士習不古 絃誦之聲 不聞於閭巷之間 作成之才 罕見於縫掖之中 周禮賓興之美漠焉 無論鄕黨自好之士 亦不多得 駸駸然鄕無善俗 士昧正學 累百年學校之所以敎養之成就之者 徒歸於虛文末節而止 則寧可不痛惜哉 今我聖上 追先王之志事而繼述之 御初元之休治而淸明之 沖年睿德 敦尙儒術 淆漓之士趍 勉以眞實 卑下之文體 期以淳古 三晝之討論者 一堂之都兪者 期使我八方志學明道之士 觀感興起 一變至道 猗歟盛矣 豈不美哉 然而治不徯志 事與心違 學校之弊 如右所云 則執事之所以憂之深慮之遠 而下問於學校之士者也 嗚呼 不有其源之深 安得其流之遠乎 不有其表之端 安有其影之正乎 一家仁而一國興仁 一家讓而一國興讓 有若聲之於響 風之於草 上有好者 而下必有甚焉者矣 所令反其所好 而民有不從者矣 夫人君以眇然之身 臨億兆之衆 而其所觀感響應者 不以遠邇而有間矣 不以隱顯而有異矣 是以自古論治者 必以君上之導率 爲化民成俗之要 朱子所謂人主一心 爲萬化根本 董子所謂正朝廷以正四方者 豈非所以講明而遵守之者乎 爲今之計 莫若聖上務以導率爲本 學校之不明者 毋獨諉之於士習之已渝 而必自反於聖躬 曰吾之所行 有不足以導率之者乎 風俗之不淳者 毋獨推之於民心之不古 而必自求於聖心 曰吾之所存 有不足以導率之者乎 一言一行 而加勉於導率上工夫 一動一靜 而益勤於導率上規模 聖躬雖未有過矣 而常若有過失 朝廷雖未有闕遺 而常若有闕遺 行之歲月 期以實效 則其所成就者 固將陶鑄殷周 培塿漢唐 而風化丕行 德敎遠被 則將見其韋布之士 衣冠之徒 莫不興起於高明之學 正大之道矣 學校之不古 豈足憂乎 愚也淺弊 不足與論於當世之務 而今於盛問之下 妄有臚列 深覺不韙 而乃其所言者 則無非祖述於前哲已言之說 果若不以人而棄之 擧而行之 則實爲宗祀生民之幸 而行之累年 若無其效 則愚生請伏其辜 以爲妄言之戒 篇將終矣 又有耿耿者 君上之導率 雖是學校之本 而所謂導率者 又無其本 則雖欲勞心弊精以求之 有同捕風而繫影矣 執事何不入告于后 淸閑之燕 經筵之間 博訪眞儒 延覽正士 使之薰陶德性 成就睿學 以爲端本出治之方也 吁 謹對
학교에 대한 대책
오봉 지음
명칭을 갖추고 실상도 갖췄던 것은 삼대(三代: 중국 고대 하․은․주 세 왕조) 이전의 학교(學校)이고, 명칭은 갖췄지만 실상이 없었던 것은 삼대 이후의 학교입니다. 대체로 ‘명하여 펼친 가르침[命敷之敎]’이 닦여지지 않아 오품(五品)이 순하지 않고[이 구절은 『서경(書經)』 「순전(舜典)」에 나온다. 순(舜) 임금이 말씀하셨다. “설 (契)아! 백성이 친목하지 않고 오품(五品)이 순하지 않으므로 너를 사도(司徒)로 삼으니, 공경히 다섯가지 가르침[五敎]을 펴되 너그럽게 대하라.” 여기에서 오품(五品)은 부자(父子)․군신(君臣)․부부(夫婦)․장유(長幼)․붕우(朋友)의 다섯 등급을 말한다. 오교(五敎)는 오륜(五倫)과 같다.], ‘손님을 일으키는 예[賓興之禮, 빈흥(賓興)은 주대(周代)에 선비를 채용하는 법이다. 향음주(鄕飮酒)의 예(禮)로 써 빈객을 삼아 추천하는 일.]’가 강론되지 않아 삼물(三物, 주나라 향학(鄕學)의 교과 과정인 육덕(六德)․육행(六行)․육예(六藝)의 세가 지. 『주례(周禮)』 「지관(地官)」 ‘대사도(大司徒)’를 보면, 육덕은 사람이 지켜야할 여섯 가지의 덕으로 지(知)․인(仁)․성(聖)․의(義)․충(忠)․화(和)이고, 육행은 효(孝)․우 (友)․목(睦)․인(婣)․임(任)․휼(恤)이고, 육예는 선비로서 배워야할 여섯 가지 일로서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이다.)이 행해지지 않으면서부터, 벽옹(辟雍)을 찾아와 늙은 스승에게 절한 한나라 명제(明帝)[벽옹(辟雍)은 원래 주(周)나라 때 천자(天子)의 도성에 설립한 대학교 이름. 주위의 형상이 벽(壁)과 같이 둥글고 물이 둘러 있었다. 후한(後漢)의 명제(明帝)는 기원 후 59년 겨울 10월에 벽옹에 행차하여 처음으로 양로례(養老禮)를 거행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이궁(李躬)을 삼로(三老)로 삼고 환영(桓榮)을 오경(五更)으로 삼았 다. 명제는 태자(太子) 시절부터 환영에게 『상서(尙書)』 를 배웠는데 즉위한 뒤에도 오히려 환영을 스승의 예[師禮]로 존경하였다. (『통감(通鑑)』 권6 참고) 환영(桓榮)은 용항(龍亢) 사람으로 자는 춘경(春卿). 구강(九江)에서 문도를 가르쳤고 건무(建武) 연간에 태자경(太子經)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박사(博士)에 임명되었다.]는 비록 스승을 존경한다는 명성을 얻었지만 단지 보잘것없는 장구(章句: 글의 장과 구절)를 질문했을 뿐이고, 학관(學館)을 만들어 선비를 배치한 당나라 태종(太宗)은 비록 선비를 존중한다는 명성을 얻었지만 사조(詞藻: 시문의 화려함)의 구습에 빠진 자를 등용했을 뿐입니다.
천년의 세월이 도도히 흐르도록 학교의 명칭은 세대마다 없지 않았으나, 남은 것은 진부한 말이요 전한 것은 쓸모 없는 글이었습니다. 세상은 한갓 요(堯) 임금의 옷을 입고 요 임금의 말을 떠들면 요 임금처럼 될 수 있음을 알 뿐이요, 요 임금의 행실을 행한 뒤에 비로소 참된 요 임금이 될 수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선비들은 한갓 선비의 관을 쓰고 선비의 옷을 입으면 선비처럼 될 수 있음을 알 뿐이요, 선비의 행실을 행한 뒤에 비로소 참된 선비가 될 수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군자(君子)로 하여금 대도(大道)의 요체를 들을 수 없게 만들어 가르치는 바가 올바른 방법을 얻지 못하고, 소인(小人)으로 하여금 지치(至治)의 혜택을 입지 못하게 만들어 배우는 바가 올바른 기술을 얻지 못하니, 왼쪽의 상(庠)과 오른쪽의 서(序)[상(庠)과 서(序)는 각각 주(周)나라와 은(殷)나라 시대에 향리(鄕里)에 만든 학교의 명칭이다.]를 세상사람들은 학교(學校)라고 말하지만 내가 말하는 학교는 아니요, 집안의 숙(塾)과 고을의 교(校)를 세상사람들은 학교라고 말하지만 내가 말하는 학교는 아닙니다.
이는 주선생(朱先生: 주자)이 여백공[呂伯恭: 주자의 친구 동래(東萊) 여조겸(呂祖謙)을 말함]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명칭은 있으나 실상은 없다”고 탄식한 이유이니, 어찌 단지 당시 학교의 제도에 대해서만 말한 것이겠습니까? 저도 또한 일찍이 학교에 다니면서 마음으로 개탄한 바 있어 당시의 군자(君子)와 함께 이를 토론하고 강구하려고 생각한 지 오래되었으니, 오늘 현명한 물음을 받고 어찌 감히 대책을 말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다음처럼 말합니다.
사람은 학문이 아니면 인재로 성장할 수 없고 가르침은 장소가 없으면 베풀 수 없으니, 학교(學校)는 인재를 이루고 교화를 베푸는 곳이라 생각합니다. 본래 선(善)한 천성(天性)은 반드시 학교에서 밝히고, 가지런하지 않는 기품(氣稟: 타고난 성질과 품격)도 반드시 학교에서 닦아야 합니다. 백성은 곧 인륜의 도리로 친근히 가르쳐야 하니, 어찌 일찍이 백성을 교화하여 풍속을 이루고자 하면서 학교로 하지 않은 경우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옛날 제왕(帝王)들은 학교를 중시하고 교육에 힘쓰지 않음이 없어 상(庠)과 서(序)를 만들어 돌아가 공부할 곳으로 삼도록 했고, 숙(塾)과 교(校)를 세워서 강습할 곳으로 삼도록 했으니, 그 방법은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의 글이요, 기술은 궁리(窮理)․수기(修己)․치인(治人)의 도리였습니다. 사도(司徒, 주(周)나라 때 교육을 맡은 벼슬로 육경(六卿) 중의 하나이다.)의 직책과 전악(典樂: 음악을 관장하는 사람)의 관직을 위에다 만들어 제도를 점차 갖추었고, 애경(愛敬)의 방도와 융친(隆親)의 의리를 아래에다 시행하여 인륜을 크게 밝혔습니다. 이로써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이루니 이처럼 학교가 중시된 것입니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한갓 학교에서 사람을 가르칠 수 있음을 알 뿐 사람을 가르치는 데 반드시 그 기술이 있음을 모른다면, 백성을 교화하고자 하나 백성은 교화됨이 없고, 풍속을 이루고자 하나 풍속은 이루어짐이 없게 됩니다. 그 근본의 소재는 어찌 윗사람의 인도와 통솔에 달려있지 않겠습니까? 현명한 물음을 받았으니 다음처럼 조목조목 아뢰려 합니다.
아! 바람이 땅위에 불자 선왕(先王)은 그 모양을 취하여 방향을 살피는 가르침을 두었고[『주역(周易)』 「관괘(觀卦)」를 보면, “바람(☴)이 땅(☷)위를 왔다갔다하는 것이 관(觀)괘이다. 선왕은 이것을 본받아 방향을 살펴서[省方] 백성을 관찰하고 가르침을 베푼다”고 했다.], 산 아래에서 우레가 치자 성인(聖人)은 그 모양을 본받아 백성에게 확산하는 도리를 두었습니다[『주역』 「이괘(頤卦)」를 보면, 단전(彖傳)에서 “천지가 만물을 기르듯이 성인은 현인을 길러 그 덕이 만백성에게 미치도록 한다” 하였고, 상전(象傳)에서는 “산(☶) 아래에 우레(☳) 가 있는 것이 이괘이다. 군자는 이것을 본떠서 말을 조심하고 음식을 절제한다” 하였다.]. 그렇다면 가르침을 베푸는 곳과 현인을 기르는 곳이 학교 속에 있지 않겠습니까? 아! 천자의 학교는 벽옹(辟雍)이라 부르는데 글을 베푸는[敷文] 가르침이 있고, 제후의 학교는 반궁(泮宮)이라 부르는데 글을 숭상하는[尙文] 덕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백성을 가르치는 일과 머리를 바치는[獻馘, 옛날에 적을 죽여서 왼쪽 귀를 들어 임금에게 바치는 것을 헌괵이라 함. 일종의 충성심을 나타냄. 『시경(詩經)』 「노송(魯頌)」 ‘반수(泮水)’장을 보면, “밝고도 밝으신 노(魯)나라 임금님, 그 덕망 더욱 밝게 하시려, 여기 반궁(泮宮)을 지으셨네. 회(淮) 당의 오랑캐를 굴복시키니, 범같이 날랜 신하들은, 오랑캐의 귀를 반궁에 바치네[在泮獻馘]. …” 하였다.] 공은 학교의 교화에 말미암지 않겠습니까?
아! 삼덕(三德)과 삼행(三行)[삼덕은 지덕(至德)․민덕(敏德)․효덕(孝德)이요, 삼행은 부모를 친애하는 효행(孝行)․어진 이를 존경하는 우행(友行)․스승과 어른을 섬기는 순행(順行) 이다.]은 사씨(師氏, 주(周)나라 시대에 귀족의 자제에게 덕행(德行)을 가르친 벼슬 이름.)가 국자(國子)를 가르치던 것이요, 육예(六藝)와 육의(六儀)[육예는 선비로서 배워야할 여섯 가지 일, 곧 예절․음악․활쏘 기․말타기․글 쓰기․셈하기[禮樂射御書數]. 육의는 제사(祭祀)․빈객(賓客)․조정(朝 廷)․상기(喪紀)․군려(軍旅)․거마(車馬)의 여섯 가지 일에 관한 예의.]는 보씨(保氏, 주나라 시대에 왕의 악행을 간(諫)하고 귀족의 자제에게 도리(道理)를 길러주던 벼슬 이름.)가 국자를 기르던 것입니다. 지덕(至德)과 효행(孝行)은 덕행의 머리가 되고, 예악(禮樂)과 제사(祭祀)는 예의의 으뜸이 됩니다. 그 나머지 절목은 춘관(春官, 주나라 시대 육관(六官) 중의 하나. 예법과 제사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는데 대종백(大宗伯)이 그 장(長)이다.)에 상세히 실려있으니, 또한 어찌 너절하게 말하겠습니까? 아! 시서(詩書)와 예악(禮樂)은 선왕이 선비를 만드는 것이요, 7년과 9년[『예기(禮記)』「학기(學記)」편을 보면, “7년 만에 시험을 보여 학문의 깊은 뜻을 강구하여 시비를 논설하고 친구를 취함에 반드시 방정한 자를 가리는지의 여부를 보는데 이러한 모든 것을 학문의 소성(小成)이라 한다. 9년 만에 시험을 보여 모든 사물의 이치를 잘 알아 통달하고 한편 뛰어나게 자립하는 행실이 있어서 외물(外物)의 유혹을 받을 지라도 조금도 도에 어긋나서 유혹에 빠지는 지경에 이르지 않는데 이것을 학문의 대성(大成)이라 한다”고 했다.]은 성인이 인재를 이루는 것입니다. 춘하와 추동에는 음양(陰陽)의 때가 다름이 있고, 소성(小成)과 대성(大成)은 고하(高下)의 품격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추위와 더위, 더딤과 빠름에는 스스로 합당한 바가 있으니, 또한 어찌 반드시 의심할 일이겠습니까?
아! 세대마다 명칭을 달리하니 미름(米廩)․서(序)․고종(瞽宗)․반궁(泮宮)이 있고, 방리(方里: 지역 또는 거리)로 명칭을 구별하니 숙(塾)․상(庠)․서(序)․학(學)이 있습니다. 가르쳐 기르는 방법과 명칭을 붙이는 의도는 고금이 다르지 않음이 없고 또한 반드시 도시와 시골의 차이가 있습니다. 아! 국학(國學)과 태학(太學)에 박사(博士)가 다른 것은 당나라 제도에서 따로 배치한 것이요, 내사(內舍)와 상사(上舍)에 생도가 각각 다른 것은 송나라 법률이 나누어 배치한 것입니다. 똑같이 박사이지만 재주와 학문에 다름이 있으면 따로 배치하는 것이 본래 합당하고, 똑같이 생도이지만 시험 성적에 차례가 있으면 나누어 배치하는 것도 또한 옳지 않겠습니까?
아! 호안정(胡安定, 993-1059. 북송 초기의 유학자 호원(胡瑗)을 말함. 자는 익지(翼之), 안정선생(安定先生)이라 불림. 호주(湖州) 태학(太學)의 교수가 되어 제자를 가르칠 적에 경의(經義)․치사(治事)라는 두 서재를 두어 경의는 오로지 이론을 가르치고 치사는 실무에 종사하는 자가 들어가도록 했다.)이 호학(湖學)에 있을 적에 수리(水利)와 변방(邊防)의 과목을 나란히 배열하였고, 정선생(程先生: 정자)이 학제(學制)를 맡아볼 적에 곧 해액(解額, 향시(鄕試)에 급제한 사람, 곧 거인(擧人)의 총수.)을 없애자는 청을 올렸습니다. 수리와 변방은 모두 사물을 궁리하는 일 중의 하나이니 학사(學舍)를 나란히 배열하는 것은 본래 의심할 것이 없고, 과거시험으로 인재를 선발함은 곧 분경(奔競, 대관(大官)이나 세도가(勢道家)에 출입하면서 벼슬을 구하거나 이권(利權) 운 동을 하는 것.)의 고질적인 병폐를 부르니 반드시 없애버리도록 청한 것도 또한 어찌 소견이 없다 하겠습니까?
대저 학교를 설립할 적에 그 제도를 자세히 갖추어야 하니, 천하의 어진 인재도 반드시 여기에 관계되고 한 나라의 교화도 반드시 여기에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그 가르치는 방도는 절목(節目)이 상세하여 적게는 물 뿌리고 쓸고 응대하는 예절로부터 크게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기술이 갖춰져, 인간의 윤리가 이로써 극진히 발휘되고 사물의 이치가 이로써 밝혀지게 됩니다. 대개 상고시대로부터 거룩한 임금이 세워지고 현명한 철인(哲人)이 잇달아 일어나, 정치에 발현하고 교육에 시행하면서 그 도리를 행하고 풍속을 선하게 한 것은 모두 이를 중시하였습니다. 위로는 왕궁(王宮)과 국도(國都)로부터 아래로는 주려(州閭)와 향수(鄕遂)[모두 주(周)나라 시대의 행정구역의 명칭이다.]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학교를 세워 왕공(王公)과 경사(卿士)의 맏아들과 여러 아들, 그리고 일반백성 중에서 뛰어난 재질을 지닌 자가 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음으로써, 성인이 끼친 훈계를 크게 따르고 선왕의 예악(禮樂)을 밝혀서 본성에 고유한 것을 다 드러내고 재덕(才德)의 비범함을 완성시켰으니, 학교를 통해 강습하지 않은 것이 없고 교육을 통해 밝히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교화에 힘써야 함은 어찌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소자(邵子, 송(宋)나라 때의 학자인 소옹(邵雍)을 말함. 자는 요부(堯夫), 시호는 강절(康節). 소옹은 어릴 때부터 재능이 뛰어났으며, 공명을 세우고자 하는 것을 개탄하였고, 읽어보지 않은 책이 없었다. 중년에는 사방으로 노닐며 다니다가 낙양(洛陽)으로 되돌아와 안락와(安樂窩)에서 고고한 선비처럼 살았다. 자호(自號)를 안락선생(安樂先生)이라 함.)가 “이미 지난 일을 따지기보다는 오히려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였으니, 청컨대 옛 일을 제쳐두고 오늘의 일을 말해도 괜찮을는지요? 삼가 생각건대, 우리 조정은 학술을 더욱 중시하여 성조(聖祖: 선대의 임금)가 앞에서 들추어 밝히고 신손(神孫: 후대의 임금)이 뒤에서 계승하여 기술하였는데, 홍범(洪範, 우(禹) 임금 때에 낙수(洛水)에서 나온 신귀(神龜)의 등에 있었다는 9장(章)의 문장(文章)으로서, 천하를 다스리는 대법(大法)으로 삼는 것.)에서 서술한 인륜의 가르침을 준수하고 송유(宋儒)가 후학에게 열어준 학문을 밝혀, 가숙(家塾)과 당상(黨庠)[『예기』 「학기(學記)」편을 보면, “옛날의 교육은 가(家)에 숙(塾)을 두고 당(黨)에 상(庠)을 둔다. …”고 했다. 가(家: 또는 閭)는 25호의 마을로 이곳의 학교를 ‘숙’이라 하고, 당(黨)은 500호의 마을로 이곳의 학교를 ‘상’이라 한다. ** 원문의 당서(黨序)는 당상(黨庠)을 잘못 쓴 것이다.]에서 삼대(三代)의 아름다운 제도를 뒤따르고, 주서(州序)와 국학(國學)[역시 「학기(學記)」편에서 “주(州)에 서(序)를 두고 국(國)에 학(學)을 둔다. …”고 했다. 주는 12500호의 마을로 이곳의 학교가 ‘서’이고, 국은 국도(國都)로 이곳의 학교 이름이 ‘학’이다. ** 원문의 주상(州庠)은 주서(州序)를 잘못 쓴 것이다.]에서 후세의 헛된 명칭을 모두 버렸습니다. 비록 10호쯤 되는 작은 마을에서도 모두 설치할 방도에 힘쓰고, 비록 다섯 자쯤 되는 어린 아이도 오히려 독송할 방법을 알아, 가르쳐 이끌어줌이 두루 갖춰지고 암송하여 읽는 소리가 잇달아 들리니, 우리나라 수천 리 강토가 연비어약(鳶飛魚躍, 솔개는 날고 물고기는 뛴다는 뜻으로 천지(天地)가 잘 조화되어 오묘한 작용을 드러냄을 말함.)하는 하늘에서 고무(鼓舞)되지 않음이 없습니다.
이때에 마땅히 몸소 실행하여 마음으로 깨달은 선비와 널리 알고 많이 들은 선비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나아가 태평성대를 노래해야 하건만, 어찌하다가 풍속은 날로 투박한 데로 나아가고 선비의 풍습은 옛날과 같지 않아, 거문고 타고 글 읽는 소리가 시골마을에서 들리지 않고 완성된 인재가 선비들 가운데서 보기 드무니, 주례(周禮)의 빈흥(賓興: 훌륭한 선비를 천거함)의 아름다움은 아득하기만 합니다. 물론 향당(鄕黨)에 학문을 좋아하는 선비도 또한 많지 않아 점차 고을엔 선한 풍속이 없고 선비는 올바른 학문에 어두워, 수백 년 동안 학교에서 가르쳐 기르고 성취한 것이 한갓 헛된 글과 사소한 일로 귀결되어 버린다면, 어찌 애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 전하께서는 선왕(先王)의 뜻과 일을 계승하여 기술하고 초원(初元: 등극하던 초기)의 아름다운 정치를 꾀하여 밝히시어, 어린 나이에 슬기로운 덕으로 유술(儒術: 유가의 학술)을 도탑게 숭상하셨습니다. 혼탁한 선비의 방향을 진실함으로 권면하고 비천한 문장의 형체를 순박함으로 기약하시어 3일 낮을 토론하고 온 조정이 정사를 논의함은 우리 온 나라의 학문에 뜻을 두어 도리를 밝히는 선비로 하여금 보고 느껴 일어나도록 하여 도리에 이르도록 변화시킨 것입니다. 아! 참으로 성대한 일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정치는 뜻과 맞지 않고 일은 마음과 어긋나 학교의 폐단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으니, 집사(執事, 여기서는 과거(科擧) 시험을 돕는 사람을 이름. 과거의 책문(策問)과 대책(對策)을 집사책(執事策)과 전책(殿策)으로 구분하여 수록한 작자 미상의 『집사책(執事策)』 2 책이 전해져 온다.)께서 깊이 걱정하고 멀리 생각하여 학교의 선비들에게 하문(下問)하신 것입니다.
아! 수원(水源)이 깊지 않으면 어찌 멀리 흘러갈 수 있겠습니까? 몸가짐이 단정하지 않으면 어찌 그 그림자가 바르겠습니까? 한 집안이 어질면[仁] 한 나라가 어짊을 일으키고 한 집안이 사양하면[讓] 한 나라가 사양함을 일으키니[이 구절은 『대학(大學)』 9장 제가(齊家)․치국(治國) 조목에 나온다.], 마치 소리가 메아리치듯 바람이 풀 위에 불 듯이 윗사람이 좋은 덕을 갖게 되면 아랫사람은 반드시 더 좋아할 것이고, 명령하는 바가 자기의 좋아하는 것과 반대되면 백성들이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대저 임금은 작은 몸으로 백성들 위에 군림하되, 그 보고 느끼거나 메아리쳐 호응하는 것이 멀고 가까움으로 틈을 두어서는 안되며, 은미함과 뚜렷함으로 차이를 두어서도 안됩니다. 따라서 예로부터 정치를 논하는 자는 반드시 임금의 도솔(導率: 인도와 통솔)로 백성을 교화하여 풍속을 이루는 요체로 삼았습니다. 주자(朱子)가 “임금의 한 마음이 모든 교화의 근본이 된다”고 말한 것이나, 동자(董子, 한(漢)나라 초기의 유학자 동중서(董仲舒)를 높여 부른 말. 젊어서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을 깊이 공부하여 경제(景帝) 때는 박사(博士)가 되고 무제(武帝) 때는 도강왕상(都江王相)이 되어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내쫓고 유술(儒術)만을 존중하자”고 건의 하였다.)가 “조정을 바르게 하여 사방을 바로잡아 간다”고 말한 것은 어찌 강론하여 준수해야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전하께서 힘써 도솔(導率)을 근본으로 삼아 학교의 어두운 부분을 오로지 투박한 사습(士習)에 떠넘기지 말고, 반드시 자신의 몸에 반성하여 “나의 행실에 도솔하기에 좋지 않은 것이 있는가?”라고 물으며, 풍속의 순박하지 않은 부분을 오로지 옛날 같지 않은 민심에 떠넘기지 말고, 반드시 자신의 마음에서 구하여 “내가 간직한 마음에 도솔하기에 좋지 않은 것이 있는가?”라고 묻는 것이 좋습니다. 한 가지 말이나 행동도 도솔(導率: 백성을 인도하고 통솔함)하는 공부에 한층 힘써야 하고, 한 번의 움직임과 고요함도 도솔하는 규모에 더욱 부지런해야 합니다.
전하의 몸에 비록 과실이 없다하더라도 항상 과실이 있는 듯이 하고, 조정에 비록 빠트린 인재가 없을지라도 항상 빠트림이 있는 것처럼 하되 이를 시간을 두고 실행하여 실제 효과를 기약한다면, 여기에서 성취한 것은 참으로 장차 은(殷)․주(周)처럼 인재를 도야하고 한(漢)․당(唐)처럼 제도를 정비하여 풍화(風化)가 크게 행해지고 덕교(德敎)가 멀리 퍼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장차 가난한 선비와 의관을 차린 무리들이 고명한 학문과 정대한 도리에서 흥기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학교가 옛날 같지 않다 함을 어찌 근심할 게 있겠습니까?
저 같이 재주와 학문이 얕은 사람은 현재의 급선무를 논의하는 데 참여할 수 없지만, 오늘 훌륭하신 질문을 받고 망령된 말을 늘어놓아 옳지 않은 일임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 말의 내용은 모두 이전에 철인(哲人)들이 언급한 것을 계승하여 기술한 것이니, 과연 비천한 사람의 말이라고 폐기하지 말고 채택하여 실행한다면, 실로 종사(宗社)와 생민(生民)에게 다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해를 실행했는데도 그 효과가 없다면, 저의 죄를 물어서 망언(妄言)을 경계해 주시기 바랍니다.
글을 끝맺을 때가 되니 다시 마음에 염려가 남습니다. 임금의 도솔(導率)이 비록 학교의 근본이지만 이른바 ‘도솔’이라는 것에 또 그 근본이 없다면, 노심초사하며 정력을 낭비하여 이를 구하려고 한들, 바람을 잡고 그림자를 묶으려는 헛된 일과 같게 될 것이니, 집사(執事)는 어찌 전하께서 한가롭게 쉬는 자리나 글을 보는 자리에 나아가, 널리 진유(眞儒)를 찾고 정사(正士)를 초빙하여 그들로 하여금 덕성을 도야케 하고 예학(睿學: 임금의 학문)을 성취케 함으로서 근본을 바로잡아 정치를 시행하는 방법으로 삼아야 함을 고하지 않겠습니까? 아! 삼가 대책을 아룁니다.
4) 行 狀
淵齋 宋秉璿 撰
公諱壽祿字汝必 五峰其號也 安氏望竹山者 自麗朝文惠公諱元衡始顯 至訓練參軍諱民 當我光陵時 死節於施愛亂 四傳而文康公諱邦俊 世稱隱峰先生 曾孫曰梅溪諱後相 贈司僕寺正 是生諱世楫 贈吏曹參議 卽公大父也 考諱昌勳 贈童蒙敎官 文學孝悌 世趾其美 殆有法家風 妣珍原朴氏守彧女 恭儉慈惠 族黨咸誦 以元陵丙申三月十九日生公 學語便知事長之節 父母有命 必跪而受之 其所禁止 後不復爲 受業家塾 不勞師敎 見者稱譽 弱冠贄見于性潭宋先生 先生期勉而遠到 因自奮發曰 人之所以爲人 以其有仁義也 非仁義無以立人之道 而忝厥爲人之名也 自是日取經傳 俯讀仰思 至忘寢食 以父命兼治公車業 而亦不屑屑 戊辰丁內艱 毁瘠踰制 壬午道伯李公書九 薦以閉門自守 承家令譽 戊子又丁外憂 執禮愈嚴 不以不毁之年少減焉 先是敎官公 起亭於文康公所植松梅之傍 公旣免喪恒處其中 以寓羹牆 專理舊業 不求聞達 己酉除永禧殿參奉不就 乙卯以壽陞階拜僉中樞 丁巳夏感微疾 及革命扶起坐 處置後事 少無怛化意 正席東首 恬然而逝 六月十六日也 享年八十有二 葬于順天母后山南麓抱巳原 [後丙午改葬樂安古上面兎山下甲坐] 公天姿近道 敦厚堅確 居恒簡黙 儼然端坐 怠慢之氣 不設於身 盖欲整外而養內 以爲觀理應事之本矣 每日夙興 對越方冊 凝慮潛心 天命之蘊奧 箋註之紛錯 無不硏究 其所未得者 則又箚而記之 以俟資問 尤好朱子書 如誦己言 篤信服膺 所與磨礱而切偲者 皆當時名望 而芹窩金公憙 龍湖李公度中 梅山洪公直弼 最其著也 其行於家也 必以孝友爲政 事親極其愛敬 雖疏節一遵小學 居喪盡禮 日必展墓 不以風雪或廢 塋域雜卉 手自除去 晨起謁廟 非甚病必親莅祭 文康公親盡 而父兄宗族循遐鄕謬例 不欲毁廟 公據禮止之而不得 心常慨然焉 文康遺文散佚不全 公積年收葺以成完本 愛同氣甚篤 終老和洽 季弟及庶弟俱夭札 撫恤婺孤 曲盡恩義 與夫人敬待如賓 有行輒相拜 敎子孫以義方 御家衆有法度 閨門斬斬 無褻嘻失儀者也 嘗定曾孫婚 而人有毁閨節 公擧周恭叔娶瞽事曰 婦人利德不以貌 竟使聘焉 每遇潭翁喪餘 齊潔食素 終身不廢 待親戚接鄕黨 各盡其道 惟以忠信禮義等語 諄諄誨諭 至於陰祀一切嚴禁曰 世人多禱祠於山川寺刹以徼福 而忽於奉先惑也 與其媚非其鬼 而福必不可得 曷若自致誠孝於吾祖考 而幷受徂賚之慶也 性又澹泊 除掩體充腹外 絶不言貨利之事 若見反道悖德者 不少饒假 人不敢以非義干其耳目也 平生謙抑 不喜開門授徒 其有誠求者 又未嘗不叩竭兩端焉 其所講論 絶不創新而求多 一依經訓聖法之見成者 橫豎往折 莫不逢原 聽者亹亹而不倦 故隨其才之高下 而皆有得焉 盖公生於名家 擩染旣深 又得師友以開發夾輔之 故本諸身而修在鄕邦而達 蔚然爲南州之高士 於乎韙哉 有遺藁六冊 理明辭暢 自有沖淡之味云 配錦城吳氏相賢女 理家有法 奉先率下 一遵公無違 擧三男二女 命允命浹出后命河 女歸朴應休韓友儁 曰命洛李炳夏李某妻 側出也 長房子瑩洙龢洙壻鄭耆 季房子檥洙膺洙 爲過房后致洙壻朴濤休 而曰仁洙李敎令 庶子與壻也 源忠源周及應敎鄭喜妻 朴婿出也 馨錫盧豐鉉柳圭河妻 韓婿出也 內外曾玄多不盡錄 而曾孫成煥飭躬勉學 能繼家聲 嘗錄公行治 屬余以狀德之文 顧余晩生淺見 固非善觀善言者 況又病衰筆力尤劣 何足以闡顯幽潛 然而聞公之德則雅矣 魯鈍之質 用力旣久 融析脫落 無有凝滯 陳季慈之閉門近之 剛急之氣 變爲渾厚樂易 不見畦稜 則西門豹之佩韋似之 豈古人所稱 氣質用小 學問功大者非耶 竊有所感於中者 遂並次其世系生卒之梗槪 用俟知德者考焉
행 장
연재 송병선 지음
공의 휘(諱)는 수록(壽祿)이요 자(字)는 여필(汝必)이요 오봉(五峯)은 그의 호이다. 안씨가 죽산(竹山)에 망족(望族: 명망 있는 문중)이 된 것은 고려조에 문혜공(文惠公) 원형(元衡)이 비로소 현달한 때로부터이다. 훈련원 참군(訓練院參軍) 민(民)은 우리 광릉(光陵: 세조의 능호) 시절에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만나 순절하였다. 4대를 지나 문강공(文康公) 방준(邦俊)에 이르게 되는데, 세상 사람들은 은봉선생(隱峰先生)이라 불렀다.
증손자 매계(梅溪) 후상(後相)은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되고, 그의 아들 세집(世楫)은 이조참의에 추증되니 바로 공의 할아버지이다. 아버지 창훈(昌勳)은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추증되고 문학(文學)과 효제(孝悌)로 가문의 미덕을 계승하여 제법 법가(法家)의 풍모가 있었다. 어머니는 진원박씨(珍原朴氏) 수욱(守彧)의 딸로 공손하고 검소한 자세로 자애롭게 은혜를 베푸니 일가가 모두 칭송하였다. 원릉(元陵: 영조의 능호) 병신년(1776) 3월 19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말을 배울 무렵부터 곧 어른을 섬기는 예절을 알아서 부모가 명하면 반드시 무릎을 꿇어 받았고, 금지시킨 일을 뒤에 다시 하지 않았으며, 가숙(家塾)에서 수업할 때에 스승의 가르침을 힘들게 하지 않아 보는 사람마다 칭찬하였다. 약관에 성담(性潭) 송선생(宋先生: 송환기)에게 집지(執贄: 폐백을 드려 제자의 예를 갖춤)하자, 선생이 힘써 공부하면 학문의 조예가 깊어질 것이라고 기대하니, 스스로 분발하여 말하기를 “사람의 사람답게 되는 이유는 인의(仁義)가 있기 때문이다. 인의가 아니면 사람의 도리를 세울 수 없어 사람이라는 이름을 더럽히게 된다”고 하였다. 이로부터 날마다 경전을 가져와 쉬지 않고 읽고 사색하다가 침식을 잃을 정도였으며, 아버지의 명으로 과거공부도 함께 했으나 달갑게 여기지는 않았다.
무진년(순조 8, 1808)에 어머니 상을 당해 슬픔이 예에 지나쳐 몸이 수척해졌다. 임오년(1822)에 도백(道伯) 이서구(李書九)가 문을 닫고 지조를 지키면서[閉門自守] 가문을 계승하여 좋은 명예를 떨쳤다[承家令譽]고 천거하였다. 무자년(1828)에 또 아버지 상을 당해 상례를 더욱 엄격하게 집행하여 불훼(不毁)의 나이[나이 50-60살이 되면 상례(喪禮)의 많은 절차를 조금 줄여서 몸을 상하지 않도록 함. 『예기(禮記)』 「곡례상(曲禮上)」을 보면 “사람은 50이 되면 신체가 비로소 쇠약해진다. 때문에 거상(居喪)도 너무 수척하지 않도록 한다. 60이 되면 쇠약함이 더욱 심해진다. 때문에 거상해도 수척해서 약해지지 않도록 한다. 70이 되면 쇠약함이 극단에 이른다. 때문에 상을 당해도 최마(衰麻)의 복을 만들 뿐,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며 또 실내에 있지 여막에 거하지 않는다(五十不致毁, 六十不毁, 七十唯衰麻在身, 飮酒食肉處於內)” 하였다.]에도 조금도 예를 줄이지 않았다. 이에 앞서 교관공(敎官公)이 문강공(文康公)이 심은 송매(松梅) 곁에다 정자를 세웠는데, 공은 탈상한 뒤 항상 거기에 거처하면서 조상을 추모하는 마음을 표하고 오로지 학업에 전념하여 영달을 구하지 않았다.
기유년(헌종 15, 1849)에 영희전 참봉(永禧殿參奉)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을묘년(철종 6, 1855)에는 수직(壽職)으로 품계를 올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임명하였다. 정사년(1857) 여름에 가벼운 병에 걸렸다가 위독해지자 일으켜 앉히도록 명하고 후사(後事)를 처리한 뒤,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자리에 바르게 누워 머리를 동쪽으로 두르고 편안히 서거하니, 6월 16일이요 향년은 82세였다. 순천 모후산(母后山) 남쪽 산기슭 포사(抱巳)의 언덕에 장사하였다. 그 뒤 병오년에 낙안(樂安) 고상면(古上面) 토산(兎山) 아래 신좌(申坐)로 이장했다.
공은 타고난 바탕이 도(道)에 가까워 도탑고 굳세었으며 평상시에 과묵하고 엄숙히 단좌(端坐)하여 태만한 기색을 몸에 나타내지 않으니, 대개 외모를 정돈하여 내실을 기름으로써 이치를 관찰하여 사물에 대응하는 근본을 삼으려 한 것이리라. 날마다 일찍 일어나 책을 마주하여 생각을 모으고 마음을 가라앉혀 천명(天命)의 심오한 뜻과 전주(箋註: 주석 또는 주해)의 어지러운 내용을 연구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해득하지 못한 것은 또 수시로 기록하여 질문할 때를 기다렸다. 주자(朱子)의 글을 매우 좋아하여 마치 자기의 말을 외우듯 독실히 믿어 마음 깊이 새겼다. 함께 갈고 닦으면서 간절히 격려한 사람은 모두 당시에 명망이 있었는데, 근와(芹窩) 김희(金憙), 용호(龍湖) 이도중(李度中),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이 가장 저명하였다.
가정에서의 행실은 반드시 효도와 우애로써 다스렸고 어버이를 섬길 때는 사랑과 공경을 극진히 하였으며, 비록 소략한 예절이라도 한결같이 소학(小學)을 따랐다. 상을 치를 때에는 예를 다하였고 날마다 반드시 성묘하되 눈보라가 몰아쳐도 멈추지 않았으며 묘소의 잡초는 손수 제거하였다. 새벽에 일어나 사당을 배알하고 위독한 병이 아니면 반드시 몸소 제사에 참여하였다. 문강공의 친진(親盡,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대수(代數)가 다 됨. 임금은 5대, 기타는 4대까지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 것이 보통이다.)에 부형과 문중 사람들이 먼 지방의 잘못된 예(例)를 따라 사당을 허물려고 하지 않자, 공은 예(禮)에 근거하여 말렸으나 여의치 않아 마음으로 항상 이를 개탄하였다. 문강공의 유문(遺文)이 흩어지고 없어져 온전하지 않았는데 공은 여러 해 동안 수집하여 완전한 책을 만들었다.
동기(同氣) 간에 우애가 매우 돈독하여 늙도록 화목하게 지냈고, 막내 동생과 서제(庶弟)들이 모두 요절하자 과부와 고아들을 보살피고 구휼하는데 은혜와 의리를 극진히 쏟았다. 부인을 손님처럼 공경으로 대우하여 길을 떠날 때면 곧 서로 절을 하였고, 자손을 올바른 방도로 가르쳤으며 집안 사람을 법도로 통솔하니, 가정이 질서정연하여 난잡하게 떠들거나 행동거지가 흐트러진 자가 없었다. 일찍이 증손자의 혼인을 정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규수의 범절을 헐뜯으니, 공은 주공숙(周恭叔)이 소경에게 장가든 고사를 들어 말하기를 “부인은 덕으로 취하지 모양으로 취하지 않는다” 하며 끝내 장가들도록 했다.
담옹(潭翁: 스승 송환기)의 기일을 만날 때마다 깨끗이 재계하고 소찬을 먹는 일을 한평생 폐하지 않았다. 친척과 고을 사람을 대접할 때는 각각 그 도리를 다하되 오직 충신(忠信)이나 예의(禮義) 등의 말로 순순히 가르쳐 일깨웠다. 음사(淫祀: 부정한 귀신에게 제사지내는 일)를 모두 엄격히 금지하고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대부분 산천이나 사찰에서 기도하고 제사하여 복을 구하느라 문득 조상을 받드는 데 미혹(迷惑)하다. 부정한 귀신에게 아첨하여 얻을 수 없는 복을 구하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 우리 돌아가신 할아버지에게 정성과 효도를 다하여 내려주시는 경사를 함께 받는 것이 낫다” 하였다.
성품이 또한 담백하여 몸을 가리고 배를 채우는 것 외에는 절대로 재화와 이익에 관한 일을 말하지 않았으며, 만일 도리에 반하고 덕을 어그러뜨리는 자를 보면 조금도 용서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감히 불의(不義)로 그의 이목(耳目)을 어지럽히려 하지 않았다. 평소에 겸손하여 문을 열어 생도를 가르치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지성으로 구하는 자가 있으면 또한 일목요연하게 알려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강론한 바는 결코 새로운 학설을 만들어 남보다 뛰어나기를 구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이미 완성된 경전의 가르침과 성현의 정법에 의지해 자유자재로 설명하여 도의 근원을 철저하게 밝히니, 듣는 이가 부지런히 노력하여 게을리 공부하지 않았으므로 그 재주의 높고 낮음에 따라 모두 얻는 바가 있었다.
대개 명문가에서 태어나 가정의 가르침을 깊이 받았고, 또 스승과 벗을 얻어 지식을 계발하여 보완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몸에 근본하여 수양하고 고을과 나라에 학덕을 널리 펼쳐 성대하게 남주(南州)의 고사(高士)가 되니, 아! 참으로 좋은 일이다. 남긴 문집 6권은 이치가 분명하고 글이 유창하여 절로 충담(沖淡: 성격이 맑고 깨끗하며 욕심이 없음)의 맛이 있다고 한다.
배필 금성오씨(錦城吳氏)는 상현(相賢)의 딸로 가정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어 조상을 받들고 아랫사람을 통솔할 때에 한결같이 남편의 뜻을 따라 어긴 적이 없었다. 3남 2녀를 낳으니 남자는 명윤(命允), 양자로 나간 명협(命浹), 명하(命河)이고, 딸은 박응휴(朴應休)와 한우준(韓友儁)에게 시집갔다. 명락(命洛)과 이병하(李炳夏)․이(李) 아무개의 아내는 측실에서 낳았다.
큰아들 자식으로는 형수(瑩洙)․화수(龢洙), 사위 정기(鄭耆)가 있고, 막내아들의 자식으로는 의수(檥洙)․응수(膺洙)가 있다. 양자로 나간 아들의 자식으로는 치수(致洙)와 사위 박도휴(朴濤休)가 있고, 인수(仁洙)와 이교령(李敎令)은 서자와 사위이다. 원충(源忠)․원주(源周) 및 응교(應敎) 정희(鄭喜)의 아내는 사위 박응휴가 낳았고, 형석(馨錫)과 노풍현(盧豐鉉)․유규하(柳圭河)의 아내는 사위 한우준이 낳았다. 내외(內外) 증손과 현손이 많지만 다 적지 않는다.
증손자 성환(成煥)은 몸을 닦아 학문에 힘써 능히 가문의 명성을 이었는데, 일찍이 공의 행실과 치적을 기록하여 나에게 덕을 밝히는 글(곧 행장)을 부탁하였다. 돌이켜보건대 뒤늦게 태어나 식견이 옅은 나는 본래 능숙하게 관찰하거나 말하는 자가 아니요, 게다가 또 병으로 쇠약하여 필력(筆力)이 더욱 졸렬하니, 어찌 감춰진 덕을 높이 드러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평소에 공의 덕을 자주 들었다.
노둔한 기질(氣質)로 오랫동안 공부에 힘을 기울여 사욕이 풀리고 떨어져나가 엉기고 막힌 것이 없어짐은 진계자(陳季慈, 계자는 송나라 후관(侯官) 사람 진열(陳烈)의 자(字). 학행이 뛰어나고 몸가짐이 단정하였다. 인종(仁宗) 조에 구양수(歐陽脩)가 천거하여 국자감 직강(國子監直講)으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원우(元祐) 초에 본주교수(本州敎授)로 부르자 직무를 수행하면서 녹봉을 받지 않았으며 집안에 곡식이 여유가 있으면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데 썼다. 76세에 죽으니 학자들이 계보선생(季甫先生)이라 불렀다.)가 문을 닫은 것에 가깝고, 강하고 급한 기질을 바꾸어 원만하고 두텁고 화락하고 평이하게 만들어 모가 나지 않음은 서문표(西門豹, 전국(戰國)시대 위(魏)나라 업령(鄴令)을 지낸 사람인데, 성질이 급박하였으므로 이를 고치기 위해 가죽을 차서[佩韋: 가죽의 부드러운 성질을 취함] 자신을 경계하였다고 함. 『한비자(韓非子)』 「관행(觀行)」편에 나옴.)가 가죽을 찬 것과 비슷하니, 어찌 옛사람이 “기질의 작용은 작지만 학문의 공화(功化)는 크다”고 일컬은 것이 아니겠는가? 가만히 마음에 느껴지는 바가 있어 마침내 세계(世系)와 생졸(生卒)의 줄거리를 함께 편차하고 덕을 아는 자[知德者]가 살펴주기를 기다린다.
5) 墓碣銘幷序
霞石 李容元 撰
昔我從王父忠簡公秉銓 擧安文康之門篤行士 爲南殿參奉 諱壽祿是已 不佞時以妙齡 學雖未就 多從南士遊 尙有鼎鐺之耳 皆曰公選心甚仰止 居已五十又九年 忽公之曾孫成煥君 䝴宋淵齋所爲狀 乞余相役于阡刻 始以癃昏辭 及按狀乃公也非他 又惡敢已之 公字汝必號五峰 安氏著封竹山 至文康公諱邦俊 學者尊之曰隱峰先生 寔公六世祖也 諱後相贈僕正 諱世楫贈吏議 諱昌勳贈敎官 是爲曾祖祖若考 世以學耨義播爲家計 其益之及於人者 不可涯量 妣珍原朴氏守彧女 生公于元陵丙申 自學語已知敬長之節 親命必跪而受之 有所禁止 則不復爲 嘗於厠上吸南靈 敎官公望其烟 錯認以失火 至虩虩然來視 公曰由此貽憂於親 可乎 自後不復近口 弱冠贄見于宋性潭 與之講論 期勉甚大 退而自警曰 人之爲人 非以具耳目口體也 盡所以爲人之道 然後乃可曰人 遂日星乎聖賢書籍 俯讀仰思 反復未得 則箚記之 以備考問 尤好朱書 如誦己言 所與輔仁 則金芹窩李龍湖洪梅山諸賢也 以敎官公命 兼治貢擧業 屢解而屈於禮圍 李相公書九按藩 薦于朝至擬寢郞 貳於李相者沮之 幷不以嬰懷 善居喪雖顔丁不能過 日展墓罔間雨暘 遇性潭忌日 必齊素以寓慕 伯母隆老 居在數里外 每懷甘毳而進之 惓惓如嬰兒保 仲弟失明 常常往見 笑語以寬之 季弟及庶弟三人俱夭 撫恤婺孤 如不能盡者 晩就敎官公所築亭舍而居焉 亭是文康公手植松梅處 自後不窺戶外 俛焉自脩 不知年數之不足也 乙卯陞通政爲僉樞 易簀于丁巳六月十六日 得年八十二 嘗因微疾 子弟訪藥于醫家 醫曰尊公靈臺中 自有金丹 奚煩剉劑 爲其人以神醫目之者也 盖服公定力有素 而臨革正席東首 恬若平日 又可以見公矣 有遺集六卷藏于家 辭達理透 而無鉤章棘句 深得古作者遺意 葬順天母后山 後移于樂安之兎山申原 配淑夫人錦城吳氏相賢女 六親至今頌之 墓在母后之東南背壬而封 生三男曰命允 曰命浹系宗家后 曰命河 二女朴應休韓友儁 側男曰命洛 女李炳夏李某 命允二男曰瑩洙曰龢洙 女鄭耆 命河三男曰檥洙 曰膺洙系命浹后 曰致洙 女朴濤休 側男曰仁洙女李敎令 曾玄以下姑不載 公本質近道 擩染庭訓 資以師友之益 盖性與習成者 固已脫落 凡儒而況又化鈍爲銛 去弦取韋 以之制家 則不施聲威 而閨門斬斬 以之處人 則不設畦畛 而頑懦瞿瞿 苟非所養乎內者厚 惡能如是乎 誠於追先 晨必廟謁 痛斥淫祀曰 與其媚非其神 曷若致孝于吾祖 受徂賚之慶也 文康公親盡當祧 宗中循謬例將行世祀 公據禮止之竟不得 心常慊慨 而其遺稿之散佚者 蒐輯成秩 則公所積力也 嘗議曾孫婚約旣定 有以半體殘廢毁之 公曰獨不聞周恭叔娶瞽事乎 謀面非取婦之道 且敦約不可以貳 竟娶焉 傳之者亦誤 自持謙抑 不喜開門授徒 其以誠來者 則隨叩大小而應之 嗚呼 求道必之於誠正 則雖不中不遠 若公之爲公 約己而泊於利 强識而居於晦 凡言理氣性命之際 謙謙焉不以已知先於人 至見夫踐一行制一事 惟道理當而已 不亦君子矣乎 遂爲之銘曰
朝不信道 曷由能國 人無善師 于何攸則 喈彼鳴矣 莫我翶翔 惟善不替 寔流洋洋
묘갈명서문을 덧붙임
하석 이용원 지음
옛날 우리 종조부 충간공(忠簡公) 병전(秉銓)이 안문강공(安文康公)의 가문에 행실이 돈독한 선비를 천거하여 남별전 참봉(南別殿參奉, 남별전은 영희전(永禧殿)의 먼저 이름이다. 영희전은 조선조 태조․세조․원종․숙종․영조․순조의 영정(影幀)을 봉안하여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을 만드니, 휘(諱) 수록(壽祿)이 바로 이 분이다. 나는 묘령의 나이에 학문을 성취하지 못했으면서도 자주 남쪽 선비들과 어울려 교유하였는데, 모두 “공정한 선발이었다[公選]”고 말하던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게 남아있어 마음으로 매우 추앙하였다. 그러던 차 내 나이 쉰 아홉 살에 갑자기 공의 증손자 성환(成煥) 군이 송연재(宋淵齋: 송병선)가 지은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 나에게 묘갈비를 세우는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하였다. 처음에는 몸은 병들고 정신이 혼미하여 사양했으나 행장을 펼쳐봄에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공이었으니, 또한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공의 자는 여필(汝必)이요 호는 오봉(五峯)이다. 안씨는 죽산(竹山)에 봉해지면서 저명하게 되었고 문강공(文康公) 휘(諱) 방준(邦俊)에 이르러 학자들이 존경하여 ‘은봉선생(隱峰先生)’이라 불렀다. 이분이 공의 6세조이다. 휘 후상(後相)은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되고, 휘 세집(世楫)은 이조참의에 추증되고, 휘 창훈(昌勳)은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추증되니, 이분들이 증조, 조부 그리고 아버지이다. 대대로 학문을 갈고 정의를 뿌릴 것[學耨義播]을 가문의 목표로 삼아 사람들에게 이익을 베푼 것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어머니 진원박씨(珍原朴氏)는 수욱(守彧)의 딸로 원릉(元陵: 영조의 능호) 병신년(1776)에 공을 낳았다.
공은 말을 배울 무렵부터 이미 어른을 공경하는 예절을 알아서 어버이가 명하면 반드시 무릎을 꿇어 받았고, 금지시킨 일이 있으면 뒤에 다시 하지 않았다. 일찍이 변소 위에서 남령(南靈: 담배의 별칭)을 피웠는데 교관공이 그 연기를 바라보고 화재가 발생한 것으로 오인하여 두려워하며 달려와 공을 쳐다보며 말하기를, “이것으로 해서 어버이에게 걱정을 끼치는 것이 옳으냐?” 하니, 이후로 다시는 입에 가까이 하지 않았다.
약관에 송성담(宋性潭: 송환기)에게 집지(執贄: 폐백을 드려 제자의 예를 갖춤)하자, 성담이 함께 강론하고 매우 크게 기대하니, 물러 나와 스스로 경계하기를 “사람의 사람됨은 귀․눈․입․몸을 갖춰서가 아니다. 사람이 되는 도리를 다한 뒤에 사람이라 부를 수 있다”고 하였다. 마침내 날마다 성현의 글을 대하며 쉬지 않고 읽고 사색하였으며, 거듭 읽어도 해득하지 못한 것은 수시로 기록하여 질문할 자료로 삼았다. 주자(朱子)의 글을 매우 좋아하여 마치 자기의 말을 외우듯 하였는데, 함께 학문을 격려한 사람은 김근와(金芹窩), 이용호(李龍湖), 홍매산(洪梅山) 등 여러 현인이었다.
교관공의 명으로 과거공부도 함께 하여 여러 번 응시했으나 예위(禮圍, 예위(禮闈)라고도 쓰는 데, 과거의 회시(會試)를 말함. 또는 그 회시를 보이는 장소. 예조(禮曹)에서 주관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에서 떨어졌다. 상공(相公) 이서구(李書九)가 관찰사가 되어 조정에 천거하여 침랑(寢郞: 참봉의 별칭)의 물망에 올랐으나 이상공과 사이가 좋지 않은 자가 막아버렸는데, 공은 이를 결코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부모의 상을 잘 치러 비록 안정(顔丁, 춘추 시대에 노(魯)나라 사람으로 상(喪)을 잘 치른 고사가 전해져 온다. 『예기(禮記)』 「단궁하(檀弓下)」편.)이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었으니, 비가 오나 날이 개나 상관없이 날마다 성묘하였다. 성담(性潭)의 기일을 만나면 반드시 깨끗이 재계하고 소찬을 먹으면서 흠모하는 마음을 폈다.
나이 많은 큰어머니가 몇 리 밖에 살았는데 항상 맛있는 반찬을 싸들고 찾아가 마치 어린 아이를 보살피듯이 정성을 다하였다. 중제(仲弟: 안수택)가 시력을 잃자 항상 찾아가 웃으며 얘기하여 마음을 누그러뜨려 주었고, 막내 동생과 서제(庶弟) 세 명이 모두 요절하자 과부와 고아들을 보살피고 구휼하는데 마음을 극진히 쏟았다. 만년에 교관공(敎官公)이 세운 정자로 나아가 거처하였는데 이 정자는 문강공(文康公)이 손수 심은 송매(松梅) 곁에 있었다. 이후로는 문 밖을 엿보지 않고 스스로 수양하는 데 힘쓰느라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을묘년(철종 6, 1855)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가 정사년(1857) 6월 16일에 역책(易簀, 증자(曾子)가 죽을 때를 당하여 삿자리[簀]를 바꾸었다는 고사에 근거하여, 학식과 덕망이 높은 사람의 죽음이나 임종을 이르는 말. 『예기(禮記)』 「단궁(檀弓)」편 참고.)하니 향년이 82세였다. 일찍이 가벼운 병에 걸리자 자제들이 의원(醫員, 이 의원의 이름은 조진의(趙鎭毅)이다. 「오봉부군유사(五峯府君遺事)」 참고.)을 찾아가 약을 물으니, 의원은 말하기를 “존공(尊公: 남의 아버지에 대한 존칭)의 마음 속에 금단(金丹, 도사(道士)가 정련(精煉)한 황금의 정(精)으로 만든 환약. 먹으면 장생불사(長生不死)한다고 함.)이 있는데 어찌 번거롭게 약을 조제하겠는가?” 하였다. 아마도 그 사람은 신의(神醫)로 알려진 자로 평소에 정력(定力, 원래는 불교에서 선정(禪定)에 의하여 양성된 힘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오봉공이 평소에 심성 수양을 통해 삶과 죽음까지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길렀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 같다.)을 갖춘 공(公)에게 마음으로 복종한 것이리라. 임종할 즈음에 자리에 바르게 누워 머리를 동쪽으로 두르고 평소처럼 편안히 눈을 감으니, 또한 공의 됨됨이를 볼 수 있겠다. 남긴 문집 6권이 집안에 보관되어 있는데 글이 유창하고 이치가 분명하여 읽기에 난삽한 글귀가 없어, 옛날 작자(作者)가 남긴 뜻을 깊이 터득한 것이다. 순천 모후산(母后山)에 장사지냈다가 뒤에 낙안(樂安) 토산(兎山) 아래 신좌(申坐)의 언덕으로 이장했다.
배필 숙부인(淑夫人) 금성오씨(錦城吳氏)는 상현(相賢)의 딸인데 육친(六親)이 지금까지도 칭송하고 있고, 묘소는 모후산 동남쪽 임좌(壬坐)의 언덕에 모셔져 있다. 3남을 낳으니 명윤(命允), 종가의 뒤를 이은 명협(命浹), 명하(命河)이고, 2녀는 박응휴(朴應休)와 한우준(韓友儁)에게 시집갔다. 측실이 낳은 아들은 명락(命洛)이요 딸은 이병하(李炳夏)․이(李) 아무개에게 시집갔다. 명윤의 두 아들은 형수(瑩洙)․화수(龢洙)요, 딸은 정기(鄭耆)에게 시집갔다. 명하의 세 아들은 의수(檥洙)․응수(膺洙), 명협의 뒤를 이은 치수(致洙)요, 딸은 박도휴(朴濤休)에 시집갔으며, 측실이 낳은 아들은 인수(仁洙)요 딸은 이교령(李敎令)의 아내가 되었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적지 않는다.
공은 도(道)에 가까운 본래 자품으로 아버지의 교훈을 깊이 새기고 스승과 벗의 도움에 힘입어 습성이 된 기질을 참으로 벗겨내 버렸고, 더구나 또 노둔한 기질을 예리하게 변화시키고 급하고도 강한 성격을 누그러뜨렸다. 이로써 가정을 거느리면 고함을 치거나 위엄을 보이지 않아도 집안이 질서정연하고, 이로써 사람을 대처하면 본보기를 보이지 않아도 욕심 많은 자들이 두려워하였으니, 진실로 속마음을 두텁게 기른 자가 아니라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이 하겠는가?
선조를 추모하는 데 정성을 쏟아 새벽마다 반드시 사당을 배알하였고, 음사(淫祀: 부정한 귀신에게 제사지내는 일)를 통렬히 배척하여 말하기를 “부정한 귀신에게 아첨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조상에게 효도를 다하여 내려주시는 경사를 것이 낫다” 하였다. 문강공(文康公)의 제사를 받드는 대수(代數)가 다 되어 마땅히 사당을 옮겨야 하는데도, 문중 사람들은 잘못된 예(例)를 따라 세사(世祀: 신주를 옮기지 않고 대대로 제사를 지냄)를 지내려하였다. 공은 예(禮)에 근거하여 말렸으나 끝내 여의치 않아 마음으로 항상 이를 개탄하였다. 문강공의 흩어져 없어진 유고(遺稿)를 수집하여 완전한 책으로 만든 것은 공이 여러 해 공력을 들인 결과였다.
일찍이 증손자의 혼인을 논의하여 혼약을 이미 정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규수의 몸이 작고 쇠잔하다고 헐뜯었다. 공은 “홀로 주공숙(周恭叔)이 소경에게 장가든 고사를 듣지 못했는가? 모양을 논하는 것은 부인을 취하는 도리가 아니요 또 돈독한 혼약을 위반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하며 끝내 장가들도록 했는데, 이 말을 전한 사람이 잘못한 것이었다. 스스로 겸손함을 지녀 문을 열어 생도를 가르치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지성으로 찾아와 묻는 사람이 있으면 또한 크고 작음을 따라 적절하게 알려주었다.
아! 도(道)를 구하되 반드시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을 따르면 비록 적중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멀리 있지 않다. 공의 됨됨이는 자신을 단속하여 이욕(利慾)에 뜻을 두지 않고 뛰어난 식견으로 숨어 지내면서, 이기(理氣)와 성명(性命)을 말할 즈음에도 겸손하여 자기의 지식을 남보다 앞세우지 않았으나, 하나의 행동을 실천하고 한 가지 일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면 오직 도리에 합당하게 처신할 따름이었으니, 또한 군자(君子)가 아니겠는가? 마침내 다음처럼 명(銘)을 단다.
조정이 도(道)를 믿지 않으면
무엇으로 나라를 다스리랴
사람에게 좋은 스승이 없다면
어디에서 본보기를 얻으랴
아름다운 저 새 울음소리
나를 방황케 하지 말게나
오직 선(善)은 바뀌지 않으니
넘실대며 세차게 흐르리라.
6) 淑夫人吳氏墓表
族先祖五峰先生 配淑夫人錦城吳氏萬年之宅 在松光面龍首洞東臺嶝壬坐原 而尙無揭德之表石 其五代孫鍾聲 懼夫愈久而愈失其潛懿也 使鍾宣記之 鍾宣辭以耄昏不敢當 而綜不獲 則謹據其長胤蓮亭公所撰狀而敍之曰 吳氏始顯高麗 文武相繼 至鮮朝益大而昌 若諱愼中 諱自治 諱世勳 旣皆位至封君 而若諱謜 諱彦彪 諱希道號明谷 諱以井號藏溪 雖位不至甚高 而從事學問 俱名於世 是夫人之六世以上也 曰諱大延 諱世冑 諱泰源 高曾若祖 而考諱相賢 妣全州李氏進士文彦女 以英宗辛卯三月二日 生夫人于昌平之後山第 在家已有孝女之稱 自幼未嘗忤父母之志 家貧躬執炊爨 少無厭苦之態 爲親嗜酒 資沽於針績而不乏焉 年二十二歸于先生 卽正祖壬子也 事舅姑以誠 奉夫子以敬 而家庭之雍睦若治朝 先生之終成碩德 實多夫人之輔佐 純祖戊子十二月二十九日卒 享年止五十八 嗚呼惜哉 先生姓安 諱壽祿字汝必 永禧殿參奉壽僉樞 職憂堂諱昌勳子 文康公牛山先生六代孫也 子姓已詳於先生狀碣 玆不復著
民國七十年戊辰立夏節 夫黨族後孫 安鍾宣 述
숙부인 오씨의 묘표
문중 선조인 오봉(五峰) 선생의 배필 숙부인 금성오씨(錦城吳氏)가 영면하고 있는 묘소가 송광면 용수동(龍首洞) 동대등(東臺嶝) 임좌(壬坐)의 언덕에 있는데, 아직껏 덕행을 게시한 표석이 없었다. 그 5대손 종성(鍾聲)이 세월이 오래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숨은 덕과 아름다운 행실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여 종선(鍾宣)으로 하여금 이를 기록하도록 하니, 종선이 몸은 늙고 정신이 어두워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했으나 끝내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따라서 삼가 그의 큰아들 연정공(蓮亭公: 안명윤)이 지은 행장(行狀)에 근거하여 다음처럼 서술한다.
오씨(吳氏)는 고려조에 처음 높이 드러나 문관과 무관이 잇달아 배출되다가 조선조에 이르러 더욱 크게 번창하였다. 예컨대 휘(諱) 신중(愼中), 자치(自治), 세훈(世勳)은 이미 모두 봉군(封君)의 지위에 이르렀고, 휘(諱) 원(謜), 언표(彦彪)와 호가 명곡(明谷)인 희도(希道), 호가 장계(藏溪)인 이정(以井)과 같은 이는 비록 지위가 매우 높은 곳에 이르지 못했지만 학문에 종사하여 모두 세상에 명성을 떨치니, 이들이 숙부인의 6세(世) 이상의 선조이다.
휘(諱) 대연(大延), 세주(世冑), 태원(泰源)은 고조․증조․조부이고, 아버지는 상현(相賢)이요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진사(進士) 문언(文彦)의 딸이다. 영조 신묘년(1771) 3월 2일에 숙부인을 창평(昌平)의 후산(後山) 본가에서 낳았다. 친가에 있을 때에 이미 효녀라는 칭송을 들었는데, 어려서부터 부모의 뜻을 거스른 적이 없었고, 집안이 가난하여 몸소 불을 피워 밥을 지으면서도 조금도 싫어하거나 고통스러운 모습이 없었으며, 술을 즐기는 아버지를 위하여 바느질과 길쌈한 돈으로 사서 부족함이 없게 하였다.
나이 22세에 선생에게 시집을 오니 곧 정조 임자년(1792)이었다. 시부모를 지성으로 섬기고 남편을 공경으로 받들어 가정이 마치 잘 다스려진 조정처럼 화목하였는데, 선생이 끝내 큰 덕을 이룬 것은 실로 숙부인의 보좌에 힘입은 바 많았다. 순조 무자년(1828) 12월 29일에 세상을 떠 향년이 58세에 그치니, 아! 애석하다.
선생의 성은 안씨(安氏)요 휘는 수록(壽祿)이요 자는 여필(汝必)인데, 영희전 참봉(永禧殿參奉)을 지내고 수직(壽職)으로 첨추(僉樞)에 올랐다. 직우당(職憂堂) 창훈(昌勳)의 아들이요 문강공(文康公) 우산(牛山: 안방준) 선생의 6대 손이다. 자손들은 이미 선생의 행장(行狀)이나 묘갈명(墓碣銘)에 상세히 적혀있으므로 여기에 다시 드러내지 않는다.
대한민국 70년 무진년(1988) 입하(立夏) 절기에 남편의 문중 후손 안종선(安鍾宣)이 적음.
■ 인명록(人名錄)가나다 순서로 배열
권익관(權益寬): 1676-? 문신(文臣), 자는 홍보(弘甫), 본관은 안동(安東), 영조 때 암행어사를 지냈다.
김영한(金甯漢): 1878-1950. 호는 동강(東江), 본관은 안동(安東). 경술국치에 음독 자살한 오천(梧泉) 김석진(金奭鎭)의 아들이요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후손이다. 『급우재집(及愚齋集)』을 남겼다.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완당(阮堂)․노완(老阮), 본관은 경주(慶州). 박제가(朴齊家)에게 수업하여 당대에 고증학(考證學)․금석학(金石學)․서예가(書藝家)로 이름을 떨쳤다.
김 희(金 憙): 1729-1800. 자는 선지(善之), 호는 근와(芹窩), 시호는 효간(孝簡), 본관은 광산(光山), 대제학 김익희(金益熙)의 5대손. 정조 때에 우의정이 되었고 효성이 지극하고 청렴 결백하였다.
민병승(閔丙承): 호는 단운(丹雲), 본관은 여흥(驪興). 한말에 참판(參判)벼슬을 지냈고 『단운집(丹雲集)』을 남겼다.
박광전(朴光前): 1526-1597. 자는 현재(顯哉), 호는 죽천(竹川), 시호는 문강(文康), 본관은 진원(珍原),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제자요,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의 스승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의병을 일으켰고, 『죽천집(竹川集)』을 남겼다.
성 혼(成 渾): 1535-1598. 자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牛溪), 시호는 문간(文簡), 본관은 창녕(昌寧), 청송(聽松) 수침(守琛)의 아들이다.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의 스승이다. 『우계집(牛溪集)』을 남겼다.
송병선(宋秉璿): 1836-1905. 자는 화옥(華玉), 호는 연재(淵齋),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은진(恩津),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9대손이다. 을사년(1905)에 늑약(勒約)이 체결되자 음독 자결하였으며, 문집으로 『연재집(淵齋集)』을 남겼다.
송병순(宋秉珣): 1839-1912. 자는 동옥(東玉), 호는 심석재(心石齋),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의 아우이다. 1912년에 활산정사(活山精舍)에서 음독 자결하였으며 『심석재집(心石齋 集)』을 남겼다.
송환기(宋煥箕): 1728-1807. 자는 자동(子東), 호는 성담(性潭) 또는 심재(心齋), 본관은 은진(恩津),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5대손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으며, 문집으로 『성담집(性潭集)』을 남겼다.
안규숭(安圭嵩): 1889-1943. 자는 성거(聖居), 호는 우촌(愚邨), 『우촌유고(愚邨遺稿)』를 남겼다. 안성환(安成煥)의 둘째 아들이다.
안근수(安根洙): 1818-1873. 자는 성고(聖固), 통덕랑(通德郞)이요, 안명집(安命集)의 아들이다.
안기환(安琦煥): 1847-1918. 자는 계헌(季獻), 호는 소봉(小峰), 생부는 안형수(安瑩洙)이고 양부는 안화수(安龢洙)이다.
안명윤(安命允): 1794-1834. 자는 경승(敬升), 호는 연정(蓮亭), 통덕랑(通德郞)이요, 안수록(安壽祿)의 아들이다.
안명집(安命集): 1791-1855. 자는 양직(養直), 호는 매음(梅陰), 안수영(安壽永)의 아들이다.
안방준(安邦俊): 1573-1654. 자는 사언(士彦), 호는 빙호자(氷壺子)․우산(牛山)․은봉(隱峰), 시호는 문강(文康), 본관은 죽산(竹山), 죽천(竹川) 박광전(朴光前)과 우계(牛溪) 성혼(成渾)에게 배웠다. 『은봉전서(隱峰全書)』를 남겼다.
안성환(安成煥): 1858-1911. 자는 치장(穉章), 호는 소산(蘇山) 또는 고광자(古狂子),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의 문인(門人)이다. 경술년(1910) 국치(國恥)에 피를 토하고 병을 얻어 이듬해에 세상을 뜨니 사림이 애석하게 여겼다. 문집으로 『소산유고(蘇山遺稿)』를 남겼고, 안응수(安膺洙)의 아들이다.
안세림(安世霖): 1694-1766. 자는 용여(用汝), 안후상(安後相)의 장남이다.
안세집(安世楫): 1697-1762. 자는 제여(濟汝), 도암(陶庵) 이재(李縡)의 문하에 유학하고,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안후상(安後相)의 차남이다.
안수록(安壽祿): 1776-1857. 자는 여필(汝必), 호는 오봉(五峰),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의 문인이다. 영희전 참봉(永禧殿參奉),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올랐으며, 『오봉유고(五峰遺稿)』를 남겼다. 직우당(職憂堂) 안창훈(安昌勳)의 아들이다.
안수린(安壽麟): 1763-1807. 자는 지수(趾叟), 호는 순호(蓴湖) 또는 직암(直菴),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의 문인, 『순호유고 (蓴湖遺稿)』가 간행되었다.
안수상(安壽相): 1665-1729. 자는 인수(仁叟), 호는 오헌(梧軒). 학행으로 종묘서령(宗廟署令), 동복현감(同福縣監)을 제수받았다. 택촌파 안후지(安厚之)의 손자이다. 『오야문답(梧野問答)』을 지었다.
안수택(安壽宅): 1783-1858. 자는 여인(汝仁), 호는 죽야(竹埜), 안수록(安壽祿)의 아우이다.
안수행(安壽行): 1781-1863. 개명(改名)은 수언(壽彦), 자는 경숙(敬叔), 호는 존와(存窩), 안창엽(安昌燁)의 셋째 아들이다. 아들 사간원 정언 명석(命奭)의 귀(貴)로 가선대부(嘉善大夫) 에 올랐다.
안인환(安寅煥): 1835-1881. 자는 중헌(仲獻), 호는 매하(梅下), 안형수(安瑩洙)의 아들이요 안기환(安琦煥)의 형이다.
안일지(安逸之): 1613-1643. 자는 정숙(靜叔),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의 다섯째 아들이다. 선교랑(宣敎郞)에 오르고 병자호란(丙子胡亂)에는 부친을 따라 의병을 일으켰다.
안종민(安鍾珉): 1872-1917. 자는 민옥(民玉), 호는 후송(後松), 연재(淵 齋) 송병선(宋秉璿)의 문인이다. 오봉(五峰) 안수록(安壽祿)의 직계 5대손이다.
안종선(安鍾宣): 1899-1992. 자는 성홍(聲洪), 호는 봉산(蓬山), 회봉(晦 峰) 안규용(安圭容)의 둘째 아들이다.
안창규(安昌奎): 1729-1785. 자는 덕휘(德輝), 호는 임연당(臨淵堂), 안세집(安世楫)의 큰아들이다.
안창징(安昌徵): 1733-1805. 자는 백휴(伯休), 안세림(安世霖)의 큰아들 이다.
안창현(安昌賢): 1736-1792. 자는 희백(希伯), 안세림(安世霖)의 둘째아들로 『우산집(牛山集)』 초간본을 간행 배포하는 데 앞 장섰다.
안창훈(安昌勳): 1748-1828. 자는 덕로(德老), 호는 직우당(職憂堂), 동몽 교관(童蒙敎官)에 추증되고 『직우당유고(職憂堂遺稿)』를 남겼다. 안세집(安世楫)의 셋째 아들이요, 오봉(五峰) 안수록(安壽祿)의 아버지이다.
안형수(安瑩洙): 1812-1875. 자는 태이(泰以), 호는 괴재(愧齋), 통선랑(通善郞)이요, 안명윤(安命允)의 아들이다.
안후상(安後相): 1665-1726. 자는 익경(益卿), 호는 매계(梅溪). 향약(鄕約)․의창(義倉)․학사(學舍)를 만들었고 사복시정(司僕 寺正)에 추증되었다. 안외(安崴)의 아들이다.
유영선(柳永善): 1893-1970. 호는 현곡(玄谷),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으로 『현곡집(玄谷集)』을 남겼다. 전북 고창 사람 이다.
유한지(兪漢芝): 1760-?. 자는 덕휘(德輝), 호는 기원(綺園), 본관은 기계(杞溪). 서예가로 문익점 신도비(文益漸神道碑)를 쓴 바 있다.
이건명(李健命): 1663-1722. 자는 중강(仲剛), 호는 한포재(寒圃齋), 시호는 충민(忠愍), 영의정 이경여(李敬輿)의 손자. 경종조에 세제(世弟) 책정 문제에 관여하다 고흥 나로도(羅老島)로 유배되었다가 처형되었다. 『한포재집(寒圃齋集)』을 남겼다.
이도중(李度中): 호는 용호(龍湖) 또는 용산(龍山).
이병전(李秉銓): 1824-1891. 호는 이고(離皐). 『이고집(離皐集)』을 남겼다.
이서구(李書九): 1754-1825. 자는 낙서(洛瑞), 호는 척재(惕齋), 시호는 문간(文簡), 본관은 전주(全州). 교리․호조판서를 걸쳐 순조 때 우의정에 올랐다. 『강산집(薑山集)』을 남겼다.
이용원(李容元): 호는 하석(霞石).
이 이(李 珥): 1536-1584.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시호는 문성(文成), 본관은 덕수(德水). 『율곡전서(栗谷全書)』를 남겼다.
이 재(李 縡): 1680-1746.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陶庵) 또는 한천 (寒泉), 시호는 문정(文正), 『도암집(陶庵集)』과 『사례편람(四禮便覽)』 등을 남겼다.
전 우(田 愚): 1841-1922. 자는 자명(子明), 호는 간재(艮齋), 본관은 담양.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의 제자이며 말년에 부안 계화도에서 강학하여 많은 문도를 배출했다. 『간재사고 (艮齋私稿)』를 남겼다.
정운오(鄭雲五): 1846-1920. 호는 벽서(碧棲), 본관은 연일(延日), 송강(松 江) 정철(鄭澈)의 후손이다. 송병선(宋秉璿)과 종유(從遊)하였고 『벽서유고(碧棲遺稿)』를 남겼다.
정환필(鄭煥弼): 자는 은뢰(殷賚).
홍직필(洪直弼): 1776-1852. 자는 백응(伯應), 호는 매산(梅山), 시호는 문경(文敬), 본관은 남양(南陽). 근재(近齋) 박윤원(朴胤源)의 제자로 젊어서부터 과거에는 뜻이 없고 오직 수양 하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매산집(梅山集)』 52권이 전해 진다.
황 현(黃 玹): 1855-1910.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梅泉), 본관은 장수(長水), 황희(黃喜)의 후손. 1910년에 나라가 망하자 유시(遺詩) 4수를 남기고 음독 순절(殉節)하였다. 한말의 야사를 묶은 『매천야록(梅泉野錄)』은 최근세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職憂堂 安昌勳과 松梅亭
편 찬 : 安泰淳, 安秉五, 安奭淳, 安南淳
번 역 : 安東敎(전남대 철학과)
발행일 : 2003년 7월 11일
발행처 : 竹山安氏 牛峯派 童蒙敎官 宗親會
인 쇄 : 도서출판 라 이 프
ISBN 89-954182-3-0 93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