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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라니>
김마리아
야트막한 산중턱에 벽돌집 하나가 외따로 앉았다.
100여 평쯤 되는 마당 한쪽에 온갖 잡동사니가 쌓여 있다. 잡동사니 위로 내려앉은 서리가 한기를 뿜는다. 대문 맞은편 끝에서 쇳소리가 나며 현관이 열린다. 머리칼을 하나로 질끈 묶은 남자가 기지개를 켜며 마당으로 나온다. 남자의 입김이 허공으로 길게 흩어진다. 그는 두꺼운 오리털 점퍼 속으로 재빨리 목을 구겨 넣는다. 창백한 얼굴에 섬세한 이목구비. 가늘고 긴 체구. 얼핏 보아 남자는 여성적인 인상을 풍긴다. 반면 이마 위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머리칼너머 눈빛이 세차다.
남자가 잡동사니 앞으로 다가선다. 서리를 머금은 잡동사니 위로 햇살이 힘없이 드리워 있다. 주머니에 손을 꽂고 그 모양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남자가 나직이 중얼댄다. 빛 좀 봐. 잡동사니 위로 미끄러지며 반사되는 빛. 남자는 그 모양을 즐긴다. 그는 참지 못하고 주머니에서 손을 빼 잡동사니들을 어루만진다. 잠든 자식의 머리칼을 쓰다듬듯 부드러운 손길이다. 남자는 이내 그것들 가까이에 얼굴을 들이밀고 속삭인다. 조금만 기다려. 근사하게 다시 태어나게 해줄게. 잡동사니 틈에 섞인 낡은 꽃병 위로 남자의 입김이 닿는다. 꽃병에 얹혔던 서리가 잠시 옅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되앉는다.
때. 그것은 스스로 찾아오지 않는다고 남자는 믿는다. 그는 주어진 모든 날들을 손톱만치도 낭비하지 않는다. 문 밖으로 나가본 지 언제던가.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오거나 누군가를 불러들인 지 역시 오래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은 인터넷으로 해결한다. 그나마 대문언저리까지 가는 일도 택배 회사 직원이 찾아올 때 말고는 드물다.
버려진 것들이 지닌 지독한 텅 빔. 그 무한한 상처를 어루만져 그것들을 새로 태어나게 하는 일이 남자에겐 쾌감이 된다. 바람 빠진 타이어, 깨진 항아리, 삐걱대는 의자, 낡은 꽃병, 아무렇게나 생긴 돌덩이, 자잘한 자갈, 불룩하게 쌓인 흙더미, 망가진 악기…. 온갖 것들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가 주머니를 뒤져 장갑을 꺼낸다. 가죽장갑을 낀 그의 손이 부지런히 더미를 더듬는다. 남자는 폐타이어들을 남김없이 골라낸다. 스산한 등나무 아래 놓인 작업대 왼편으로 타이어들이 바삐 옮겨진다. 남자의 눈길이 삽시간에 타이어를 훑는다. 그는 이내 손바닥으로 타이어를 두어 번 내리치더니 잠시 눈을 감고 답을 찾아 헤맨다.
곧 눈을 뜬 남자가 타이어 하나를 작업대로 들어 올린다. 타이어는 틀에 끼워져 세로로 고정된다. 무섭도록 빠르게 회전하는 전기톱. 그 아래로 타이어가 2㎝ 간격으로 잘려나간다. 잘려나간 것들이 작업대 오른편 마당에 포개어진다.
오래 전 일이다. 어느 정도 성공한 선배가 귀띔했다.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달라졌지. 근데 말이지, 그 어느 날은 결코 하루아침에 온 게 아니란 말이지.”
남자가 물었다.
“그럼 어떤 과정을 거친 뒤 오는 거죠? 예술이 뭐죠?”
질문에 답하기는커녕 선배가 오히려 남자에게 되물었다.
“니 생각엔 어떤 과정을 통해 올 거 같냐?”
남자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선배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5년 넘게 설치미술에 매달린 놈이 그걸 말이라고 하냐? 어느 날이 어떤 과정을 통해 오는지 잘 생각해 봐, 새꺄.”
남자는 다시 생각에 잠겨봤으나 답을 알 길이 없었다.
“아무래도 모르겠으니 선배한테 묻는 거 아녜요.”
선배가 한심한 눈초리로 남자를 노려봤다.
“멍청한 놈. 답이 나올 때까지 죽어라 생각해 봐.”
남자는 선배가 해보라는 생각 말고 딴 생각을 했다.
‘자기도 몰라서 저러는 거 아냐.’
남자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선배가 대뜸 지껄였다.
“혹시라도 내가 답을 몰라 이런다고 생각진 마라. 답을 모르면 내가 이 자리에 서기나 했겠냐.”
남자는 긴가민가했으나 그만 입을 다물었다.
만날 그깟 말이나 해대며 우쭐대던 꼴이라니. 주제넘게 뻣뻣했던 선배의 목. 그 꼴을 지우려는 듯 남자의 손놀림이 빨라진다.
타이어 하나를 다 자른 후 전기톱의 작동을 잠시 멈춘다. 순간 무엇이 내는 소리인지 분간하기 힘든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온다. 별 것 아니려니 여긴 남자는 다시 타이어 하나를 세로로 세운 뒤 전기톱을 켠다. 두 번째 타이어를 다 자르고 전기톱을 끄자 여전히 그 소리가 들린다. 남자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긴다.
처마 밑에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있다. 가까이 다가가 그 앞에 쪼그려 앉는다. 얼어붙은 날개를 웅크린 작은 새. 날개를 파닥이려 안간힘 쓴다. 남자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몸짓임이 분명하다. 간신히 벌어진 그것의 주둥이에서 보일 듯 말듯 희미한 입김이 새어나온다. 눈은 반쯤 감겨 있다. 남자가 장갑 낀 손을 내밀어 새를 감싸 쥔다.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현관으로 가 손잡이를 돌리려다 동작을 멈춘다. 새는 다시 제자리에 놓인다. 잘하면 살릴 수도 있을 거라고 남자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대로 두고 관찰하기로 한다.
살아 있는 것에게서 걷히는 생명. 남자는 그것을 보아야 했다. 생명을 가진 것과 주검의 차이를 목격해야만 했다. 이미 생명이 있는 것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은 예술이 아니라 의술이라고, 생명 없는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었을 때 비로소 예술이 된다고 남자는 생각한다. 죽은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방식을 터득하기 위해선 끊임없는 관찰과 사유가 필수다.
한참을 안간힘 쓰던 새의 몸이 서서히 굳는다. 잠깐 사이 한 생명이 속절없이 갔다. 남자는 언 땅을 제법 깊이 파내어 구덩이 속에 새를 밀어 넣는다. 구덩이 주변에 흩어진 흙을 손바닥으로 쓸어 구덩이를 덮는다.
남자가 다시 타이어를 자른다. 타이어를 다 자르도록 죽어가던 새의 모습이 남자의 머릿속을 오락가락한다.
어느새 머리 위로 해가 기운다. 그제야 일손을 놓고 허리를 편 남자가 장갑을 벗는다. 오랜 작업으로 열손가락의 뼈마디가 굳어버렸다. 남자는 손가락을 굽혔다 펴기를 반복하며 걸음을 뗀다.
집안으로 들어온 남자가 벽난로에 장작을 넣는다. 타들어가는 장작의 벌건 불빛이 닫힌 벽난로 문틈 새로 네모난 띠를 이루며 번뜩인다.
난로 옆 식탁에 앉아 밥알을 씹는 동안 새가 죽어가던 과정이 스친다. 그 위로 타들어가는 장작에서 튀는 불꽃이 겹친다. 남자가 쿡, 웃음을 터뜨린다. 살아 있던 새가 얼어 죽었고, 죽은 장작은 벌겋게 타오른다. 움직이거나 혹은 움직이지 않거나. 무언가를 하거나 맥 놓고 있거나. 삶과 죽음의 차이는 그뿐이다…. 이번 공모전에선 반드시 해낼 거야. 남자가 입을 앙다물고 거실을 둘러본다. 공모전에서 낙선한 채 되돌아온 조형물이 곳곳에 즐비하다.
알람이 두어 번 울리자 남자는 눈을 채 뜨기도 전에 침대에서 내려온다. 주방 귀퉁이에 어정쩡하게 선 채 생식가루를 물에 흔들어 마시고는 주섬주섬 옷을 입는다. 창밖을 보자 새하얀 눈이 마당 전체를 덮고 있다. 바람에 휘몰아치는 제법 큼직한 눈발. 대뜸 화가 치민 남자는 거칠게 현관을 열고 나가 담벼락에 기댄 빗자루를 집어 든다. 빗자루로 마당을 쓸지 않고 눈발에 대고 휘두르며 고함을 지른다. 안 그래도 날씨 탓에 작업에 지장이 많다. 눈이 아니더라도 타이어가 단단히 얼어버려 형상을 만드는 데 무리가 있는 것이다. 잘라낸 타이어를 누르고 구부려 옷감을 짜듯 가로와 세로로 교차시켜가며 작업을 해야 하므로.
빗자루로 타이어에 쌓인 눈을 털어내면 이내 눈발이 타이어를 덮는다. 남자는 분이 풀릴 때까지 빗자루로 타이어를 내리친다. 숨이 가빠온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 덮인 타이어에 토치램프를 가져다 댄다. 눈발을 뚫고 사납게 뿜어져 나오는 불길에 단단히 얼었던 타이어가 이내 축 처진다. 원통 모양의 타이어를 잘라내자 기다란 고무판이 된다.
눈보라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된다. 땅을 박차고 달리는 네 다리가 완성된다. 다음은 몸통이다. 몸통 위로 목을 쭉 뻗쳐 올린다. 그 위로 곧 말의 머리가 형태를 드러낸다. 목덜미로 촘촘히 갈기가 자란다. 바람의 방향을 따라 갈기가 시원스레 나부낀다. 마지막으로 90㎝쯤 되는 늠름한 꼬리를 달아주자 말은 한층 위용을 더한다.
공모 마감을 이틀 앞두고 남자는 작품을 완성했다. 작업이 얼추 끝난 건 이미 오래다. 그때부터 남자는 끌과 전기사포를 들고 말 주변을 돌며 표정은 물론이고 갈기 한 가닥에도 섬세함을 더했다.
마당 한가운데 말 한 마리가 우뚝 서 있다. 남자는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손등으로 훔치며 대견스러운 듯 그것을 바라본다. 칼바람이 부는 마당에 서서 남자는 밤이 깊도록 말을 끌어안고 한참을 떨고 섰다.
날이 밝자 2톤 트럭 한 대가 마당으로 들어온다. 남자는 인부들에게 몇 차례고 주의를 준다. 고무밧줄로 단단히 묶인 말이 트럭 위에 선 채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뿌옇게 이는 마른 먼지 사이로 말이 달린다. 더는 트럭이 보이지 않음에도 남자는 미동조차 않고 서서 물끄러미 길 끝을 본다. 칼에 벤 듯 가슴이 아려온다. 남자는 문득 어머니를 떠올린다. 그분은 어떻게 나를 두고 떠났을까. 작품에 대한 반응이 좋더라도 남자는 다른 사람 손에 말을 팔아넘길 생각이 없다.
그날 이후 남자는 날마다 하릴 없이 마당을 서성이거나 트럭이 달리던 길목으로 나갔다.
당선자에겐 보통 발표일 이전에 통보가 오게 마련이다. 당일이 되도록 소식이 없자 남자는 초조한 손길로 오랜만에 수화기를 집어 든다. 수신자가 짧고 건조한 말투로 결과를 전한다. 남자는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 컴퓨터가 부팅되는 데 걸리는 2, 3분이 까마득히 길다. 공모 주최 기관 사이트로 들어가 입상작들을 클릭한다. 장원, 사방 길이 각각 1.5m 크기의 대형 아크릴 액자 속에 수백 마리의 박제된 나비와 수백 개의 돌멩이가 설치돼 있다. 나비들의 날개 끄트머리와 돌멩이 사이에 검은 실이 이어졌다. 작품 제목은 <구속>이다. 차상, 연주에 깊이 도취된 얼굴로 줄이 끊어진 바이올린을 켜는 인간. 청동조형물이다. 작품 제목은 <최고도>. 그 아래론 볼 것도 없다.
사기꾼 같은 새끼들! 그는 미친 듯 마당으로 뛰쳐나간다. 땅에 박힌 돌덩이를 집어든 그가 잡동사니를 사정없이 찍어댄다. 잡동사니들은 이내 만신창이가 되어 마당에 수북이 뒹군다.
며칠 후 말이 돌아왔다. 남자는 한동안 말을 향해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급기야 남자는 자신을 몰아세운다. 말을 떠나보낼 당시 칼에 벤 듯 아려왔던 심정은 뭐냐. 자식과도 같이 여겼던 건 착각이었구나. 반응이 좋아도 다른 사람 손에 넘기지 않으리라 다짐했었잖아. 말은 지금이나 이전이나 똑같은 모습이야. 단지 수상작에 끼지 못했을 뿐. 그런데 왜 말을 피하니? 여느 부모들도 남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자식은 으레 외면해? 영락없이 네 아버지를 닮았구나.
지난 십여 년…. 그는 잠시도 쉬지 않고 무언가를 만들고 부수기를 반복했다. 아무 것도 보장받지 못한 채 속절없이 시간을 죽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지나며 그는 이따금 포기하고 싶었다. 자기만의 깃발이 있긴 한 건지, 깃발을 높이 치켜들 날이 오긴 할지 불안했다. 하지만 끝내 포기 못했다. 혹시라도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서 깃발이 펄럭이며 기다리는 중일지도 모르므로. 남자가 바랐던 건 유명세가 아니었다. 다만 자신이 죽은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을 줄 아는 인간인가를 타인의 시선을 통해 확인받고 싶었을 뿐.
말을 만들며 확신이 섰다. 자동차 바닥에 박혀 자기 의지와는 무관하게 핸들이 꺾는 쪽으로 착실하게 방향을 틀며 구르던 고무바퀴. 그것이 스스로 늠름한 말이 됐다. 어디로 보나 녀석은 당장이라도 땅을 박차고 달릴 듯 생기가 넘친다. 게다가 표정까지 지니지 않았는가. 한껏 치켜 올라간 윗입술 아래 정교하게 뻗은 잇바디. 그 사이로 우렁찬 소리가 터져 나올 듯 보인다 말이다. 뭐가 문제인가. 남자는 예술이라는 것을 더는 믿지 않기로 한다. 작업을 멈출 생각은 없다. 남들이 뭐라 하든. 결과가 어떠하든.
마당으로 나간 그는 뾰족하게 날을 세운 채 널브러진 잡동사니를 일일이 담벼락에 붙인다. 회칠한 듯 삭막하던 담벼락이 온갖 색을 입는다. 고르지 않은 빛깔과 재질이 제 멋대로 섞여 목적 없는 무늬를 이룬다. 봄을 맞은 산처럼 담벼락이 야단스럽다. 밤이 깊도록 남자는 담벼락을 마주하고 서 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남자는 그 짓을 한다. 깨어져 나뒹구는 것들이 모조리 사라질 때까지. 그는 이제 깃발에 관한 미련 따윈 버렸다. 깃발을 원했었다는 것과 원치 않는다는 것 외에는 전이나 지금이나 상황이 같다.
야단스러운 담벼락은 지나는 사람들 시선을 종종 붙들었다. 사람들은 마당 안쪽까지 기웃거렸다. 전에 없던 관심이다. 남자는 낯선 눈길들을 무시하고 제 할 일만 한다.
마당에 뒹구는 것들이 더는 없자 남자는 모처럼 차에 시동을 건다. 낡을 대로 낡은 자동차가 바람 빠진 공처럼 쿨럭대며 간신히 산을 내려간다. 남자는 며칠째 산 아래 아파트 단지를 돌며 사람들이 내다버린 물건들을 주워 차에 싣는다. 버리지 않아도 좋을 물건을 아무렇지 않게 버리는 사람들. 남자는 그들의 심리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쓰레기를 차에 싣는 남자의 뒤통수에 대고 경비가 중얼거린다.
“허구헌날 쓰레기만 뒤지고 다니네. 대체 뭐하는 짓인지, 원….”
어떤 경비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의 수위를 한층 높인다.
“저 사람 저 거 미친 거 아녀?”
그러거나 말거나. 마당 한쪽에 다시 잡동사니가 수북이 쌓일 때까지 남자는 그 짓을 계속한다.
쓰레기를 싣고 집으로 가던 중 남자가 갑자기 방향을 튼다. 고급 주택가의 어느 호화스러운 집 앞에 남자가 서 있다. 그는 대문 밖에 서서 대문을 가로지르는 넓은 정원과 정원 끝에 들어앉은 익숙한 건물을 한참 주시한다.
남자의 등 뒤에서 굵직한 저음이 묻는다.
“누구냐!”
남자가 고개를 돌린다.
“아버지….”
저음이 단호하게 남자의 말을 자른다.
“네 녀석이 내 자식이긴 한 거냐!”
남자는 아버지의 말에 아랑곳 않고 묻는다.
“잘 지내시죠?”
“못난 녀석….”
“그냥… 근처를 지나던 길이에요. 갈게요.”
남자가 힘없이 돌아서 자동차 문짝을 막 여는 순간 아버지가 묻는다.
“언제까지 그러고 살 거냐?”
“이렇게 사는 게 편해요.”
“나도 이제 살날이 많지 않다.”
남자는 말없이 차에 올라탄다. 길목을 빠져나오는 동안 아버지가 백미러 속에서 꼼짝 않고 서 있다. 길 끝에 다다른 남자가 천천히 좌회전을 하고서야 백미러 속 아버지가 사라진다.
아버지 앞에서 남자는 늘 숨통이 막혔다. 아버지는 언제나 열어젖힐 의사가 없는 강철 문처럼 고집스럽게 살아왔다. 남자는 그 안에 갇혀 살거나 아예 벗어나야만 했다. 그 문 안팎을 들락거리며 아버지와 자유롭게 공생할 길은 없었다. 남자는 고분고분한 태도로 아버지를 기쁘게 해주고픈 맘이 없었다. 아버지가 고통스런 표정을 할 때면 남자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버지는 남자가 자기 대를 이어 수완 좋은 사업가로 살아가길 바랐고 남자는 아버지가 가장 끔찍해하는 예술가의 길을 택했다. 아버지는 끝내 남자를 내쳤다. 남자는 오히려 속이 후련했다. 오늘은 다르다. 어느새 굽어가는 허리. 듬성듬성한 새하얀 머리칼. 살날이 많지 않다는 힘없는 한마디. 남자가 사라질 때까지 돌아서지 못하는 모습…. 허물어져 가는 아버지를 봤음에도 통쾌하지 않다. 남자는 갑자기 목이 칼칼해 몇 번이고 헛기침을 해댄다. 갑자기 아버지는 왜 찾아갔을까. 남자가 길게 한숨을 쉰다.
집으로 돌아온 남자는 곧바로 사생첩을 꺼낸다. 식탁에 앉아 데생을 시작한다. 터치 하나하나가 신경질적이다. 하얀 종이 위에 여인의 품에 매달린 아이가 들어 있다. 여인은 나이를 가늠할 수 없다. 소녀인지 어른인지 모호한 표정이다. 한 가지 뚜렷한 점은 여인의 표정이 몹시 슬프다는 것. 남자가 두 손으로 종이를 사정없이 구겨 뜯어낸다. 다시 데생이다. 아이와 여인이 풍기는 분위기가 여전하다. 종이가 다시 뜯겨나간다. 다시 데생이다.
남자는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를 본 적이 없다. 자식이 없는 아버지가 젊은 여자를 데려다 아기를 낳게 했고,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여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했다. 낳자마자 두고 가야 할 아이를 낳다니. 어떻게 감히 그런 일을….
밤이 깊어서야 남자가 식탁에서 일어선다. 사생첩을 덮은 남자가 마당으로 나간다. 그는 천천히 말 앞에 선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남자가 다시 말을 끌어안는다. 조금씩 새어나오던 흐느낌이 점점 거세진다. 흡사 말의 울부짖음과도 같은 소리가 허공을 찢는다. 싸늘한 달빛이 남자를 희롱한다. 들썩이는 남자의 어깨를 타고 짓궂게도 쉬지 않고 춤을 추며.
주워 온 물건 가운데 유아용 욕조가 있다. 대문 밖에서 작은 나무 한 그루를 뽑아내 욕조에 옮겨 심는다. 땅에 묻었던 새를 다시 파낸다. 추운 날씨 덕에 새는 아직 그대로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새의 내장을 발라내고 빈 공간에 솜을 넣어 실루엣을 살린다. 방부·방충 처리를 꼼꼼히 한다. 새는 비록 죽었지만 멀찌감치 떨어져 바라보면 제법 살아 있는 듯 보인다. 남자의 한쪽 입 꼬리가 올라간다. 굵은 철사를 2m쯤 되는 길이로 자른다. 박제된 새 다리에 철사를 감아준다. 기다랗게 남은 철사의 한쪽 끝을 나뭇가지에 연결한다. 새가 철사에 묶인 채 나무 아래로 늘어진다. 남자는 사다리를 펼쳐 그 위로 올라가 철사를 단단히 세운다. 날개를 펼친 새가 하늘로 치솟는다.
지나던 사람이 카메라를 꺼내 벽과 말과 욕조와 그 밖의 조형물을 찍어댄다. 남자가 그 모양을 바라보자 카메라를 쥔 사람이 손가락을 들어 V자를 그린다. 남자는 그자에게 어떤 말과 표정으로 응하는 게 적당할지 감을 잡지 못한다.
겨울 가고 어느새 봄이다. 남자의 마당 곳곳에 기이한 조형물들이 불균형하게 어우러져 있다.
오전 열한 시. 모처럼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남자가 눈을 뜬다. 그는 길게 하품을 하며 비트적거리는 걸음으로 거실 창가로 간다. 캠코더를 둘러맨 중년의 사내와 아직 이십 대로 보이는 여자 하나가 대문 밖에서 마당을 기웃거린다. 남자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밖으로 나간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방송국에서 왔습니다. 작품들이 상당히 독특합니다.”
눈곱이 말라붙은 남자의 멍한 눈이 재잘거리는 여자를 무심히 본다.
이번엔 사내가 묻는다.
“언제부터 설치미술을 하셨습니까?”
남자가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좀 됐어요.”
“다다이스트이신가요?”
“무엇으로부터 이탈하려는 몸부림이 치열한 인간일수록 실은 무엇에 강하게 지배당하는 경우가 많은 거 알아요?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그래요. 어쨌거나 일단은 기존 코드를 전복시키고 보자는, 말하자면 다만 탈코드를 위한 몸부림에만 집중하는 자들…. 왜 그 짓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이탈을 위해 몸부림치느라 오히려 이탈에 속박된 자들로 가득한 세상이죠. 달아나는 짓, 지긋지긋할 텐데 말예요. 사조 따위 관심 없어요. 나는 그냥 내 멋대로 해요.”
남자의 말을 가만히 듣던 사내가 문득 여자를 본다.
바통을 넘겨받아 여자가 종알댄다.
“촬영 좀 해도 될까요?”
캠코더를 응시하며 남자가 잠시 망설인다. 나쁠 건 없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남자가 머리칼을 정돈하기 시작한다.
사내가 부탁한다.
“머리, 그대로 두시죠. 자연스럽고 좋습니다.”
남자가 머리칼에 뻗었던 손을 거두자 사내는 서둘러 캠코더 액정을 펼친다.
여자의 질문이 이어진다.
“선생님 작품들을 보면, 음산한 기분과 동시에 뭔지 모를 슬픔이 전해져요. 작품 경향을 한마디로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남자가 눈꺼풀을 비빈다. 바짝 마른 눈곱들이 남자의 손가락 사이로 바스러져 흩어진다.
“찢고 깨고 붙이고, 내 안에서 시키는 대로. 아니 가끔은 내가 내게 반항도 하면서. 내가 처한 모든 상황을 주로 눈 부릅뜨고 마주보면서…. 되도록 달아나지 않으려 애쓰면서…. 그렇게 작업해요. 그냥…, 그래요.”
캠코더를 든 사내와 젊은 여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삼일 뒤 방송이 나갈 겁니다. 편집 잘 해서 내보내겠습니다.”
인터뷰를 마친 그들이 깍듯이 인사하고 돌아선다.
뒷모습을 보이며 걷는 여자의 말소리가 대문을 닫는 남자의 고막으로 스민다.
“재밌네요.”
남자는 등나무 아래 작업대로 간다. 작업대 앞 나무의자에 걸터앉아 갑자기 벌어진 조금 전 일에 대해 가만히 떠올린다.
약속된 그날, TV에서 남자와 남자의 작품이 소개되고 있을 때 그는 TV를 켜지 않았다. 태연히 마당을 돌며 버려진 물건들을 가져다 열심히 무언가를 했을 뿐.
방송이 나간 뒤 전에 없던 일들이 빈번하다. 통 소식이 없던 선배에게서 곧 들르겠다는 연락이 왔고, 아예 인연이 끊겼던 동기들이 어떻게 연락처를 알았는지 전화를 해댔다. 지역 문화재단에서도 요청이 왔다. 집을 아예 박물관 식으로 개방하면 어떻겠냐고. 남자는 좀 더 생각해보겠노라며 대답을 미뤘다. 신문이나 잡지 기자들도 심심찮게 찾아왔다. 순식간에 일어난 변화. 그토록 기다리던 순간이 왔건만 남자는 별 느낌이 없다.
봄이 한창인 어느 날 아버지가 전화를 했다. 남자가 집을 나온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애비다. TV며 신문 봤다. 그 길이 네 길 맞는가 보다. 열심히 해 봐라…. 가끔씩이라도 집에 들르고.”
아버지와의 통화를 마치고 수화기를 내려놓기 무섭게 선배가 전화를 했다. 잠시 후 선배는 예쁘장한 기자 한 명을 데리고 들이닥쳤다. 선배는 어느새 눈에 띄게 늙었다. 세월이 그를 늙게 한 건지, 요즘 뜸해진 세간의 관심이 그를 초라하게 만든 건지 알 수 없었다. 그토록 오랜만에 만났건만 반가운 마음이 일지 않는다. 선배는 달랐다. 서로 며칠이 멀다하고 만나온 사람처럼 무척 친숙한 척을 했다.
선배가 기자에게 남자를 소개한다.
“얘가 인성이에요. 사진보다 실물이 낫죠?”
기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선배는 연달아 기자에게 너스레를 떤다.
“어쩌면 이 녀석이야말로 진정한 예술가예요. 예술 때문에 집에서 쫓겨나면서도 눈 하나 꿈쩍 안 한 놈이니까. 그렇게 좋은 환경을 버리긴 쉽지 않죠. 아버지 밑에만 있었으면 죽을 때까지 고생이라곤 모르고 살았을 텐데 말이지. 그 좋은 환경 다 버리고 말이야. 얘가 하루아침에 뜬 거라고들 하는데 모르는 소리예요. 이렇게 되기까진 다 이유가 있는 거지.”
남자는 선배를 빤히 본다.
예의 그 뻐기는 말투로 선배가 또 지껄인다.
“얘가 또, 뭐냐. 내 영향도 많이 받았어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말이지, 둘이 마주앉아 예술이 뭐니, 인생이 뭐니 하며 같이 고민 많이 했지요.”
기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배실 웃으며 선배의 말을 받아 넘긴다.
“그 말씀은 여기 오는 내내 하셨잖아요.”
의도하지 않은 콧방귀가 남자에게서 새어나온다.
기자가 화장실엘 가느라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선배가 남자에게 슬쩍 묻는다.
“대체 어떻게 된 거냐? 소식 뚝 끊고 살더니만 하루아침에 이게 웬일이냐? 작품 좋네, 좋아. 어떻게 이런…. 누구한테 전수받았냐? 비결이 뭐냔 말이지.”
남자가 나직이 대답한다.
“답은 이미 알면서 왜 이래요?”
선배가 남자의 옆구리를 쿡 찌른다.
“에이, 새끼 그 거…. 거드름 피우지 말고 말 좀 해 봐.”
남자는 대답 없이 하늘을 본다. 구름이 많이도 떠 있다. 남자가 한동안 그 자세를 유지한다.
선배가 남자를 따라 고개 들어 하늘을 보며 묻는다.
“구름이 장난 아니네. 근데 너, 뭔 생각으로 목 빼고 하늘만 보냐?”
남자는 말이 없다.
화장실에 다녀온 기자가 남자에게 묻는다.
“사진 좀 찍어야겠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선배와 함께 여러 컷의 사진을 찍는다. 남자의 작품 앞을 꼬박 돌며 촬영을 했음에도 기자는 지칠 줄을 모른다. 수십 방이 넘는 사진을 찍고는 이제부터 독사진을 찍잔다. 남자가 말 옆에 뻣뻣이 선다.
기자가 산뜻한 목소리로 외친다.
“웃으세요, 선생님.”
남자가 웃어 보이려 애쓴다.
성에 차지 않는지 기자가 다시 주문한다.
“치즈. 치즈하세요.”
남자가 인중 근육을 그대로 둔 채 입을 벌려 치즈, 한다. 입 꼬리가 오히려 아래로 쳐지며 아랫니만 일제히 드러난다.
기자가 손사래 치며 말한다.
“아니아니, 김치하세요!”
남자가 김치, 한다. 나름대로 웃어 보이려 애쓰며 입을 한껏 벌리자 윗니 아랫니가 모두 보인다. 그럼에도 기자는 불만인 모양이다.
“아이 참, 선생니임~! 김치요, 김치!”
아무리 김치를 해줘도 기자는 곤란한 표정이다.
남자는 생각한다.
‘에이 씨, 김치 했는데 어쩌라고. 날더러 자꾸 뭘 어쩌라고, 젠장!’
선배가 나직이 중얼댄다.
“아, 새끼. 한 번 웃어주는 게 그렇게 힘들어? 되게 뻣뻣하게 구네, 새끼….”
기자가 답답하다는 듯 외친다.
“그냥 편히 계세요.”
남자가 입을 꾹 다문다. 어정쩡한 자세로 말 등에 손을 얹은 무표정한 남자가 카메라에 잡힌다.
선배와 기자가 돌아갔다. 남자는 쓰러지듯 침대에 눕는다. 창을 뚫고 들어온 햇살이 아직 창창하다. 한 시간 넘도록 카메라를 응시하느라 지친 눈을 지그시 감는다.
스탠바이 상태는 이미 지났다. 스산했던 무대에 조명이 켜졌다. 무대 사방이 퍽 부시다. 이제 남자 스스로 큐를 잡고 무대를 종횡무진하면 그만이다. 남자에게서 환상을 기대하는 관객의 수런거림으로 객석이 분주하다. 기다리던 때가 온 것이다. 이상하다. 시작도 하기 전에 기운이 빠진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다. 모든 게 낯설다. 남자는 왠지 자신의 무대를 조명 없던 스산한 상태로 되돌리고 싶다.
조명. 그것은 원할 때 켜지지 않았듯 원할 때 꺼지지도 않는다. 남자가 무대 위를 서성거린다. 그가 걸음을 뗄 때마다 관객들이 환호한다. 관객을 마주한 그의 시선은 초점 없이 흐리다.
첫댓글 포천 가는 길에 그 말이 있더니만 이 남자가 만든거였넹...치즈도 좋고 김치도 좋으니 누가 그래봐라 시켜줬으면 좋겠다.
바로 그 말을 보고 말 만드는 작업에 관한 에피소드를 상상했지요^^. 우선은 제가 언제 한 번 치즈~! 하시라고 요청할게요.
이미 생명이 있는것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은 예술이 아니라 의술이라고, 생명없는 사물에 생명을 불어 넣었을 때 비로소 예술이 된다고..... 의술도 예술도 되지 못한 사람은 어디로 가야할꼬.
의술도 예술도 다 되시면서 지나치게 겸손하십니다 ㅠ.ㅠ;;
“찢고 깨고 붙이고, 내 안에서 시키는 대로. 아니 가끔은 내가 내게 반항도 하면서. 내가 처한 모든 상황을 주로 눈 부릅뜨고 마주보면서…. 되도록 달아나지 않으려 애쓰면서…. 그렇게 작업해요. 그냥…, 그래요.” 마치... 이 글을 쓰실 때의 <마리>님의 치열한 열정을 함축시켜 놓은 듯한 문장이라면, 외람된 말씀일른지요??? 잠깐 둘러 보러 왔다가, 마리 님의 멋진 글의 <무대>위를 집중하여 감탄하며....한참을 그냥,,,그렇게 서성거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