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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세 |
주요인물 |
인원 |
분파조 |
5 |
김구정 |
1 |
입향조 |
6 |
김자첨 |
1 |
태동기 |
7 |
김효온 김효항 |
2 |
8 |
김극해 |
1 | |
9 |
김광수 김광복 |
2 | |
10 |
김당 |
1 | |
11 |
김세우 |
1 | |
도약기 |
12 |
김사원 김사형 김사정 |
3 |
13 |
김준 김회 김형 |
3 | |
14 |
김상원 김상기 김상유 김상각 김상빈 김상린 |
6 | |
15 |
김은좌 김석좌 김경좌 김양좌 김성좌 |
5 | |
16 |
김이달 김이중 김이규 김이구 |
4 | |
전성기 |
17 |
김도응 김성 김오응 김추응 김남응 김재응 김성응 |
7 |
18 |
김종덕 김종필 김종경 김종구 김종신 김종헌 김종택 김종국 김종발 김종섭 김종식 김종준 김종록 |
13 | |
19 |
김형진 김당진 김慶진 김청진 김천진 김해진 김經진 김景진 김성진 |
9 | |
20 |
김양직 김양관 김양휴 김양경 김양정 김양식 김양징 김양익 김양인 김양법 |
10 | |
21 |
김재선 김희유 김석유 김기선 김노선 김경선 김택유 김지유 김하유 |
9 | |
정체기 및 재건기 |
22 |
김수익 김수운 김수황 김수학 김수기 김수담 김수욱 김수협 김수정 김수태 |
10 |
23 |
김상종 김희종 김휘종 김시호 김상호 김봉종 김진종 김주종 김현종 김면호 |
10 | |
24 |
김호유 김호직 김호창 김호두 김위윤 김호산 김제 |
7 | |
25 |
김기수 김승회 김일수 김용회 김원영 김사수 |
6 | |
총계 |
109 |
충렬공 9세 송은 광수는 증손대에 가서 사원(만취당), 사형(독수헌파 파조) ,사정(후송재) 3형제로 사촌마을의 전성기 초석을 마련한다. 사형은 청송으로 이거해서 독수헌파로, 만취당과 후송재는 사촌 문중 마을을 형성하여 오늘날 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1) 사촌 문중 태동기(충렬공 6세- 충렬공 11세, 15세기 - 16세기, 태조 - 중종)
사촌 안동김씨는 입향 초기 자손이 귀하여 6대(약 150년)를 내려오면서 한 집으로 이어졌으나 입향조의 아들(효온)과 손자(극해)는 대를 이어 문과에 급제하였고 증손(광수)은 진사가 되어 학문을 이루고 청백한 가문으로 자리 잡았다.
현손(당)은 기저전 참봉을, 6세손(세우)은 통례원 인의를 역임하였으며 3형제를 두어 문중의 기틀을 만들고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5명이 대.소과에 급제하였고(문과2, 생원2, 진사1)목민관을 배출하였으며, 두 분이 문집을 남겼다. 외롭게 내려오면서도 사촌마을의 중심에 섰다.
이 시기의 인물로는 입향조 자첨, 김효온 김효항 김극해 김광수 김광복 김당 김세우등이 있다.
2) 사촌 문중 도약기(충렬공 12세 - 충렬공 16세, 16세기-18세기, 중종-숙종)
사촌 안동김씨는 세우(충렬공 11세손)의 아들 3형제가 선조시대에 활동하면서 유학에 힘써 가학을 이어나가고, 종택과 만취당을 창건하는 등 후손들에게 삶의 기반을 다져놓았다. 이들은 사촌마을을 주도하고 임진왜란 때는 함께 창의하여 나라를 지켰다.
이 기간은 13세 3형제분, 14세 8종반이 되고, 15세에 이르러서야 16세대가 되어 문중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으며 16세는 40명에 이른다. 8명이 대.소과에 급제하였고 (문과3, 무과1, 생원3, 진사1)외교관을 배출하였으며 12명이 문집(유고)를 남겼다. 한편 무신의병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충과 의를 존중하는 마을을 이루었다.
이 시기의 인물로는 김사원 김사형 김사정 김준 김회 김형 김상원 김상기 김상유 김상각 김상빈 김상린 김은좌 김석좌 김경좌 김양좌 김성좌 김이달 김이중 김이규 김이구등이 있다.
3) 사촌 문중 전성기(충렬공 17세 - 충렬공 21세, 18세기- 19세기 숙종-고종)
사촌 안동김씨는 숙종 시대(1674-1720) 영ㆍ정조 시대(1725-1795)에 이르러 17세 65명, 18세 98명이 되어 약 100여 세대에 이르고, 19세는 140명, 20세는 190명, 21세는 220명에 이른다. 이 시대는 사촌마을 유학의 전성기로 천사 김종덕(충렬공 18세손)이 대산 이상정을 이어 퇴계의 학맥을 잇게 되고, 대ㆍ소과 급제자 30명을 배출하였으며(문과 7, 생원 18, 진사 4, 도산별과 1) 문집이나 유고를 남긴 분이 58명에 이른다. 한편 무신의병을 주도하여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자 하였으며, ‘의’를 지키고 주장을 내세우고자 상소에도 수 명이 참여하였다.
이 시기의 인물로는 김도응 김성 김오응 김추응 김남응 김재응 김성응 김종덕 김종필 김종경 김종구 김종신 김종헌 김종택 김종국 김종바 김종섭 김종식 김종준 김종록 김형진 김당진 김慶진 김청진 김천진 김해진 김經진 김景진 김성진 김양직 김양관 김양휴 김양경 김양정 김양식 김양징 김양익 김양인 김양범 김재선 김희유 김석유 김기선 김노선 김경선 김택유 김자유 김하유 등이 있다.
4) 사촌 문중 정체기 및 재건기 (충렬공 22세- 충렬공 25세, 19세기-20세기, 고종-일본강점 및 대한민국)
사촌 안동김씨는 조선 말기〔고종〕에 이르러 22세 230여 명, 23세가 약 260명에 이르렀다. 이 시기는 500여 년을 가꾸어온 기와집들이 마을을 덮어 ‘영남의 와해’라과 불리었으나 1896년 병신의병을 주도하여 온 마을과 서적들은 잿더미가 되고 삶의 기반이 무너져 버렸다. 조선의 몰락은 바로 사촌 마을로 이어졌다.
이 시기는 영남만인소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애국 계몽기 국채보상운동에도 75세대가 참여했으며 사마시 합격자 3명(생원 1, 진사 2)을 배출하였고 22명이 문집을 남겼다.
사촌마을은 병신의병 백년을 지난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정체기를 벗고 위선(爲先)사업과 마을의 발전에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 시기의 인물로는 김수익 김수운 김수황 김수학 김수기 김수담 김수욱 김수협 김수정 김수태 김상종 김회종 김휘종 김시호 김상호 김봉종 김진종 김주종 김현종 김면호 김호유 김호직 김호창 김호두 김위윤 김호산 김제 김기수 김승희 김일수 김용희 김원영 김사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