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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世 습명(襲明, ?∼1151)
∙호(號) : 동하(東河), 형양(滎陽).
∙관직(官職) : 고려(高麗) 예종(睿宗), 인종(仁宗), 의종(毅宗) 3대 간신(諫臣). 의종의 사부(師傅), 한림학사(翰林學士),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행적(行蹟) : 김부식(金富軾)과 함께 삼국사기편찬(三國史記編纂), 인종의 명으로 충남 태안반도 굴포(堀浦)에 운하개착(運河開鑿).
∙최자(崔梓), 김부식(金富軾), 임원애(任元敱), 이중(李仲), 최주(崔奏) 등과 함께 '시폐 10조(時弊十條)'를 상주(上奏).
∙실기(實紀)와 단비(壇碑, 영의정 유척기 찬), 신도비(神道碑), 남성재(南城齋)가 있음.
∙향(享) : 오천서원(烏川書院), 하동옥산서원(河東玉山書院).
2世 섭균(燮均)
∙관직(官職) : 고려조(高麗朝) 위위주부동정(衛尉主簿同正)
∙묘소(墓所) : 불명(不明)(고려 때는 불교가 국교이기 때문에 다비(茶毘)를 하였을지도 모름)
3世 겸목(謙牧) 장남 인신, 차남 차연(8파)
∙관직(官職) : 고려조(高麗朝) 내시주부동정(內侍主簿同正)
∙묘소(墓所) : 불명(不明)
4世 인신(麟信)
∙관직(官職) : 고려조(高麗朝) 태학박사(太學博士), 봉위동정(奉衛同正)
∙묘소(墓所) : 불명(不明)
5世 지태(之泰)
∙관직(官職) : 고려조(高麗朝) 주부동정(主簿同正)
∙배위(配位) : 기계군부인 윤씨(杞溪郡夫人 尹氏)이며 감찰어사(監察御使) 昇의 따님
∙묘소(墓所) : 불명(不明)
6世 종흥(宗興) 장남 임, 차남 호(7파)
∙관직(官職) : 고려조(高麗朝)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 중현대부 감문위대호군(中顯大夫 監門衛大護軍)
∙배위(配位) : 진(陳)씨로 서승(署丞) 취렬(就列)의 따님이며 군기현감(軍器監令) 규(規)의 손녀이다.
∙묘소(墓所) : 불명(不明)
7世 임(林) 장남 인수(1파) , 차남 인언
∙관직(官職) : 고려조(高麗朝) 봉익대부 판도판서(奉翊大夫 版圖判書)
∙배위(配位) : 의창(義昌) 박씨(朴氏)로 부령(副令) 익(益)의 따님이며 장군(將軍) 승합(承?)의 손녀이다.
∙묘소(墓所) : 불명(不明)
8世 인언(仁彦)
(고려(高麗) 충숙왕 1315년~?)
∙호(號) : 송간(松磵)
∙관직(官職) : 고려조(高麗朝) 봉익대부 전공판서(奉翊大夫 典工判書)
∙배위(配位) : 오천군(烏川郡) 부인(夫人) 영일정씨(迎日鄭氏)(고려 충숙왕 1324년~?)로 종부령(宗簿令) 유(侑)의 따님이며 의랑(議郞) 윤(潤)의 손녀(孫女)이고 의랑(議郞) 인천(仁川) 채유길(蔡惟吉)의 외손녀(外孫女)이다.
∙묘소(墓所) : 불명(不明)
공(公)은 충혜(忠惠), 충목(忠穆), 충정(忠定), 공민왕(恭愍王) 4代의 중신(重臣)으로 고려(高麗)는 공민왕이 반원정책(反元政策)을 쓰고 또한 홍건족(紅巾賊)과 왜구(倭寇)의 침입이 잦고 국내 사정은 조정 중신들 간에 신진파(新進派)와 구귀족(舊貴族)간, 친원파(親元派), 친명파(親明派)로 갈리던 혼란한 시대였다. 힘없는 우왕(禑王) 때에는 신흥귀족인 이성계(李成桂) 일파가 위화도(威化島) 회군(回軍)으로 군사.정치(軍事·政治)의 전권(全權)을 장악하고 역성혁명(易姓革命)의 꿈을 꾸던 때였다. 이러한 국내외의 어지러운 상황에 처하자 송간공(松磵公)은 나라의 보전(保全)은 종증손(從曾孫) 포은(圃隱) 선생(先生)<포은(圃隱)은 신진파 중에서도 이숭인(李崇仁) 등과 같이 근왕주의자(勤王主義者임)>이 가문보전(家門保全)은 공(公)께서 담당하니 당시 상주목사(尙州牧使)이던 아드님(光厚)과 함께 포은공의 자제(子弟) 형제(兄弟)들을 비롯하여 문내(門內) 젊은이들을 어디론가에 은적(隱迹)시키고 자신들도 영천(永川) 전촌(錢村)으로 피신하여 풍전등화(風前燈火) 같던 우리 가문을 보전케 한 선조이다. 만약 이때 피신하지 않았다면 고려(高麗)의 유신(遺臣)이고 또한 포은(圃隱)의 종증조부(從曾祖父) 가정이기 때문에 역성혁명(易姓革命)을 한 이성계(李成桂), 이방원(李芳遠) 부자와 그 도당(徒黨)에게 무참히 도륙(屠戮)당하여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9世 광후(光厚) - 판서공(判書公) 장남 위, 차남 번, 3남 영<장남 문비(5파 파조),차남 문욱(6파 파조)>
∙관직 : 문과급제, 고려조 상주목사, 조선조(朝鮮朝) 공조판서.
∙가문의 안녕(安寧)을 위해 공조판서를 승낙하여 향화(香火)를 천추(千秋)에 잇게 하였다.
∙묘(墓) : 영천시 북안면 원당리. 원당재(元堂齋)가 있음.
∙만사(輓詞) : 영의정 성주 이 직(李稷).
∙묘지명(墓誌銘) : 12대손 참의 중기(重器)가 찬하고, 갈명(碣銘)은 8대손 사물(四勿)이 찬.
∙배 : 익양군부인이씨(益陽郡夫人李氏), 전리판서 후룡(典理判書 厚龍)의 여.
10世 위(瑋) (司正公) 장남 문예(2파 파조), 차남 문계(3파 파조), 문손(4파 파조),
∙관직(官職) : 돈용교위 웅무시위 사후령사정(敦勇校尉 雄武侍尉 司後領司正)
∙배위(配位) : 대구 서씨(大邱 徐氏)로 동정(同正) 유(裕)의 따님. 묘소(墓所)는 부공(夫公)과 같은 등선
∙묘소(墓所) : 영천시 금호읍 원기리 당지(唐旨). 묘소(墓所) 아래 당산재(唐山齋)가 있음.
∙묘사일(墓祀日) : 陰曆 10月 16日
11世 문예(文裔) - 생원공(生員公)
∙조선 태종(太宗)2年 생원, 영산유학교도(靈山儒學敎導).
∙전촌(錢村)에서 대전동(大田洞)으로 옮긴 이파(二派) 파조.
∙자, 손(子, 孫) 양대(兩代)에 8급제(及第)가 났다.
∙묘 : 영천시 오미동 삼귀, 삼귀재(三歸齋)가 있음.
∙묘표(墓表) : 9대손 석주 기(九代孫 碩冑 記)
∙배 : 영양이씨(永陽李氏<永川李氏>), 부사직(副司直) 현실(玄實)의 여로 대전(大田) 이보흠(李甫欽)의 누님.
12世 종소(從韶)
∙자(字) : 가정(可貞). ∙호(號) : 정헌(靖軒).
∙세종조(世宗朝) 문과중시(文科重試),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류성원(柳誠源) 등과 동방급제.
∙관직 :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 의성(義城), 영천(榮川, 현 영주), 예천(醴泉), 함양(咸陽) 군수(郡守), 통훈대부 성균관사성(通訓大夫 成均館司成).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선생이 항상(恒常) 오천정선생(烏川鄭先生)이라 추존(追尊)하였으며 단종(端宗)을 도운 유신(遺臣)으로 계룡산 숙모전(鷄龍山 肅慕殿)에 배향(配享)<西廡 30>.
∙묘 : 영천시 북안면 원당리.
∙지문(誌文) : 9대손 참의 중기(重器) 찬.
∙배 : 숙인 평산윤씨(淑人 平山尹氏), 참판 통(統)의 여.
13世 이휘(以揮)
∙자(字) : 자건(子健).
∙문과중시에 급제.
∙관직 : 장수도찰방(長水道察訪, 현 新寧), 별제(別提), 용안현감(龍安縣監, 현 전북 익산),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직제학(直提學), 통정대부양주목사(楊州牧使).
∙지문(誌文) : 9대손 일찬(一鑽) 찬.
∙묘 : 조부 생원공(生員公)의 묘 계하.
∙배 : 숙인 춘천박씨 (淑人 春川朴氏), 효전(孝佃)의 여.
14世 차근(次謹) - 선무랑(宣務郞)
∙자(字) : 신보(愼甫).
∙무오사화(戊午史禍)를 피하여 대전(大田)에서 자양 노항(紫陽 魯巷)으로 은입(隱入)하신 자양 입향조(入鄕祖).
∙배 : 벽진이씨(碧珍李氏)로 배원(培源)의 여. <생육신(生六臣) 이맹전(李孟專)의 증손녀(曾孫女)>.
15世 윤량(允良, 1515-1580)
∙자 : 원좌(元佐). ∙호 : 노촌(魯村).
∙관직 : 장사랑(將仕郞), 숙릉참봉(淑陵參奉), 창릉참봉(昌陵參奉).
∙갈명(碣銘) : 세마(洗馬) 이광정(李光庭) 찬.
∙행적 : 퇴계(退溪)선생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후 후진양성을 위하여 자양서당(紫陽書堂)을 설립하였으며 진사 노수(盧遂), 생원 김응생(金應生), 생원 정거(鄭琚)와 함께 임고서원(臨皐書院) 창건.
∙배 : 의인(宜人) 영천최씨(永川崔氏), 봉사(奉事) 덕금(德嶔)의 여, 계배(繼配) 영천최씨(永川崔氏).
16世 세아(世雅, 1535-1612)
∙자 : 화숙(和叔). ∙호 : 호수(湖叟).
∙시호(諡號) : 강의(剛義).
∙24세에 진사(進士)에 합격.
∙1565년 31세 때 요승(妖僧) 보우(普雨)를 처단(處斷)하도록 상소(上疏).
∙1592년 58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천지방(永川地方)에서 가장 먼저 의병(義兵)을 일으켜 의병장(義兵將)에 추대되어 빼앗겼던 영천성(永川城)을 찾고, 경주성(慶州城) 싸움에서 적군에 포위되자 장자(長子) 의번(宜藩)이 부공(父公)을 구출하고 자신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영천성, 경주성을 찾은 공(功)은 다른 장수(將帥)에게 양보하고 자양(紫陽) 옛 고장의 자호정사(紫湖精舍)에서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체찰사(體察使)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공의 추천으로 잠시 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 현 경남 양산)을 지낸 후 귀향하여 전란으로 불탄 임고서원을 중건하여 후진양성에 전념.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창석(蒼石) 이준(李埈),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선생 등 여러 선비들이 때때로 찾아와서 학문을 토론하였으며, 끝내 벼슬을 사양하고 수려한 산수를 벗 삼아 천수(天壽)를 누리시어 향년(享年) 78세로 돌아가셨다.
∙1732년에 영천, 경주를 복성(復城)한 공(功)으로 자헌대부병조판서(資憲大夫兵曹判書)에 증직.
∙1788년에 강의(剛義)란 시호(諡號)가 내려짐.
∙호수선생실기(湖叟先生實記)가 있으며, 신도비명(神道碑銘)은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 영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찬하고 묘지명은 좌의정 송인명(宋寅命) 찬.
∙향(享) : 환구세덕사(環丘世德祠), 임란호국 영남충의단(壬亂護國 嶺南忠義壇), 경주임란의사창의단비(慶州壬亂義士倡義壇碑)<경주황성공원>.
∙배 : 증 정부인(贈貞夫人) 일직손씨(一直孫氏)로 현감 치운(致雲)의 여<모당의 고모>.
17世 수번(守藩, 1580-1621) 장남 호의, 차남 호례(출계), 3남 호신.
∙호수공의 4子.
∙자 : 정보(貞甫).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丁酉再亂)때 호수공, 숙형(叔兄) 안번(安藩)과 더불어 화왕산(火旺山) 회맹(會盟)에 참가.
∙관직 : 무과급제,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 내금위장(內禁衛將). 형난원종일등공신(亨難原從一等功臣).
∙호군공사적지(護軍公事蹟誌), 위사재(衛社齋)가 있으며,
∙갈명 : 참의 정중기(鄭重器)가 찬하고, 지명은 서강(西岡) 전삼성(全三省)이 찬.
∙향 : 임란호국 영남충의단(壬亂護國 嶺南忠義壇). 경주임란의사창의단비(慶州壬亂義士倡義壇碑)<경주황성공원>.
∙배 : 숙부인(淑夫人) 창녕조씨(昌寧曺氏)로 생원 희익(希益)의 여.
18世 호신(好信, 1605-1649) 장남 시우, 차남 시희, 3남 시찬.
∙호군공(護軍公) 수번(守藩)의 차자(次子).
∙자 : 덕기(德基). ∙호 : 삼휴정(三休亭).
∙모당 손처눌, 여헌 장현광의 문인.
∙정묘·병자호란 창의. 승훈랑(承訓郞).
∙상화집(常華集), 삼휴정(三休亭), 초곡재(楚谷齋), 유적비(遺蹟碑)가 있음.
∙묘 : 영천시 고경면 초일리 (永川市 古境面 草日里).
∙갈명 : 야성 송이석(冶城 宋履錫) 찬.
∙배 : 창녕성씨(昌寧成氏), 찰방 이직(察訪 以直)의 여.
19세 시우(時羽) <사과공(司果公)>장남석현, 차남석함, 3남석겸, 4남석승, 5남석임
∙경오1630년 8월 20일-기묘1699년 11월 13일.
∙국가가 구호(守護)된 후에 학문이 중요하다. 그르니 문무는 그 귀함이 같다라고 주장하시었다.
∙병진1676년 무과에 급제하여 내직을 거처서 용양위(龍釀衛)부사과 (副司果)에 재직하다가 권문세족(權門勢族)들의 횡포를 보자 직(職)을 버리고 낙향하여 시우(詩友)들과 자호(紫湖)의 산수간(山水間)에 유유 자적(悠悠自適) 하셨고 그리고 두 아우들과 더불어 학문 토론을 자주 하셨다 고 한다.
∙삼휴고택인 현재의 이 건물를 조선조 광해군 6년(1655년)에 세우셨다.
∙배위는 의인(宜人) 능주구씨이다.
∙묘소는 하천묘역에 있으며 묘사는 4월 셋째 일요일이다.
20세 석승(碩升) <구은공(龜隱公)> 장남중주(출계), 2남중태, 3남중교, 4남중강, 5남중여
∙현종(顯宗)을사1665년 3월 9일-무오1738년 7월 20일 (향년74세). 통덕랑(通德郞).
∙배위는 공인(恭人) 경주최씨(慶州崔氏) 부(父) 현령 국성(國成)의 따님.
∙묘소는 하천묘역에 있고, 묘사 일은 수위(首位)와 같다.
∙세 번의 화재(아래귀미,인구,중귀미)로 인하여 구은공에 대한 참고문헌 (參考文獻)이 불타 없어졌다.
∙시(詩) 세 편과 글 두 편, 그리고 상중(喪中)의 만장(輓章) 등 약간 의 글을 찾았다.
∙천성(天性)을 타고남이 풍체(風采)와 거동(擧動)이 맑고 깨끗하며 품위(品位)가 고상(高尙)하며 활달(豁達)하셨다.
∙공의 계부(季父) 무재공(無齋公)에게 수업(受業)을 받으셨고 고을 선비의 지위(地位)에 오르게 되셨으며, 학문(學問)에 젖고 효행(孝行)과 우애(友愛)로 이컬음을 받게 되셨고, 문사(文詞-문장가로 불리움)로 드러나 게 되셨다.
∙학문을 좋아하시어 집안의 재종형(再從兄) 함계공(涵溪公)과 횡계 (橫溪) 의 훈수(塤叟), 지수공(篪叟公) 형제분과 향내(鄕內)와 도내(道內) 에서는 병 와 (甁窩)이형상(李衡祥), 병애(屛厓)조선장(曺善長), 적암(適菴)김중태(金重台), 해은(海隱)박기봉(朴기鳳) 등과 학문(學文)과 도의 (道義)로 교분 (交分)을 맺으셨다.
∙어느 해 칠월 기망(旣望-16일)에 학문을 좋아하여 형 삼 형제와 병와 (甁窩)이형상(李衡祥)를 청하여 이수(二水)의 아래에서 배 띄워 놀으셨다.
∙백형 휘 석현(碩玄), 숙형 휘 석겸(碩謙)을 모시고 아우 휘 석임 (碩臨) 는 앞에서 이끌어 함께 운주산(雲住山)에 오르니 삼 형제의 우애가 참으로 장관(壯觀)이였다고 한다.
∙소문(所聞)에 의하면 오회당(五懷堂) 아래 관상수(觀賞樹)가 줄지어 서 있다가 통덕랑(通德郞)이 작고하자 시들었고, 생원공(生員公)이 작고하자 모두 말라죽었다고 한다.
∙아들 다섯과 딸 네 분이시니 중주(重周)는 백부 휘 석현(碩玄)에게 양자(養子)가시고, 차남에 중태(重泰), 삼남에 중교(重喬), 사남에 중강 (重岡), 오남에 중여(重呂)이다. 사위는 박태후(朴泰厚), 손효순(孫孝舜), 김경석(金慶錫), 권만정(權萬銓)이다. (참고자료) 통덕랑묘갈명(墓碣銘)
오회당(五懷堂)창수록(唱酬錄) 서(序)
당호를 오회당이라 命名함은 宜兄宜第之義를 숭상함이며 五兄弟분의 우애지도를 돈독히 함이라 오직 兄弟間 父母님이 안 계시는 孤露餘生 이 年算也 或七十에 이르고 或五十이 넘어서 다행히 無故하게 俱全함 을 世之人이 咸稱福慶之家라 칭하며 古今人世之間에 或不免 종선고경 지탄(終鮮孤煢之歎)하고 역불무순씨(亦不無荀氏) 매씨지행수언이(買氏 之幸數焉而) 능히 수(壽)를 보존하였으며 또 능히 그 수(壽)를 얻었으 니 君家의 福善만한 이가 누가 있겠는가. 칭함으로 나 역시 固辭치 못 하고 마음에 항상 두렵던차 舍伯께서 朝霧暮煙을 달래기 위하여 건사 영성일당(建四楹成一堂)하니 그 規模가 아담하여 형제분이 매일 한자 리에 모여 혹상영지(或觴咏之) 혹기박지(或碁博之) 오직 相和相唱一日 無於樂好事而時或相違則 문득 회지경경언(懷之耿耿焉) 잉차득당호야 (仍此得堂號也) 내차망졸구 (乃此忘拙搆) 四聲하야 求和諸君子하니 즉 청사국추지한야(靑蛇菊秋之瀚也) 계제(季弟) 석림(碩臨)
-中略-
又 第四弟 碩升
團聚荊庭共討懷餘生何幸保哀骸連襟一榻情相篤對月三更興自佳宜弟宜兄 湛樂穩開樽開榼醉醒偕人間至樂長如許我願兒孫愼勿乖
같은 마음 같은 뜻에 荊庭에 모여 사니,
우리의 늙은 餘生 多幸한 일 아닐 소냐.
한자리에 둘러앉아 情도 서로 두터 웁고,
三更에 달떠오니 興도 또한 아름답다.
兄과 아우 흐뭇한 뜻 安穩하기 다름없고,
술과 안주 열어두고 醉醒도 같이하네.
人間의 기쁜 일이 언제나 이럴세라.
願컨데 子孫代代 어기지 말지어다.
21세 중교(重喬) <모재공(慕齋公)> 장남 일필
∙숙종(肅宗)기묘1699년 2월 26일- 1756년 2월 1일.
∙배위는 밀양손씨 이시다.
∙을묘1749년 1월 3일 백암공 분황제(焚黃祭)에 참사(參祀)하시었다.
∙기사1749년 10월 과 계유1753년 11월에 남성재(南城齋) 이건(移建) 관계의 진정서(陳情書)에 연기명(連記名) 하셨다.
∙백형 구계공(龜溪公)과 같이 훈수(塤叟), 지수(篪叟) 양선생의 교육 을 받으셨고, 훈수선생께서 제자(諸子) 좌우(左右)에서 오직 새소응대 (灑掃應對)의 가르침을 삼가 보는 자는 바로 이 사람이라 하셨다.
* 오회당창수록(五懷堂唱酬錄)에 차운(次韻)을 지으셨다.
우(又) 종자(從子) 중교(重喬)
新搆茅簷揭五懷陶陶幽致外形骸姜公被裏深情洽范子堂中至樂佳對月三更 談笑穩開樽一榻醉醒偕箕구遺業傳來久不肖長期竟勿乖
아담한 새 정자(亭子)에 오회당액(五懷堂額)을 걸었으니,
모년(暮年) 형제(兄弟) 여년(餘年)을 즐기심이 넉넉하도다.
안봉(案峰)의 뛰어난 경색(景色)은 아직도 씩씩하며,
오호(五皓)의 한가로운 시정(詩情)도 다 함께 가상(佳賞)함이다.
형제분(兄弟分)이 함께 즐기실 곳을 이미 얻었으나,
그 일사(日事)는 세상을 더불어 속류(俗流)와 함께 하심이라.
삼휴고택(三休古宅)에 참신한 여복(餘馥)이 머물러 넉넉한 바이며,
대(代)를 이어온 그 유범(遺範)을 어긋치지 말지어다.
山水亭 次韻
산수정 차운
族弟 鄭重喬
족제 정중교
山水中間結素盟 산수 속에 맺은 평소의 맹세로
산수중간결소맹
晩來新構屋三楹 만년에 세 칸 정자 새로 지었네
만래신구옥삼영
簷前秀岳層層色 처마 앞 수려한 산봉우리 층층이 빛나고
첨전수악층층색
軒外淸流曲曲聲 헌함 밖 맑은 시내 굽이굽이 소리내네
헌외청류곡곡성
雲接阿尼傳毅象 구름은 이산에 닿아 의연한 기상 전하고
운접아니전의상
波連玉磵溯幽情 냇물은 옥간정과 이어져 그윽한 정 떠올리네
파연옥간소유정
閑居興味人誰識한가로이 사는 흥취를 누가 알까
한거흥미인수식
長臥書窓度一生 서창 아래 길게 누워 일생을 보냈네.
장와서창도일생
∙중귀미에 부자(모재공,자언공)분을 추모하는 추모당(追慕堂)과 성산재(聖山齋)가 있다.
∙묘소는 성자산 29 번지에 합폄 하시다.
22세 일필(一鉍) <자언공(紫彦公)> 장남하문, 차남하신, 3남하주, 4남하로
∙영조정미 1727년 3월 13일- 병인1806년 10월 27일
∙배위는 영천최씨 계배위는 경주김씨 이시다.
∙묘소는 성지골 수위 산소 아래에 있다.
(남성재(南城齋)에 관계하신 일)
∙기축(1764)년- 현령(縣令)에게 간청하여 수리안전답(水利安全畓) 5 두락(斗落)을 추가로 납입하고 영원불환(永遠不換)의 계약을 맺으셨다.
∙을사(1785)년- 재사(齋舍)에 남은 재물을 늘이셨다.
∙갑진(1784)년-1785년에 걸쳐 허물어진 남성재(南城齋)를 19간으로 확장하는 데 큰공을 세우셨다. 또한 비각을 세우셨다.
∙1761년- 1787년 사이 13회나 묘사에 참사하셨고,
∙1778년부터는 10년간 개근(皆勤)을 하셨음이 기록되어 있다.
∙묘단재중건기(墓壇齋重建記)- 11세손 일찬(一鑽) 근기(謹記) ‘하찮은 선비로서 백 여리 밖에서 분주히 내왕하면서 수십 년 간의 노고를 쌓아서 마침내 그 역사(役事)를 완성하여 나무꾼이나 목동들로 하여금 침범을 못 하게 하여 제사에 필요한 것을 갈무리 할 수 있게 하였으니 지극한 정성이 아니면 가능하겠는가! 이를 글로 써서 재실 벽 에 걸어놓고 각 종인(宗人) 에게 보여 생각하게 할 진저! 힘쓰게 할 진 저!’
(문중의 중요 송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셨다)
∙을미(1775)년 5월- 영천군지의 정찬판공 주각상(註脚上) 본역의장 (本域義將) 4자를 삽입한 사실을 고소하는 글에 연기명(連記名) 하셨다
∙신축(1781)년 5월 10일- 권(權), 손(孫), 정(鄭)이 세덕사(世德詞) 무고(誣告) 사실을 변명하는 글에 연기명 하셨다.
∙임인(1782)년 5월- 세덕사 피무(被誣) 사실을 변명하는 글에 연기명 하셨다.
∙을사(1785)년, 병오(1786)년 10월- 원당의 외선조 묘소 인유장(人兪葬) 사건 소송에 연기명 하시었다.
∙갑인(1794)년, 정사(1797)년- 2회에 걸쳐 영일읍을 다시 시조 묘하 (墓下)로 옮기지 말라는 진정서에 연기명 하시었다.
23세 하주(夏澍)<농와공(農窩公)> 장남성휴, 차남진휴, 3남체휴, 4남정휴
∙영조병술(1766)년 1월 21일- 계묘(1843)년 8월 8일
∙배위는 창녕성씨
∙넉넉지 않은 살림을 타고나셨지만 손수 노력하여, 당대(當代)에 수 백 석(石) 지기의 부농(富農)으로 자수성가(自手成家) 하셨다.
∙성품이 효성과 우애가 남다르셨다.
∙병인년(1806)에 부공(父公)께서 갑자기 돌아가시자 백형(伯兄)이 없는 집안의 초상(初喪) 장사(葬事)를 스스로의 힘으로 예절에 따라 잘 치루었다.
∙항상 말씀하시기를 “조상님은 비롯 멀드래도 제사를 정성껏 모시고, 자손은 비롯 어리석으나 경서(經書)를 닦아야한다.”고 하셨다.
∙제전(祭田)과 의물(儀物)을 구해서 가정에 필수적으로 갖추어 두셨 다
∙순조 2년(1802년)에 조선시대의 특색 있는 디귿(ㄷ)자 기와집을 지어 사시었고, 4형제의 살림집을 똑같이 네 간 맛배의 기와집으로 지어드렸다. 현재 용산동 소재 인구서당(仁邱書堂)이 그 건물이다.
∙농아고택(農窩古宅)은 주손(冑孫)들이 넉넉지 못해 남에게 팔리어 경북도 유형문화재 74호로 지정되어 사의당(四宜堂)의 현판을 달고 하 천재(夏泉齋) 옆에 이건 되어 있다.
∙계미1823년 5월- 녹전의 정몽규(鄭夢奎)가 최참판 임진 일기를 임의로 변조한 사실을 고소한 고소장에 연기명(連記名)을 하시었다.
∙계유1813년 2월- 하천재 수호 완문(完文)을 해달라고 군수에게 올 린 진정서에 연기명 하셨다.
∙택호 구기이
∙묘소- 용산리 마당지산659번지 쌍분. 수몰로 이장함.
24세 성휴(性休) <인촌공(仁村公)> 장남 유명, 차남 유조, 3남 유휘, 4남 유성, 5남 유극
∙정조신해(1791)년 4월 2일- 정묘1867년 8월 2일(향년77세)
∙배위- 영해신씨, 계비위- 구산박씨, 계비위- 이씨
∙수차 과장에 오르셨으나 낙방하여 입신할 운이 없으셨다고 한다.
∙택호- 소대 (현 청송군 안덕면)
∙묘소- 충효리 큰일견 산 번지, 배위신씨 묘- 마당지 산 번지, 계비박씨 계비이씨묘- 큰일견산 번지
25세 유명(裕明) 장남 치선, 차남 치기
∙순조병인(1806)년 10월 27일-1854년 2월 25일 (향년49세)
∙배위- 함안조씨, 계배위-함양박씨
∙외가에서 생후 1개월 6일 만에 모친(신씨)이 사망하여 상려(喪轝) 뒤에 유모와 같이 친가인 인구(仁邱)로 돌아오셨다.
∙운구과정은 청송 땅에서는 친정 쪽, 영천 땅(노귀재)에서는 시가 쪽에서 맡았다고 한다.
∙묘소- 용산리 마당지산 번지, 모(母)이신 영해신씨(소대) 산소 아래 3쌍분.
∙택호- 가무이 (현 청송군 안덕면 가암리)
26세 치선(致璇) 장남 진구, 차남 진우, 3남 진도(출계)
∙병술(1826)년 5월 14일- 무진(1868)년 2월 2일 (향년43세)
∙배위- 여강이씨, 계배위- 의성김씨
∙택호- 오금이 (현 경주시 강동면)
∙묘소- 용산리 마당지산 번지, 부공(유명)묘위 옆에 3쌍분
27세 진우(鎭禹) <경암공(耕庵公)> 장남 연석
∙계축(1853)년 6월 14일- 무신(1908)년 12월 4일 (향년56세)
∙배위- 청안이씨- 임자(1852)년 11월 21일 -임술(1922)년 11월 27일 (향년71세)
∙기해(1899)년 4월 8일 구계(舊稧) 창설에 참여하셨다.(선무랑, 노촌공, 강의공을 위함)과 사성공(司成公)에 대한 문배전(門排錢) 거출에 적극 참여하셨다.
∙묘소- 삼귀리 성자산 29 번지, 모재공 산소 입구 , 배위는 부공(夫公)묘위 아래
∙택호-산드뱅이 또는 대촌(坮村) (현 경주시 안강읍 산대리)
28세 연석(淵錫) <용헌공(龍軒公)> 장남 훈식, 차남 준식, 3남 찬식
∙을해(1875)년 4월 18일- 을미(1919)년 1월 10일 (향년45세)
∙배위- 하양허씨, 부(父)는 선공가감역(繕工假監役)-토목(土木)과 영선(營繕)에 관한 행정을 맡아 보는 관직(종9품) 윤(潤)이시고, 조(祖) 속(), 증조 설(說)시다.
∙임신(1872)년 8월 11일- 신묘(1951)년 12월29일 (향년80세)
∙무던하고 심성(心性)이 좋으셨으며, 체구(體軀)가 크고 힘이 좋아 장사소리를 들으셨다.
∙묘소- 충효리 군평 분지밭골 산 번지, 배위- 작은일견 광등 산 번지
∙택호- 하양 (현 경산시 와촌면)
29세 훈식(勳植)<송당공(松堂公)> 장녀병증, 장남병호, 차남병목,3남병욱,
4남병극, 차녀병숙, 5남병묵
∙경자(1900)년 11월 7일- 기해(1959)년 3월 29일 (향년60세)
∙배위-남양홍씨-경자(1900)년 7월25일-무술(1958)년5월16일(향년59세)
∙1919년에 20세 때 부공(父公)께서 45세로 돌아가시자(백당공 13세. 죽당공 10세)로 집안의 기둥이 되셨다.
∙1938년경 구주택(舊住宅) 이 오래된 고가(古家)로 노후(老朽)하였으므로 신 주택(新住宅)을 건립하여 이사(移徙)를 하셨다.
∙‘용산리 965-1번지에 3동 10간이고, ㄷ자형의 와가(瓦家) 재목(材木)이나 장차 기와를 이을 계획으로 하고 초가(草家)를 지으셨다. 안 팍 마당 두 개소에 우물 1개소를 팠다.’
* 1936년 2월 5일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자양공립보통하교 학무위원으로 경상북도로부터 위촉(委囑)되셨다.
∙1946년 해방 후(解放 後) 면(面) 단위(單位) 장(長)으로 주민들의 추대(推戴)를 받으신 일이 있다.
∙장자(長子) 병호(炳浩)의 운수업(運輸業) 및 정부미곡도정공장(政府米穀搗精工場)과 주유소(注油所)운영 자금(資金)으로 논밭을 모두 팔아 자금(資金)을 대어 주셨다.
∙묘소- 삼귀리 대양골 산 91-5번지 쌍분.
∙배위 묘소는 미끼 조부산소 밑에서 부위(夫位) 묘소 옆으로 이장하였다.
∙삼 형제분의 묘소가 위아래 차례대로 위치하다.
∙택호- 문성 또는 문호 (현 포항시 기계면 문성리)
29세준식(準植)<백당공(栢堂公)>장남병집,차남병업,3남병섭,4남병협(출계), 장녀병옥
∙정미(1907)년 1월 4일-임자1972년 11월 24일 (향년66세)
∙배위-월성손씨-무신(1908)년 12월 12일- (정해)1947년 12월22일 (향년40세)
∙일제강점기인 20대에 일본으로 건너가 가토구미(加藤組)토건회사를 창건하여 성공하셨다
∙해방 후 귀국하여 국가질서가 바르지 않아 환전(換錢)에 실패하여 큰 손해를 보셨다. 그 후 면내의 소규모의 토건청부업을 하셨다.
∙해방의 혼란기의 귀국동포 등으로 일터가 없어 실업자가 많았기 때문에 항상 “실업자 구제방침(失業者 救濟方針)”을 주창하셨다.
∙큰집 앞에다 삼간 겹집을 지어 사르셨다.
∙대한청년단 자양면 단장으로 좌우 대립의 시대 상황에서 면민의 생명을 보호하는데 큰 공을 새우시어 많은 주민들의 생명의 은인이 되셨다.
∙묘소- 삼귀리 대양골 산 91-5 * 배위- 용산리 광연산 심구 번지
∙택호- 미재 (현 포항시 죽장면 매현리)
29세 찬식(璨植) <죽당공(竹堂公)> 장남 병철, 차남 병걸, 장녀 병주, 2녀 순희
∙경술(1910)년 1월 18일- 을묘(1975)년 2월 28일 (향년66세)
∙배위-안동권씨-무신(1908)년5월 20일-임신(1993)년3월18일(향년86세)
∙1922.4.8-자양학습강습회(영흥학원) 수학하셨다.
∙농업 및 상업을 겸업하셨다.
∙해방 후 무일푼으로 포항에 이거한 다음 각종 상업으로 자금을 비축하신 후 오징어 보채낚시* 제조사(製造社)를 설립. 운영하셨다.
∙6.25동란 때 낚시 공장은 화재로 전소하여 다시 귀향하시여 신용산에 소재하는 자양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농업 및 상업에 종사하셨다.
∙1965년 이후 자양초등학교 기성회 회장을 장기간 역임하시면서 후학들 지원에 많은 역할을 하셨다.
∙1969년 자양 별정우체국을 설립하여 우체국장에 취임하여 운영을 하시면서 지역사회 발전에 공헌하였다.
∙인구마을 끝자락에 4간 5곡의 기와집을 지어 사르셨다.
∙삼 형제(송당공, 백당공, 죽당공)분을 위한 후손들의 계모임을 백당공과 협의하여 창계(創稧)하는 주된 역할을 하셨고 계안을 지으셨다.
∙묘소- 삼귀리 대양골 산 91-5 번지 쌍분
∙택호- 다리골(경주시 강동면 국당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