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詩
1) 題白(自)棗堂鄭公玉良旌閭(제자조당정공옥량정려)/ 흰 대추나무 집 정옥량공의 정려에 題하다.
번역/나천수
氷鯉冬筍世爭慕。(빙리동순세쟁모)/세상은 氷鯉冬筍의 효성을 다투어 사모하는데
若比先生摠下風。(약비선생총하풍)/만약에 선생을 견준다면 모두가 별것 아니라 하네.
棗實當年天實降。(조실당년천실강)/올해의 대추 열매도 하늘이 내린 열매이니
名聲千古振吾東。(명성천고진오동)/오랜 세월 동안 명성이 우리나라를 흔들겠구나.
<해설>
○鄭玉良이 누구인가.
정옥량(鄭玉良) 1395(태조 4)∼1447(세종 29)대 인물로 본관은 삼가(三嘉/草溪), 자는 곤보(崑甫), 호는 경재(耕齋)이다.
아버지는 증승정원도승지 사중(師仲)이며, 어머니는 임급(任伋)의 딸이다. 길재(吉再)와 권우(權遇)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박팽년(朴彭年)·유성원(柳誠源)·정창(鄭昌)·이석형(李石亨)·정준(鄭悛) 등과 교우가 두터웠다.
세종 때에 효행으로 천거되어 봉직랑행하양현감(奉直郎行河陽縣監)에 임용되었으나 곧 향리에 은거하였다.
성품이 지효(至孝)하여 편모를 극진히 봉양하였고, 사후에는 장례와 시묘는 물론 종신토록 상식(上食)을 올렸다.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자 어머니가 일찍이 대추를 좋아했으므로, 제사와 치전(致奠)에 대추를 올리지 않은 적이 없고, 매양 뜰 앞의 대추나무를 부여잡고 통곡을 하니, 대추나무가 열매를 맺음이 전보다 훨씬 많아졌는데, 그 열매가 모두 흰색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효자(孝子) 백조당(白棗堂)’이라고 일컬었다.
뒤에 효행의 표본으로 《삼강행실》과 《동국여지승람》에 등재되었다.
1516년(중종 11) 정려가 세워지고, 1689년(숙종 15)에는 사림들이 평천(平川)에 사(祠)를 세우고 제향 하였으며, 1701년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경재문집》이 있다.
이 글은 언제 지었을까.
김천일은 1537-1593년대 인물이다.
그러므로 1516년 정려를 세울 때 지은 것이 아니라 세워진 후에 지은 것이다.
그런데 三賢實紀 제5권에 鄭玉良선생의 효성을 찬한 白棗堂傳과 白棗論 등 후인의 글과 白棗圖의 목판화가 실려 있다 한 글로 보아 自棗堂이 아니라 白棗堂인 것이다.
白棗堂은 흰 대추집이란 뜻이다. 필자가 수정하여 해석코자 한다.
白棗堂은 號나 字가 아니므로 풀이하여 흰 대추나무 집으로 해석해야 맞다.
旌閭가 三岐(三嘉縣) 平川에 건립되었다. 오늘날 경남 합천군 삼가면 일대이다.
○氷鯉(빙리)는 진(晉)나라 때 벼슬이 태보(太保)에 이른 효자(孝子) 왕상(王祥)이 어려서부터 효성이 매우 지극했는데, 어느 추운 겨울날 그의 계모(繼母)가 생선을 먹고 싶어 하므로, 왕상이 강에 나가 얼음을 깨려고 하자 갑자기 얼음이 저절로 깨지면서 잉어 두 마리가 뛰어나왔던 고사에서 온 말
○冬筍(동순)은 삼국 시대 오(吳)나라에서 벼슬이 사공(司空)에 이른 효자 맹종(孟宗)이 어렸을 적에 어느 추운 겨울날 대숲에 들어가서 그의 어머니가 즐기는 죽순(竹筍)이 없음을 슬피 탄식하자 갑자기 눈 속에서 죽순이 나타났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下風은 사람이나 사물의 질이 낮게 보는 것
즉 氷鯉冬筍이 정옥량의 대추나무 효행보다 낮다는 표현이다.
○그런데 三賢實紀에서 원문 시를 보면 名一作風聲千古振吾東에서
一作風이란 글이 삽입되어 있다.
삽입된 글을 원래 넣어야 하는데 7언절구 시의 7언을 맞추기 위해 차마 생략치 못하고 작은 글씨로 써 놓은 것 같다.
이를 붙여서 해석해 보면 “한번 지은 이름으로 들리는 명성이 오랫동안 우리나라를 흔들겠구나.” 이다.
○규장각 원문 글은 “名聲千古振吾東。(명성천고진오동)/오랜 세월 동안 명성이 우리나라를 흔들겠구나.”로 되어 있는데
三賢實紀에는 “名聲千古滿吾東。(명성천고만오동)/오랜 세월 동안 명성이 우리나라에 가득하겠구나.”로 되어 있다.